소설리스트

10. 냉정과 이성 속에서 (10/14)

10. 냉정과 이성 속에서

폴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로봇 강아지를 슥슥 쓰다듬고 있었다. 흠집이 나지 않는 기계 피부는 매끈했다. 단단한 삼각형의 귀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강아지의 입에서는 입력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앙미앙.

앞에 서 있는 비서는 인간이지만 기계적으로 보고 내용을 읊었다. 가만히 듣던 폴이 중간에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말을 끊었다.

“자기야. 제2 개발부가 어떻게 됐는지부터 말해 봐. 마일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마일.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실적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던 제2 개발부장이다. 그가 자리를 지키려면 매일같이 용을 써서 실적을 채워야만 했다. 63구역의 주방장까지 동원하여서라도.

“확실히 이상합니다. 실험체 다섯 개는 무조건 수급해 올 수 있다고 하더니. 이번 기한 내에는 힘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뭔가 일이 꼬였는데 우리한테 숨긴 거 아냐?”

마일이 집에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시장실에서는 그의 불안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장을 갈아치워야겠네.”

“인사 목록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 행적에 대해서 하나도 다 빠짐없이 훑어봐.”

“예.”

캐슬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어디에든 시티 홀의 눈이 달렸지만, 그 수천수만 개의 눈을 언제나 부릅뜨고 있을 순 없다. 가끔가다 빈틈이 생기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이런 일이 줄어들 텐데. 폴은 합리성에 의해 통제되는 세상을 원했다. 개개인의 자아가 뚜렷해질수록 미래 예측은 힘들어지기 마련. 그러다 구세계가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폴은 화려한 네일 아트를 피해, 그 옆의 살을 잘근 깨물었다. 네일 장식이 입술을 꾹 짓눌렀다. 불안했다. 제2 개발부의 실적이 예상보다 매끄럽지 않은 게 문제였다.

하지만 제1 개발부에는 뚜렷한 단점이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유전자를 배합하고 인공 자궁을 통해 실험체를 탄생시키고 교육시키고……. 하나의 온전한 에스퍼를 얻기 위해서 너무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성장 촉진제를 여러 번 투여하면, 5년 내로 에스퍼를 키워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획 단계에서 예상 못 한 부작용이 발발했다. 촉진제를 세 번 이상 투여하자, 예외 없이 다들 신체가 망가져 버렸다.

실험체 수급이 부족했다. 실험체 중에 쓸 만한 에스퍼로 자라난 비율은 30% 정도. 하나의 군대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죽기 전에 과업을 완성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오프 리쉬 프로젝트’를 하루라도 빨리 실행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고민한 끝에, 최근 들어 다른 돌파구를 찾아냈다. 대기병 환자들의 유전자가 에스퍼 형질 전환에 그나마 잘 반응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폴은 재빠르게 방향을 틀어 제2 개발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부었다. 이미 존재하는 인간을 잡아 와 발현시키면, 양육하는 비용과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그놈의 예측 불가성이 문제였다. 만들어 낸 인간은 통제도 세뇌도 더 쉬웠는데. 이미 자아가 형성된 인간을 교육하자니, 여러 말썽이 발생했다. 실험체 수급 과정에서부터 트러블이 생기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인간은 이래서 문제야.”

폴은 중얼거리며 로봇 강아지 래빗을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인간의 명백한 한계다. 기계처럼 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저 또한 그랬다. 폴은 재작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갑자기 책상에 제 이마를 내리찧었다.

쿵! 쿵!

“시, 시장님!”

“내버려 둬. 나도 반성할 필요가 있으니까.”

당황한 비서가 달려와 막으려 했지만, 폴이 손을 내저었다. 미앙미앙. 강아지가 울었다.

폴은 골이 울리고 이마 부근이 뜨거워졌으나, 통증을 참고서 총 여섯 번 머리를 박았다. 폴이 다시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마 부근에 핏줄이 터져 있었다. 기형적으로 개조된 얼굴에는 경련이 일었다.

폴은 자기 신념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여러 신약이 나오면, 개중 몇 개는 직접 제 몸으로 테스트해 보기도 했다. 스스로 인간의 결함을 내비쳤을 때는, 꼭 자기반성의 시간을 거쳤다.

“내가 그 애를 왜 살려 뒀을까.”

폴이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비서는 누구의 이야기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폴이 오프 리쉬 프로젝트 도중에 제 규칙을 깨뜨린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정상적 발현에 실패한 실험체들은 모두 폐기 처분된다. 그게 원칙이었다. 그런데 살려 두었다. 심지어 폐기될 것을 눈치챘는지 탈출까지 시도했던 놈을.

“가장 우수한 개체이다 보니, 바로 죽이기에는 아까우셨다고…….”

“그래, 그랬지.”

“훌륭한 것은 박제해 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사실 실험체에 미련과 흥미가 남았다면, 그대로 개발부에 놔두고 관찰했을 터였다. 하지만 폴은 실험체를 살려 둔 채 저 멀리 갖다 버렸다. 그 과정에서 기억 제어 칩을 심는 소모적인 비용까지 발생했다.

비서는 폴이 왜 그랬는지 진실된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말을 아꼈다. 곧이곧대로 발설했다가는 폴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지금이라도 걜 죽일까?”

“원하시면 조치하겠습니다.”

폴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말없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비서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버지. 아버지…….>

그 애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라 불쾌해졌다.

<왜 탈출하려 했지? 어떻게 탈출할 마음을 먹은 거야? 어째서? 언제부터?>

그 애는, 애쉬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폴은 분노했다. 오기가 생겼다. 분명히 세뇌는 완벽했는데. 무엇이 변화를 일으킨 걸까.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고, 그대로 폐기 처리하기에는 아쉬웠다. 1단계를 가장 높은 점수로 통과한 개체라, 그간 기대가 크기도 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뿐이다. 희소한 개체였으니까.

<아버지. 제발 살려 주세요.>

애원하는 초록색 눈동자에서 제 어린 시절을 겹쳐 보았다는 것은, 끝끝내 인정하기 싫었다. 그 때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다는 것도.

성장 촉진제를 맞고 자라난 실험체의 이목구비가 묘하게 낯익었다. 어른에게 맞으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자세와 목소리도 소름 끼치게 저와 비슷했다. 자기 연민이 솟구쳤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실험체 중에 제 유전자가 들어간 개체가 있다고 들었다. 최대한 많은 유전자 샘플이 필요했고, 폴은 프로젝트에 늘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니.

하지만 생물학적 자식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찾아보지 않았다. 알기도 싫었다. 아버지란 호칭은 실험체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 아빠…….>

아니어야만 했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 애정에 자신이 무너졌다면 그건 너무 끔찍하니까. 폴은 머리를 흔들고 애쉬의 생각을 떨쳐 냈다.

제2 개발부까지 난항을 겪으니, 비로소 경계심이 바짝 솟구쳤다. 정신 차려야 할 때였다.

“죽여, 걔.”

폴이 비서에게서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

* * *

그 무렵, 탄은 공장에서 사무소로 돌아오고 있었다. 실험의 목적이 얼추 밝혀졌다. 시티 홀은 에스퍼를 만들려고 했던 거다. 애쉬와 나즈도, 그 거대한 실험의 일부였고.

인위적으로 에스퍼를 만드는 이유야 간단히 짐작되었다. 현재 경비대는 시티 홀과 독립된 조직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시티 홀이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었다.

에스퍼들의 강력한 힘 때문에. 하지만 그 힘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유일하게 독립되어 있던 경비대마저 무너지고, 모든 권력이 시티 홀 하나로 합쳐지게 될 것이다. 에스퍼를 온전히 소유하길 원했던 거다.

일생 내내 반복되었던 폭력적 세뇌. 모두 기계적으로 시티 홀에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탄은 얼굴을 찌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공장에 들르느라, 혼자 놔둔 애쉬가 신경 쓰였다. 마지막에는 거의 뛰다시피 다리를 움직여 사무소 앞에 도착했다. 잠깐 잠가 두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흐으…… 으…….”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애쉬는 2층에서 잠들어 있어야 했다.

“애쉬?”

탄은 불안감에 심장이 순간 조여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누군가 들어왔나? 사무소에 누군가 침입했다면, 홀로그램 워치로 알림이 떴을 텐데. 애쉬가 거의 회복되었다지만, 전투가 가능할 정도의 몸 상태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신음은 2층으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탄은 정신없이 발을 내디뎠다. 중간에 사무소 책상 모서리에 몸이 부딪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계단 앞에 도착해 고개를 돌린 순간.

“흐윽…….”

애쉬가 보였다. 커다란 덩치를 동그랗게 말아 계단 중간에 주저앉아 있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은 채였다. 온몸이 경련하듯이 덜덜덜 크게 떨렸다. 그 진동에 머리카락도 같이 팔랑거릴 정도였다.

“너, 너 왜 그래?”

탄이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몸을 웅크린 애쉬 앞에 쪼그려 앉아 어깨를 감싸 쥐었다. 천 너머로도 체온이 심상치 않게 달아올랐음이 느껴졌다. 부름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애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애쉬. 애쉬.”

탄이 억지로 애쉬의 얼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머리통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애쉬가 온몸에 힘이 빠진 채로 축 늘어져 있던 탓이다. 탄이 손목에 힘을 주어 애쉬의 목을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눈을 반만 뜨고서 간신히 탄과 시선을 맞추었다.

“타…… 타안.”

바르르, 바르르. 탄이 단단하게 붙잡고 있음에도, 애쉬의 턱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온몸의 경련은 점점 더 거세지기만 했다. 제 무릎을 붙들고 있는 손가락은 마디마디 부들거렸고 손등의 힘줄이 기괴할 정도로 튀어나와 있었다.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애쉬가 어떤 상태인지, 맞닿은 살갗을 통해 전달되는 이 격동이 무엇인지, 이미 너무 잘 알았다.

에스퍼의 폭주다. 애쉬는 폭주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웬만한 가이딩은 통하지 않는 상황. 이대로 오래 방치되면, 과폭주 상태로 이어진다. 그 후에 에스퍼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애쉬가 괴로운 듯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치로 관절을 뒤튼다. 탄은 애쉬의 얼굴을 감싸 안은 채 다급하지만 또렷한 투로 말했다.

“애쉬, 정신 차려. 나 봐 봐. 응?”

“으…… 우으…….”

탄이 손끝으로 애쉬의 뺨 문지르면서 가이딩을 시도했다. 곧바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폭주에 접어든 에스퍼는 불씨 같다. 살갗이 오그라들 것을 빤히 알면서도 제 발로 불구덩이에 발을 들이는 느낌이다.

애쉬가 느끼는 고통 일부분이 탄에게로 전이되었다. 탄이 입술을 짓씹었다. 마약을 한 것처럼 순간 시야가 휙 돌아가고 속이 메스꺼웠다.

예상보다 가이딩이 더 순탄치 않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고강도의 폭주가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치고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걸까.

탄의 머릿속에 고통스러운 상상이 불쑥 샘솟았다. 내가 만약 공장에서 조금만 더 미적거렸다면. 애쉬도 우고처럼, 손쓸 새도 없이 과폭주에 빠졌을지도……. 탄이 생각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거세게 털어 냈다. 지금은 애쉬를 살리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아도 모자랐다.

잠시간 고통스러운 숨소리만 맴돌았다. 탄도 애쉬와 비슷한 신음을 내뱉었다. 꾸역꾸역 가이딩을 시도해 보았으나, 뚜렷한 차도가 없었다.

S급의 표준 가이딩이 통하지 않는다. 에스퍼가 그보다 더 높은 능력치의 이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규정상 S급보다 더 높은 등급은 없었다. 즉, 애쉬의 힘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측정 불가능, 규격 외의 에스퍼였다.

그렇다면 이런 가이딩으로는 폭주를 멈추지 못할 것이다. 탄은 직감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옥시토신의 양. 최대한 옥시토신을 폭발적으로 분비시켜, 가이딩 물질로 전환해야만 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이딩 긴급 매뉴얼에도 적혀 있는 내용이다.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호감이 있을 시, 단순 접촉 외에 추가적인 스킨십을 시도할 것. 조건에 명확하게 들어맞았고, 처음도 아니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탄은 그대로 턱을 틀어 애쉬에게 입을 맞추었다.

“흐읍…….”

놀란 듯 애쉬가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툭. 그리고 제 무릎에 올려놓았던 두 손을 발 옆에 떨구었다. 순간 사지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탓이다.

탄은 곧장 혀를 움직였다.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고통으로 반쯤 벌어져 있던 입을 혀로 메운다.

“흐, 흑.”

애쉬가 간헐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탄은 애쉬의 신음이 짙어지는 지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입천장을 건들고 잇몸을 쓸었다. 손으로는 척추를 하나하나 짚어 내려갔다.

모든 행위가 유효타였다. 애쉬의 몸에 성감이 차올랐다. 탄이 건드리고 지나간 모든 부위가 욱신거렸고 그 위로 황홀한 스파크가 터졌다. 사랑의 호르몬이 끊임없이 분출되기 시작한다. 가이드는 옥시토신과 저만의 페로몬을 반응시켜 가이딩 물질로 빠르게 변환한다.

입맞춤 하나로 엉망진창 휘저어지던 애쉬의 몸이 단단히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경련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달아오른 살갗은 여전했다. 가슴팍과 팔 곳곳에 발진이 붉은 점처럼 올라와 있었다. 탄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이딩을 더 빠르게 진행하려 애썼다. 그만큼 입맞춤도 깊어졌다.

『아파, 아파, 아파…….』

얼마 후, 애쉬의 텔레파시가 탄에게 흘러들어 왔다. 텔레파시를 쓸 수 있다는 건, 이제 이능력이 조금은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였다. 적어도 완전한 혼란 상태는 아니다. 통증은 여전한 듯했지만, 인형처럼 텅 빈 눈으로 덜덜 사지를 떠는 것보다는 나았다.

