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재강
준원이 재강의 옥탑방에 돌아온 건 지난여름이었다.
당시 재강은 떡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새벽 3시쯤 출근해 오후 4시가 넘어 퇴근하는 일상이었다.
오후 5시쯤, 재강이 퇴근해 옥상으로 올라왔을 때, 멀찍이 평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배낭을 베고 웅크려 누운 그 등을 보는 순간 재강은 곧장 그게 준원이란 걸 알았다.
재강은 마지막으로 준원을 본 게 작년 초여름 무렵이란 걸 떠올리며 그 등을 바라보다 느릿느릿 가까이 다가갔다.
준원은 더운 여름의 늦은 오후, 딱딱한 평상 위에 누워서도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살이 또 빠졌네.
재강은 그 얼굴과 몸을 내려다보다 준원을 등지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대체로 그랬다. 준원이 재강을 떠났다 돌아올 땐 살이 좀 빠진 모습이었다.
재강과 얼마간 함께 지내면서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다시 떠났다가, 살이 빠진 채 돌아왔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중2 때 같은 반이 되면서 만난 준원과 재강은 이런 관계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준원은 떠나고, 재강은 기다렸다.
준원이 돌아오면 재강은 받아 주고, 준원이 다시 떠나면 재강은 기다렸다.
준원은 세상만사에 관심이 많고 늘 의욕이 넘쳐, 성인이 된 후엔 온갖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혼자 돌아다녔다.
그리고 금세 흥미를 잃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장인을 찾아가 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다 두어 개 구워 본 후 그만두고, 밴드를 하겠다며 사람을 모아 공연을 서너 번 해본 후 그만두고, 일본까지 가서 제빵 기술을 배우다 몇 달 후 돌아오고, 외진 도시의 공장에 처박혀 무엇에 쓰는지 알지도 못하는 걸 만들다 도망치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준원은 재강을 떠나 다른 남자와 어울렸다. 준원이 ‘애인’이라 칭하는 남자들이었다.
준원은 새로운 경험에 흥미를 잃으면 애인에게도 흥미를 잃고, 재강에게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남녀노소를 통틀어 누구에게나 인기 많고 호감을 얻던 준원은 그 인기를 보란 듯 누리며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면서도, 결국엔 언제나 재강의 곁으로 돌아왔다.
“역시 너랑 있는 게 제일 편해.”
돌아온 준원은 그런 말을 했다.
재강은 멋대로 훌쩍 떠났던 준원에게 잔뜩 화가 났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마음이 누그러졌고, 준원이 돌아오면 마음이 완전히 풀려 아무 일 없었던 듯 받아 주었다.
준원은 언제 어느 때 돌아와도 재강이 자신을 받아 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재강 역시 자신이 준원을 받아 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의 1년 만에 돌아온 준원을 뒤에 두고, 재강은 가만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곧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들리자 재강이 뒤를 돌아봤다.
등을 대고 누운 준원과 재강의 눈이 마주쳤다.
“……강이 왔네.”
준원이 배시시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준원의 이마 가장자리엔 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재강은 말없이 준원의 미소 띤 얼굴을 내려다봤다.
준원은 얼굴이 작고 눈, 코, 입은 큼직큼직해 늘 표정이 화사하고 다이내믹해 보였다.
살짝 웃어도 활짝 웃는 듯 보이고, 조금 찡그리면 거세게 분노한 듯 보였다.
그 표정 덕인지, 준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그로부터 적극적인 공감과 반응, 관심을 받는 듯 느껴졌다.
준원 역시 자기 외모의 힘을 알고 그걸 이용하며,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호감을 끌어내 이득을 취했다.
재강은 그런 걸 알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하고 오는 거야?”
준원이 손을 뻗어 재강의 등을 살며시 문지르며 물었다. 재강의 티셔츠는 땀 때문에 조금 축축했다.
“응.”
“요새는 무슨 일 해?”
