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하울링
Silent Howling
3권
11. 따뜻한 피, 부드러운 손가락
이발소 안은 여러 울음소리가 뒤섞여 요란했다. 개중 가장 큰 소리는 아혼의 것이었다. 연락을 받고 뛰어온 아혼이 울부짖고 있다.
탄은 잠시 현장 밖으로 나왔다. 이발소 건물 옆 골목길로 들어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편두통이 일었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내내 힘을 주고 있던 턱이 아릿했다.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려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탄이 휙 고개를 돌렸다가 예민해진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이리 와.”
애쉬였다. 말도 없이 조용히 뒤를 따라온 모양이다. 탄이 손을 까딱거리자, 애쉬가 눈치를 살피며 다가왔다. 탄은 말없이 커다란 몸뚱이를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두툼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과 양감. 슬픈 안정감을 주었다.
“탄…….”
가만히 안겨 있던 애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슬퍼요?”
“응.”
“돕고 싶습니다.”
“이렇게 있기만 해도 도움이 돼.”
탄은 아혼처럼 목 놓아 울지 못했다. 거의 평생을 그렇게 훈련받았다. 가장 아끼는 친구의 시체를 옆에 두고서도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눈물은 머릿속을 흐물흐물하게 만드니까.
마에가 죽었다.
그 사실에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탄은 마에의 시체를 보자마자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사인부터 확인했다. 기계적으로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자신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최초 발견자인 다언은 충격에 잠겨 있었다. 일평생 마에와 함께 63구역에서 살아왔던 아혼은 오열했다. 탄은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한다고.
넌 저 사람들처럼 마에와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았잖아. 스스로 다그쳤다.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숨을 참았다. 차오르는 습기를 억눌렀다.
잠깐이나마 밖에 나와 애쉬를 끌어안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탄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정돈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다시 돌아가자.”
“탄…….”
“괜찮아.”
탄은 힘주어 말을 내뱉으며 손바닥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애쉬는 물끄러미 탄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지, 않습니다.”
“…….”
“모두 울어요. 탄도…… 울고 싶습니다.”
난 됐다고 아니라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탄이 멈칫했다. 투박한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 때문이다. 탄이 고개를 스르륵 떨구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내가 울어도 되는 건가. 물러지는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깨달았다. 애쉬 앞에서만은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은 거라고.
탄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둘이 있을 때 울게.”
“지금?”
“지금은 다시 들어가야지. 이따가.”
애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탄은 마음이 정돈되는 걸 느꼈다. 울음을 약속하는, 어찌 보면 기묘하고 유치한 일을 했을 뿐인데, 이미 기분은 반쯤 운 것 같았다. 해소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이딩을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탄은 평생 느껴 보지 못할 감각을 어렴풋이 상상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은 탄은 빠르게 이발소 안으로 돌아왔다. 아혼은 눈이 시뻘게진 채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오열은 잦아들었으나, 진정된 모습은 아니었다. 탄이 옆으로 다가가자 아혼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이럴 리 없어. 마에가 왜 자살을 해? 말도 안 되잖아. 분명히 어젯밤까지만 해도…….”
칼날의 방향과 시신에 남은 상처만 보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마에가 직접 칼로 제 목을 찌른 것이다.
마에의 시신 위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탄은 그 옆에 조심스레 쪼그려 앉아 천을 살짝 들쳤다. 몸에 시반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경직 상태를 보니 사후 서너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전투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이 하나둘씩 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뮤턴트 상대법 외에도 전투와 죽음에 관련한 것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수업에 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런 지식은 마에가 훨씬 더 잘 알 텐데. 입 속이 텁텁해진다.
혼자 살아남아 힘들었다던 마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갑작스레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혼과 함께 미래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탄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분명히 그녀의 몸이 무언가 말해 줄 것이다. 그녀의 목 부근을 다시 살폈다. 죽음의 상처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목 빗근 위 경동맥. 탄이 과폭주한 우고의 숨을 끊어 줄 때 찔렀던 바로 그 부위였다. 빳빳하게 굳은 시체가 우고와 겹쳐 보였다. 호흡을 재빨리 진정시켰다.
탄이 밖에서 숨을 돌리던 사이, 피에 물들었던 마에의 피부가 반쯤 닦여 있었다. 자상 주변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상처를 훑는 탄의 시선이 옷깃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손자국이 있었다. 울혈처럼 죽은 이의 살갗에 아로새겨져 있다. 누군가 칼날이 파고든 곳을 막으려 애쓴 듯이. 목덜미를 강하게 움켜잡은 것 같았다.
마에의 숨이 끊어질 때,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아.”
탄이 작게 탄식처럼 숨을 내뱉었다. 마에의 시신에서 타인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이 재빠르게 회전했다.
떳떳한 자라면, 최초 발견자인 다언처럼 어디에든 신고했을 테다. 여기서 사라졌다는 것은 마에의 죽음에 찝찝하게 관련되었다는 뜻. 그를 찾아야 했다.
경동맥이 잘리면 피가 솟구친다. 마에의 목덜미를 붙잡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분명히 옷에 피가 묻었을 것이다.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 서너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도망자는 그사이에 피 묻은 옷을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63구역 가정집에는 개인 세탁실이 없었다. 공용 세탁소를 이용하는데, 그곳에 피 묻은 옷을 들고 가지는 못했을 터. 손빨래도 불가능했다. 해가 뜨기 전에 가정집 수도관은 작동하지 않았다. 밤부터 아침까지는 단수 기간이었다.
그렇다면 옷을 버리거나 태우는 방법밖에는 없다. 옷은 생각보다 금방 타지 않는다. 싸구려 합성 소재로 만든 63구역의 옷은 더더욱 그렇다. 애써 불을 붙였다고 하여도 연기가 엄청나게 난다. 실내에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실외에서 태웠다면, 누군가 하나쯤은 그 자욱한 연기를 목격했을 것이다. 63구역에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옷을 처리할 만한 널찍한 공터가 없었다.
그래서 탄은 추론했다. 도망자가 멍청하다면 피 묻은 옷을 쓰레기통에 그냥 버렸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조심성이 있다면 아직 본인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 * *
애쉬가 앞장서서 빠르게 달려나간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탄과의 거리를 살폈다. 탄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짓했다. 더 빨리, 서두르라고.
가설을 세우는 것은 탄의 몫이었고, 그 가설을 증명하는 일에는 애쉬가 나섰다. 애쉬가 이능력을 온통 후각에 집중시켜, 마에의 피 냄새를 쫓았다.
요즘 이능력을 끌어 쓸 때면 애쉬의 눈동자가 더 선명한 초록으로 변했다. 무작정 후각에 의존하여 달려 나가는 애쉬의 뒤에 탄이 바짝 따라붙었다.
탁. 쉼 없이 움직이던 애쉬의 다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탄이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손등으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아 냈다.
“애쉬?”
애쉬가 멈추어서 멍하니 바라보는 곳은, 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다크]
매일같이 그들이 식사를 해결했던 레스토랑 간판이 앞에 있었다.
식당 문은 굳게 닫혔고, 그 위에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종이 쪼가리만이 붙어 있었다.
[영업 종료]
* * *
겐즈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수중에 남은 돈을 계산했다.
“윽…….”
손톱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역한 철분의 맛. 손을 수어 번 벅벅 닦았으나, 핏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걸까. 겐즈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우선은 62구역으로 넘어와서 허름한 여관에 몸을 숨겼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마에의 숨이 멎는 걸 확인하고서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누가 봐도 미친놈 같은 상태로 검문소에 도착했다.
다른 구역으로 넘어가려면, 검문 후 통행료를 내야만 했다. 하위 구역 거주민들이 감당하기엔 높은 가격. 현행 통행 제도는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구역에 묶어 두는 역할을 했다.
겐즈는 오늘을 위해 돈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검문관은 겐즈의 수상한 꼴에 뜨뜻미지근하게 굴었다. 웃돈을 달라는 암묵적 신호였다. 돈을 한참 얹어 주니, 그제야 미적거리지 않고 62구역으로 들어가게 해 주었다.
여기서 바로 61구역으로 넘어가려 했는데, 이미 지출이 너무 컸다. 심장이 뛰고 어지러워 우선 여관으로 향했다. 가장 구석진 방을 달라고 한 다음, 매트 끄트머리에 앉아서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마에가 죽었다니. 그것도 보란 듯이. 내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던 마에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윙윙댔다.
