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1. 가든에서 일해요(1권) (1/28)

숯불 좀 넣어 주세요

1권

1부-1. 가든에서 일해요

명선이 도도의 몸속으로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

도도의 벌어진 입에서 작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파?”

명선이 도도의 표정을 살피며 속삭여 물었다.

명선은 최대한 다정하고 친절하며 섹시한 표정을 연출하는 중이었다.

도도는 명선의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훑다가 다시 눈을 맞췄다.

“아뇨…….”

명선은 도도가 이미 자신에게 흠뻑 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반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키 크고 몸 좋고 잘생긴 데다가 매너까지 좋은데.

명선은 입꼬리를 양옆으로 한껏 늘려 빙긋이 웃어 보였다.

명선이 필살기로 쓰는 미소였다.

눈이 가볍게 휘어지면서 눈꼬리는 아래로 살짝 내려가고, 입꼬리 양 끝으로는 조그맣게 보조개가 패는 미소.

전에 명선과 만났던 누군가는 이걸 보고 꼭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사르르 녹는 것처럼 웃는다고 했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누구였더라. 그 얘길 듣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져서 바로 사 왔는데.

그걸 입 안에 물고 있다가 서로 좆을 빨아 주고.

아이스크림을 가득 머금은 입 안에 성기를 넣었을 때의, 차가운 동시에 따뜻하고 질척이던 느낌이 떠오르자 명선은 문득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역시나, 명선의 필살기 미소를 마주한 도도의 얼굴엔 가슴 벅찬 표정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계속할게.”

명선이 다시 속삭이자 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선은 도도의 얼굴을 응시하며 성기를 완전히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리고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빼내고 다시 밀어 넣으면서, 도도의 몸속을 부드럽게 느릿느릿 쑤시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명선은 도도의 얼굴이 점차 쾌락으로 일그러져 가는 것을 지켜봤다.

“아, 하아, 형…… 형…… 으응…….”

도도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이쯤에서 한마디 날려 줘야지.

“너 진짜 맛있다…….”

명선이 도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잡으며 달콤한 목소리를 꾸며내 말했다.

“안쪽이…… 너무 따뜻하고 쫀쫀해.”

“형…… 형도요. 형도 맛있어요…….”

도도의 얼굴은 이미 무아지경이었다.

명선이 키스하자 도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선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명선은 도도의 입술을 정성 들여 빨고 혀를 뒤섞다, 뺨과 귀에 입을 맞추며 내려가서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으으…….”

도도가 명선의 등을 꽉 붙잡고 신음했다.

허공에 들린 도도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혀, 엉…… 너무 좋아요, 하아…….”

“나도 좋아.”

명선이 도도의 목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도도의 뒤를 쑤시는 명선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윤활제가 듬뿍 묻은 둘의 피부가 맞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그 미세한 간지러움이 흥분을 배가시켰다.

“아응, 형아, 형아, 흐으응…….”

도도의 목소리는 톤이 조금 높고 맑았다.

그 신음도, 도도의 체형도, 딱히 명선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섹스는 섹스이니 삽입에만 집중하면 될 터였다.

명선은 더 나직하고 투박한 신음을 그 위에 덮듯 상상하며, 눈을 감고 접합부의 감각에만 몰두하려 애썼다.

* * *

명선의 차가 멈춰 서자 조수석에 앉은 도도가 명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얘 왜 안 내리니.

“여기 맞지?”

명선은 억지로 다시 필살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그래, 그럼…….”

명선이 도도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며 고개를 기울이는데 갑자기 도도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목을 뒤로 뺐다.

도도가 어색한 얼굴로 명선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얘 뭐야, 애인도 아니고. 갑자기 키스하려고 해?

좀 전 모텔 침대 위에선 서로의 입술이 부을 정도로 물고 빨고 했으면서도, 명선은 도도의 행동이 영 탐탁지 않았다.

명선은 오직 섹스가 연관된 상황에서만 키스를 즐겼다.

“이마 부딪칠 뻔했네.”

명선이 애써 태연한 척 다시 필살기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도도가 명선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형, 우리 다음에…… 또 볼까요?”

뭐라는 거냐.

명선은 필살기 미소에 ‘살짝 미간 찌푸리기’를 가미했다.

“음…… 요즘 바빠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약속을 미리 잡기가 좀 그래.”

명선은 백수이고, 약속을 미리 잡기 힘들 정도로 바쁘진 않았다.

“아, 네…….”

이 정도면 알아들었으려나.

“조심히 들어가.”

명선은 도도의 숨이 뺨에 와 닿을 만큼 몸을 깊숙이 기울여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연 후 거두는 손이 도도의 허벅지를 살짝 스치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도를 밀어내는 와중에도 명선은 습관적인 플러팅을 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도도는 조금 경직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명선이 무심히 몸을 제 위치시킨 후 다정한 얼굴로 도도를 바라보자, 결국 도도는 머뭇거리다가 차에서 내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형…….”

“응. 오늘 재밌었어. 안녕.”

명선은 도도에게 웃어 주며 손을 흔들었다.

다시 머뭇거리던 도도가 차 문을 닫은 후, 명선은 곧장 차를 출발시키면서 미소를 지웠다.

룸미러로 힐끗 보니 도도는 그 자리에 서서 명선의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

명선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둘러 도도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쟤 왠지 계속 쪽지 보내고 징징댈 것 같은데.

명선은 얼마간 운전하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마자 채팅앱을 열었다. 명선이 오직 섹스 상대를 찾기 위해 이용하는 앱이었다.

도도와는 어제 앱에서 매칭되어 쪽지를 몇 번 주고받다가 명선이 도도의 동네 쪽으로 와서 만난 것이었다.

피부 좋은 것 빼고는 별로 매력도 없고…… 그리고 나한테 너무 빠졌어.