“떡집에서 일해.”
“떡 많이 먹겠네.”
“호주는 어땠어?”
“재밌었어. 지루했고.”
준원이 작년 여름 재강을 떠났던 건 워킹 홀리데이 때문이었다.
늘 그랬듯, 잘 있다가 갑자기 워킹 홀리데이에 꽂혀 일사천리로 준비를 하더니 호주로 떠났다.
그 준비 과정에서 드는 비용은 모두 재강이 지불했다.
돈이 많은 준원의 부모가 외아들인 준원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데도, 준원은 재강의 곁에 있으면 재강의 도움을 받았다.
어딜 가나, 준원은 애인과 친구들의 후한 도움을 받곤 했다.
재강 역시 준원이 흥미를 갖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비용을 대주었다.
차비를 내주고, 필요한 물건도 사 주고, 밴드 연습실 비용을 대기도 했다.
준원은 아무렇지 않게 재강의 호의를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보답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떠날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준원이 호주로 떠나면서 핸드폰도 정지해 버려 재강은 준원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다.
이메일 주소를 알고 있긴 하지만 보내 봤자 준원이 읽지도 않으리란 걸 알아 보내지 않았다.
재강은 그저 준원이 떠나면 늘 그랬듯, 지도 앱을 켜서 준원이 있을 곳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고, 이번엔 호주였다.
준원이 그 지도 속에 나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이 되어버린 행동이었다.
재강은 그렇게 하면서 준원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언제 귀국한 거야?”
“지난주에.”
지난주에 들어와 놓고 내 앞엔 왜 이제야 나타났는데?
재강은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럼 어디서 지냈어?”
“부모님 댁에서.”
“한국에 아주 온 거야?”
“응.”
이제 준원은 또 얼마간은 재강의 집에서 지낼 터였다. 그것이 수순이었다.
언제 다시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겨 떠나 버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만난 호주 놈들은 오랄을 영 못 하더라.”
준원이 킥킥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워 한 팔로 재강의 배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섹스는 나쁘지 않았어.”
“…….”
재강의 골반을 만지작거리던 준원의 손이 허리와 배를 거쳐 가슴으로 올라왔다.
재강은 가만히 앉아 평상 가장자리를 꾹 쥐었다.
“같이 씻을까?”
준원이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며 물었다.
재강은 미소 띤 준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자그마한 욕실에 들어가 함께 샤워했다.
샤워하는 동안 재강은 준원의 몸과 얼굴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고 빨았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와서 재강이 눕고 준원은 그 위에 등을 보인 채 올라앉았다.
준원이 재강과 섹스할 때 가장 선호하는 체위였다.
준원은 그렇게 앉아서 재강의 성기를 몸 안에 넣은 채 느릿느릿 골반을 움직였다.
재강은 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등과 허리,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노란 빛이 준원의 몸 위에 베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재강의 배와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쭉 뻗고 있는 다리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였다.
준원은 자신의 것을 문지르며 재강의 위에서 계속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고 빙글빙글 돌려대기도 했다.
“……강아.”
“응.”
“나 보고 싶었지?”
“……보고 싶었어.”
“역시 너밖에 없다.”
준원이 숨찬 신음 사이로 낮게 웃었다.
재강은 준원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 * *
준원은 재강의 옥탑방에서 함께 지내며 호주에서 사귄 친구, 섹스 파트너, 애인 이야기와 농장을 떠돌며 일했던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재강의 집엔 늘 준원의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새로 살 필요도 없었다.
준원은 그저 늘 옷장 한구석에 있는 자신의 옷을 자연스럽게 꺼내 입으면 되었다.
준원을 위한 새 칫솔도 늘 준비되어 있었다.
준원은 한동안 편의점에 가는 정도 외엔 집밖에 나가지도 않고 작은 옥탑방과 옥상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고, 작은 욕실에서 샤워하고, 노을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아래에서 섹스했다.