<이제야 살아 있는 것 같아.>
도망치는 내내 수없이 곱씹어 봤지만,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다. 어째서 죽음이 삶으로 느껴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내가 어떤 짓까지 했는데, 내가…….”
억울했다. 겐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웅얼거렸다.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 것에 울분을 느끼는 시절은 옛적에 지났다. 그저 옆에서 마에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더 따져 묻고 싶었으나, 답해 줄 유일한 사람이 없어졌다. 이것은 고문이며 형벌이다. 마에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짓이었다.
겐즈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집착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보안관이 나타나면서 모든 게 틀어지고, 이런 사달까지 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자꾸 마에의 이발소에 들락거리는 보안관이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그가 마에를 언젠가는 망칠 줄 알았다.
그게 걱정돼서 이발소에 도청 장치까지 설치해 두었는데. 결국은 막지 못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접선지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났던 날. 지지직. 겐즈는 주방 구석에서 잡음이 섞여 나오는 싸구려 도청 장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에가 실종된 나즈를 찾는 일에 끼어들려는 걸 알고 절망했다. 다급하게 무두장이 아들놈을 접선지 건물에 들여보냈다. 나즈를 다른 곳에 옮길 생각이었다. 그곳에 이미 보안관이 침입해 있을 줄은 몰랐다.
홀로그램 워치를 통해 현장의 대화가 전달되었다. 보안관에게 모든 걸 들킨 상황. 겐즈는 수습할 방법은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저놈을 죽여 버려야 한다.
자폭 모드를 발동시켰다. 최선의 해결책이라 믿었다. 그런데 보안관은 죽지 않았다. 유일한 성공 실험체인 나즈마저 그가 데려가 버렸다.
“멍청한 새끼…….”
겐즈가 중얼거렸다.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생각하겠지? 멍청한 보안관 새끼.
시티 홀의 계획을 방해해 봤자 돌아오는 건 죽음뿐인데. 같잖은 정의 놀음에 마에까지 위험에 빠졌고, 이제는 그녀를 영영 잃었다.
겐즈의 정신은 병들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병세에 가까운 감정이 시작된 계기를 찾는 것은 이제 무의미했다. 시작은 흐려지고, 이어진 과정에서 자신이 희생했던 것만이 뇌리에 남았다.
내가 그 보안관처럼 잘났다면 나를 사랑해 줬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겐즈는 의미 없는 상상을 해 보았다. 비참하고 억울했다.
그래도 나만큼 마에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어. 내가 그녀를 제일 사랑했어. 모든 걸 희생했어. 그런데 왜.
겐즈가 마른 피부에 흐르는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마에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병든 여자. 당신은 병들었어…….”
도리어 죽은 자를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리워한다.
마에를 잊으려 억지로 결혼했던 적도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마에만이 유일한 사랑이라고 굳게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그녀가 없어지니 삶이 완전히 무너진 기분이었다.
나의 희생을 상대는 원하지 않았다. 나의 희생은 무례였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겐즈의 뇌는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 외곬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겐즈가 바들바들 떨면서 품 안을 뒤졌다. 주사기와 용액이 담긴 병 몇 개가 나왔다. 실험체들에게 투여했던 약물이었다.
대기병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조건을 충족하여도, 죽지 않을 확률은 고작 30%.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 자에게는 독극물에 가까웠다.
겐즈가 떨리는 손으로 주사기에 용액을 채웠다. 이걸 몸에 꽂아 넣으면, 아마도 죽을 것이다.
죽음이 코앞에 있다. 주사기 바늘을 팔뚝에 갖다 대었다. 찌르기만 하면 된다. 마에를 따라갈 수 있다. 어차피 사는 게 의미도 없었다.
마에 때문에 살았던 거잖아, 나는.
겐즈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사기를 쥔 손은 한참 덜덜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나서 주사기를 놓칠 것 같았다.
죽으면 되잖아. 네가 원했던 것은 마에고, 이제 그건 사라졌잖아.
머릿속에서 수십 년 동안 그를 지탱해 온 감정이 속삭였다. 그런데 도통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내가…….”
겐즈가 결국 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왜 죽어야…….”
울음과 함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본심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죽고 싶지는 않아. 그 여자는 날 떠났어. 완전히 나를 버렸어. 그런 여자 때문에 내가 왜 죽어야 하지?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사랑은 자기애와 다름없다. 마에가 아니라, 겐즈는 마에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희생적인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 묻어 왔던 본심이 선명해졌다.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숴 버리고, 아무나 탓하고 싶었다. 자신을 무시한 마에를, 기어코 그렇게 죽어 버린 마에를.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보안관을. 시티 홀의 소유물인 주제에 63구역으로 와서 이곳을 헤집어 놓은 애쉬까지.
쿵. 쿵. 겐즈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매트에 머리를 박았다. 딱딱한 벽에는 부딪칠 자신이 없었다.
쿵! 그때 누군가 몸으로 힘껏 방문을 밀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겐즈가 깜짝 놀라 동작을 멈추고 충혈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시티 홀인가? 벌써 날 따라왔나? 내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쿵! 또다시 문이 거칠게 흔들렸다. 겐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았다. 이 망할 싸구려 여관은 변변한 옷장 하나 없었다.
쾅! 세 번의 시도 끝에 낡은 합성 목재의 이음새가 틀어졌다. 문을 반쯤 부수고 들어온 자는, 겐즈가 저주를 퍼붓고 있던 대상이었다.
검은 머리 보안관. 여나의 아들.
겐즈는 여나가 살아 있을 때 그녀에게 늘 패배감을 느꼈다. 여나와 마에의 유대감은 특별했고, 그사이에 겐즈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 여자의 아들. 그 여자를 닮은 아들. 혐오스럽다.
“여기 있네. 나와.”
고압적으로 말을 내뱉는 얼굴이 증오스럽다.
“으, 으으……!”
겐즈가 충동적으로 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마침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이 약을 저놈에게 꽂아 버리자. 그래, 내가 죽는 게 아니라 저 원흉을 죽이면 되잖아.
탄은 저에게 달려드는 겐즈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비쩍 마르고 균형도 맞지 않는 몸으로 덤비다니. 웃기지도 않는다.
탄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겐즈를 회피하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겐즈가 무력하게 철퍼덕 넘어지며 주사기를 놓쳤다.
탄은 허공에 떠오른 주사기를 잽싸게 낚아채 잡고서, 제 품에 넣었다. 모든 시도가 무산된 겐즈는 무력감을 느꼈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
“왜 당신 식당에서 마에의 피가 묻은 셔츠가 나왔는지 싹 다 설명하고 나서 죽어.”
탄은 겐즈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아 들어 올렸다. 겐즈가 시뻘게진 눈으로 탄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 썩은 뮤턴트 같은 보안관…….”
평소 귀한 단골에게 깍듯하던 겐즈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네 말대로 내가 보안관이라 가능했지. 언제 잘릴지 모르겠지만, 아직 시티 홀 소속이거든. 너랑 다르게 검문소를 자유롭게 드나들고 명부 확인도 할 수 있다는 거야.”
겐즈가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많이 급했나 봐. 흔적을 이리저리 흘렸더라고.”
“…….”
“마에가 자살한 게 충격이 컸나? 당신이 죽인 것도 아닌데? 왜 도망쳤지?”
“난, 나는…….”
“주사기는 시티 홀 제품 같던데. 63구역 주방장께서 이런 걸 들고 다닐 이유가 뭐가 있을까?”
탄의 말투는 흘려들으면 나긋하고 여유로웠지만, 낯빛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주방에서 나온 도청 장치는 또 뭘까?”
꽈악. 탄이 겐즈의 멱살을 더 억세게 잡아 비틀었다.
“네놈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대충 그런 생각 하면서 왔거든.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서 대화 좀 해 보자.”
“꺼, 꺼져어…….”
겐즈가 악에 받친 얼굴로 덜덜 떨었다.
“다, 다 네 잘못이잖아. 왜 겁도 없이 시티 홀을 들쑤셔서. 마에까지 죽게 만들고, 왜. 이제, 이제 본청에서 사람이 올 거야. 우리는 다 끝이라고. 네가 달고 다니던, 그, 그 자식도…….”
“뭐?”
