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4. 귀여워요
아주 작게, 규칙적으로 뭔가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명선이 눈을 떴다.
“…….”
멀찍이, 냉장고 옆 벽에 기대앉은 재강의 모습이 보였다.
재강은 반바지만 입은 차림 그대로, 앞쪽 어딘가를 멍하니 보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바스락대는 소리는 재강이 뭔가 씹는 소리였다.
명선은 눈만 끔뻑거리며 재강을 가만히 쳐다봤다.
소처럼 우물거리던 재강이 곁에 놓인 접시에서 뭔가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접시 위엔 초록색 물체가 담겨 있었다.
재강은 잠이 덜 깬 얼굴이었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치거나 눌린 채였다.
그 아래로는 완벽한 몸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잠이 잔뜩 묻은 그 얼굴과 엉망인 머리카락이 탄탄한 몸과 대비를 이루며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목엔 어젯밤 명선이 술김에 흥분해 남긴 키스 마크가 벌겋게 드러나 있기까지 했다.
귀엽네…….
명선은 무심코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가 표정을 굳히고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뭐가 귀여워?
“으으.”
명선이 낸 소리에 재강이 이쪽을 힐끗 쳐다봤다. 명선이 얼른 일어났다.
“아오, 악몽을 꿨네.”
재강은 시큰둥하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 계속 우물거렸다.
“뭐 먹어?”
명선이 일어나 재강에게 다가갔다.
접시에 놓인 초록색 물체는 스틱 모양으로 숭덩숭덩 잘린 오이였다.
“오이?”
명선이 그 앞에 털썩 앉자 재강이 접시를 명선 쪽으로 살짝 밀었다.
“먹고 싶으면 먹어.”
“이게 아침이야?”
“해장하는 거야.”
“오이로 해장을 해?”
명선이 오이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오이는 생각보다 더 상큼하고 달달했다.
“……나쁘지 않네.”
명선은 오이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얼마간 둘은 말없이 허공을 보며 오이를 집어 먹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오이만 한가득이었구나.”
접시가 비자 명선이 뒤로 팔을 뻗고 길게 앉으며 중얼거렸다.
재강은 팔짱을 끼고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명선은 집안을 휘휘 둘러봤다. 여전히 작고 휑했지만 밤에 봤을 때와는 또 달라 보였다.
“집 진짜 귀엽다. 내 방보다 조금 큰가? 아니 그 정도 되나? 은근히 아늑하고 좋은 것 같은데?”
“…….”
재강이 눈을 뜨고 명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혼자 살기에 딱 좋은 크기인 것 같긴 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
“나도 독립하고 싶었는데. 너 독립한 지 얼마나 됐어?”
“……7년 정도.”
“아, 그럼 스무 살 때쯤? 그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한 거네? 어때?”
“뭐가.”
“혼자 사는 거. 식구들이랑 사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더 편하긴 하겠지? 아무것도 신경 안 써도 되고.”
“굳이 독립할 필요 없으면 그냥 지금처럼 안전하게 살아. 독립할 능력도 없으면서 환상 갖지 말고.”
“아우, 저 꼰대.”
명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는 대화의 기술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얼마나 기술이 풍부하셔서 그런 지적을 하는지.”
“대화는 훈계가 아니라 공감으로 이루어지는 거야.”
“네가 지금 하는 건 훈계가 아니야?”
“이건 조언이고.”
“바라지도 않은 조언을 하면 그게 훈계지 뭐야.”
“오오 숯불, 의외로 똑똑한 구석이 있네?”
재강이 코웃음을 치고 일어나 침대 쪽으로 가더니 바닥에 깔려 있던 이불을 차곡차곡 접었다.
명선은 팔을 뒤로 쭈욱 뻗다가 그대로 드러누워 재강의 몸을 바라봤다.
재강은 접은 이불들을 모아 안고 명선의 머리맡을 지나 옷장 쪽으로 갔다.
“야, 같이 아침 먹으러 나갈래?”
명선이 물었다.
옷장 구석에 이불을 쑤셔 넣은 재강이 문을 닫고 돌아서서 명선을 쳐다봤다.
“……뭐?”
“제대로 된 음식으로 브런치 먹자. 드라이브도 하고.”
재강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드라이브 좋아하시네. 대낮부터 카섹스할 일 있냐?”
재강이 명선 쪽으로 다가와 바닥에 있던 빈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 틈을 타 명선이 두 다리로 재강의 몸을 턱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씨……!”
재강이 접시를 놓치며 비틀했다가 명선의 몸 위로 쓰러졌다.
명선은 얼른 재강의 몸을 끌어안고 두 다리로도 결박했다.
“모닝 바디 좀 충전해 볼까.”
“미친 새끼가!”
재강이 펄떡펄떡 몸부림치다 명선을 떼어내고 일어섰다.
명선은 재강에게 밀려 데구르르 굴러서 엎어졌다가 고개만 홱 쳐들고 재강을 쳐다봤다.
개처럼 헥헥대며 웃는 명선의 얼굴을 보고 재강이 치가 떨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너야말로 뭐가 문제야? 예쁜 몸 좀 예뻐해 주겠다는데 왜 그렇게 수줍어해?”
“누가 너한테 예쁨 받고 싶대?”
“키스할래?”
재강은 입을 꾹 다물고 명선을 내려다보다 접시를 다시 집어 들고 싱크대 쪽으로 갔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아, 싫음 말고. 혹시 마음 바뀌었나 해서 체크해 본 거야. 앞으로도 종종 체크할 테니까 마음 바뀌면 알려 줘.”
“역겨운 새끼.”
재강이 싱크대에 접시를 두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숯불, 어디 가?”
바닥에서 뒹굴뒹굴하던 명선이 외쳤지만 재강은 대답도 없었다.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자 명선은 일어나서 창 앞으로 가 옥상을 내다봤다.
재강은 과자 봉지와 소주병 등 어젯밤의 잔해들을 치우고 있었다.
이리저리 오가며 청소를 끝낸 재강은 옥상 벽을 따라 빼곡하게 늘어선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물을 주기도 했다.