젖은 표피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진다. 애쉬는 입을 벌린 채 정신없이 탄의 숨과 타액을 받아 마셨다.

탄은 숨이 부족해서 얼굴에 열이 차오르고 흉부가 뻐근해지고 있었다. 아래 허리가 화끈거렸다. 이걸 가이딩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흩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키스가 너무 길고 짙지 않은가.

그때 애쉬가 웅크리고만 있던 거대한 몸을 조금씩 펼쳤다. 바닥에 힘없이 늘어졌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근육이 빳빳하게 섰고, 상체가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탄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더니,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윽.”

힘을 되찾은 에스퍼의 움직임은 순식간이었다. 애쉬가 탄의 몸을 억지로 들어 올린 다음 밀어붙였다. 타닥, 탁. 탄은 힘에 떠밀렸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등허리와 계단 난간이 맞닿았다. 철제 난간이 아프게 근육을 짓누른다.

어느 정도 신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된 애쉬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탄의 날갯죽지 양쪽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잡았다. 뻣뻣하게 굳은 채 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혀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쉬의 그림자가 탄을 덮었다. 탄의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키스인지 공격인지 모를 움직임을 받아 내면서도, 가이딩만은 끊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윽…….”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당하기만 하는 건 취향이 아닌데. 난간에 짓눌린 허리는 뻐근하고, 입가는 얼얼하다. 지금의 애쉬는 힘 조절이라는 걸 몰랐다.

참다못한 탄이 애쉬의 어깨를 꾹 밀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 숨 막혀 죽을 판이다. 끈질기게 애쉬의 가슴팍이며 등을 주먹으로 쿵쿵 내리쳤다. 꽤 힘을 주었는데도 애쉬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탄의 주먹이 아릿해질 때가 되어서야, 애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잠깐 입을 뗐다. 타액으로 범벅된 입술 사이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간뿐이었다.

“헉, 허억…….”

탄은 가슴팍을 들썩이며 억눌렸던 숨을 몰아쉬었다. 애쉬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몇 초 만에 다시금 턱을 틀어 다가오려 했다. 쪽. 탄이 다급히 고개를 돌렸음에도 아랫입술끼리 부딪쳤다.

“야, 잠깐. 애쉬. 나 좀…… 봐줘라. 지금 죽겠다…….”

애쉬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한 거리에서 물끄러미 탄을 바라보았다. 두 눈가가 붉었다. 탄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후, 내가…… 살아 있어야 가이딩도 제대로 해 주지. 나 이거 허리도 아파 가지고…….”

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휙 뒤집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저항할 틈새도 없었다. 애쉬가 탄의 겨드랑이 사이를 잡아 안아 들더니, 제 어깨에 털썩 얹혀 놓았다.

“어?”

탄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 얘 어깨에 걸쳐 있는 건가? 복근에 애쉬의 어깨뼈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탄의 어이가 소멸하였든 말든, 애쉬는 그대로 타다닥 계단을 올라갔다. 탄의 발목이 공중에서 흔들거렸다.

“야…….”

탄이 완벽히 제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애쉬는 2층에 도착했다. 냉큼 탄의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매트 위에 탄을 풀썩 내려놓았다.

탄은 폭신하게 저를 감싸는 매트의 촉감을 느끼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애쉬는 온 살갗이 시뻘게져서는 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씨근덕대는 꼴이 범상치 않다.

애쉬가 거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허리, 아프면 안 됩니다…….”

“아. 그래서 여기로 옮겨 준 거야?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죄송…… 화났…….”

“아니, 아니. 화 안 났어. 그보다 몸은 좀 어때. 가이딩이 꽤 진행된 것 같기는 한데.”

“네, 네…….”

애쉬가 고개를 어설프게 주억거리더니, 갑자기 다리를 풀썩 꺾었다. 탄과 몸이 떨어진 지 10초도 안 된 때였다. 분명히 폭주가 거의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이딩이 멈추자마자 폭주의 증세가 다시금 올라오고 있었다. 애쉬가 쪼그려 앉은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탄은 다급히 상체를 일으켜서 애쉬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그대로 제품에 애쉬를 다시 안았다.

“아, 미치겠네.”

『아파요…….』

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가이딩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건지. 애쉬가 완벽하게 안정을 되찾고 제정신을 차리지 않는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까처럼 아파?”

애쉬는 얼굴을 탄의 어깨에 기댄 채 비비적거렸다.

“흐, 으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애쉬가 훌쩍였다. 애쉬의 근육이 기묘하게 꿀렁거렸고, 몸은 다시 물 먹은 천처럼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탄은 초조해졌다.

키스로도 안 되면…….

탄이 고개를 틀어 물끄러미 애쉬의 사타구니 부근을 바라보았다. 면바지를 찢고 나올 듯이 중심이 부풀어 있었다.

저거밖에는 남은 게 없는데…….

탄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문제는 제 것이었다. 내가 서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잖아. 탄은 이성에 근거한 고민에 잠겨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

저도 모르게 입에서 당황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임무라고 생각하고 키스에 임했다. 쾌락을 느낄 만한 상황도 상대도 아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탄의 것도 반쯤은 단단해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거지. 탄이 얼떨떨한 눈으로 제 사타구니와 울먹거리는 애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되나?

탄이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아니, 우선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만져 주기만 해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꼭 삽입까지 가야 성적 황홀감에 빠지는 건 아니니까. 타인과 온몸을 부대끼는 것보다야 덜하겠지만.

“……애쉬.”

탄은 짧은 고민 끝에 나지막이 말했다. 애쉬가 푹 젖은 얼굴로 탄을 올려다보았다.

“많이 아프지.”

끄덕…….

“가이딩을 더 세게 해야 할 것 같아.”

끄덕끄덕.

“……무슨 뜻인지 알아?”

애쉬가 축축한 눈을 깜빡거리며 가만히 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음…… 내가 여기, 도와줄까?”

탄은 말을 고르며 애쉬의 중심 쪽으로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성으로는 필요한 행위란 생각이 들면서도, 이상한 죄악감이 차올랐다. 방금 한 말…… 애한테 접근하는 쓰레기 아저씨 같지 않았나?

애쉬가 다 큰 청년처럼 보이더라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마음에 걸렸다. 애쉬는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신체 나이와 정신적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애쉬의 어깨가 점점 더 크게 떨리고 있었다. 하, 탄이 숨을 한번 크게 뱉어 내고 말했다.

“나 좋아한다고 했던 애한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이걸 해야 네 폭주가 더 빠르게 진정될 거야.”

“무슨…… 짓?”

탄이 또 멈칫했다. 이런 말을 애쉬한테 해도 되나? 자꾸만 애를 꼬드기는 나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취미는 없는데. 자괴감에 물든 얼굴로 웅얼거렸다.

“기분 좋은 짓…….”

“기분…… 좋아요?”

성교육을 하나씩 해 줘야 하는 건가. 그럴 시간은 없는데. 탄이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너도, 그, 해 봤을 거 아니야. 자위…….”

탄이 희미하게 말을 끝맺었다. 경비대에서는 스스럼없이 야한 농담이 오갔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죽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

애쉬가 짧게 소리 냈다. 단번에 알아들었다. 학교에서는 죄악이라고 가르쳤던 행위. 그리고 요새는 매일 아침 탄을 생각하면서 했던 짓이었다. 애쉬의 눈이 빠르게 깜빡이고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곧이어 당황에 물든 텔레파시가 탄을 덮쳤다.

『그, 그걸 도와줄 수도 있는 거야? 어떻게? 서, 서로의 성기를 만지는 것은 자위보다 더 더 불경한, 나, 나쁜 행위……. 아니야. 아니야. 탄이 내가 학교에서 배운 건 다 틀렸다고 했어. 그러면 나쁜, 나쁜 게 아닌가?』

애쉬는 텔레파시를 조절하는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탄의 머릿속을 혼란스러운 말들이 헤집어 놓았다. 탄은 최대한 차분하게 답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동의하에 진행된다면 나쁜 게 아니지.”

『그러면, 그, 자연 번식 교미…… 성교도 나쁜 게 아닌……? 아닌가? 나, 남자끼리도? 동성 간의 그것은 제일 큰 죄악이라고…….』

“어어, 뭐. 그것도 그렇지.”

『나쁜 게…… 아닙니다?』

“서로의 의사가 맞는 상황에서 진행이 된다면…….”

『지금은?』

탁. 탄의 시야가 또다시 뒤집혔다. 탄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얘는 계속 예고 한마디 없이…….

애쉬는 무작정 탄을 밀어 넘어뜨려 그 위에 올라탔다. 친절한 예고 한마디 내뱉을 여유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기는 했다. 이번에는 텔레파시가 아니라, 낮게 잠긴 육성으로 웅얼거렸다.

“탄. 지금은?”

탄은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애쉬는 흥분한 수컷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톡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숨이 거칠다. 단단해진 그것으로 탄의 가랑이 사이를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탄은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위화감을 느꼈다. 저 눈빛이 무엇인지 같은 남자로서 모르지 않았다. 흐릿하게 풀린 눈, 열에 들뜬 얼굴. 꾸욱, 꾹. 애쉬는 본능에 휩싸여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이기까지 했다.

설마.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의 고민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에이, 설마……. 내가 서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던 건가?

그러니까…… 쟤가 날? 내 거시기를 원했던 게 아니라…… 내 엉덩이를?

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깐. 잠깐만!”

탄은 숨을 헐떡거리며 애쉬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이 들어간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애쉬는 붉게 물든 눈으로 물끄러미 탄을 내려다보았다.

“뭐, 뭐 하려고?”

탄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볼썽사납다고 생각해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꾸욱. 애쉬는 하체를 탄에게 바짝 갖다 대며 웅얼거렸다.

“……성교?”

성난 아래와 다르게 목소리는 수줍었다.

“너랑, 나랑?”

끄덕끄덕.

애쉬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사타구니 부분이 영 불편한지 허리를 들썩거렸다.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바지를 내리려 했다. 탄은 시선만 아래로 하여 설핏 드러난 윤곽을 보았다. 1초 만에 바로 눈을 뗐다. 사내놈 거시기를 마주한 게 처음도 아니건만, 왠지 지금은 견딜 수가 없었다.

애쉬는 비스듬히 돌아간 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초조해졌다. 폭주로 인해 몸은 욱신거렸고, 머릿속은 거칠게 날뛴다. 탄에게 실수할까 봐 마음이 쪼그라들면서도, 아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답답한 천 밖으로 나가고 싶어, 뿌리 쪽 근육이 움찔거렸다.

애쉬가 탁하게 쉰 목소리로 중얼댔다.

“탄이…… 나쁘지 않다고…….”

탄이 작게 헛기침했다. 옆얼굴에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과 마주할 자신이 없다. 휙.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고서 그답지 않게 다소 엉성한 말을 늘어놓았다.

“어어. 그런데…… 그 서로의 의사가 맞는 상황이어야 된다고 했잖아. 이게, 어? 조금 당황스럽네? 만약에 한다면, 당연히 내가 너를…….”

“애쉬를?”

“내가 널……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너무 상스러운 표현을 쓰지 않기 위해 탄이 머리를 굴렸다. 내가 너한테 박을 줄 알았다? 아니지. 넣을 줄…… 뭐가 됐든 이상할 것 같다. 결국에는 괜스레 돋아난 어투로 말을 돌렸다.

“너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지 알기는 해?”

“성교 방법?”

“그래.”

“알려 주면, 배웁니다.”

“그게 한 번에 배워지는 건 줄 아나.”

탄은 으름장 놓듯이 말하며 슬쩍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가 고개를 아래로 숙여 다가왔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흐릿하게 번진 초점 속에서 애쉬의 기다란 속눈썹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저는 금방 배웁니다.”

애쉬가 눈을 깜빡였다. 순수하게 자신감에 찬 눈동자였다. 탄은 아랫입술을 움찔거렸다. 딱 봐도 동정인데. 키스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저 단호함은 뭐란 말인가. 섹스가 격투술 같은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기세가 살짝은 꺾였다. 규격 외 에스퍼면 뭐든 잘할지도 모르겠다며, 은근히 설득되는 것이다.

탄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애쉬가 잽싸게 바로 혀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그, 하겠다고?”

“그?”

“넣을 거냐고.”

“넣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애쉬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명확한 입력값이 없으면 아무것도 출력해 내지 못하는 기계처럼. 탄이 참다못해 얼굴을 와락 찡그리며 소리쳤다.

“네 성기를. 나한테!”

애쉬가 멍하니 탄을 쳐다보았다. 질문의 초점이 어딜 향하는지 이해 못 한 표정이었다.

“네. 성교…… 결합입니다. 삽입.”

“…….”

“당연히 넣는 것…… 아니면, 다른 방법……?”

애쉬는 고장 난 듯 웅얼거리면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탄은 맥이 빠졌다. 그러니까 당연하게 나한테 넣는다고 생각한 거네.

다른 방법은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얼굴이다. 탄은 본인이 그랬던 것은 순간 까맣게 잊고, 열이 올랐다. 착하고 순진한 줄 알았더니.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내가 나이도 훨씬 많고, 상관인데.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자식이…….

탄이 씨근덕대며 말했다.

“뭐, 너한테만 달렸냐? 나도 있거든.”

애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진무구한 까딱임에 탄은 더 열이 올랐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크기도 평균 이상에, 여태껏 쌓아 온 스킬도 훨씬 많고, 파트너 중 불만을 표한 이도 없었다. 칭찬을 받으면 받았지.

“내가 너한테 넣을 건 왜 고려를 안 해? 열받네. 야, 나도…….”

탄이 빠르게 말을 늘어놓다가, 이상함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히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반쯤 일어섰던 것이, 지금은 완전히 죽어 있다. 너무 놀랐던 모양이다. 애쉬의 시선도 자연스레 탄을 따라가 그의 사타구니에 지그시 머무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너무 놀라서 그래. 이거 금방 다시…….”

도리도리. 애쉬는 잔뜩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요?”

“네가 나한테 넣는 게……. 그, 그게 싫은 거야. 아마도.”