재강은 섹스 후 바로 곯아떨어지는 준원의 몸을 등 뒤에서부터 꼭 안고 있다가 잠들었다.
평소엔 쉽게 잠들지 못하고 도중에 자꾸 자다 깨곤 했지만, 준원과 함께 자면 늘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러다 준원이 언제 갑자기 떠날지 알 수 없어 종종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준원이 곁에 있으면 잠이 잘 왔다.
얼마간 재강과 함께 지내는 것 외엔 아무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 듯하던 준원은 어느 날 갑자기 선언했다.
“캥거루가 나오는 웹툰을 그려 볼까 생각 중이야.”
이번엔 웹툰이군.
재강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 준원에게 노트북과 액정태블릿 따위를 사다 주었다.
준원은 한동안 웹툰을 그려 올리더니 한 출판사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며 계약 문제로 바빠졌다.
뭔가 진지한 얘기가 오가는가 싶었는데, 준원은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며 계약도 하지 않고 웹툰도 그만두었다.
재강은 준원이 이제 손도 대지 않는 노트북과 도구들을 상자에 넣어 한쪽에 치워두었다.
재강의 집 한구석엔 그런 물건들이 담긴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강아, 제주도 놀러 가자.”
준원은 ‘밥 먹자’라고 하는 투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언제?”
“내일 아침이나 모레?”
“얼마나?”
“2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
재강은 그날 떡집에 출근하자마자 사정이 생겨 그만둬야겠다는 얘길 했다.
사장과 어렵사리 논의한 끝에 이틀 더 일하고 그만둔 후 준원과 함께 제주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예정을 훌쩍 넘겨 거의 한 달간 이어졌고, 물론 돈은 모두 재강이 냈다.
일산으로 돌아온 후 재강은 서둘러 새 일자리를 찾았다.
준원의 기분에 따라 언제 갑자기 함께 여행을 가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재강은 아르바이트도 그에 맞춰 구했다.
아주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대체 인력이 금세 채워질 수 있어 갑자기 그만둬도 큰 부담이 없는 종류의 아르바이트.
이번엔 ‘명선 가든’의 숯불 장치 아르바이트와 사우나 청소 아르바이트였다.
또다시 무료하게 지내는가 싶던 준원은 어느 날 쪽지 한 장만 달랑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렸다.
[목수 일을 배워 볼 거야. 친구가 제천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딱 내가 만들고 싶은 스타일의 옷장을 만든대. 잘 지내. 안녕.]
재강은 사우나 청소 후 새벽에 퇴근해 돌아와서 현관문에 붙어 있던 그 쪽지를 발견했다.
재강의 손엔 수박이 들려 있었다. 그날 오후에 준원이 출근하던 재강에게 수박을 사 오라고 부탁해 산 것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수박을 사 오라고 했던 준원은 그런 식으로 사라져 버렸다.
“…….”
재강은 수박을 안은 채 서서 쪽지를 여러 번 읽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오자 재강은 전화를 끊고 수박을 옥상 바닥에 집어 던졌다.
퍽, 소리가 나며 수박이 산산이 조각났다.
재강은 어깨와 가슴을 들썩이고 씨근거리며 한참 동안 그 잔해를 노려보다가 곧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가져와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수박 조각들을 쓰레기봉투에 나눠 담으니 여러 개 나왔다. 재강은 그 봉투들을 내려다봤다.
준원 때문에 조각조각 부서져 버린, 수없이 부서졌다가 다시 붙고 또 부서지길 반복한 자신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듯했다.
이번엔 얼마 만에 돌아올까.
재강은 평상에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이제 또 불면의 밤이 시작될 것이었다.
* * *
준원이 떠나버린 다음 날, 그렇게 반쯤 신경이 곤두서고 반쯤 풀이 죽은 채 가든에서 일하던 재강은 문득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나 카운터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신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넘겼는데, 무시하면 할수록 더 노골적으로 되는 듯했다.
