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환상의 표백 세계
정전된 파티장.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쉼 없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불안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젖은 숨소리 사이로 간간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혼란 속에서도, 애쉬는 여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였다.
탁. 파티장의 불빛이 돌아온 순간.
“컥.”
애쉬는 시티 홀 가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호흡 부족으로 기절한 가드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사이 아혼이 잽싸게 가드의 무기를 빼내 챙겼다.
요란한 폭발음이 들린 이후, 약 1분간 이어진 정전. 애쉬에게는 어둠이 오히려 득이었다. 경계 태세를 유지한 채 애쉬를 주시하던 가드들은 우왕좌왕했지만, 애쉬는 어둠을 뚫고 날쌔게 움직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세 명부터 차례로 처리했다. 급소를 때려 기절시켰다. 다시 파티장이 밝아졌을 때, 이제 애쉬의 손에는 무기가 여럿 들려 있었다.
“악!”
바닥에 쓰러진 가드를 발견한 이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순식간에 만찬은 엉망이 되었다. 다른 가드들은 몇 초간 얼이 빠져 있다가, 애쉬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때 애쉬는 이미 아혼과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에 있던 다른 일행들도 슬슬 움직였다. 이제 파티장을 무사히 빠져나가, 나머지와 합류하면 된다.
실탄이 여기저기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애쉬는 주변 기물을 사용해 피했다. 총알이 적당히 스쳐 지나가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정강이 쪽에 뜨끈한 피가 흐르고 있다. 아혼의 뒤에 딱 붙어 그녀를 엄호하며 뛰어갔다. 아혼도 작은 체구가 아니었으나, 애쉬에게 몸이 완전히 가려졌다.
가드들은 쉽게 레이저총을 쓰지 못했다. 폭발 반경이 컸기에, 표적 외 민간인까지 다칠 위험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죄다 캐슬 시티의 최상류층. 폴은 다른 피해가 없게끔 조심스레 표적을 제거하거나 포획하라고 명령했다.
탕! 탕! 결국에는 실탄 총을 쏴 댔는데, 빠르게 뛰어가는 애쉬를 맞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팍! 심지어 표적이 아닌 이가 총알에 맞았다. 살점이 터져 나가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바닥에 흐른다. 쌓여 있던 음식물 위에 핏방울이 튄다. 공포에 젖은 비명이 파티장을 뒤덮었다.
애쉬는 아혼을 엄호하면서 간간이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총구를 겨누었다. 그의 총알은 빗나가지 않았다.
문에 다다랐을 때 애쉬가 아혼을 휙 떠밀며 말했다.
“아혼. 먼저.”
아혼부터 문밖으로 내보내고서, 애쉬가 제대로 총을 움켜잡았다. 파티장에 남아 있는 가드는 셋. 이들은 다 정리해 놓는 것이 좋을 테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연달아 총성이 울려 퍼졌다. 문에 기대고 있던 아혼도 빼꼼 몸을 내밀어 한 명을 처리했다.
“끝?”
아혼의 물음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드가 모두 쓰러진 걸 확인한 후, 망설임 없이 뛰어갔다. 파티장 반대쪽에 있던 공장 사람들도 무사히 합류했다.
애쉬는 제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심장 고동을 들었다. 평소보다 호흡이 빠르게 이어졌다. 세 군데나 총알이 스쳤다. 피격 당시에는 엄청난 통증이 몸을 헤집었지만, 바로 아물기 시작했으니 상관없었다.
부상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관제 센터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나면, 곧 다른 이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폭발 화재를 진압하려 몇몇은 빠질 테니, 그렇게라도 인력이 나뉘는 게 다행이었다.
그때 환풍구 근처 골목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카머와 다언이었다. 다언은 카머의 등 뒤에 업혀 있었다. 아혼이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발목이 좀 접질린 것뿐이에요. 보다시피 멀쩡해요.”
다언이 말했고, 카머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끙. 카머가 다언을 고쳐 업으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갑니까? 파티장 상황은 어땠어요?”
아혼은 빼앗은 무기들을 일행에게 하나씩 건네면서 답했다.
“지금까지는 괜찮아. 바로 움직이자. 금방 다른 놈들이 따라붙을 거야.”
애쉬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앞장섭니다.”
앞을 막는 누군가가 나오면, 무작정 다 밀어 버릴 작정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탄이었으므로. 정보를 빼내러 지하로 간 탄을 지켜야만 했다. 그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아혼은 뒤늦게 핏물에 젖은 애쉬의 정장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야, 너 다친 거 아니야?”
“괜찮습니다.”
“아니, 피가…….”
“탄에게 가야 합니다.”
애쉬가 대화를 일축하고 발을 내디뎠다. 탄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아직 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 * *
끼익. 끼익.
낡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골조가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탄이 입술을 깨물었다. 엘리베이터 사방은 막혀 있었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밖을 볼 수 없으니 갑갑했다. 도대체 이놈의 실험 센터는 얼마나 지하 깊숙이에 있는 건지.
심지어 무전 신호마저 끊겼다. 정전된 걸 보니, 얼추 계획의 중반부까지는 잘 넘긴 것 같은데……. 불안했다. 끼익. 끼익. 음침한 소리를 듣고 있자 소름이 끼쳤다.
쿵!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거대한 진동이 일면서 탄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요란한 소리가 한참 귓가를 메아리쳤다. 진동이 희미해졌을 즈음, 엘리베이터 철문이 아주 느리게 열렸다. 드드득. 노후화한 기계에서 나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점점 문틈으로 부옇게 빛이 새어 들어왔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탄은 엘리베이터 가장자리에 최대한 몸을 숨긴 채로 기다렸다.
쿵!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리면서 고정되었다. 탄이 숨을 참으며 속으로 열까지 셌다. 자신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청소부인 척할 때 카트 밑바닥에 숨겨 두었던 레이저총을 움켜잡았다. 느릿하고 조용하게 몸을 돌려, 한 발짝씩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내디뎠다. 그렇게 제 앞에 빼곡하게 펼쳐진 풍경을 마주한 순간.
손끝에 힘이 풀릴 뻔했다. 탄이 입가에 팽팽하게 힘을 주었다.
교란, 현혹, 기만. 눈앞의 공간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들이다.
이곳은 정말 학교라고 불릴 만하게 꾸며져 있었다. 음산한 기운을 풍길 줄 알았으나, 정반대로 지나치게 밝았다. 애쉬에게 전해 듣기로는 외관은 평범한 곳이라고 하였다. 익숙해진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복도 천장에는 규칙적으로 전등이 달려 있었다. 새하얗지 않고 따스한 노란빛을 뿜어내는 등이었다. 벽지는 연두색이었다. 꾸준히 관리하며 교체까지 하는 건지, 벽지가 낡지 않았다. 쭈글쭈글하게 울어 버리거나 찍힌 흔적도 없었다.
대신 벽 곳곳에 귀여운 장식품이 걸려 있었다. 잘 관리된 벽지 중간에는 아이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아이가 자주 손을 대는 곳이라면, 더러워져야 정상인데.
낙서는 누군가의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그 아래에 삐뚤빼뚤 글씨도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요!
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무장한 놈들이 여럿 달려들어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쪽이 마음은 편할 것이다. 기만과 통제로 꾸며진 공간 속으로 어렵사리 발을 내디뎠다.
복도 양옆에는 여러 방이 있었는데, 죄다 닫힌 채였다. 창이 달린 것도 아니라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
저 방문을 열면, 애쉬와 같은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 해맑은 기만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제어실. 제어실로 가야 해. 탄이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곳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걸어갔다. 오른쪽, 왼쪽, 그다음 또 왼쪽. 제어실까지 가는 동안 코너가 나올 때마다 외운 방향대로 향했다.
탁. 탁. 저벅저벅 걸어가는 탄의 발걸음 소리만 기나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만큼 기괴했다.
아이들이 모인 곳은 시끄러워야 정상이었다. 부산스럽고 어지러워야 했다. 그러나 여기는 엄격한 계획하에 꾸며진 모형일 뿐이었다. 굳게 닫힌 방문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탄은 군데군데 새겨진 낙서를 힐끔거렸다. 제어실에 가까워질수록 낙서의 내용이 기괴해졌다. 입이 바늘로 꿰매진 사람. 그러나 눈은 웃고 있다.
그 옆에 적힌 글자들.
[선생님 말을 잘 들어요.]
[행복해요.]
[루]
루. 탄은 익숙한 이름을 속으로 읊었다.
이곳에 애쉬도 있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끔 가이딩 받을 때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꾸며진 가정집으로 갔겠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세뇌당한 아이들은 밖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지하에 자리 잡은 이곳이 진화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쉬는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을 거부했다.
돌연변이는 바깥을 꿈꾸었다. 예상 가능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실험 도중에 탄생한, 예상 밖의 인간. 별종은 이곳의 살균된 공기가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탄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애쉬를 계속 생각했다. 안압이 치솟았다. 눈가가 뻐근해지고 총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분노와 동시에, 비로소 애쉬라는 존재를 완전히 이해한 것만 같았다.
직접 와 보니 알겠다. 이곳의 공기가 얼마나 사람을 납작하게 짓누르는지. 순진무구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애쉬의 눈을 떠올렸다.
이 기괴한 세계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표백된 인간을 만들어 내려는 욕망도.
탁. 한참 만에 탄의 다리가 멈추었다. 탄이 제어실 문 앞에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방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문 옆에 보안 장치가 달려 있었다.
삑. 가까이 다가가자 보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탄은 문 옆의 벽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내부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한 뼘 정도만 열고서는,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자그마한 손거울이 나왔다.
마에의 유품이었다. 손거울의 각도를 조절해서 안쪽 모습을 먼저 살폈다. 한쪽 벽면 전체가 홀로그램 화면이었다. 수십 개의 모니터 화면이 동시에 나오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 어째서지? 탄이 의문을 품은 순간, 갑자기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루. 다시 한번 알립니다.
