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우리 애쉬 얼굴 좀 보자.”
탄은 술 냄새를 뿜어냈다. 평소보다 얼굴이 붉었고, 끊임없이 엉겨 붙는 몸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애쉬는 묵묵하게 탄을 부축하며 걸어갔다. 탄이 가끔가다 제 뺨을 주물럭거리고 가슴팍에 정수리를 갖다 박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집까지 탄을 안아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았다. 참아야 했다. 경비대 구역에서는 어딜 가도 다 탄을 알은체했다. 전 대대장이 남자에게 안겨서 귀가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탄이 못 견딜 게 분명했다.
애쉬가 탄의 등허리에 두른 팔에 더 단단히 힘을 주었다.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몇 명은 툭 던지듯이 말을 걸기도 했다.
“대장님 모셔다드려? 저 양반은 왜 이렇게 취했대.”
애쉬는 말없이 고개만 꾸벅꾸벅 숙이고 지나갔다.
경비대 구역에서 지낸 지 보름째. 애쉬는 이곳에서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탄은 인기가 아주 많다. 경비대로 복귀하기도 전인데, 모두가 반가운 얼굴로 탄에게 대장이라 불렀다.
이곳에서의 탄은 평소보다 좀 더 짓궂고 능글맞다. 63구역에 있을 때보다 훨씬 긴장이 풀렸다. 사전적 의미의 고향은 63구역이었으나, 탄에게 진정한 집은 이곳 같았다. 탄은 여기서만은 평화로워 보였다.
경비대 구역 바깥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아니, 캐슬 시티 전체가 그렇다.
시티 홀의 시장직은 오랫동안 공석이리라 모두가 예상 중이다. 여러모로 번잡하고 시끄러운 시대였다. 잡음 없이 조용하게 죽어 있는 것보다야 낫지만.
애쉬는 사실 캐슬 시티가 어찌 되든 관심 없었다. 제 곁에 탄이 무사히 존재하면 그만이었다.
탄은 애쉬에게 기댄 채 발을 질질 끌며 걸어갔다. 잔뜩 늘어진 목소리로 그가 웅얼거렸다.
“하아……. 이렇게, 취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탄. 너무 빨리 마셨습니다.”
“그랬나.”
“말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아아, 나만 취하고. 재미없어라.”
애쉬가 힐끔 탄을 바라보았다. 애쉬의 눈매가 살짝 아래로 처졌다.
“죄송해요.”
“어이구, 죄송할 건 아니지. 그리고 나한테, 끅, 사과하지 말라니까? 넌 예뻐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애쉬는 술을 궤짝으로 들이부어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마시는 즉시 몸에서 알코올 분해가 일어났다.
애쉬의 주사가 무엇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했던 탄은 맥 빠져 했다.
하지만 애쉬는 자신이 술에 취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탄은 과음하는 경향이 있다. 마시기로 한 날에는 자제력 없이 달린다. 자신이라도 멀쩡해야 탄을 집에 잘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대신 탄은 안 마시기로 작정하면 술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63구역에서 지낼 때가 그랬다. 늘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술을 잠시 끊었다고 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마시고 싶었어.”
탄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숨이 잔뜩 섞인 웃음은 그다지 경쾌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오늘 오후, 탄과 애쉬는 ‘루’를 보고 왔다. 정확히는 루라고 불렸던 아이들. 그들 모두 현재는 전투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다.
여태껏 아이들은 실험실 안에서 세뇌당하며 살았다. 그대로 밖의 세상에 내던져지면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시들 말라 버릴 것이다.
교육과 보호가 필요했다. 에스퍼 형질이 불안정한 애들은 더더욱 주의 깊게 관찰해야만 했다.
<대장님께서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애쉬라는 친구도 그렇고요.>
하지만 기존 교관 인력만으로는 통제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전투 학교에서 탄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다.
탄은 두 주 후쯤 경비대에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그 시기를 뒤로 미루었다. 반년가량 전투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기로 했다.
그 자리에 탄보다 더 적임자는 없었다. 아이들이 겪은 일을 잘 아는 데다, 최상급 가이딩으로 형질을 제어해 줄 수도 있다.
가장 ‘성공작 루’라 할 수 있는 애쉬도 함께 교관을 맡았다. 어쩌다 보니 둘은 63구역을 떠나서도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처지가 되었다.
본격적인 교관 업무에 앞서, 오늘 아이들을 만났다. 실험실 밖으로 끄집어내진 아이들은 모두 불안과 혼란스러움에 잠겨 있었다.
저 애들을 다 사회에 적응시킬 수 있을까. 반년으로 될까. 탄은 걱정에 잠겼고, 전투 학교를 나서자마자 애쉬와 함께 술집으로 향했다.
그 결과, 지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말 그대로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은 탓이다.
탄이 애쉬에게 끌려가며 웅얼거렸다.
“애쉬, 그 있잖아.”
“네.”
“내가…… 도둑놈인가?”
애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탄을 바라보았다.
“도둑?”
“아니, 애쉬 네가 너무 어린 거야. 어? 이거 겉모습만 이렇지. 끽해야 20년 정도 산 거 아냐? 완전히…… 갓 태어났잖아. 정수리에…… 숨구멍도 안 닫혔겠다고.”
탄은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점점 그의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애쉬가 탄을 다시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 아까 애들 보고 와서 그런가. 너랑 같이 지냈던 애들도 있던데.”
애쉬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비뚜름하게 숙였다. 풀이 죽은 꼴이었다.
“탄……. 기분이 왜 이상해요?”
“양심이 찔린다고 해야 할까.”
탄이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넌 치유력도 엄청나잖아? 그러면 아예 늙지도 않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다른 에스퍼처럼 노화하면서 형질도 줄어드는……그런 게 애초에 없으려나?”
탄이 지끈거리는 고개를 털어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아니다. 그냥 무시해. 진짜 취했나 보네. 뭐 이런 이야기를…….”
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흐물거렸다. 애쉬는 탄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의 생각을 따라가려고 애썼다.
탄은 무엇이 걱정인 걸까? 이상한 표정이다. 슬픈 걸까? 화난 걸까? 그런데 이 이야기랑 도둑놈은 무슨 연관이지? 탄이 뭔가를 훔쳤나? 그럴 리가.
애쉬는 탄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릿속을 굴렸다. 경비대 구역에서 지내면서, 이전보다 말이 유창해졌고 사회성도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실감할 때가 있었다. 보편적인 관습이 어렵다거나, 행간에 숨은 감정을 잘 포착하지 못할 때.
애쉬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걷는 중이었지만, 그의 뇌는 바쁘게 돌아갔다. 저장된 기억 몇 개를 선별하여 들여다보고 정보를 흡수했다. 지금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한 기억은 다시 뒤편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다가 경비대 구역에 온 지 며칠 안 됐을 때를 떠올렸다. 다이온 총감이 빠르게 관사를 마련해 주어, 탄과 함께 집 안을 간단히 꾸미던 중이었다.