알고 보니 사장 부부의 막내아들 ‘명선’이었고, 꽤 애지중지 사랑을 받는 모양이었다. 가든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지을 정도이니.
적당히 풍족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라 아무 어려움도 모를 듯한 그 해맑은 얼굴과 태도부터 일단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렇게 자신을 훔쳐보기까지 하니 더 기분이 나빴다.
적당히 넘어가 주려던 재강은 다음 날에도 명선이 카운터에 떡하니 앉아 쳐다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준원 때문에 심란한 때이기도 했다.
퇴근 중 명선과 모퉁이에서 마주쳤던 재강은 불쑥 솟는 화를 가라앉히며 제 갈 길 가려다 결국 다시 돌아서서 명선에게 다가갔다.
“그만 좀 쳐다봐, 이 씨발 새끼야.”
그 후 재강은 명선과 이상하게 얽혀 버리고 말았다.
* * *
왠지 모르게 명선은 재강을 남창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혼자 설레발을 치고 알짱댔다.
처음엔 이게 대체 뭔가 싶었지만, 별로 길게 말 섞고 싶지도 않아 무시했다.
그러다 어쨌든 돈이 들어온다는데 딱히 손해 볼 게 있나 싶어 섹스하자는 제안을 수락했다.
재강이 이제껏 섹스해 본 사람은 준원 하나였는데, 계속 들이대는 명선을 보고 있자니 자기도 다른 남자랑 섹스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도 했다.
준원을 향한 반발심과 자포자기하는 심정도 섞여 있었다.
어쩌다 보니 일이 꼬여 모텔에 가서 다 벗고도 서로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헤어졌지만, 명선은 여전히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훌쩍 제천으로 떠났던 준원이 갑자기 돌아온 건 그 날이었다.
명선이 아침부터 나타나 의기양양하게 예약금 3만 원을 내민 날.
가든 영업이 거의 끝나 한산해진 무렵, 숯불 방을 정리하던 재강에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강아.
“…….”
-나 너희 집에 왔는데, 현관문이 안 잠겨 있네.
준원은 놀랍게도, 떠난 지 거의 보름 만에 돌아왔다.
“……그래?”
-도둑 든 것 같진 않고, 혹시 일부러 안 잠근 건가 해서. 어디야? 근처야?
“일하는 중이야.”
재강은 준원의 목소리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와중에 집을 나설 때를 떠올려 봤지만, 매일 무의식중에 하는 일이니 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기억날 리가 없었다.
도둑이 든다 해도 딱히 가져갈 물건도 없었다. 준원의 노트북이나 일렉 기타 같은 물건들 정도일까.
-요즘은 무슨 일 해?
“똑같아. 가든이랑 사우나.”
-늦겠구나. 알았어.
“원아.”
-응?
“아주 온 거야?”
-응.
“그래.”
결국 재강은 저녁 식사 후 명선을 숯불 방으로 불러내 예약금 3만 원을 돌려줬다.
준원이 돌아왔으니 아르바이트 외의 시간은 당연히 준원과 함께 보내야 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퇴근해 사우나에 가서 청소한 재강은 오래전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자기 대신 2주일 정도만 사우나 청소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후 휴가를 냈다.
준원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종일이라도 준원의 곁에 붙어 있고 싶었지만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번엔, 또 얼마나 머물까.
체념 비슷한 것을 하면서도 재강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옥상에 들어서자 평상에 앉은 준원이 보였다. 예전처럼.
“잘 있었지?”
준원이 앉은 채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물었다.
재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준원에게로 가 그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제천은 어땠어?”
“그냥 그랬어.”
“이번엔…… 금방 왔네.”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야 돼.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갈 거야.”