복도 곳곳에 설치된 소형 스피커에서 폴의 음성이 나왔다. 귓가가 따갑고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음량이 높았다.
- 5단계 상황입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습니다. 안에서 대기합니다.
똑같이 녹음된 내용이 세 번 반복되었다. 음가가 섞인 기이한 어조다.
탄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소름 끼칠 만큼 고요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조용히 대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던 거다. 탄은 바짝 굳었던 몸을 움직여 제어실로 잽싸게 들어갔다. 곧장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한쪽 벽을 빼곡하게 뒤덮은 홀로그램 화면과 마주했다. 수십 개의 모니터 속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똑같은 방, 똑같은 옷, 똑같은 침대, 똑같은 자세. 모든 아이가 방 한중간에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로 서 있었다.
“하.”
탄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축축한 한숨을 내뱉었다. 눈앞이 순간 어찔했다. 이곳은 학교도 실험실도 아니었다. 공장에 가깝다.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홀로그램 단말기 쪽으로 다가갔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슥, 손바닥에 스민 식은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 냈다.
단말기 위에 익숙한 관리 채널 화면이 보였다. 탄이 옆으로 조금 밀려나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화면에는 잠금이 걸려 있었으나, 선생의 제어 칩을 가까이 갖다 대자 손쉽게 해제되었다.
이제 이곳의 데이터에 마음껏 접근할 수 있다. 관리 채널을 뒤져, 폴이 실험과 연관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찾아낼 것이다. 모든 건 시간 싸움이었다. 데이터를 복제한 다음 최대한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제어실까지 걸어오는 동안은 무사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폭발로 관리자가 대피한 거라면, 얼마 후 돌아올 테다. 관제 센터에서 폭발의 원인을 찾기 위해 CCTV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실험 센터 근처를 얼쩡거리는 청소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언젠가는 존재를 들킬 것이다. 탄은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홀로그램 화면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수많은 백업 데이터를 로딩하고, 개중에 몇 개를 선별하여 복제한다.
오랫동안 깊숙한 지하에 묻혀 있던 데이터를 세상으로 내보낼 때였다.
* * *
탄이 저 먼 지하에 박혀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은 쫓기는 중이었다.
시티 홀 가드들이 하나둘씩 뒤에 따라붙었다. 쉼 없이 총을 쏘면서 이동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인원이 몰려올 것이다. 탄과는 여전히 무전이 통하지 않았다.
아혼은 실험 센터 입구 쪽으로 뛰어가면서 생각했다. 여기서 모든 이가 무사 귀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예상했던 상황이다.
심지어 출발 직전에 탄이 넌지시 말을 전하기도 했다.
<혹시 나랑 연락이 끊기면, 아혼 당신이 일행을 이끌고 탈출해. 호버카에 유도 레이저가 설치되어 있어. 조작도 쉬우니까 미리 익혀 두고. 여차하면 튀어.>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혼은 순간 머릿속이 혼탁해졌다. 쾅! 바로 뒤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삐이. 이명이 울려 퍼졌다.
애쉬가 가스통을 저 멀리 있는 가드들을 향해 던진 탓이다.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고 가드 몇 명이 불길 속에 스러졌다.
잠시 시간을 벌었지만, 다른 방향에서 가드들이 또 몰려올지도 모른다. 퍽, 아혼은 이명이 울리는 귓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눈을 찡그렸다. 탄은 임무에 성공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존 여부조차 불투명했다.
이대로 탄만 버려둔 채 승하차장으로 달려가 호버카에 올라타야만 하는가. 아혼은 짧게 고민하고 금세 결정을 내렸다.
“애쉬. 너는 실험 센터로 들어갈 수 있지?”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실험 센터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애쉬뿐이었다.
“좋아. 우리가 저놈들을 유인할 테니까, 애쉬는 탄을 찾아.”
다이온 총감이 빌려준 호버카는 전투용이다. 뮤턴트의 공격에도 버틸 만큼 강한 소재로 만들어졌다. 탄은 호버카로 적들을 격추하고 달아나라고 조언했지만, 아혼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정면 돌파다.
아혼의 계획은 이러했다. 애쉬는 CCTV 사각지대에 잠시 숨어 있고, 나머지는 호버카가 있는 승하차장으로 뛰어간다. 가드들을 그리로 유인하는 것이다. 애쉬는 가드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험 센터 쪽으로 향한다.
“우리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게.”
호버카에 달린 무기로 가드들과 맞설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들을 뒤꽁무니에 매단 채로는, 탄을 찾으러 다니기 힘들었다.
아혼의 계획을 들은 다언은 움찔 떨었다.
“보안관님을 빨리 못 찾으면요? 두고 떠나요?”
“다행히 호버카는 두 대지. 못 버티겠다 싶을 때, 떠날 사람은 떠나. 네 명 선착순이다. 하지만 내가 탄 호버카는 보안관이 올 때까지 출발하지 않을 거야.”
몇 분이라도 더 버티면서 시티 홀 전력에 흠집 낼 수만 있다면. 아혼은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음까지 각오했다. 어떤 죽음은 차라리 생존보다 평온하다.
아혼은 일행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어떻게 할래?”
* * *
[해당 데이터들을 복제합니다.]
[진행률 0.13%]
탄은 홀로그램 화면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긴장이 온몸을 수축시켰다. 숫자가 올라가는 속도가 야속하게 느렸다.
“제발, 제발…….”
핵심 실험 데이터 몇 개만 추려 냈다. 시스템상 원본을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는 없지만, 복제는 가능했다. 여러 차례 보안 확인을 거치는 탓에 시간이 다소 걸릴 뿐.
그 복사본을 배포할 것이다. 경비대원 모두가 접속해 있는, 경비대 공용 채널에.
[진행률 30%]
[접근 권한을 재확인합니다.]
경비대원이라면 모두 의무적으로 공용 채널을 확인한다. 이번에도 뭐 쓸데없는 공문이 올라왔겠지, 하고 채널에 접속한 이들은 보게 될 것이다. 시티 홀의 수장이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을 물건처럼 다루는 모습을.
영상 속 아이들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개중 몇몇은 입을 반쯤 벌리고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실험 중 부작용이 발현된 아이들 같았다. 폴이 하나씩 무감하게 서류를 읽어 내릴 동안, 옆의 사람이 설명했다.
- 12번 개체는 언어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두 번의 전기 충격과 뇌파 조작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탕, 총성과 함께 아이 하나가 쓰러졌다.
- 7번 개체. 성장 촉진 3차 때 발작을 일으킨 후 형질이 사라졌습니다.
탕.
- 27번 개체.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고 소심합니다. 전투 훈련을 전혀 따라오지 못합니다. 형질도 아직 미미한 수준이며, 발현 시에도 우수 개체로 성장시킬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탕…….
그리고 경비대의 지지를 더 확실히 얻을 만한 영상도 있었다. 홀로그램 화면 속에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 저 실험체 이름이 뭐라고 했지?
- 라함입니다.
우고가 끝까지 사인을 파헤치려 애썼던 그의 친구였다. 영상 속 라함은 통유리로 된 실험실 안에 갇혀 있었다. 길길이 날뛰며 유리 벽에 머리를 수없이 찧어 댔다. 폭주 상태였다.
벽 너머에는 폴과 몇몇 사람이 라함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재 그의 심박 수와 뇌파 등을 기록하면서.
선생이 알려 주었던 죽음의 실체가 영상 속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폴은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대기병 유전자를 지닌 이들을 모집했다. 신약의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데이터값으로 활용했다.
라함은 실험실에 갇혀서 울부짖었다. 부작용으로 발발된 폭주는 어떤 가이드가 와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탄은 제 눈앞에서 죽어 가던 우고를 떠올렸다.
라함을 고통에서 해방해 줄 가이드는 없었다. 대신 일부러 보란 듯이 실험실 탁자 위에 총이 놓여 있었다. 라함은 스스로 총을 들어 제 머리통에 겨누었다.
탕, 유리 벽이 뇌수와 피로 뒤덮였다. 실험실 밖에서 라함을 지켜보던 이들 중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 아니, 의도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라함의 공식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다. 시체에 남은 흔적들은 라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명백히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탄은 과거 영상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우고의 말이 맞았다. 이건 자살이 아니다. 타살이다.
- 말 안 나오게 자기가 알아서 잘 처리하리라 믿어.
- 네, 시장님.
- 이 타이밍에 폭주가 오다니. 우리한테 행운이 따르는 것 같지 않아? 어차피 경비대 들어가기 전에 처리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유의미한 데이터값까지 얻었네.
- 시장님의 계획이 워낙 훌륭하니, 이런 호재도 따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 아무튼 최대한 빨리 신약 완성해 내. 실험체가 너무 부족해.
- 노력하겠습니다.
- 총감이 부쩍 건방져졌어. 시티 홀까지 넘볼 기세야. 재수 없게.
- 요즘 에스퍼들은 유독 보상 심리가 강한 것 같습니다. 캐슬을 위한 헌신에 대가를 바라더군요.
- 풀어놔서 그렇지. 옛적 이야기들 봐라. 군인들이 나대면 하나같이 다 나라가 망했다니까.
- 이런 시대에 분열은 안 될 말이지요…….
폴은 만들어 낸 에스퍼를 제 무기로 쓰고자 했다. 모든 권력을 저에게 집중시키고자 했던 그의 야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탄은 인도적인 이유만으로는 경비대의 전폭적 지지를 끌어내긴 힘들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경비대를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폴의 뜻대로 된다면, 경비대라는 독립 조직은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다.
폴을 막아야 한다. 탄은 그 메시지를 경비대원 모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복제 진행률 70%]
[접근 권한을 재확인합니다.]
