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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2. 게이다를 작동해요 (2/28)

1부-2. 게이다를 작동해요

“그만 좀 쳐다봐, 이 씨발 새끼야.”

명선은 벌써 두 시간이 넘게 침대에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재강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와 건조한 말투, 똑바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던 그 눈빛과 매캐한 내음까지도.

재강은 그 말만 하고는 몇 초간 명선의 눈을 쏘아보다가 뒤돌아 사라졌다.

난데없는 막말에 얼이 빠진 명선은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갔다가 인사하고 먼저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차를 몰고 서울에 있는 집까지 돌아오는 동안에도, 멍한 상태였다.

그러다 아주 뒤늦게, 불현듯, 분노가 머리를 들었다.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뭐 하는 새낀데 사장 아들한테 깝쳐? 제정신?

명선이 스르르 일어나 앉았다.

“하…….”

명선은 허공을 노려보다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사장 아들인 걸 모르나? 내 앞에서 바짝 숙여야 되는 입장 아니야?

“와, 나 씨…….”

명선은 다시 헛웃음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뜨거운 거 옆에 있다가 판단력이 다 녹아버린 거 아니야?

야, 숯놈. 너 제정신이냐, 씨발?

명선은 씩씩거리다가 더욱더 어처구니없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처구니없음의 레벨이 최고조를 찍고 있었다.

“존나 웃기는 새끼 아냐.”

명선이 홱 드러누우며 주먹으로 침대를 퍽 쳤다.

“알바 주제에…….”

명선이 중얼거리다 문득 입을 다물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분노의 성격이 조금 미묘했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듯 욕을 얻어먹었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 안에 아쉬움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자신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그 완벽한 몸엔 정작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사실.

사장 아들에게 대뜸 욕부터 내뱉는 되바라진 알바생의 그 몸을 여전히 원한다는 사실.

그 알바생의 성향이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 아쉽고 짜증스러웠다.

가장 화가 나는 건, 다시 그 몸을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천연덕스러운 명선이라 해도, 그런 일을 겪은 후 재강이 있는 가든에 다시 가는 게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아니, 그것 역시, 화가 난다기보다는 아쉬웠다.

언제, 어디로 가면 그 몸을 볼 수 있는지 버젓이 아는데도 참아야 한다니.

아쉬움을 넘어선 비극이었다.

“아, 씨이발 새끼, 진짜…….”

명선은 씩씩대며 얼굴과 머리를 헤집다가 너른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뚝 동작을 멈춘 명선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다 알고 있었단 거잖아. 내가 쳐다보는 걸.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명선이 눈을 반짝 빛냈다.

아, 그러네. 그러면서도 계속 모른 척하면서 내숭 떨었던 거네.

알면서도 몇 시간 동안 나한테 싫은 티도 안 내고 계속 일만 했다는 거고.

나를 의식하고 있긴 했단 거잖아.

아무 관심 없는 것처럼 굴더니, 사실은 의식하고 있었어.

말없이 눈만 깜박이던 명선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내숭 떨었어, 웃기는 새끼…….

최고치를 찍었던 어처구니없음의 레벨은 어느새 최저에 내려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 식으로 귀엽게 굴었다 이거지.

재강이 일하는 내내 자신의 시선을 계속 신경 썼을 거라 생각하니 명선은 갑자기 흥분됐다.

사장 아들한테 대뜸 욕부터 하는 성질머리에, 그런 완벽한 몸을 해가지고는.

그 완벽한 100퍼센트의 몸.

“…….”

명선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재강의 몸을 되새겼다.

곧 ‘원조’ 100퍼센트의 몸이 떠오르며 그 위로 겹쳐졌다.

첫 섹스 상대이자, 명선의 확고한 몸 취향을 만들어 놓은 사람.

명선은 그의 이름도 모르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섹스 이후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찾을 방법도 없어 그냥 그렇게 잊은 채 살았지만, 그의 몸이 명선에게 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했다.

그 몸을 갈구하고 집착하며, 다른 몸은 모두 조금씩 모자란 숫자로 점수 매기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그를 만난 건 몇 년 전, 버스 터미널 화장실이었다.

* * *

화장실은 아주 더럽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퀴퀴하고 조금은 불쾌한 분위기도 감돌았다.

그냥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 반,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 반을 가진 채 명선은 어색한 얼굴과 몸짓으로 그 안을 어슬렁거렸다.

이곳에 게이들이 종종 출몰해 욕구만 해소하고 사라진다는 소문을 들은 지는 오래였다.

그때까지 섹스는커녕 키스 한 번 해본 적 없던 명선은 혹시라도 자신 역시 그런 짜릿한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 싶어 용기를 내서 와 본 참이었다.

평범하게 소변을 보러 온 사람들만 몇 번 들락거리는 일이 반복되어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때, 소변기 앞에 엉거주춤 서 있던 명선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확연히 남다르게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느낀 명선은 곧장 얼어붙었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묘한 눈빛을 던지며 접근하자 겁이 나는 동시에, 전엔 느껴본 적 없는 흥분감이 몸을 서서히 달구는 듯했다.

남자는 사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체격도 인상도 꽤 날렵했다.

그와 어색하게 눈빛을 몇 번 주고받고 명선은 칸 안으로 끌리듯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는 눈치를 보다가 손을 뻗어 명선의 바지 앞섶에 슬그머니 갖다 댔다.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살짝 물러난 명선의 등이 칸막이벽에 닿았다.

남자는 손을 떼지 않고, 계속 명선의 눈치를 살피며 그만큼 가까이 다가와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명선은 잔뜩 긴장한 채 남자의 손만 내려다봤다.

그의 단단하고 잘생긴 손안에서 명선의 성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팽팽해졌다.

명선의 가슴이 들썩이고, 남자의 손놀림도 조금씩 격해졌다.

곧 남자가 다급하게 명선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더니 무릎을 꿇었다.

“흡…….”

남자가 허겁지겁 성기를 입 안에 넣은 순간, 명선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죽였다.

남자의 입 안은 놀랍도록 깊고 부드러웠다.

혀를 놀리는 기술도 굉장했다. 사람의 혀가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남자는 명선의 것을 빨면서 자신의 바지 앞섶을 어루만졌다. 그러다 입을 떼고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더니 맞은편 벽에 기대며 엉덩이를 내밀었다.

남자의 낡은 청바지는 군데군데 말라붙은 페인트 자국이 있고 오래된 흙먼지 얼룩 같은 것도 있었는데, 그 속에서 드러난 속살은 매끈하고 깨끗했다.

