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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평화의 중심부 (12/14)

12. 평화의 중심부

“이건 도박이야.”

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지금 도박과도 같은 일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보안관 사무소 책상 앞에 앉은 채로 마른세수했다. 피부가 평소보다 거칠거칠하다. 긴장감에 찬 몸에 힘을 뺐다.

도박이면 어쩔 것인가. 이제 더는 물러설 곳도 없다.

오늘 오전, 마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위 구역에서는 고인이 생전 아꼈던 물건을 친지들이 하나씩 나눠 가진다. 그들 나름대로 애도법인 셈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았기에 생겨난 관습이겠지만, 사람들은 고인이 쓰던 물건에는 고인의 영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캐슬 시티에는 체계화된 종교는 없었다. 교단을 꾸릴 만큼의 신도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상위 구역은 과학을 신봉했고, 하위 구역은 미신과 애니미즘의 시대였다. 육체는 사라지더라도 영혼만은 존재하리란 믿음.

탄은 그 모든 게 살아남은 자들의 합리화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마에의 물건 하나를 챙겨 왔다. 투박한 천 소재의 주머니에 고이 담아 두었다.

장례까지 치르고 나자, 아혼은 더 독한 얼굴로 변했다. 당장 시티 홀에 쳐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아혼도 탄도 알고 있었다.

분을 못 이겨 이대로 시티 홀로 향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시티 홀을 무너뜨릴 전력이 갖춰지지 않았다. 더 정교한 전략과 동료가 필요했다.

선생은 여전히 공장에 감금되어 있었다.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했으나, 그가 계속 돌아오지 않으면 시티 홀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챌 터였다. 시티 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의 며칠이 골든 타임이다.

이때 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경비대였다. 우군이 되어 줄 자들.

시티 홀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려진다면, 경비대의 지지를 얻을지도 모른다. 우고와 라함과 친하게 지내던 이들은 더 적극적으로 포섭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경비대에 진실을 알린다는 것은, 이쪽의 패를 하나 까 보이는 셈이었다. 우군이 되기는커녕, 반동의 기미가 보인다며 시티 홀에 보고할 수도 있었다.

모두가 시티 홀에 반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현재에 아무런 불만도 없으며, 현상 유지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경비대가 캐슬 내 유일한 독립 권력체라고는 하나, 시티 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간부 중에서는 시티 홀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유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탄은 웬만해서는 타인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다양한 방면에서 조금씩 나쁘고, 가끔 선한 행동을 할 뿐이다. 양심과 정의감에 호소해 봤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그렇기에 경비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도박이라 부른 거다.

하지만 낮은 확률이더라도 여기에 배팅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아니,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탄은 심호흡하고서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처음으로 접촉할 사람을 결정했다. 63구역으로 전근을 명령받았을 시, 배웅해 주러 나왔던 다이온이다.

탄이 일반 경비대원이었을 때 그의 직속상관이었으며, 지금은 경비대의 최고 명령권자인 총감.

탄은 다이온을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존경했다. 다이온은 경비대라는 조직에 애정이 깊었으며, 그간 부조리한 사건도 일으킨 적 없었다.

하지만 시티 홀과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이기에, 총감직에 오를 수 있었다.

탄은 63구역으로 떠나기 전, 다이온이 저에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야 살아. 그 구역 주민이랑은 절대 엮이지 말고. 알겠어?>

<시장님 눈치 봐서 조금만 버텨. 때 되면 네 능력 멀쩡히 복구됐다고 하고 다시 경비대로 부를 테니까.>

상위 구역 출신에 분쟁을 싫어했다. 더군다나 현 체제 속에서 권력을 움켜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했었다.

<시티 홀 놈들이 무슨 짓 한 거 아니고?>

<경비대에는 아직 네 편이 많아.>

<그러니까, 도울 일 있으면 말하란 거야. 알겠어? 그게 뭐든. 넌 경비대 사람이잖아.>

탄은 다이온과 10여 년을 알고 지냈다. 확실한 것은, 총감이 되기 전후 언제나 다이온에게는 경비대가 우선순위였는 것. 시티 홀과의 분란으로 행여나 조직에 문제가 생길까 봐, 온건주의 노선을 유지하는 중이기도 했다.

탄은 다이온에게 곧장 1:1 채널 생성을 요청할까 했으나 멈칫했다. 시티 홀이 주시할지도 모른다. 우선은 홀로그램 화면을 두드려 다이온에게 메시지만 보냈다.

총감에게 어떤 정보까지 풀 것인지는 이미 머릿속으로 계획해 놓았다. 이제 그를 설득해야 할 때다.

[총감님. 그간 잘 지내셨죠. 이렇게 텍스트로 연락드리는 건 처음 같네요. 그냥 제 근황이나 전해 드릴까 하고요.

요즘 생각이 많아, 연락이 뜸했습니다. 저는 63구역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중앙 쪽과는 문화도 기반 시설도 다르더군요. 1구역의 음식이 그리워지는 나날입니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실종과 살인 사건이 예삿일입니다. 이곳에서 정붙이고 지내던 임시 부관 놈이 있는데, 며칠 전부터 보이질 않군요. 어디로 도망간 건지.

총감님 부대에 속해 있을 때, 제가 가끔 그랬죠. 행정 보고 귀찮아서 도망 다니고. 그때마다 총감님도 매번 마음 졸이며 힘들어하셨겠다 싶네요. 지난날의 저를 반성합니다.

그러면서 예전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드니 감성적으로 변하는 건지. 현역이실 때, 같이 전투 나갔다가 저 다쳤던 거 기억하십니까?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때 총감님이 절 업고 캐슬 안으로 대피하셨죠. 하아. 그 단단하던 등이 그립습니다.

얼른 보안관 업무를 종료하고, 경비대로 돌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여기서는 사실 할 게 없어요. 그냥 자리에 앉아 있는 거지, 업무도 대충입니다. 현지민들이 절 신뢰하지도 않고요. 원래 가만히 있다가 가기로 했으니. 뭐, 잘됐죠.

뵙고 싶습니다! 답장은 굳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황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언제나 총감님을 존경하는 탄.]

탄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화면을 빠르게 터치했다. 전송까지 완료하고 나서,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한 숨을 내쉬었다.

“총감님, 제발.”

애타는 마음에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탄이 알고 지냈던 다이온이라면, 이 메시지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터였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거짓으로 가득했으니.

우선, 탄은 이렇게 살가운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행정 보고가 귀찮아서 도망 다닌 적도 없었다. 탄은 능글맞은 어투와 다르게 성실한 대원이었다.

함께 나갔던 전투에서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도 거짓이다. 다리가 아니라 팔을 다쳤다. 업힌 적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탄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이하다고 생각할 편지였다. 탄은 글에 녹여 낸 제 진의를 다이온이 알아채 주기를 바랐다. ‘답장을 주지 않아도 된다.’ 즉, 텍스트로 오는 답을 원치 않는다.

몇 분 정도 지났을 때. 홀로그램 화면이 번쩍였다.

“아, 역시.”

탄이 숨을 토해 내며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보안이 걸린 사설 채널로 다이온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티 홀이 바로 모니터링할 수 없는 채널이었다.

채널 승인을 하자, 홀로그램 화면에 다이온 총감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그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 이상한 메시지가 왔어. 사무소 채널 해킹당한 거 아냐?

탄이 숨을 푹 내쉬며 다급하게 물었다.

“믿고 있었습니다, 총감님. 이거 보안 등급이 어떻게 됩니까?”

- 아니, 뭔 소리냐. 1등급이긴 한데. 메시지가 너무 이상하길래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이거로 연락했지.

“정말…… 이런 타고난 센스가 있으시니, 총감까지 되신 것 아니겠습니까. 존경합니다. 사설 채널로 연락 주실 것까진 예상 못 했는데.”

다이온이 눈가를 찌푸렸다.

- 너, 뭔 일이 있기는 하구나? 왜 답지 않게 아양을 떨어?

“저를 역시 잘 아시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갈게요. 저 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뭔데 이렇게 이상한 짓거리까지 하면서…….

“우선, 고공비행 가능한 호버카가 필요합니다. 4인승 두 대 정도면 좋겠는데.”

- 뭐?