탄은 빠르게 화면을 터치하면서, 관리 채널과 CCTV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통일된 자세. 모두에게 붙여진 루라는 단일한 성명. 하지만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들 생김새가 달랐다. 나이도 체구도 천차만별이었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부터 10대 후반까지 있었다.
[복제 진행률 95%]
[접근 권한을 재확인합니다.]
복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고요하던 공간에 갑작스레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루.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루.
모니터 화면 속 아이들이 일제히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다. 정확히 같은 허공을 응시한다. 마치 명령을 전달받은 로봇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루, 밖으로 나와 제어실을 포위합니다.
탄은 뒷덜미가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런, 씨…….”
폴에게 들켰구나. 이곳의 CCTV 데이터를 시장실 직통으로 보내는 경로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놀랍지는 않았으나, 아직 임무를 완료하기 전인 게 문제다.
[복제 진행률 100%]
[복제가 완료되었습니다.]
폴의 명령에 아이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순간, 홀로그램 화면 속에서 반가운 글자가 떠올랐다. 이제 복제 파일을 경비대 공용 채널에 전송하기만 하면 된다.
탄이 다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쿵, 쿠웅, 규칙적인 진동이 들려왔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는 소리였다. 모니터 화면을 곁눈질로 바라보자, 방 내부는 모두 말끔히 비워졌다. 대신 복도를 비추는 화면이 꽉 차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 배당받은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훈련받은 군인처럼 복도에 일렬로 줄을 섰다. 탄이 입술을 짓씹었다.
[데이터를 전송합니다.]
허상의 화면은 반짝이고, 아이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카테고리를 설정합니다 : 긴급]
탄은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데이터를 유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성을 붙잡고 무사히 전송을 누른 순간,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하.”
탄은 전송 진행 중이라는 홀로그램 문구를 보면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됐다. 이제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기만의 세계를 밖에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계획대로라면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탄은 힘을 쭉 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친 얼굴로 모니터 속 일렬로 서 있는 아이들을 응시했다. 자신을 발견하면, 폴이 가드를 보낼 줄 알았다. 아이들에게 직접 공격을 명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음성이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열만 맞춘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몇몇 애들은 조금씩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몸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폴은 어디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중인 걸까. 폴의 명령이라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따르던 애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추가 명령이 떨어졌다.
- 제어실을 접근 금지 구역에서 해제합니다. 내부로 들어가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아.”
여태껏 아이들은 제어실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교육 내지는 세뇌를 받았던 거다. 두 가지 명령이 충돌하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이제야 머릿속에서 교통정리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은 모니터 화면으로 아이들이 저에게 다가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웅. 저 멀리서 수십 명이 한 번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라며 카머를 질책했는데. 상황이 참 멋쩍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탄은 죽음을 직감했고 받아들였다. 사실은 폴이 아이들에게 명령한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저 아이들에게 어떠한 반격도 하지 못할 것을. 저를 향해 달려들고 물어뜯고 제 뼈를 부술지라도.
죽는 게 아니라 죽이겠다는 각오로 시티 홀에 왔지만, 오늘 죽이기로 한 대상에 아이들은 없었다. 가드들이 떼로 덤벼 왔다면, 승산 없는 전투일지라도 어떻게든 총을 쏴 대며 도망칠 궁리를 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아이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 수는 없었다.
애쉬 같은, 애쉬처럼 자라난 아이들.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니터 화면상으로 보니, 다들 스물 아래였다. 어른이 되기 전에 죽거나 죽임당했다. 성장 촉진제를 여러 번 맞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개체는 애쉬뿐이었다.
“아. 젠장…….”
탄이 고개를 뒤로 꺾고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쿵. 쿵. 수십 명이 일제히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죽음이 무섭지 않을 리 없다. 죽기 싫다. 좆같다. 탄은 속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하지만 여기서 탈출하려면, 저 애들을 해치면서 지나가야 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최악과 차악 중에서 골라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상처 입히고 살아나가는 쪽은, 탄에게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도저히 택할 수 없으며, 설령 택할지라도 평생 후회하게 될.
욱신거리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가져온 무전기는 불통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사할까. 애쉬에게 마지막 한마디라도 남기고 싶은데. 애쉬는 이 선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
잠깐이나마 몇 초라도 좋다. 애쉬와 연락이 이어지길 바라며 무전기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떠나간 이를 계속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을 미워해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 * *
애쉬는 달렸다. 다른 일행이 승하차장으로 가드들을 유인한 이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실험 센터를 디디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폐기되어서라도 빠져나오고 싶던 곳이었다. 다시 돌아오면 두렵거나 하다못해 께름칙한 기분이라도 들 줄 알았으나, 지금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탄을 찾아야 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삶의 총체나 다름없던 공간을 뛰어간다. 선택받은 아이들만이 오는 천국이었다가, 벗어나야만 하는 족쇄이기도 했던 곳. 애쉬에게는 강렬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괴한 소리를 내는 엘리베이터도, 의무적으로 꾸며야만 했던 파스텔 벽지도, 애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세뇌의 언어가 희뿌옇게 흩어진다. 여기는 탄이 있는 곳일 뿐이다. 그게 전부다.
탄을 얼른 찾아야 해. 늦으면 안 돼. 이런 불안이 애쉬의 몸을 빼곡하게 채웠다. 심장을 격동시키고 다리를 내달리게 했다. 내가 늦는다면, 탄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난 후에 그를 찾는다면. 나는 나를 죽여 버릴 거야.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꾹 참아 왔지만, 애쉬는 사실 모든 게 힘겨웠다. 울고 싶었다. 이번 계획을 짤 때부터 그랬다. 조금만 삐끗하더라도 탄이 위태로워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미끼가 되어 유인해야 할 뿐, 임무 중에 탄의 곁에 있지도 못한다.
떼를 부리고도 싶었다. 비현실적이란 소망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끼리 도망가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요. 위험해요. 다칠 거예요.
하지만 탄이라면 자신을 부드럽게 달래며 안 된다고 대답할 것도 알았다. 이제 캐슬 시티 어디를 가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성벽 너머로 떠나는 건 더 위험했다. 밖은 인간이 버티기에는 냉혹한 환경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식수나 합성육 따위는 없다.
결국은 이번 임무에 뛰어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감정은 널뛰었다. 담담하고 의연한 탄을 보며, 억지로 불안을 억눌렀다.
- 침입자가 있습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루, 밖으로 나와 제어실을 포위합니다.
그런데 애써 납작하게 눌러 놓았던 공포와 불안이 기어코 현실로 다가왔다.
복도를 내달리던 애쉬는 공기를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다.
-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애쉬는 손끝을 덜덜 떨었다. 스피커에서 떨어지는 명령 속 침입자는 아마도 탄을 뜻하는 것일 테다. 눈가가 욱신거렸다. 아버지. 평생 익숙했던 호칭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저것은 조종하고 세뇌하는 목소리다. 폴은 몹시 나쁜 사람이다.
-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싫어. 싫어. 싫어. 애쉬의 목 빗근이 일어섰다. 안 돼. 죽여 버릴 거야.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눈동자에 습기가 어렸다. 다 죽여 버릴 거야.
공격성을 거세시켰던 공간에서, 애쉬는 생전 가장 강렬한 분노와 살기를 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 건 처음이다. 여태까지는 실제 존재하는 대상에게 원한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시티 홀에서 도망치려 했을 뿐, 시티 홀을 파괴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탈출의 원동력은 바깥 세계, 정확히 말하면 탄에 대한 그리움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분노를 품는 법 따위 배우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지금 애쉬는 분노하고 있다. 제어실까지는 거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탄이 다친다면. 탄이 ‘제거’된다면.
그 행위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하나하나 직접 분해할 것이다. 쓰레기장에 보낼 거야. 귀가 따갑게 들어 왔던 말을 떠올렸다. 턱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쓰레기로, 의미 없고 보잘것없고 더는 형체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만들 거야. 모두를.
- 제어실을 접근 금지 구역에서 해제합니다. 내부로 들어가 침입자를 제거합니다.
쓰레기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린다.
애쉬의 심장이 거세게 펄떡였다. 아이들은 저 명령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안 돼. 안 돼. 안 돼. 눈동자에 핏발이 선 채로 애쉬가 뛰어갔다.
멀리서 아이들의 냄새가 난다. 희미한 소독약의 냄새도. 쿠웅. 이내 여럿이 이동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복도를 울리는 진동이 뇌까지 뒤흔든다. 긴장으로 온몸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루가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루…….”
애쉬는 뛰어가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수없이 들었던 이름을 혀끝에서 굴려 보았다. 이제는 어색했다.
나는 루가 아니야. 하지만 저 애들은 아직 루였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존재들이다. 서로 연결된 세포이자 신경망 같은.
애쉬는 이곳에서 수없이 받은 훈련을 떠올렸다. 에스퍼 형질을 개량 및 강화하기 위한 실험에 참여해야만 했다.
텔레파시도 그런 실험 중 하나였다. 형질 보유자끼리 생각을 주고받는 이능력을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험의 목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로의 신경망을 결합한 듯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개인이 모여서 하나를 이룬다. 하나가 되어 과업을 수행한다. 모두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예측 불가함과 돌발성으로 이루어진 개인을 지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화를 이룩한다.
제어실에 가까워질수록 애쉬의 머릿속에는 뒤엉킨 생각 뭉텅이가 흘러들어 왔다.
『침입자.』
『침입자야.』
『침입자. 제거.』
『침입자다.』
다른 루들이 무심코 내뿜은 텔레파시였다. 애쉬를 제외하고서는, 텔레파시 능력이 제대로 개화한 아이는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상념들. 아주 희미하게 들려, 마치 제 마음의 소리인 줄 착각할 것만 같은.