총감이 안부를 물을 겸 집에 들렀다. 그는 탄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애쉬를 바라보더니 작게 감탄했다.
<어리다, 어려. 넌 아저씨가 되어 가는데 저 친구는 탱탱하네. 불안해서 어째?>
<아, 그런 소리 하려고 왔으면 그냥 가세요. 시티 홀 어떻게 돌아가는지나 말해 주시지?>
탄이 불퉁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때의 장면을 집어낸 애쉬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불안! 불안이구나. 탄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부디 맞는 추측이길. 이게 문제라면 명확한 해결책이 있었다.
애쉬가 흐느적거리는 탄에게 속닥거렸다.
“탄.”
“뭐어.”
“혼자 아저씨 아닙니다.”
“……엉?”
“저도 아저씨가 될 방법을 방금 생각해 냈습니다.”
탄이 눈을 찌푸리며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는 살짝 들떠서 종알거렸다.
“치유력을 억제하면 돼요. 의도적으로 노화를 발생시키면 됩니다. 언제 늙을까요?”
“뭐?”
“탄이 원할 때마다 같이 늙겠습니다.”
탄은 입술을 톡 벌리고 있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애쉬는 눈가에 힘을 가득 준 채로 탄의 얼굴을 살폈다.
“됐거든.”
“왜요?”
“늙는 게 뭐가 좋다고. 늙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
애쉬가 당황했다. 이게 아닌가? 추측이 틀렸나?
“하, 하지만 탄이 불안해합니다.”
“안 그랬는데.”
“약간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아, 아니라니까. 이 자식이…….”
“애쉬랑 같이 늙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틀렸어요?”
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퉁명스럽게 부정하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탄의 목덜미가 화악 붉어졌고, 심박 수도 상승했다. 애쉬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틀렸어요?”
“…….”
“네?”
“……못 당하겠네.”
탄이 고개를 작게 내저으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네 말이 맞아. 나 혼자 아저씨 될까 봐 불안하고 슬펐어. 됐지? 항복.”
“이제는 안 슬퍼요? 언제 늙으면 될지 말해 주면…….”
“어유, 됐어.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고. 얼른 집에 가자.”
탄이 고개를 휙 옆으로 틀었다. 술에 취한 탄은 평소보다 투정이 많아진다. 언제나 습관적으로 짓던 여유로운 미소도 한 겹 옅어졌다.
애쉬는 탄을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말했다.
“탄, 탄. 저 술에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치유력을 일부러 억제하면 됩니다. 그럴까요?”
“됐어…….”
“하지만, 내가 취하는 거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에.”
“그렇기는 한데.”
애쉬가 고개를 기울여 탄에게 더 바짝 다가가고서는 말했다.
“다음에는 같이 취할까요?”
울림이 큰 저음이 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탄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뭐, 뭔데. 나 유혹해?”
“네?”
애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됐다. 됐어.”
애쉬는 탄의 얼굴 곳곳을 뜯어보며 분석했다. 탄이 작게 헛기침하면서 코끝을 찡긋거렸다. 저건 부끄러울 때 짓는 표정이다. 맞닿은 몸을 통해 탄의 체온이 솟구치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쉬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은 오히려 탄이 자신을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탄의 실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혹은 무척이나 잘 먹혔다.
……끌어안고 싶어. 애쉬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무작정 여기서 탄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애써 주먹을 강하게 쥐자, 손톱이 살갗에 파고들려 했다.
완전히 연소하지 못한 욕망이 찌꺼기처럼 체내에 남아 있다. 폴의 사망 후 지금까지 내내 여유가 없었다. 단둘이 술을 마신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탄은 매일같이 바쁘게 불려 다녔다. 애쉬도 증인 신분으로 이곳저곳 참석하느라 정신없었다.
현재 캐슬 시티는 격동 중이었다. 그저께는 시티 홀 최고 위원, 경비대 간부들, 구역 보안관 등이 모인 비상 위원회가 촉발되었다.
탄은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평생 뮤턴트와 싸우며 살았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었다. 보안관 배지는 진즉에 내려놓았다. 권력 다툼의 싸움터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함이었다.
비상위가 설립되고 나니, 이제 슬슬 여유가 생겼다. 내일은 애쉬와 탄 모두 일정이 없는 날이었다. 보름 만에 처음이다.
애쉬는 사고 회로가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한번 의식하고 나자, 끊임없이 야한 생각만 들었다. 욕망의 기억이 솟구쳐 오르면서 눈앞이 지끈거렸다.
그간 틈이 나면 키스와 포옹 정도는 했다. 중간에 한 번 서로 손으로 해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자꾸 그 너머를 바라게 된다. 여태껏 딱 한 번 맛보았던 쾌락인데, 깊숙하게 뇌리에 박혀 버렸다. 평생토록 그걸 원해 왔던 것처럼. 탄. 탄의 몸. 탄과의 섹스…….
『안고 싶어, 안고 싶어, 안고 싶어…….』
열기에 젖은 욕망이 탄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탄은 몸에 힘을 쭉 빼고 있다가 움찔거렸다.
“야, 애쉬. 너 지금 텔레파시 새어 나왔어.”
“아.”
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쌓였구나. 응?”
“……네.”
애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평소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초조하고 예민해진 얼굴로 수긍했다. 탄이 놀란 눈치로 말했다.
“뭐야. 아니라고 할 줄 알았더니만.”
“탄은 아니에요? 저…… 이상해요?”
탄은 애쉬를 놀리려다가 괜히 멋쩍어졌다.
“아니, 뭐. 나도 그렇지.”
애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웅얼댔다.
“어, 얼른 집에 가야…….”
탄을 붙든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어어.”
그 순간 탄의 발꿈치가 땅에서 들렸다. 부축을 넘어서, 흡사 애쉬가 탄을 옆구리에 낀 채 달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조금 전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경비대 관사 앞에 도착했다. 탄이 배정받은 곳은 총 8세대가 함께 사는 5층 건물의 꼭대기 집이었다.
애쉬가 계단 앞에 다다라서야, 탄을 놓아주었다. 탄이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발을 디뎠다.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몸의 균형을 잡기 쉽지 않았다.
“어우.”
탄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눈앞에 늘어선 계단을 바라보자 이마가 지끈거렸다. 평소에는 5층까지 올라가는 게 별일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취하긴 취했구나.”
애쉬는 탄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예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야아.”
“탄. 지금 계단 힘듭니다.”
끙, 탄은 앓는 소리만 낼 뿐 버둥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부끄러울 만한 상황이었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어차피 스스로 5층까지 올라갈 자신도 없었다.