체격과 인상만큼이나 날렵하고 탄탄한 엉덩이 사이로 털 하나 없이 깔끔한, 짙은 색 구멍이 드러났다.

명선은 숨을 빠르게 몰아쉬며 남자의 엉덩이를 보다가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의 항문과 자신의 성기를 적셨다.

남자의 엉덩이를 양옆으로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던 때의 충격이란.

충격이었다. 충격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

손으로 자위할 때 느끼던 조임이나 촉감과는 질적으로 확연히 다른 세계가 그 안에 있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쾌락에 놀란 명선은 남자의 골반을 움켜쥐고 정신없이 성기를 퍽퍽 박아 넣었다.

“흑, 윽…….”

남자는 허리와 고개를 잔뜩 수그린 채 벽에 손을 짚고서 낮은 신음을 삼켰다. 뒤로 손을 돌려 명선의 허벅지를 잡고 밀어내는 듯했지만 적극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남자의 손은 힘이 들어가 딴딴해진 명선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더듬다가, 꽉 쥐었다가, 슬그머니 어루만지기도 했다.

명선은 벽을 짚은 남자의 다른 쪽 손을 바라봤다. 둥글고 짧게 깎인 손톱과 힘줄이 바짝 선 손등, 팔뚝.

이곳저곳에 자잘한 흉터들이 있고 손목엔 시계 자국이 조금 밝은 피부색으로 남아 있었다.

반팔 소매가 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팔 상박부의 피부도, 탄 부분과 덜 탄 부분으로 경계가 나뉘어 있었다.

명선은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손과 팔을 응시하다가 그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잘게 쪼개진 등 근육이 드러났다. 명선에게 부딪치며 흔들릴 때마다 그 근육과 뼈들이 규칙적으로 꿀럭꿀럭 움직였다.

마치 명선 자신의 성기로 그의 꼬리뼈를 탁, 탁, 치는 것만 같았다.

명선은 숨을 씨근씨근 몰아쉬며 잔뜩 힘이 들어간 손으로 그 등을 쓸었다.

남자는 티셔츠가 목덜미까지 쓸려 올라오자 그걸 벗어 한 손에 꽉 쥐었다.

명선이 거세게 쳐대는 남자의 엉덩이에서 철퍽, 철퍽 하는 소리가 났다.

“어훅, 씨…….”

명선은 이를 악문 채 벽을 쾅 짚으며 남자의 몸 안에 사정했다.

다리가 후드드드 떨리면서 발이 뒤로 밀려 운동화 밑창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작게 났다.

명선은 부들거리면서 남자의 등 위로 거친 숨을 뱉어냈다. 끄윽, 끄윽, 하고 남은 정액을 짜내는 것처럼, 몇 번 더 배를 떨며 성기를 밀어 넣다가 간신히 뒤로 물러났다.

명선이 물러나자마자 남자의 몸에서 정액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남자는 조금 끙끙거리다 일어서더니 명선을 바라보며 벽에 기댔다. 빳빳하게 선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있었다.

명선은 남자의 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나 칸막이에 기댔다.

압축 포장을 해놓은 고기처럼 탱탱하고 야무져 보이는 가슴. 근육이 쪽쪽 갈라진 배와 옆구리.

명선은 입술을 한 번 빨고 침을 삼켰다.

남자는 발기가 반쯤 풀린 명선의 성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것을 빠르게 문질렀다. 남자의 발목에 걸쳐진 바지와 속옷 위에는 명선의 정액이 떨어져 있었다.

그 정액을 내려다보는 순간 명선은 갑자기 겁이 났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콘돔도 없이 섹스하다니.

명선은 경직된 채로 벽에 붙어 서서 그의 몸만 바라봤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겨드랑이 부근의 가슴 근육이 불툭불툭 솟았다 꺼지길 반복했다. 이두근 위를 지나가는 긴 정맥이 춤을 추는 듯했다.

두려움과 후회, 매혹, 갈망 따위의 감정들이 명선의 몸 안에서 뒤섞인 채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사정하려는 듯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명선은 서둘러 바지를 끌어 올려 추스르며 화장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렇게 도망쳐 나온 후, 며칠간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온갖 무서운 상상들이 머릿속을 지나다녔다.

그리고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열병을 앓았다.

그 몸을 다시 보고, 만지고 싶었다. 다시 한번. 딱 한 번만 더.

몇 차례 같은 시간에 그 화장실을 서성대기도 하고, 그의 옷차림에서 유추해 근처 공사 현장 같은 곳을 기웃대기도 했지만, 다시 그를 볼 순 없었다.

그의 몸은 어느새 명선에게 완벽함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같은 몸을 쉽게 찾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완벽함으로 자리 잡은 몸이었다.

* * *

그 후 언제나 조금씩 부족한 몸들만을 봐왔는데,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딱 그 몸을 연상시키는, 100퍼센트에 부합하는 몸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그 숯놈 몸도 그런 느낌이겠지.

명선은 천천히 손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쫀쫀하고, 탄탄하고, 땡땡할 거야.

뜨겁고, 딱딱하고, 매끄럽고, 유연하고, 강하기도 하겠지.

명선은 눈을 감고, 반쯤 벌어진 입으로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을 뱉어냈다. 손으로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몸 위에 재강이 올라앉아 있다고 상상했다.

골반을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명선의 가슴과 배를 그 거친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하아…….”

명선의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좋아 죽겠지, 이 씨발 새끼야.”

상상 속 재강이 낮게 속삭였다.

* * *

아침, 양자와 정식이 출근하는 소리를 듣고 깬 명선은 퉁퉁 부은 얼굴인 채 방 밖으로 허둥지둥 나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대?”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양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나 저녁때 또 카운터 볼까?”

명선의 말에 양자와 정식은 눈을 크게 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아유, 우린 좋지. 네가 와서 일하면 좋지.”

“해보니까 정말 할 만했구나. 맞아,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정식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손뼉까지 쳐댔다.

명선은 부모의 그 오버하는 반응에 곧장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 재강을 떠올린 채 두 번의 자위를 하며,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도 내내 생각하다가, 결국엔 다시 정면으로 부딪쳐 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몸을 거기에 두고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는 해야 했다.

다시 그를 보고.

* * *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밖으로 나온 명선은 ‘명선 가든’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원에 나와 있던 양자가 명선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명선이 출근했구나!”

명선도 손을 흔들고 아치형 입구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양자는 긴 고무호스 끝을 쥐고 정원 가장자리의 나무들을 향해 물을 흩뿌리는 중이었다.

“뭐 좀 먹었니? 부침개 먹을래?”

“아니, 배 안 고파.”