『제거.』
『제거해야 해.』
『침입자를 제거.』
불안정하고 미약한 텔레파시였다. 일전에 실험할 때는 듣지 못했으나, 이능력이 최고치로 발현한 지금은 선명하게 포착해 낼 수 있었다. 애쉬는 깨달았다. 나는 루들과 연결될 수 있어.
루라는 이름을 버렸지만, 누구보다도 루를 잘 알았다. 저 아이들은 적이 아니다. 쓰레기가 아니다. 저들 안으로 들어가자. 선생은 늘 욕망을 버리고 하나가 되라고 하였다. 도통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다.
애쉬는 이곳에서 훈련받았던 대로 자신의 형제들에게 생각을 내뿜었다.
『멈춰.』
애쉬가 다른 아이들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지르르. 지금 여기에는 무형의 파동이 가득 차 있다. 폴이나 선생들이 알았다면, 그날 바로 자축 파티를 열었을 만한 엄청난 성과다.
『루. 그만해 줘. 제발.』
애쉬의 텔레파시가 아이들의 뇌리에 꽂혔다. 스피커가 뿜어냈던 폴의 음성처럼 선명하고 크게. 다른 점이라면, 세뇌와 협박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
『그는 침입자가 아니야.』
애쉬는 제어실로 뛰어가며 애타게 머릿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온정신을 다해 호소했다.
『사실, 우리는 루가 아니야.』
* * *
탄은 제 죽음을 받아들인 채로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둥. 두웅.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멈추었다. 여럿이 제어실을 향해 일제히 걸어오며 울려 퍼지던 진동도.
“뭐야.”
탄이 움찔하며 고개를 세웠다. 모니터를 바라보자 아이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대열에서 벗어나 우왕좌왕했다. 다들 혼란에 가득 잠긴 얼굴이었다. 금세라도 문을 열고 들어와 침입자를 제거할 것만 같던 기세가 꺾였다.
『그는 침입자가 아니야.』
곧바로 탄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실, 우리는 루가 아니야.』
애쉬가 왔다.
애쉬의 목소리가 형질 보유자인 탄에게도 닿았다. 뇌를 헤집는 선명한 텔레파시. 익숙하다 못해 반가운 감각이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아 씨…….”
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에게 멋진 척하며 마지막 한마디를 무엇으로 남길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응당 끝이란 좀 비장해야만 하니까.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지금 꼴사납게 눈물까지 나려는 걸 보니, 사실은 어지간히도 죽기 싫었던 모양이다. 탄이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여기까지 달려와 주는 귀한 연하 애인을 두고 죽을 순 없지.
초조하게 모니터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애쉬가 복도를 뛰어가는 게 보였다. 멀리서 이능력으로 아이들을 제어하는 것 같았다. 미숙한 어린애들은 혼란을 견디지 못했다.
아이들의 조직력이 약해졌다. 다들 정신에 직접 쏟아붓는 목소리에 압도되고 있었다.
『바깥 세계로 나가야 해.』
『밖은 오염되지 않았어.』
애쉬는 끊임없이 외쳤다.
『아버지의 명령은 잘못됐어.』
『아버지가 우릴 속였어.』
절대로 복종해야만 하는 사람을 모욕하는 말들이 울려 퍼진다. 어떤 아이는 불경을 저지르는 듯한 죄책감에 벽에 달라붙어 울었다.
통제된 상황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응하지 못했다. 다들 연약하였고, 자유에 면역력이 없었다. 무균실에서만 있다가 바깥에 내던져진 식물처럼 시들시들하게 앓았다.
그중에 다섯 정도만 애쉬의 텔레파시에 저항했다. 그들은 폴의 명령을 잊지 않고 다시 제어실 쪽으로 달려들었다. 삐빅. 밖에서 보안 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거칠게 열렸다.
탄은 이 모든 걸 내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일어서서 벽 쪽에 바짝 붙은 상태였다. 아이들은 모두 맨손이었다.
폴이 실험 대상에게 무기를 지급했을 리는 없겠지. 그럼에도 사살 명령을 내린 것은, 아이들이 맨주먹으로 사람을 죽일 만한 힘을 지녔단 뜻.
하지만 아직 다들 어렸다. 끽해야 10대 초반. 저 나이의 에스퍼는 대개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능력을 다스리는 법을 몰라, 끙끙 앓기도 했다. 만들어진 에스퍼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섯. 고작 다섯이다. 이 정도는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벽에 붙어 있는 탄을 발견했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탄을 살벌하게 주시한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안녕.”
탄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탄에게 달려들었다.
휙. 탄은 복부 쪽으로 날아오는 주먹 여러 개를 피하며 움직였다. 쿵. 여러 명이 산만하게 움직이면서 의자가 바닥에 엎어졌다. 순간 첫 번째로 든 생각은, ‘할 만하다’였다. 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나는 소리는 험악했지만, 생각보다 속도는 느렸다. 평생을 훈련받으며 살아온 몸이 본능적으로 회피했다. 탄은 재빠르게 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복도에는 혼란에 빠진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얼른 이곳을 나가야만 했다. 탄은 널브러진 아이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으며 나아갔다. 입은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애들아, 미안. 미안. 어이고.”
탄은 루의 떼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쪽으로 내달렸다. 어느새 아까 공격했던 다섯 명이 뒤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덜 자란 몸은 순간 가속도는 높았지만 지구력이 떨어졌다. 이곳에서 오래 달리는 훈련을 해 본 적도 없을 거다.
나는 지긋지긋하게 많이 했지. 탄은 아이가 내뻗은 손을 피해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쿵! 따라오던 애 한 명이 넘어졌는지,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탄은 고개를 앞에 고정한 채 소리쳤다.
“미안! 아저씨가 가 볼 데가 있어서.”
폐가 녹슬지는 않았구나. 탄은 이 순간만큼은 경비대의 지옥 같은 훈련에 감사했다. 그렇게 왔던 대로 길을 되짚어 달려갈 때였다. 코너를 돌다가 거대한 몸뚱이와 부딪힐 뻔했다.
“윽.”
“탄!”
단단한 팔뚝이 전속력으로 달리던 탄을 멈춰 세우며 허리를 붙들었다.
애쉬였다. 눈가와 코끝이 온통 벌겋게 물든. 탄은 이대로 애쉬를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정말 눈물 나게 반갑고……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애쉬. 그렇지만 바로 움직여야 해. 애들이 따라와. 사랑해.”
대신 속사포처럼 말을 단숨에 쏟아 냈다. 헉, 헉. 가슴팍이 조이듯이 아팠고 가쁜 숨이 목구멍을 메웠다. 비틀거리는 몸에 힘을 줘서 다시 달리려는데, 시야가 갑자기 뒤집혔다. 눈 한 번 깜빡이고 나니, 어느새 애쉬의 어깨에 몸이 걸쳐져 있었다.
“이게 더 빠릅니다.”
애쉬가 푹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애쉬의 몸은 기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탄의 주변 풍경이 아까보다 몇 배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윽.”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탄이 두 눈을 꽉 감았다. 엄청난 속도였다. 아이들을 확실히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탄은 대롱대롱 애쉬에게 매달린 채로 말했다.
“다른, 윽,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에?”
“승하차장에. 가드들을 유인했습니다.”
“유인?”
탄은 입술을 짓씹었다. 대강 어떤 상황인지 짐작되었다. 연락이 끊기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라고 아혼에게 말했지만, 아혼이 무시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쩌고 있는 거야…….”
탄은 불퉁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안도감과 고마움이 차오르는 건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이 시간을 벌어 주었기에 애쉬가 때맞춰 도착했고 목숨을 구했다.
탄은 죽고 싶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하며 이곳에 왔음에도. 삶은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우스웠지만, 탄은 언제나 살아남는 쪽을 택해 왔다. 운이 따랐고 목숨줄도 질긴 편이었다. 치졸한 생존 본능이라 자조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애쉬의 체온과 숨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지금, 탄은 정말로 살고 싶었다. 역시 자신은 의연한 영웅이 될 그릇은 아니라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시티 홀을 뒤엎어 버리는 일에 끼어든 것뿐이다.
그냥 살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되나. 다소 삶이 억지스럽게 굴지라도. 가끔가다 던져 주는 기쁨에 소시민처럼 만족할 것이다. 별것 아닌 일상을 누리고, 옆에는 잘생긴 연하 애인을 끼고 다닌다면 더 좋겠지. 갓 시작한 연애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결의, 혁명적 사고, 사명감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아서, 사랑하고, 가끔은 타인을 살리기도 하는 삶이면 족했다.
평범함 하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며 별별 꼴을 다 봐야 한다니. 갑자기 억울함이 치솟았다. 치사하고 더러워서라도, 오늘은 폴의 뜻대로 죽을 수 없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끙, 탄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애쉬에게서 내려왔다. 머리를 땅 쪽으로 처박고 있었더니 시야가 어지러웠다.
“승차감이 좋네.”
탄이 두통을 무시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얼른 지상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마음이 급했다. 드드득. 무거운 엘리베이터 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저 멀리서는 아이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끈질기네. 애들이라 힘이 좋아.”
탄은 습관적 너스레를 떨었지만, 몸은 재빠르게 반쯤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애쉬와 손을 잡은 채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막 코너를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 꽈악. 탄이 저도 모르게 애쉬에게 손깍지를 꼈다. 쿵!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두 탑승객만 태운 채 지상을 향해 움직였다.
“하아…….”
그제야 탄이 온몸에 들어찬 긴장을 잠시 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흐느적거리며 애쉬에게 몸을 기대려다가, 애쉬의 옷 곳곳을 물들인 핏자국을 발견했다.
“이거 뭐야? 너 다쳤어?”
탄이 놀라서 소리쳤다. 목소리 끝이 엉망으로 갈라졌다. 애쉬는 촉촉한 눈동자로 탄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탄이 문제입니다.”