일반적인 호버카는 지면에서 5m 정도까지 날아오르는 이동용 차량이었다. 상위 구역에서만 호버카를 볼 수 있었다. 트램 같은 대중교통이 아니라(63구역에는 트램조차 다니지 않지만), 부자들만 간간이 과시용으로 구매해서 타고 다녔다.

개중에 차내에 순환 발전기를 달아 고공비행이 가능하게끔 개조된 것이 있었다. 일반 호버카보다 세 배 빠르며, 성벽을 넘을 수 있을 만큼 높이 난다. 일반인은 구매하지 못하며, 시티 홀 보안관들의 치안 유지용이나 경비대 전투용으로만 쓰이는 호버카였다.

- 거기에 뭔 문제가 났구나. 시티 홀에 요청하면 보안관용 호버카 보내 줄 텐데. 나한테 연락했다는 건…….

“어디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거죠.”

전투용 호버카는 아주 높이 뜬다. 성벽을 넘어가고, 시티 홀의 레이더망에서 벗어날 만큼 높이. 구역마다 설치된 검문소를 가뿐히 무시하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바로, 시티 홀에.

탄은 캐슬 시티의 중심부로 갈 생각이었다.

선생의 자백을 녹음해 두었으나, 고문과 세뇌로 얻어 낸 목소리였다. 이걸 공개하면 도시 전체에 충격을 주겠지만, 과연 협조까지 끌어낼 수 있을까.

선생은 시티 홀 정식 명부에 등록된 직원도 아니었다. 신뢰도가 낮은 증거였다. 폴은 조작된 증거라고 내빼고, 꼬리를 잘라 버릴 것이다. 그렇게 굴어도 무사할 만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실험 데이터나 실존하는 실험 대상들. 선생이 말하기를, 시티 홀 건물 지하에 실험 센터가 있다고 하였다.

그곳으로 간다. 폴이 우리를 죽이러 오기 전에, 그를 끌어내리러. 실험 대상으로 이용되던 아이들을 풀어 준다. 현 시장인 폴이 명백하게 실험에 얽혀 있다는 증거를 획득하고 퍼뜨린다. 여기까지가 탄의 계획이었다.

“경비대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꼭두각시처럼 다른 세력에게 휘둘린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 그야…… 열받지.

“네. 지금 보낸 거 들어 보시면 미치도록 열받으실 테니까 미리 주의 드리겠습니다.”

탄은 짧은 음성 데이터를 다이온에게 전송했다. 선생이 웅얼거리며 고백했던 내용을 중간중간 잘라 내 편집한 것이었다. 다이온은 음성 데이터를 들으면서 얼굴을 구겼다.

- 이게 뭐냐, 탄?

“누군가가 경비대에 침투해서 우리를 이용하려 합니다. 들으셨죠. 에스퍼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실험입니다.”

-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야? 이 목소리 주인은 누구고.

“시티 홀 사람이라는 것만 확실합니다. 본청에 가서 증거를 더 확보해야 합니다. 배후도 더 파헤치고요. 그래서 도움을 요청드린 겁니다.”

폴이 연루되었다는 이야기는 적당히 생략했다. 총감이 어디까지 도와줄지 알 수 없는 상황.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오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제 목숨 하나만 달린 일이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너무 많은 목숨이 딸려 있다.

- 그래서 나한테 연락한 거군. 시티 홀에 잠입하겠다고? 경비대 호버카를 빌려서?

“규약 위반인 건 압니다. 그래도 몰래 시티 홀에 들어가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어서요.”

- 좌천된 동안 쥐 죽은 듯이 살라고 했더니만, 도대체…….

“지금은 보안관 신분이지만, 총감님이 전에 말씀하셨듯이 저는 결국에는 경비대 사람 아닙니까? 위험을 감수해야죠. 이런 걸 알고도 어떻게 그냥 넘어갑니까.”

- 탄. 이거 정말 확실한 정보인 거냐? 나 지금 머리가 지끈거린다. 늙어 빠져서 일선에서 물러난 아저씨를 이렇게 괴롭히고…….

“이런 실험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63구역 아이 중 한 명이 실제로 당했고요.”

- 아이고.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 모른다는 게 문제죠. 총감님이 보시기에도, 이걸 터뜨리려면 증거가 더 필요하겠죠.”

- 아마도. 나야 널 믿지만, 상위 구역 사람들까지 설득하려면…….

죽어 나간 공장 사람들. 애쉬. 나즈. 과연 그들의 증언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을까. 탄은 순진한 성격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걸 적당히 간과하고 무시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곳은 통제 사회였다. 단단한 틀을 무너뜨리려면, 그만한 큰 충격이 필요했다.

무시할 수 없는, 끔찍하고도 선명한 진실.

“물론 이번에 저한테 호버카를 내주시면, 후에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총감님께 책임을 물을지도요.”

- 그래. 네가 틀린 거라면, 나는 총감 자리를 내놓을 각오를 해야겠지. 대가리까지 내놓을지도 모르고.

홀로그램 속 다이온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 젠장…….

“총감님.”

- 하여간 너는 기이하게 좀 운이 좋단 말이야.

“제가 그렇단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총감님이 그러시다니, 앞으로 그렇게 알고 살아가겠습니다.”

- 어유. 어떻게 하필이면 오늘 나한테 연락을 하냐. 너도 참…….

“왜요?”

- 네 말 하나만 믿고 승부수를 띄운다 쳐. 그러려면 오늘만큼 좋은 날이 없거든.

“오늘 시티 홀에 뭐 있습니까? 그보다 도와주실 거예요? 거의 넘어오신 거 같은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탄은 애타게 다이온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다음 이어 나올 말을 기다리면서.

* * *

부우웅. 저 너머에서 희미한 진동이 들려온다.

높게 쌓아 올린 캐슬 벽과 가장 가까운 63구역의 공터. 이곳에 총 여덟 명이 모였다. 탄, 애쉬, 다언, 아혼, 카머, 그리고 아혼의 수족 세 명.

곧 흐릿한 하늘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커다란 물체가 보였다. 다이온 총감이 지원해 준 전투용 호버카였다.

두 대가 차례대로 예상 착륙지를 향해 다가왔다. 행선지 좌표만 입력해 놓으면 무인으로도 운행이 가능한 버전이었다.

목을 꺾고서 하늘을 바라보던 다언이 중얼거렸다.

“호버카는 처음 봐요. 진짜 저걸 타고 시티 홀로 가는 거예요?”

“제 알아서 잘 가는 놈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급 상황에만 차내에 있는 매뉴얼 보고 수동 조작하면 돼. 계속 무전으로 연락하고.”

나선형에 반짝이는 비행체가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땅바닥과 만났다. 탄이 앞장서서 호버카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좌석 위에 올려놓은 옷가지가 보였다. 상류층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최고급 정장들이었다.

“자. 옷 갈아입고 다시 여기서 만나. 빨리 움직여.”

탄이 손뼉 치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하늘의 명도가 낮아지고 흐릿한 검은색이 퍼지기 직전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탄은 무사히 도착한 호버카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다이온 총감에게 연락했던 것이 불과 오늘 점심이었는데, 해가 지기 전에 시티 홀로 출발할 수 있다니.

오늘은 시티 홀이 개최하는 만찬이 있는 날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열리는데, 사회 기여도 만점을 채우고도 남는 상류층 인사들만 참여할 수 있다. 한 사람당 초대장이 최대 두 개 지급되며, 그들은 매번 만찬에 함께할 이를 선택할 권리를 지닌다. 피후원자를 고르듯이.

사교를 표방한 치열한 사회생활의 장이었다. 탄도 경비대 시절, 몇 번 초대를 받아 참가했다. 모두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아침까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인사하고 술을 마셔야 했다. 그게 초대장을 준 이에 대한 예의였다.

게다가 음악과 연극이 쉴 새 없이 시끄럽게 이어졌다. 원래 캐슬 시티에서는 예술이 금기시되어 있다. 사회 기여도를 만점까지 채운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과시적 사치가 된 예술을 즐기며 교양을 얻는다. 상류층끼리는 친분을 다지고, 초대받아 온 이들은 자신을 꾸준히 이곳으로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숨 막히는 일이었지만, 이날만큼 시티 홀에 잠입하기 좋은 때도 없었다. 외부인이 대거 드나드는 때. 초대받은 사람인 양 은밀하게 인파에 섞여 들 수 있었다.