“명선아, 여기 와서 일하는 건 너무 좋은데, 이왕 할 거면 일주일, 한 달, 그렇게 크게 끊어서 하면 더 좋을 텐데. 어때?”

“…….”

명선은 고무호스 끝에서 흩뿌려지는 물줄기를 말없이 바라봤다.

오늘 일하기로 한 것도 한참 고민했는데, 일주일, 한 달씩이나 카운터에 묶여 있고 싶진 않았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일단…… 오늘 해보고 결정할게.”

“그래, 그래.”

양자가 얼른 대답했다.

양자는 명선이 식당 일에 어렵게 얻은 관심을 혹시라도 또 잃어버릴까 봐 노심초사인 얼굴이었다.

명선은 느릿느릿 홀 건물로 향하다 슬그머니 뒤뜰 쪽으로 갔다.

어젯밤 재강이 자신에게 욕을 내뱉었던 그 모퉁이를 지나며 명선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나도 바로 뭐라고 욕을 해줬어야 했던 건데.

평소 같았다면 명선도 곧장 반응을 했겠지만, 어제는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고 예상 밖이어서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명선은 씁쓸한 얼굴로 그 모퉁이를 지나 뒤뜰 숯불 방 쪽으로 갔다.

여지없이 그 완벽한 몸이 세척기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휴…….”

명선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수모를 당한 후에 보는데도 그 몸은 여전히 완벽해 보였다.

앞치마는 한없이 벙벙한 핏인데도 그 몸에 흠결 하나 낼 수 없었고, 목장갑과 팔뚝에 튄 물 역시 완벽했다.

원시와 문명이 뒤섞인 채 물을 뿜고 열을 내고 윙윙대고 덜컹거리는 그 분위기의 강렬함도 여전했다.

명선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 광경을 보다가 이를 악물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소리와 냄새와 열기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저기요.”

숯불 방 앞에 서서 말을 건넸는데 재강은 명선의 목소리를 못 들은 듯했다. 세척기 소리가 너무 컸다.

에이 씨.

“어이, 숯불!”

재강이 뒤를 돌아봤다. 팔뚝과 마찬가지로 얼굴과 목에도 물이 맺혀 있었다.

명선은 문득 그 젖은 부분을 훑어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혼자 섹시한 티는 다 내고 있네. 화보 촬영하는 것도 아니고.

“뭐.”

명선을 물끄러미 보던 재강이 짧게 말했다.

명선은 얼른 정신을 다잡으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왜 반말인데?”

재강이 손에 든 불판을 왼쪽 싱크대에 던져 넣고 세척기를 끄더니 명선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다.

“뭐라고?”

명선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이제 둘은 어젯밤 건물 모퉁이에서처럼, 두 발짝 정도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왜 반말이냐고, 어제. 욕까지 하고.”

“…….”

재강은 입을 다문 채 명선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 보다 명선은 배에 흡, 하고 힘을 주었다.

“내 말 안 들려? 왜 반말…….”

“죄송합니다.”

재강은 45도 정도로 허리까지 수그렸다.

“…….”

명선은 재강을 멍하니 쳐다봤다.

허리는 수그렸지만 재강의 눈은 그대로 명선의 눈에 고정된 채라, 치뜨고 노려보는 꼴이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제는 하도 변태 새끼처럼 쳐다보시길래 욱해서요.”

“…….”

재강이 다시 허리를 폈다.

“됐죠?”

재강이 몸을 돌리려 하자 명선이 한 발짝 다가섰다.

“야, 아니, 숯불. 뭐래? 이게 사과야, 뭐야?”

“그럼 어쩌라고, 씨발아.”

“허?”

명선이 입을 쩍 벌렸다.

“사과했잖아. 어쩌라고. 오늘도 계속 쳐다보면 눈구녕을 다 파버린다. 양아치 새끼가 성가시게.”

“…….”

“나는 누구처럼 한가하지 않으니까 일 좀 하게 두지?”

“…….”

얼이 빠진 명선을 뒤에 두고 재강은 세척기 앞으로 가 도로 작업을 재개했다.

명선은 머릿속이 하얗게 빈 채 눈만 깜박이며 서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상체, 하체를 차례로 이어서 돌린 후 삐걱삐걱 뒤뜰을 지났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저 새끼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죄송, 눈구녕, 사과, 욱, 변태, 양아치……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조각난 채 명선의 머릿속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다녔다.

명선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에 세수하고 멍하니 거울을 보다가 다시 한번 세수했다.

한참 동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던 명선이 곧 어이없다는 웃음을 짧게 내뱉었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 * *

금요일 저녁의 가든은 지옥이었다. 단체 손님은 넘쳐나고 이런저런 실수도 잦았다.

명선은 그 와중에도 재강이 지나가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주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가며.

눈을 정말 파낼지 한번 보자고. 어디서 협박질이야?

그리고 뭐? 양아치? 사람 협박하고 욕부터 찍찍 갈기면서, 지금 양아치 짓은 누가 하고 있는데? 야,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가슴 한편에선 어쩐지 재강이 정말로 눈을 파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는데 뭘 어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식당의 직원들과 손님들이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 주고 있었다.

영업이 마무리되고 직원들의 식사 시간이 되자 명선은 일찌감치 그의 지정석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자리엔 여지없이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일반 버전보다 조금 더 도수가 센 빨간 뚜껑 버전이었다.

꼴에 술 세다고 자랑하냐. 별게 다 자랑이다.

“명선아, 오늘은 어땠어? 그래도 이제 몸에 많이 익었지?”

곁에서 정식이 얼굴을 들이대고 물었다.

“응.”

명선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재강이 들어올 입구 쪽을 바라봤다.

곧 그가 완벽하기 짝이 없는 몸을 무심히 움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명선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물을 들이켰다. 시선은 그에게 고정된 채였다.

눈 파내 봐, 이 새끼야. 한번 해보라고.

재강은 명선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걸어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재 냄새가 옅게 풍겼다.

“잘 먹겠습니다.”

재강은 늘 하던 대로 컵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명선아, 내일은…….”

“식사 때마다 그렇게 반주를 하시나 봐요?”

명선은 곁에서 말을 거는 정식을 무시하며 재강에게 물었다. 몸도 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재강이 소주 뚜껑을 닫으며 명선을 힐끗 쳐다봤다.

“네.”

“밥 먹고 나서 마무리 청소하지 않아요? 일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닐 텐데 음주를?”

“이 정도로 취하진 않는데요.”

“그래도 좀 방만한 거 아닌가?”

“제가 술이 세서요.”

“아, 그러세요.”

명선이 재강을 향해 필살기 미소를 지었다.