화분 무리는 어젯밤 기억보다 훨씬 더 무성했다. 갖가지 풀과 꽃, 나무가 가득 모여 무슨 정글이라도 이룬 듯했다.
명선은 여름 아침 햇살 아래에 선 재강의 몸을 응시했다.
멀리서도 목에 있는 키스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어젯밤 재강의 몸 위에 앉아 풀썩풀썩 흔들리던 게 떠오르자 명선은 문득 뱃속이 간질거렸다.
엉덩이를 단단하게 잡고 있던 재강의 손. 성기를 꽉 쥐고 문지르던 손. 사정 후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도 하던 그 손.
그리고 자신의 정액이 흩어져 있던 그 완벽한 배와 가슴.
명선은 가만히 입맛을 다셨다.
오늘도 여기서 잘까…….
집이 어딘지 확실하게 알게 됐으니까 이젠 언제든 올 수 있잖아. 쟤가 쫓아내지 않는 이상.
뭐, 어제도 얌전히 내버려 두고 섹스도 하고 재워 주기까지 한 거 보면, 은근히 내가 온 게 반가웠던 것 같기도 해.
같이 살던 애인이 도망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외롭긴 하겠지.
근데 이 좁아터진 집에서 둘이 어떻게 살았지? 집이 좁아서 도망갔나?
애인은 어떤 타입? 둘이 몇 년이나 같이 살았으려나?
명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재강은 정리를 끝내고 집 안으로 들어와 욕실로 들어갔다.
명선은 욕실 문가에 서서 거울 속 재강을 바라봤다.
“브런치 먹으러 가자, 숯불.”
“뭔 브런치.”
재강이 손을 씻으며 거울로 명선을 쳐다봤다.
“오이로 배도 안 차잖아. 배가 찰 만한 걸 먹자고. 괜찮은 데 있어. 내가 살게.”
재강은 물끄러미 명선을 바라보다 세면대로 시선을 내렸다.
“먹고 드라이브도 하자. 지난번처럼 딴 길로 안 새고 곱게 여기로 데려다줄게.”
재강은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명선은 구부린 채인 재강의 등을 바라보며 그곳을 핥고 싶은 충동을 잠재웠다.
“씻어, 나가려면.”
세수를 마친 재강이 칫솔을 꺼내 들며 세면대 쪽으로 손짓했다.
명선은 신난 얼굴로 얼른 달려들어 세수했다.
“이게 뭐야.”
재강이 갑자기 으르렁거렸다.
명선이 올려다보니 재강은 눈을 부릅뜨고 거울 속 자신의 목을 노려보는 채였다.
“아아, 뜨거운 밤이었다. 그치?”
명선은 세면대 위로 몸을 구부린 채 물을 뚝뚝 흘리며 생글거렸다.
속으론 재강이 같이 나가기로 한 걸 취소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중이었다.
“우리 둘 다 좀 취했었잖냐.”
“…….”
곧 재강의 시선이 명선의 얼굴에 꽂혔다.
“너도 내 목에 만들어서 복수할래?”
명선이 계속 생글거리며 자기 목을 가리켰다.
“…….”
재강은 명선을 태워죽일 것처럼 노려보다가 주먹을 꼭 쥐더니 심호흡을 길게 했다.
얼마간 그러고 있다가 재강은 말없이 거칠게 이를 마저 닦기 시작했다.
“얼마든지 복수해도 돼.”
명선은 재강의 눈치를 보다 작게 말하고 다시 세수했다.
* * *
“어휴, 주차할 데를 못 찾아서 어제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몰라.”
명선이 운전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곱게 자기 집으로 갔으면 편하게 주차했겠지.”
재강이 조수석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그 목엔 큼직한 밴드가 붙은 채였다.
“그 대신 예쁜 몸이랑 섹스했잖아. 난 후회 안 해. 주차 좀 힘들게 하는 게 뭐 대순가?”
“…….”
“매일이 어젯밤 같으면 난 매일 주차할 자리 찾으면서 뺑글뺑글 돌아도 상관없다.”
재강은 시동을 걸며 싱글대는 명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티셔츠 가슴 부분을 잡아 펄럭였다. 차 안은 찜통이었다.
“덥지? 뭐 시원한 거 사서 가는 동안 마실래?”
명선이 에어컨을 틀고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 주차된 자리를 벗어나며 물었다.
“아니.”
재강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보는 채였다.
차를 잠시 세운 명선이 재강 쪽으로 몸을 훅 숙이자 재강이 펄쩍 뛰었다.
“뭐.”
“안전벨트 매시라구요.”
명선이 능글능글 웃으며 안전벨트를 빼 채워 주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걸까. 나는 승객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재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럽게 느물거려.”
명선은 킥킥 웃으며 운전해 골목을 빠져나갔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 아니지, 또 그런다. 권명선. 귀엽단 말 좀 그만할래?
……아냐. 그만해야 할 건 또 뭐야.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는데 뭐가 잘못됐어?
인터넷에서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보면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오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야.
그래. 귀여우면 마음껏 귀여워해야지. 굳이 자제할 필요 없어.
이제 마음껏 귀여워해 주자. 어차피 오래 갈 사이인데 귀여워해서 나쁠 게 뭐 있어?
아까 오이 먹고 있을 때 진짜 귀여웠다니까.
맞아. 그때 모텔에서 처음 같이 잔 날 아침에도 진짜 귀여웠고.
머리는 다 뻗쳐 가지고.
귀여워.
명선이 후후 웃자 재강이 명선을 힐끗 쳐다봤다.
명선은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 어젯밤 생각하니까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변태 새끼.”
“야, 근데 그거 아냐? 나 원래 존나 강탑이었어. 너랑 자 보려고 바텀 된 거야. 영광이지?”
“…….”
“네가 내 첫 탑은 아니지만 어쨌든 영광스러워할 만한 일이긴 하다는 거다. 나같이 잘나가던 탑을.”
“…….”
“바텀 처음 했을 땐 아무 느낌도 안 와서 난 진짜 내 전립선이 똥인 줄 알았다니까. 근데 너랑 했을 때 엄청 느꼈잖아. 알고 보니까 그 사람 좆이 똥좆이었던 거야.”
“…….”