“싫으면, 나쁜 짓. 안 합니다.”

애쉬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상체를 일으켰다. 탄이 반사적으로 애쉬의 팔목을 붙잡았다. 바르르. 애쉬의 근육이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제야 애쉬가 폭주 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렇게 실랑이만 할 때가 아니었다.

“어디 가.”

“하지만…… 나쁜 짓.”

“나쁜 짓 직전까지만 해.”

“……자위 도와주는 것?”

“그래.”

애쉬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주춤거렸다. 탄이 상체를 휙 일으켜 다가오자,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탄의 손이 제 중심부로 다가오는 걸 바라보며 애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에서 엉망으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타, 탄.”

탄은 막무가내로 팔을 뻗었다. 가이딩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 반, 홧김 반이었다. 성기가 죽어 있으니, 괜스레 자존심이 상했다. 이 상황에서 발기한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애쉬는 엉덩방아를 찧어 다리가 벌어져 있었다. 탄은 애쉬의 사타구니 위에 손을 얹고서는, 바지와 팬티를 단숨에 끌어 내렸다.

“흐윽…….”

애쉬가 움찔거리면서 고개를 옆으로 팩 돌렸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공기 중에 드러났다. 선단은 이미 쿠퍼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팬티 중심부가 진한 색으로 물들었다.

탄은 손가락을 멈칫거리다가, 이내 애쉬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애쉬가 푸드득 떨며 두 다리를 모으려 했다. 탄이 팔꿈치로 억지로 애쉬의 무릎을 밀어냈다.

“가만히 있어. 아까 냅다 사람을 넘어뜨릴 때는 언제고.”

“흐, 흐윽, 윽…….”

탄이 왼손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금세 손바닥이 찐득거리고 축축해졌다. 바로 눈앞에는 우람하게 일어서 껄떡거리는 남자의 성기가 있다. 남성 페로몬 특유의 코를 쿡 찌르는 냄새가 풍겨 온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 벌어지는 중인데, 이상하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애쉬는 두 눈을 꽈악 감고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등 뒤로 넘긴 팔로 매트를 짚었다. 팔뚝에 힘줄이 올라섰다.

“흐으, 아……!”

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뒤로 휙 젖혔다가, 푹 숙이기를 반복했다. 몰아치는 쾌감에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탄은 제 손짓 하나에 요동치는 애쉬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옷 다 더러워지겠다. 바지 벗어 봐.”

애쉬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고 실눈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쾌락에 잠식된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다.

“흐으…… 네…….”

탄은 순간 심장이 확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가슴 근육이 지끈거리고 동시에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지금 내가…… 저 녀석 느끼는 얼굴만 보고 흥분한 건가?

탄이 잠깐 혼란에 빠진 사이, 애쉬는 고분고분하게 다리를 꿈틀거려 바지를 완전히 벗었다. 하체에는 팬티 한 장만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애쉬가 팬티 끝만 만지작거리며 탄의 눈치를 살폈다.

“……속옷도?”

“어? 아, 어어. 그것도 벗어.”

탄이 마른침을 삼켰다. 애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속옷을 벗었다. 젖은 천이 탄탄한 다리 위를 스르륵 미끄러져 지나갔다. 탄은 저도 모르게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애쉬의 몸은 완벽했다. 거대한 골격. 그 위에 붙은 묵직한 근육들. 와중에 허리부터 골반까지는 라인이 좁게 떨어졌다. 근육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퉁퉁해 보이지는 않았다.

성기는 같은 남자로서 질투가 날 정도로 크고 굵었다. 체모의 색은 머리카락처럼 옅어서, 보고 있어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훌륭했지만, 개중에 가장 손에 꼽을 만한 것은.

“탄…….”

역시나 얼굴이었다. 탄은 자신을 조심스레 부르는 그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맥박이 빠르게 뛴다. 혈류가 솟구치면서 가운데로 모이기 시작했다.

쾌락에 젖어 있는 애쉬는 지나치게 잘생겼다. 인간 외적인 존재처럼 느껴졌고, 성별도 의식되지 않았다. 그런 분류 자체가 의미 없는 존재 같았다.

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볼 안쪽 연한 살을 깨물었다. 애쉬를 감상만 할 때가 아니었다. 이 행위의 목적이 가이딩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방금 잊어버릴 뻔했지만. 이러느니 차라리 애쉬의 얼굴을 안 보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리 와.”

탄은 애쉬의 뒷덜미를 붙잡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애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해 놓고서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성기 기둥을 붙잡고 위아래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아, 아…….”

애쉬가 땀이 난 이마를 탄의 어깨에 비비적거리면서 신음했다. 두툼한 등이 둥글게 굽으면서 움찔거렸다.

탄은 팔랑거리는 애쉬의 머리카락과 뒷덜미를 훑어보며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간간이 귀두를 손끝으로 꾸욱 짓누르기도 했다. 그러면 애쉬가 헐떡이며 신음했다. 기둥과 귀두 사이 살짝 들어간 곳을 조이면 거의 우는 소리를 냈다.

“하아…….”

탄은 무심코 젖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건 가이딩이다, 가이딩이다…….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손으로는 바삐 애쉬의 것을 주무르면서, 가이딩도 진행해 나갔다. 여간 벅찬 게 아니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어 보여 다행이었다. 가이딩 물질이 빠르게 생성되어 애쉬의 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애쉬의 텔레파시도 정제된 형태로 돌아왔다.

『탄, 타안, 탄…… 나도 탄 만지고 싶은데. 좋은 냄새 나. 키, 키스하면 싫어할까? 싫어하면 나쁜 짓인데. 아, 생식기가 터질 것 같아…….』

내용이 다소 민망하다는 것 외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탄은 의도적으로 텔레파시를 흘려들으려 애썼다.

『교미, 아, 아니, 성교하고 싶어……. 안 돼, 이런 생각 하면…….』

저를 향한 들끓는 욕망이 느껴져도 달관한 표정으로 있으려고 애썼다.

『닿고 싶어, 닿고 싶어, 넣고 싶어, 넣고 싶어, 넣고 싶어…….』

“야.”

참다못한 애쉬의 성기를 힘주어 꽉 움켜쥐었다. 아, 애쉬가 신음하며 어깨를 떨었다. 탄이 굽어진 애쉬의 뒷덜미를 붙들어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애쉬의 짙은 피부 위로도 홍조가 또렷하게 보였다. 눈가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 들리거든.”

애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넋이 반쯤 나가 보였는데, 지금 저 상태는 폭주가 아니라 차오르는 성욕 때문이었다.

『죄, 죄송해요.』

“넣고 싶어…….”

“너 지금 생각이랑 말 반대로 나왔다.”

“아.”

“정신이 빠지긴 했구나.”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생식기가 너무 욱신욱신? 아프다? 잘 모르겠습니다…….”

애쉬가 기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원래 발기하면 그래.”

“네…….”

“그래서, 만져 주지 마?”

도리도리.

애쉬가 밭게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빠르게 내저었다. 곱실거리는 앞머리는 어느새 땀에 젖어 있었다. 눈동자 속에는 선명한 욕구가 날뛰는 중이었다.

욱신, 탄은 다시금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시발. 욕을 간신히 목구멍 아래로 집어넣었다. 난 쟤를 만져 주기만 하는데, 왜 이러지. 제복 바지 아래에서 은근하게 일어나는 움직임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어 있어 사람을 망신시키던 것이, 단단하게 되살아나는 중이었다.

탄이 침을 삼켰다. 누군가와 맨살을 부대낀 지 얼마나 되었더라, 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1년 정도는 된 것 같다. 쌓일 만도 했다. 63구역으로 온 뒤에는 자위도 자주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성욕이 다 사라졌나 싶었지만, 지금 보니 그저 잠시 억눌렸던 것뿐이었다.

탄이 엄지로 애쉬의 귀두를 부드럽게 문지르면서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끄덕…….

“만지고 싶고?”

“싫으면…… 안 합니다.”

“넌 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은데?”

애쉬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슬쩍 피했다. 속눈썹 끝이 파르르 떨린다. 탄은 문득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해 보든가.”

그래서 무심코 이런 말이 튀어 나간 모양이다. 애쉬가 움찔하며 고개를 휙 정면으로 다시 돌렸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최대치로 뜨여 있었다.

“정말?”

“그래.”

명백한 허락이 떨어지자, 애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턱을 틀 때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키스할 것 같더니, 갑자기 브레이크가 풀린 모양이었다. 탁. 부딪쳐 오는 입술이 거셌다. 탄은 손목에 힘이 풀려 애쉬의 성기를 놓을 뻔하다가, 다시금 꽈악 감싸 쥐었다.

애쉬는 눈을 꼭 감은 채 열심히 키스했다. 말 그대로 성실하고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쉴 틈 없이, 혀로 핥아 올리고 탄의 입을 헤집었다. 추읍, 춥. 혀를 섞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흥분한 애쉬의 몸뚱이는 점점 탄 쪽으로 기울었다. 어느 순간, 무게 중심이 이동하더니 그대로 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풀썩. 데자뷔인가. 탄은 오늘 애쉬에게 떠밀려 바닥에 깔린 게 몇 번째인지 셈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애쉬는 탄의 위에 올라타 키스를 이어 나갔다. 혀가 더 깊숙하게 치고 들어온다.

탄은 두 몸 사이에 낀 팔을 꾸역꾸역 움직였다. 제대로 수음해 주기가 쉽지 않은 자세였는데, 그 와중에 애쉬가 허리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으읍…….”

가만히 좀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 막혀 있었다. 손목이 저린다. 탄이 눈을 찡그리며 손을 잠시 밖으로 빼내서 탈탈 털었다.

그런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애쉬가 꾸욱, 사타구니를 붙여 왔다. 탄이 크게 움찔했다. 바지 아래에 갇혀 있던 성기에 자극이 들어온다. 애쉬가 의도하고 저러는 건지, 본능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좋다는 거다.

“흐읍, 윽…….”

탄은 입이 막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속절없이 신음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굵은 살덩이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천 아래에 자리한 성기를 자극해 댔다. 탄은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했다. 고민은 짧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돌이킬 수도 없다. 탄이 제 것도 속옷 안에서 끄집어냈다.

애쉬가 잠시 숨을 들이켜더니, 손으로 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세팅해 두었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지만, 탄은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성감에 잠겨 허우적거렸다.

위아래로 딱 맞붙은 채 성기를 치대고 비비고 있다. 탁, 탁. 애쉬의 골반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앞뒤 좌우 방향을 계속 바꾸면서 가장 예민한 살갗끼리 마찰시킨다.

다소 투박한 몸짓이기는 했다. 너무 강하게 움직일 때는 탄은 성기가 짓눌려 약간의 통증이 들었다.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본능의 목소리를 따르고 있는 거다.

탄은 점차 숨이 차올랐다. 입 속을 자비 없이 헤집는 혀가 버거웠다. 고개를 비틀어 잠깐 입술을 떼어 내자, 애쉬가 스르륵 눈을 떠서 탄을 내려다보았다. 탄은 숨을 몰아쉬면서 애쉬와 말없이 눈을 마주했다.

젠장, 젠장, 젠장. 속으로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욕을 읊어 댔다. 이 정도면 자위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거의 성행위 단계에 접어든 것 같은데. 문제는 너무 흥분된다는 것이다. 저릿한 성감이 사타구니 주변을 데웠다.

“탄…….”

애쉬의 나지막한 부름을 들은 순간, 탄은 더 난감해졌다. 이러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정할 것만 같았다. 쟤는 왜 쓸데없이 목소리도 좋고, 쓸데없이 잘생겨서……. 애쉬보다 먼저 사정하는 것만은 절대로 싫었다. 손으로 한 것까지 치면, 애쉬가 훨씬 더 오래 자극받았다. 그까짓 성기끼리 좀 비비적댔기로서니, 먼저 사정한다면. 생각도 하기 싫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애쉬는 이번에는 얼굴 사이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눈을 마주치면서 골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쉬의 단단하고 굵은 것이 스윽스윽 움직이며 고환 근처를 건드릴 때마다 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위험했다. 사정 타이밍을 늦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는 눈빛 또한 위험했다.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골반을 탁탁 흔드는 꼴이라니. 아이 같은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씨를 뿌리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점철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에 저 녀석이 욕망하는 대로, 저 녀석의 것을 넣으면 무슨 기분이 들까.

조금 전까지는 상상도 하기 싫던 것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아프긴 아프겠지? 탄의 몸도 애쉬만큼 달아올랐고 머릿속은 성욕에 절어 있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정신을 다잡으려 할 때마다, 눈물이 어룽진 애쉬의 얼굴에 넋이 다시 나갔다.

“아, 탄, 타안…… 저, 저 이상…….”

그때 애쉬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골반을 앞으로 힘주어 뺐다. 꾸욱. 최대치로 두 사타구니가 맞붙었다. 짓눌린 부분이 아릿할 정도였다.

애쉬는 허겁지겁 턱을 틀며 다가와 탄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초조한 키스를 받아 주면서, 탄은 일생의 의지를 끌어모아 사정감을 낮추려 애썼다. 안 돼. 위엄을 지켜. 이제 와, 위엄이라는 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으윽……!”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쉬가 온 근육에 힘이 들어간 채로 멈추었다. 푸슛, 주르륵. 끈적한 정액 덩어리가 탄의 샅에 흩뿌려졌다. 비릿한 냄새가 훅 퍼졌다. 애쉬는 사정하고 나서도 몇 번 더 성기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정액이 탄의 성기 곳곳에도 잔뜩 묻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애쉬는 입을 느리게 떼며 탄을 내려다보았다. 절정에 다다른 게슴츠레한 눈빛이 탄을 향했다. 탄은 사정의 여운에 잠긴 애쉬를 바라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성기 뿌리가 까딱거렸다. 애쉬의 잔열이 저에게 옮겨붙은 듯했다. 아닌 척하기 위해 태연한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는 전혀 태연하지 않았지만.