탄은 다이온이 호버카에 실어 보낸 옷을 집어 들었다. 한동안 만져 본 적 없는 고급 옷감의 감촉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오늘을 놓쳤다면, 다음 만찬 때까지 한두 달을 기다리거나 안정성을 포기하고 다른 날 잠입해야 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성공 확률이 극도로 떨어졌다.

아혼은 정장을 해괴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걸 입고 다니나? 답답할 것 같은데.”

“다들 눈 딱 감고 얼른 환복합시다. 제때 도착해야지.”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사실 63구역이 아니었다면, 오늘 호버카를 공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가장 외져 있으며, 가장 성벽에 붙어 있는 63구역이었기에 행운을 쥘 수 있었다.

현재 이용 가능한 전투용 호버카는 모두 성벽 밖 정비소에 있었다. 그 벽을 넘기만 하면 63구역이었다. 덕분에 바삐 움직이면 만찬 시작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일행은 공터 근처 공용 욕탕에서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이런 옷감은 처음 봐요.”

이번 임무에 참여한 카머가 정장 재킷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탄만 추레한 복장을 선택했다. 너무 얼굴이 팔린 탓에, 시티 홀에서 일하는 청소부인 척하기로 했다. 평소 항상 깔끔하게 올렸던 머리카락이 이마를 지나 눈썹까지 푹 덮었다. 어수선하게 머리를 헤집어 놓고, 그 위에 촌스러운 안경까지 썼다.

일부러 못나 보이게 꾸미는 건 처음이었다. 내 얼굴에 그게 쉬울까, 뻔뻔스레 말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탄은 인상이 달라졌다. 허리와 어깨도 구부정하게 숙여서, 사람이 소심해 보였다.

탄이 재빨리 변장을 마칠 동안, 옆에 있던 애쉬는 초조하게 손끝을 꿈지럭거리며 겨우 바지만 갈아입었다. 탄이 끙끙대는 애쉬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래?”

“……어렵습니다.”

일할 때는 점프 수트, 평소에는 헐렁한 면 옷만 입던 애쉬였다. 딱 달라붙는 정장은 어색하고 불편한 모양이었다.

사정은 다른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탄은 주변을 쓱 쳐다보았다. 옷매무시가 어딘가 엉성하고, 머리카락도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초대장이 있다고 한들,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안 되겠다. 하나씩 이리 와서 앞에 서.”

탄이 손끝을 까딱였다. 카머를 비롯한 아혼의 수족들부터 한 명씩 차림새에 각을 잡기 시작했다. 옷깃은 똑바로. 타이도 단정하게. 혹시 몰라 챙겨 온 향수도 요긴하게 쓰였다. 그럴싸하게 맵시를 내고 꾸미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머리도 문제다. 모자를 쓰든지, 손을 좀 보든지.”

탄이 제 손바닥에 헤어 젤을 쭉 짜냈다. 기계적이고 재빠른 손짓으로 다른 이들의 머리카락을 쓱쓱 매만졌다. 최대한 적은 시간 동안 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나씩 제법 세련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다이온 총감이 보낸 옷은 최상위 구역에서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머리를 꾸미자, 다들 만찬에 초대받은 젊은이들 같았다. 약간의 어색함은 느껴졌지만, 오히려 이런 자리가 아직 익숙지 않은 듯한 풋풋함을 풍겼다.

“좋아, 좋아.”

탄은 만족한 얼굴로 쭉 훑어보았다. 카머는 옷깃을 매만지며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꾸미니까 저도 봐 줄 만하지 않습니까? 보안관님, 어때요?”

“누가 꾸며 줬는데.”

“저 괜찮죠?”

“괜찮아, 아주 괜찮아.”

탄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카머의 생김새는 굳이 따지자면 평균 이상이었다. 눈이 높은 탄에게는 큰 감흥을 주지 못할 뿐이었다. 평생 거울만 보면 제 얼굴이 있었고, 이제는 곁에 애쉬가 붙어 있으니.

“이러고 다녔으면 루시한테도 안 차였을 텐데요…….”

“그래, 그래. 준비 끝난 사람들은 빨리 나가 있어.”

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독한 헤어 젤 냄새에 정신이 없었다. 이제 애쉬만 남았다. 나머지를 후딱 해치워 두어야, 애쉬에게 온전히 공을 들일 수 있을 것 같아 마지막 차례로 빼놓았다.

탄이 숨을 크게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탈의실 구석에서 오도카니 서 있던 애쉬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뚱한 표정이었다.

“애쉬. 이리 와.”

평소였다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하고 대답했을 텐데. 애쉬가 말없이 묵묵히 다가왔다. 턱에는 한껏 힘이 들어갔고 아랫입술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왜 그래?”

“……아니요.”

“뭐가 아닌데?”

도리도리.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만 내젓는다. 뭐야, 도대체. 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손에 젤을 묻혀 애쉬의 머리카락도 매만지기 시작했다. 애쉬는 잠깐 흠칫할 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탄이 딱딱하게 굳은 애쉬의 눈치를 살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잘생겼네. 누구 애인인지.”

“…….”

이래도 답이 없었다. 이건 너무 이상한데. 수줍어하면서 몸을 배배 꼬아야 정상이었다. 귀라도 빨개지든지. 작게 방긋거리든지. 모든 예상을 어긋나간 반응이었다.

“애쉬. 너 어디 아프냐? 표정이 왜 그래.”

“……어요.”

“뭐?”

애쉬가 눈가를 구기면서 탄을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제법 앙칼지고 매서운 눈빛이었다.

“탄이…… 다른 사람 만졌습니다.”

애쉬가 느릿하게 말을 내뱉고서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엉?”

탄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건 준비를 도와주려고…….”

“아파요.”

“어? 아프다고?”

“열나고 아픕니다.”

탄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애쉬의 이마를 짚었다. 체온은 멀쩡했다.

“아까 전부터 가슴이 계속 아픕니다.”

애쉬가 가슴팍을 들썩거리며 쌕쌕 거칠게 호흡했다. 탄은 얼이 빠진 채로 애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제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는 모습. 애쉬의 얼굴 한가득 떠오른 감정이 무엇인지 탄은 모르지 않았다. 너무 잘 알았다. 다만, 애쉬가 이렇게 표현한다는 게 의외였을 뿐이다.

애쉬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속사포처럼 말을 우르르 쏟아 냈다.

“카머한테. 괜찮아, 아주 괜찮아. 했습니다. 카머, 괜찮아요? 애쉬는요?”

동시에 요즘에는 잘 들리지 않던 텔레파시도 탄의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계속 안 만져 주고 왜 다른 사람들만. 왜. 왜. 왜. 왜……. 가슴 뜨거워. 이상해. 소리치고 싶어. 하지만 탄이…….』

허. 탄이 헛웃음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너 질투해?”

애쉬가 잠시 멍하니 탄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언어를 따라 읊듯이 어색한 투로 중얼거렸다.

“……질투?”

애쉬는 단어의 뜻을 곱씹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가슴팍을 두드리는 통증이 심해졌다. 얼굴에는 열기가 차오르고, 자꾸만 아까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다른 사람을 어루만지는 탄.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 옷깃, 소매, 그리고 신체를.

울컥. 둥그런 불덩이가 가슴에서부터 솟아서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격렬한 기운이 몸을 지배하는 게 느껴졌다. 질투란 몹시 아프고 분노를 동반하는 것이구나, 애쉬는 깨달았다.

탄에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니. 죄를 짓는 듯하여 습관적으로 사과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웬 사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탄의 물음에 애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모……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모르겠지. 네가 잘못한 게 없으니까.”

애쉬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넌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끝내주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놈들이랑은 비교도 안 돼. 네가 질투할 그런 수준이 아니라니까.”

애쉬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탄의 사근사근한 말을 듣자마자, 뜨겁던 분노가 반쯤 가라앉았다. 가슴팍에는 통증 외에도 기분 좋은 떨림이 찾아들었다.

꼴사나워. 애쉬는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꼈다. 몇 초 만에 화가 났다가 두근거렸다가.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꼴이 추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애쉬가 막무가내로 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표정을 숨기고 싶었다.