명선은 그 앱에서 도도를 차단했다. 그러고 나니 한결 안심됐다.

다시 운전하던 명선은 전화가 오자 흠칫했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써니 써니 명써니.

대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이 용이 대용이. 나 지금 가는 중이야.”

-앗, 그렇구나. 어딘데?

“좀 있으면 자유로 타.”

-이야, 우리 자유로운 영혼 명써니가 곧 자유로를 타는구나.

“…….”

-…….

“이 쉐끼!”

-네에에?

“너 또 약속 취소하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무슨 소리세요, 취소가 아니라 연기죠, 연기.

“아, 뭐 하는데. 왜. 이번엔 또 뭐야.”

-누나랑 매형한테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조카 봐줄 사람이 없대서. 마침 내가 오늘 쉬는 날인 데다가 고 귀염둥이가 나를 워낙에 좋아하잖냐.

“…….”

명선이 눈을 한 번 굴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조카랑 놀아, 그럼.”

-아니면 우리 조카랑 셋이 놀래?

“사양합니다.”

-그래. 조카한테 써니 삼촌 안부만 전해 줄게.

“담부턴 일찍이라도 말해라, 좀.”

-알았어. 미안해, 써니. 근데 자유로 탔니? 자유롭게 타버렸니?

“탔어. 탄 김에 가든이나 가지, 뭐.”

명선의 부모는 일산에서 숯불 갈빗집을 했다.

일산에 있는 대용을 보러 가던 길에 파투가 났으니 겸사겸사 그곳에 가서 저녁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 너 오늘 오프했지? 어땠어?

“뭐, 그냥. 나한테 너무 심하게 반한 것 같아서 바로 차단했다.”

-재수 없는 자신감?

“나를 보는 눈에 하트가 뿅뿅이더라니까. 집 근처에 데려다줬는데 내리면서 키스를 하려고 하질 않나. 어으.”

사정 후 몽롱하게 명선을 쳐다보던 그 눈빛과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서 있던 도도의 실루엣을 떠올리면서 명선은 몸서리를 한 번 쳤다.

-사랑하게 해놓고 발을 빼다니 나쁜 남자네.

“떡이나 치자고 만났는데 무슨 사랑이야.”

-그럼 꼬시는 행동을 좀 작작 하든가. 안 봐도 훤하다. 네가 먼저 하트 뿅뿅 날렸겠지. 눈웃음 날리고 보조개 날리고 듣기 좋은 말 날리고.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했을 거 아냐. 아, 느끼해.

“섹스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지.”

-좀 적당히 하라 이 얘기야. 사람들이 다 너처럼 섹스랑 사랑을 딱딱 구분해 가면서 사는 건 아니잖니?

“애초에 그런 인간이면 섹스용 앱을 안 쓰면 되잖니?”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리는 소리 하지 마.

둘은 잠시 킬킬거렸다.

-근데 이번에도 역시 노가다 근육은 아니었나 봐? 이번엔 몇 퍼센트?

“48퍼센트.”

명선은 잔 근육이 단단하게 자리 잡히고 날렵해 보이는 몸, 쉽게 말해 사람들이 주로 ‘노가다 근육’이라고 부르는 몸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슬프게도 그런 몸을 만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완벽하게 취향에 100퍼센트 들어맞는 몸은 딱 한 번 만났고, 그 이후엔 다들 조금씩 부족했다.

명선의 취향이 유독 세밀하고 까다롭기도 했다.

-48이면 그렇게 나쁘진 않네.

“딱히 좋은 것도 아니지.”

-그냥 노가다 하는 사람을 만나지 그래.

“아이고 염 씨, 몇 번을 설명해야 돼, 진짜. 일단 이 바닥에서 그 계통이랑 매칭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고, 같은 노가다라고 무조건 다 그 몸을 갖는 게 아니고, 꼭 노가다 한 사람이어야 그 몸인 것도 아니라고.”

-암튼 참 까다로워.

“됐고, 가서 조카랑 노세요.”

-아, 맞다. 안녕, 써니!

대용은 주저하지도 않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명선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음악을 틀었다.

문득, 단 한 번 본 그 100퍼센트의 몸이 떠올랐다.

짧고 강렬한 기억만을 남긴 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 몸.

어쩐지 달리는 말의 허벅지를 연상하게 하는 몸이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씻기고 잘 빗겨서, 영양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최상급으로 느껴지는 그런 말의 허벅지 근육.

물론 ‘노가다 근육’이 정말 ‘노가다’ 일을 해서 얻어진 근육이라면 영양학적으로 최상급일 경우는 거의 없을 거라는 선입견도 함께 들었지만.

명선의 눈은 투시경처럼, 한겨울 두툼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도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몸을 찾아내곤 했다.

클럽 등지에서 시험해 본 일련의 사례를 통해, 그 눈이 꽤 정확하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다.

명선은 자신의 취향에 가까운 몸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최상급 말 근육을 떠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그 몸을 만지는 감촉이 어떤지, 그 몸이 자신의 아래에서 흔들리는 광경이 어떤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음식의 맛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먹고 싶어지는 그런 느낌과 비슷했다.

“배고파…….”

명선은 100퍼센트의 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몸이 고프고, 실제로 배도 고팠다.

* * *

명선의 부모가 하는 숯불 갈빗집은 2층 건물에 정원까지 갖춰진 대형 식당이었다.

명선이 도착한 시각은 5시쯤으로, 홀에는 띄엄띄엄 소규모의 손님들이 있고 본격적인 저녁 장사를 앞둔 직원들의 긴장감이 한창 맴돌 때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나온 명선은 정원의 아치형 입구 위에 붙은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선 가든’.

명선의 부모는 집안의 막내이자 늦둥이로 태어난 명선의 이름을 따 이 가든의 이름을 지었다.