준원은 망아지처럼 그렇게 멋대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1년에 한두 차례 정도는 부모님 집에 들어가 얼마간 함께 지내며 그들을 달래곤 했다.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에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대답을 하고, 그럼 결혼이라도 하라는 말에 역시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대답을 했다.
부모와 함께 있는 동안은 계속 그런 말싸움의 반복이었지만, 어쨌든 준원은 정기적으로 그런 ‘도리’를 하며 부모라는 자금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게끔 관리를 했다.
“강아, 우리 결혼할까?”
재강은 멈칫했다가 준원을 내려다봤다. 준원이 고개를 들어 재강을 마주 봤다.
재강은 준원의 큼직한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내려갔다 올라가길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야?”
“결혼. 반지 주고받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신혼여행도 가고.”
“…….”
“정착하고 싶어졌어.”
“…….”
“너는 정착하기에 좋은 사람이고.”
준원이 살짝 웃더니 재강의 배에 얼굴을 파묻고 느릿느릿 비볐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그러면서도 재강은 생각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럼, 계속 나랑 같이 있겠다고?”
“결혼하면 그래야겠지.”
“…….”
난 너 안 믿어, 이준원.
재강은 말없이 준원의 머리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준원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는 사실은 믿었지만, 준원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란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재강은 문득 가슴이 희망으로 부푸는 듯했다.
“결혼하자, 재강아.”
준원이 재강의 허리를 꽉 안으며 말했다.
“집은 좀 큰 곳으로 옮기고 고양이도 한 마리 입양하자. 그림 사서 벽에 걸어 놓고. 주말 밤엔 공원 산책하고, 아침엔 조조로 영화도 보고.”
“…….”
“그렇게 살면 재밌을 거야.”
재강이 준원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가 놓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래.”
“그럼 가서 부모님한테도 얘기해야지.”
“……뭐?”
재강이 몸을 살짝 떼고 준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들이 결혼할 거라는데 부모님은 아셔야지.”
“커밍아웃이랑 그런 얘길 동시에 하겠다고?”
“그냥 결혼한다고만 얘기하면 되지, 상대가 남자란 얘기까지 굳이 할 필요가 있나?”
“…….”
“암튼, 내일 집에 가서 얘기하고 밤에 다시 여기로 올게. 어차피 그 얘기 하면 누구냐고 귀찮게 굴 거 뻔하고.”
준원은 무심히 얘기하고는 일어서서 재강의 손목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재강은 은근하게 솟아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준원의 뒤를 따랐다.
* * *
아침 느지막이 눈을 떴을 때 곁에 준원은 없었다.
재강은 눈을 깜박이며 작은 방 안을 훑어보다가 일어나 앉았다.
“……원아.”
입을 여는 순간 머리맡 창문에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갔다 올게. 행운을 빌어 줘. 이따 낮에 통화하자.]
멍하니 앉아 준원의 글씨를 올려다보던 재강은 곧 방 안을 정리했다.
지난밤 솟아올랐다 살짝 파묻혔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말처럼 쉽게 흘러가진 않으리란 예감.
그리고 그런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재강이 점심때쯤 한 번, 가든에 출근해서 한 번, 전화를 걸었는데 준원은 받지 않았다. 재강이 남긴 문자도 몇 시간째 읽지 않았다.
심란한 와중에도 명선은 끊임없이 재강을 찾아와서 알짱거리고 지분거렸다.
정말로, 불판 세척기에 그 꼴 보기 싫은 얼굴을 처박고 물이라도 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정식이 부침개를 들고 나타나는 바람에 어쨌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부모가 쎄빠지게 일해 번 돈 받아다가 섹스하는 곳에나 쓰겠다고 설쳐대는 쓸모없는 새끼.
재강은 속으로 명선을 향한 욕을 내뱉으며 저녁 장사 개시 준비를 했다.
개시하고 나선 정신없이 일하면서도 준원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는지 틈틈이 확인했다.