“보다시피 나는 문제라곤 하나도 없고. 넌 다쳤는데 괜찮다는 거야, 안 다쳤다는 거야.”
“탄, 괜찮습니까?”
“아! 나는 괜찮다니까. 너 말이야, 너.”
애쉬가 눈을 잠시 도르륵 굴렸다. 탄과 맞잡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엄지로 탄의 손등을 꾹꾹 누르고 매만졌다. 그곳에 탄이 실존함을 확인하듯이.
두 사람은 서로 괜찮냐는 말만 몇 번 반복해서 주고받았다. 흥분에 가득 찬 영양가 없는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확실히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애쉬가 울먹거리다가 탄의 성화에 못 이겨 말했다.
“세, 세 군데 정도.”
“다쳤어?”
“총을 맞았…….”
“총을 맞았다고?”
탄이 경악하며 소리를 높였고, 사방이 막힌 엘리베이터 안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다 나았습니다.”
“봐 봐.”
탄은 불쑥 손을 내뻗어 애쉬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손짓에 애쉬가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타, 탄.”
탄은 미간을 찡그린 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러네. 바로 아물긴 했네. 다행이다.”
“으, 네에…….”
애쉬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애쉬를 빤히 바라보았다. 늘 매끈하던 피부에 핏방울이 튀었고, 머리카락에는 먼지도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잘생긴 얼굴에 은은하게 붉은빛이 감돌았다.
끼익. 끽. 잠시간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는 소리만 들렸다. 내려올 때도 한참 걸리더니, 올라가는 건 더 느렸다.
애쉬는 탄의 시선을 받는 동안 숨을 꾹 참았다. 더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젖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제 옆구리를 붙든 탄의 손에 모든 감각이 쏠렸다. 끌어안고 싶었다. 사실 복도에서 탄과 딱 마주쳤을 때부터 내내 그랬다. 품 가득히 탄을 끌어안고서 입 맞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 다시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워야만 했다.
애쉬가 탄의 입술에서 간신히 시선을 떼어 내며 작게 말했다.
“탄. 소, 손을 좀…….”
“아.”
탄이 그제야 애쉬의 복부에서 손을 치웠다. 애쉬의 가슴팍이 크게 한 번 들썩거렸다.
“죄송…….”
“너무 극한의 상황이라서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
행여나 기분 상했을까 싶어, 빠르게 사과를 덧붙이려는데 탄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네?”
“되게 키스하고 싶네.”
“……네?”
“미친 건가.”
탄이 짧게 혀를 찼고, 애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역겨운 건물만 탈출하면 키스해야지. 탄은 얼이 빠져 있는 애쉬를 두고 혼자 결론 내렸다. 지금 키스하는 건 미친 짓이다. 연극 속 주인공들도 아니고.
하지만 잘 꾸며 놓은 애쉬의 입술에 자꾸만 시선이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투로 인한 흥분이 성적 흥분과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애쉬는 탄의 말을 뒤늦게 흡수하고서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키스해도 되나, 키스하라는 건가, 지금? 아닌가? 머릿속에서 오만 생각이 동동 떠다닐 때였다.
드드득. 상념을 가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쿵. 엘리베이터가 깊은 지하를 뚫고 올라와 멈춘 거다.
멍하니 붙어 있던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떨어져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렇게 총을 움켜잡고서 엘리베이터 문 너머를 마주했을 때. 둘 모두에게서 키스에 관한 생각은 휙 증발되었다.
“총 내려.”
바로 앞에 기괴하고도 익숙한 인물이 서 있는 탓이다. 독특한 음가를 지닌 음성이 들렸다. 시티 홀의 수장, 폴이었다.
나이도 성별도 짐작하기 힘든 외관. 폴은 여러 시술을 받으며 유일무이함을 추구했다. 지그재그로 뻗은 눈썹과 형광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 빛이 흐르는 피부.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거울 속 자신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폴은 양옆에 가드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둘 다 총을 들고 있었으나, 애쉬가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제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애쉬와 탄은 얼어붙은 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폴의 홀로그램 워치가 비추고 있는 화면 때문이다.
“밖에서 네 일행이 쓸데없는 짓을 벌이고 있더군.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거야.”
이동형 CCTV가 승하차장을 날아다니며 찍은 화면이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호버카 두 대가 위태롭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늘에는 시티 홀의 호버카가, 땅에는 신식 무기를 든 가드가 즐비했다.
탄이 입술을 짓씹었다. 공장 사람들이 위험하다. 저렇게 될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니. 첫 만남에 자신을 질색했던 아혼이 떠올랐다. 그럴 땐 언제고. 적당히 유인하고 도망쳤어야지. 과하게 의리가 넘치는 여자다. 미안함과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호버카 두 대로 뭘 어쩌겠다고 저러는 걸까. 멍청해.”
폴이 짧게 혀를 차더니 홀로그램 화면을 조작했다. 곧 이동형 CCTV가 위로 날아가 시티 홀 꼭대기 쪽을 비추었다. 지붕이 열리면서 유도 미사일 끄트머리가 드러났다.
- 공격 준비 모드로 전환합니다.
딱딱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려 퍼진다.
“이걸 쏘는 즉시 네 친구는 다 죽겠지.”
탄이 한쪽 눈썹만 까딱였다. 홀로그램 화면에 공격 개시 버튼이 떠올랐다. 폴은 금세라도 그걸 터치할 것처럼 손을 내뻗었다.
“총 내려놓고 이리로 나와.”
애쉬가 거칠게 숨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탄은 시선을 살짝 돌려 애쉬에게 눈짓했다.
“괜찮아.”
애쉬의 턱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총을 쥔 손끝이 새하얘졌다. 애쉬는 붉어진 눈으로 시장과 탄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을 전했다.
『탄. 괜찮지 않습니다. 다칠 겁니다. 아버지는 나쁜 사람입니다. 안 돼요. 제가 처리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죽여 버리면 됩니다. 저한텐 탄이 제일 중요합니다.』
“안 돼.”
탄이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애쉬는 초조하게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분노에 잠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의 근육이 얼른 앞으로 달려가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탄의 부드러운 만류 하나로 다리가 묶여 버렸다. 탄이 그 어떤 명령이나 협박도 하지 않았음에도, 애쉬는 자발적으로 탄에게 순종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붙들렸다. 탄이 끔찍하게 여길 만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희생시킬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탄이 천천히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애쉬는 끝까지 무기를 붙든 채로 눈가를 구겼다. 눈꼬리에 물기가 맺혔다.
『싫어요. 위험…… 위험합니다.』
“애쉬.”
나지막한 부름에 애쉬가 마지못해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면서도 혼자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무기 없이도 맨몸으로 인간 셋을 제압하는 건 쉽다. 정말로 탄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때는, 설령 탄이 평생 자신을 미워할지라도 탄을 살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탄은 숙였던 허리를 일으켜 세우면서 애쉬에게 작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나 믿지?”
애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탄이 씁쓸하게 헛웃음을 내뱉으며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몇 발짝 나갔다. 두 사람이 모두 나온 후, 쿵, 엘리베이터 문이 거친 소음과 함께 닫혔다.
탄은 두 손을 공중으로 들어 까딱거리며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자. 무기 내려놨어. 정말 치사하네. 친구 갖고 협박을 하고. 그쪽은 친구 없나 봐?”
“입 적당히 놀려. 내 손짓 한 번이면 다 끝이야.”
“그래. 너 잘났다.”
폴은 눈썹을 잠깐 꿈틀했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최대한 격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보안관. 당신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어. 경비대 채널에 이상한 걸 보내 놨던데.”
“체면 상하는 일인 줄 알면 하질 말지, 나 참.”
탄이 뺀질거릴수록 폴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졌다. 폴은 탄을 쏘아보았다. 정말 짜증 나는 남자다. 이 상황에서마저 미끈한 얼굴로 웃고 있다. 탄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치밀어 오르는 신경질을 참기 힘들었다.
폴은 뻣뻣한 입가 근육에 힘을 주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한테 힘이 필요하겠지.”
폴의 시선이 잠깐 애쉬에게 닿았다. 탄은 본능적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비스듬히 애쉬를 가리려 했다. 그런데 애쉬가 한 발짝 더 빨리 움직여 탄의 앞을 벽처럼 막아섰다.
폴은 자연스레 서로 지키고자 움직이는 둘의 모습을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탄. 역시나 당신이 나에게로 와야겠어. 당신이 필요해.”
탄이 미간을 과하게 찡그렸다.
“나 좋아해? 그쪽은 내 취향이랑 거리가 먼데.”
“……그, 이상하게 거들먹거리는 것 좀 그만하지?”
“그런 적 없는데.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데. 네가 꼬아 듣는 거겠지.”
“네 친구들을 이대로 날려 버리는 수가 있어.”
“하려면 진즉에 그랬겠지. 당신도 쫄렸으니까, 나랑 협상하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냐?”
“물에 빠지면 입만 뜨겠군.”
탄은 무기는 내려놓았을지언정 기세는 놓지 않았다. 폴이 자신을 쉽게 죽이지 못하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며 폴을 도발했다.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건,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그사이 경비대에서 지원군이 오기를 바랐다.
폴은 온 얼굴을 찡그리면서 탄식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머리 아파. 그래, 실수였어. 저 녀석을 살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힘이 돌아온 거지? 오류가 생겼어. 시정해야 해. 시정해야…….”
“헛소리하지 말고, 내가 왜 필요한지나 말해.”
“당신이 저 아이의 새로운 주인이니까.”
저 아이. 애쉬를 뜻하는 거였다.
“아, 역겹네…….”
탄은 폴이 원하는 바를 알아채자마자 속이 역겨워졌다. 폴은 애쉬를 다시 제 편으로 포섭하려는 생각이었다. 재빠른 눈치로 먹고살아 온 자였다.