“이제, 좀 괜찮아?”

애쉬는 말없이 침만 삼켰다. 굵은 목울대가 요동쳤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젓는 건지 모를, 애매한 제스처를 취하며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탄을 감싸고 있던 뜨거운 체온이 멀어진다.

애쉬는 탄에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앉았다. 저 혼자 심호흡하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그러다 조심스레 곁눈질로 탄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접촉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일전에 비밀 통로를 찾으러 뛰어다닐 때처럼 텔레파시가 전달되었다.

『또, 또 흥분했어……. 뜨거워, 뜨거워.』

“다시 섰다고? 그새?”

텔레파시에 답하자 애쉬가 깜짝 놀라 토끼 눈으로 탄을 돌아보았다.

“아, 종종 떨어져 있어도 들리더라.”

“죄, 죄송…….”

유달리 애쉬의 이능력이 강하게 치솟을 때는, 접촉 없이도 텔레파시가 가능한 것 같았다. 지금 힘이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폭주가 거의 종료 상태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가이딩은 더 필요 없을지도.

내심은 그걸 알면서도 탄이 말했다.

“구겨져 있지 말고 이리 와. 가이딩은 해야지.”

“하, 하지만.”

탄은 까딱거리며 애쉬에게 손짓했다. 사정 직전에 멈춘 성기가 뻐근했다. 목이 탄다.

가이딩이 맞아?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아니고? 탄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문하다가, 적당한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폭주가 완벽하게 끝났는지 어떻게 확신해. 어쨌든 애는 살려야 할 것 아닌가. 생명이 먼저다. 이러다가 또 아프기라도 하면? 끔찍하지. 너무 끔찍하지……. 큰일이야.

성욕이 머리를 뒤덮자, 모든 장애물의 턱이 낮아졌다. 이성이 둔해지면서 세상 모든 게 쉽게 느껴졌다. 어떻게 되든 좋았다.

이래서 다들 술 마시고 사고를 치는 거구나 싶었다. 부모님도 그랬던 걸까. 한참을 서로 밀어내다가 술과 슬픔으로 머리가 흐릿해진 그날. 이성이 걷히고 감정이 불쑥 튀어나온 거다. 그렇다면 그게 진정한 본심이었겠지. 제 탄생의 기원까지 구구절절 올라가던 탄은, 결론을 간단하게 내기로 했다.

시발, 뭐.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흥분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솔직해지자. 꼴렸잖아. 그러면 된 거다.

“애쉬. 이리 오라니까.”

“탄……. 그런데, 그런데 제가…….”

애쉬가 웅얼거리더니 눈치를 보면서 탄에게 기어 왔다. 죄지은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탄의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장황하고 어지러운 텔레파시가 쏟아져 내렸다.

『자꾸 나쁜 애가 될 것 같아요. 당신과 성교하는 생각만 듭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타, 탄한테 미움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은데……. 네. 그래요. 주, 죽겠습니다. 이대로.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죽어 버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뚝. 뚝. 애쉬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사정했음에도 멈추지 않는 성욕에 적잖이 혼란스러운 상태인 듯했다. 탄의 손등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탄은 거칠어진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야. 그게 뭐라고 죽기까지 해.”

『아닙니다. 애, 애쉬는 글러 먹었어요. 나쁜 짓. 죽어야 해요.』

이성이 흐릿해진 애쉬는 습관처럼 박힌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나쁜 짓인데. 왜 멈출 수가 없을까. 왜 자꾸 해서는 안 되는 상상이 떠오르고 생식기가 뜨거울까. 내버려 두면 이대로 벽에 머리라도 쿵쿵 찧을 기세였다.

“울지 말고. 아, 협박이 아니라 진심인 걸 알아서 더 무섭네.”

『멍청이, 멍청이, 멍청이…….』

텔레파시에서는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죄책감이 애쉬를 뒤흔들고 있었다. 이쯤 되자, 탄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엉덩이 그게 뭐 대수라고 애를 울려. 저렇게 애처롭게 사과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깟 엉덩이가 뭐라고. 서른여섯 살 먹은 놈 엉덩이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넣고 싶어?”

애쉬가 어깨를 떨었다. 고개를 내저었지만, 얼굴은 명백한 긍정으로 보였다. 눈물에 푹 젖은 애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탄은, 기어코 입 밖으로 이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 뭐…… 한번 대 줘?”

잠깐의 침묵. 탄은 애쉬가 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부연 설명까지 했다.

“넣게 해 줘?”

크응. 애쉬가 숨을 급하게 들이켜다가 콜록거렸다. 콜록, 콜록, 히끅, 콜록. 그사이에 작은 딸꾹질까지 섞여 있었다. 시선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애쉬는 왠지 겁에 질린 얼굴로 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요?”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긴 물음이었다. 아까는 분명히 싫다고 했는데, 나쁜 짓인데. 왜 탄은 이런 것까지 허락해 주는 걸까. 흐읍, 애쉬가 숨을 꾹 참아 딸꾹질을 진정시켰다. 후드득. 눈가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크게 뭉쳐 아래로 떨어졌다. 벅벅, 손등으로 제 뺨을 닦아 내고서는 애쉬가 중얼거렸다.

“탄. 너무…… 착합니다.”

“내가?”

“애쉬 때문에, 억지로…….”

탄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애쉬는 진지하게 자책에 빠진 얼굴이었다. 탄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탄은 당황해서 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물론 조금 전까지 엄두도 나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늘 변하기 마련이며…… 뭐 좀 비비고 있다 보니까, 은근히 괜찮을 것 같기도 해서……라고 제 입으로 주절주절 털어놓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웠다.

논리적인 이유도 몇 개 더 있었다. 크기를 보니, 더 큰 쪽이 넣는 게 아무래도 서열상 이치에 맞고…… 절박함으로 따지자면 저 녀석이 더 우세고…… 생각해 보니 둘 다 남자는 처음이니까, 분명히 아플 텐데 애쉬를 아프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구구절절 더 늘어놓을 수 있으나, 사실은 모든 게 하나로 요약되었다. 흥분해서 헐떡이는 아름다운 얼굴에 넘어간 거다. 아직도 팽팽하게 서 있는 성기가 그걸 증명했다. 이런 애의 소원이라니 슬그머니 들어주고 싶다. 엉덩이에 뭐 좀 넣는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기분이 은근히 좋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들 하겠지.

탄은 여러 이야기를 안으로 삼키며 민망함에 웅얼거리듯이 말을 던졌다.

“싫으면 말고.”

“시, 싫지 않…… 하지만.”

애쉬는 잔뜩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무릎 위에 얹어진 손이 꿈틀거렸다. 당장에라도 이 미끼를 덥석 물어 탄에게 달려들고 싶은 마음 반, 참을성 없는 자신에 대한 책망 반이었다.

“억지로…… 탄, 힘들면 안 됩니다.”

애쉬가 우물거렸다. 탄은 달아오른 제 뒷덜미를 손으로 벅벅 긁었다. 큰 결심 하고 아래로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반응이 자꾸 이러니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펄쩍 뛰면서 바로 달려들 줄 알았더니만. 해 준다고 해도 빼? 탄은 뼛속까지 반동분자답게, 청개구리 심보와 승부욕이 살살 솟구쳤다.

“억지 아닌데?”

“……?”

“아니,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라고. 내가 뭐, 숭고한 희생자도 아니고.”

“그래도…….”

애쉬는 우물쭈물하다가 탄의 불룩해진 중심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이제 그것도 됩니다. 탄이 애쉬한테 너, 너, 넣…….”

탄이 제 팔뚝을 슥슥 감싸 문질렀다.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양심의 소리가 꽤 컸다. 헐떡이며 느끼던 애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이 저 때문에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상상했다.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뾰족하게 말했다.

“몰라. 그냥 하라면 해.”

“……탄?”

“나도 꼴렸으니까. 하겠다고 할 때, 그냥 하라고! 아, 종알종알 말이 많네.”

탄은 충동적으로 말을 와르륵 내뱉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말을 기어코 육성으로 하게 하다니. 순진하고 아름다운 애쉬의 얼굴이 갑자기 조금은 얄밉게 보였다. 이게 수치 플레이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젠장, 젠장. 탄이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고 웅얼거렸다. 몇 초간 멍하니 굳어 있던 애쉬가 마침내 움직였다. 그 즉시 애쉬를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예고도 없이, 애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탄을 덮쳤다.

“윽!”

애쉬가 예고 없이 달려드는 게 이제 놀랍지도 않다. 떠밀리듯이 매트에 눕혀지는 감각도 익숙하다. 탄은 제 위에 올라탄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애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탄의 턱을 어루만졌다. 숨은 가쁘게 차올랐고 금세 다시 일어선 성기는 움찔거렸다. 사타구니 주변의 근육이 바짝 올라왔다.

애쉬는 제 몸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욕망은 저 혼자 벌써 내달리고 있는데, 신체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갑갑했다. 뭐든 하고 싶었는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손끝은 탄의 살갗 위에서 방황했다. 탄이 날 원하고 있어, 탄이 날 원하고 있어, 탄이 날 원하고 있어……. 하나의 생각만이 쉼 없이 메아리쳤다.

그러다 결국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웅얼댔다.

“탄. 아, 아, 알려…… 주세요.”

탄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큰일을 저지를 것처럼 기세 좋게 덮쳐 댈 때는 언제고, 금세 선생 앞에 선 아이처럼 소심해졌다. 이래서 얘가 좋은 건가. 귀여워서? 탄은 흘러가듯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줘?”

끄덕끄덕.

“성교하고 싶다고 난리를 칠 땐 언제고. 막상 하려니까 모르겠어?”

애쉬가 눈을 구기면서 시무룩하게 탄을 바라보았다. 소심하게 변명의 목소리를 냈다.

“난리…… 안 쳤습니다.”

탄은 애쉬를 더 골려 줄까 하다가, 본인도 지금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 마음을 접었다. 오랜만에 타인과 닿은 몸은 추가적인 자극을 갈망하고 있었다.

무엇부터 알려 줘야 할까. 탄이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남자와 해 본 적은 없어도, 관련 지식은 얼추 알았다. 경비대는 성별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다. 일평생을 남자들이랑 부대끼며 살다 보니, 자연스레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모여서 하는 대화의 절반 이상이 음란한 것들이었으므로.

그간 했던 섹스와 크게 다를 것은 없을 테다. 삽입 전에 서로의 성감을 끌어올리고 흥분을 돋우는 데까지는. 이후가 문제였다. 그곳에 무작정 쑤셔 넣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당연한 소리다.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섹스하다가 몸을 다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을 테다. 탄은 내 몸은 내가 챙기자는 생각으로 말했다.

“……잠깐만 비켜 봐.”

“탄?”

“준비가 필요하거든.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애쉬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떨다가, 탄이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났다. 탄은 꾸물거리며 위로 움직여 팔을 뻗었다. 이것저것 생활품을 모아 놓은 서랍을 뒤졌다.

정리에 그다지 일가견이 없는 그였으므로, 손가락에 걸리는 무수한 잡동사니를 헤치며 원하는 것을 찾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애쉬의 시선에 머쓱해지려는 찰나, 마침내 찾아냈다. 연고였다.

“이거로 되려나…….”

연고를 손에 쥐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애쉬는 두 무릎을 곱게 모아 꿇어앉고 있었다. 벌 받는 애도 아니고, 진짜 쟤는 어이가 없다니까.

탄이 다시 한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까지 맴돌던 겁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다행이었다. 애쉬를 이끌면서 어리숙하고 삐걱대는 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탄이 연고 튜브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웅얼거렸다.

“되겠지…….”

미끈미끈한 제형이니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피부 재생에 탁월하다는 문구가 캐슬어로 적혀 있었다.

애쉬는 긴장 반 호기심 반의 얼굴을 한 채 탄을 힐끔거렸다. 탄은 손가락으로 애쉬의 흉통을 지그시 눌렀다. 위협적일 정도로 커다란 몸뚱이가 그 자그마한 손짓 하나에 바짝 굳었다.

탄은 애쉬와 닿은 손끝에 심장이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펄떡이는 제 맥박을 느끼며, 긴장감을 완전히 지우려고 애썼다. 마치 처음 할 때처럼 어색하고 머쓱하며 입이 마른다. 미묘한 기류를 깨 버리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움직이는 것이다.

탄이 애쉬의 뒷덜미를 붙잡아 끌어당겨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경험상 무작정 키스라도 시작하면, 어찌어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열심히 배우겠다는 모범생의 자세로 있던 애쉬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움칫한 것도 잠시, 억센 팔로 탄을 꽉 감싸 안았다.

진득하게 혀를 섞을수록 흥분이 긴장을 덮어 가렸다. 욕망에 흐려진 탄의 이성은 용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것으로 바뀌었다. 까짓거 얼마나 아플까. 전투 훈련을 받으면서 이곳저곳 다치고 뼈도 부러져 봤는데.

애쉬는 손을 살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의 제복 셔츠 안쪽으로 파고들려 했다. 탄의 바지는 지퍼가 내려가 골반 부근에 걸쳐져 있었다. 늘 단정하던 복식이 흐트러져 있다. 그 틈을 타고 애쉬의 뜨거운 손가락이 맨허리를 움켜잡았다.

“읏…….”

탄이 입술이 맞붙은 채로 작게 신음했다. 이런 건 아직 알려 주지 않았는데. 애쉬가 옆구리에 붙은 살과 근육을 힘주어 붙들고 주무르고 있다. 아마 본능적인 행동 같았다.

애쉬는 잠시 입술을 떼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콧잔등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채로 웅얼거렸다.

“알려…… 주세요.”

“이미 제법 아는 것처럼 구는데? 잘하네.”

탄은 제 셔츠 아래에서 꾸물거리는 손짓에 착실하게 달아올랐다.

“……애쉬, 잘했어요?”

“그래.”

“감사합니다.”

몽롱하게 풀어져 있던 애쉬의 눈이 잠시 초롱초롱했다. 기쁜 기색이다.