명선은 어릴 때부터 이것이 늘 창피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고깃집 이름이라니.

가짜 장미 덩굴이 꼬불꼬불 감겨 있는 입구를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며 명선은 문득 뒤늦게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아, 괜히 왔나. 그냥 집 근처에서 덮밥이나 먹을걸.

염대용 때문에 이게 뭐야.

명선은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적미적 홀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아이고, 웬일이야. 명선이 왔구나. 마침 잘 왔다.”

카운터에 있던 명선의 엄마, 양자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명선이 오늘 카운터 좀 볼래?”

“어?”

“잘 왔네, 잘 왔어. 세상에, 역시 우리 복덩이.”

양자가 명선의 양손을 붙잡고 그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카운터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명선은 얼떨결에 그쪽으로 비척비척 끌려갔다.

“저녁때 주방에 두 사람이나 비어서 급한 대로 너희 아빠랑 나랑 들어가게 됐지 뭐니. 그럼 카운터를 누가 봐. 우리가 주방에 있다가 왔다 갔다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오늘 바로 되는 사람 있는지 인력사무소에 막 전화 넣어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우리 명선이가 저기로 사악 들어오는 거야. 뒤에 날개가 막 달려 있고, 어머 세상에, 우리 주님께서 보내 주셨나, 우리 아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나 그랬지.”

“엄마, 뭔 소리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양자의 말을 멍하니 듣던 명선이 몸부림을 쳤다. 명선은 어느새 양자에게 밀려 카운터 책상 뒤에 틀어박힌 채였다.

양자가 명선의 한쪽 팔을 양손으로 꼭 붙들었다.

“명선아, 밥 먹었어? 일단 밥 먹어. 밥 먹고 나서 포스기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줄게. 어이구, 얘는 이제 팔이 지 아빠보다 굵어졌네.”

“나 그냥 밥만 먹으러 온 거란 말이야. 대용이가…… 아니, 됐어. 나 갈래.”

“돈 줄게, 명선아. 이것도 다 알바로 쳐주는 거야. 시간당 페이로 해서 보너스까지 얹어 줄게. 오늘 일 끝나면 바로 줄게. 용돈 떨어질 때도 됐지?”

“…….”

명선이 양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렸다.

용돈이 거의 다 떨어지긴 했다. 원래 매달 1일마다 받는 용돈은 20일쯤 되면 늘 바닥이 났다.

게다가 이번 달 초엔 비싼 향수를 사 버리는 바람에 12일밖에 안 된 지금, 용돈이 몇만 원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용돈의 상태는 명선의 섹스 라이프에도 영향을 미쳤다.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 일한다 치고 시간당 페이로 하면 몇만 원 나오긴 하는데…… 그럼 모텔 대실 두 번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명선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양자는 명선의 팔을 여전히 꼭 붙든 채 그 얼굴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10시까지 맞아?”

주저하다 묻는 명선의 말에 양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 명선이밖에 없다.”

양자가 명선의 엉덩이를 두들기자 명선이 얼른 몸을 뒤틀어 피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 6시에 단체 한 팀 들어오고 6시 반에 몇 팀 더 있어. 6시까지는 내가 카운터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서 밥 먹어. 주방 가서 아빠도 보고. 응?”

“알았어.”

명선은 찜찜한 기분인 채 주방 쪽으로 갔다.

갑자기 후회가 차오르기 시작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랜덤 상대와의 섹스는 어쨌든 돈이 드는 일이고, 그걸 안 하고 살 수는 없으니.

“아빠, 나 왔어.”

“아이구, 우리 명선이 왔네.”

주방 한쪽에서 비닐 앞치마를 두른 채 고기를 썰던 명선의 아빠, 정식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도 만났고?”

“어. 오늘 카운터 내가 보기로 했어.”

“기특하네! 비상시에 이렇게 도와주고! 우리 명선이가!”

사뭇 감격하는 듯 보이기까지 하는 정식의 얼굴을 보고 돌아서며 명선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도와준다기보다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하는 일일 뿐이었다.

모텔에서 섹스하기 위한 돈.

* * *

명선은 밥을 반도 못 먹은 상황에서 손님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카운터로 끌려 나갔다.

손님들이 오가는 와중에 간신히 포스기 작동법을 배우고 익힌 명선은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별것도 아닌 게 뭐 이리 복잡해. 이해력 달리는 사람은 돈 받는 일도 못 하겠네.

명선은 툴툴대며 바글거리는 홀 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식탁 사이를 지나는 한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명선의 머릿속으로 대저택의 평원을 힘차게 달리는 말 한 마리가 떠올랐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씻기고 잘 빗긴, 영양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최상급인,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말 허벅지의 근육.

달릴 때마다 근육이 자잘하게 쪼개지며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는 그 광경.

그와 함께 너른 초록빛 평원의 상큼한 공기와 풀 내음, 달리는 말이 땅을 디딜 때마다 나는 다그닥 다그닥, 하는 소리와 씩씩대는 콧김마저 느껴지고 들리는 듯했다.

고양이의 것처럼 동공이 활짝 열린 기분으로 눈을 크게 뜬 명선은 홀을 가로질러 카운터 앞을 지나 문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목장갑을 낀 남자의 손엔 납작하고 긴 쇠막대가 들려 있고 그 막대 끝엔 숯이 든 숯 통이 매달린 채였다.

거의 100퍼센트인데.

명선은 남자가 사라진 입구를 멍하니 바라보며 두근대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취향의 몸, 노가다 근육의 완전판 같은 몸, 오래전 명선의 취향을 만들어낸 기준이 됐던 그 몸에 가장 가까운 몸이었다.

키도 딱 적당하고 근육의 비례와 형태도 최상급이었다.