탄은 휘청거리면서도 애쉬를 받아 냈다. 어떻게 들이박아도 언제나 단단하게 애쉬를 지탱해 주었다. 꽈악. 애쉬가 두 손으로 탄의 날갯죽지 부근을 움켜잡았다. 본능적인 손짓이었고, 평소보다 억센 힘이었다.

이렇게까지 질투할 일이었나. 탄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만, 파들파들 떠는 애쉬가 귀여운 것만은 사실이었다. 얼른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조바심이 드는 와중에도, 실없는 웃음이 터질 정도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도 재주다.

탄은 자신에게 안기느라 구부정해진 애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왜, 아직도 기분 나빠?”

애쉬가 탄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합니다. 나쁜 감정, 나쁜 짓입니다.”

“어떤 게. 질투가?”

“네…….”

“아닌데. 나쁜 짓 아니고 귀여운 짓인데.”

애쉬가 큰 덩치를 움찔거렸다. 탄은 입매에 꾹 힘을 주어 웃음을 참았다.

“……귀, 귀여워요?”

“응. 지금 되게 귀엽다.”

애쉬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을 꺼내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내심은 탄에게 요구하고 싶었다. 그의 행동을 제어하고 싶었다. 감히 해서는 안 될 일 같았지만, 피어오르는 독점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약간은 건방지게 굴고픈 마음은, 애정 어린 확신에 기반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그에게 용인되리란 확신. 약간은 떼를 쓰고 욕심을 부릴지라도.

‘탄은 날 받아 줄 거야. 탄은…… 나를 예뻐해.’

애쉬는 여태껏 바짝 엎드리며 굴종하는 삶만 살아왔다. 아래로 늘 꺾여 있던 목이 아팠다. 몸을 웅크리는 게 습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개를 들어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애쉬는 꽉 감고 있던 눈을 떠서, 시야 가득히 탄의 얼굴을 담았다. 주저하며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에서 저도 모르게 투정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다, 다른 사람 칭찬하면…… 아픕니다.”

“어디?”

“심장…….”

“그랬구나.”

탄은 그 나름대로 집중해서 듣는 중이었다. 토라진 애쉬의 얼굴이 흥미로웠다. 결연한 눈동자를 한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애교스럽게 들렸다.

여태껏 연인이 질투하면 피곤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달랐다. 짜증은커녕 기묘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탄은 애쉬와 몸을 겹칠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순하디순하던 애가 제 욕망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순간마다 흥분했다. 자신이 변태인가 걱정될 정도로.

애쉬는 탄의 부드러운 반응에 힘을 얻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 만지면 싫습니다.”

구속이라고 느껴질 법한 말도 애쉬의 입을 빌려 나오자 애교처럼 들렸다. 집착당하는 걸 좋아하는 취미는 없었는데. 탄은 제 뺨을 긁적였다.

“애쉬만…… 만져 주세요.”

“다른 사람 머리 쓰다듬는 거 싫어?”

애쉬가 상상만으로도 괴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손잡는 건?”

이번에는 커다란 눈동자가 구겨졌다. 억울함에 물든 표정이었다.

“……왜요? 제 손도 있습니다.”

“그러면 애쉬 손만 잡아야 해?”

애쉬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시, 싫어요?”

이대로 몇 번만 툭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을 것만 같다. 탄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짓궂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싫기보다는 불가능하지 않나? 살다 보면 악수도 해야 하고. 일하다 보면 손도 잡게 되고. 아닌가?”

애쉬에게는 미안했지만, 일일이 반응하는 얼굴이 퍽 귀여웠다. 애쉬가 턱에 잔뜩 힘을 준 채로 파르르 떨었다.

“탄의 말이…… 맞습니다.”

마지못해 인정하고서는 입술을 꾸욱 다문다. 논리적으로 탄이 옳다는 걸 알았음에도, 어쩐지 억울했다.

탄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애쉬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장난기를 지우려 애썼다. 슬슬 그만 놀려야겠다. 즐거움과 죄책감이 줄다리기하는 중이었는데, 점차 후자로 기울고 있다.

“하지만! 네가 심장이 아프다는데, 그러면 안 되지.”

애쉬가 속눈썹을 떨면서 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냉큼 그러라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너만 만지도록 애쓸게.”

굳어 있던 애쉬의 얼굴이 슬금슬금 풀렸다.

이런 대답만으로도 기뻐하는 건가. 순수하기는……. 죄책감이 조금 더 짙게 솟아오른다. 탄은 다시금 애쉬에게 잘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행여나 애쉬가 시무룩해져 떠나지 않도록. 그러다 못된 놈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어찔했다.

“……약속입니까?”

“응, 약속.”

애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탄의 날갯죽지를 움켜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스르륵 풀었다.

“이제 마음 안 아파졌어?”

“네…….”

슥슥, 탄이 애쉬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귀여운 녀석. 이런 애를 품에서 놓쳐 밖에 내놓는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자, 그럼 이제 준비 마저 하자.”

탄은 얌전해진 애쉬의 머리카락을 멋대로 휘휘 매만졌다. 늘 자신이 하던 것처럼 깔끔한 포마드 형식으로 다듬었다. 매끈하게 드러난 이마와 이어지는 눈썹 뼈. 그리고 콧대까지. 모두 유려한 선을 이루었다.

총감이 넣어 준 옷도 하나씩 입혔다. 인공 실크로 만든 검은색 셔츠는 부드러웠으며 약간의 광택이 돌았다. 시중에 나오는 것 중 가장 큰 사이즈였는데도, 가슴팍과 어깨 부분이 딱 맞아 팽팽하게 늘어났다. 애쉬의 커다란 흉통이 도드라졌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자 애쉬는 답답해했다. 단추를 두 개 풀고, 타이는 하지 않기로 했다. 재킷과 바지는 민무늬 연회색이었다. 전체적으로 심심한 스타일이라 오히려 화려한 얼굴에 시선을 쏠리게 했다.

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애쉬를 쭉 훑어보았다.

“이거 안 되겠는데…….”

다 꾸며 놓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너무 잘생겼다. 분명히 모든 이들의 이목이 애쉬에게로 쏠릴 것이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이상……합니까?”

애쉬가 답답하게 몸을 조이는 복장에 어색하게 쭈뼛댔다.

“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너만 보겠어.”

“역시…… 이상합니다…….”

“그러게. 너무 수상할 정도로 잘생겼어.”

“네?”

탄이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고민했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게 분장해야 하나.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애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시장인 폴을 비롯하여 실험 관계자들뿐이다. 그들은 애쉬가 시티 홀에 등장한 걸 알아챈 즉시, 애쉬를 제거하려 할 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애쉬를 지켜보고 있다면 어떨까. 상위 구역에 등장한 새로운 얼굴에 흥미를 느낀 이들이 애쉬를 둘러싼다면. 적어도 만찬 도중에는 폴이 애쉬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계획을 좀 수정해야겠다.”

탄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다급하게 세웠던 계획이 조금 더 탄탄해졌다. 그래, 아예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 수밖에 없도록 꾸며 놓자. 시티 홀은 자신들의 가장 빛나고 완벽한 실패작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 * *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이 호버카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탄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아혼은 번쩍이는 드레스를 입었다. 영 불편한 눈치였다. 이번 임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옷을 받자마자 찢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언은 상위 구역에서 10대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 중인 스타일이었다. 체크 무늬가 들어간 멜빵에 베레모를 썼다. 다언이 어색하게 베레모를 매만지다가 애쉬를 발견하고서는 입을 톡 발렸다.

“애쉬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힘 좀 썼지.”

다들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며 탄은 뿌듯해했다. 이 반응을 보니, 만찬에서 이목을 끌겠다는 첫 번째 계획은 성공일 것 같았다. 팔불출처럼 좀 더 자랑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정말로 출발해야 할 때였다.

일행은 네 명씩 나누어 호버카에 탑승했다. 목적지 좌표는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이제 상공으로 떠올라 시티 홀의 레이더망을 무시한 채 쭉 날아가기만 하면 된다.

탄은 가장 앞자리 운전석에 앉아, 호버카끼리 통신망을 연결하고 시동을 켰다. 부우웅. 차체에 진동이 일었다. 운전석 뒤에 일자로 붙은 세 좌석에는 다언, 애쉬, 카머 순서로 앉았다.