애쉬 이야기가 나오자, 탄의 눈가가 구겨졌다. 목덜미를 쥔 손의 힘이 약해졌다.
그사이 겐즈는 숨을 밭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안관뿐이었다. 늘 붙어 다니던 애쉬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왔구나. 그랬을 것이다. 급하게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정체 모를 수상한 녀석을 데리고 다닐 순 없으니.
“나랑 이럴 시간 없을걸. 너 그 벙어리를 꽤 아끼는 것 같던데.”
“한 번만 더 벙어리라고 해 봐. 혀 뜯기고 싶으면.”
“……그, 그 자식이 뭔지는 몰라도, 시티 홀에서 사람이 온댔어. 그놈을 죽이러 온다고 했다고. 지금쯤 63구역에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겐즈는 탄의 얼굴이 싸하게 굳는 걸 바라보았다. 묘한 쾌감이 들었다. 보안관을 흔들고 엿 먹일 수 있다니. 어차피 다 망한 판이다. 보안관의 기분이라도 망쳐 버리고 싶었다.
평생을 기회주의자처럼 영악하게 살아온 겐즈는 직감으로 깨달았다. 보안관의 약점은, 그 잿빛 머리 덩치라는 걸.
“넌 주워서는 안 될 것을 주운 거야. 벙어…… 그놈은 애초에 시티 홀 소유였어.”
“누가 그래?”
탄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시, 시티 홀이.”
“좆 까라 그래. 걘 내 거야.”
“뭐라 하든 시티 홀이 나선 이상 아무 소용 없어. 그들은 모든 걸 통제하지. 거스르려는 게 어리석은 거야. 우리를 굴복시킬 방법을 늘 알고 있다고! 아무리 힘이 세거나 의지가 굳건한 사람이더라도 결국은, 네 엄마처럼…… 윽!”
탄이 잠자코 듣고 있다가 예고 없이 주먹을 날렸다. 퍽. 겐즈의 얼굴에 직격으로 주먹이 꽂혔다. 곧바로 입 안쪽이 터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난 보통 주먹으로 굴복시키는 편인데.”
겐즈가 쿨럭거리면서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이런 게 취향이면 계속 지껄이고. 아니면 조용히 나 따라 63구역으로 가고.”
한 대 얻어맞자 겐즈가 입술만 우물거릴 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생각보다 탄의 주먹이 더 강했다. 골이 울리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탄은 겐즈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고서 등을 확 손바닥으로 밀었다.
“빨리 걸어. 이 뮤턴트랑 붙어먹을 새끼야.”
“아, 아파…….”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겐즈가 탄에게 떠밀려 마지못해 걸어갔다. 탄은 평정심을 유지한 얼굴로 능숙하게 겐즈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약해 보여서는 안 되니. 제 감정을 통제하려 애썼다.
애쉬. 애쉬가 위험할지도 몰라. 그 문장이 온몸에 선사하는 공포를 튕겨 내야만 했다. 63구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 * *
탁, 달칵. 애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공장 1층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열심히 사제 무기를 조립하는 중이었다. 옆에 앉은 다언도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에의 시신은 공장 사람들이 수습해 두었다. 내일 화장을 할 것이다.
공장 내부는 경직되어 있었다. 시티 홀의 의도적인 방치 속에서 이어지던 평화가 깨지는 중이라는 걸 모두 직감한 탓이다.
여러 사람이 죽었다. 공장의 리더인 아혼은 사제 무기 제작에 온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 벌어지고 말 거다.
다언은 눈물을 그쳤다. 비록 이미 두 눈은 퉁퉁 부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내일 장례에서 울 기력도 남겨 두어야 했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있다가, 다언이 무심코 애쉬에게 말을 던졌다.
“너 이제 언제든 말할 수 있는 거야?”
끄덕끄덕.
“아하.”
대화가 어색하게 끊겼다. 다언은 혀로 입술을 축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혼에게 대충 이야기 들었어.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너 에스퍼 같은 거라며?”
애쉬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다언을 바라보았다.
“눈동자 색도 예전이랑 다르게 좀 밝아졌네. 탁한 기가 줄어들었어.”
“그렇구나.”
“에스퍼로 살면 무슨 기분이야?”
“잘 몰라.”
애쉬는 일정한 톤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다언은 손을 우뚝 멈춘 채로 중얼거렸다.
“네 목소리는 정말 적응 안 된다.”
“어째서?”
“음. 몰라. 너무 남자 같아.”
“애쉬는 남자야.”
“누가 모르니? 무튼. 내 동생이 에스퍼가 됐잖아. 아마도.”
끄덕끄덕.
“그러면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 거지? 가이딩 오래 안 받으면 힘들대. 너는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아픈 적 없었어?”
“괜찮았어. 그땐 에스퍼 아니야.”
“무슨 소리지.”
“탄 만나고 진짜 에스퍼 됐어.”
“아, 그래.”
다언은 애쉬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냥 넘겼다. 어차피 그녀에게 중요한 본론은 이것이 아니었다.
“내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왜?”
애쉬는 시선은 다언에게 고정한 채로도 손은 쉬지 않고 무기 부품을 조립하고 있었다. 탁. 달칵.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안관님이 아직은 형질이 약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보내야 하나? ……경비대로?”
“나는 잘 몰라. 탄이 알아.”
“그러겠지. 큰일이네. 나도 아무것도 몰라.”
다언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요 몇 주간 너무 많은 게 변화했다. 하지만 그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형질을 보유하면 무슨 느낌이 드는지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몰라. 하나도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내가 언니인데.”
애쉬가 조립을 잠시 멈추고 온전히 다언에게 집중했다. 잠깐 속에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즈 강해.”
다언이 울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어려. 강하지 않아.”
“강해져.”
덤덤하지만 확신에 찬 어투였다. 다언은 쟤가 뭘 알면서 대답하는 건가 의심스러우면서도, 기이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애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좋은, 좋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그러면 강해진다고?”
“응. 사랑.”
“사랑? 그래, 나는 나즈를 사랑하지. 그리고…….”
마에도 사랑해. 나는 내 사람들을 사랑해. 나는 사랑하지 않아도, 그들과 함께인 내 삶은 사랑해. 다언이 뒷말은 안으로 삼켰다.
마에의 죽음을 곱씹지 않으려고 애썼다. 잔인하게도 산 사람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에가 죽었어도. 아니, 마에가 죽었기에, 더 부지런히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다언이 머리를 살짝 좌우로 털어 내며 화제를 돌렸다.
“애쉬. 그러면 너는 누구를 사랑해? 그래서 강해졌어?”
애쉬가 멈칫했다.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그맣게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안.”
“못 들었어. 뭐라고?”
애쉬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예 제 손을 맞잡고서 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탄…….”
“허.”
다언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서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애쉬와 탄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이야 눈치챘지만, 직접 말로 들을 줄은 몰랐다. 애쉬가 갑자기 얼굴이 벌게져서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적응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표정 변화가 극심한 애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어릴 때부터.”
“어릴 때, 언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보안관님도 널 좋아한대?”
애쉬가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눈동자가 데구루루 이리저리 굴러갔다. 엄지손톱으로 반대쪽 검지를 득득 긁었다. 분명한 답을 들었는데도, 어쩐지 머뭇거리게 된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진짜?”
“으응.”
“둘이 사귀어?”
애쉬가 힐끗 다언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애인 사이냐고.”
“애인…….”
애쉬가 곰곰이 생각했다. 애인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탄에게 그런 관계라고 확정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애초에 애인의 정의도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서로 애정을 나누며 깊이 사랑하는 사람……. 잘 모르겠다.
사랑하면 다 애인인 걸까. 다언과 나즈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애인이 아니라 자매였다. 그렇다면 탄과 자신도 애인이 아닐 수 있었다.
애쉬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탄에게 물어볼걸. 돌아오면 물어봐야겠다. 당혹감으로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한층 자신감이 옅어진 음성으로 답했다.
“잘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사랑한다며? 뭐, 비밀 연애 같은 건가?”
“비밀 연애?”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왠지 그럴 것 같기는 해.”
애쉬가 이번에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몰라…….”
이것도 모른다. 나는 왜 이렇게 모르지. 애쉬가 자신감을 잃었다. 탄에게 물어볼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머리통 옆을 퉁 내리쳤다. 조금 울적해져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
“청소.”