폴은 애쉬를 붙들어 놓는 방법을 단숨에 찾아냈다. 이제 자신의 명령이나 세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대신 애쉬에게 새로이 생긴 약점을 이용하면 된다.
“보안관, 당신이 나에게 협력한다면 모두 무사할 거야. 네 친구들은 곱게 그 쓰레기 구역으로 돌아가겠지. 너랑 저 아이만 여기에 남으면 돼.”
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를 볼모로 삼겠다는 거구나. 짜증 나지만 꽤 유효하게 먹힐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실패작을 개조한 거지?”
“말하는 꼴 하고는…….”
“잠시 지켜본 바로는 너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것 같던데.”
“복종? 웃기네. 당신 연애 안 해 봤어? 명색이 시장이란 사람이. 하기야 그 얼굴이면 연애하기 쉽지 않지.”
폴이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몸을 떨었다. 인공적으로 개조된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움직였다. 표정이 기괴하게 보였다.
“그게 무슨 역겨운 소리야?”
“역겨워할 것까지야 있나. 아, 애들 보고 널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다지. 그러면, 뭐, 자식을 나한테 뺏겨서 열받는 건가.”
탄은 여유롭게 받아치면서도 머리는 재빠르게 굴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파해 나갈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 중이었다.
폴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부들부들 떨다가 말했다.
“둘이 붙어먹는다고?”
“표현이 좀 그런데? 부정은 안 할게.”
“더, 더러운, 역겨운, 멍청한…….”
폴은 혐오를 넘어서 공포감에 빠져들었다. 헛구역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입매가 비뚜름하게 틀어졌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루.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런 짓은, 미개한, 미개한 것들이나…….”
내내 여유를 가장하던 탄이 이번만은 차갑게 굳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루라고 부르지 마.”
폴은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거리면서 웅얼거렸다. 그는 성욕에 대해 늘 강한 거부감을 느껴 왔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이, 인간의 맨몸을 마주하고 서로 맞닿는 행위는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결벽에 가깝게 성욕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싶어 했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혐오와 공포였다. 폴이 아직 애쉬와 비슷하게 생겼던 어린 시절, 어떤 일이 벌어졌다. 폴은 그것에 관해 깊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지워 버리는 쪽을 택했다.
“더러워. 역겨워. 더러워…….”
다만, 그 제거 행위가 타인에게까지 확장되고 강요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더러워.”
안압이 잔뜩 오른 폴의 눈가가 벌겠다. 폴이 탄을 쏘아보면서 반복적으로 웅얼거렸다.
저거 미친놈인가. 탄은 잠시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모욕을 들었으나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폴이 완전히 돌아 버린 인간임을 다시금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옆에서 내내 조용히 서 있던 애쉬는 분노했다. 꾹 다물렸던 입술이 열렸다.
“더럽, 다고 하지 마세요.”
애쉬는 폴에게 분노를 느꼈다. 이 정도로 생생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폐기되기 전 붙잡혔을 때도, 폴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교육받았으니까. 우리를 이끌어 줄 아버지. 그에게는 부정적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애쉬가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심장이 엇박자로 거세게 뛰었다.
“탄은 더럽지 않습니다.”
세뇌가 더는 통하지 않았음에도, 다음 말을 내뱉기가 힘겨웠다. 애쉬가 목에 힘을 주어 소리를 쥐어짜 냈다.
“더, 더러운 건…… 아버지예요.”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 어딘가가 지끈거린다. 애쉬는 자신이 너무나 뒤늦게 폴을 미워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짓을 당했으니 폴을 증오해야 당연했지만, 싫어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학대를 학대라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아버지가, 아니야. 다, 당신은…….”
“닥쳐. 입 열지 마.”
애쉬가 폴의 말을 무시한 채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쁘고, 아주 나쁜 사람이야.”
“조용히 해.”
“당신을, 죽이고 싶어.”
“루!”
“폐, 폐기되었으면 좋겠어. 쓰레기장에. 쓰레기니까.”
애쉬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언어를 전부 쏟아 냈다.
폴은 제 아들이자 피조물이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모습에 충격받았다. 이럴 리 없다. 이 정도로 세뇌가 풀렸을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배신감마저 들었다. 애쉬는 유일하게 폴이 ‘온정’을 베푼 실험 개체였다. 너무나도 큰 실책이었고, 그것이 돌아와 지금 뼈를 찌르고 있다.
폴은 격앙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통제에서 벗어나 날뛰는 저것을 붙들어야만 한다. 폴이 바르르 떨며 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당장 이쪽으로 와, 보안관.”
폴은 미사일 제어 화면을 더 확대해 띄어 놓았다. 당장에라도 공격 개시 버튼을 누를 기세였다. 탄은 씨근덕거리는 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로 가라고?”
“널 묶어 놔야 마음이 편하겠어.”
“취향 참……. 알겠어.”
탄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옆에서 애쉬가 화들짝 놀라며 탄을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가 일전에 본 적 없이 일그러졌다.
“싫…… 싫어요.”
“괜찮아.”
“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싫어요. 나쁜 사람입니다. 탄, 다칩니다.”
애쉬가 바들바들 떨며 탄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왜……. 내가 지금, 저 사람들, 다 죽일 수 있습니다. 죽일게요.”
순한 기색이 사라지고 애쉬의 얼굴에 분노와 폭력성만이 떠올랐다.
“그러면 우리 친구들도 죽게 돼.”
탄은 애쉬를 빤히 바라보다가, 잠시 그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애쉬의 등에 팔을 두른 채로 작게 속삭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할게. 날 믿어.”
“싫…….”
“애쉬,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탄이 애쉬의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았다. 찰나에 이루어진 가이딩이었다. 그럼에도 애쉬는 전혀 진정하지 못하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탄은 애쉬를 놓아주고서는 아랫배 쪽에서 은밀하게 손을 까딱였다. 수어였다. 탄이 애쉬를 부관으로 삼고 가장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던 것. 일렁이던 애쉬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어를 포착해 낸다.
「기다려.」
「내 공격 이후 추가 공격.」
「왼쪽부터 노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그리고 지금은 가장 강력한 언어가 둘 사이를 오갔다.
당장에라도 폴에게 뛰어들 것처럼 흥분했던 애쉬의 얼굴이 살짝 가라앉았다. 탄에게 계획이 있다. 폴의 뜻대로 순순히 붙잡혀 줄 생각이 아니었다.
탄은 휘릭 몸을 돌려서 토할 것같이 얼굴이 파리해진 폴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붙잡혀 줄 테니까 약속 지켜. 공격 중지해. 일이 틀어져서 누구 하나라도 다치는 순간,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았어?”
“그러도록 하지.”
“미사일 제어창 내려.”
“당신 손목에 수갑 채우고 나서.”
“진짜 치졸하고 쪼잔하게…….”
탄이 인상을 쓰면서 걸어갔다. 폴 바로 앞에 서서 얌전히 주먹 쥔 손을 쭉 내밀었다.
“이제 됐냐?”
폴은 반신반의하면서 가드에게 고갯짓했다. 오른쪽에 있던 가드가 잠시 사격 자세를 풀고 수갑을 꺼내 들었다.
탄은 살벌하게 폴과 홀로그램 화면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말했다.
“제어창 내리라니까?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난 당신이랑 협상 안 해. 그냥 혀 깨물고 죽어 버리고 말지.”
“교양 없게…….”
“농담 같아? 아닌데.”
평생을 전투하며 살아왔던 이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폴은 우악스럽게 구는 탄이 불편했다. 역시나 경비대 출신들, 특히나 힘도 없으면서 에스퍼에 기생하여 권력을 누리는 가이드 놈들은 재수가 없다. 미친놈들도 많고. 여기서 가장 미친 자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채 생각했다.
가드가 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동안, 폴은 마지못해 홀로그램 화면을 조작했다. 탄의 손목이 완전히 결박되었을 때, 폴은 미사일을 대기 모드로 전환했다.
CCTV 화면으로 미사일이 완벽하게 지붕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탄이 움직였다. 자신이 꿈틀거리는 찰나, 그 공격의 시작을 애쉬가 놓치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탄이 오른쪽 가드의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동시에 묶인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대로 폴의 목덜미를 노렸다. 주먹 쥔 손에 숨기고 있던 소형 주사기를 폴에게 꽂아 넣었다.
“윽!”
푹, 주삿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감과 동시에 옆에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탄의 공격 개시를 확인한 애쉬는 재빠르게 총을 집어 들어 왼쪽 가드를 쏘았다.
1,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폴은 예측도 반응도 하지 못했다. 가드들의 행동은 애쉬보다 한참 느렸다. 탕! 오른쪽 가드의 머리통에 총알이 박히고 둘 다 쓰러졌다.
“커억……!”
폴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의 목 쪽을 쳐다보았다. 탄은 가드가 죽으면서 내뿜은 피로 얼굴이 온통 물들어 있었다. 끈적거리는 살갗을 닦아 내고 싶었지만, 주사기를 끝까지 꾸욱 폴에게 박아 넣었다.
폴이 파들파들 떨면서 신음했다. 퉤. 탄은 입에 들어간 남의 핏물을 바닥에 뱉으면서 말했다.
“나한테 거리를 내주면 어떡해? 애쉬는 상대 못 해도 나는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나. 자존심 상하네.”
“이, 게 뭐…….”
“이거? 당신이 개발한 약물.”
겐즈의 자살을 막을 때 챙겨 둔 주사기였다. 대기병 환자를 개조시키기 위한 약물. 극소량이어도 일반인에게는 독약과도 같다고 하였다. 투여받는 즉시 몸이 뻣뻣하게 굳고 몇 분 내로 사망한다.