탄은 모두 무사히 착석한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비행 모드를 설정했다.

- 목적지. 시티 홀 C-102 승하차장. 운행을 시작합니다.

안내 음성이 차체에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졌다. 곧 호버카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엔진에서 나는 거센 진동이 한참 이어졌다. 탄은 덜덜 몸이 떨리는 탓에, 팔걸이를 양손으로 꽉 붙잡고 버텼다. 복부에 두른 안전벨트가 몸을 짓눌렀다.

목표 높이까지 다다르자, 점차 진동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다 시티 홀 쪽을 향해 차체가 회전하더니, 추진 엔진이 활성화되었다. 부우웅. 부상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진동이 차체를 휘감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탄은 저를 뒤따르는 호버카를 확인했다. 아혼과 다른 공장 사람들이 탄 것이다. 두 대 모두 무사히 궤도에 진입했다. 출발만 정상적으로 되면, 그 후로는 운행이 자동화되어 있어 큰 문제가 없었다.

탄이 숨을 돌리며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피곤한 사람들은 눈 좀 붙여. 이제부터는 안전하니까.”

고속으로 날아가면 시티 홀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벨트를 꽉 붙잡고 있던 다언이 안심하며 눈을 감고 옆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호기심에 두리번거릴 법도 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체력을 충당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언은 전투 인력은 아니었지만, 이번 임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다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밤새 임무를 준비하느라 깨어 있었다. 창에 머리를 대자마자 다언은 곧장 얕은 잠에 빠졌다.

반면 카머는 상기된 표정으로 호버카 아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기 막 반짝이는 것도 있네요. 몇 구역이지?”

높이 떠오르자 캐슬 시티가 전체적으로 시야에 잡혔다. 중위 구역 전광판이 여기서는 작은 별빛처럼 보였다. 아직은 하위 구역 상공을 가로지르는 중이었기에, 바로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탄은 말없이 지면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풍경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이질적일까. 그러다 깨달았다. 경비대에 있을 때는 늘 가장 빛나는 곳에서 어둠에 잠긴 성벽 밖으로 향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라는 걸. 시티 홀에 가까워질수록 시야를 화려한 야경이 채울 것이다.

카머는 혼자 들떠서 눈을 반짝이다가 가운데에 끼어 앉은 애쉬를 힐끗거렸다.

“애쉬. 너는 안 신기하냐?”

애쉬가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애쉬는 애초에 외부 환경에 큰 감흥을 느낀 적 없었다. 어떠한 정보 값으로만 해석될 뿐, 감정을 유발하는 요인은 아니었다. 탄이 끼어 있는 풍경이라면 모를까. 잠시 고민하던 애쉬가 느릿하게 답했다.

“잘 모르겠어.”

카머가 팔꿈치로 애쉬를 툭툭 쳤다. 애쉬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탄을 제외한 타인과의 접촉이 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아까의 질투심이 카머에게 향하는 신경을 더 곤두세운 탓도 있었다.

“그래도 아깝잖아. 아래 좀 봐 봐.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일 수도 있는데.”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탄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카머.”

“말이 그렇다는 거죠, 보안관님.”

탄이 뒤돌아 카머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카머는 서글서글하게 웃더니, 태연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어도 크게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런 것도 보고 가고.”

탄이 이마를 팍 찌푸렸다.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굴지 말라니까.”

“그 정도의 각오까지 하고 여기에 탔다 이 말입니다.”

탄은 다시 꼿꼿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평온과 즐거움을 가장하는 카머의 얼굴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카머가 어떤 심정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번에 죽은 대기병 환자 중 한 명이었다. 63구역에서 죽음이란 요란스럽게 굴 정도로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꿀 만한 힘 정도는 지녔다.

탄은 입을 다물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호버카 아래의 풍경은 점점 환상적으로 바뀌어 갔다. 번쩍이는 네온 불빛. 새벽까지 운행되는 트램 도로. 종종 보이는 일반용 개인 호버카의 지시등. 거대한 홀로그램 전광판이 꿈틀거린다.

63구역에 오기 전에는 탄도 일상처럼 누리던 것들이다. 대낮보다 심야가 오히려 밝았다. 고층 빌딩 사이 빼곡하게 들어찬 가게들. 적당히 번화한 거리 속 펍에서 술을 마셨다.

시티 홀을 좋아했던 적은 없었지만, 알코올에 취해 흐느적거리던 어떤 날에는 63구역에서 탈출하게 된 제 신세를 행운이라 여기기도 했다. 가이드로 발현하지 못하여 고향에 쭉 머물렀다면……. 엄마의 죽음을 막고서 평생 가난하게 살거나, 엄마를 잃고서 평생 가난하게 살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다.

지금은 저 네온이 그립거나 반갑지 않았다. 누군가 시간을 되돌리고 저 모든 것을 다시 누릴 기회를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았다.

요란한 불빛과 술이 기껍게 느껴지려면, 오늘의 계획이 성공한 후여야만 했다. 그렇게 일상을 되찾고 나서는 애쉬를 데리고 펍에 가 보고 싶기도 했다. 좋아하려나. 술을 먹어 본 적은 있을까. 술버릇은 뭘까.

운전대에 한 손만 올려놓은 채 탄이 물끄러미 지면을 바라보았다. 소소한 상상 끝에 결심이 굳어진다.

“……난 오늘이 마지막이면 아쉬워서 눈 못 감아.”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못 해 본 게 아직 많았다. 애쉬랑 술도 먹어 보고, 다른 사람이랑 손잡는지 안 잡는지 감시도 받아야 한다. 둘 다 맨정신일 때 두 번째 섹스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오늘은 절대로 죽을 수 없었다.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로 보일 정도로 위험한 계획에 뛰어들고 있지만, 탄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죽이러 가는 것이다.

* * *

호버카가 승하차장으로 천천히 착륙한다.

고공비행 호버카는 외관만 보았을 때는 일반 호버카와 다를 바 없었다. 엔진 작동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별 의심을 사지 않고 호버카가 지면에 닿았다. 우우웅. 착륙 내내 덜컹거리던 차체가 조금씩 얌전해졌다.

달칵. 탄이 엔진을 끄고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가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탄을 응시했다. 저절로 달래 주고픈 얼굴이었지만, 당장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탄이 단호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들 가. 다들 조심하고,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메인 홀에서 보자.”

한 명은 비상 상황에 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승하차장에서 대기했다. 나머지 일곱 중 여섯은 초대받은 사람인 양 파티장으로, 탄은 지하로 향했다.

일행들이 적당히 시선을 끌며 시티 홀 정문으로 걸어갈 동안, 탄이 몰래 뒤로 돌았다. 모두가 제각기 떠맡은 임무가 있다. 탄은 시티 홀 청소부로 위장한 채 지하 청소 구역으로 들어가야 했다.

선생의 홀로그램 워치에는 건물 내부 지도가 저장되어 있었다. 보안 때문에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부분까지 포함된. 세부 관리 시설도로 가스관 위치까지 확인했다. 탄은 이렇게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꾸렸다.

누군가는 교란하고, 또 누군가는 잠입한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시티 홀에 도착한 순간, 다음 기회란 없었다. 이번에 해내야 했다.

꾹. 탄이 위장용으로 쓴 두툼한 안경을 매만졌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문 앞에 섰다. 잡역부만 드나드는 통로라 허름했고 중앙과 외떨어졌다. 문에는 보안 장치가 달려 있었다. 시티 홀 관리 시스템에 생체 정보가 저장된 이들에게만 반응하여 열리는 문이었다.

하지만 보안 장치를 무력화할 방법이 하나 있었다.

1급 보안 정보가 담긴 제어 칩. 애쉬와 선생의 뇌에 박혀 있던 것이다. 제어 칩에서 흘러나오는 전기 신호는 시티 홀의 모든 보안 장치를 해제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난 지금에야, 탄은 접선지 지하에서 일어났던 기이한 일의 진상을 깨우쳤다.

당시 문에 달린 보안 장치가 애쉬에게만은 발동하지 않았다. 원래는 폭발해야 할 것이 잠잠했다. 애쉬는 보안 장치 아래를 지나가며 혼란스러운 텔레파시를 쏘아 댔었다.