헐렁한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 목장갑, 토시에 가려져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자, 권명선. 침착하자.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갑자기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다 보니까 몸이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을 수도.

명선은 조심스레 입구를 곁눈질하다 누군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명선은 손님에게 버럭 소리 지르듯 인사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예, 예약하셨나요?”

“아뇨.”

“어…… 몇 분이세요?”

“다섯 명이요.”

“저 안쪽으로 가시겠어요?”

자리를 안내하고 카운터 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명선의 눈에 다시 그가 들어왔다.

명선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명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는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그 곁을 휙 지나 홀 안쪽으로 갔다.

그가 스쳐 가는 순간 숯 냄새와 함께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손에 들린 숯 통에서 나는 열기였겠으나, 명선에겐 그것이 마치 그의 몸이 내뿜는 광채의 열기로 느껴졌다.

100퍼센트의 몸에서 나는 광채.

명선은 어물대다가 겨우 카운터로 돌아와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아, 씨. 미치겠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그의 몸은 정확히 명선의 취향에 부합하는 몸이었다.

다시 봐도 그렇고, 가까이에서 봐도 그랬다. 굳이 옷을 다 벗겨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구경을 하게 되다니.

갑자기 명선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약속을 뒤늦게 취소한 대용에게도 고맙고, 일을 제안한 엄마에게도 고마웠다.

아니, 무엇보다도 일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고마웠다.

또한 그에게도 고마웠다.

혼자서 이 큰 고깃집의 숯불을 담당하는 듯 보이는 그는 고맙게도, 쉼 없이 명선의 눈앞을 오갔다.

그가 바삐 들락거릴 때마다 명선은 진수성찬을 하나씩 맛보는 기분으로 그의 몸을 음미했다.

목덜미부터 발뒤꿈치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쪼개서 음미하고 전체적으로 크게 보며 음미했다.

걸음걸이, 동작 하나하나조차 완벽했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걸을 때마다 달랑이는 무전기마저 그의 몸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100퍼센트였고,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왔다. 카운터 일이 더는 지겹지도 싫지도 않았다.

저 몸이랑 하면 소원이 없겠네.

명선은 어느덧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 * *

“명선아, 수고했어. 밥 먹고 갈 거지? 아까 제대로 못 먹었잖아.”

영업이 끝날 무렵, 홀 안이 한산해지자 양자가 다가와 명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 다 같이 먹는 거야? 직원들이랑?”

“응. 너도 와서 먹어.”

“그럴…… 까?”

명선은 홀의 한쪽 끝, 직원들을 위한 상이 차려지고 있는 곳과 입구를 번갈아 보며 두리번거렸다.

그 숯불남은 같이 안 먹는 건가.

명선은 식탁 쪽으로 갔다가 주방 안도 슬쩍 보고 다시 입구 쪽으로 갔다.

숯불 방 있는 데로 한번 가 볼까. 그냥 마당 어슬렁대는 척하면서…….

“명선아! 와서 밥 먹어라!”

뒤에서 정식이 내지르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멈춘 명선은 입구를 힐끔대며 식탁 쪽으로 향했다.

정식은 명선이 가든에서 일했다는 사실에 한없이 기뻐 보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명선을 위한 자리를 곁에 마련하고는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수고했어, 우리 명선이. 힘들었지?”

정식이 명선의 어깨를 두드리며 곁에 앉혔다. 명선의 신경은 여전히 입구 쪽에 쏠린 채였다.

“카운터 몇 시간 본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주방 직원 애덕이 맞은편에 앉으며 핀잔을 줬다.

“경험이 없으면 다 힘들지, 뭘.”

정식이 변명하듯 말하며 여전히 뿌듯한 얼굴로 명선의 어깨를 주물렀다.

명선은 그런 아빠가 귀찮았지만 말없이 얼굴에 접대용 미소만 지었다.

직원들이 하나둘 식탁으로 와 앉는데 숯불남은 보이질 않았다.

돌겠네. 물어볼 수도 없고.

명선은 애가 탔으나, 곁에서 계속 칭찬하는 정식에게 반응도 해줘야 하고 애덕이 틈틈이 건네는 말에도 대꾸해야 해서 바빴다.

다른 쪽 곁에 양자가 와서 앉자 이제 명선은 양자와 애덕, 정식이 하는 대화의 한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날리는 풀잎 한 장이 된 듯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밥을 한술 뜨는데 문득 식탁 끝에 그가 와 털썩 앉는 것이 보였다.

명선은 다시 동공이 고양이의 것처럼 커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를 힐끔댔다.

“잘 먹겠습니다.”

숯불남의 목소리는 저음으로, 말이 없어 보이는 사람치고는 성량이 꽤 좋은 듯했다.

그는 앞쪽에 있는 소주병을 열어 물컵에 한가득 따르기부터 하더니,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절반 정도를 쭉 마신 후 곧장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화에 끼어들거나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진 않았고, 가끔 곁에 앉은 주방 직원의 말에 짧게 대답 정도 하는 게 전부인 듯했다.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어서 그 목소리나 말의 내용이 명선에게까지 들리진 않았다.

저녁 내내 일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명선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시 봐도 환상이네.

명선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여전히 폭풍 속 풀잎 한 장이 된 채 건성으로 대화에 맞장구를 치고, 동시에 식탁 끝을 훔쳐봤다.

아, 저쪽에 앉았어야 했는데.

아빠는 왜 남의 자리를 맡아 놓고 난리야. 내가 앉고 싶은 데 앉게 두든가 하지. 진짜 도움이 안 돼.

물 뜨러 가는 척하면서 옆에 뭐라도 좀 떨어뜨려 볼까? 아니면 직원들 소개 좀 해달라고 해서 한 명씩 다 돌아가며 인사라도 해보면…….