탄은 흐느적거리는 몸을 완전히 애쉬에게 기댄 채로 숨을 내쉬었다. 허공에 뜬 발끝만 까딱였다.
애쉬는 흔들림 없이 계단을 올랐다. 금세 집에 도착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문까지 단단히 잠그고 나서야, 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탄이 비틀거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털어 냈다.
“어유…… 아주 재빨라. 거의 호버카에 버금가는 승차감이었어.”
“감사합니다.”
탄이 헛웃음을 내뱉고는 두 손으로 애쉬의 뺨을 움켜잡았다. 애쉬가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텔레파시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탄. 탄. 탄. 탄. 탄.』
“그래.”
『키스. 키스. 키스. 키스…….』
“키스하고 싶어?”
끄덕끄덕.
“이리 와.”
탄이 애쉬의 뺨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집에 오는 내내 흐트러지지 않았던 애쉬의 숨소리가 거칠게 튀어 올랐다.
애쉬가 와락 탄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부딪쳤다. 문 바로 앞에서 두 남자의 몸이 엉켰다.
애쉬의 등이 성난 듯이 잔뜩 부풀었다. 본능적으로 탄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취기 오른 탄은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졌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음에도, 스르륵 아래로 몸이 흘러내렸다. 그때마다 애쉬가 팔뚝으로 옆구리를 붙들어 올렸다.
애쉬는 정신없이 혀를 섞었다. 술을 들이부어도 멀쩡하던 몸이 지금은 온통 지끈거렸다. 성욕이 정신을 야금야금 지배해 갔다. 연인의 타액을 마시고, 입술을 힘주어 문댔다.
『부드러워. 좋아. 탄, 입술…… 따뜻해…….』
탄은 맞닿은 입술 사이로 작게 신음했다.
“흐으…….”
입가가 아릿할 정도로 오랫동안 격렬하고 거친 키스가 이어졌다. 그동안 애쉬의 욕망은 여과 없이 탄의 머릿속에 그대로 꽂혀 들어왔다. 술에 취해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날 정도로 노골적인 것들이었다.
『탄. 교미, 결합……하고 싶어. 넣고 싶어…… 탄, 탄…….』
두 사람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탄은 잔뜩 물기 어린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끔뻑였다. 흥분으로 물든 시야가 흐릿했다. 애쉬도 마찬가지로 잔뜩 녹아내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탄이 지그시 무게를 실어 애쉬에게 몸을 기댔다. 팽팽하게 부푼 애쉬의 성기가 사타구니를 찔러 왔다. 탄은 고개를 숙여 이마를 애쉬의 뺨에 치대며 웅얼거렸다.
“하, 나 너무 취해서 안 설지도 모르는데. 괜찮나?”
“네…… 저는 섰어요.”
애쉬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음성만 들으면 위압감이 느껴질 만한데, 음성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그걸 내뱉는 사람은 순하고 고분고분했다. 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기특하네.”
“네에…….”
애쉬가 애교 부리듯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탄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팔뚝으로 탄의 허리를 감싼 채 번쩍 그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애쉬는 저벅저벅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관사는 공용 거실에 방이 한 개 딸린 구조였다. 방에는 덩치 큰 성인 남성 둘이 뒹굴어도 될 만큼 널찍한 수면 매트가 깔려 있었다.
매트로 향하는 동안 애쉬는 거칠게 호흡했다. 탄을 안아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갈 때도 멀쩡했던 숨소리가 지금은 엇박자로 튀어나왔다.
애쉬는 머릿속이 팽팽 도는 것 같았다. 색욕에 몸이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탄의 맨살에 얼른 코를 파묻고 냄새를 들이마시고 싶다. 그의 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파고들고 싶다.
애쉬가 탄을 매트 위에 내려놓았다. 탄은 흐느적거리며 윗옷을 벗으려 했다.
“아, 잘 안 된다.”
“탄. 제…… 제가…….”
애쉬의 덜덜 떨리는 손끝이 탄에게로 다가왔다. 애쉬는 말을 끝맺지도 못할 만큼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탄은 사복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애쉬의 두툼한 손끝이 셔츠 단추 위에서 미끄러졌다. 애쉬는 미간을 찡그리며 초조해했다. 단추를 하나씩 다 풀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단추 따위야 다 뜯어 버릴 수 있었지만, 탄의 옷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애쉬가 단추와 씨름할 때, 탄이 나지막이 말했다.
“……얼른.”
“죄송해요……. 단추가 너무 작고 많습니다.”
“그냥, 얼른…….”
“네?”
“단추를 뜯어 버리든가, 좀…….”
탄은 열기에 물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러누워 애쉬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이미 흥분이 가득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는데도, 성기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애쉬가 바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단추만 뜯어낸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아예 셔츠가 찢어져 버렸다. 애쉬가 너덜거리는 셔츠 자락을 쥐고 탄을 바라보았다.
“타, 탄.”
“셔츠는 다시 사면 되니까…… 너도 벗어.”
평소였다면 애쉬는 조금 더 안절부절못하며 탄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급하게 웃옷을 벗어 던지고서, 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콧날이 미끄러지듯이 내려가며 가슴팍 사이에 머물렀다.
탄은 아래에 깔린 채 흐느적거리는 팔을 애써 뻗었다. 손을 더듬거리며 서랍 안을 뒤졌다. 63구역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여러 자원이 풍부했다. 이런 행위에 도움을 줄 만한 물건을 구비해 놓았다는 소리다. 그동안은 미처 쓸 여유가 없었지만.
탄이 콘돔을 찾을 동안, 정제되지 않은 애쉬의 생각이 탄에게 쏟아져 내렸다. 텔레파시는 언어가 아니라 파편화된 욕망 그 자체였다.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뒤죽박죽 섞였다.
『탄, 좋아, 뜨거워, 얼른……, 간지러워, 안에, 탄, 냄새, 탄…….』
애쉬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탄의 몸을 어루만졌다. 애무라기에는 다소 투박한 손짓이었다. 상대와 닿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듯한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점점 애쉬의 눈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손끝이 벌벌 떨렸다.
“이리 와.”
탄도 마찬가지로 여유가 없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서랍 속에서 콘돔을 꺼내 들자마자 애쉬에게 손짓했다. 탄이 능숙하게 콘돔 포장지를 찢었다.
언제든 황홀한 밤을 선사합니다! 고통에는 둔감하게, 쾌락에는 민감하게! 이런 문구를 보고 주문해 놓았던 것이다. 탄은 미끈거리는 콘돔을 손에 쥔 채 잠시 어색하게 애쉬를 바라보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
애쉬가 멍하니 있었다.
“내가 해 줄게.”
탄은 웅얼거리면서 애쉬의 성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민망하네…….”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으로 애쉬의 바지를 벗겼다. 애쉬는 가쁘게 호흡하며 시선을 탄에게 고정했다. 짙은 눈매가 탄의 이곳저곳을 훑었고, 머릿속에 그 이미지를 빠르게 저장했다.