재강은 무표정인 채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소주를 반 정도 쭉 마셨다.

“우리 명선이가 식당 일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이네.”

정식이 들뜬 얼굴로 명선의 팔을 쿡쿡 찌르며 키득댔다.

“근데 괜찮아. 재강 씨를 한 달 넘게 봤는데, 저기서 더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어. 딱 절도가 있는 사람이야. 그렇지요, 재강 씨? 많이 들어요.”

정식이 재강에게 독려하는 손짓을 하고 하하 웃었다.

명선은 미소가 남은 얼굴로 재강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도가 있어 보이긴 하네. 과묵하시고.”

재강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대꾸도 안 하고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과묵하고 일 잘하는 게 낫지, 전에 있던 장 씨는 일은 일대로 서툴면서 말은 또 어찌나 많던지…….”

곁에서 정식만 다른 얘기로 떠들어댔다.

* * *

“잘 먹었습니다.”

식사 후 컵에 남은 소주를 해치우고 재강은 곧장 자리를 떴다.

명선은 그가 입구에서 사라지자마자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 먹었니?”

정식이 명선의 밥그릇을 들여다봤다.

“어. 나 잠깐 차에 좀 갔다 올게.”

명선은 평소의 속도로 홀을 지나 입구까지 간 후,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다닥 뛰어 뒤뜰로 갔다.

눈 파내는지 어쩌는지 한번 보자, 이 새끼야.

성큼성큼 뒤뜰 잔디밭에 들어서던 명선이 우뚝 멈춰 섰다.

“…….”

고무호스를 쥐고 바닥에 물을 흩뿌리는 재강은 웃통을 벗은 채였다.

허름한 숯불 방의 쨍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땀으로 번들대는 등 근육의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명선이 원하는 ‘노가다 근육’의 결정판이었고, 결정체였으며, 완전판이자, 완전체였다.

명선은 입을 벌리고 선 채 그의 몸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달리는 말. 푸른 초원. 튀어나오고 패이며 움직이는 근육. 힘줄. 적당한 두께의 단단한 피부. 씩씩대는 숨소리. 윤기와 온기, 열기.

모든 이미지와 감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며 쉼 없이 명선을 자극했다.

허리 아래쪽, 바지 속으로 사라지는 두 줄기의 탄탄한 척추 기립근을 보며 명선은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화장실 벽을 짚고 명선의 아래에 엎드려 있던 그 몸.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덜컥덜컥 흔들리던 그 원조 100퍼센트 몸이 떠올랐다.

엉덩이를 꽉 쥐었다가 찰싹 때리고 등을 쓰다듬는 거야. 손가락 끝에 힘을 잔뜩 줘서, 할퀴는 것처럼.

쓸어내리고, 쓸어 올리고, 꽉 쥐었다가 놓고, 다시 쓸어 올려서 목덜미를 움켜잡고, 그리고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돌아서던 재강이 우뚝 멈춰 명선을 마주 봤다.

명선은 저도 모르게 재강의 가슴과 배로 시선을 내렸다.

등과 마찬가지로, 앞쪽 역시 완벽했다.

곧장 명선의 머릿속으로 헐떡이는 재강의 가슴과 배가 재생됐다.

명선이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탄탄하게 흔들리는 가슴, 바짝 솟은 젖꼭지, 땀에 젖어 빛나는 배와 옆구리,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근육의 결, 땀과 프리컴이 섞인 채 고인 배꼽.

눕혀놓고 박으나 엎어놓고 박으나 존나 천국이겠는데.

재강은 물이 줄줄 흐르는 호스를 쥔 채 명선을 물끄러미 보다가 벽 쪽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잠그고 호스를 정리했다.

명선이 입을 열었다.

“눈을 파 버리신다며.”

재강은 말없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티셔츠를 집어 몸을 닦더니, 한쪽 벽에 걸린 배낭을 열고 다른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어이, 숯불 아저씨. 한번 해보세요, 어떻게 되나 보게.”

재강은 몸을 닦은 티셔츠를 배낭 안에 던져 넣고 한쪽 어깨에 멨다.

명선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나 보자니까?”

재강은 숯불 방 안을 한 번 휘 둘러본 후 다른 쪽 어깨에도 배낭을 메며 명선 쪽으로 걸어 나왔다.

명선은 심장이 조그맣게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곁을 스쳐 가는 재강의 팔을 탁 붙잡았다.

“너 나 사장 아들인 거 알아?”

멈춰 선 재강이 명선의 눈을 마주 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식당 이름이 그쪽인데 모를 수가 있나.”

명선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야, 숯불. 사람 봐 가면서 깝쳐.”

재강이 명선의 코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자 명선은 무의식중에 목을 살짝 뒤로 뺐다.

“네가 그 눈알 한 쌍을 잃는 거랑 내가 교도소에 가는 거 둘 중에 어떤 게 더 손해일까.”

재강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숨에서 약하게 소주 냄새가 났다.

“네가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고 지긋지긋하게 느린 속도로 회복하고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동안 나는 교도소에 가서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잘 살 텐데.”

말을 끝낸 재강이 명선의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차례로 번갈아 가며 들여다봤다.

“…….”

명선은 멍하니 있다가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였다.

둘은 얼마간 서로의 눈만 바라봤다.

가만히 있던 재강이 갑자기 움찔, 몸을 움직이자 명선은 저도 모르게 재강을 놓고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씨발……!”

재강이 그런 명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나 사람 봐 가면서 깝쳐.”

“…….”

재강은 곧장 뒤뜰 잔디를 지나 사라졌다.

명선은 눈만 끔뻑거리면서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재강이 모퉁이로 사라지자마자 숨을 내쉬며 양팔을 문질렀다. 어느새 소름이 돋아 있었다.

미친 새끼. 무슨 말을 저딴 식으로 해?

저거 혹시 범죄자 아니야? 알바 뽑을 때 전과 기록도 확인하나?

명선은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한참 숨을 골랐다.

건드려선 안 될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 * *

“하, 아…… 하으윽, 박아주세요, 박아주세요…….”

청담이 낮게 신음했다.

명선은 한 손은 청담의 골반을, 다른 손은 시트를 움켜잡은 채 거세게 몸을 부딪쳐댔다.

둘의 움직임에 맞춰 차체가 거세게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아무리 뒷좌석이어도 큼직한 두 남자의 몸이 뒤엉켜있다 보니 공간은 한없이 좁고 불편했다.

명선은 그 와중에도 머릿속으론 재강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그 눈알 한 쌍을 잃는 거랑 내가 교도소에 가는 거 둘 중에 어떤 게 더 손해일까.”