명선이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그는 어느새 식사를 끝마친 듯, 남은 소주를 쭉 들이켜더니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 밖으로 휘적휘적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명선은 갑자기 목이 바짝바짝 탔다.

저 몸에 자신의 살갗이 닿는 상상에 이어 그 목소리로 신음하는 상상까지 더해지자 몸이 숯처럼 열을 내는 것만 같았다.

“저…… 분은, 새로 오셨나?”

명선이 입구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무심한 듯 가장해 물었다.

“누구?”

양자가 크게 싼 쌈을 입에 넣으며 입구를 힐끗 봤다.

“숯불 담당.”

옆에서 정식이 보탰다.

드디어.

명선은 몸을 살짝 뒤로 빼고 양옆에 앉은 정식과 양자를 차례로 보며 숯불남에 대한 대화가 좀 더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렇게 새로는 아니고.”

양자가 대답하고 쌈을 씹으며 고추에 쌈장을 찍었다. 정식은 밥그릇 안에 찌개를 퍼 넣고 비비느라 바빴다. 뭐가 매운지 계속 스읍, 스읍 하는 소리를 냈다.

“…….”

명선은 생각대로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는 둘을 보고 있다가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 오셨는데?”

“음…….”

정식이 컵에 물을 따르며 눈을 깜박였다.

“한 달 됐나? 한 달 좀 넘었지?”

정식이 양자를 보며 묻자 양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넘었지. 지난달 초에 시작했으니까.”

“어. 일 잘해. 차분하고.”

“그전에 했던 장 씨랑 딴판이지. 장 씨보다 한참 어린데 일도 금방 배우고.”

“그렇지. 금방 익혔어. 근데 장 씨는 진짜 젬병이야.”

“장 씨 어디 갔댔지? 저기 분당 쪽 어디로 갔댔나?”

“몰라. 어디 가서도 그 눈치랑 그 실력이면 소용없어. 안 돼.”

장 씨 말고 저 사람 얘기를 하라고! 장 씨가 누군데! 장 씨 얘길 누가 듣고 싶어 해!

명선은 속으로 가슴을 두들기다가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 어려? 나이가 몇인데?”

그 와중에도 명선은 그에 관한 정보를 빼낼 수 있는 대화의 줄기를 낚아챘다.

“스물…… 몇이더라? 얘보다 많지?”

“많지. 명선이보다 형이야.”

“스물일곱. 우리 막내딸이랑 똑같아.”

앞에서 애덕이 불쑥 말했다.

사랑합니다, 애덕 님.

명선은 드디어 신상 정보 하나를 알아냈다는 기쁨에 필살기 미소를 띠고 애덕을 바라봤다.

“막내 따님은 어디 미국 간다면서?”

옆에서 정식이 묻자 명선은 다시 김이 빠졌다.

“어. 유학 가게 생겼어. 그 디자인인가 뭔가 공부하러.”

“멋있네, 멋있어.”

대화는 또 금세 다른 곳으로 샜다.

명선은 속으로 하릴없이 27이란 숫자만 받아 적었다.

나이 따윈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성향을 확실히 알아야 했다.

게이인지 아닌지는 당연히 아무도 모르겠지. 바이라도 돼야 작업을 좀 걸어 볼 수 있을 텐데.

일단 내가 보기엔 100퍼센트 헤테로긴 하지만.

그래도, 내 게이다가 워낙에 쓸모없잖아. 어떻게 될진 모르는 거야.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지금이라도 슬쩍 나가 볼까? 산책하는 척하면서 숯불 방에…….

명선이 주변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들썩이는데 갑자기 그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리 끝났고요,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홀을 가로지르며 쩌렁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

“어, 그래. 잘 가요.”

“수고했어요.”

그의 인사에 식탁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씨발, 안 돼!

바로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명선은 속으로 절규했다.

“아휴…….”

명선이 식탁 아래에서 두 주먹을 꼭 쥐고 한숨을 삼키는 동안 사람들은 다시 숯불남과 전혀 상관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 * *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명선의 머릿속은 그 숯불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저 아쉬움과 미련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몇 시간을 그렇게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고 말 한마디 섞어 보지도 못했다.

그는 숯을 옮기는 일에만 집중했고, 밥 먹는 동안엔 밥에만 집중했다.

어쩜 그렇게 주변엔 관심 한 톨 없는지. 그런 인간은 또 처음 보네.

눈이라도 마주쳤으면 그쪽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아님 대화라도 짧게 나누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파악하고…….

게이인지 뭔지라도 알아야 무슨 조치를 할 거 아냐.

“하, 씨…….”

명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웠다.

그런 몸을 앞으로 또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완벽한 정답 같은 그 몸.

맨날 여기까지 놀러 와서 어슬렁댈 수도 없고…….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해야 하나? 그러면 오긴 오려나?

성향이 이쪽이기만 하면 나한테 완전히 빠지게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솔직히, 내가 모자란 게 뭐야? 키 크지, 몸 좋지, 잘생겼지, 목소리 좋지.

그러니까 도도처럼 오늘 처음 본 인간들도 나한테 푹푹 빠지는 거지.

안 빠지고 배기겠냐. 나라도 나한테 빠지겠다. 섹스도 얼마나 잘해.

명선은 자아도취의 미소를 비실비실 흘리며 운전하다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섹스.

나랑 섹스한 사람 중에 만족 못 한 사람은 없었잖아.

내가 얼마나 상대한테 잘 맞춰 주는데. 부드러운 거 좋아하면 부드럽게 해주고, 거친 거 좋아하면 거칠게 해주고.

갑자기 명선의 가슴 속에서 ‘근거 있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섹스 후 정말 좋았다고 말한 사람, 도도처럼 명선을 정말 좋아하게 되어 버린 사람도 꽤 있었고, 한 번도 느낀 적 없다는 바텀을 쾌락에 떨게 만든 경험도 많았다.