[역시 커밍아웃도 결혼 얘기도 다 용납을 못하고 노발대발ㅋ 쫓겨나든지 감금되든지 둘 중 하난데 일단 이따 전화할게]
저녁 8시쯤 도착한 준원의 문자를 읽고 나자 재강은 더 애가 탔다.
틈을 타 전화를 걸었지만 준원은 받지 않았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받아 이준원]
불쑥 화가 치민 재강은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숯불 방 구석에 처박아 놓은 채 일했다.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아 그저 소주만 몇 잔 더 마시고 싶을 뿐이었지만, 직원들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숯불 방으로 돌아와 남은 뒷정리를 다 마친 후에야 핸드폰을 켰는데 준원은 그 문자마저도 읽지 않은 상태였다.
재강은 기운이 쭉 빠진 채 서 있다가 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차례 걸었고, 준원은 세 차례 모두 받지 않았다.
“숯불, 우냐?”
또 명선이었다. 어김없이 나타나 다시 신경을 긁어댔다.
“3만 원 도로 가져왔어.”
저놈의 3만 원 타령.
재강은 그 3만 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눈을 들어 명선을 바라봤다.
이 새낀 어떻게 이렇게나 올곧게 끈질길 수가 있을까. 아무리 내 몸이 자기 타입이라고 해도.
내 몸이 뭐 그렇게 특별히 다른 것도 아니고, 몸의 어디가 타입이라는 건지도 도무지 모르겠고.
“최대한 네 사정에 맞춰 줄게. 네가 날을 골라.”
“…….”
준원은 단 한 번도, 재강의 사정에 맞춰서 뭔가를 한 적이 없었다.
준원과 재강의 관계는 늘 재강이 준원의 사정에 맞추는 구도였다.
이제까지의 상황과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태에서 재강은 충동적으로, 다시 명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넌 내 거잖아, 김재강.
어릴 때 준원이 했던 말.
난 네 거지.
재강도 동의하고 철석같이 믿던 말이었다.
학창 시절엔 ‘이준원의 개’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준원에게 충성하며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주었고, 성인이 된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몸과 마음을 맡겼다.
재강이 마음을 준 사람은 준원 하나뿐이고, 섹스한 사람도 준원 하나뿐이었다.
다른 남자에게 흥미나 매력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감정을 진지하게 여기거나 키워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준원과 함께 있을 땐 준원에게 집중했고, 준원이 떠나 있을 땐 그가 언제든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역시나 준원에게 집중했다.
그런 재강에게 명선과의 섹스는 27년 인생을 통틀어 꽤 큰 사건이었다.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고, 부끄럽기도 했다. 꼭 처음으로 섹스한 것만 같았다.
차마 그 앞에서 사정까지 가고 싶진 않아 재강은 명선의 사정 후 욕실에 들어와 준원을 떠올리며 자위하듯 해 끝을 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아서, 재강은 조금 의아했다.
왜일까.
재강은 연꽃 모텔에서 나오며 생각했다.
준원에게 죄를 짓거나 준원을 배신한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준원과 자신이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김재강은 이준원의 것이라는 합의가 둘 사이에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죄책감이라기보다는, 기이한 조마조마함 같은 것이 있었다.
먹지 말라는 간식을 몰래 먹고 나서 부모님에게 들켜 혼날까 봐 조마조마한 아이의 심정 같은.
우습게도 그런 감정이었다.
걘 내가 뭘 먹든 말든 관심도 없을 텐데.
재강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명선이 자신을 여전히 이성애자 남창으로 여기며 사업에 관한 조언까지 하던 꼴을 떠올리고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너 다른 고객들한테도 이렇게 박하게 구냐? 아니면 그냥 내가 첫 남자라 이러는 거야?
사실 인생의 기본값처럼 느껴지는 준원을 제외한다면, 명선이 자신의 첫 남자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몸을 만진 사람도, 명선이 처음이었다.