교도소까지 들먹인다 이거지? 내가 겁낼 것 같냐?

야, 솔직히 넌 한주먹거리도 안 돼, 이 입만 산 새끼야. 말로 겁주는 걸 누가 못해?

명선은 씨근거리며 잔뜩 오그라든 청담의 등을 노려보다가 그 등에 손을 바짝 대고 쓸어 올렸다. 땀이 난 등은 축축하고 미끈거렸다.

그 새끼 등도 이렇게 젖어 있었지.

뜨거운 것을 다루며 쉼 없이 오가다 보니 재강의 티셔츠 윗부분은 땀에 젖어 피부에 살짝 달라붙어서, 어깨와 등의 선이 매혹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대로 한 번 꽉 깨물어 봤으면.

명선은 눈을 감았다.

바지 속으로 사라지는 두 줄기의 선명한 척추 기립근, 팽팽하고 단단해 보이던 가슴골, 군데군데 힘줄이 솟은 팔뚝에 있던 옅은 화상 자국들, 걸을 때마다 무전기가 달랑거리며 쳐대던 엉덩이, 낮고 고요한 목소리…….

재강의 이미지가 명선의 머릿속을 구석구석 채웠다.

‘정복’이란 단어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몸을, 그 거칢을, 정복하고 싶었다.

재강이 자신의 밑에 누워, 그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앙다문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삼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리에 갇혀 으르렁대는 야생 동물 같은 모습.

좀 전엔 간까지 다 졸아붙는 듯 겁을 냈으면서도, 시간이 지나자 두려움은 희석되고 흥분과 미련이 그 자릴 채웠다.

벗은 채이던 그 몸, 뒤판도 앞판도 완벽하던 그 헐벗은 몸만이 짙게 떠올랐다.

아마 그 새낀 성질도 더럽고, 고분고분한 맛이 하나도 없겠지.

하는 동안 바닥에 머리 처박고 욕만 해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결국은 더 원하게 되겠지.

너도 별수 없이 쾌락에 중독되고, 그러다 나한테도 중독되는 거야.

나를 볼 때마다 한 번만 해달라고 조르게 될 거라고.

그 목소리로 끙끙거리면서, ‘계속 박아, 이 씨발 새끼야’ 그럴지도 모르고.

“하아, 너무, 좋아요, 흐윽…….”

계속 박아, 이 씨발 새끼야.

청담의 헐떡임 위로 재강의 목소리가 겹쳐지자 명선은 문득 몸이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강이 명선의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청담의 머리가 차 문을 쿵쿵 두들기자 명선은 청담의 머리카락을 그러잡아 자기 쪽으로 홱 당겼다.

“아학, 학…….”

턱을 잔뜩 치켜든 청담은 입을 크게 벌리고 신음했다. 둘의 몸이 부딪칠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해봤으면. 많이도 안 바라니까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면, 너도 나를 원하게 될 텐데.

명선은 이마를 잔뜩 찡그린 채 눈을 꼭 감고 헐떡였다.

* * *

명선이 글로브 박스에서 물티슈 팩을 꺼내 몇 장 뽑고 팩을 청담에게 건넸다. 청담도 물티슈를 뽑아 자신의 몸을 닦았다.

명선의 차 안엔 늘 콘돔과 윤활제, 물티슈가 넉넉히 구비되어 있었다.

친구 대용이 ‘섹스 응급 키트’라고 이름 지어준 물건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카섹스나 ‘급섹’을 위해, 그리고 평소 모텔용 싸구려 콘돔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어디 가든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해 둔 것이었다.

명선은 뒷좌석 구석에 앉아 몸을 닦고 옷을 끌어 올려 입으며, 옆쪽 구석에 앉아 정리 중인 청담을 바라봤다.

청담의 몸은 65퍼센트 정도였다.

재강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후 집에 가는 길에 돌연 앱을 켜고 매칭 된 사람과 무작정 만난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였고, 섹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재강 같은 100퍼센트 몸과 저녁 내내 같이 있었으면서도 결국 이런 ‘잔챙이’와 섹스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못내 씁쓸했다.

“잠깐 환기 좀 할게요.”

청담이 옷을 얼추 다 입은 듯하자 명선이 작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와 차 문을 모두 열었다.

차 앞쪽으로 펼쳐진 나무숲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대는 소리 외에 공터는 고요했다.

짓다 만 건물 뒤쪽의 이 공터는 명선이 카섹스를 위해 애용하는 장소였다.

자동차 최대 3대까지 동시 수용이 가능한 이곳에서 카섹스 피플은 예의 바르게, 서로 간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각자 필요한 일을 하고 바로 떠났다.

도로 쪽에서 공터가 안 보이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건물은 몇 달째 그 흉물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는데, 부도나 사기 등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된 듯했다.

이곳을 이용하는 카섹스 피플은 분명 모두 명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저 건물이 영원히 완성되지 않기를. 카섹스여 영원하라.

명선은 이곳에 올 때마다 언제나 공사가 재개된 상황을 맞이할까 봐 두근대곤 했다.

다행히 오늘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고, 공터는 비어 있어서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명선은 자동차 보닛에 기대서서 시커먼 나무숲을 응시하며, 가든을 나오기 전 살펴봤던 재강의 직원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이름 김재강. 나이 스물일곱.

주소로 봐선 가든이랑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것 같고, 전과 기록은 딱히 직원 정보에 포함 안 하는 것 같던데.

근데, 그나마라도 맞는 정보이긴 한 건가?

사실은 전과 몇 범이거나 수배범일 수도 있어. 신분 숨기고 그 시골 동네 식당에 처박혀서 조용히 사는 중인지도 몰라.

주소는 진짠가? 핸드폰 번호는?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고른 숫자지? 자기 생일은 아니었고.

애인 생일? 부모님 생일? 아니면 혹시…… 자식 생일?

씨발, 혹시 유부남 아니야? 처자식 딸린 진성 헤테로…….

“갈까요?”

“아, 네.”

청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명선이 얼른 몸을 돌렸다. 청담은 조수석에 앉은 채였다.

명선이 차례로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섹스 되게 잘하네요.”

안전벨트를 매는 명선을 바라보던 청담이 말했다.

명선은 으쓱해지는 어깨를 잠재우면서 피식 웃었다.

“잘하긴요.”

내가 잘하긴 하지.

그 숯불남도 존나 녹여 줄 수 있는데.

새끼가 뭣도 모르고 사장 아들한테 그따위로 깝치기나 하고 말이야.

숯불남.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너한테 생애 최고의 섹스를 선사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라 이거야. 너는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거라고.

어느새 명선의 머릿속은 오직 재강만 가득했다. 재강과의 섹스를 향한 갈망.