『달라요. 하, 할 수 있어요. 해야 합니다. 지, 진화를 증명……하고, 그러, 그러려면 저, 전기, 전기 신호를. 터, 터지면 쓰레기장으로 갑니다. 애쉬는 터지지 않았어요. 저는 계속…… 괜찮았…….』

이 모든 게 애쉬의 머릿속에 제어 칩이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애쉬가 시티 홀이 1급 보안으로 다루었던, 공들인 피조물이었기에. 게다가 칩이 잘 작동되는지 여러 번 테스트까지 겪었던 것 같다.

시티 홀 내부를 자유로이 드나들려면, 그 칩이 필요했다. 다행히 애쉬의 것 말고도 여분이 하나 더 있었다.

선생의 뇌 안에 삽입된 제어 칩. 오랫동안 실험을 주재해 왔던 선생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는 제 실험의 산물을 고스란히 내놓아야만 했다. 제 두개골을 열어서.

선생은 머리가 갈린 채 죽었다. 공장 사람들 여럿이 달라붙어 작업했다. 질척한 뇌수와 핏속에서 제어 칩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이동형 배터리 안에 칩을 넣어 전류를 공급했다. 지금, 그 칩은 탄의 바지 주머니 속에 있다. 그럴 리 없지만,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삑. 탄이 문 앞에서 몇 초 머무르자, 자동으로 보안 장치가 해제되었다. 달칵. 안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탄이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탄이 숨을 몰아쉬었다. 첫 단계는 무사히 통과했다. 제어 칩만 있으면, 이대로 실험 센터까지 드나들 수 있다. 문제는 시티 홀에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 곳곳에는 이동식 CCTV가 날아다닌다. 주먹 반절 정도의 구체였으며, 정해진 궤도를 따라 끊임없이 내부를 순회했다. 녹화된 영상은 곧장 관제 센터로 전송되었다. 그 외에도 몇몇 주요 시설 앞에는 고정형 CCTV까지 설치되어 있다.

청소부가 1급 보안 시설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면, 관제 센터에서 경보를 울리고 시티 홀 가드들이 달려올 것이다. 떼로 몰려올 그들을 탄이 한 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잠깐은 따돌린다고 쳐도, 실험 센터의 데이터를 빼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가 시선을 교란해야만 했다. 탄이 실험 센터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도록.

탄은 지금쯤 파티장에 도착했을 다른 일행들을 생각했다. 잘 해낼 것이다. 만약에 무언가 어긋난다면……. 남은 결말은 하나였다. 탄은 실패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발을 내디뎠다.

타닥, 타닥. 지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중간에 올라오는 잡역부 한 명과 마주쳤다. 탄은 잠깐의 멈칫거림도 없이 고개만 까딱이고 그를 태연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긴장감은 탄에게 익숙했다.

별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속삭인다. 인간보다 열 배는 거대한 뮤턴트를 상대할 때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를 다스리는 훈련을 평생 받아 왔다.

탄은 알았다.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 한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 뮤턴트나 인간이나, 어느 순간엔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구인류를 파멸시킨 뮤턴트도, 그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높은 성벽을 쌓은 캐슬 시티도. 자그마한 실수는 할 수밖에 없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드는 게 중요하다.

탄은 차분하게 지하 1층 복도로 진입했다. 창고에 들러 카트를 꺼냈다. 가장 밑바닥에는 가슴팍에 숨겨 둔 총을 깔아 두고, 그 위에 청소 도구를 쌓아 가렸다. 카트를 부드럽게 밀면서, 그는 실험 센터 쪽으로 슬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이번 정기 만찬의 컨셉은 복고였다. 인류의 최전성기라고 불리던 21세기의 사치스러운 파티장을 따라 했다. 몇 안 되는 복원된 고대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을 덧칠했다. 구세계 인류가 본다면 이질적으로 느껴질 풍경일 테지만.

조명이 번쩍이는 파티장 안. 각기 맡은 임무에 따라 둘씩 묶여 다녔다. 애쉬는 아혼의 옆에 딱 붙어 서 있었다.

흐읍. 애쉬가 숨을 참았다. 모든 게 너무 번잡스럽고 화려했다. 학교나 63구역은 삭막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지금 같은 활기참은 애쉬에게 오히려 메스껍게 느껴졌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술과 음식이 보였다. 모두가 먹고도 남을 법한 양이었다. 애쉬는 음식이 넘쳐흐르는 꼴이 마치 길목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보였다.

아혼은 긴장한 애쉬의 팔꿈치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팔짱.”

애쉬가 뻣뻣하게 팔을 구부렸다. 아혼은 능숙하게 팔짱을 끼고서는 애쉬를 이끌며 걸어갔다.

파티장에 입장하는 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이온 총감이 구해 온 초대장을 내밀자, 가드가 무기 탐지기로 몸을 슥슥 훑을 뿐 별다른 검사를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아혼은 애쉬에게 달라붙은 채로 작게 말했다.

“좀 웃어 봐. 왜 이렇게 굳어 있어?”

“……웃음이 안 나옵니다.”

“여긴 파티라고.”

“하지만 탄이 걱정됩니다.”

“그 양반은 알아서 잘할 거다.”

“하지만.”

“걱정되면 그만큼 우리가 잘해야 해.”

끄덕끄덕.

애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둘이 맡은 임무는 어찌 보면 간단했다. 만찬에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붙잡아 두기. 다른 일행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작업할 수 있도록.

우선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반쯤 성공이었다. 여러 시선이 애쉬에게로 꽂혀 들었다.

상류층 만찬에는 숱하게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고 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애쉬 같은 인물은 흔치 않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낯선 얼굴을 보며 몇몇 이들이 속삭였다. 유명 인사 자제는 아닐 테다. 어린애도 아니고 저 나이대에 이곳에 처음 왔을 리는 없는데. 저 남자는 누굴까?

파티장에서는 요란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혼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웅얼거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어후.”

하위 구역 사람들에게 음악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아혼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자장가나 흥얼거림에만 익숙했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음향 효과들이 귀를 따갑게 두드렸다. 거부감이 드는 소리였다.

소음부터 착장까지, 아혼은 지금 저를 둘러싼 모든 게 불편했지만,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혼은 상위 구역에서 유흥이나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특징적인 옷차림을 흉내 냈다. 악성 곱슬머리를 일부러 풀어서 풍성하게 어깨를 뒤덮게 했다. 머리카락 이곳저곳에 번쩍이는 장식도 꽂았다.

지금의 아혼은 공장 리더가 아닌 다른 이를 연기해야만 했다. 3구역에서 새 극장을 설립하려고 계획 중인 여자. 중위 구역 출신이지만, 줄줄이 사업을 성공시키고 위로 올라온 수완가.

그리고 옆에 딱 붙어 있는 애쉬는 아혼이 우연히 발견해 낸 인재 역할이었다. 곧 개장할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서게 될, 아름답지만 어리숙한 신인. 두 사람은 연극 산업에 관심이 많은 후원자에게 초대받았다는 설정이었다.

점점 더 많은 시선이 둘에게로 꽂혀 들었다. 아혼이 팔짱 낀 손을 까딱거리며 속닥거렸다.

“웃는 게 어려우면 아예 도도하게 입 꾹 다물고 있어. 그게 낫겠다. 자세 바로 하고.”

끄덕끄덕.

애쉬가 어색하게 꿈틀거리던 얼굴 근육을 다잡았다. 웃음기를 싹 지운 채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위이잉. 이동식 CCTV가 공중을 떠돌다가 애쉬 옆을 느릿하게 날아서 지나갔다. 관제 센터에 애쉬의 모습이 그대로 전송되었을 것이다. 시티 홀에 의도적으로 노출된 그 순간,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애쉬에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아혼은 눈웃음을 지으며 한 발짝 내디뎌 애쉬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 자신을 통해 대화해야만 한다는 의도를 빤히 내비쳤다.

“저희 둘 다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그러시군요, 마담.”

상류층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호칭에 아혼의 등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속이 메스껍다. 그래도 이 나이까지 63구역에서 리더로 살아남으며 쌓아 온 노련함으로 표정을 가장해 냈다.

남자가 물었다.

“어느 분의 초대로 오셨는지?”

“하일로 님입니다.”