“이다음은…… 넣어요?”

“바로? 급하셔라. 준비 없이 하면 아프대.”

“탄, 아프면 안 됩니다……!”

애쉬가 움찔거리며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탄은 네 크기를 보니 아예 안 아프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 같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대충이라도 아래를 좀 풀어 봐야지.”

탄이 임무를 읊듯 덤덤하게 말하며 연고 튜브를 만지작거렸다. 애쉬가 연고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말했다.

“……풀어요? 어떻게?”

“잘.”

“이것으로?”

“쓸 만한 게 이거밖에 없다. 63구역 와서 섹스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챙겨 온 게 없거든.”

피임 알약도 윤활제도 가져오지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누군가와 붙어먹을 리가.

그런데 지금 그 미친 짓이 벌어지는 중이다. 하기야 자살 테러를 앞두고도 사랑은 샘솟기 마련이었다. 탄은 제 반항적이고 비뚤비뚤한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늘 의문이었는데, 이제는 확신했다. 엄마를 닮은 거라고.

애쉬는 섹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하의를 다 벗고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를 밖에 드러낸 채였지만, 이런 걸 직접 듣는 데에는 면역이 없었다. 자연 번식 교미, 성교, 결합 등의 단어가 덜 부끄러웠다.

탄은 피식 웃었다. 애쉬의 꼴을 보니 역시나 리드는 제 몫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그시 애쉬의 어깨를 짓눌렀다.

“탄?”

탄이 그대로 애쉬를 밀어 매트에 눕혔다. 곧장 그 위로 올라타 애쉬의 사타구니 부근에 앉았다. 애쉬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침을 삼키면서 목울대가 크게 요동친다.

탄은 바지를 허벅지 절반까지 대충 끌어 내렸다. 여전히 걸리적거렸지만, 다 벗어 버리기에는 왠지 부끄럽다. 대신 셔츠 단추만 두세 개 정도 풀었다. 점점 맨몸을 감싼 천이 답답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애쉬는 속옷 밖으로 드러난 탄의 성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셔츠 끝자락이 성기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선단에 닿아 있는 면이 쿠퍼액에 젖어 진하게 물들었다.

탄은 어리둥절한 얼굴의 애쉬를 내려다보며 기이한 쾌감을 느꼈다. 한쪽 손으로 애쉬의 가슴팍을 짚고, 오른손을 뒤로 가져갔다.

“기다려.”

탄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고서는, 연고를 엉덩이 근처라 예상되는 지점에 짰다. 질척거리는 이물감이 엉덩이골을 타고 흘렀다.

애쉬는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탄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다. 그와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칠 때마다 감전된 듯이 부르르 몸이 떨렸다. 애쉬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언어화하는 법은 배우지 않았다. 탄에게 물어봤다면 망설이지 않고 명료히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이게 꼴린다는 거야.

애쉬가 허공에서 삐걱거리며 배회하던 손을 탄의 골반에 얹었다. 안달이 났다. 초조했다. 탄의 얼굴은 자극적이었다. 그를 만지고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어떻게’의 자세한 내용을 몰라서 문제였지만.

탄은 움찔거리는 애쉬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풀어야 들어갈 거 아니야.”

“가만히…….”

“그래, 가만히.”

애쉬는 감정이 격동하는 와중에도 탄의 말을 들었다. 손바닥을 골반에 얹어만 놓은 채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탄은 손가락으로 제 뒤를 더듬거렸다. 민감한 살갗에 자극이 들어가니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곧바로 자기 최면을 걸려 애썼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보다 두세 배는 큰 뮤턴트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다. 뒤에 손가락 넣는 것 정도야 진짜 별것도 아니다.

직접 뒤를 푸는 모습을 애쉬에게 보여 주는 게 민망할 뿐이었다. 탄이 시선을 살짝 돌렸다. 비스듬히 틀어진 옆얼굴에 애쉬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동시에 흥분에 젖어 있는 텔레파시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탄이 흥분했어……. 키스하고 싶은데, 가만히,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가만히. 가만히. 탄의 말 들어. 근데 푼다는 게 무슨 뜻이지? 푼다? 매듭을 푼다, 문제를 푼다, 코를 푼다……? 어려워. 더 알려 주면 좋을 텐데…….』

탄은 선명하게 꽂히는 애쉬의 생각을 모른 척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미끈한 연고 때문에 손가락 한 마디까지는 곧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부터가 문제다.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대충 손가락 여러 개 넣고 쑤시다 보면 되는 건가.

탄은 자기가 깔고 앉은 성기의 크기를 가늠했다. ……진짜 들어가기는 할까, 저게?

희미하게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충동과 흥분에 못 이겨 내지른 말이라지만, 뱉었으니 지켜야 한다. 탄이 의지를 다잡았다. 꾸욱, 손목에 힘을 주어 손가락을 안으로 더 밀어 넣어 본다.

“윽…….”

『헉. 아픈 걸까? 나는 계속 가만히 있어야 하나? 가만히? 가만히? 하지만…… 아, 탄은 생식기도 잘생겼구나…… 턱에 땀이 흐르고 있어…… 핥으면 싫어할까?』

“으, 으윽.”

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애쉬의 가슴팍을 짚은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리 연고를 발랐다고 한들, 깊숙이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뒤로 꺾여 있는 오른팔이 저리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해. 탄을 보고 있으니까 자꾸 생식기에 힘이 들어가. 탄은, 탄은 지금…… 탄은…… 이런 걸 뭐라고 하지. 단어가, 단어가 생각이 안 나.』

“하아…….”

와중에 생생하게 꽂히는 애쉬의 속마음이라니. 탄이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혹? 미혹? 현혹? 음란? 외설? 음행? 야…… 야하다? 탄…… 야하다?』

텔레파시가 요란했다. 겉으로는 묵묵하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얌전히 누워 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별생각을 다 한다. 탄은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만은 애쉬의 이능력이 성가시기 그지없다.

“애쉬…… 텔레파시 간수 좀 해라.”

탄이 아랫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꽉 깨물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애쉬가 화들짝 어깨를 떨었다. 정신이 혼미하여 생각이 무절제하게 빠져나가는 줄도 몰랐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힘을 조절하려 애썼다.

애쉬가 첫 경험이 주는 어찔함에 휘둘리는 동안, 탄은 손가락 하나를 더 집어넣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아릿한 통증을 참으면서 억지로 중지 한 마디를 넣었을 때였다.

“시, 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일생 한 번도 넓혀진 적 없던 곳이다. 근육이 팽팽하게 늘어나면서 드는 뻐근한 통증.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이물감이 들었다.

이런 걸 어떻게 하는 거지? 안 되겠는데? 탄의 몸이 바짝 굳었다. 끝까지 넣은 것도 아닌데, 이미 손가락 두 개만으로 버겁다.

“탄…… 힘들어 보입니다.”

애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면서 탄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탄이 어금니에 힘을 꽉 주었다. 연상과 상사로서의 자존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대체로 쓸모없는 객기로 번진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당당히 말해 놓았으니 혼자 해결해 내고 싶었다.

“아니. 딱히.”

탄은 신음과 통증을 억누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말끝이 엉망진창으로 흔들리고 가쁜 숨이 섞여 나와 실패했다.

“아프다면 그만…….”

“아픈 게 아니라 어색해서 그래.”

“하지만.”

탄의 괜찮은 척이 길어질수록, 애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랫입술이 튀어나오고 턱에 주름이 잡혔다.

“진짜 괜찮다니까?”

“…….”

“넌, 그냥 가만히…… 윽!”

불퉁한 표정으로 탄을 움직이던 애쉬가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탄의 허리를 붙든 팔뚝에 힘줄이 불뚝 튀어나온다. 그대로 탄의 몸을 들어 뒤집으면서, 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반대로 바뀌었다.

탄은 얼굴을 찡그리며 매트에 털썩 드러누웠다. 애쉬는 묘하게 심술이 난 표정이었다. 고르지 않은 호흡과 함께 말했다.

“가, 가만히 안 합니다.”

“뭐?”

애쉬가 콧잔등을 마구 찡그렸다. 일평생을 입을 닫고 살았던지라, 육성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게 아직은 어색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여러 감정이 뒤섞여 요동치고, 말을 쏟아 내고 싶을 때는 혀가 꼬였다. 대신 텔레파시를 우르르 쏟아붓기로 했다.

『알려 주면 배운다고 했는데. 탄은 자꾸 혼자 하려고 하고. 가만히 있으라고만……. 아파 보이는데. 애쉬한테는 안 알려 주고. 소, 속…….』

“아니, 나는 그냥.”

탄이 당황해서 변명하려는 때, 애쉬의 굵은 육성이 울려 퍼졌다.

“속……상합니다.”

애쉬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속상함. 그 감정을 입에 담아 발화하자 마음이 울렁거렸다. 날것의 감정, 그것도 상대에게 반하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어……? 미안.”

탄이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애쉬의 복잡한 표정을 마주한 순간, 탄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애가 속상하다잖아. 괜한 자존심 부리고 뭐 하는 거야.

“소, 속상했어?”

“푸는 거……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애쉬는 억울한 기색이었다. 탄이 잠시 입만 뻐끔거렸다. 미안하기는 한데, 냉큼 그러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숨만 쌕쌕 내쉬며 멍하니 있었다. 이번에는 자존심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주워들었을 뿐 제대로 된 요령도 모르지만, 애쉬에게 맡기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부끄러우니까.

애쉬는 바닥에 떨어진 연고 튜브를 집어 들었다. 쭈욱, 커다란 제 손에 연고를 잔뜩 짜내고서는 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제가…… 합니다.”

휙. 애쉬가 탄의 왼쪽 발목을 낚아채 끌어당겨 제 어깨 위에 얹었다. 저절로 탄의 몸이 비스듬하게 들렸다. 미끈거리는 연고로 뒤덮인 엉덩이골이 얼핏 보였다.

“잠깐, 애쉬.”

애쉬가 입을 꾹 다문 채 탄의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탄이 팔을 뻗어 애쉬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밀려나지 않았다. 애쉬가 작정만 한다면 힘으로 그를 이길 수는 없다. 곧이어 탄의 것보다 훨씬 뜨겁고 굵은 손가락이 아래에 닿았다.

“흐……!”

스치듯 건드렸을 뿐인데, 타인의 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릿함이 온몸을 꿰뚫었다. 탄은 숨을 집어삼키며 고개를 휙 옆으로 돌렸다. 한쪽 뺨을 매트에 기댔다.

애쉬가 호흡을 끊어 내뱉으며 말했다.

“여기에, 넣어요? 풀어서?”

하는 행위에 비해 목소리는 담백했다.

“탄.”

애쉬는 답을 종용하듯이 한 번 더 불렀다.

“그…….”

“네.”

“어, 맞기는 한데…….”

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개중 가장 강렬하고 또렷한 한 문장은,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였다.

“알겠습니다.”

애쉬는 간결하고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후 잠시간 애쉬의 목소리도 텔레파시도 뚝 끊겼다. 정신 사납게 쫑알거리던 게 그리워질 정도로 숨 막히는 적막이었다.

애쉬의 손가락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탄은 감은 눈가에 힘을 주면서 숨을 참았다. 혼자 팔을 뒤로 뻗어서 할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들어왔다. 직접 하면 겁이 나서 한계치에 다다르기도 전에 멈추었지만, 타인의 손길은 그런 게 없었다. 꾸욱. 꾹. 마디뼈가 굵게 튀어나온 손가락이 안을 헤집으며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 아아…….”

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이래서야 리드는커녕, 애한테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주게 생겼다. 눈을 떠서 애쉬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기도 할 수 있다던 애쉬의 선포는 완벽하게 사실이었다. 아프다, 더는 무리다 싶던 구간만 뚫고 들어오면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모든 건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생소한 이물감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애쉬는 가만히, 그러나 끈덕지게 탄을 살펴보다가, 손가락 하나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윽!”

거세진 압박감에 탄이 어깨를 떨며 눈을 반쯤 떴다. 곧장 애쉬의 눈동자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흔들림 없는 눈. 힘주어 감고 있던 탓에 흐릿하던 시야가 차츰 밝아질수록 애쉬를 이루는 선이 선명해졌다.

모든 선이 조화로웠다. 빳빳하던 탄의 뒷덜미에 힘이 쭉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새삼 저 이목구비 배치에 감탄하게 된다. 탄은 제 심장이 격동하는 걸 느꼈다. 평소 순하던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우물쭈물하던 기색이 사라지고 단단함만이 남은 애쉬의 얼굴은 색다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파괴력이 있었다. 잠깐 사람의 이성을 정지시킬 정도로.

애쉬는 몇 분 만에 처음으로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탄, 아파요?”

탄은 멍하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애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다시 물었다.

“정말?”

꾸욱. 그 순간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움직이며 안을 양옆으로 벌려 냈다. 흡, 탄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견딜…… 만해.”

거짓말이다. 아프다고 표현하기에는 모호한 감각이었지만,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난생처음 겪는 느낌이라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여유로움을 유지하며 감당할 만한 무언가는 아니라는 것.

애쉬는 탄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눈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뭐, 뭐야.”

애쉬의 이런 행동은 처음이었기에, 탄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왜 갑자기 애가 아니라 성인 남성처럼 굴지. 물론 겉모습은 이미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탄의 인식 속에서 애쉬는 어린애일 때가 더 많았다.

낯선 당혹감에 젖어 있을 때, 안에서 이리저리 꿈틀거리던 애쉬의 손가락이 어느 부근을 쿡 건드렸다. 두툼한 손가락뼈가 내벽을 짓눌렀고, 탄의 몸이 펄떡였다.

“아……!”

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음이 튀어나왔다. 찌잉, 아래에서부터 묵직한 진동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허공에서 손을 떨다가 무의식적으로 애쉬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탄?”

“거, 거기…… 읏.”

“여기?”

애쉬가 방금 자극했던 곳을 다시 꾹 눌렀다.

“우윽!”