“섹파 같은 거 있어요? 왠지 있을 거 같은데.”

청담의 질문을 듣자마자 명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너 나랑 섹파 하고 싶구나.

이런 얘기로 밑밥을 깐 다음에 차례차례 대화를 진행하면서 ‘나랑도 하는 건 어때요?’라고 하겠지.

근데 어쩌냐. 나는 이제 그런 건 영 안 땡기는데.

“딱히 만들 필요성은 못 느껴서요.”

명선이 느릿느릿 핸들을 돌려 공터를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청담을 향해 필살기 미소를 짧게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명선에게 섹스 파트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들 쪽에서 감정이 깊어지는 바람에 안 좋게 틀어지기를 세 차례나 겪다 보니, 명선은 누군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만드는 일 자체에 질리고 말았다.

명선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엔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세상 모든 사랑을 다 바치기라도 하는 양 다정하고 살갑게 굴었고, 안타깝게도 그들 셋 모두 결국엔 명선에게 반하고 말았다.

“이 개미지옥 같은 인간아.”

셋 중 하나는 끝내 마음을 열지 않는 명선에게 그런 말을 하며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명선은 그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피곤했다.

그렇게 피곤해져 버린 끝에 일회성 만남만을 갖자고 결심한 지 오래였다.

“그러시구나.”

청담이 차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명선은 청담의 옆얼굴을 힐끔 보고 계속 운전에 열중했다.

얘하고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네.

도도에 비하면 나름 태도도 산뜻하니까 한 번 정도 더 보는 건 상관없긴 한데, 계속 섹파 얘기 꺼내다가 혼자 사랑에 빠지고 난리 치는 단계로 갈지도 몰라.

그전에 미리 차단해 버리는 게 낫지.

그래도…… 숯불남이 섹파 하자고 하면 진짜 죽을 때까지라도 할 텐데.

보아하니 걔는 성질이 드러워서 딱히 사람한테 정 붙일 것 같지도 않거든.

솔직히 100퍼센트 몸이랑 정기적으로 놀 수 있으면 굳이 잔챙이들이랑 어울릴 필요가 없잖아.

명선은 청담 몰래 한숨을 삼켰다.

지금으로선 재강이 자신과 섹스 파트너가 될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섹스 파트너가 되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해야 재강과 섹스라도 한 번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 * *

“위험한 사람 같다. 그만 알짱대.”

대용이 마네킹에 재킷을 입히며 말했다.

대용이 일하는 빈티지 옷가게에 와 빈둥대던 명선이 재강과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은 참이었다.

“아니야. 입만 산 거 같아. 가든 직원들이랑은 무난하게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일인용 빈티지 소파에 앉은 명선이 팔걸이에 걸쳐둔 다리를 꺼떡대며 말했다.

“써니의 자기 합리화가 발동되었다.”

“솔직히 험한 말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말로는 뭘 못 하냐고. 근데 내가 위험한 사람이야? 아니잖아.”

“뭔 소리야. 너도 충분히 위험해, 써니.”

“웃통 벗고 있는 걸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진짜…… 등이랑 가슴이랑 배가…… 어휴…….”

“……저런데 지가 안 위험한 인간이라고?”

대용이 마네킹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혀를 차고는 카운터 쪽으로 갔다.

명선은 아랑곳없이 입맛을 다시다 문득 몸을 세우며 대용을 쳐다봤다.

“우리 용이 용이…… 게이다 성능이 꽤 좋지 않니?”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대용이 명선을 힐끗 봤다.

“응?”

“이쪽 사람들 잘 알아보지 않아?”

“나쁘진 않지.”

“그치?”

“아, 내 주위 게이들이 전부 다 저 사람 절대 게이 아니라고 하고 나 혼자 게이로 민 사람 있었는데 결론은 내가 맞았던 적도 있어.”

“성능 좋네, 우리 대용이!”

대용이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훗 웃었다.

“근데 왜?”

“그…….”

명선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대용이가 봤는데도 앞뒤로 꽉꽉 막혀 있는 진성 헤테로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진짜, 완전히 물 건너가는 건가?

“혹시 그 숯불남 봐달라고?”

“역시 척하면 척이네, 우리 대용이!”

“그만하고 떨어지라니까, 이것아.”

“하는 데까진 해봐야지.”

“뭘 하는 데까지 해봐, 얘기만 들어도 개마초 냄새가 풀풀 나는구만. 너 그러다 잘못 걸려서 진짜 무슨 해코지 당하면 어쩌려고?”

“게이 중에도 개마초 타입은 많잖아.”

“써니 써니 명써니…….”

대용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그냥 한 번만 좀 같이 가서 봐줘. 내 게이다는 진짜 성능 안 좋잖아.”

“네 게이다는 정말 똥이지. 없느니만 못해.”

“그러니까 네가 와서 감별 좀 해보라고. 네가 봤는데도 헤테로다 싶으면 깨끗하게 물러날게.”

대용이 물끄러미 명선을 바라봤다.

“용이 용이 대용이. 갈 거지? 가서 볼 거지?”

명선이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방실방실 미소 지었다.

대용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명선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차량 픽업 제공?”

“아, 당연하지. 가든까지 곱게 모셔다줄게.”

“흠…….”

“최상의 서비스로 모신다니까, 용이 용이.”

“뭐…… 너희 부모님 뵌 지 오래되기도 했고, 그럼 일단 가서 보기라도 할까.”

“예스!”

“감별사 출동!”

대용이 주먹 쥔 손을 쭉 뻗어 올리자 신난 명선이 얼른 그 앞으로 튀어 가 주먹 쥔 손을 크로스했다.

“출동!”

조금이라도 이쪽인 기미가 있다고 하면 좀 더 알짱대 보고, 대용이가 봐도 진성 헤테로다 싶으면 그냥 깨끗하게 마음 접자.

* * *

월요일 이른 저녁 시간.

명선은 뒤뜰 숯불 방으로 곧장 가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대용을 홀 건물로 이끌었다.

“대용이 어서 와라!”

카운터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정식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버아버 아버님!”

“사업은 잘돼 가니?”

“사업이라기보단 제가 빌붙어 있는 거죠, 뭐. 그냥 근근이 먹고 삽니다.”

“아니야, 대용이, 아주 잘하고 있어. 어린 나이에 그런 가게를 꾸리고 말이야. 우리 명선이도 대용이처럼 하면 참 좋을 텐데.”

“제가 귀인을 만났듯 써니에게도 아버님과 어머님 같은 귀인이 계시지 않습니까?”