광고가 허풍만은 아니었는지, 콘돔 외면에는 윤활제가 듬뿍 발라져 있었다. 탄이 애쉬의 성기 위에 콘돔을 씌웠다. 애쉬는 어정쩡하게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우고는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껍질이 생식기를 덮고 있다. 기이해 보였다. 콘돔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직접 착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상한…… 갑갑합니다.”
“좀 작나.”
애쉬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조금 작긴 하네. 끝까지 안 닿는구나. 여기 브랜드는 이게 제일 큰 사이즈였는데…….”
“이걸, 하면 좋아요?”
“아, 그냥 뺄래? 평소보다 네가 좀 덜 느끼긴 하겠지.”
“아뇨. 탄이.”
“나한테 좋냐고? 뭐, 통증을 줄여 준다길래……. 안 풀고 바로 하면 좀 아플까 봐.”
“안 풀어요? 왜?”
“급해서. 여유 부릴 정신 있어?”
“아……니요.”
“근데 없이 해도 뭐 괜찮을걸? 답답하면 빼자.”
탄이 콘돔을 다시 벗겨 내려고 손을 뻗었다. 무작정 넣으면 아프기야 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쾌락이 경감된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찢어지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아니, 조금은 다쳐도 된다. 어차피 내일 쉬니까.
탄은 고통에 둔감했다. 평생을 자잘한 부상을 달고 사며 훈련을 받아온 탓이다. 애쉬는 재빠르게 탄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전혀 답답하지 않습니다. 느슨해요.”
“……그래 보이지는 않는데?”
“펴, 편합니다.”
의심하는 눈초리가 꽂히자, 애쉬가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탄이 아프면…… 싫어요…….”
탄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애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녀석. 이리 와.”
탄이 애쉬의 손목을 붙잡았고, 애쉬는 주춤거리며 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레 밀착하며 맨살이 맞닿았다. 애쉬는 피부 너머 탄의 심장이 콩닥거리는 걸 느꼈다. 천천히 성기 끝을 아래에 가져다 댔다.
“흐…….”
작은 접촉에도 애쉬가 신음했다. 콘돔 때문에 덜 느끼기는커녕, 벌써 온 신경이 활성화되었다. 그래도 안에 곧바로 넣지 않고 인내했다. 귀두로 구멍 주변의 근육을 은근하게 짓눌렀다.
탄의 살갗에는 서서히 윤활제가 스며들며, 민감한 부위가 더 예민해졌다. 약한 자극만으로도 아래쪽이 간지럽고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애쉬는 탄의 아래가 움찔거리는 걸 느꼈음에도, 차근차근히 귀두의 절반만 꾸욱 밀어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아래가 풀어질 시간을 주려는 의도였으나, 탄은 오히려 이게 더 고통스러웠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구멍 안쪽까지 근질거렸다.
“와…… 야, 이거…….”
참된 광고였구나. 탄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벽을 단숨에 긁어 주지 않고 입구에서만 깔짝거리는 성기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탄이 두 팔로 애쉬의 어깨를 감싸고서 속삭였다.
“그냥, 해…….”
“벌써?”
“흐, 으으…… 빨리.”
탄이 재촉하듯이 애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애쉬는 조심스럽게 성기 끝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윽, 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통증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기분 좋음이 더 컸다. 탄이 다리로 애쉬의 골반을 감쌌다.
“아, 좋아…….”
애쉬는 탄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참고 있다가, 이 순간 모든 걸 내려놓았다. 꽈악, 탄을 끌어안으며 골반에 힘을 주었다. 굵직한 것이 내벽을 벌리면서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탄은 안이 늘어나는 감각에 신음했다.
두 사람은 빈틈없이 맞붙은 자세로, 잠시 몸이 연결되는 쾌락에만 집중했다.
“으윽…….”
탄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두 몸뚱이 사이에 낀 성기가 자극되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서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반쯤 단단해진 상태였다.
애쉬는 탄을 꽉 안은 채로 골반만 움직였다. 꾸욱, 꾹, 성기가 계속해서 안을 짓누르고 파고들었다. 그러다 점점 골반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탄은 뇌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아래처럼 정신까지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애쉬는 언어화된 텔레파시가 아닌 무형의 감정 덩어리를 끊임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엄청난 파동이 탄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애쉬가 느끼는 쾌감과 몸이 동화되었다.
“하아, 읏…….”
탄이 눈을 질끈 감고서 낮게 신음했다. 두 사람 모두 살갗이 땀에 젖어 갔다. 축축한 피부끼리 맞닿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퍽, 굵직한 성기가 내벽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도 일정한 박자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탄은 숨이 갑갑할 정도로 애쉬에게 파고들어 매달렸다. 저번보다 애쉬의 움직임이 훨씬 다급하고 거칠었다. 오랜만인 데다가 잘 풀지도 않아 아플 법도 한데, 짙은 쾌락이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성기가 안을 수십 번 긁고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간지럽고 욱신거렸다.
뜨거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애쉬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말로 물어보지 않아도, 애쉬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몸으로 알 수 있었다.
“하아…….”
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다 녹아 버릴 것 같다. 두려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두 몸 사이에 짓눌린 성기가 움찔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탄은 아랫배가 확 조여들고 지끈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허벅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애쉬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다리가 덜덜 떨리고 발끝이 굽어졌다.
“애, 쉬…… 잠깐.”
몇 분 만에 처음으로 탄이 말을 내뱉었다. 잔뜩 뭉개진 목소리는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애쉬는 정신없이 골반을 앞뒤로 더 빠르게 움직였다.
“허윽, 으…….”
탄이 손끝을 갈고리처럼 세워 애쉬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윽고 길고 무거운 쾌락이 몸을 짓눌렀다. 온 근육이 긴장하면서 뻣뻣하게 굳었다. 내벽도 마찬가지였다. 확 조여듦과 동시에 바르르 떨렸다. 탄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아……!”
그제야 애쉬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축축한 숨을 몰아쉬면서 땀에 젖은 뺨을 탄에게 문댔다.
탄은 입을 살짝 벌린 채 호흡하기 급급했다.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진한 쾌락에 몸이 잠식되었으나, 사정은 하지 않았다. 뒤로만 간 거다.
애쉬의 성기는 여전히 내벽을 가득 메운 채였다. 부피가 줄어들 기세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탄은 성기가 가만히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내벽이 오르가슴의 여파로 한껏 민감해져 있었다. 예고도 없이 움찔거리며 경련했다.
“흐응, 으, 읏…….”
탄이 작게 신음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애쉬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애쉬. 나, 나 너무…….”