이거 뭐야. 탄이 헐떡이면서 애쉬를 바라보았다. 너무 느끼다 못해 속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애쉬는 커다란 눈으로 지그시 탄을 관찰했다. 경험도 없고 섹스에 미숙하더라도, 탄의 표정을 읽고 구별해 내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지금 탄이 내비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다.

탄이 좋아해. 탄이 좋아하고 있어. 탄의 생식기가 움찔거려.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애쉬가 잔뜩 들뜬 채로 전립선만 집요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탄을 기분 좋게 한다, 그 목적이 잠시 애쉬를 지배했다.

“애, 애쉬…… 아, 윽, 아, 아!”

탄이 손끝을 세워 애쉬의 어깨를 긁어내렸다. 입술을 깨물어서 신음을 참고 싶은데, 잘되지 않았다. 쿡. 안이 자극될 때마다 속절없이 힘이 풀리고 턱이 벌어졌다.

“미, 미칠 것 같…… 으응!”

탄은 처음 듣는 제 신음에 낯섦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시야가 온통 번쩍거렸다. 땀에 젖어 빛나는 애쉬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쿨쩍, 쩍, 미끈한 연고가 내벽과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푹. 푹. 애쉬는 끈덕지게 탄의 얼굴을 훑으면서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의 오차도 찾아볼 수 없는 박자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탄이 온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

탄이 고개를 내저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이제야 사람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쾌락이 극심해 눈물까지 났다.

아까부터 흥분해 있던 성기는 한계치였다. 성기가 껄떡거리더니 셔츠 자락을 밀어내고 온전히 공기와 맞닿았다. 앞에서는 사정감이 밀려오는데 뒤에서는 욱신욱신 생소한 쾌락이 덮쳤다.

“흡, 흐으, 아…….”

탄은 본능적으로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제 성기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몇 번의 자극만으로도 금세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윽!”

앞으로 절정을 맞이한 순간 몸이 바짝 굳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평소였다면 이러고 나서 몇 초 후 길게 내쉬는 한숨과 함께 성감이 사그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끝이어야만 했는데. 쿡, 쿡, 쿡. 뒤를 찌르는 애쉬의 손가락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

탄이 목을 뒤로 젖혔다. 이게 뭐지. 성감이 한계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것이 찾아왔다. 끝도 없이 쾌락이 이어진다. 뒤에서부터 퍼진 쾌락이 멈추지 않고 온몸을 때렸다. 탄이 힘 빠진 손으로 애쉬를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그만…… 그만해…….”

“……왜요?”

맥빠지는 질문이 돌아왔다. 왜겠냐? 보면 몰라? 마음 같아서는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힘이 없었다. 뇌가 녹아내린 것만 같다.

“탄, 아프면 안 됩니다…….”

“아니…… 아픈 건 아닌데, 저, 정신 나갈 것 같으니까 잠깐 그만하라고…….”

탄이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애쉬가 손을 멈추더니, 잠시 후에 순순히 밖으로 빼냈다. 탄은 흉곽을 크게 들썩였다. 고집부리지 않는 게 그래도 평소의 애쉬답다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였다.

꾸욱. 손가락보다 훨씬 뜨겁고 굵은 것이 구멍을 짓눌렀다. 탄이 젖혔던 고개를 바로 하고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너…….”

꾸욱. 이어지는 압박감에 탄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추어 있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이물감. 애쉬의 성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굵은 귀두 부분이 주변 근육을 한계치로 늘리면서 내벽을 벌려 냈다.

애쉬는 성기 끝만 넣고서 탄을 마주하며 웅얼거렸다.

“아프지 않아…… 다행입니다. 탄…… 벌어져 있습니다. 꿈틀, 거렸어요.”

어디가 꿈틀거렸다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동시에 묻고 싶지 않았다.

“뭐?”

“손가락 세 개…….”

탄은 애쉬의 말을 해석하려 희뿌연 정신으로 애썼다. 손가락이 세 개까지 들어왔다는 건가. 두 개인 줄 알았는데. 중간부터 정신이 혼미해져, 안으로 뭐가 더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애쉬는 촉촉한 입술을 살짝 벌리고서 종알거렸다.

“늘어나서…… 풀려서…… 넣을 수 있어요.”

“으, 윽…….”

“애쉬가…… 했어요.”

탄은 수줍게 말하는 애쉬를 바라보며 맥이 풀렸다. 심지어 약간 뿌듯한 표정이었다.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이. 정신 나갈 것 같다는 소리 못 들었느냐고 다그치려던 마음이 순간 사그라들었다. 애쉬에게 이렇게까지 물러지는 스스로가 어이없었지만.

애쉬가 힘을 주어 조금 더 성기를 밀어 넣었다. 탄이 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이 정도 통증은 각오했던 바였다. 오히려 저렇게 커다란 것이 제 구멍을 찢지 않고 무사히 들어오고 있단 사실이 놀라웠다.

“탄, 탄, 탄, 탄…….”

애쉬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빠르게 같은 말만 내뱉었다. 목소리에는 집요함이 담겨 있었다. 애쉬의 앞머리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잘 때 입는 헐렁한 티셔츠도 땀 때문에 가슴 근육에 찰싹 달라붙었다. 커다란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탄, 탄, 탄…….”

“으, 흐윽, 조용…….”

탄이 희미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상했던 최악은 아니었으나, 버겁기는 했다. 가끔 숨 참는 것을 잊을 만큼은. 불로 된 기둥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온 내벽이 화끈거렸다.

애쉬의 성기가 절반쯤 들어왔다.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저 삽입한 것만으로도 자극이 된다. 앞뒤로 한 번씩, 이미 총 두 번 절정에 달했던 탄의 몸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커다란 부피의 성기가 안을 억지로 늘리면서, 전립선도 같이 짓눌렸다.

찌이잉. 아래에서 저릿함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했던 섹스에서는 느낀 적 없는 감각이었다. 숨이 껄떡거리고 시야는 가물거린다. 희미해지는 이성을 붙든 것은, 애쉬의 목소리였다.

“탄.”

“으, 흐으으…….”

꾸욱. 애쉬가 성기로 안을 조금 더 벌려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탄의 이마에 뺨을 문대고, 귓가에 입술을 비비적댔다. 탄의 귓바퀴에 입을 꼭 맞댄 채로 중얼거렸다.

“타, 탄을…… 사랑해요.”

탄은 탁한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 따끔거렸다. 기절할 것 같았으나, 애쉬를 바라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꾸욱. 차근차근 안을 가르고 들어오면서 애쉬가 계속 속삭였다.

“사랑…… 사랑해요.”

콱, 때마침 성기의 가장 굵은 부분이 지나가고 안을 가득 메운다. 뿌리까지 살짝 남아 있었으나, 다 넣지는 못했다. 애쉬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끝임을 알았다. 탄은 잠시 숨을 참은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야가 흔들거렸다.

“으, 윽…… 읏.”

아래에서 작열감이 느껴지면서 온 근육이 수축했다.

탄의 호흡이 안정될 때까지 애쉬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곁눈질로 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식은땀에 젖은 살갗을 코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하, 하아…….”

탄이 정상적으로 숨을 내쉬기 시작하자, 애쉬가 허리에 힘을 주었다. 꾸욱. 단단한 것이 안에서 꿈틀댔다.

탄은 두 팔로 애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맨살이 찰싹 맞닿았다. 잠시간 아무런 말 없이 본능의 소리만이 오갔다. 거친 호흡과 맞닿은 피부가 마찰하며 나는 소음들.

애쉬는 느리지만 강한 힘으로 탄을 밀어붙였다. 탄의 땀이 매트를 흠뻑 적셨다. 천천히 애쉬의 성기가 밖으로 빠져나갈 때는 내벽도 딸려 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온몸이 저릿해지고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벅찬 행위다. 한 번도 이런 용도로 쓴 적 없는 곳을 무리하게 넓혀 놨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애쉬의 움직임이 노련한 편도 아니었다. 동정답게 너무나도 정직하고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흐으, 윽…….”

하지만 탄은 자신이 점점 이 행위에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안을 쑤시는 성기의 크기와 굵기가 압도적이라, 단조로운 움직임에도 정신이 나가는 듯했다.

여기서 애쉬가 더 빠르게 움직인다거나 능숙하게 이곳저곳 자극해 댔다면 오히려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애쉬가 가만히 있어도 전립선이 한껏 짓눌린 상태라 끊임없이 쾌락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느린 속도로 첫 행위에 적응해 나갔다. 탄이 아래쪽이 벌어진 감각에 익숙해지고, 애쉬의 티셔츠가 흠뻑 땀으로 젖었을 즈음. 애쉬가 본능적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퍽, 퍽. 안을 때리는 소리가 더 짧은 간격으로 이어졌다.

“흣……!”

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들이켰다. 손으로 애쉬의 등을 더듬거리며 붙들었다. 땀으로 푹 젖어 등에 천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애, 쉬…… 빠르…… 윽!”

콱, 애쉬가 깊숙한 곳에 제 성기를 파묻었다. 탄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웠다. 애쉬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동시에 텔레파시도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 기분…… 좋아, 탄, 탄…… 기분 좋아…….』

쉴 새 없이 기둥으로 내벽을 문지르고 자극해 댔다. 애쉬가 다급하게 헐떡였고, 그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랐다. 탄은 같은 남자로서 애쉬가 어떤 상태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절정에 다다르려는 막바지, 사정하기 위해 더 크고 빠른 자극을 쫓고 있었다.

툭. 애쉬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탄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애쉬는 몽롱하게 풀어진 눈을 한 채 웅얼거렸다.

“탄, 타안…….”

애처롭게 들리는 목소리와 달리, 애쉬의 골반은 점점 더 격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몸이, 이상…… 이상해요, 탄…….”

그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소린데. 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길게 말을 내뱉을 만한 기력도 없었다. 애쉬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올 것 같아요…… 이상한 게…….”

“윽, 그러면, 하아, 빼…….”

“탄, 탄, 탄…….”

빼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애쉬는 와락 탄을 더 꽉 끌어안고 골반만 세차게 움직였다. 탄은 누군가 제 목구멍을 죄기라도 한 듯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쾌락에 내벽이 경련했다.

애쉬의 팔뚝이 단단하게 탄을 붙들고 있었다. 탄은 저를 가둬 둔 품 안에서 신음했다. 꾸욱. 애쉬는 골반을 최대한 앞으로 빼서, 가장 깊숙한 곳에 성기를 파묻었다.

“흐, 으윽…… 타안…….”

잔뜩 힘이 들어간 애쉬의 엉덩이와 등 근육이 요동쳤다. 허벅지 안쪽 근육도 경련했다. 곧 한참 동안 쌓여 있던 진한 정액이 탄의 안에 울컥 쏟아져 나왔다.

탄은 얼이 빠져 애쉬가 사정한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애쉬가 바들바들 몸을 떨며 느릿하게 골반을 다시 움직였을 때야 깨달았다. 구멍 사이로 찐득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와 살갗을 적시는 느낌이 생생하게 들었다.

“야, 너…… 잠, 잠깐.”

애쉬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거친 숨만 내쉬었다. 쿨쩍, 쿨쩍, 애쉬가 움직일 때마다 정액이 기둥과 마찰해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구멍 주변에 흰색 거품이 일었다. 잔뜩 젖은 내벽은 원활하게 성기를 받아들였고, 애쉬는 사정 전보다 조금 더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 지금…… 야…….”

탄은 흐느적거리며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 못했다. 분명히 조금 전 사정했으면서, 애쉬의 성기는 다시금 최대치로 부풀어 제 안을 때리고 있었다. 탄이 발꿈치로 애쉬의 허리를 힘없이 내리쳤다. 멈춰 보라는 뜻이었으나, 애쉬에게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미치겠네. 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진한 정액 냄새와 땀 냄새가 정신을 더 몽롱하게 만들었다. 주변의 공기는 습하고 뜨거웠다.

“아, 흐으, 제, 젠장…….”

탄이 숨을 몰아쉬며 몸을 비틀었다.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애쉬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지금 느껴지는 자극이 너무 과한 탓이었다. 여기서 쉬지 않고 더 이어졌다가는, 몸이 이상해질 것만 같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들었다.

애쉬는 탄이 몸통을 옆으로 틀자,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탄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탄은 지친 얼굴을 매트에 기대면서 웅얼댔다.

“야, 좀…… 봐줘라.”

애쉬의 속눈썹 끝이 바르르 떨렸다. 애쉬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평소보다 유달리 굵은 음성에 탄이 흠칫하며 곁눈질했다.

“저…… 못했어요?”

탄은 작게 숨을 내쉬면서 애쉬를 살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가슴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애쉬는 가슴팍을 들썩거리며 탄의 눈치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힘들어 죽을 것 같았는데, 저 모습을 보자마자 탄은 마음이 물러졌다. 스스로가 어이없을 정도로 애쉬에게 약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뒤까지 내주고 있는 거겠지……. 탄은 다시금 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잘했어.”

“정말요?”

“근데 힘들어…….”

애쉬가 넋을 놓은 틈을 노려, 탄은 몸을 꾸물거렸다. 위로 도망가려는 듯한 움직임에, 애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탄의 골반을 콱 붙잡았다. 그대로 위에서 탄의 몸을 짓누르듯 덮쳤다.

“어……야, 애쉬. 윽, 이 자식이.”

여전히 성기는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꾸욱. 아까와는 다른 각도로 성기 끝이 내벽을 찔렀다. 탄이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눈앞에서 빛이 쉴 새 없이 터지는 것만 같다.

“흐윽, 윽……!”

탄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애쉬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자꾸만 손목에 힘이 빠졌다. 약하게 버둥대자 애쉬가 느릿하게 성기를 쭉 빼냈다.

“읏.”

탄은 헐떡이면서 고개를 매트에 파묻었다. 엎드려 누워,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숨겼다. 탄의 등이 가쁘게 부풀었다가 꺼졌다. 그러다 잠시 후, 등에서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애쉬의 가슴팍과 맞닿았다.