그 숯불남도 일단 나랑 한번 하면 그 맛에 푹 빠질걸? 취향만 좀 알면 내가 완전 녹여 줄 수도 있고, 진짜 섹스에 중독되게 만들 수도 있다고.

게이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보기엔 진성 헤테로 같아도, 내 게이다가 더럽게 성능 안 좋다는 걸 고려해서 완전히 오픈 마인드로 바라봐야 돼.

그리고 헤테로라 해도 그쪽에 편견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친해진 다음에 구슬려 볼 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잖아? 어쨌든 내가 실력이 있는데.

명선은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그와 말 몇 마디라도 주고받으면, 정말 자신에게 성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넘어오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야하게 굴거나, 다정하게 굴거나, 그도 아니면 재빨리 숯불남의 성격을 파악해서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굴어 줄 수 있었다.

나랑 한 번만 자 보자. 딱 한 번만.

그다음엔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그 몸이랑 섹스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그런 몸을 갖고 있으면서 왜 놀려?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한테 인정받으면 너도 좋지 않겠어?

생각을 정리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명선은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곧장 핸드폰부터 켰다.

-명선이, 집에 도착했니?

양자가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엄마, 내일은 카운터 누가 봐?”

-아빠랑 나랑 하지. 왜?

“내가 내일 카운터 한 번 더 볼까?”

-으잉?

“포스기 배운 것도 아깝잖아. 오늘 해보니까 같이 있는 것도 좋더라. 엄마 아빠 일하는 것도 보고.”

-아이고, 웬일이니. 우리 명선이가 그런 생각을 다 했어? 기특해라. 세상에, 주님께서 응답을 주시나 보다. 창선 아빠! 이리로 와 봐!

“엄마, 그냥 된다 안 된다 한마디만 하면 돼.”

-창선 아빠!

엄마, 집중 좀 해!

명선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왜.

-명선이가…….

양자는 아랑곳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정식에게 명선의 제의를 설명했다.

-아! 우리 명선이가!

감격에 겨운 정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명선의 부모는 전문대를 겨우겨우 다니다 그만두고 군대에 다녀온 후 아무 목적 없이 빈둥거리는 막내 명선에게 언젠가는 가든을 물려주겠다는 꿈을 늘 꾸고 있었다.

큰아들 창선은 결혼해 호주로 이민 갔고, 딸 인선은 제주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제 앞가림하고 사는데, 명선은 그들과 너무나도 달랐다.

결국 가든을 물려주는 것 외에 명선이 벌어 먹고살 방법은 없어 보인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그들이 명선에게 식당 경영 수업을 받아 보면 어떻겠냐고 여러 번 조심스레 제안했지만, 그럴 때마다 명선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렇게 식당 운영엔 일말의 관심도 없던 명선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두 사람이 설레지 않을 리 없었다.

-명선아!

정식이 양자의 핸드폰을 빼앗은 듯했다.

-명선아, 잘 생각했어. 일 배워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일한 만큼 돈 버는 기쁨을 아무나 다 누리는 게 아니야. 특히 네 나이 때는 이런 보람을 느끼는 게 너무 중요해.

명선은 핸드폰에서 입을 멀리 떼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아빠. 그러니까 내일 내가 카운터 보면 되는 거지?”

-그럼, 그럼. 우리는 너랑 같이하면 너무 좋지.

-점심부터 할 건지 물어봐.

곁에서 양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선아, 점심…….

“근데 저녁때랑 점심때 일하는 직원들이 같아?”

-알바들은 파트로 하고 정직원들은 종일 하지. 왜?

“아, 그…….”

명선은 말을 멈추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숯불남은 알바? 정직원? 근데 딱 그 사람만 집어서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럼 질문을 좀 바꿔서…….

“아아, 알바가 있었어? 난 다 정직원인 줄 알았네. 홀에서 일하는 분들이 알바인 거야?”

-홀은 주로 알바고 설거지랑…… 아, 숯불도 알바.

예스!

“아, 숯불도 알바 쓰는 거구나. 그건 몰랐네. 그럼 숯불도 파트타임이겠네? 점심에 따로, 저녁에 따로?”

-그렇지. 점심엔 영찬 씨, 저녁엔 재강 씨.

숯불남 이름이 재강?

“재강? 오늘 나 일할 때 있었던 사람?”

-이야, 우리 명선이가 오늘 일하고 식당 일에 관심이 많이 생겼구나. 해보니까 보람이 있지? 재밌지?

또 딴소리야.

“됐고, 일단 내일 저녁때만 할게. 낮엔 일이 있어서.”

-저녁때만 한대.

-4시 반에 저녁 장사 오픈하니까 그 전에 와서 좀 둘러보든지 하라고 해.

-5시쯤 와도 괜찮지 않아?

-아유, 그래도 할 거면 제시간에 똑같이 해야지. 직원들 눈치 보여.

어차피 셋이 함께 살아 집에 와 얘기할 수 있는데도, 정식과 양자는 핸드폰을 든 채 토론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명선은 내일 그 숯불남 재강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할지 속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 * *

아직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지 않은, 오후 4시가 좀 넘은 시각. 바깥에서 보는 가든은 조용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온 명선은 차 유리창에 몇 번이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고 머리를 다듬었다.

출근 준비를 하며 집안을 돌아다닐 때도 거울만 눈에 띄면 수없이 들여다보고 외모를 살폈다.

옷장에 있는 모든 옷을 꺼내 입고 벗기를 반복하고, 머리에 왁스를 바르며 손질하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 감고 다시 말린 후 스타일링하기도 했다.

향수와 손목시계, 신발도 세심히 골랐다.

내가 이 정도로 몸치장에 공을 들인 상대가 없는데 말이야.