“그래. 이건 내가 마저 할게.”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청소가 제일이었다. 애쉬의 습관을 아는 다언은 그를 순순히 보내 주었다. 애쉬는 봉투를 들고 다니면서, 공장 1층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구석구석 나뒹구는 쓰레기를 주웠다.
봉투가 묵직해지자 그걸 번쩍 어깨에 메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쓰레기를 소각장으로 보내기 전에 임시로 모아 두는 곳이 있었다. 애쉬는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다언에게서 들은 단어를 강박적으로 생각했다.
애인. 비밀 연애. 애인. 비밀 연애…….
툭. 투두둑. 쓰레기를 버렸으나, 기분이 말끔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탄은 중요한 일을 하러 다른 구역에 가 있었다. 금방 온다고 했다. 잘 기다릴 줄 알았는데, 불안감이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는 탄과 멀리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초조해하지 마. 금방 올 거야. 그런다고 했어. 애쉬가 스스로 달랬다. 탄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보고 싶어도 얌전하게 참아야 한다. 우선은 탄이 아직 울지 못했으니까, 둘이 있을 때 눈물 흘리는 걸 지켜본 다음, 애인이랑 비밀 연애에 관해서도 물어봐야지.
애쉬는 쓰레기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는 계획을 차근차근히 세우며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애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탄 생각에 너무 깊이 빠지는 바람에,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나긋한 인상의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공장이랑 거래가 있어서 잠시 들렀는데. 식당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길 안내 좀 해 줄래요?”
애쉬가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낯설고 상냥한 이방인인 척하는 남자. 하지만 애쉬는 그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으므로.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루. 침묵을 지켜야지.>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지나간다.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루.>
그는 선생이었다.
애쉬는 뒷걸음질 치지 않으려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시야가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선생은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너무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요.”
선생의 상냥한 말씨와 웃음을 보고, 애쉬는 깨달았다.
이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 힘과 기억이 되돌아온 걸 모른다. 내 머릿속 칩이 여전히 멀쩡히 작동한다고 믿고 있다.
애쉬도 기억 제어 칩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다가 기억을 되찾았는지도. 접선지에서 입은 피해와 폭주 등이 영향을 끼쳤겠거니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선생과 아버지는 도통 무언가를 자세히 알려 주는 법이 없었다.
“혹시 부담스러우신가요? 바쁘십니까?”
회유하려는 자의 얼굴이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무해한 척, 다정한 척, 그 무엇도 잘못되지 않은 척. 유들유들한 몸짓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애쉬는 이 모든 게 홀로그램 연극처럼 느껴졌다. 정녕 그렇다면…… 자신도 연극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리도리. 순진한 멍청이를 연기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선생은 조심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례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저…… 혹시 말을 못 하시는 건가요?”
끄덕끄덕. 애쉬는 고개를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위선자.
“실례했네요.”
모든 걸 다 알면서. 내 입을 막은 건 당신이었잖아요.
애쉬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금세라도 선생에게 말을 쏟아 내고 싶었다.
당신의 가르침은 틀렸어요. 탄이 그랬어요. 선생님과 아버지는 날 교육한 게 아니라고 학대한 거라고.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떴다. 탄의 음성을 곱씹었다. 침묵을 지키지 않아도 돼. 욕망을 가져도 돼. 넌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선생은 혼잣말하듯이 속삭이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스윽 꽂았다. 사소하고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애쉬는 그의 손짓을 끈질기게 눈으로 따라갔다. 기시감이 드는 탓이다. 선생은 ‘학교’에서도 종종 저랬다. 이제는 학교란 이름을 빌린 거대한 실험장이었다는 걸 안다.
선생은 자주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쨌더라? 대개 명령조의 말을 내뱉었다. 애쉬는 그때마다 자신이 선생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는 걸 기억했다. 거부했던 적은 드물었다. 탄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주머니 안에서 선생의 손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안에 담긴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는 듯했다.
“날 따라오세요.”
선생은 나지막이 말하며 애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애쉬는 멀거니 선생의 시선을 받아 냈다. 선생이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그마한 표정 변화였지만, 그가 당황했음이 느껴졌다.
“따라오라니까.”
선생이 다시 한번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애쉬는 서 있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무던히 애썼고, 성공했다.
차분한 겉모습과 달리, 애쉬의 심장은 빠르게 펄떡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수없이 들어 왔던 명령의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다리 근육이 움찔하며 그를 향해 다가가려 했으나, 가까스로 멈추었다. 애쉬는 그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다.
선생의 얼굴에 스며 있던 가식적인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는 이상함을 직감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스르륵.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혁대에는 레이저 총이 꽂혀 있었다. 여차하면 총을 꺼낼 생각이었다. 외진 장소로 데려가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황은 애초 계획에서 틀어졌다.
애쉬의 뇌에는 두 개의 칩이 박혀 있었다. 하나는 최근에 삽입된 기억 제어 칩이고, 나머지 하나는 실험체라면 모두 투입받는 칩이었다. 실험 명칭을 따서 오프 리쉬 칩이라고 불렸다. 이것으로 시티 홀은 실험체를 원활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들은 편도체의 기저외측핵에 다다라 대뇌피질로 투사된다. 그에 따라 인간은 감정을 느낀다.
편도체에 삽입된 ‘오프 리쉬 칩’은 감각 정보를 인위적으로 오염시킨다. 특정 상황에서 실험체가 특정 감정만 강렬하게 느끼도록 의도하고, 그걸 수없이 반복한다.
점점 실험체는 정보 값이 정해진 로봇처럼 다루기가 쉬워진다.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규칙에 어긋난 짓을 할 때마다 엄청난 불안과 공포를 느끼다 보면, 실험체는 저절로 규칙 속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 선생 앞에서는 공격성이 극도로 저하되며, 언제나 평온함을 느낀다. 비록 선생이 주먹을 휘두를지라도, 그것을 당연한 행위라 인식한다.
선생과 마주할 때는 공손하게. 그들은 언제나 옳다. 애쉬가 성장 과정 내내 몸에 익힌 정보였다. 더는 머릿속 칩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데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선생님 말을 들어야지.”
선생은 반복적으로 주입한 세뇌의 언어를 속삭였다. 기억 제어 때문에 세뇌 작용이 원활하지 않은 건가. 몇 번 세뇌어를 반복하면, 실험체가 굴복하고 저를 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셔.”
애쉬가 식은땀 나는 손을 꽉 주먹 쥐었다. 둘 사이에 잠시간 긴장 서린 침묵이 흘렀다.
선생은 여유로움을 가장했으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더러운 쓰레기 구역까지 오게 한 눈앞의 실험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릴 때는 모든 수치가 최상이었던 놈이다. 그런데 성장 촉진제가 문제였던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세뇌가 옅어지고 형질 수치는 떨어져 갔다.
1년 전에 완전히 제거했어야 했는데, 그때 폴이 변덕을 부렸다. 이번에야말로 실험체를 폐기하라고 명하고서는, 혹시나 이상 행동을 보일 시 데이터값 수집을 위해 웬만하면 생포하라고 했다.
선생은 애쉬의 연둣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조금 전보다 어쩐지 눈동자 색이 선명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널 도와주러 온 사람이야. 도태되지 않게끔.”
애쉬는 숨을 꾹 참았다. 선생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달콤하게 들렸다. 머릿속 구석 어딘가에서는 그에게 다가가라고 속삭인다. 그럴 때마다 의식적으로 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아니야.
“이리 와.”
아니야. 저 사람은 나를 위하지 않아.
“돌아가야지. 네가 속한 곳으로.”
나는 물건이 아니야. 나는 소유물이 아니야. 나는 나만의 생각을 할 수 있어.
애쉬가 두 팔을 부르르 떨면서 쿵 작게 발을 굴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선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어코 손에 레이저 총을 쥐었다.
나는 욕망해. 탄을 사랑해. 나는 탄의 애인이 되고 싶어. 나는…….
“루. 이리 오라니까.”
애쉬의 눈두덩이 움찔거렸다. 선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루.”
“나…… 나는…….”
애쉬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얼굴의 미세 근육이 파들파들 떨리고,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나는…… 루가 아니야.”
드디어 낮게 잠긴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선생은 몸을 덮치는 위협감에 빠르게 레이저 총을 애쉬에게 조준했다. 실탄 총과 다르게, 저소음으로 빠르게 인간의 살갗을 녹이는 무기였다.