대용의 말을 들으며 명선은 코웃음을 삼켰다. 대용 본인도 속으로 코웃음을 삼킬 게 뻔했다.

대용이 말하는 귀인이란 지금 일하는 빈티지 옷가게의 사장 승규였다.

대용은 승규의 가게에서 매장 관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승규와 사귀게 되었는데, 애인에 대한 특별 대우였는지 평소 수완이 좋았기 때문인지 얼마 후엔 동업자가 되어 있었다.

연인으로서는 오래 가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사업 파트너로서는 잘 맞았던지 지금도 계속 그와 함께 매장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명선의 부모는 명선과 같은 나이의 대용이 이렇게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부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사는 모습을 대단히 부러워했다.

“저도 저희 사장님이 워낙에 잘 끌어 주셔서 말뚝 박은 거잖아요. 명선이도 계속 잘 끌어 주시면 될 거예요.”

“잘 안 끌려와. 아직 생각이 너무 어려서 그런가.”

대용과 정식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듯하자 명선은 홀을 둘러봤다가 입구를 바라봤다 하며 안달했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재강이 불쑥 나타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

“한동안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니 또 확 식었더라구.”

정식이 쓸쓸하게 웃었다.

“직원들이랑 친해지면 더 수월하게 말뚝을 박을지도 모르죠.”

대용이 명선을 보고 능청스레 웃으며 말했다.

“적당히 좀 하고 들어갑시다.”

명선이 대용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홀 안으로 잡아끌었다.

“우리 밥만 먹고 갈 거야, 아빠.”

“그래. 대용아, 많이 먹어.”

“네!”

“염 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오늘은 얌전히 고기 먹고 게이다만 작동하면 되는 거야.”

명선이 대용을 끌고 가며 낮게 말했다.

“긴장 풀어, 명써니.”

“그리고 사장이 잘 끌어줘서 말뚝 박긴 무슨? 사장한테 박다가 말뚝도 박은 거지.”

“하얀 거짓말이라는 게 있어, 써니.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라는 것도 있고.”

“아이고, 대용이 왔구나.”

“어머어머 어머님!”

주방에서 나오던 양자가 다시 대용과 한참 안부를 나누는 바람에 명선은 또 안절부절못하다가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하여, 어디인가? 나의 정교하고 수준 높은 게이다를 작동할 이는 어디에 있는가?”

“갈비 시켰으니까 이제 숯불이 올 거야. 그거 가져오는 사람을 잘 봐봐.”

“느껴지는 서스펜스!”

“진지하게 봐. 장난 아니고.”

“장난 아냐 시리어스!”

에휴.

잘 될지 모르겠다.

명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구를 등지고 앉은 채여서 재강이 오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뒤통수가 계속 근질근질한 기분이었다.

“염 씨, 딴 데 보지 말고 문 쪽을 보고 있어. 저기로 들어올 거니까.”

대용은 샐러드를 우걱우걱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입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할렐루야.”

“왜. 왜. 뭐. 뭔데. 뭐.”

명선은 돌아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대용만 뚫어지게 보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대용이 피시식 웃으며 다시 샐러드를 뒤적였다.

“장난이야.”

“씹……! 펄놈아, 진지하게 하라고.”

명선이 버럭 했다가 목소리를 간신히 낮추며 식탁 밑에서 대용의 발을 걷어찼다.

“예쁜 입으로 험한 말 하지 마, 써니.”

“잊지 마라, 시리어스.”

“지금부터 시리어스!”

대용은 춤을 추다가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딱 한 시간만 깨방정 자제하자, 대용아.”

명선이 한숨을 쉬며 서랍에서 새 젓가락을 꺼내 놓아주었다.

“써니, 안 어울리게 엄청 긴장했네…….”

대용은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줍다 말끝을 흐리면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입구 쪽에 고정된 채였다.

“…….”

대용의 그 표정을 본 명선은 공연히 두 손을 쥐어짜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뒤통수와 등에 소름이 바짝 돋는 듯했다.

곧 익숙한 열기가 곁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냄새와 함께.

“선생님, 이 숯의 종류는 뭔가요?”

대용이 재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명선은 태연한 척하려 애쓰며 공연히 핸드폰을 켜고 들여다봤다. 뭘 보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무작정 화면만 긁어내렸다.

“비장탄이요.”

재강의 목소리.

훅, 하고 열기가 끼치고 덜컹, 숯 통이 들어간 후 챙, 하고 불판이 도로 놓였다.

재강이 곧장 자리를 뜬 후에도 계속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두고 있던 명선이 대용을 슬쩍 쳐다봤다.

대용은 팔짱을 끼고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이글거리는 숯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선은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대용을 봤다.

“잘 봤어?”

“흠…….”

대용이 한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게이다 켜고 봤어?”

“흠…….”

대용이 반대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모르겠어?”

“이야…….”

“말을 좀 해보라고.”

“역대급이다.”

“뭐? 뭐가?”

“역대급으로 난이도가 높아.”

명선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좀 더 봐야 알 것 같기도 하고.”

“…….”

“써니, 근데 내 게이다가 지금 좋은 컨디션이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부사장인데 매장 휴무일이라고 놀았겠니. 오전에 사입하러 도매처도 돌았고, 덕분에 살짝 피곤해서 게이다도 좀 무뎌졌을지 모른다는 거.”

명선은 실망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불판 위에 고기를 얹었다.

“……어쨌든 숯불 담당은 저 사람 하나니까 계속 들락날락할 거야. 일단 지켜봐 봐.”

“응.”

“티 내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네.”

* * *

카운터가 아닌 홀에 앉아 재강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명선은 기분이 묘했다.

재강은 여전히 자기 일에만 충실한 모습이었고, 숯불과 불판 외엔 아무것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명선은 저런 몸을 가진 재강에게 손님들이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놀라웠다.

자신은 재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로 눈이 부실 지경인데, 다른 손님들에게 재강은 아무 존재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재강이,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그때 그 난리를 치고 헤어졌는데, 오늘 내가 여기 와서 앉아 있다는 것도 알 텐데, 꼴 보기 싫다는 눈빛으로라도 한번 보고 갈 수 있잖아. 뭔 인간이 저래?

“네가 좋아하는 몸인 것 같긴 하네.”

둘의 테이블 옆을 지나 입구 쪽으로 나가는 재강의 뒷모습을 보던 대용이 말했다.

“100퍼센트 내 이상형이라니까.”

명선이 오이냉국을 퍼먹으며 웅얼댔다.

“너 얼굴은 진짜 안 보는구나.”

“얼굴이 무슨 상관이야, 얼굴에 박을 것도 아니고.”