힘드니까 잠시 쉬었다가 하자.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쉬의 눈동자를 본 순간 입이 굳었다. 이성이라고는 한 올도 남지 않은 듯한 얼굴. 쾌락에 잠긴 애쉬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탄은 느슨해졌던 다리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고, 애쉬의 허리를 옭아맸다. 본능적으로 애쉬를 다시금 자기 쪽으로 옭아매고 끌어당겼다. 애쉬의 얼굴에 홀린 기분이다. 감당 못 할 쾌락에 온몸이 녹아내려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내일 후회할 것을 직감하면서도, 당장은 이 행위에 몸을 내던졌다.
“하…….”
탄은 자조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린 애인에게만은 자꾸만 속절없이 약해진다. 일평생 꼿꼿했던 고집은 애쉬 앞에서는 너무나도 손쉽게 꺾였다.
애쉬는 탄과 얼굴을 마주한 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치로 예민해진 내벽에 자극이 가해지자, 탄의 몸이 저절로 뒤틀렸다.
애쉬는 탄이 버둥거리고 꿈틀거려도 개의치 않았다. 탄이 쾌락에 압도당해 본능적으로 빠져나가려는 듯이 움직이면, 애쉬 또한 본능적으로 탄의 골반을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탄의 다리가 한껏 벌어졌다. 애쉬가 만족할 때까지 오늘의 행위는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기력이 빠져도 애쉬가 원하는 눈빛을 보내면 자신은 넘어가고야 말 테니까. 다행히도 콘돔은 한참 남아 있었다.
* * *
탄이 붙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좀 괜찮니?”
끄덕끄덕. 말없이 고갯짓만 하는 게, 꼭 누구를 닮았다.
아이의 신체 나이는 열두 살 정도로 추정된다. 일전에는 루라 불렸으나, 지금은 스스로 택한 이름으로 불린다. 아이는 케인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었다.
탄이 실험실에서 구출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도 두 달째였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작명할 때도 웃지 못할 사건의 연속이었다. 루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탄은 아이들에게 여러 생활 상식 및 제도를 알려 주고 형질을 가이딩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애쉬는 형질을 스스로 제어하는 법을 가르쳤다.
오늘은 정기적으로 케인이 가이딩을 받는 날이었다. 케인에게는 가이딩이 그나마 잘 통했다. 아이들의 형질은 대부분 뒤틀려 있었기에, 탄의 가이딩마저 먹히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린 애쉬와는 경우가 달랐다. 애쉬에게 했던 것처럼 가이딩이 자연스럽게 될 줄 알았다가 초반에 무척 당황했다. 오히려 애쉬가 예외였던 거다. 애쉬는 탄의 가이딩을 받고 나면 몸이 안정되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성장 촉진제의 부작용이 심해 일상생활이 힘든 아이도 몇몇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전투 학교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병동으로 가야만 했다. 이곳에 남아 재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지하 실험실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옛날이야기들처럼 행복한 앞길만 이어질 리 없단 걸 알았으나, 탄은 가끔가다 씁쓸해졌다.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만한 피해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겪은 일은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그마하게나마 상처를 남겼다.
탄은 자신이 최대한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아이들이 자립하도록 돕는다. 아이들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몇 가지 저만의 철칙을 세워 놓고서 일을 하는 중이었다.
가이딩이 끝나고 탄은 케인을 먼저 내보냈다. 이 가이딩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가이딩 룸으로 쓰이는 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나오자마자, 문 앞에 떡하니 애쉬가 서 있었다.
“어이고, 깜짝이야.”
“끝났어요?”
“그래.”
“이제 오늘 끝? 집에 가요.”
애쉬가 종알거리며 탄의 옆에 찰싹 붙었다. 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애쉬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응, 끝.”
탄은 애쉬를 곁눈질했다. 애쉬의 입매와 눈매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애쉬는 탄이 다른 아이를 가이딩하는 걸 견디기 힘들어했다. 어린애들과 손을 잡는 게 전부인데도.
수업이 시작되고 초반에 애쉬는 실의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설마 어린애한테도 질투하는 건가. 처음에는 귀엽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이제는 애쉬도 탄의 일임을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질투심은 여전했다. 탄의 가이딩이 끝나고 나면, 한참 동안 주변을 맴돌았다. 지금도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 꼴이 안쓰럽다.
“손잡을까?”
탄이 달래려 손바닥을 내밀자, 애쉬가 냉큼 붙잡았다.
“네. 좋아요.”
“내가 다른 에스퍼 가이딩해 주는 게 싫어?”
끄덕끄덕.
“어린애한테도 질투하면, 나중에는 어쩌지.”
원래는 반년으로 예정된 교관 업무였으나, 탄은 자의로 기간을 조금 더 늘리려 했다. 여기서 아이들을 더 책임지고 싶었다.
“이 김에 복귀 안 하고 학교에 눌러앉을까. 애들 케어해 주는 것도 꽤 재미있는데.”
애쉬의 눈이 동그래졌다.
“……! 네!”
“하지만 넌 경비대로 갈 거잖아.”
영영 여기서 뭉개고 있지는 못할 테다. 자신은 몰라도, 애쉬는 언젠가 경비대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애쉬 정도의 전투 인력을 내버려 두는 건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렸다. 다이온 총감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애쉬를 데려갈 터였다.
탄은 작게 투덜거렸다.
“거기서 다른 놈한테 가이딩 받는 거 아냐?”
“아.”
“……부대에 있을 땐 그러려나?”
탄은 처음으로 다른 가이드가 애쉬의 손을 잡는 상상을 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놀랐다. 머리로는 업무의 일환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어, 싫네.”
겨우 손잡는 것 정도로 심기가 뒤틀리다니. 자기 자신이 나이에 맞지 않게 유치해진 것 같아 헛웃음이 터졌다.
“안 되겠다. 투잡 뛰어야지.”
“네?”
“너 경비대 들어가면 나도 따라갈 거라고. 학교 일도 부분적으로 병행하면 되지 않을까? 교관을 몇 명 더 뽑고…….”
탄이 중얼거리며 계획을 세웠다. 애쉬를 옆에 끼고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는다? 생각만 해도 짜증 났다. 애쉬의 질투를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탄. 기분이 나빠 보입니다.”
“마음이 아파졌어.”
“네?”
애쉬가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아아, 안 되겠어.”
“타, 탄?”
“너 어딜 가나 나랑 같이 가. 알겠어?”
“그건 당연합니다.”
“그래, 좋아.”
후우. 탄이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곧 특별한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까.
오늘은 다언이 경비대 구역에 오는 날이었다. 몇 달 만에 얼굴을 보는 거였다.
그간 캐슬과 각 구역 내에서는 여러 변화가 일어났다. 탄은 웬만하면 거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탄과 달리 적극적으로 변화에 뛰어든 이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63구역 공장의 리더, 아혼이 그러했다. 얼마나 바쁜지 연락도 잘되지 않았다. 다언을 만나면 아혼의 근황도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다.