“내가 엎드려 있고 그 사람이 뒤에서 박는데…….”
“내가 그런 걸 알 게 뭐야.”
재강이 찡그리고 손을 내저었다.
“아니, 재밌는 얘기 좀 들려주겠다는데.”
“좆도 관심 없으니까 추억은 혼자 간직해라.”
“재밌는 얘기 놓치면 자기만 손해지, 뭐.”
명선이 입을 비죽거리며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둘은 잠시 말없이 차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넌 섹스에 목숨 걸었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거야?”
재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꿈에 그리던 몸이랑 잘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목숨 안 걸게 생겼어? 넌 안 할 거야?”
“널리고 널린 게 몸인데 뭔 잡소리야. 아무하고나 대충하면 되는 거지.”
“널리고 널렸다니. 이 몸이 널리고 널렸다고? 내가 몇 년을 찾아 헤매던 몸인데?”
명선이 말하며 재강의 가슴 쪽으로 손을 뻗자 재강이 얼른 쳐냈다.
명선은 킥킥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네 기준이 어떤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런 몸은 많아.”
“야, 내가 어떤 인간이냐면 한겨울에 옷 껴입고 지나가는 사람 보면서도 체형 견적을 바로바로 낼 수 있는 인간이거든? 근데 이런 몸이 절대 흔치 않아. 네 몸은 100퍼센트 완벽한 몸이야. 진짜 예뻐.”
재강은 팔짱을 낀 채 얼마간 앞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변태 같아.”
“너랑 계속 할 수 있으면 변태여도 좋아. 변태하지 뭐.”
재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늘도 같이 루프탑 바에서 좀 놀아 볼까? 오늘은 맥주 어때?”
“…….”
재강은 말없이 앞만 보는 채였다.
명선은 그런 재강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호오? 평소 같으면 말 나오자마자 바로 ‘싫어’나 ‘됐어’라고 했을 텐데.
역시 나랑 논 게 재밌었던 거야.
재미없을 수가 없지. 애인도 떠나가고 칙칙한 방에 나 같은 빛돌이가 강림한 건데.
“소주 마셔도 상관없…… 아, 오늘 금요일이네. 우리 내일 쉬잖아. 야, 그러지 말고 양주 마실래? 내가 집에서 가져올게. 밤을 불태워보자.”
재강이 명선을 쳐다봤다.
“그거 너희 아버지 거라며.”
“아빠 거면 내 거도 되는 거지, 뭘.”
“철도 드럽게 없고, 하여튼.”
“아, 왜 또 꼰대질이야?”
“네 앞에선 꼰대질을 안 하기가 불가능해.”
“나이 먹은 것 좀 티 내지 마.”
재강이 팔짱을 더 단단히 끼며 차 문 구석 쪽으로 붙어 앉았다.
“말 걸지 마. 철없는 거 옮으니까.”
“지금 네가 더 애처럼 굴고 있거든?”
“벌써 너한테서 옮았나 보네, 씨발.”
“회춘한 거에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말 걸지 말라고.”
“맬 걜재 맬래걔.”
“아, 저 앞에 세워 봐.”
재강이 갑자기 몸을 세우고 앞쪽을 가리켰다.
“왜?”
명선이 얼떨결에 길가에 차를 세우자 재강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잠깐 있어.”
재강은 차 문을 닫고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명선은 재강이 들어간 곳을 기웃거리다가 룸미러를 보며 머리를 정돈하고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봤다.
아, 잘생긴 거 봐라. 며칠 동안 계속 환상적인 섹스를 했더니 피부에서 빛이 나네.
얼마 있다 차로 돌아온 재강이 명선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받아.”
“뭐야?”
명선이 봉투를 받아 안쪽을 들여다봤다. 5만 원짜리 몇 장과 만 원짜리 몇 장이 담겨 있었다.
“화대…… 아니, 뭐, 암튼, 네가 나한테 줬던 돈. 돌려준다고 했잖아. 총 46만 원.”
명선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주는 거야? 왜? 너 나 등쳐먹으려고 했잖아.”
“네 돈이면 등쳐먹었겠는데, 생각해 보니까 너희 부모님 돈이라 안 되겠다.”
“뭔 소리? 정당하게 받은 용돈에, 내가 일해서 번 돈도 합친 건데.”
“너희 부모님 식당에서 일한 거잖아, 새끼야.”
“뭐래? 그럼 네가 거기서 일해 받은 것도 우리 엄마 아빠 돈이냐?”
“너 나랑 자려고 거기서 일한 거잖아. 의도가 그따윈데 내가 그걸 편한 마음으로 갖고 있게 생겼어?”
“헐? 갑자기 착하고 좋은 사람인 척?”
“출발이나 해. 길 막고 있지 말고.”
명선은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봉투에서 꺼낸 돈을 지갑에 잘 넣고 차를 출발시켰다.
“브런치는 이 돈으로 먹으면 되겠다. 꽁돈 생긴 기분이네.”
금세 기분이 좋아져 흥얼거리는 명선 곁에서 재강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 * *
“뭔, 밥 하나 먹겠다고 서울까지 오는지.”
재강이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명선이 메뉴를 들고 와 그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에 서울 구경도 하고 좋지 뭘 그래. 안 그러니, 시골 쥐야?”
재강은 말없이 턱을 괸 채 메뉴를 내려다봤다.
“메뉴들이 생소하지? 설명 좀 해줄까, 시골 쥐야? 너 베이컨이 뭔지 알아?”
“…….”
피곤한 표정의 재강이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댔다.
“네가 알아서 시켜. 서울 쥐새끼야.”
명선은 키득키득 웃으며 카운터로 가 주문했다.
“핸드폰은 고쳤어?”
자리로 돌아와 명선이 묻자 재강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으. 어떻게 사냐. 불편하지 않아? 왜 수리 안 해?”
“시간이 없었어.”
“나 같으면 심심해서 미쳤을 텐데. 친구들이 답답하다고 안 해? 아, 너 친구 없지, 참.”
재강은 한심하다는 미소를 지어 주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곧 둘의 앞에 아이스커피 두 잔이 놓였다.
“넌 가든 출근하기 전에 뭐 해, 그럼?”