다이온 총감은 여러 인맥을 동원하여 여분의 초대장을 긁어모았다. 그 인맥 중 한 명이 하일로였다. 때마침 하일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 만찬에 참가하지 못했다.

“하일로 씨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안 보이시는군요. 아프다고 들었는데.”

“네. 편찮으셔서요.”

“만찬 데뷔에 후원자 없이 오셨다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죠.”

“아, 괜찮습니다. 지금은 이목이 너무 쏠려 있어 조금 부담스럽네요. 이 친구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우선 제 명함만이라도 받아 주시지요.”

아혼은 급조해서 찍어 낸 명함을 남자에게 건넸다.

“다음 달에 극장이 오픈될 예정이에요. 이 친구는 다음 분기에 바로 데뷔할 거고요.”

“흥미롭군요.”

아혼이 적당히 남자를 물리치는 동안 애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며 탄이 무사할지 생각 중이었지만, 겉으로는 냉한 기운이 풍겼다. 과묵한 미남은 신비로움을 불러일으켰다.

아혼은 애쉬를 이끌고 구석진 곳으로 걸어갔다. 고급 배양육과 유전자 조작 과일들이 그릇에 놓여 있었다. 모두 신선 제품이었다. 아혼이 과일 조각 하나를 입에 밀어 넣으며 웅얼댔다.

“입에 경련 나겠네.”

평소에 쓰지 않던 말투를 흉내 내느라 얼굴 근육이 온통 긴장했다. 허리 부분에 들어간 셔링 때문에 몸도 갑갑했다.

“이놈의 드레스. 일만 마무리되면 찢어 버려야지. 너도 셔츠 답답해 보인다.”

“답답합니다…….”

애쉬가 슬쩍 몸을 비틀면서 미간을 좁혔다. 어깨와 흉곽을 압박하는 천의 감촉이 어색했다. 잔뜩 쌓여 있는 음식을 봤음에도 허기가 들지 않았다. 그저 초조함을 억누르려고 계속해서 애썼다. 지하 1층을 맴돌고 있을 탄이 걱정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힐끗거리며 눈치만 볼 뿐, 이쪽으로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공기가 미묘하게 긴장해 있었다. 머리카락을 올리고 인상을 쓴 애쉬는 평소보다 훨씬 차갑고 거친 분위기를 풍겼다.

그때 파티장 안에 시티 홀 가드들 몇 명이 추가로 들어왔다. 합성육 완자를 우물거리던 아혼이 급하게 꿀꺽 삼키고서는 말했다.

“왔다.”

가드들은 스르륵 들어와서는 곳곳으로 퍼졌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애쉬를 향하고 있었다.

“좋아. 계획대로야.”

아혼이 고기 파이 한 조각을 마지막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 이제 힘을 써야 할 때였다.

애쉬의 등장을 알아챈다면, 폴이 분명히 가드들을 이쪽에 증원하리라 생각했다. 예상이 맞았다. 시티 홀 윗선과 가드의 관심이 이쪽에 쏠리는 동안에는, 다른 곳이 한산해질 것이다.

애쉬는 유혹적인 미끼가 되어야 했다. 탄이 안전하게 잠입할 수 있도록.

* * *

애쉬와 반대쪽 구석에 서 있던 다언과 카머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카머가 고개를 낮추어 속삭였다.

“가드들이 저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다언이 꿀꺽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목이 탔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움직이자.”

카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때를 살폈다. 만찬에는 총 여섯 명의 일행이 둘씩 짝지어 있었다. 애쉬가 교란하고 다른 이들은 애쉬를 지킨다. 그동안 카머와 다언은 이 혼란의 장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근데 이거 되게 맛있다.”

카머가 고기 파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난 과일만 먹어도 체할 것 같은데. 참 신경도 좋아.”

“이런 음식을 언제 또 먹어 보냐고. 먹고 죽은 뮤턴트가 때깔도 좋다고 했어.”

그때 애쉬와 아혼이 사람이 적은 외부 테라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티장 곳곳에 퍼져 있던 가드들이 은근하게 이동하며, 둘을 따라가는 게 보였다.

다언과 카머는 말없이도 지금이 때라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고요한 눈짓을 교환하고서는, 조심스럽게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드 인력 대부분이 애쉬 쪽으로 쏠릴 때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다언의 머릿속에는 시티 홀 내부 지도가 들어 있었다. 외워 둔 지도를 곱씹으며 CCTV 사각지대로 향했다.

이동식 CCTV도 한 시간에 한 번씩만 지나가는 경로. 고정형 CCTV에는 애매하게 잡히지 않는 자그마한 구석. 그 위에는 환풍구가 있었다.

이 임무에는 손이 정교하고 빠르며, 몸집이 작고, 길눈이 밝은 자가 필요했다. 그 방면에서는 63구역에서 다언이 가장 뛰어났다. 다언은 문득 보안관 사무소에서 탄과 면접을 본 날을 떠올렸다.

<내세울 특기 같은 건 좀 있나?>

<글쎄요.>

<아무거나 좋아. 아주 사소한 거라도.>

<음. 문을 잘 따요.>

<오…….>

<63구역에서 그거로는 제가 최고라고 할 수 있어요.>

<부관으로 일하면서 문을 강제로 딸 일이 그렇게 흔치는 않을 텐데.>

그 흔치 않은 일을 지금 해야만 했다.

카머가 환풍구 바로 아래에서 몸을 기울여 다언에게로 등을 내밀었다. 다언은 망설임 없이 카머의 어깨 위에 앉았다. 쑥, 카머가 일어서자 다언의 손바닥이 환풍구에 무리 없이 닿았다.

다언은 머리에 꽂아 두었던 핀을 빼냈다. 핀 안쪽에 기다란 철심과 락픽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 연장이면 웬만한 자물쇠와 나사 등은 다 풀어 버릴 수 있었다.

다언이 환풍구 나사를 하나씩 철심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손이 작았지만 악력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 목말을 태우고 있는 카머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잘돼?”

“거의 다 했어.”

“벌써?”

“응.”

대답과 함께 투둑, 환풍구 문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다언이 풀어낸 나사를 카머에게 건넸다. 나머지도 빠르게 작업한 후, 다언이 팔을 환풍구 안쪽으로 쭉 뻗었다.

끙. 카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언을 더 위로 올리려 애썼다. 다언이 잠깐 버둥거리다가 환풍구 통로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통로 안쪽은 캄캄했다. 아래에서 카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언을 올려다보았다.

“괜찮겠어?”

“당연하지. 문은 다시 붙여 놔. 나사는 살짝만 조여 놓고. 돌아오면 바로 떼어 낼 수 있게.”

“조심해.”

“너나 조심해.”

다언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자그마한 간이 램프를 켜서 앞을 비추었다. 그렇게 환풍구를 잇는 통로를 네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다언이 몸을 웅크려야 할 정도로 통로는 좁은 편이었다. 여기를 빠르게 드나들 만한 사람은 다언뿐이었다.

다언은 숨이 차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기어갔다. 얼른 맡은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파티장에 있는 일행들이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지 몰랐다.

다언은 제 머릿속에 새겨 둔 시티 홀 평면도를 따라 움직였다. 간간이 통로 아래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나 화장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마다 잠깐 무릎걸음을 멈추고서 숨을 참다가 다시 출발했다.

다언은 인기척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부모 없이 63구역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의 것을 몰래 훔치는 기술은 필수였다. 지금은 훔치는 게 아니라, 파괴하러 가는 중이지만.

몇 분 후 다언이 멈춘 곳은 1층 왼쪽 끝. 파티장과 가장 멀리 떨어진 창고였다. 드득, 드드득. 커다란 환풍기가 느릿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날개 사이로 창고 내부가 보였다. 다언이 차분하게 아래를 살폈다. 감옥의 창살 같은 빗금이 다언의 얼굴 위에 그림자 졌다. 환풍기 날개가 다언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감옥의 창살처럼 보이는 빗금이 일렁였다.

창고에는 사람이 없었다. 만찬이 한창 진행 중인 지금. 이 창고에서 가져가야 할 비품은 미리 준비해 파티장 근처에 두었을 것이다.

만약에 창고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여야 했다. 무고한 인명 피해를 줄이는 게 이번 계획의 지향점 중 하나였지만, 다언은 필요하다면 살인까지 염두에 두었다.