총구에서 형광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려 한다. 애쉬는 그 즉시 발을 디뎌 움직였다. 머릿속으로는 단 한 가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읊었다.
나는 루가 아니야. 나는 루가 아니야. 나는 루가 아니야.
* * *
쿵! 탄은 공장 바닥에 겐즈를 내팽개쳤다.
“알아서 결박해 둬.”
겐즈를 끌고 다니느라 힘쓴 팔뚝이 욱신거렸다. 63구역으로 오는 동안에 애써 유지하던 차분한 표정이 조금씩 흔들렸다.
이곳에서 구역간 이동이 자유로운 사람은 보안관인 탄뿐. 겐즈를 빠르게 붙잡아 오기 위해서는 탄 혼자서 움직이는 게 유리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딱 한나절 동안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에 별일이 터지지는 않겠지. 불안감을 억누르려 했지만, 사실은 겐즈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시티 홀에서 애쉬를 죽이려 한다. 애쉬가 위험하다.
탄은 앞머리를 초조하게 쓸어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쉬는 어디 있지?”
“저녁 이후로는 못 봤는데…….”
“그런가? 아까 지나간 것 같은데.”
공장 분위기가 영 어수선했다. 밤의 폐발전소 공장은 어두컴컴했다. 야간 경비를 맡은 이들이 들고 다니는 간이 램프가 광원의 전부였다. 끼익. 불법 증축된 건물 골자는 바람에 종종 신음했다.
탄이 허리춤에 차 놓았던 전등을 꺼내 시야를 밝혔다. 그때 옆에서 아혼의 수족 하나가 다가왔다. 카머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였다. 수더분하게 생겼지만, 힘을 잘 쓰기로는 공장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보안관님. 이리로 좀 오셔야겠습니다.”
카머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했다. 다른 이들이 겐즈를 단단히 결박하는 사이, 탄이 카머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야.”
“아혼이 보안관님 돌아오면 바로 모시라고 했어요. 아까 오후에 일이 좀 있었습니다. 공장 분위기가 더 어수선해질까 봐, 우선은 조용히 처리 중입니다.”
“뭘 조용히 처리하는데.”
탄이 다급하게 몰아붙였다.
“습격 시도가 있었습니다. 시티 홀 사람인 것 같고요. 확인된 인원은 아직 한 명인데…….”
탄은 순간 카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습격?”
“네.”
“습격을 당했다고? 누가? 애쉬가? 다쳤어?”
중간에 숨 쉴 틈도 없이 탄이 말을 와르르 쏟아 냈다. 카머는 짙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어. 애쉬인 건 어떻게 아시지. 연락 들으셨습니까?”
“뭐? 진짜 걔가 다쳤어?!”
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카머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다쳤다고 해야 할지, 괜찮다고 해야 할지. 일단은 무사한데.”
“다치면 다친 거지. 아닌 건 또 뭔데? 미치겠네. 어디로 가면 돼? 빨리 앞장서.”
두 눈으로 애쉬가 멀쩡한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심장이 어지럽게 뛰었다. 다쳤다고? 또? 의식을 잃고 꼼짝없이 며칠간 누워 있었던 게 얼마 전 일이었다.
팍, 탄이 카머의 등을 떠밀었다. 카머는 아혼의 사무실이 위치한 4층이 아니라, 1층 구석에 있는 무기고로 안내했다. 공용 구역에서 한 번 통로를 꺾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여긴 왜…….”
“사무실에서 처리할 일은 아니라서요.”
도대체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무기고 앞에는 아혼의 다른 수족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탄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무기고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탄……!”
익숙한 목소리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탄의 인기척을 감지하고 뛰쳐나온 애쉬였다. 탄은 빠르게 애쉬에게로 다가갔다.
외지게 빠져 있는 공간이어서, 공용 구역보다도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애쉬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린 랜턴으로 우선은 얼굴부터 확인했다. 랜턴 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탄이 애쉬의 턱을 한 손으로 와락 붙잡았다. 말캉한 뺨이 눌려 튀어나왔다. 휙휙, 애쉬의 고개를 틀어 가며 빠르게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이야. 습격당했다며?”
“우으…….”
“얼굴은 멀쩡한데. 어디 다쳤어? 아파? 많이?”
애쉬가 탄의 손에 짓눌려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로 웅얼거렸다.
“괘차…… 괘차나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우…… 네에.”
둘의 요란한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카머가 슬쩍 끼어들어 말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옆구리 살점이 떨어져 나갔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멀쩡해졌어요.”
“뭐? 살점이 떨어져 나가?”
탄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곧장 손바닥으로 애쉬의 복부를 더듬었다.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게 느껴졌다. 애쉬가 어깨를 움찔 떨며 말했다.
“다…… 회복됐어요.”
“어떻게?”
“음. 그냥, 됐어요…….”
아직 가이딩을 받지 않았음에도, 애쉬의 회복력이 기괴할 정도로 빨랐다.
“그래, 됐어. 어떻게 나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아무튼 아팠다는 거잖아. 젠장. 뭔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카머가 뒤에서 덤덤하게 말하고서는 무기고 쪽으로 손짓했다. 탄은 애쉬의 팔뚝을 움켜잡고서는 함께 무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역한 냄새가 탄의 코끝을 건드렸다. 오늘 오전에도 맡았던 것이다. 피 냄새.
“윽…….”
무기고는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중앙에 달린 자그마한 전구 하나가 전부였다. 어둠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보이지 않는 어둑한 구석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안관 왔구나.”
아혼이었다. 탄이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랜턴을 향했다. 휙, 휙. 불빛을 흔들어 광경을 살폈다. 사람이 둘이다. 바닥에 축 늘어진 몸뚱이와 옷에 피가 잔뜩 묻은 아혼.
“……저건 뭐야.”
아혼은 널브러진 남자를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시티 홀 놈이야. 애쉬가 선생이라고 부르던데.”
“선생?”
탄의 뒷덜미가 싸하게 굳었다. 아혼이 힘주어 남자를 몇 번 더 걷어차자, 남자의 몸이 옆으로 굴러갔다.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멍이 잔뜩 든 얼굴이 보였다. 숨은 붙어 있었다. 터진 입술 사이로 헐떡이는 호흡이 흘러나왔다. 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를 살폈다. 어쩐지 이목구비가 낯익었다.
“아.”
기억을 잠시 뒤지다가, 어디서 만났던 사람인지 곧 깨달았다. 애쉬가 루일 때, 그의 가족인 척 탄을 맞이했던 사람이었다.
늘어진 몸뚱이 주변에는 핏방울이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어디서 흘러나온 핏물인지는 명확했다. 남자의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잘려 있었다. 고문의 흔적이다.
탄은 아연하게 아혼과 선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혼이 피로감이 살짝 묻은 덤덤한 투로 말했다.
“겐즈는 잘 붙잡아 왔지?”
“어…….”
“정보를 얻어 내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협조를 잘 안 하더라고.”
“그래서 손가락을 잘랐……구나?”
탄의 목소리 끝이 조금 튀었다.
“발가락도 몇 개. 이 정도면 자비롭지. 다리를 절단한 것도 아니고. 마에처럼 목을 찌른 것도 아니고.”
낮게 중얼거리는 아혼의 음성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결국에는 시티 홀 때문에 마에가 죽은 거잖아. 이 새끼는 이렇게 당해도 싸.”
탄은 아혼의 눈동자 속에 득시글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복수심. 저것이 자신을 고통에 던져 버리는 감정인 것도 알았다. 스스로 갉아먹히면서도, 잔인한 사적 복수만이 구원이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쓰러져 있는 놈은 분명히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탄은 이 광경에 통쾌함만 들지는 않았다. 증오가 짙게 물들어 있는 현장. 복수는 절대로 안식이 될 수 없었다.
63구역의 리더로서 오래 버텨 온 아혼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가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이목구비가 낯설었다. 외곽에서 무리를 이끌려면 온정만으로는 불가하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탄은 아혼에게 선뜻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비난도 공감도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그저 처음부터 복수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마에도 여나도 죽지 않고, 애쉬도 세뇌받지 않는 세계였다면.
탄이 텁텁한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알아낸 건 좀 있나?”
“독한 놈이야. 입을 다물고 말을 안 해. 내가 다 지친다. 그쪽도 겐즈를 잡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우선 앉아. 먹을 것 좀 줄까?”