명선이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물었다.
“쉬어. 일 있으면 하고.”
“아, 그 동네 사람들 잡일 해준다는 거?”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뭘 하는 거야?”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형광등 갈고 싱크대 고치고 집까지 무거운 물건 날라 주거나 뭐 사다 주거나 대리운전도 하고…… 그런 거.”
“아, 심부름 앱 같은 데서 하는 그런 거구나.”
“그래. 나는 그걸 그냥 동네 주민들 한정으로 하는 거고.”
“그거 하고, 가든 와서 일하고, 또 다른 일도 한다며.”
“사우나 청소.”
“우워…….”
명선이 감탄하는 얼굴로 재강을 바라봤다.
“몸이 남아나냐?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겠는데.”
재강은 시큰둥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그게 진짜 노가다로 나오는 근육이었구나.”
명선이 중얼거리며 재강의 몸을 살폈다.
“넌 뭐 하는데, 그럼.”
“가든 출근하기 전에?”
“응.”
“그냥 뭐…… 일어나서 밥 먹고, 친구한테 가서 좀 놀기도 하고. 일산에서 옷가게 하는 친구 있거든. 내 베프.”
“혹시 너랑 전에 가든 같이 왔던?”
“어, 기억하네?”
재강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걔가 인상적이었어? 나보단 별로였을 텐데?”
재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보다 별론지 아닌지 내가 알 게 뭐야?”
“무의식중에 순위가 매겨지지 않냐? 난 그렇던데.”
“난 안 그래.”
명선이 킥킥 웃었다.
“야, 근데 그때 걔 왜 왔는지 알아? 너 보여 주려고 내가 데려온 거야.”
“……뭐?”
“나는 네 몸 보자마자 반해가지고 존나 하고 싶어서 쩔쩔맸거든. 근데 헤테로인지 게인지 바인지 감도 안 잡히고. 내가 또 유난히 게이다가 후져. 근데 걔는 나보단 잘 본단 말이지? 그래서 한번 감별 좀 해달라고 고기까지 먹이면서 거기 앉혀둔 거야.”
“…….”
명선이 신나서 떠들어대는 동안 재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걔도 한참 보다가 헤테로라고 하더라고. 나도 너 진성 헤테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완전 실망하고…… 아, 그러다 그날 너랑 애덕 씨 대화 듣고 너를 남창으로 착각한 거네.”
“…….”
“솔직히 누구한테 돈 주고 자자고 하는 게 쉽진 않았는데, 그래도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어쨌든 돈을 주면 너랑 잘 수는 있는 거였잖아. 와, 그때 진짜…….”
서버가 다가와 둘 앞에 접시를 내려놓는 동안 명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재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 그대로 멍하니 명선을 바라보다가 접시 위로 시선을 내렸다.
“용돈도 거의 떨어졌을 때라 내가 그 친구한테서 모텔비까지 따로 빌려뒀다는 거 아니냐.”
서버가 떠나자 명선이 이어 말하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너한테 3만 원 뜯기고, 인천까지 가서 첫 바텀 경험도 하고, 진짜 파란만장했다…… 아, 그건 에그 베네딕트라는 거야. 포크로…….”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네 거나 신경 써, 서울 쥐새끼야.”
재강이 포크로 수란을 푹 찍어 으깼다.
“자립심 있는 시골 쥐였네.”
명선은 과장된 필살기 미소를 날려 주고 자신의 접시 위 수란을 포크로 톡톡 두들겼다.
“맛이 어때? 입에 맞아?”
“아직 먹지도 않았어.”
“아, 여기 팬케이크도 진짜 맛있는데. 다음에 오면 그거 먹자. 그거 하나 이거 하나 시켜서 나눠 먹을 걸 그랬나?”
명선은 재강이 입 안에 음식을 넣는 걸 지켜봤다.
“맛있지?”
“어휴, 드럽게 보채네…….”
재강이 중얼거리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 땡기지 않냐? 맥주 한잔할래?”
“됐어.”
“아, 운전 땜에 못 마시네.”
명선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다 포크 끝으로 재강을 가리켰다.
“너 대리운전도 한다며, 참.”
“…….”
“대리 좀 해줄래? 얼마씩 받아?”
재강은 명선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냥 내가 운전할 테니까 마시고 싶으면 마셔라.”
“너 오늘 좀 친절하다?”
“운전대 잡고 또 딴 길로 샐까 봐 그런다.”
“그러셨어요.”
으이그, 츤데레 새끼. 또 귀엽게 굴고 있다.
명선은 신나서 맥주를 주문했다.
둘은 얼마간 말없이 먹고 마셨다.
평일 늦은 아침, 풀과 꽃이 가득한 카페는 한산했고, 해가 내리쬐는 바깥과 달리 시원하고 쾌적했다.
“아, 좋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 명선이 맥주를 마시고 나직이 말했다.
재강의 접시와 커피잔도 빈 채였다.
“일하는 시간 때문에 저녁때 못 노는 게 좀 억울했는데, 남들 다 직장에 있을 때 이런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름 좋은 것 같네.”
“한량 짓 하고 살던 게 뭔 소리야.”
“또, 또, 꼰대질.”
“다 먹었으면 가자, 이제.”
“아, 소화 좀 시키고.”
“그걸 꼭 여기서 시켜야 돼?”
“릴랙스 좀 하라고요, 아저씨. 뭐가 그렇게 바빠?”
재강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길게 기대앉았다.
명선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열두 시도 안 됐네. 출근하려면 한참 남았구만. 이 근처에 괜찮은 모텔 있는데 갈래?”
창밖을 보고 있던 재강이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깜박이다 명선을 쳐다봤다.
“……뭐?”
역시 기습 공격에 대한 반응이 쏠쏠한 놈이야.
명선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재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방에 거울이 붙은 모텔이 있거든.”
“…….”
“너랑 거기 가보고 싶어.”
재강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명선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얘 봐라?
수줍어하는 거야?
명선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으며 턱을 괴는 척,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웬일이야.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 목에 밴드까지 붙이고 있으니까 더 귀여워.
아, 존나 깨물어 주고 싶네.
명선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포효를 내질렀다.