애쉬와 탄은 얼른 퇴근할 준비를 했다. 모든 교관이 같이 사용하는 사무실 구석에 둘의 책상이 있었다. 두 사람 외에 교관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은퇴한 경비대원들이었다. 탄이 일반 대원이었을 때 알고 지내던 선배들도 많았다.
근무지도 근무 내용도 급격히 바뀌었으나, 탄은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빠르게 적응을 마쳤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면서 친근하게 인사했다.
“가 보겠습니다.”
“어어, 고생했어. 퇴근해.”
“예에.”
탄이 다른 교관들과 인사를 나눌 동안, 애쉬는 조용히 꾸벅꾸벅 고개만 숙였다.
애쉬는 탄을 제외한 이들과는 말을 그다지 섞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벽을 세우거나 무심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남몰래 다른 이들을 챙기기도 했다. 다만 말수가 적을 뿐이었다.
그런 애쉬가 적극적으로 언어적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상대는 탄이 유일했다.
“탄. 배고픕니다.”
학교 본관을 나서면서 애쉬가 웅얼거렸다. 탄과 함께 있을 때는 애쉬의 과묵함이 사라졌다. 육성이 아니더라도 텔레파시를 이용해 쫑알거리기도 했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둘은 서둘러 학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보안관님!”
다언이 전투 학교 앞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탄은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다언에게 다가갔다. 못 본 사이 다언의 머리카락은 조금 길어져 어깨에 닿았다. 창백하던 얼굴에는 이전보다 혈색이 돌았다.
“어어, 오느라 고생했지?”
“경비대에서 호버카를 보내 줘서요. 편하게 왔어요.”
다언이 경비대 구역에 온 것은 동생인 나즈 때문이었다. 나즈의 에스퍼 형질이 최근 들어 짙어졌다. 처음 강제로 발현되었을 때는, 형질이 너무 미미한 상태였다. 주기적인 가이딩이 딱히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뒤늦게 형질 수치가 치솟았다. 결국에는 전투 학교에 입학해 탄이 가르치는 특수반에서 함께 훈련받기로 했다.
다언은 경비대 구역에 나즈 혼자 보내는 걸 불안해했다. 이후에 다른 부작용이 터질 수도 있었다. 약효가 어떤 식으로 변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탄은 다언이 경비대 구역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지낼 수 있도록, 근처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그 과정에서 다이온 총감의 인맥을 조금 활용했다. 총감의 지인 중에 2구역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때마침 소품 팀 인력이 부족하다길래, 손기술이 좋은 다언을 은근슬쩍 추천했다. 극장주는 63구역 출신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다언을 못 미더워했다. 전직 경비대원이자 보안관인 탄이 나서서 설득하며 다언의 신원을 보증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다언은 무사히 취직에 성공했다. 월급을 두 달 치 당겨 받아, 2구역에 방을 구할 예정이었다.
다언이 며칠 내로 방을 구하고 나면, 나즈도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그동안 지낼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탄과 애쉬가 자신들의 거실을 잠시 내주기로 했다.
세 사람이 오랜만에 나란히 걸어간다. 트램 정거장 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경비대 구역에서 2구역까지는 트램으로 15분 정도 걸렸다. 2구역으로 넘어가서, 식사부터 해결하고 다언이 지낼 곳을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다언은 가장 가운데에 서서 걸어가다가, 탄과 애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진짜 보안관님 집에서 지내도 되는 건가요?”
탄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당연하지. 이미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어?”
“제가 두 사람 사이에 끼는 것 같아서…….”
“그런가?”
“눈치 없이 신혼집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신혼집?”
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네?”
“제가 보안관님한테 신세 진다고 하니까, 아혼이 그러더라고요.”
“뭐 그런 얘길 했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그래도 최대한 빨리 방을 구해 볼게요…….”
아혼을 비롯하여 함께 시티 홀에 왔던 일행들은 자연스레 탄의 연애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상대가 애쉬라는 것도.
탄은 딱히 숨길 생각도 안 했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시티 홀에 머무르는 동안, 원치 않더라도 다들 탄과 애쉬가 연애한다는 걸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탄은 애초에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캐슬 시티에서 동성 연애가 흔하지는 않다. 공공연히 드러내는 사람은 극소수며,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탄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보편’에서 벗어난 일을 하도 저지른지라, 정상성을 연기해 봤자 무의미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근데 아혼은 잘 지내나?”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빠요.”
“자율 협의체인가 뭔가 그건 잘되어 가?”
“비대위랑 치고받고 하는 중일걸요.”
두 달째 시장직은 공석이었다. 시장을 임기제 선출직으로 변경하자는 흐름이 있었고,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임기는 몇 년으로 할지, 선출 방법은 어떻게 할 건지,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다.
비대위는 말 그대로 비상 상황을 해결하면 해체될 수순이었으나, 아직도 그 명줄이 끊기지 않았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자, 각 구역에서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이 모여 구역 간 자율 협의체라는 조직을 꾸렸다.
이 조직을 추진하고 기어코 설립해 낸 주최 중 하나가 아혼이었다.
맨 처음에는 각 구역의 의견을 취합해서 비대위에 압력을 넣는 게 설립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중앙을 대신해 각 구역의 자치 기구 같은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캐슬 시티의 모든 구역이 협의체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합류를 논의 중이거나 이미 거부한 구역도 있었다. 현재 총 47구역이 가입되었으나, 개중 10구역 이하는 한 곳도 없었다. 중하위권 구역의 느슨한 연합체인 셈이다.
자율 협의체에서 요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사회 기여도 측정 기준의 개정. 구역 간 이동을 억지하는 통행제의 폐지.
아직 그 무엇도 확정 난 사안은 없었다. 일련의 흐름이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만이 확실했다.
다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아혼을 비롯한 63구역 사람들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정류장에 2구역으로 나가는 트램이 도착했다.
조금씩 하늘이 어두워질 시각. 길거리뿐만 아니라 트램 내부에도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다언은 색색의 조명과 네온사인 등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 이쪽에 오면 완전히 다른 세계 같다니까요.”
63구역의 어둠에 익숙해지다 보면, 불빛이 꺼지지 않는 밤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진다.
셋이 탑승한 트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인승 트램은 거의 꽉 차 있었고 무척이나 번잡스러운 분위기였다.
한쪽 구석에서는 홀로그램 광고가 끊임없이 나오는 중이었다.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중년 남성이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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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남자 옆에는 자그마한 홀로그램 글씨가 떠 있었다.
[10구역 이하 구역에서만 한정 판매되는 프리미엄 제품입니다.]
이런 광고가 흘러나오는 걸 보면, 비상위니 자율 협의체니 다 꿈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무 일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음식 광고가 끝나자, 이번에는 다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어.”