“탄…….”

애쉬는 땀으로 젖은 셔츠를 벗어 던진 채 뒤에서 탄을 끌어안았다. 탄의 귓바퀴에 입술을 비비적댔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는 탄의 엉덩이골 위에 얹혔다. 곧바로 넣지는 않았지만, 성기 기둥이 움찔거리며 안달 나 하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애쉬는 작게 헐떡이면서 지그시 허리에 힘을 주었다. 성기로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듯이 굴더니, 아래위로 은근하게 움직이며 문지르기만 했다.

“하아…….”

탄이 뭉개진 숨을 내쉬었다. 매트에 얼굴을 묻고 있다 보니, 호흡이 갑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 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예민해진 엉덩이 주변을 찌르는 감촉에, 구멍 안쪽이 움찔거렸다.

축축한 애쉬의 머리카락이 어깨를 간질였다. 애쉬는 콧잔등으로 탄의 이곳저곳을 문지르고 냄새 맡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탄에게는 발칙한 애교처럼 느껴졌지만.

“탄이 힘들면…… 안 합니다.”

고분고분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성기는 여전히 단단했다. 선단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이 탄의 살갗에 스며들었다.

“미……치겠네.”

탄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숨을 몰아쉬며 웅얼댔다. 꽉 끌어안은 채로 내뱉는 그만하겠다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아니면 설득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대다가 생각했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빠져든 섹스가 얼마 만이던가. 아니, 이렇게 흥분한 건 아예 처음이었다. 이미 사정했음에도, 여전히 오르가슴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잠깐 쉬자마자 다시금 아래가 화끈거렸다. 엉덩이골 주변만 은근하게 뭉개는 성기가 애타게 느껴지기도 했다.

탄은 입술을 끔뻑이다가 결국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해…….”

“네?”

애쉬가 더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못할 정도로…… 힘든 건 아니야.”

탄이 그답지 않게 민망해하며 중얼거렸다.

“아.”

애쉬의 몸이 잠시 굳었다가 풀렸다. 탄은 제 귓바퀴에 떨어지는 거친 숨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애쉬는 뒤에서 꽉 끌어안은 채로 성기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듯했다. 하지만 바짝 붙어 있다 보니, 삽입할 각도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자세를 바꿔 줘야 하나. 탄이 고민하던 찰나, 애쉬가 스스로 움직였다. 딱히 알려 준 적도 없는데, 커다란 손바닥으로 탄의 골반을 붙잡아 쑥 들어 올렸다. 탄이 당황해서 숨을 집어삼켰다. 애쉬는 탄과 연결되고 싶어 마음이 다급해진 채였다.

애쉬가 두 팔로 탄의 아랫배를 끌어안고서 성기를 다시 밀어 넣었다.

“허, 윽…….”

탄이 고개를 떨구며 뺨을 매트에 비비적댔다. 내벽을 벌어 젖히는 감각에 발끝이 저절로 굽어졌다.

아까 전 애쉬가 뿜어냈던 정액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하지만 아래는 무리 없이 성기를 받아들였다. 애쉬의 것이 끝까지 빠듯하게 채운 순간, 탄은 잠깐 숨을 참았다. 어찔한 정신 속으로 애쉬의 생각이 쏟아져 들어왔다.

『좋아, 좋아, 좋아……. 계속 더, 더 하고 싶어. 두 번, 세 번, 아니, 열 번 더 계속, 계속……. 평생. 탄이랑 할래. 탄이랑, 계속……. 교미…… 번식 안 하는 교미. 좋아……. 부드러워…….』

“조용히…… 좀.”

탄이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애쉬가 자신의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마다 의도치 않게 수치심을 느껴야만 했다. 고개를 파묻은 탄의 뒷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텔레파시는 금세 멈추었는데, 대신 등 뒤에서 육성이 들려왔다.

“탄…… 좋아요. 계속…… 또 해요.”

그러다가는 나 죽는다. 탄은 핀잔주고 싶었으나 안을 빠르게 찔러 오는 성기에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더 하려고. 약간은 두려운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몸을 덮치는 쾌락에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졌다.

* * *

탄은 온몸이 땀으로 푹 젖은 채 매트에 털썩 드러누웠다. 사지에 힘이 다 빠졌다. 성벽 밖에서 뮤턴트 여러 마리를 동시에 상대했을 때만큼 녹초가 되었다. 1년에 두 번, 극한의 상황을 상정하고 진행되는 경비대 특별 훈련이 오히려 덜 힘들었다.

맨피부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땀. 다리 사이에 흐르다가 그대로 굳어 버린 액체.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 온통 난장판이었으나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타안…….”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더 하면 나 진짜 죽는다. 내 나이를 생각해. 너처럼 갓 태어난 게 아니라고.”

총 몇 번 한 거지. 탄은 아뜩해졌다. 사실 중간부터는 정신이 날아가서 횟수를 제대로 세지도 못했다.

괴물 같은 체력으로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지금의 애쉬는 다시 고분고분해졌다. 애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자기가 괜찮지 않게 만들어 놓고서. 이 모든 것의 원흉…… 같은 생각이 문득 솟구치다가 멈추었다. 아무리 비유라 할지라도, 애쉬에게 흉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런 본인을 깨닫고서, 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미쳤구나.

애쉬는 대자로 뻗어 있는 탄에게로 꾸물거리며 다가왔다. 탄을 향해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탄은 피곤함에 젖어 눈을 감았으나, 제 이목구비를 훑는 시선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호흡이 가쁜 탄에 비해, 애쉬는 고른 숨소리를 냈다.

“너는 지치지도 않아? 아니다, 지칠 리가 없지…….”

규격 외 에스퍼가 지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섹스를 해야 하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직접 경험으로 알아 갈 자신은 없었다.

애쉬는 조용히 탄의 흉통 옆쪽에 이마를 기댄 채 몸을 웅크렸다. 저한테 안기려는 듯이 구는 몸짓에, 탄은 무심코 마음이 물렁물렁해졌다. 보호 본능이 들끓었다. 애쉬가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몇 분 전까지 전혀 애라고는 볼 수 없는 행위를 했음에도.

“……애쉬, 몸은 어때. 폭주는 완전히 멈춘 것 같은데.”

물론 멈춰도 한참 전에 멈추었을 것이다. 중간부터는 가이딩이 아니라, 그냥 섹스였음을 탄도 알고 있었다. 애쉬가 손을 꼬물거리며 탄의 가슴팍에 올려놓고서 웅얼거렸다.

“완전히……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타안…….”

“왜애.”

탄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끝만 길게 늘어뜨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애쉬를 바라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프기만 할까 봐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분명한 쾌락을 느꼈다. 발가락 끝이 구부러지고 허리가 들리고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피부는 작은 숨결만 스쳐도 홧홧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서른여섯 인생 처음으로 깨달았다. 극심한 쾌락은 몸을 망가뜨릴 수도 있구나. 아직도 몽롱했다.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는데, 육체만 돌아오고 정신은 그곳에 남은 기분이다.

뒤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 커다란 것이 쉴 새 없이 밀고 들어왔으니,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다. 애쉬 나름대로 힘을 조절하려고 애썼으나, 흥분한 동정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완급 조절을 좀 더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오늘도 하는 도중에 실시간으로 요령이 느는 게 보였다. 차분하게 알려 준다면, 애쉬는 금방 배울 것 같았다.

“나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받다가 기절했을걸…….”

탄이 힘 빠진 눈꺼풀을 닫은 채 중얼거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깊은 잠에 빠질 터였다. 태평하게 늘어져 잘 상황이 아니라,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애쉬의 폭주 때문에 의도치 않게 몇 시간을 광기에 사로잡혀 보냈다. 원래 사무소로 돌아오면 바삐 이것저것 알아보려 했는데. 지금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직은 미미한 능력치지만, 나즈가 에스퍼로 발현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가이딩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나즈의 상태를 잘 살펴야만 했다.

그리고 아혼의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냈다. 실험의 윤곽이 또렷해질수록, 아혼은 분노했다. 그녀의 화가 공장 천장을 뚫을 기세다. 시티 홀을 무너뜨리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명백한 반동죄 도모였다. 방법론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아혼은 하위 구역의 네트워크와 공장이라는 인력 자원을 지녔다. 우선은 이번 사건에 관해 하위 구역에 소문을 퍼뜨려 추가적인 피해자를 막을 계획이었다. 그렇게 시티 홀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둘씩 포섭해, 세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다.

탄은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현재 시티 홀 소속이었고, 관련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있다. 상위 구역의 생리를 더 잘 알기도 했다.

탄은 경비대원들 중에서도 포섭할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고와 라함을 떠올렸다. 우고는 라함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시티 홀에 의한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나즈가 참여했던 실험과 연관되어 있을까. 아니면 ‘루’들과?

어느 쪽이든, 경비대에도 이미 시티 홀이 침투하고 있었다. 침략은 은밀했으나, 언제나 흔적은 남기기 마련이다. 우고가 진실을 알아낸 것처럼. 앎은 변화를 불러온다.

탄은 63구역으로 발령받을 때만 해도 시티 홀과 혼자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기나긴 여정 끝에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래도 해야 한다. 더 많은 애쉬와 나즈가 생기지 않게끔.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수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탄은 의도적으로 비장함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어 애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부슬부슬한 것이 손끝에 잡히니 안정감이 든다. 피로에 찌들어 몽롱해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운동 강도를 좀 더 늘려야겠지……. 앞으로 싸울 일이 많아질지도 모르고. 아, 여기 와서 체력이 약해진 건가……. 곤란한데. 이러다가 다음에 할 땐 진짜 기절하는 거 아냐.”

혼잣말하듯이 내뱉은 탄의 웅얼거림에, 애쉬가 크게 움찔했다. 애쉬는 탄의 가슴에 올려놓았던 손을 파르르 떨었다. 지그시 탄을 바라보며 입술만 수어 번 달싹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쥐어 짜냈다.

“……다음에?”

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뭐?”

“다음에?”

“엉?”

힘 빠진 대답이 이어졌다.

“다, 다음에, 또…… 해요? 애쉬랑?”

그제야 탄은 자신이 자연스레 애쉬와의 다음 섹스를 상정한 채 말했단 걸 깨달았다. 흐물거리던 정신이 순간 빳빳하게 굳는다. 무겁게 처져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탄의 가슴팍 옆에 얼굴을 찰싹 붙인 채로 몸을 자꾸 움찔거렸다. 발끝으로는 초조하게 매트를 꾹꾹 문질렀다.

“아.”

탄은 스스로 듣기에도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애쉬가 한참 아래로 내려가 있느라, 평소와 눈높이가 반대였다. 커다란 눈이 긴장과 기대를 품은 채 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잘했어요? 또 할 수 있어요?”

“…….”

“탄…….”

탄은 축 늘어졌던 몸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괜스레 쓸어넘겼다.

“뭐, 처음치고는.”

탈진할 정도로 여러 번 절정에 달했다는 소리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기쁩니다…….”

“정진해.”

“네.”

“그런데, 그런데요. 탄.”

“어.”

“서, 성교를…… 다음에. 그건, 애쉬가 또 아플 때?”

“아프면 안 되지. 오늘처럼 폭주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해.”

“그러면…… 아프지도 않은데 성교를 하는 거면…….”

애쉬는 시선을 탄에게 고정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지만, 긴장감 때문에 속에서 몇 번이고 곱씹고 다듬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순수한 애정을 빚어 만든 목소리로 말했다.

“애쉬를…… 사랑해요?”

탄은 잠시 숨을 참았다. 이미 들어 본 적 있는 질문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하지만 목소리가 주는 울림은 이전과 달랐다. 좀 더 단단하고 적극적이었다. 기어코 언어로 구체화한 허락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나를 받아 주세요. 나를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나를 당신의 안에 들여 주세요. 애쉬의 눈이 그렇게 외치고 요구하고 있었다.

“저번에, 제가 다 나으면…… 대답해 준다고 했는데, 탄이…….”

이번에는 피해 갈 수 없다는 듯이, 소심하지만 예리하게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허, 탄이 참아 왔던 숨과 함께 헛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한데.”

탄의 대답에 애쉬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잘 짚었어.”

애쉬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잠시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사랑은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이 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단순하고 명료한 탄의 인생 계획이었다. 더는 고통스럽기 싫었으므로. 아니, 두려웠으므로.

하지만 지금은 애쉬의 눈동자 안에 담긴 기대를 꺾어 버리는 게 더 두렵다. 직선으로 올곧이 던져 준 사랑을 피하고, 바닥에 내팽개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을 떨 자신도 없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탄은 회피하는 게 이제 더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벅참을 감당하고자 했다. 이런 결심이 어떤 것에서 야기되는지 알았다.

탄은 제 인생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제 고집이 꺾여 버렸음을 인정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애쉬가 숨을 내쉬지 않고 있다. 빳빳하게 몸이 굳은 게 느껴졌다. 탄은 귀 끝이 달아올랐으나, 최대한 담담히 말하려 애썼다.

“사랑이지, 뭐. 아니고서야 이런 짓 못 해.”

애쉬는 제법 당돌하고 귀엽게(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물어 놓고서, 애쉬는 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사고가 잠시 정지된 듯했다.

“자부심을 가져. 이런 부끄러운 소리 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나 참, 어릴 때도 안 하던 짓을 이제…….”

휙. 잠자코 있던 애쉬가 긴 숨을 내쉬며 탄의 위로 올라탔다. 뚝. 동시에 애쉬의 눈동자에서 떨어진 커다란 물방울이 탄의 뺨을 적셨다.

“……울어?”

뚝. 뚝. 탄은 다시금 겹쳐진 맨몸의 감촉에 뒷덜미가 뜨거워졌다. 이토록 절절하게(적어도 탄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사랑 고백을 주고받고, 눈물 젖은 섹스까지 하는 건가. 너무 전형적이고 설익었지만 뜨거운 사랑 같다. 여태껏 탄이 제일 질색했던 유형의 연애다.