이런 노력이 과연 저 진성 헤테로 재강의 눈에 들기나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명선 자신의 자신감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절차였다.

숯불남은 출근했으려나?

명선은 정원을 둘러보다 숯불 방이 있는 뒤뜰 쪽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4시 반에 오픈인데 4시엔 와 있어야겠지.

홀 건물 모퉁이를 지나 뒤뜰에 들어서자 윙윙대는 소리와 절그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씨.

명선은 뒤뜰 중앙에 우뚝 멈춰 섰다.

따로 출입문이 달려 있지 않고 오픈된 숯불 방. 가운데 칸막이를 두고 두 구역으로 나눠진 그곳의 왼쪽 구역에 선 재강의 뒷모습이 보였다.

불판을 세척 중인 모양이었다. 사용한 불판을 집어 기계에 대고 문지르며 세척한 후 왼쪽에 있는 싱크대 안으로 던져 넣는 손놀림이 능숙하고 재빨랐다.

두껍고 헐렁한 비닐 앞치마를 입고 있는데도 100퍼센트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몸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등과 팔의 자잘한 근육이 불룩불룩 움직였다.

명선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 노가다 근육. 저 부잣집 종마의 몸.

젖은 목장갑을 낀 손과 물이 온통 튄 팔뚝마저도 완벽했다. 그 몸에 닿아 있는 목장갑과 물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칸막이 오른쪽 구석에선 뭔지 알 수 없는 기계가 소란스럽게 윙윙대고 있었다.

그 주변에 숯 통과 숯 상자 등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숯에 불을 붙이는 기계인 모양이었다.

명선은 문득 그 배경 전체와 재강을 동시에 눈에 담으며 감탄했다.

불판 세척기와 숯불 착화기는 한없이 문명에 닿아 있는 기계였고, 불판에 달라붙은 고기 찌꺼기와 착화기 안에서 달궈지고 있을 숯은 한없이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재강의 주위는 이 문명과 원시가 묘하게 뒤섞인 채 소란스럽고 뜨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매력적인 분위기였다.

그 모든 소리와 물줄기, 열기, 재강이 집중하는 노동이 그 몸과 한데 어우러져 그를 돋보이게 했다.

저것이 육체 노동의 섹시함인가.

명선은 얼마간 입을 벌리고 선 채 재강의 완벽한 몸과 그를 둘러싼 광경을 감상했다.

“명선아!”

양자의 목소리에 명선은 꿈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며 홱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그도 뒤를 돌아봤다.

명선은 고개를 돌리기 직전 그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내가 자길 지켜보는 걸 눈치챘으려나.

“일찍 왔구나.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왜.”

“어, 그냥…… 구경하느라.”

“너 일 시작 전에 뭐 좀 먹을래? 배 안 고파? 이따 바빠지면 뭐 먹을 시간도 없다.”

“아니야. 먹고 왔어. 배 안 고파.”

양자에게 끌려 홀 건물 쪽으로 가며 명선은 힐끗 뒤를 돌아봤다.

재강은 다시 돌아서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명선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 *

그만들 좀 와라, 인간들아.

명선은 들어서는 손님에게 인사하며 속으로 절규했다. 손님이 어제보다 훨씬 더 많은 듯했다.

카드 결제를 두 번이나 실수해서 양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주차 때문에 시비가 붙은 손님들을 중재하느라 진땀을 뺐다.

조금 취한 듯한 손님으로부터 왜 그렇게 표정이 싸가지 없냐는 말을 들은 이후엔 바닥남은 인내심을 간신히 붙들고 버티는 중이었다.

어제는 운 좋게도 아주 평화로운 날이었던 것이다.

밀려들어 오고 쓸려나가는 손님들의 얼굴이 다 똑같이 끔찍해 보이고 지긋지긋했다.

그 와중에 쉼 없이 들락거리는 재강의 몸을 감상하는 것만이 명선에겐 큰 위안이었다.

내가 저 숯불남 아니었으면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았겠지.

일만 잘 풀리면 저 숯불 방에서 한번 박아 봐도 좋을 텐…… 헉.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명선은 자기 자신의 상상력을 향해 감탄을 날리며 숨을 들이켰다.

그럼 진짜 대박이겠는데?

그 세척기 앞에서 일하는 동안 뒤로 다가가서 바지랑 팬티를 한꺼번에 내리고 박는 거지.

기계 붙들고 끙끙대는 동안 몸이랑 기계랑 다 같이 덜컹덜컹대고 물은 사방으로 튀고.

아슬아슬해서 더 흥분되지 않을까. 아마 저놈 몸도 숯불처럼 후끈후끈해지겠지.

뜨거운 노가다 근육. 뜨거운 말 근육…….

명선은 재강을 바라보며 속으로 온갖 음란한 상상을 했다.

홀딱 벗은 저 몸과 자신의 맨살을 맞대는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끝없이 박아대고, 만지고, 주무르고, 빨고, 빨리고 싶었다.

어이, 숯불남. 한 번만 자 보자. 한 번만 깔려 주라, 어? 딱 한 번만.

그러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명선은 슬그머니 의자를 움직여 카운터 책상 안쪽으로 좀 더 깊숙이 다가앉았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한 와중에도 성기로 피가 몰리는 중이었다.

미치겠네.

어제에 이어 계속 그렇게 지켜보고만 있자니 뱃속이 숯처럼 허옇게 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곳이 게이클럽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헤테로인지 아닌지라도 좀 어떻게 알아낼 수 없나?

어째서 세상엔 헤테로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쓸모없는 헤테로 놈들.

헤테로여도 실험적인 걸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그런 오픈 마인드 헤테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내지?

꼭 게이 아니어도 나랑 자기만 하면 상관없잖아.