“아니. 됐어.”
손가락이 잘린 채로 누워 있는 사람 옆에서 식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탄은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애쉬가 옆에 조용히 붙어 섰다.
아혼은 간략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선생의 습격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가 두 가지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첫째로 애쉬의 기억이 돌아왔으며, 애쉬의 이능력 또한 돌아왔다는 것.
선생은 세뇌가 먹히지 않자, 총을 꺼내 들어 애쉬를 공격했다. 재빨랐으나 그래 봤자 일반인의 움직임이었다. 애쉬에게는 느릿하게 보였다. 손쉽게 회피할 수 있었으나,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마주하자 아주 잠시간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찰나의 멈칫거림. 그사이 레이저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살갗이 타는 고통이 들었다. 선명한 통증이 애쉬의 정신을 오히려 날카롭게 일깨웠다.
애쉬는 곧장 선생이 지니고 있던 홀로그램 워치를 벗겨 내 전원을 껐다. 접선지에서처럼 자폭 모드가 발동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놈을 여기로 끌고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지. 우선 녹음은 해 놨는데.”
아혼은 디지털 녹음기를 손에 쥐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중간중간 거친 숨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 아파, 아파, 아파…… 차라리 죽여.
- 몇 날 며칠 당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도 못 참아? 왜 이렇게 나약해? 빠르게 편히 죽고 싶으면, 입을 열어. 그래야 죽여 주지.
- 으윽…….
-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위대하신 시장님이 널 가만두겠냐? 어차피 네 운명은 정해져 있잖아. 편하게 갈 거야, 아프게 갈 거야? 선택해.
- 아니……. 쓰레기촌의 운명도 정해져 있지. 당신 이거 다 헛짓거리야! 내가 죽은 걸 시티 홀이 영영 모를 것 같아? 시간문제지. 알고 나면 그 즉시 바로 추가 인력을 보낼 거라고. 날 죽인다고 끝이 아닌…… 윽!
- 그러든가 말든가. 우리를 걱정할 땐가?
- 이, 이 냉혈한.
- 어린애까지 데려다가 실험한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넌 멍청해서 몰라. 쓰레기촌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 못 해. 이게 다 시장님의 위대한 계획이란 걸. 우리 인류가 도태되지 않으려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야. 우리는 진화해야 해. 나는 진화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잇따르는 고통에도 선생은 광적인 목소리로 비슷한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 지금은 기절까지 한 상태였다. 탄은 그를 힐끗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독하네.”
“독하다니까.”
“왜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치는 거지? 거의 미친 사람 수준이군.”
“시장님 충성, 충성, 충성. 아주 메아리가 따로 없어. 프로그래밍된 로봇도 아니고.”
“그러게. 정말 로봇처럼…….”
무심코 중얼거리던 탄이 말을 멈추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반복해서 내뱉는 비일상적인 단어들. 오로지 하나로 통하는 논리. 세뇌라도 당한 사람 같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하다.
그래. 이 새끼들 세뇌로 먹고살던 집단이잖아. 탄은 옆에 우뚝 서 있는 애쉬를 돌아보았다. 애쉬는 눈앞의 풍경에도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탄과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애쉬.”
끄덕.
“저 인간도 혹시 너처럼 시티 홀에 세뇌를 당했을까?”
“그건, 모릅니다.”
“응. 그렇겠지.”
애쉬가 눈동자를 잠시 이리저리 굴렸다.
“아. 하지만 알 수도 있습니다.”
애쉬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쓰러져 있는 선생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자신을 조종하고 세뇌하려는 때마다 반복했던 행동이 있다. 아까도 그랬다.
애쉬가 선생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그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한 손에 쥘 만한 크기의 홀로그램 장치가 나왔다.
“아.”
애쉬가 물끄러미 장치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눈에 익었다. 곧장 탄에게로 다가가 장치를 건넸다.
“뭐야?.”
“이용했습니다, 자주.”
슥슥. 애쉬는 손에 묻은 선생의 피를 바지에 닦아 내며 말을 이었다.
“루를 조종할 때 이걸 씁니다. 아마도.”
탄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너한테 어떻게 영향을 미치지? 몸에 갖다 대나?”
도리도리.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작용을…….”
“아! 아마도, 여기…….”
“응?”
애쉬가 자신의 귀 뒤쪽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원래는 이곳에 흉터처럼 자그마한 수술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능력이 돌아오고 나서 치유력이 대폭 증가하자,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살갗이 매끈해졌다.
“여기에 넣었습니다.”
“뭐?”
“피부를 칼로 잘라서요.”
탄은 열이 확 올라 이마가 욱신거렸다.
“저 새끼들이 네 머릿속에 뭔가를 넣었다고?”
애쉬가 두 손가락으로 어림잡아 크기를 설명하며 말했다.
“네. 칩. 이만해요.”
이런 시발. 탄이 욕을 속으로 삼키며 홀로그램 장치를 살폈다.
에스퍼를 통제하기 위한 컨트롤러 같은 건가. 장치 뒷면에는 자그마한 버튼이 달려 있었다. 손바닥만 한 디스플레이를 이리저리 터치하자, 곧 전원이 켜지고 홀로그램 화면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 장치랑 연동되는 기기 목록인 것 같은데.”
감지되는 기기는 총 세 개였다.
“……왜 세 개지?”
“제 머리에 두 개 있습니다.”
애쉬가 마치 점심 메뉴를 설명하듯이 말했다.
“뭐? 시발. 심지어 하나가 아니야?”
탄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애쉬가 겪은 일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본인이 무엇이 비정상적이었는지 완전히 판단할 수 없으므로. 어떤 경험이 피해였는지 당해서는 안 될 고통이었는지, 깨닫지 못했기에 말하지 않았다.
애쉬는 탄에게 붙으며 심지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애쉬한테는 이제 안 통합니다.”
탄은 컨트롤러에서 방사된 화면과 애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에 힘을 주었다. 우선은 선생인지 뭔지 하는 작자를 족칠 때였다.
“이 중에 두 개가 너한테 있는 칩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저 새끼일 걸 수도 있겠네.”
선생의 입을 열 방법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 더 효과가 좋을 것이다.
* * *
꾸욱. 탄이 컨트롤러의 뒷면 버튼을 눌렀다.
“그래서, 실험 센터가 시티 홀 지하에 있다고?”
“네, 네…….”
선생은 자정이 지나면서 의식을 되찾았다. 그가 깨어나자마자, 컨트롤러를 작동시켜 보았다. 반응했다. 그의 편도체에도 칩이 박혀 있던 거다. 애쉬의 머릿속 칩은 불량이 된 듯 작동하지 않았지만, 선생의 것은 정상적이었다. 컨트롤러의 옵션을 선택해서 조작하자, 특정한 감정만 강하게 유발할 수 있었다.
현재의 선생은 완전히 경계심을 버리고 나른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모든 공격성을 잃은 채 순종적인 얼굴로 변했다. 그는 자신이 안전한 상황에 있다고 느꼈다. 눈앞의 탄에게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탄의 질문에 속절없이 진실을 쏟아 냈다.
실험의 목적, 실험의 배후, 실험 센터의 위치, 그리고 센터의 보안 장치를 해제하는 방법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아혼은 감정이 솟구치는지 발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폴 그 자식을 죽여 버리자. 센터인지 뭔지 거기로 당장 가서, 애들을 풀어 주고. 폴도 죽여 버려야 해.”
탄은 아혼의 감정에 완전히 공감했다. 하지만 방법은 더 신중하게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탄이 선생에게 말했다.
“우선 임무에 성공했다고 폴에게 말해 둬. 애쉬는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그래야죠, 맞습니다…….”
선생은 제 홀로그램 워치를 이용해, 폴에게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연락했다. 이로써 잠시간 시간을 벌었다. 속임수가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며칠 동안은 시티 홀도 방심할 것이다.
탄은 축 늘어진 선생을 툭툭 치며 다시 다그쳤다.
“우고와 라함을 아나?”
“예? 아…… 아, 예. 아. 아아. 그 애들 말씀이군요. 초창기 실험의 한계였습니다, 예.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던 중이었거든요.”
“무슨 시도였고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빠짐없이 털어놔.”
“실험체 수급을 더 빠르게 해야 했는데…….”