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냈다. 익숙한 얼굴이 허공에 동동 떠오른 탓이었다. 아혼이었다.
탄이 홀로그램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뭐냐.”
다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아. 광고 건다고 하더니 진짜 했네? 웬일이야.”
홀로그램 속 아혼은 탄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휙 손짓하자, 생생한 디지털 화면 하나가 떠올랐다. 불타는 시티 홀 건물의 모습이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꼴이 익숙했다. 호버카를 타고 쳐들어갔던 그날이었다.
이어서 아혼이 손짓할 때마다 여러 장면이 팝업되었다가 사라졌다. 상위 구역에서는 볼 수 없는 지저분하고 비루한 골목의 모습, 병색이 역력한 사람들. 자극적인 장면만 일부러 모아 놓은 듯했다.
- 우리가 알던 캐슬 시티는 무너졌습니다.
아혼이 진중한 말로 이런저런 말을 읊었다. 요약하자면, 구역 간 자율 협의체에 후원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자신들과 함께할 사람들도 모집한다고 했다.
트램에 있던 몇몇 이들은 아혼의 광고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이곳에는 아혼의 말에 공감할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다른 구역의 사정이 어떻든지, 여전히 합성육 스테이크를 구워 먹을 수 있다.
퇴근 시간에 굳이 불편한 장면을 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위 구역 트램에까지 광고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꽤 공격적으로 선전 중이라는 뜻이었다.
탄은 자그맣게 웅얼거렸다.
“아혼이 작정했구나.”
“예전에는 이런 광고를 하고 싶어도 못 했으니까요.”
광고를 신청한 순간, 시티 홀의 검열에 걸려 무조건 잡혀갔을 것이다. 현재는 시장의 직권으로 이루어지던 검열이 멈추었다. 여러 이야기가 마음껏 난입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탄은 집중해서 홀로그램 아혼을 응시했다. 광고가 끝나 갈 무렵에야, 조금 힘을 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그런데 영 표정이 어색하다. 연습 좀 더 해야겠는걸.”
“말도 마세요. 아혼은 광고 찍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저 양반이 맡았대?”
“협의체가 수직적인 곳은 아니지만, 실질적 리더 역할을 아혼이 하는 중이라서요. 그리고 인물도 아혼이 제일 좋으니까?”
“멋지게 생기긴 했지. 카리스마 있어. 얼굴마담까지 도맡고 아주 바쁘겠…… 윽.”
고개를 끄덕이며 다언의 말에 수긍하던 탄이 작게 신음했다. 내내 잠자코 있던 애쉬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른 탓이었다.
애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탄이 당황하며 웅얼거렸다.
“아이, 왜 이래.”
애쉬는 별말 없이 입매에 힘만 꾹 주었다. 다언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키득거렸다.
“설마 보안관님이 아혼 칭찬하니까 질투하는 거야?”
“아, 그런 건가. 애쉬, 맞아?”
애쉬는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맞구나. 일전에 아혼 같은 스타일이 취향이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두고두고 마음에 품을 줄 알았다면……. 아니, 애초에 그때는 애쉬와 이런 사이가 될 거란 생각도 못 했지만.
“내가 뭐 아혼한테 사심이 있어서 칭찬한 게 아니라, 그냥 객관적인 시선에서 말을 한…… 거였는데. 이런 말 하지 말까?”
“네.”
애쉬가 굵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다언은 웃음을 꾹 내리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방을 구해서 이 남자들의 집에서 나가 주자고 다짐했다.
* * *
세 사람은 근사한 저녁을 먹고서, 2구역 월세방을 이곳저곳 구경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다언은 이미 한 곳으로 마음을 정한 듯했다. 탄이 가장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다가 말했다.
“앞으로 여기서 한참 살지도 모르는데. 뭐 이리 급하게 정해? 좀 더 천천히 둘러봐.”
“아뇨. 아까 본 데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생각한 예산 내에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기도 하고…… 거기보다 좋은 곳 구하긴 힘들 것 같아서요.”
“그래서 내일 바로 계약하겠다고?”
“이사 날짜도 최대한 빠르게 맞춰 봐야죠.”
“어이고, 급하다 급해.”
조금 서두른 감은 있었지만, 다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상태 좋은 매물에 마음을 빼앗겼다.
“여기에서 오래 지내기도 좀 그렇고요.”
“편하게 있어도 된다니까.”
탄의 옆에서 걸어가던 애쉬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 제가 싫어요.”
탄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거참, 사람이 매정하게. 오랜만에 봤는데.”
“어차피 2구역으로 이사하고 나면, 자주 뵐 거 아니에요. 가까우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피곤해 보이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더니……. 얼른 씻고 자야겠어요.”
다언은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호버카를 타고 경비대 구역으로 향할 때부터 긴장 상태였다. 저녁을 먹고 돌아다니면서도 그랬다.
다언은 남들의 연애 행각에 면역이 없었다. 애쉬와 탄은 밖에서 대놓고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종종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고는 했다.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챙기는 건 기본. 탄은 말버릇인지 툭하면 애쉬에게 귀엽다 귀엽다 노래를 불렀고, 심지어 애쉬는 그 말에 기뻐했다.
귀엽다는 말에 알레르기가 생길 판이었다. 물론 두 남자가 이해는 되었다. 죽고 못 사는 게 당연한 연애 초기니까. 그저 자신이 얼른 빠져 줘야겠다는 다짐이 강해졌을 뿐이다.
애쉬와 탄의 집 안에 발을 들였을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짙어졌다. 침실에 매트가 단 한 개밖에 없었다. 남자 둘이서 뒹굴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만한 크기였다.
“매트가 크네요…….”
눈썰미가 좋은 다언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콘돔 상자도 알아보았다.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다.
탄은 다언이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존경하는 전직 상관의 사생활을 엿본 느낌이다. 게다가 그 상대 또한 잘 아는 인물이라서 더 어색했다. 딱히 원한 적 없는 정보를 과다 섭취했다.
다언이 거실 한복판에서 어정쩡하게 멈추어 섰다. 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온다고 그래서 여분 매트도 사 놨어. 여기에 깔아 줄게.”
“네. 감사해요…….”
“집에 뭐가 별로 없지? 뭐 꾸밀 시간이 없어서, 아직 휑해.”
애쉬가 옆에 조용히 서 있다가 나지막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좋아요.”
애쉬의 말에 탄이 헤실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의 팔꿈치가 맞닿았다. 다언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꾸려 온 가방을 급히 뒤졌다.
“아, 저 선물을 좀 사 왔는데…….”
“어? 그냥 빈손으로 오지. 뭘 또.”
“진짜 별거 아니에요. 나중에 돈 모아서 더 좋은 거 사 드릴게요.”
“줄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너한테 써.”
“보안관님이 일자리도 알아봐 주셨고, 앞으로 나즈도 돌봐 주실 테니까……. 여러모로 감사의 의미예요.”