지금 모텔 꼭 가야 되겠다. 이건 정말…… 지금 이 감정을 가지고 점잖게 드라이브 같은 거나 하다가 얌전히 헤어질 수는 없다고.
내가 이건 진짜 꼭 성사시킨다.
명선은 마음을 굳게 먹고 표정을 말끔히 정리하며 얼굴을 가린 손을 스르르 치웠다.
재강은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창밖을 보는 채였다.
“우리, 거기서 한 시간만 있다 갈래?”
명선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어내 물었다.
재강은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명선을 쳐다봤다.
명선은 표정도 최대한 부드럽고 유순하게 꾸며냈다.
“딱 한 시간만. 진짜야.”
“어제도 했잖아.”
“더 오래 있자고 안 할게.”
“넌 왜 이렇게…….”
재강은 말을 끊고 입을 다물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명선은 몸을 잔뜩 낮추고 재강 쪽으로 바싹 기울였다.
“그럼 그냥 방에 들어가서 너 벗은 몸만 보면 안 될까? 꼭 섹스 안 해도 돼. 보고 싶어서 그래. 너도 알잖아, 내가 네 몸 진짜 좋아하는 거.”
“…….”
“벗고 가만히 누워 있는 건 어때?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싹 핥아줄게.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밥도 먹었겠다, 피곤하면 그냥 낮잠 자고 있어도 되고. 혹시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줄게.”
“…….”
“거기 거울 때문에 분위기가 진짜 에로 끝판왕이야. 어느 체위로 하든, 사방에서 보면서 할 수 있어. 무슨 행위 예술 하는 기분까지 든다니까. 그것도 완전 음탕한 버전으로.”
말없이 명선을 바라보던 재강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강이 가만히 침을 삼키는 것이 명선의 눈에 들어왔다.
봐봐. 혹하기 시작했어.
이쯤에서 확실히 끌어 줄까.
명선이 조금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켜고 일어섰다.
“일단 나가자. 모텔비도 내가 낼게.”
명선이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 말하고 카페 밖으로 먼저 나왔다.
화단을 내려다보며 서 있자니 얼마 후 재강이 따라 나와 사이를 띄우고 곁에 어색하게 섰다.
명선은 들뜨는 기분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중이었다. 예전, 두 번 가 봤던 거울방에서의 섹스가 떠오르자 진정하기가 더 힘들었다.
‘잔챙이’들과의 섹스도 그렇게 좋았는데, 100퍼센트인 재강과 함께라면 더 좋으리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은 얼마간 화단을 내려다봤다.
명선이 화단 위를 의미 없이 휘 둘러 가리켰다.
“화단 예쁘게 해놨네. 그치.”
“…….”
“여기서 걸어가도 돼. 가까워.”
재강은 말없이 화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있다가 입을 뗐다.
“……한 시간 만이다.”
예스!
“알았어.”
명선은 신난 표정을 감추고 재강의 팔을 살짝 끌어당긴 후 모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대실 시간 꽉꽉 채운 다음에 나와야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만들어 줄게.
* * *
재강은 명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텔비를 계산했다.
“정말 괜찮겠어?”
엘리베이터에 타 5층 버튼을 누르고 명선이 물었다.
재강은 명선과 떨어진 반대쪽 벽에 기대서서 층수가 바뀌는 것만 올려다봤다.
“괜찮다니까.”
“나 돈 많은데. 오늘 네가 돌려준 것도 있고.”
“그 돈은 저금해, 그럼.”
“저금…….”
명선이 키득거렸다. 5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재강이 먼저 내렸다.
“너 가끔 진짜 꼰대처럼 말하는 거 알지?”
재강의 뒤를 따르며 명선은 계속 킥킥 웃었다.
“스물일곱 살 주제에.”
재강은 말없이 카드를 찍고 문을 열었다.
“혹시 어릴 때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지 않았어? 너 같은 사람들 약간 그런 공통점이 있던데.”
“어.”
방 안에 들어선 재강이 거울로 둘러싸인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며 답했다.
큼직하고 높다란 침대의 양옆과 머리맡, 천장 모두 거울이 있어 마치 침대를 반쯤 감싸 쥐고 있는 듯했다.
화려한 시트의 색이 거울마다 비치기까지 해 방은 꽤 요란해 보였고, 얼핏 웅장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둘은 침대 앞으로 가 섰다.
“어, 진짜? 와, 그렇구나. 역시.”
“…….”
재강은 계속 거울만 이리저리 보는 중이었다.
곁에 선 명선은 거울에 비친 재강을 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미리 챙겨온 콘돔을 침대 위로 던져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분들도 일산에 사셔? 언제까지 같이 산 건데?”
“……아니, 속초.”
재강이 천장에 붙은 거울을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할아버지랑 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원이랑…….”
재강이 문득 말을 멈추더니 입을 다물고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이제 자기 얘기도 슬슬 꺼내긴 하는군.
더 듣고 싶지만 일단 지금은 집중해야 할 게 따로 있지.
이미 알몸이 된 명선을 본 재강이 흠칫했다.
“시간도 없는데 같이 샤워할래? 그냥 해도 난 별로 상관없지만, 네가 좀 깔끔 떠는 성격이잖아.”
“…….”
“아니면, 땀 난 몸에 박는 거 찝찝해? 나만 씻을까? 난 네 몸에 땀 난 거 상관없이 구석구석 쪽쪽 다 빨아 줄 수 있어.”
명선은 조급함을 애써 누르고 자신의 성기를 느긋이 문질렀다.
고개를 돌린 재강이 거울에 비친 명선의 하체 쪽을 빠르게 훑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말만 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명선이 재강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재강은 곧장 한 발짝 물러섰다가 티셔츠를 바닥에 던져 놓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빨아, 그럼.”
재강은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낮게 말했다.
재강이 옷을 모두 벗자 명선은 얼른 그를 침대에 앉게 하고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재강의 것은 반쯤 발기한 채였다. 명선은 곧장 그것을 입 안 가득 넣고 빨아들이며 입술로 꽉 조였다.
재강이 몸을 움찔하며 명선의 등을 붙잡았다가 머뭇머뭇 놓고 침대 가장자리를 쥐었다.