“나 진짜 더는 못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마음이 좋다. 온몸이 지끈거리고 당황스러웠지만,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울어도 소용없어. 자꾸 그렇게, 그, 어? 눈물이랑 얼굴로 승부 보려고 하면 곤란해.”

애쉬가 아직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탄은 제 발이 저려 중얼거렸다. 애쉬의 눈물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흐물흐물하게 녹고 뭉개졌다. 여기서 또 하면 엉덩이까지 뭉개질까 봐, 그건 무서웠지만.

도리도리. 다행히도 애쉬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키스만…….”

“어?”

“키스……합니다.”

“키스만? 뭐, 그건 좋지.”

“네. 키스할래요…….”

애쉬가 소심하게 눈치를 보며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제 의지로 움직였고, 그 움직임이 받아들여지리란 확신이 있었다. 애쉬는 턱을 틀어 탄에게로 다가왔다. 축축한 입술끼리 겹쳐지기 직전, 탄은 애쉬의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여태껏 본 모습 중에 지금이 제일 사랑스럽다고.

* * *

쾅쾅쾅.

한밤중 이발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에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예상치도 못한 방문객이다. 아예 공장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하여, 짐을 싸던 중이었다.

“마에.”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이 시간에 겐즈가 왜? 마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겐즈는 커다란 짐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야?”

겐즈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이발소 안으로 들어왔다.

“아, 아. 도망가야 해요. 지금 당장요. 계속 공장에만 붙어 있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당신이랑 이야기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겐즈는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반지하 이발소 안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시티 홀이 들이닥칠 겁니다.”

겐즈의 입술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마에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겐즈를 바라보았다. 친근하고 시시한 아저씨. 63구역의 유일한 레스토랑 주방장. 평범하고 넉살 좋던 얼굴이 지금은 예민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다 잡아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요. 그, 그, 말 못 하는 멍청한 녀석과 연결된 사람이라면 모두…….”

“……애쉬 말하는 거야?”

“네, 네. 안전한 곳으로 당장 피신합시다. 61구역 쪽에 미리 알아 둔 자리가 있어요. 도와줄 사람도 있고. 계획했던 것보다는 훨씬 누추하지만…… 살 만은 할 겁니다. 마에도 모아 놓은 돈이 조금은 있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 도망간다면.”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겐즈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에는 위험을 직감했다. 친숙한 얼굴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본능이 경고했다. 겐즈가 계속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안, 마에는 차근차근히 뒷걸음질 쳐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당신이랑 왜 도망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겐즈가 우뚝 멈추어 서더니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시티 홀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 녀석을 죽이겠다고 본청에서 사람을 보낸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벌어진 일도 알아챌지도 몰라요.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전부, 다 죽을 겁니다. 마에 당신도요!”

겐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에는 다급하고 거칠게 튀어나오는 말 사이에 녹아 있는 진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연결하려 애썼다.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최대한 침착한 어투로 마에가 말했다.

“여기서 벌어진 일이라니?”

“그, 그, 접선지요. 거기서 일어난 폭발 사건. 살아남은 실험체가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젠장! 마에. 도대체 거긴 왜 들어간 거예요? 제가 당신을 지키려고 수십 년 동안 무슨 짓을 했는데!”

마에가 현기증이 난 것처럼 일부러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뒷걸음질 쳐서 카운터로 다가가더니, 안쪽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 잠깐. 잠깐만.”

마에는 떨리는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자신에게 속삭였다. 침착해. 우선은 아무것도 모르는, 힘없는, 무지해진 할머니인 척해. 겐즈를 자극하지 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겐즈.”

겐즈는 성큼성큼 카운터로 다가왔다. 힘이 잔뜩 들어간 두 눈가가 간간이 꿈틀거렸다. 마에는 시선은 겐즈에게 고정한 채 팔을 아래로 내렸다. 카운터 안쪽 서랍에 비상용으로 숨겨 두었던 칼이 있다. 달칵. 몇 번의 더듬거림 끝에 서랍에서 간이 나이프를 꺼내 쥐고, 등 뒤에 손을 숨겼다.

겐즈는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팍을 들썩였다. 마에는 무해함을 연기하면서 등 뒤에서는 나이프를 스르륵 매만졌다. 살갗이 따갑다. 정신이 선명하게 든다. 다행히 칼날이 살아 있었다.

“겐즈 당신이 접선지에 대해서 어떻게 알지?”

“마에.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나에게는 중요해.”

탁. 겐즈는 카운터 책상 위를 두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짚었다. 상체를 마에 쪽으로 기울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동자에는 반쯤 물기가 고여 있었는데, 애처롭기보다는 무서워 보였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당신이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아는 거냐고 물었어.”

“마에.”

회유하려는 듯이 물러지는 음성. 꾸욱. 마에는 칼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당신, 시티 홀 사람이었어?”

카운터 책상을 짚은 겐즈의 팔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겐즈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시티 홀 사람이에요. 아닌 사람도 있답니까? 시민들은 모두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요. 설마 아직도 시티 홀에 반감이 있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너 리베라단에 대해 아는구나.”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할게요, 마에.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얼른 짐을 마저 싸요.”

“당신이 제대로 말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일어나지 않겠어.”

“정말 왜 이럽니까?”

쿵, 쿵. 겐즈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여러 번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마에의 귓가에 꽂혔다. 마에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름진 살갗은 물렁물렁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너무 오래 살았다. 혼자서만 너무 질기게 살아남았구나. 그래서 이런 꼴까지 보게 되고.

마에는 한숨을 삼키며 겐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악하고 욕심 많은 소년이었다. 그의 이기적인 성정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겐즈는 심부름 삯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친구의 것을 냉큼 훔친다거나, 적당한 거짓말로 친구를 따돌렸다. 좋은 정보는 절대로 타인과 공유하려고 들지 않았다. 철저히 본인의 이득만을 위해 움직였다.

생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성격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기심도 마에 앞에서만은 한풀 꺾였다.

그러나 마에는 그의 호의가 썩 달갑지 않았다. 이럴 필요 없다고 여러 번 거절했지만, 겐즈는 막무가내였다. 내내 겐즈가 조금은 불편했다. 서글서글한 얼굴 뒤편에 숨겨진 그의 욕심을 본능적으로 느껴서다. 그 욕망의 대상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

뒤늦게 겐즈가 결혼할 때는 속으로 안심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혼할 때는 불안을 느꼈다. 다시금 그가 저를 욕망할까 봐. 늘 그의 마음을 농담으로 치부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마에. 난 당신한테 내 모든 삶을 바쳤어요.”

마에는 겐즈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애써 사소한 척 넘겨 버리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읽어 냈다. 속이 울렁거린다. 저것을 사랑이나 순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래, 맞습니다. 나 시티 홀한테 돈 받고 일해요. 그게 어떻단 말이에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나도 내 양심을 죽인 겁니다. 시티 홀에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면서, 나라고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사회 기여도가 올라가고 돈 좀 받는다고 뭐……. 그건 다 부차적인 이유였어요. 마에,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였어. 당신을 위해 내가 더러워졌다고.”

마에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모든 동료 단원들이 하나둘씩 색출되어 죽어 나갈 때도, 저만은 멀쩡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랬구나.

진실이 숨구멍을 죈다.

내 목숨은 이 남자의 사랑 혹은 욕망에 빌붙어 있었구나.

마에가 입에 꾹 힘을 주었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제 숨결이 순간 역하게 느껴졌다.

“일평생 시티 홀에 충성을 바친다면, 당신만은 살려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 거지 같은 구역을 떠나지 못한 겁니다. 알겠어요? 온갖 더러운 짓이란 더러운 짓은 다 감당해 가면서, 내가…….”

겐즈는 울분에 찬 얼굴이었다. 마에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힘 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어?”

겐즈가 눈썹을 구겼다.

“그런 말 듣겠다고 한 일은 아니에요. 그냥 말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당신을 이만큼이나 사랑했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감격하고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

겐즈가 입술을 짓씹었다. 마에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분노도 놀라움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공허했다.

겐즈는 그 무심함이 공격처럼 느껴졌다. 마치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울컥, 감정이 치솟고 목소리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저를 향한 공격에 바짝 날을 세우듯이.

“내가 언제 당신한테 강요한 적 있어요? 왜,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나는 지금까지 당신 털끝 하나 건드린 적 없어!”

책상 위에 얹은 겐즈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마에는 오래전부터 겐즈의 이기심이 제 앞에서는 물러지고 꺾인다는 걸 잘 알았다. 그 이기심이 얼마나 깊고 추악했는지를 몰랐을 뿐.

“하지만 마에가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요. 억지로라도 데려가야만…….”

겐즈의 목소리가 분노로 파들거렸다. 마에는 중간에 끊어 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를 지킨답시고 무슨 정보를 팔았어? 시티 홀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던 단원들…… 늘 얼마 못 가서 발각당해 죽었지. 다들 무서워했어. 시티 홀이란 이렇게나 빈틈없고 강한 권력체구나.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있구나, 하고.”

“마에, 그만. 몇십 년 전 일이에요.”

“겐즈. 당신이 그들을 감시했어? 죽게 했어?”

“…….”

“이번에는 공장의 사람들과 그 어린 나즈까지. 당신이 꼬드기고 붙잡아 와서 죽이고, 시티 홀에 팔아넘기려고 했어?”

“필요한 실험입니다. 캐슬 시티가 더 강건해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그게 당신의 이념이야?”

“이념이고 뭐고, 난 그런 거 모릅니다. 당신 때문이었어. 당신이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다고!”

마에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겐즈를 응시했다.

“그래도 결국 지금은 마에를 택했잖아요! 당신이 다칠까 봐 내 목숨을 걸고 시티 홀을 배신했다고. 접선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혹시나 조사 중에 당신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할까 봐.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미안하다고 할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문제가 아니야! 본청에서 애쉬를 죽이러 온다고 했어요. 왜 갑자기 그놈을 제거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김에 63구역을 온통 들쑤시겠죠. 성공한 실험체가 있었다는 걸 알지도 모르고.”

성공한 실험체. 마에는 그 표현이 열두 살 나즈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듣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들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수록, 머릿속은 차분해졌다. 그간의 모든 의문점이 사라지고 논리가 일목요연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내 거짓말이 들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시티 홀에 잡혀가겠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자백할 때까지 얻어맞을 거라고요. 내가 그 꼴이 되면, 마에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알겠어요? 알아듣겠냐고.”

“……알아들었어.”

“그러니 일어나요. 실랑이하지 말고. 지금 도망가면 됩니다. 61구역에 연줄이 있어요. 평생 모은 돈을 다 바치고 신분 세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숨죽이고 같이 삽시다. 그쪽 사람들이 여기 일도 처리해 줄 겁니다.”

“처리?”

“여지는 남겨 두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형질이 발현된 실험체를 발견했다가는…….”

나즈를 제거하겠다는 거구나. 겐즈가 말끝을 흐렸으나, 마에는 그의 의중을 이해했다.

“내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면?”

“알아들었다면서요? 왜 또 원점입니까? 나한테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데?”

마에는 겐즈의 눈동자에서 대답을 읽었다. 그의 가장 큰 공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죽은 동료들을 위해 겐즈에게 복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겐즈를 완전히 무너뜨릴 방법.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겐즈,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야.”

마에는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혼자 남았다는 지독한 죄책감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이미 지친 지 오래였다. 남은 이들이 어른거렸으나, 곧 탄을 떠올렸다. 탄이 제 빈자리를 메워 주지 않을까.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힘으로 당신을 이길 수는 없겠지.”

여기서 겐즈를 죽이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요원하다. 마에는 제 몸이 늙었다는 걸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고관절이 아팠고, 어깨는 결렸다. 저보다 한참 어린 남자를 힘으로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목의 어느 부분을 찔러야 사람이 빠르게 죽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 그 칼 내려요.”

“하지만 당신을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 수는 있지.”

“그러지 못할 거 알아요. 그만하라고.”

“오지 마. 이대로 찌를 거야.”

네가 아니라 나를. 마에는 죽음 앞에서 기묘한 승리감과 평화를 느꼈다. 삶이 너무 지난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죽을 만큼 내가 싫어요?”

“당신이 싫은 게 아니야. 당신의 것이 되는 게 싫은 거지.”

“내 소유가 되어 달라고 한 적 있습니까? 그냥 살려 주려는 거잖아요. 지금껏 그래 왔듯이!”

“내가 살려 달라고 한 적은 있나?”

나는 늘 사는 게 힘들었어. 마에가 뒷말을 삼켰다. 잠시 눈을 꾹 감았다. 여나와 당시 어렸던 아혼이 떠올랐다. 삶이 아직은 좋았던 시절이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드러웠던 탄의 정수리도 기억났다. 아이의 머리에 코를 묻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주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그때는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이후 혼자만 살아남게 되면서, 의미를 잃어버렸다. 왜 나만 멀쩡할까, 영영 모를 듯한 궁금증이 마에를 괴롭혔다.

이제야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마에는 오랜만에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쉬고 싶었다. 영원한 휴식으로 갈 여정에 달콤한 복수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참으로 행운일 것이다.

* * *

해가 떴다. 하늘이 밝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이른 아침, 보안관 사무소에 다언의 연락이 도착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탄은 곧장 애쉬와 함께 이발소로 뛰어왔다.

“보안, 보안관님.”

기다리고 있던 다언이 손을 덜덜 떨며 탄에게로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마에가…….”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피비린내가 훅 새어 나왔다.

“……마에가 어떻게 됐다고?”

다언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비틀거리며 문 옆으로 비켜났다. 탄이 문을 손바닥으로 꾸욱 밀어젖히면서 애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 쪽으로 다가갈수록 불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을 잔뜩 적신 피 웅덩이. 막 경직이 시작된 듯 보이는 사지. 찢어진 목의 경동맥. 숨결이 완전히 빠져나간 육체. 그 얼굴이 익숙했다. 마에였다.

『사일런트 하울링』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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