“얼굴에도 박긴 하지. 입에.”

“그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왜 중요하냐고.”

“그렇게 따지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왜 중요하담?”

“어쨌든 본격적으로 박고 만지는 데는 몸이잖아.”

대용은 앞니로 갈비를 갉작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얼굴 보는 눈도 좀 키워, 써니.”

“얼굴엔 관심 없다고. 그리고 그렇게 못생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뭐.”

“내 기준엔 별로야.”

“여기서 네 기준을 왜 끌어와?”

“호오옹? 너 저 사람 두둔한다?”

“…….”

“단단히 빠져버린 모양?”

명선은 말없이 오이를 우적우적 씹다가 컵에 물을 콸콸 따랐다.

“뭔 소리야? 그게 왜 두둔하는 게 돼?”

“조심해라. 더 깊어졌는데 정말 헤테로면…….”

“뭐? 헤테로야? 네가 봐도 헤테로 같아?”

대용은 깨끗이 발라먹은 뼈를 내려놓고 물수건에 느릿느릿 손을 닦았다.

“그냥 봐서는 진성 중에서도 진성 헤테로이긴 한데.”

“…….”

“보는 게 또 다가 아니잖아? 대화 몇 마디라도 나눠본다면 모를까.”

에이 씨, 다 틀렸나.

대용은 턱을 문지르며 눈을 깜박거리다가 명선의 뒤쪽을 보고 손을 쳐들었다.

“여기 불 좀 빼주세요.”

“잠시만요.”

뒤쪽에서 재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바쁘게 핸드폰을 켜 딴청 피우는 척하는 명선을 보며 대용이 킥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밖으로 나갔어. 아직 안 와.”

“…….”

명선이 눈만 치떠 대용을 노려보고는 다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써니 써니 명써니…….”

대용은 웃음 띤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에 빠진 명써니.”

“뭐?”

명선은 곧장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행동이 지금 딱 그래. 좋아하는 사람 생겨서 친구한테 몰래 보여주려고 데려온 거.”

“게이인지 아닌지 봐달라고 차로 모셔 와서 고기까지 대접하고 있는데 뭔 소리세요?”

“자신의 진짜 감정이 뭔지 네가 자각을 못 하는 건 아닌지?”

“헛소리 그만하고 고기 먹은 값이나 좀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박 타러 갔다가 센조이만 하고 돌아온 바텀의 한을 네가 알간?”

“뭐……?”

명선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곧장 재강이 둘의 테이블 곁에 섰다.

명선은 얼떨결에 재강을 올려다봤다가 대용을 바라봤다. 대용은 재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강이 무심히 숯 통을 빼내 들고 사라지는 동안 대용은 재강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명선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염 씨. 그게 네 전략이었어? 고작 그딴 게?”

“혹시 모르니까 이것저것 다 동원해 보는 거지. 기초 용어 던져보기.”

“한심…….”

명선은 말을 끊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용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럼?”

“응?”

“뭘 좀 알아냈어?”

“헤테로야.”

명선은 대용의 얼굴을 응시하다 천천히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댔다.

“……확실해?”

“내 기준으론 그래.”

“…….”

“100퍼센트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내 게이다로는 99퍼센트 정도의 헤테로 함유량을 지니고 있다고 나오네.”

“구십 구!”

“나머지 1퍼센트는 ‘세상만사 모르는 거다’라는 명언에 기댄 비율이랄까. 진짜 일반틱한 사람들이 있긴 하니까.”

“…….”

명선은 팔짱을 끼고 너저분한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실망이네.

은연중에 머리끝까지 가득 차 있던 기대감이 발끝을 향해 서서히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왜 하필 그런 몸에 환장하게 된 것이며, 왜 하필 저런 헤테로 건달 같은 게 그런 몸을 갖게 된 것이며, 왜 하필 저딴 놈이 내 눈에 띈 것이며…….

처음부터 다 잘못됐네.

“써니, 근데 자기가 대놓고 말하기 전까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자기가 게이란 걸 모르고 사는 사람도 의외로 꽤 있고. 또 아까도 말했지만 내 게이다가 조금 손상을 입은 상태일 수도 있어.”

“됐어. 위로하지 마.”

“그래, 말뿐인 위로는 여기까지 하고, 포기한댔으니까 포기해라. 더 빠져 봤자 너만 손해다.”

“나가자.”

명선이 일어섰다.

“명선이 정말 가니?”

카운터에 있던 정식은 명선이 식당을 떠나려 하자 아쉬운 얼굴을 했다.

명선은 귀찮다는 듯 손만 몇 번 내젓고는, 정식과 긴 인사를 나누는 대용을 뒤에 두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불쑥 화가 치밀었다.

저딴 거 하나 때문에 사흘이나 여기 처박혀서 일하고, 쳐다본다고 욕은 욕대로 처먹고, 씨발, 근데 뭐? 헤테로이기까지 해?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 감정 낭비, 도대체 저 헤테로 건달 새끼 때문에 내가 낭비한 게 몇 가지냐고.

네가 그따위 몸을 가지고 눈앞에서 알랑거리는 바람에, 이 쓸모없는 새끼야, 어?

명선은 찌푸린 채 주머니 속 차 키를 만지작대며 서성이다가 문득 뒤뜰로 성큼성큼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욕이나 시원하게 해주고 끝내자.

저딴 게 나한테 씨발 새끼라느니 눈을 파버린다느니 질러놨는데 나는 욕다운 욕도 못 해줬잖아.

나도 만만치 않게 지랄 맞을 수 있는 인간이거든? 야,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수고했어. 아니, 어쩜 그렇게 다재다능해?”

모퉁이를 도는 순간 주방 직원 애덕의 목소리가 들려 명선은 우뚝 멈춰 섰다.

숯불 방 앞에 애덕과 재강이 서 있었다.

“아주 별세계야, 별세계. 우리 정애 아빠도 못 하는 걸 재강이가 했네.”

애덕이 재강의 등을 두들기며 말하고는 들고 있던 봉투를 재강에게 내밀었다.

“그땐 현금이 없어서 못 줬지.”

“네, 고맙습니다.”

“주는 거 또 까먹을까 봐 생각나자마자 일하다 말고 뛰어나왔네. 나이 들면 계속 깜빡깜빡 하잖어.”

명선은 모퉁이에 선 채 눈만 깜박거리며 둘을 바라봤다.

“민철이 엄마 말 듣길 잘했다. 나도 주변에 광고해 줄게.”

애덕이 몸을 돌리는 듯하자 명선은 후다닥 건물 뒤로 물러섰다가 주차장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뭐야, 저 새끼 저거…….

명선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남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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