바짝 오므라든 채 앞뒤로 움직이는 명선의 입 안에서 재강의 성기가 점점 커지고 단단해졌다.
“내가…… 진짜, 이놈 저놈 많이 빨아 봤는데…….”
명선이 입맛을 다시며 속삭이고 기둥을 길게 핥아 올렸다.
“네 좆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
명선은 재강의 성기를 얼굴에 이리저리 문질렀다. 끝에 배어나 있던 윤활액과 타액이 뒤섞인 채 명선의 얼굴 위에서 펴 발렸다.
재강은 이마를 찡그린 채 입을 꾹 다물고 그런 명선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명선은 입을 크게 벌려 혀를 길게 빼고 그 위에 성기를 탁탁 두들기기도 했다.
자신의 입만 응시하는 재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명선은 얼마간 그 뜨겁고 축축한 성기를 마음껏 가지고 놀았다.
명선이 성기를 다시 깊숙하게 물고 왕복 운동을 반복하자 재강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어깨만 들썩이던 재강이 뒤로 팔을 스르르 미끄러뜨리다 털썩 드러누웠다.
명선이 힐끗 보니 재강은 눈을 크게 뜬 채 천장에 있는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데려오길 잘했네. 시골 쥐 녀석. 신세계지, 짜샤?
명선은 뿌듯함을 느끼며 재강의 것을 열심히 흡입하다가 입을 떼고 헐떡이며 그 아랫배에 얼굴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단단한 피부에서 재강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아…… 너무 좋다.
오늘 밤에도 얘네 집에서 자야지.
* * *
명선은 엉덩이를 쳐들고 엎드린 채 거울 속 재강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뒤에 무릎을 대고 선 재강은 아래만 내려다보며 성기 끝을 명선의 엉덩이 사이에 대고 느릿느릿 문지르고 있었다.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살짝 씨근대는 재강의 어깨와 가슴이 호흡에 맞춰 오르내렸다.
아휴, 눈도 호강이고 뒤도 호강이고…… 오길 정말 잘했네.
명선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느긋하게 감상하는 모드로 접어들었다.
재강은 앞에 있는 거울을 힐끗 봤다가 명선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다시 시선을 내렸다.
명선은 속으로 끅끅 웃었다.
수줍음이 저렇게 많아서야.
근데 저게 킬 포인트라는 걸 쟤는 모르겠지?
그걸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킬 포인트네, 정말…… 앗.
“으응…….”
재강의 것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명선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수그렸다.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는 동안, 재강은 잡고 있는 명선의 엉덩이를 조금씩 어루만졌다.
아…… 쟤가 엉덩이 만져 주는 게 왜 이렇게 좋지……?
원래 좋아했던가? 다른 사람이 만졌을 때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
곧 재강의 손이 명선의 골반으로 올라왔다.
재강은 그렇게 양손으로 명선을 잡고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다시 집어넣길 반복했다.
명선은 찡그린 채 신음을 내뱉다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재강은 역시나 시선을 곧장 피했지만, 거울에 비친 명선의 몸을 조금씩 힐끔거렸다.
명선은 그런 재강을 응시하다 양옆의 거울도 차례로 바라봤다.
재강의 몸이 부딪칠 때마다, 부드럽게 휘어진 명선의 등과 엉덩이의 곡선이 들썩이고 찰랑였다.
재강의 탄탄한 가슴과 엉덩이, 허벅지 피부도 가볍게 진동했다.
명선은 옆쪽 거울을 응시하며 뺨을 시트에 댔다. 재강은 명선의 등과 엉덩이를 내려다보고,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재강의 씨근거림과 동작이 점점 격해지면서 철썩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명선의 골반을 그러쥔 재강의 손가락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아, 하아…….”
잔뜩 찡그린 명선이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서 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강은 명선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무릎을 세워서 명선의 몸에 좀 더 바싹 다가붙었다.
명선은 재강에게 밀려 거칠게 흔들리면서, 거울 속 재강의 몸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헐떡이는 둘의 숨소리와 젖은 피부가 맞닿는 소리만이 한동안 울렸다.
곧 재강이 명선의 등을 세게 누르며 쓸어 올리다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재강이 손을 당기자 명선의 목이 꺾이며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명선은 입을 잔뜩 벌린 채 힘겹게 소리를 뱉어냈다. 빳빳한 시트가 긁히고 짓눌리며 버석거렸다.
재강은 그렇게 명선을 붙든 채 명선의 몸 안으로 성기를 퍽퍽 밀어 넣었다. 온몸 구석구석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명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새빨간 얼굴을 바라봤다. 한껏 찡그린 이마 가장자리의 땀과 벌어진 입 안으로 보이는 이, 혓바닥.
시선을 올리자 다시 재강과 눈이 마주쳤다. 재강은 눈을 조금 크게 뜬 채 명선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명선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네가 나를…… 만, 지는 게 너무 좋아…….”
명선이 쿵쿵 밀쳐지며 속삭였다. 재강은 말없이 씩씩거리기만 했다.
“엉덩이…… 엉덩이 좀. 응……?”
재강이 곧장 명선의 머리를 놓고 엉덩이를 세게 움켜잡았다. 명선의 얼굴로 더없이 황홀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엉덩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꽉 쥐기도 하는 재강의 손은 강하고 뜨거웠다. 그 자유자재로 강약 조절을 하는 아귀힘이 명선을 미치게 했다.
재강은 양손으로 명선의 엉덩이를 그러쥔 채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성기를 박아 넣고, 엉덩이를 양옆으로 한껏 벌려 더 깊이 밀어 넣기도 했다.
명선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재강에게 쿵쿵 밀리며 거의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재강이 엉덩이를 찰싹 때리자 반짝 고개를 들었다.
재강은 어깨와 가슴을 들썩이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선의 엉덩이와 그 안을 드나드는 자신의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된 듯했다.
명선은 거울 속 재강을 응시하며 밀쳐지다 그 거울을 손으로 턱 짚었다.
재강이 한 번 더 같은 부위를 찰싹 때렸다. 명선은 길게 신음하며 거울 위에서 주먹을 그러쥐었다.