준원은 애무하는 것보다는 받는 걸 좋아했다. 둘이 섹스할 땐 늘 재강이 준원의 몸을 열심히 애무하고 빠는 쪽이었다.
준원이 재강의 성기를 오럴해 준 적도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재강의 가슴을 명선이 주물러 댔을 땐, 분명 익숙지 않고 뭔가 잘못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미치게 좋기도 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그래서 명선이 더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섹스할 때 조용한 편인 준원과 달리 명선은 발작적이고 시끄러웠다.
명선은 너무나, 새로웠다.
어떤 섹스가 더 좋으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번에 대답할 수 없었다.
준원과의 섹스는 밥 먹듯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었고, 명선과의 섹스는 혼란투성이였다.
그 혼란 속에서 억제된 흥분이 부글부글 끓는 듯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명선은 비열하고 불쾌한 구석이 있었다.
오전엔 그렇게나 흥분하게 만들어 놓고 몇 시간 만에 그런 식의 인상을 준다는 것도 놀랍긴 했다.
명선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날 내내 재강은 명선이 만들어낸 혼란에 더해 준원을 목 빼고 기다리는 마음까지, 이래저래 분주했다.
준원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도 문자를 확인하지도 않다가 재강이 가든을 퇴근할 때에서야 전화를 받았다.
-어, 강아.
아무렇지 않은 준원의 목소리에 불쑥 소리라도 치고 싶었던 재강은 자전거 핸들을 꽉 움켜잡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딘데.”
-나 지금 통영.
“통영…… 아니, 뭘 하게. 이번엔 뭘 하려고.”
자전거 핸들을 잡은 재강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미 준원이 결혼이고 뭐고, 자신이 뱉은 말은 다 뒷전에 두고 또 다른 뭔가에 금세 꽂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 타보고 싶어서. 고깃배.
“또 왜 그래. 이런 거 안 하기로 했잖아. 며칠 전에 우리 그런 대화 하지 않았어? 기억 안 나?”
-아…… 좀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지. 이 나이에 벌써 무슨 정착이야. 우리 부모님도 비웃더라.
핸드폰 너머에서 준원이 킬킬 웃었다.
-좀 싸우다 그냥 나왔어. 답답해서 바다 보러 왔는데 좋아 보이네. 배 타고 몇 달 나가 있을 거야. 돈도 벌고, 생선도 먹고.
또 뜬구름 잡는 소리.
재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데리러 갈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원아, 내가 데리러 갈게. 그냥 어디 들어가서 위치만 알려 줘, 지금 갈 테니까.”
-근데 너 사우나 청소하러 갈 시간 아니야? 거기 일은 어떡하려고.
“그 일은 어차피 이번 주 내내 쉰다고 했잖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모텔 같은 데 가 있을래? 아니면 피시방?”
-됐어. 오지 마.
“너 물건도 다 여기 있잖아. 입을 옷이라도 있어?”
-옷이야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사면 그만이고 빨아 입으면 되지.
“알았어. 그럼 물건만 전해 주는 거로 하자. 네 옷 좀 싸서 내가 갖다줄 테니까, 그러는 김에 얼굴이라도 좀 보자. 어? 얼굴 보고 얘기하자.”
사실 재강은 준원이 결혼해 집을 새로 얻고 고양이를 들이자느니 하는 얘기 같은 건 믿지도, 실현 가능성이 있다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말로 인해 어쩌면 준원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 상태였다.
어렵사리 한 번 생긴 기대감을 아무렇지 않게 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준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재강아, 그냥 하던 대로 해.
재강이 고개를 수그리고 얼굴을 문질렀다.
또 이런 식이지.
“이준원. 사람 미치게 하지 마라, 제발.”
-미치지 말고 잘 살아. 너는 괜찮을 거야. 나도 괜찮을 거고.
“…….”
-언젠가 또 보자. 안녕.
전화는 곧장 끊겼다.
재강은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바닥에 힘껏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