실험 증거물이라 생각해서 들고 왔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탄은 아까 애쉬에게 짧게 포옹하는 틈을 노려, 주먹 안에 주사기를 숨겨 놓았다. 그리고 폴이 미사일 발사를 취소하고 경계를 풀기만을 기다렸다. 가드 한 명이 빈틈을 보일 때, 바로 움직일 계획이었다.
“윽, 크윽.”
폴의 기도가 부어올랐다. 폴은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온몸 근육이 빠르게 굳어 갔다. 눈꺼풀마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두 눈을 크게 뜬 채였다. 호흡은 희미해져만 갔다.
“약효 좋지? 당신이 만든 거야. 어때?”
그사이 애쉬는 어느새 탄 옆으로 다가왔다. 가드의 품을 뒤져 찾아낸 수갑 키로 탄의 손목을 풀어 준 다음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탄…….”
애쉬는 망설임과 오차 없이 가드를 공격할 때는 언제고, 곧장 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렸다. 히끅. 탄은 물기에 젖어 가는 숨소리를 들으며 애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눈빛은 죽어 가는 폴에게 꽂혀 있었다.
폴의 의식은 아직 끊기지 않았으나, 전신이 거의 마비 상태였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득시글거려도 한 음절도 내뱉을 수 없었다. 탄은 폴의 눈동자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읽었다. 입술이 희미하게 꿈틀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조용히 해. 그래야 착한 어른이지.”
탄의 나지막한 목소리만 공기를 울렸다.
* * *
호버카 내부가 요란했다. 쿵, 차체가 흔들리고 경고 알림은 시끄럽게 계속되었다.
- 점검 요망.
- 점검 요망.
- 점검 요망.
운전석에 앉아 있던 아혼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놈의 경고창, 시끄러워 죽겠다. 쉴 새 없이 떠들지 않아도 모두가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혼은 뒤를 힐끗 바라보며 카머에게 물었다.
“몇이나 죽였지?”
“꽤 많이요. 그런데 그만큼 또 기어 나온 것 같네.”
카머는 낮게 내려갈 때마다 뒷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총을 쏘고 숨기를 반복했다. 그 옆에서는 다언이 부푼 발목을 움켜쥐고 무전기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이 쏟아졌다. 전투용 호버카라고 할지라도 무한대로 버텨 낼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한계점에 다다랐고 시스템이 소리쳤다.
- 엔진에 열기가 감지됩니다.
- 화재 경보.
너덜너덜해진 호버카가 그만 자신을 놔 달라며 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 비상 착륙을 시행하시겠습니까?
“아이고.”
아혼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짚었다. 저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불안하더니 기어코 엔진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이러다 폭발하겠어.”
“어떡하죠.”
“뭐……. 음. 호버카에서 불타 죽는 것보단 나가서 총이라도 한 발 더 쏘다가 죽는 게 낫지 않나?”
카머가 아혼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호버카를 저놈들 한복판에 끌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폭발할 거라면요. 꽤 큰 피해를 줄 수 있겠죠.”
“어, 나쁘진 않은데.”
반쯤 몸을 구기고 앉아 있던 다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쁘지 않기는 뭐가!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봐! 전 죽기 싫어요. 다른 방법 없어요?”
아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떡하냐. 그러게 넌 다른 호버카에 타라니까.”
다언이 입을 삐죽거렸다. 혼자 남게 될 동생 나즈를 생각하면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랬기에 무릎이 다 까져 가는데도 이를 악물고 환풍기 통로를 기어서 탈출했다.
언제나 강한 생존 욕구로 질기게 살아남았던 다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언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탄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애쉬랑 보안관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다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리할지언정 매정하지는 못했다. 내가 왜 이러지, 미친 건가,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탄을 기다렸다.
다른 호버카에는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도망가기를 택한 사람들이 타 있었다. 아무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모두 고향에 소중한 사람과 가족을 두고 왔다. 탄과 가깝지도 않았던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무사히 귀환하여 이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전해 줄 입도 몇 개 필요했다.
때마침 다른 호버카에서 연락이 왔다.
- 아혼. 더 버티기 힘듭니다. 지금 빠져야 해요.
“어, 알아. 가.”
- 저희만요? 진짜 안 가실 겁니까?
“가고 싶어도 못 그래. 우리 호버카 엔진이 나갔어.”
- 예? 어쩌시려고요.
“지금 생각 중인데…….”
삑. 갑자기 목소리가 끊겼다. 시스템이 긴급 모드로 강제 전환되면서 연락 채널을 닫아 버렸다. 차체는 이리저리 옆으로 덜컹거렸다. 금세라도 지면에 처박힐 모양새였다.
- 비상 착륙을 실시합니다.
시스템은 사용자의 명령이 없자, 자체적으로 판단을 완료했다. 더는 비행할 수 없다. 억지로라도 착륙해야만 했다. 레이더망이 땅을 스캔하면서 그나마 안전한 착륙지를 찾았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운전 방향을 바꾸었다.
아혼은 가드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저기다가 갖다 박아?”
내내 이마를 감싸 쥐고 있던 다언이 급작스레 소리쳤다.
“그래요! 그냥 박아 버려요! 한복판에다가 꽂아 넣자고요.”
“뭐야? 아까는 죽기 싫다더니.”
이 호버카에 탑승한 이상, 어느 정도 예견된 죽음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언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왜인지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만 같았다.
“이왕 죽을 거라면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는 게 낫겠어요. 나도 이제 몰라.”
카머는 옆에서 다언의 어깨를 툭 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좋은 자세다.”
“조용히 해.”
“나즈는 다른 공장 사람들이 잘 챙겨 줄 거야.”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여기저기 부탁하고 왔어.”
“준비성이 좋네.”
다언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각오까지 하고 왔잖아. 자신을 달래 보았지만, 무서운 마음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혼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진짜 간다?”
“가 보죠.”
흐어엉. 다언은 손에 얼굴을 파묻고 반쯤 우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답을 대체했다.
아혼이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시스템을 무시하고 수동으로 호버카를 조종하려 했다. 시티 홀 놈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에 떨어져 폭사하는 게 계획이었다.
그러나 탑승자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기로 고안된 시스템은 요란하게 소리쳤다.
- 수동 운전을 중지하십시오.
“망할.”
- 수동 운전을 중지하십시오.
“싫어!”
- 착륙 가능 속도까지 조절합니다.
“싫다고! 이거 완전 자기 멋대로야.”
프로그래밍한 대로 경고하는 시스템과 아혼이 시끄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시스템을 아예 꺼 버리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몰랐다. 퍽. 아혼이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다언은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대략 몇 분 후쯤 들이닥칠 죽음에 의연하게 굴려고 애썼다. 잘되지는 않았지만. 꽉 감긴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비집고 나오려던 눈물을 애써 삼킬 때였다.
다언이 내내 소중히 품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다들 미쳤어?
쾅! 쾅! 시스템에 열받아 하며 운전대를 때리던 아혼이 멈칫했다. 다언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보, 보안관님?”
- 당장 속도 줄여!
“보안관님이에요? 살아 있어요?”
- 당연히 살아 있지. 우선 속도부터 줄이라고!
탄이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소리가 호버카 내부에 울려 퍼졌다. 아혼은 억지로 운전대를 조종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장렬하게 폭사할 생각이었지만, 탄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비상 착륙 시행.
드디어 시스템이 조종권을 돌려받았다. 아혼이 손을 떼자마자, 속력을 조절하면서, 최대한 인적이 드문 착륙지를 찾았다. 삐비빅. 호버카가 지면과 가까워질수록 경고음이 더 크고 빠르게 차내를 울렸다.
쿵! 후미에서는 폭발음 비슷한 게 들려왔다. 덜컹, 호버카가 몸부림쳤다.
“추락한다. 안전벨트 매!”
세 사람은 벨트를 꽉 움켜잡고 눈을 감았다. 진동이 심해서 온몸이 같이 흔들렸다. 뇌가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만찬 때 먹었던 음식이 위로 올라오려는 순간, 호버카가 굉음과 함께 지면과 맞닿았다.
드드득. 땅을 갈아 버리면서 몇 미터쯤 미끄러졌다. 결국에는 차체가 90도로 확 뒤집힌 채 멈추었다. 폭발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거센 충격에 셋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차체에는 점점 메스꺼운 연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언은 차창에 여러 번 부딪힌 머리를 감싸 쥐며 콜록거렸다. 눈앞이 부옇다. 이제 여기서 나가야 했는데, 온몸이 욱신거려 쉽지 않았다. 시야까지 뒤집혀 있으니 더 정신이 없었다. 다른 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멀리서는 총성과 레이저 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언이 기침하면서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아요?”
“어어.”
“나가야 해요. 가드들이 오고 있나 봐요. 윽, 근데 저 다리가 너무…….”
발목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이번에는 정말 부러진 것 아닌가. 다언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쿵! 그때 누군가 밖에서 호버카를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언이 깜짝 놀라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이내 거칠게 호버카 뒷문이 열렸고, 다언의 뿌연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한가득 들어찼다.
“빨리 나와.”
탄이 다언을 향해 팔을 쭉 내뻗고 있었다. 다언은 얼결에 손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탄의 힘에 이끌려 호버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아혼. 앞문은 틀어져서 안 열릴 것 같아. 뒤로 넘어와야겠어.”
다언은 쿨럭이면서 잠시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밖에 나와서 보니, 호버카 꼴이 정말 엉망이었다.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언은 호버카에서 사람을 한 명씩 끄집어내는 탄을 곁눈질로 올려다보았다. 진짜 탄이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내려와 있고, 온몸에 먼지와 핏물이 묻어 있었지만. 틀림없는 그였다. 킁. 다언은 몰래 코를 들이켰다. 연기가 매워서 그렇다고 자신에게 핑계를 대며.
마지막으로 아혼까지 밖으로 빠져나왔다. 삐비빅. 호버카 내부의 경고음은 여전히 살벌하게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튀자.”