인천에서 ‘박렼’에게 엉덩이를 맞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흥분감이 가득 차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재강이 곧 눈을 들어 명선과 시선을 맞췄다.
명선은 재강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더듬더듬 손을 올려, 재강의 손을 잡고 성기 쪽으로 끌어내렸다.
“여기도 만져, 줄래……?”
재강은 아무 반발 없이 끌려와 명선의 뜨겁고 단단한 성기를 꽉 쥐었다가 앞뒤로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하, 씨발, 너무 좋아.”
명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계속, 해줘, 계속…….”
명선은 시트를 움켜쥐고 거울을 긁어대며 크게 신음했다.
“야, 쌀까, 아흐응, 나…… 지금…….”
재강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명선의 성기를 더 빠르게 문질렀다. 그와 동시에 뒤에선 재강의 성기가 거칠게 오갔다.
“아흑, 씨…….”
명선은 침대에 얼굴을 처박으며 쓰러지듯 했다.
재강이 명선의 몸 양옆으로 손을 받치며 엎드리자 후끈한 재강의 체온이 뒤에서부터 명선을 가득 끌어안는 듯 느껴졌다.
명선은 재강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퍽퍽 들쑤셔지고 짓눌려졌다.
머릿속이 다 타 버리고 한 가지 생각만 남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섹스가 존재하다니.
* * *
두 번의 섹스 후 둘은 널브러졌다.
주위로는 사용한 콘돔과 휴지 뭉치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숨을 고르던 명선이 눈을 뜨고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은 머리를 대고 누워 눈을 감은 채였고, 얼굴 가장자리와 목덜미에 땀이 맺혀 있었다.
“키스할래?”
나지막이 속삭이자 재강이 곧장 눈을 뜨고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꺼져.”
“흥.”
명선은 어깨를 으쓱하고 시트에 뺨을 붙이며 엎드렸다.
“싫음 말고. 혹시 마음 바뀌었나 해서 물어본 거야. 앞으로도 계속 체크할 거다.”
재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선은 계속 재강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재강의 눈이 천장 거울 속 명선의 몸을 훑고 있는 듯 보였다. 특히 엉덩이 쪽을.
재강이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이자 명선은 스르르 미소 지었다.
명선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고 양옆으로 살랑 흔들었다.
“예쁘지?”
흠칫한 재강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뭔 소리야.”
“예쁘잖아. 예뻐서 보고 있었던 거잖아.”
“빨갛게 돼 있어서 본 거지, 거기만 빨간색이니까.”
명선이 고개를 돌려 천장 거울을 봤다. 섹스하는 동안 재강이 서너 번 때렸던 한쪽 엉덩이가 조금 빨갰다.
“아이고, 더 예쁘네, 잘 익은 복숭아 같고.”
“복숭아가 다 말라 죽었냐.”
“깨물거나 빨고 싶으면 말해. 나는 언제든지 콜이야.”
“됐어.”
재강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명선은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띤 채로 재강을 바라보다 그쪽을 향해 모로 누웠다.
“너 주말엔 뭐 해?”
“뭐?”
“출근 안 하는 날엔 주로 뭐 하냐고.”
“그냥…… 쉬어.”
명선이 재강의 배 위로 손을 슬쩍 올리자 재강은 흠칫했지만 그 손을 쳐내진 않았다.
명선은 재강의 배에 손을 가만히 뒀다가 천천히 부드럽게 쓸었다. 조금 축축한 피부 아래의 단단한 굴곡이 느껴졌다.
“나 여기, 전에 두 번 와 봤는데, 그땐 탑만 했거든. 여기 와서 바텀 한 건 처음이야.”
“…….”
“근데 오늘 한 거 진짜 좋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
“너 어째 나날이 더 잘 박는 것 같다? 역시 초반엔 내숭 좀 떨었지?”
재강이 한숨을 짧게 쉬고 양손을 올려 머리 뒤를 받쳤다.
명선이 손을 재강의 가슴 쪽으로 쓸어 올렸다.
재강은 여전히, 명선을 밀쳐내지 않고 그대로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명선은 조심스레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다, 재강의 겨드랑이와 가슴 사이에 살짝 입술을 댔다.
얼마간 그 위에 가만히 있다 촉, 촉, 입을 맞추며 쇄골 쪽을 향해 갔다.
재강의 쇄골에 코끝을 대고 가볍게 쓸기도 했다.
그냥 몸 냄새 자체가 좋은 거였나. 하긴, 100퍼센트 몸인데 냄새도 당연히 100퍼센트겠지.
“역시 100퍼센트 몸이랑 이런 데서 하니까 훨씬 더 좋다. 다른 거랑 비교가 안 돼.”
명선이 재강의 가슴에 귀를 대고 누우며 나직이 말했다. 쿠궁, 쿠궁, 하고 규칙적으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에선 어떤 체위로 해도 네 몸을 볼 수 있으니까 그게 좋아.”
“…….”
“다음에 또 오자. 다음엔 내가 낼게.”
“…….”
“그리고 나 오늘도 너희 집에서 잘 거야.”
가만히 있던 재강이 곧 머리를 쳐들고 명선을 쳐다봤다.
“……뭐?”
“같이 놀자고. 오늘도.”
“…….”
“루프탑 바에서 좀 마시고. 귀여운 방에서 섹스도 하고.”
명선이 고개를 들고 재강과 눈을 맞추며 필살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지?”
“재수 없게…….”
재강이 명선의 입가를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뭐가 갑자기 재수 없대, 또?”
“그냥 재수 없어, 너 같은 새끼들.”
“말하는 것 좀 보소?”
명선이 껄껄 웃었다.
“암튼 오늘 일 끝나고 같이 퇴근하는 거다. 너희 집으로.”
“……그러든지.”
명선은 돌아누우려는 재강의 어깨를 얼른 잡아 누르고 아래쪽으로 갔다.
“잠깐 있어 봐. 좀 빨아보자.”
“…….”
재강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대로 얌전히 누웠다.
명선은 재강의 아랫배부터 입을 맞추며 성기를 향해 갔다.
* * *
결국 둘은 대실 시간을 살뜰히 채운 후 밖으로 나왔다.