다언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살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는 살 수 없다. 기꺼이 죽이고자 하는 마음마저 지니고 있어야, 악착같이 목숨줄을 지키는 법이다. 적어도 캐슬 시티에서는 그렇다.

다언은 느리게 돌아가는 환풍기 날개를 바라보았다. 반묶음 할 때 썼던 커다란 머리핀을 날개 사이에 끼워 넣었다. 끼긱, 드드득. 날개가 움찔거리면서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틈을 타서, 날개 중앙 엔진 부분을 해체했다.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기계를 재조립하고 해체하는 일은 공장에서 지겹도록 많이 해 보았다. 금세 엔진을 고장 냈고, 날개 전체를 환풍구에서 떼어 냈다. 얼굴에서 땀이 주르륵 흐르고, 힘을 과하게 쓴 손목은 저릿저릿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문제는 그냥 떨어지기에는 높이가 꽤 있다는 것.

하지만 다언은 주저하지 않았다. 환풍구 외곽을 손으로 꽉 붙잡은 채 한 다리씩 아래로 내렸다. 팔심으로 대롱대롱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손을 확 놓아 버렸다.

탁! 바닥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지이잉. 하지만 발목부터 무릎까지 아릿한 진동이 덮쳤다.

“윽.”

다언이 입술을 깨물어 통증을 참았다. 골이 울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으나,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창고 내부에는 합성 가스관이 벽을 둘러 지나가고 있었다. 외부에는 가스관이 보이지 않게끔 마감되어 있지만, 이곳만은 달랐다.

다언은 절뚝거리면서 가스관으로 다가갔다. 밸브를 고정하는 링을 헐겁게 만들어야 했다. 완전히 해체할 필요도 없었다. 살짝 어긋나가게만 해도 가스가 새어나갈 것이다. 소량의 합성 가스만으로도 거센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철심과 락픽으로 밸브 잠금 부분에 틈을 만들었다. 다언의 손바닥은 어느새 살갗이 터져 있었다. 이마를 손으로 닦아 내자, 땀방울이 상처에 닿아 따가웠다.

다언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바삐 둘러보았다. 이제 다시 환풍구 통로로 올라가야만 했다. 내려올 땐 손을 놓고 뛰면 그만이었으나, 그 반대는 쉽지 않았다.

밟고 갈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다행히 자그마한 3단 사다리를 찾아냈다. 높이가 애매했지만, 더 높고 큰 사다리를 찾을 여력은 없었다.

다언이 3단 사다리를 환풍구 아래에 세웠다. 욱신거리는 발목 통증을 참으며 사다리 끝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팔을 쭉 뻗으니 아슬아슬하게 환풍구 끝자락에 손가락이 걸렸다.

탁! 다언이 사다리를 발로 차면서 도약했다. 간신히 통로 안쪽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온몸에 힘을 주어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갔다.

“하.”

다언이 잠시 어두컴컴한 통로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한계치까지 힘을 끌어다 쓴 것 같았다. 사지가 욱신거렸다.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으나,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었다.

다언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멜빵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홀로그램 워치를 꺼냈다. 시티 홀에서 보낸 선생이란 작자의 물건이었다.

다언이 탄에게 배운 대로 워치를 조작했다. 보안관 사무소에서 조금 일해 봤다고, 이제는 홀로그램 화면이 제법 익숙했다. 잠시 후, 워치에서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 10분 후 자폭 모드가 발동됩니다.

“됐다…….”

설정을 마친 홀로그램 워치를 가스관 근처로 던졌다. 10분 동안 무색무취의 합성 가스는 조금씩 누출되어 공기 중을 떠돌 것이다. 워치의 자폭 모드가 발동되면, 불꽃은 가스를 만나 엄청난 폭발을 일으킬 테다. 아마 건물의 왼쪽 벽면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워치의 자폭 모드만으로는 시티 홀이란 최상급 보안 건물에 흠집을 내기엔 부족하리라 생각했다. 접선지에서 보았듯이, 사람에게는 큰 피해를 주어도 낡은 2층 건물을 모조리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더 거대한 충격이 필요했다. 시티 홀 관리 시스템을 잠시나마 마비시킬 만한.

다언은 신음을 참아 가며 왔던 길을 되짚어 기어갔다. 10분 동안 폭발 지점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더럽게 아프네…….”

접질린 발목이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내일은 붓기 때문에 걷기 힘들 것 같았다. 내일의 해를 맞이할 수 있을지 아직 미지수였지만.

폭발까지 600초. 다언은 자폭 모드를 설정한 직후부터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45, 46, 47…….”

작은 목소리로 카운트다운 하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땀이 들어가 따가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면서.

* * *

그 무렵, 탄은 실험 센터 근처 복도를 오가면서 청소하고 있었다. 위잉. 이동식 CCTV 하나가 탄을 스쳐 지나갔다. 태연한 척하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초조함이 피어올랐다.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제때 수행해야만 계획이 성공한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다. 주어진 자원 내에서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었을 뿐이다.

탄은 안경 너머로 실험 센터 입구를 곁눈질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으나, 문 옆에는 보안 장치가 달려 있었다. 일개 청소부는 저곳의 보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누군가의 뇌에 박혀 있던 칩이 있다면, 사정이 달라지지만.

이번 임무의 마지막 퍼즐은 다언이 갖고 있었다. 괜찮을까. 잘하고 있을까. 자연스레 걱정이 샘솟았다. 너무 위험한 일을 맡겼다. 본인의 의지가 강했고 더 좋은 대안이 없던 상황이라 하여도, 불편한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다.

탄이 입술을 잘근 짓씹을 때였다. 쿠우웅! 순간 거센 진동이 모든 벽을 타고 전달되었다. 꼿꼿하게 서 있던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해냈구나. 탄은 비틀거리며 생각했다. 곧바로 균형을 다잡고 실험실 입구 쪽으로 몸을 틀자마자, 탁.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덮쳤다.

일시적인 정전이었다. 창고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나며 발전기도 함께 고장 났다. 전력 시스템에 이상이 감지되자, 잠시 전기 공급이 끊긴 것이다.

타닥. 타닥. 탄은 어둠 속을 뛰었다. 아까 전부터 입구로 향하는 길을 눈에 익히고 있었다. 장애물 유무와 보안 장치의 위치까지.

정전 상태는 길지 않을 것이다. 대개 1~2분이면 비상 전력 시스템이 가동된다. 그 전에 센터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센터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관제 센터에서 늦게 알면 알수록 좋았다. 탄의 목표는, 실험에 관련한 실증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교란 작전을 두 개 덧댄 이유였다. 애쉬가 가드들을 교란하는 사이, 다언이 폭발을 일으켜 또다시 교란을 일으켰다. 여럿이 모여 만들어 낸 자그마한 빈틈을, 탄이 뚫고 들어간다.

전력이 끊긴 지금, 고정형 CCTV는 작동을 멈추었고 관제 센터 모니터에는 불빛이 나가 있다. 장치 내부 배터리로 작동하는 기기들만이 살아 있었다.

예를 들면, 입구 옆에 달린 보안 장치.

어둠 속에서 탄이 팔을 쭉 내뻗었다. 탁. 딱딱한 무언가가 손바닥과 맞닿자마자, 드르륵.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됐다. 탄이 재빠르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선은 문 옆벽에 몸을 숨긴 채로,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도 전기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탄은 가쁜 제 숨소리를 억누르려 애썼다.

우웅. 실험 센터의 입구가 닫힌 순간.

탁. 탁. 탁. 탁. 어두컴컴하던 공간에 차례로 불빛이 들어왔다. 전력 시스템이 재가동된 것이다.

탄은 시야를 덮치는 전등 불빛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잠시 눈앞이 부옇게 물들었다가, 찬찬히 사물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가장 처음 보인 것은,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통로였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낡고 투박한 엘리베이터.

탄은 죽기 전 선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CCTV가 없어요. 관제 센터에서도 알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니까요. 실험 영상은 저희가 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신 칩을 소지하지 않은 개체가 들어오면 내부에 경고 시스템이 울려 퍼지고요.>

탄은 선생의 뇌수에서 꺼낸 제어 칩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조심스레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뎌 보았다.

두웅. 통로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은 평온하고도 고요했다. 마치 새로운 방문자를 반기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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