둘만의 시간이 생겨야 뭐라도 해볼 텐데 이건 뭐, 저놈의 고기 처먹는 인간들 때문에, 망할.

명선의 머릿속은 손님들을 향한 욕과 재강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님들은 명선을 쉬게 놔두질 않았다. 저녁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카운터 일이 가만히 앉아 돈만 받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자리 안내, 각종 클레임 처리, 전화 응대, 간단한 청소 등등, 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었다.

명선은 열심히 재강의 몸을 주시하며 만신창이가 된 기분을 달랬다.

그러다 마침내 영업이 마무리되자 명선은 직원들의 저녁 식사가 차려지는 모습을 멀찍이서 훔쳐봤다.

애덕이 주방에서 느릿느릿 나오며 어제 재강이 앉았던 끝자리에 반쯤 빈 소주병을 턱 내려놓고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명선은 어제도 저 자리에 소주병이 있던 걸 떠올렸다.

그러니까 저 자리가 숯불남의 공식 지정석이고, 식사 때마다 그렇게 소주를 마시는 거군. 그걸 주방 사람들이 알고 챙겨 주기도 하는 거고.

그럼 저 옆에 앉는 게 나을까, 맞은편에 앉는 게 나을까.

옆에 앉으면 운 좋게 몸이 스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몸을 훔쳐보기가 힘들 테고, 맞은편은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으나 몸이 스칠 일은 없었다.

명선은 아직 드문드문 비어 있는 식탁 쪽으로 가 재강의 지정석 맞은편에 앉았다가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이쪽이 나으려나. 대화할 때 정면 맞은편보단 대각선 맞은편이 부담 없고 좋다는 얘길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안쪽에 앉지, 왜 끝에 앉아.”

양자가 불쑥 나타나 그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엄마, 거기.”

명선은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도로 앉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응?”

“아니야…….”

명선은 공연히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재강은 어제처럼, 사람들이 모두 앉아 식사를 시작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재강의 몸을 보며 명선은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다.

몸이 진짜…… 참하다, 참해. 참근육일세.

더럽게 참하고, 더럽게 섹시하고. 어휴.

재강이 가까워질 무렵 명선은 공연히 눈썹을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재강이 맞은편에 앉자 불에 탄 나무 냄새가 훅 끼치는 듯했다.

토시와 장갑을 끼지 않아 드러난 팔과 손에는 드문드문 불에 덴 자국들이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많이 들어요.”

“잘 먹겠습니다.”

양자가 건네는 말에 재강은 고개를 꾸벅하며 말하고는 물컵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기회다.

명선의 입술이 달싹였다.

‘식사할 때마다 이렇게 반주를 해요?’라고 물으려는 순간 정식의 목소리가 명선을 덮쳤다.

“명선아, 어땠어? 오늘은 좀 힘들었지?”

그사이 재강은 옆으로 몸을 살짝 돌리고 소주를 반쯤 들이켠 후 곧장 식사를 시작했다.

명선이 김빠진 표정을 애써 지우고 미소를 띠며 정식을 바라봤다.

“힘들긴…….”

“하긴, 센스가 있어서 금방금방 익히고 잘하긴 해.”

정식은 명선을 화제에 올리고 계속 이야길 이어나갔다.

정식이 자꾸 명선을 바라보며 얘기해서 명선은 바로 앞에 있는 재강을 제대로 훔쳐볼 기회도 계속 잃고 있었다.

한쪽으론 재강을 잔뜩 의식하고, 다른 한쪽으론 정식과 양자의 말에 반응하고 대꾸해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재강은 식사를 금방 마쳤다.

남은 소주를 쭉 들이켠 후 바로 일어나는 것도 어제와 똑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입구 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사라진 그 완벽한 뒷모습.

야, 넌 밥만 먹고 가냐? 밥 먹을 땐 사람들이랑 대화도 좀 하고 그러는 거지. 너 뭔데? 사회 부적응자야?

명선은 그가 사라진 곳을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벌떡 일어섰다.

“명선이 다 먹었니?”

“어. 아, 나 잠깐 차에 좀 갔다 올게.”

명선은 양자나 정식이 뭐라 더 말 걸기 전에 서둘러 입구로 향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일단 숯불에 관해서 얘기하는 거야. 신기하다고.

그 기계는 뭔지, 불은 어떻게 붙이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런 거 물어보면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 얼굴도 가까이에서 좀 들여다보고, 터치도 하면서 반응을 보고.

명선은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뒤뜰 쪽으로 가다 멈춰 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왜 이렇게 떨리냐. 이게 뭐라고.

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나 같이 잘나가는 놈이!

“…….”

명선은 손을 쓸어내려 목을 감싸 쥔 채 가만히 심호흡했다.

지금은 이렇게 떨리고 구차하게 느껴져도,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나중엔 더 후회할 거야.

100퍼센트 몸을 이제야 다시 만났는데, 한 번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끝낼 순 없잖아?

그래.

그렇지.

명선은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홀 건물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맞은편에서 재강이 불쑥 나타났다.

“!”

명선은 입을 꾹 다물며 우뚝 섰다. 그을린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흠칫하며 멈췄던 재강은 명선을 힐끔 보더니 무심히 지나쳐 홀 입구 쪽으로 갔다.

안 돼!

명선이 속으로 외치며 재강을 향해 돌아섰다.

숯불남! 저기요! 아저씨! 숯불! 알바! 아니, 뭐라고 부르지? 불러서 뭐라고 하지?

명선이 엉거주춤 선 채 머릿속을 헤집는데, 멀어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엇.

명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재강은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더니 명선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명선의 눈도 조금씩 더 커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그을린 나무 냄새.

재강이 앞에 와 우뚝 서더니 멍한 명선의 눈을 마주 봤다.

“그만 좀 쳐다봐, 이 씨발 새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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