탄이 손짓하자, 카머는 말없이 다언을 휙 안아 들었다. 그대로 최대한 빠르게 호버카에서 멀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펑, 호버카에 첫 번째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근처에서는 계속해서 요란한 폭음과 총성이 들리고 있었다. 아혼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애쉬는?”
“내가 여기로 오는 동안 가드들을 유인하고 있어.”
“혼자?”
“어, 근데 맨몸은 아니고. 시티 홀 호버카 하나를 뺏었어. 이제 그거 타고 도망가면 돼. 얼른 애쉬한테 붙자.”
“일은 잘됐나. 하도 연락이 없길래 죽어 버린 줄 알았네.”
“당연히 완벽하게 성공했지. 날 못 믿은 거야?”
탄은 탈출해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겪은 일은 잠시 묻어 두고 여유로운 척 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일만 남았어.”
폴이 죽었으니 갈수록 시티 홀은 혼란스러워질 테다. 한동안은 캐슬 전체가 시끄럽겠지. 공석인 시장직을 두고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여기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부우웅. 그때 호버카 하나가 근처로 위태롭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탄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미간을 찡그렸다.
“……저게 애쉬가 탄 걸 텐데.”
“저것도 그다지 멀쩡해 보이진 않네.”
“아, 젠장.”
애쉬는 탄이 안전하게 일행을 구출해 내도록 최대한 가드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레이저 유도탄 여러 발이 애쉬의 호버카에 쏟아지는 중이었다. 고작 한 대가 감당하기에는 공격의 수위가 셌다.
“안 되겠다. 다들 적당히 사리고 있어. 호버카 한 대 더 훔쳐 올 테니까.”
쿵. 애쉬의 호버카가 공격에 맞아 흔들리는 모습에 탄은 눈앞이 잠시 어찔해졌다. 급하게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던 호버카는 모두 하늘 위에 있었다.
오는 길에 다른 승하차장에서 여분의 호버카를 본 기억이 났다. 탄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빨리 뛰어가서 호버카를 하나 더 구해오면 된다. 그런데 그때까지 다른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아혼은 벌써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얼른 갔다 와. 나는 적당히 지상에 있는 놈들 처리할 테니까. 애쉬한테만 공격이 쏠리게 둘 순 없지.”
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 안이 썼다. 폴을 죽였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수장이 사라졌음에도 가드들은 침입자를 박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은 시티 홀이 인류의 등대라 믿었고,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감수하라고 훈련받았다.
우우웅.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진동이 들려왔다. 어둠이 깜깜하게 하늘을 뒤덮은 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별을 관찰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늘 새까만 장막과도 같던 밤하늘에 불빛이 점점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잠시 멈추어 아연한 기색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혼이 중얼거렸다.
“저게 다 뭐야?”
구름 사이를 꿰뚫는 불빛들의 정체가 조금씩 확연해졌다. 호버카에 달린 경고등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수십 대의 호버카가 하늘을 수놓고 있다. 구세계의 별 무리처럼.
혼자서 위태롭게 버티던 애쉬의 호버카 양옆을 보호하듯이 둘러쌌다. 공장 사람들도 되돌아왔는지, 그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다.
깜빡깜빡. 앞장 서 있던 호버카가 경고등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총 다섯 번의 규칙적인 깜빡임. 저게 무슨 신호인지, 탄은 알고 있었다. 경비대에서 쓰이던 공격 개시 명령이다.
우우웅. 곧장 수십 대의 호버카가 대열을 맞추어 움직인다. 그러고는 일제히 같은 대상을 향해 레이저를 쏟아부었다.
모두 시티 홀을 공격하고 있다.
“뭐, 뭐지? 아군이죠?”
“경비대에서 보낸 겁니까?”
탄은 놀라서 묻는 이들의 말에 답할 정신도 없이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순간 안도감이 온몸을 덮치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긴장해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근육통이 한 번에 몰려든다.
살았다. 길고 긴 숨과 함께 처음 든 생각이다.
사실 탄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지원군이 오리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었다. 지금 즉시, 시티 홀을 공격하러 와 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영상을 보고서도 시티 홀에게 반기를 드는 게 께름칙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기 만찬이 꾸준히 열리는 탓에, 이미 시티 홀 쪽과 가까운 이들이 많았다.
경비대 조직이 훗날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폴 쪽에 빌붙는 게 이득이란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좀 더 큰 권력으로 넘어가 출세를 노리는 거다.
탄은 경비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동기로 다른 선택을 하리라 생각했다. 때맞춰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걸어 볼 뿐이었다.
폴이 장담했듯이, 권력을 지닌 자들은 잘 움직이는 법이 없다. 그들이 지고 있는 힘이란 너무 거대하고 무거웠으므로.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데에도 한껏 애써야 했다.
모든 경비대원이 시티 홀을 공격하는 일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테다. 그래도 폴에게 충성했던 가드들을 제압할 만한 전력은 모였다.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물론 여기 온 경비대원이라고 완전무결하지 않다. 오늘 이후 캐슬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폴의 실험만은 멈출 것이다. 여나를 죽였던 인물을, 애쉬를 괴롭혔던 이를 처단했다. 그가 계획하던 세계를 막아 냈다.
세상은 여러 이유로 엉망진창이고 뾰족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떻게든 모난 곳을 깎아 나가려는 시도도 존재한다. 영원히 매끄러운 원형에는 닿지 못하더라도, 그런 애씀으로 조금씩 동그래진다.
탄은 기력을 다 쓰고서 멍하니 주저앉았다가, 근처에 호버카가 착륙하는 소리를 듣고 일어섰다. 무릎에 손을 짚어 힘겹게 다리를 폈다. 드드득. 호버카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너덜너덜한 꼴이다. 곧 앞문이 열리고 익숙한 잿빛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탄!”
“거기서 기다려.”
탄은 다른 이들에게 잠깐 여기 있으라는 눈짓을 하고는 뛰어갔다. 애쉬는 밖으로 달려 나오려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멈추어 서 있었다.
탄은 전력으로 달렸다. 지쳐 버린 줄 알았던 몸이 희한하게 또 움직여진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기다리는 애쉬가 보였다. 순식간에 애쉬 앞에 도착해서는, 그의 볼을 꽉 움켜쥐었다.
애쉬는 상기된 얼굴로 탄의 손 위에 제 손바닥을 얹었다. 탄이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는 동안 빠르게 종알거렸다.
“탄. 탄. 경비대 사람들이 왔습니다. 혼자서 싸우고 있었는데. 도와줬어요.”
탄은 고개만 간신히 주억거리며 애쉬를 다시 호버카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뒷좌석으로 밀어 넣자, 애쉬는 별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다이온이라는 사람이 우리는 경비대 구역에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피해야 합니다.”
“응, 그래.”
“여기서 다른 호버카랑 연락합니까? 그런데 왜 뒷자리에? 운전석으로…….”
애쉬는 나란히 제 옆에 앉는 탄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몸이 맞붙어서 기분은 좋았지만.
“아, 다이온이 탄의 개인 채널에도 연락을 남겼다고 했…… 읍!”
탄은 숨이 진정되자마자, 성실하게 설명하던 애쉬의 입술을 틀어막아 버렸다. 예고도 없이 입술이 부딪쳤다. 쫑알거리던 애쉬가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부르르, 어깨가 진동했다.
탄은 뻣뻣해진 애쉬와 달리 부드럽게 턱을 틀었다. 내가 왜 키스하고 있지. 머릿속에는 당혹감이 떠올랐으나, 몸은 주저 없이 움직였다.
다른 호버카와 교신하고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생각이었으나, 애쉬의 얼굴을 보자마자 우선순위가 잠시 뒤바뀌었다. 생존이 확실해진 지금은 미친 짓 몇 개쯤은 해도 될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밖에서 여러 전투의 굉음이 울려 퍼지는 중에 연인과 키스한다든지.
탄은 애쉬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고서는 떨어졌다. 짧고 가벼운 키스라도 좋았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이 이토록 강렬하게 치솟은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후우. 탄이 거세게 들끓던 충동을 해결하고서는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좀 정신이 들 것만 같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툭. 애쉬와 이마를 짧게 맞대고 중얼거렸다. 애쉬는 이때까지 정신이 빠져서는 두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인 채 앉아 있었다. 탄이 쭈그리며 운전석이 있는 앞쪽으로 넘어가려는데, 그제야 애쉬가 탄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조금은 다급하게 탄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애쉬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탄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성마른 키스가 이어졌다. 무작정 탄의 입술을 핥고 깨물었다.
탄은 멈칫했다가 힘을 풀었다. 애쉬의 뺨을 꽉 붙잡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지나치게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보상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어차피 키스 한 번이나 두 번이나, 유난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총감님도 이 정도는 봐주겠지.
쾅! 때마침 하늘에서 호버카가 내뿜는 폭음이 들려왔다.
『탄.』
그러나 그 순간 더 큰 울림이 전투의 소음을 덮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요란한 고백. 머릿속 세포 하나하나까지 뒤흔드는 거센 아우성.
탄은 애쉬와 맞물린 입술 사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날이 바짝 서 있던 신경이 가라앉는다. 살고 싶다, 복수한다, 죽일 것이다. 각이 져 있던 여러 마음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자리를 일상적인 욕구가 메웠다. 누군가 지금 당장 바라는 게 무엇인지 묻는다면, 탄은 잠시 고민하다 답할 것이다. 키스하느라 입이 막힌 와중에도 사랑 고백은 하고 싶어 텔레파시로 웅얼대는, 아주 사랑스러운 연하 애인과 술이나 한잔 마시러 가야겠다고.
이제 그뿐이었다. 살아가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그렇게 마모되는 분노를 바라보며, 어제보다 오늘 조금은 더 둥근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