“그래.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선생은 탄이 가볍게 맞장구쳐 주자, 흥이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프로젝트의 한계점이 드러나, 폴이 초조함을 느꼈다고 하였다.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에스퍼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이루려면, 더 많은 인간을 모아야만 했다.
제2 개발부서를 꾸려 다른 방법을 모색하다가, 대기병이라는 유전적 특이성을 지닌 개체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강제적 발현을 시도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남들보다 비교적 높았다.
가설에는 증명이 필요했다. 대기병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접근했다. 최대한 다양한 조건의 실험 대상을 끌어모으려 노력했다.
부모 중에 대기병 환자가 있으나, 본인은 발병하지 않은 경우. 대기병을 현재 극심하게 앓는 경우. 대기병이 있으나 약을 먹을 정도로 심하지 않은 경우. 대기병 유전자를 타고 태어났으나, 형질 보유자로 발현한 경우 등.
각기 처한 상황이 다른 실험 대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하위 구역 출신이라는 것.
그들이 갑자기 없어져도, 캐슬 시티는 별문제 없이 조용히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 그들을 찾더라도, 그 발길이 시티 홀 중심부까지 닿지는 못할 것이다. 나약하게 외곽을 겉도는 자들.
그 초기 실험 대상에 라함이 있었다. A급 에스퍼지만, 극하위 구역 출신. 직계 가족 모두가 극심한 대기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없어져도 찾을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정식 경비대원이 되기 전인 전투 학교 훈련생이라 비교적 꼬드기기도 편리했다.
라함은 돈과 명예를 약속받고, 정기 외박 때마다 실험에 참여했다. 정확히 무슨 실험인지는 몰랐다. 머릿속에 칩을 넣는다고 했다. 그러라고 답했다. 매번 여러 약물이 몸에 투입되었다. 아파도 참으라 했고 그렇게 했다. 뇌파 측정기를 단 채 가만히 있었다. 명령을 따랐다.
그러다 라함에게 부작용이 발생했다. 시티 홀로서는 연구에 도움이 될 이로운 발견이었다. 이미 형질이 발현된 자에게 약을 투여하면, 폭주 위험도가 상승한다는 걸 깨달았다.
라함은 폭주했다. 실험실 속에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죽어 갔다. 가이드는 없었다. 자살로 위장된 죽음만이 그에게 허락된 것이었다.
그런데 하위 구역 출신에다가 가족도 없는 라함의 죽음을 끝까지 추적한 사람이 있었다. 라함의 절친한 동기였던, 우고.
시티 홀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타인의 죽음을 좀처럼 놓지 못하고 사는 이도 있다는 것.
우고는 상위 구역 출신의 연줄을 이용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다 시티 홀이 배후라는 사실에 조금씩 근접해 갔다. 시티 홀이 그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우고는 라함을 놓지 못한 탓으로, 죽어야만 했다. 과폭주를 촉진하는 약물이 그의 몸에 몰래 투여되었다.
마침 과폭주가 발발한 그때. 우고의 옆에는 탄이 있었다. 문제는 탄도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쉽게 놓지 못하는 사람. 비록 자신이 망가질지언정.
상실의 자리를 애써 메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 두며, 소실된 이를 곱씹는 사람.
과거의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
그렇게 이어져 온 죽음이 이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오프 리쉬 프로젝트. 폴이 직접 명명한 실험.
선생은 텅 빈 눈동자로 웅얼거렸다.
“신세계일 겁니다. 에스퍼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들을 완전히,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평온하고 행복감에 물든 얼굴이었다. 그러다 애쉬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애가,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돌연변이, 돌연변이, 돌연변이…….”
꾸우욱. 탄이 컨트롤러의 버튼을 일부러 거세게 눌렀다. 손끝이 하얘졌다.
“애쉬한테 무슨 짓을 했지?”
“아무것도요……. 갑자기 저 애가 힘을, 다 잃어버려서, 실험이 엉망이…….”
선생은 분한 듯 중얼댔다. 애쉬는 성공적으로 실험 과정을 거치던 도중, 갑자기 에스퍼로서의 힘을 잃었다.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신체 능력도 일반인과 흡사해졌다.
탄은 애쉬가 실험 센터에서 도망치기 위하여 힘을 ‘잃은 척’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선생의 말만 들으면, 정말로 당시에는 에스퍼로서의 형질이 없어진 듯했다.
“원래는 죽여야 하는데, 시장님이 그냥 이 애는 살려 두자고, 네…….”
“왜 그랬지?”
“막판에 실패했지만…… 우리 실험체 중에서 가장 뛰어났거든요. 완전히 폐기하기에는 아까웠고…… 음…… 그래도 시장님답지 않은 결정이기는 했죠. 그때 죽였어야…….”
“중간에 자꾸 쓸데없는 중얼거림이 들어가는데. 사실만 빠르게 말하지?”
“네…….”
애쉬를 폐기하지 않고 외딴곳에 버리기로 했다. 애쉬는 제거되지 않고 외딴곳에 버려졌다. 대신 기억이 지워지고 재편집된 채로.
장기 기억은 대뇌 전반에 산재해 있다.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뇌가 활성화된다. 추가로 심은 칩은, 인위적으로 뇌파를 흐트러뜨리는 기능을 했다.
아무리 만들어진 존재일지라도, 그 껍데기만큼은 인간이다. 뇌는 영혼이 깃든 미지의 신성한 영역 따위가 아니었다. 작동 원리만 안다면,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로봇에 업데이트하듯이.
하지만 모든 업데이트에는 예상치 못한 버그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63구역에서 탄과 재회한 이후, 애쉬는 매일같이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탄을 볼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려 했다.
인간의 감정은 기억을 처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강렬한 감정일수록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뇌 신경 세포를 극도로 활성화한다. 애쉬에게 탄은 언제나 강렬했다.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애쉬는 제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다가, 무심코 웅얼거렸다.
“진화…….”
문득 그 단어가 생각났다. 물리도록 들어서, 약간은 역하게 느껴지는 말.
애쉬는 진화를 거부했다. 도태되기를 원했다. 도태된 아이들은 학교를 벗어나 쓰레기장으로 가니까. 그러기 위해 이능력을 스스로 잠재웠다.
어떤 에스퍼도 자유자재로 이능력을 없애 버리지 못한다. 발현되는 순간 평생을 형질 보유자로서 살아야 한다. 가이드가 없으면, 폭주해서 죽고 마는 숙명을 떠안고.
힘에는 제약이 따른다. 극한의 세계에 내려진 축복, 진화, 혹은 저주.
하지만 애쉬는 자신이 원하면 이능력을 없앨 수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숨 쉬는 법을 설명하라고 하면 말문이 막히듯이.
이능력의 원천이 되는 대기 물질을 무시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더는 그것과 공명하고 싶지 않다. 힘이 필요 없다. 마음먹은 순간,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애쉬는 그렇게 일반인의 신체 상태를 유지했다. 가이딩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애쉬에게 이능력은 선택의 영역이었다. 그는 여러 기술이 합쳐진 산물, 어쩌면 돌연변이. 또 어쩌면 진화종이다.
애쉬는 실험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포기했다. 탄과 다시 만난 이후, 무의식적으로 이능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어느 순간, 마음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탄에게 자신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텔레파시를 발생시켰다. 점점 더 자주, 크게, 선명하게. 일부러 잠재웠던 이능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탄과 함께하는 동안 애쉬의 본능은 끊임없이 소리쳤다. 탄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해. 쓸모 있어야만 해. 탄을 지켜야만 해.
탄을 돕기 위해 후각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근력이 늘어나고 신체의 모든 감각이 선명해졌다. 탄 대신에 폭탄을 맞고서 뒹굴었다. 그러고서도 살아남았다.
폭발의 충격으로 머릿속 칩은 불완전해졌다. 기능이 멈추거나 녹아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더는 애쉬를 억누르지는 못했다. 탄을 볼 때마다 드는 강렬한 감정은 방해 없이 뇌를 극한으로 활성화했다.
제어가 약해지고 기억이 돌아와 머릿속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억눌렀던 이능력을 모조리 개방하는 것도, 숨 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순간 과도하게 힘을 끌어올린 탓에 부작용으로 폭주 상태에 접어들 뻔했지만. 탄의 도움으로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애쉬는 저에게 일어난 일련의 모든 과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탄이…… 애쉬를 진화시켰어요.”