다언은 제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선물을 내밀었다. 탄을 만나기 직전, 근처 가게에 들러 산 것이었다.
“좀 더 좋은 걸 사고 싶었는데. 가격이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더라고요…….”
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보온 컵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 세트예요. 커플로 나눠 쓰시라고…….”
탄이 입을 벌린 채 선물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언. 나 감동해서 코끝이 찡해지려고 한다.”
“마음에 들어요?”
“당연히 좋지!”
옆에서 애쉬도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그사이 좀 길어진 애쉬의 머리카락이 팔랑거렸다.
“요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선물을……. 세상에, 기특해라.”
“마,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나 참. 면접 보러 와서 잔뜩 가시를 세우던 게 어제 같은데…….”
다언은 괜히 민망해져서 헛기침했다.
“저, 저 씻을게요…….”
결국에는 도망치듯이 욕실로 향했다. 급하게 움직인 몸이 삐거덕댔다. 다언은 누군가에게 다정한 눈빛을 받는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애정 섞인 말을 듣는 것도.
“다언! 고마워!”
뒤에서 들리는 탄의 외침에 다언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어색함으로 물든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벌써 자네. 피곤했나 보다.”
탄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다언은 거실에 매트에 깔자마자 곧장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매트가 넓은데도 가장 끄트머리에서 몸을 한껏 동그랗게 만 채로 자고 있었다.
애쉬와 탄은 다언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살금살금 집 밖으로 나왔다. 자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으나, 집에서 떠들면 다언의 숙면을 방해할 것 같았다.
탄이 눈짓으로 옥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로 올라갈까?”
“네. 좋아요. 얘기해요.”
단둘이 남게 되자 애쉬의 말수가 곧바로 늘어났다. 말끝에는 약간의 애교스러움마저 섞여 있었다. 적어도 탄이 듣기에는 그랬다.
탄은 이제 애쉬의 음성을 일종의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면서 웅얼웅얼 목소리를 뱉어 낼 때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두 사람은 건물 옥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은 별거 없이 휑했지만, 밤바람을 만끽하며 숨 돌리기에는 좋은 장소였다.
탄이 앞장서 옥상 문을 열었다. 냉랭한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피로감으로 몽롱해진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듯했다. 날씨가 부쩍 추워지고 있었다.
“오래는 못 있겠다.”
탄이 난간 쪽으로 슬렁슬렁 걸어가며 어깨를 움츠렸다. 외투라도 하나 들고 올걸. 후회하던 탄의 등 뒤로 애쉬가 바짝 붙어 섰다.
“추워요?”
“약간?”
“저는 따뜻합니다.”
애쉬가 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탄은 낮게 헛웃음을 내뱉으며 옥상 난간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댔다.
“그러네. 뜨끈한데.”
“체온을 조절했어요.”
“아주 만능이야.”
탄이 몸에 슬쩍 힘을 풀어 애쉬에게 기댔다. 애쉬는 뺨으로 탄의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았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개인용 호버카들. 흐린 밤하늘 곳곳에 퍼진 홀로그램 광고. 건물에 달린 수많은 네온사인 간판들.
그리고 저 끝에 지평선에 걸쳐진 듯 보이는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 가까운 이곳에서는 이토록 까마득할 정도로 먼 곳이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저 벽만 넘어가면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모든 것이 무용해지는 황야와 포식자들뿐이라는 게.
문득 탄은 지나가다 들은 고사를 떠올렸다.
“옛날엔 개구리라는 게 있었대.”
애쉬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코끝으로 탄의 머리카락을 헤집기만 했다.
“성벽 안 개구리? 이거 맞나. 흠, 구멍 안 개구리였나? 이것도 아닌가?”
“무슨 뜻입니까?”
“사실 나도 잘 몰라.”
애쉬는 어딘가에 갇힌 채 저들끼리 물어뜯는 개구리라는 종족을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을지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걔도 동물이니 이빨로 물어뜯고 하겠지. 폐쇄적인 곳에서는 서로 치고받고 싸운다는 뜻이려나.
탄의 상상은 실제와 괴리감이 있었으나, 진실을 알려 줄 구세계인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실 개구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득 성벽 안팎 모두 싸움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상하게 허탈함이 들었다.
애쉬는 한참 동안 침묵하는 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탄, 슬퍼요?”
“응? 아니.”
“말이 없습니다.”
“아냐. 뭐, 쓸데없는 생각 했어. 개구리 생각.”
“네?”
하하. 탄이 힘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냥 세상이 좀 삭막한 것 같아서. 우리 애쉬를 잘 지켜 줘야 하는데 걱정이다.”
“저 강합니다.”
“알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애쉬라면 성벽 너머에서도 무탈하게 적응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란 건 알았으나, 탄은 종종 애쉬가 피보호자처럼 느껴지곤 했다.
실제 지닌 힘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작정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보다 센 사람일지라도.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을 책임감이 사랑의 증거임을 이제 알았다.
애쉬는 입술을 모은 채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잠시간 눈동자만 느릿하게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탄. 삭막하지 않아요. 좋습니다, 세상은.”
“의외로 낙천주의였네.”
탄은 저를 껴안은 애쉬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애쉬가 이런 말을 하니 가슴 한구석이 울렁거린다. 세상은 그다지 애쉬에게 친절한 적이 없었으니.
애쉬가 뒤에서 탄을 더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여기에는 탄이 있어요.”
탄이 고개를 돌려 애쉬를 바라보았다.
“탄이 없는 세상도 있었어요.”
“…….”
“지금은 좋습니다. 하나도 삭막하지 않아요.”
표백된 실험실만 아니라면, 탄에게 닿고 싶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면, 애쉬는 상관없다는 투였다.
탄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목을 젖혀 애쉬의 어깨에 뒤통수를 툭 기댔다. 별 하나 없는 탁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는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너무 좋아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애쉬가 대답했다.
“아…… 너한테 못 당하겠다, 애쉬.”
“네?”
“나도 너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뜻이야.”
조금 전까지는 지긋지긋하던 야경과 먼 곳에 놓인 성벽이, 이제는 좀 견딜 만해질 만큼.
“……기뻐요.”
애쉬는 순수하게 눈을 반짝였다. 탄이 몸을 돌려 애쉬와 마주 안았다. 세상이 삭막하다는 탄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삭막하고 가끔은 흉물스럽다. 그런데 애쉬와 마주하고 있으면, 뒤에 접속사가 여럿 붙는다. 삭막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세상에 내던져진 와중에도, 삶이 기쁘다. 나중에 총체적으로 제 삶을 요약하면 과연 좋아 보일지 의문이지만, 이 순간만은 기쁘다. 애쉬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실패작.
애쉬는 경이로웠다. 탄에게만은 항상 그럴 것이다.
『사일런트 하울링』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