“응?”
맥락에 맞지 않게 튀어나온 말에 탄이 고개를 기울였다. 애쉬는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완전히 세뇌당한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공입니다.”
선생이 눈두덩을 파들거리며 애쉬를 힐끗거렸다.
“나는 강합니다. 진화 실험은…… 성공했어요.”
만들어진 에스퍼이자, 현재 이 행성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 말한다. 어둡고 습한 무기고에 낮은 목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당신들은 실패했습니다.”
애쉬는 사랑이라는 변수가 끼어든, 가장 진화된 실패작이었다.
* * *
얼마 후 선생은 기력을 잃고 다시 기절했다. 아혼이 계속 창고에 남아 그를 감시하겠다고 했다.
탄은 잠시라도 눅눅한 피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애쉬를 데리고 공장 바깥으로 나왔다. 일출 전, 쌀쌀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탄이 공장 외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무릎 위에 축 늘어진 팔을 올린 채 쪼그려 앉았다. 애쉬는 말없이 탄을 따라 했다. 바로 옆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상태로 물끄러미 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애쉬가 탄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잖아.”
탄은 애쉬가 걱정되었다. 본인의 육체를 다른 이가 마음대로 헤집고 실험한 역사를 쭉 듣다 보면 지칠 만도 했다. 하지만 애쉬는 멀쩡한 기색이었다.
“괜찮습니다.”
“네가 그렇다면 다행인데…… 저 작자는 어떻게 할까. 복수하고 싶어?”
“복수…….”
애쉬가 그 단어를 따라 하며 눈을 끔뻑였다. 무기고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선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할 건지는 애쉬 네가 선택해. 그게 맞는 것 같아서.”
“복수…… 어떻게 합니까?”
복수란 무엇인가. 근본적인 물음에 탄이 잠시 멈칫했다.
“뭐, 죽인다든지?”
“죽음…… 복수입니까?”
“……거참, 철학적인 질문을 하네.”
순수함이 때로는 핵심을 찌른다. 탄은 뒷덜미를 긁적였다.
선생을 죽인다고 해서, 애쉬와 다른 이들이 겪은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나를 죽인 자의 숨통을 끊었음에도, 여나가 살아 돌아오지 아니한 것처럼.
과거는 언제나 그대로다. 무슨 짓을 하든 변함없이. 복수는 과거를 현재로 끌고 와서 의미 없는 덧칠을 하는 과정인 걸까.
탄이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할 때, 애쉬가 작게 속삭였다.
“상관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끄덕끄덕.
“죽든지 말든지?”
“네. 죽든지 말든지.”
탄이 피식 웃었다. 어쩐지 힘이 쭉 빠진다. 하루 내내 긴장과 불안으로 바짝 굳어 있던 몸이었다. 스르륵. 탄은 아예 땅바닥에 풀썩 앉아 버렸다. 바지가 조금 더러워지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풀썩. 애쉬가 이번에도 탄을 따라 바닥에 앉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탄.”
“왜.”
“피곤해요?”
“음, 약간.”
“네…….”
“뭔데. 할 말 있어?”
“아…….”
애쉬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해. 어차피 조금 쉬다가 다시 들어갈 텐데.”
“두 개…… 있습니다.”
“으응. 할 말이 두 개나 있어?”
끄덕끄덕.
날이 바짝 서 있던 탄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누그러졌다. 몸을 꾸물거려서 애쉬와 더 바짝 붙어 앉았다. 어깨가 툭 맞닿았다.
“뭘까. 궁금하네. 덜 중요한 거 먼저 듣자.”
애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오랫동안 탄의 눈치만 살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긴장할까. 자신을 학대한 사람 앞에서도 덤덤한 얼굴을 하던 애가. 탄은 물끄러미 애쉬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한참 후, 애쉬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탄의 예상 목록에 전혀 없던 것이었다.
“저는…… 애, 애, 애인이에요?”
“엉?”
“탄의 애인…….”
탄은 잠시 얼이 빠졌다. 애쉬가 시선을 이리저리 흔들며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서, 서로 사랑하면 애인입니다. 다언이 그랬습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군. 탄은 짐작하며 벌겋게 달아오른 애쉬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애쉬가 저 혼자 들떠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요란한 감정의 파고를 겪으며, 이상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탄의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습니다.”
“아하.”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다니. 탄은 손을 뻗어 애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에 감기는 머릿결이 기분 좋았다. 피곤한 몸을 때리는 밤바람이 더는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쉬는 고개를 비틀어 긴장한 눈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탄이 다정하지만 단단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쉬운 질문인데. 당연히 애쉬는 내 애인이지.”
너무나도 명료하게 떨어지는 탄의 대답에 애쉬가 멍하니 있었다. 탄이 멀찍이서 꿈틀거리는 애쉬의 손을 낚아채 깍지를 꼈다.
“나도 애쉬의 애인이야. 우리는 서로 애인인 거지. 오늘부터 1일? 뭐, 그런 건가.”
애쉬는 맞잡은 손과 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말했다.
“머…….”
“응?”
“멋집니다.”
“그래. 멋진 일이지.”
하하. 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애쉬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탄…… 이거 비밀입니까?”
“뭐, 우리가 애인인 게?”
“네.”
“아니? 왜. 숨기고 싶어?”
“어, 아.”
애쉬가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다가 다급히 외쳤다.
“아니요!”
“이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긴장했어? 귀엽다, 귀여워. 이게 어린놈 만나는 재미구나.”
“아…… 그런데, 질문 하나 더 있습니다.”
“또? 좋아. 다음 본론으로 넘어가 봐.”
애쉬가 깍지 낀 손에 힘을 꾸욱 주더니 탄을 응시했다. 얼굴 사이의 거리가 예고도 없이 훅 가까워졌다. 애쉬의 속눈썹이 움직이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이번에는 애쉬가 그다지 망설이거나 긴장하지 않고 말했다.
“탄, 지금 울고 싶어요?”
“음? 갑자기? 아니.”
탄은 비어 있는 손으로 제 뺨을 벅벅 문질렀다. 물기는커녕 살갗이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아까…… 운다고 했습니다. 둘만 있으면.”
“내가? 언제…….”
탄은 말하다가 멈칫했다. 뒤늦게 아침에 스쳐 지나가듯이 애쉬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마에의 죽음을 목격한 직후였다.
그때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탄은 아직 애도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것에 가깝다. 마에만을 온전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탄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이 기묘하게 울렁거린다.
“……이게 애인 확정보다 중요한 용건이었어?”
“확정은 나중에도 가능합니다.”
“음. 그렇지.”
“오늘의 눈물은 오늘뿐입니다.”
“…….”
“다 울었어요. 공장 사람들. 탄만 참아요.”
투박한 언어였으나, 애쉬의 의도가 명확히 다가왔다. 위로였다. 탄은 괜스레 뒷덜미를 긁적였다. 애쉬에게 위로받는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싫지는 않았지만.
“내가 눈물 참는 것처럼 보였나?”
옆에서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이 탄의 얼굴을 데웠다.
“근데 지금 와서 다시 울라고 해 봤자, 갑자기 눈물이 나올 리가…….”
머쓱하게 웅얼거리던 탄이 중간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음성에 물기가 섞여 들어가고 있다. 당황스러워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어, 이거 왜 이러냐.”
하하……. 탄의 울음 섞인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었다. 다 울었어요. 탄만 참아요. 애쉬의 말이 어쩐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마에의 죽음이 떠오르려 할 때, 의도적으로 머릿속 외곽으로 밀어 두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그렇게 해 보았다. 곧장 자연스레 눈물이 차올랐다. 아끼고 의지하던 사람이 죽는 것은 수십 번을 겪어도 무던해지지 않는 일이다.
탄은 내내 마음속에 맴돌던 생각을 인정했다. 마에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녀는 사는 게 힘들다고 했지만, 설령 죽더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따뜻한 침상에 누워서,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로. 모두와 마지막 인사를 다정하게 나누고서 안식에 빠졌다면.
살아남은 자의 욕심이고 미련일 뿐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런 상상이 드는 것은, 죽은 자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혼자서 곱씹을 상실임을 알아서다.
탄이 손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살갗에 물기가 잔뜩 묻어 나왔다.
“아, 젠장…….”
얼마만의 눈물인지 감히 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