“곧장 가든으로 출근해야겠다. 그치?”
명선이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히죽댔다.
재강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아침에 붙였던 밴드가 섹스 도중 너덜너덜해져, 목에는 새로 산 밴드를 붙인 채였다.
명선은 재강이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 모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몸을 훑어봤다.
“너 팔 선 예술이다.”
명선이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재강이 파리 쫓듯 손을 휙 내저어 물리쳤다.
“운전하는데 알짱대지 마라.”
명선은 킥킥 웃으며 좌석에 몸을 기댔다.
“네가 대리 기사로 왔으면 난 진짜 꼴려서 돌아 버렸을 거야.”
“변태 새끼.”
“손님이 껄떡댄 적 없어?”
“없어.”
“왜? 왜 없지?”
“없으니까 없지, 왜 나한테 물어.”
“너 혹시 너도 모르게 완전 철벽 치면서 사는 거 아니야? 누가 막 들이대도 그걸 들이대는 거라고 인지를 못 하는 거지.”
재강은 말없이 앞만 보며 운전했다.
“이런 죽이는 몸을 사람들이 가만 놔뒀을 리가 없는데.”
“…….”
“너 목소리도 꽤 괜찮거든. 얼굴도 나쁘지 않고.”
“…….”
“좆도 실한 편이야.”
“…….”
“가만 보면 좀 귀여운 구석도…….”
“어휴.”
재강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입 좀 닥치고 있으면 안 되겠냐?”
“넌 왜 칭찬을 해줘도 그러냐.”
“누가 칭찬해 달래?”
“칭찬을 꼭 해달라고 해야 하나? 할 게 있으니까 하는 거지.”
“할 게 있어도 하지 마. 나한텐 하지 마.”
“내 입은 내 거고요.”
“그 입을 좀 다물고 있으라고, 입을.”
재강이 한 손을 뻗어 명선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자 명선은 얼른 그 손을 잡아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
재강이 소스라치며 얼른 손을 빼냈다.
“운전하는데, 씨발!”
“누가 입 막으래?”
명선은 아랑곳없이 킬킬거렸다.
“따로 타고 갈 걸 그랬어.”
재강이 낮게 툴툴대는 동안 명선의 핸드폰이 울렸다.
명선은 화면에 뜬 발신인을 보고 살짝 찡그렸다가 전화를 받았다.
“어어.”
-써니 써니 명써니. 뭐야, 왜 이렇게 계속 연락이 안 돼?
“아, 좀, 뭐, 어쩌다 보니.”
-바빠? 뭐 하는데?
“내가 언제는 안 바빴나.”
-대답이 영 시원찮구먼? 무슨 일이지?
“일은 무슨.”
명선은 재강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공연히 신경 쓰여 몰래 핸드폰 볼륨을 낮췄다.
-오늘 양지 형네 가게 언제 올 거야?
“음……?”
-양지 형. 가게 오픈 파티 오늘이잖아. 몇 시에 올 거냐고.
“…….”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지인인 양지의 카페 겸 술집이 오픈하는 날이었다. 오픈 파티 날짜는 거의 한 달 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자연스레 선약이 된 상태였다.
명선은 운전 중인 재강의 옆얼굴을 괜히 힐끔거렸다.
-나는 9시쯤 도착할 거야. 나 먼저 퇴근하고 승규 형이 매장 클로징한 다음에 늦게 합류하기로 했어. 너 저녁 먹고 올 거야?
내가 거길 왜 가, 짜샤. 100퍼센트 몸이랑 뒹굴기도 바쁜데.
게다가 게이들만 오는 파티도 아니고 반 이상은 헤테로들 득실거리기까지 할 텐데 실속 없이…….
“아, 나는 일이 생겨서 좀.”
-무슨 일?
“뭘 꼬치꼬치 물어, 용이 용이.”
-오프하냐?
오, 좋은 핑계.
명선은 대용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기 위해 대답 대신 실실 웃었다.
-으이그. 알았다.
“내 대신 형한테 축하한다고 전해 줘.”
-이쪽이야 금방 안 끝날 거 뻔하니까 늦게라도 와. 너 어차피 숙박 안 할 거잖아.
“응, 내가 알아서 할게, 대용아.”
-그리고, 연락 좀 하고 삽시다. 네?
“네, 네. 재밌게 놀아.”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서 명선은 핸드폰 소리 설정을 무음으로 돌렸다.
방해받지 말고 놀아야지.
아, 근데 내가 자기 때문에 선약을 깬 걸 눈치챘으려나?
옆을 힐끔 보니 재강의 표정은 똑같았다.
하긴, 눈치채 봤자 지가 어쩔 거야. 내가 안 간다는데.
명선은 시트에 기대 창밖을 바라봤다.
* * *
가든에 도착해 주방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나오는 둘의 뒤를 애덕이 따라 나왔다.
“재강이, 요새 왜 연락이 안 돼? 문자 보내도 계속 안 읽는다던데?”
“아…… 핸드폰이 고장 나서요.”
“송이 엄마가 이삿날 스케줄 되냐고 물어보던데. 하도 연락이 안 되니까 나한테 와서 난리야들.”
“이삿날이 언젠데요?”
“19일.”
재강은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깜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선은 둘의 곁에서 물을 마시며 대놓고 대화를 들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더 있어.”
애덕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종이를 꺼내 펼치고 목에 걸려 있던 안경을 올려 썼다.
“상훈이네 장롱 조립, 혜진이네 베란다 청소, 용식이 할아버지 데리고 병원 갔다 오기.”
애덕이 읽는 종이를 재강이 들여다봤다.
명선도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종이 위에 적힌 날짜와 시간 따위를 읽었다.
재강은 애덕과 이런저런 스케줄을 조율하고 카운터에 있던 메모지와 볼펜을 집어 그것들을 메모했다.
명선은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곁에 서서 확정된 스케줄을 자기 머릿속에도 집어넣었다.
“핸드폰 얼른 고쳐.”
“네.”
애덕이 주방으로 돌아가고 재강이 입구 쪽으로 가자 명선은 그 뒤를 따랐다.
“숯불, 바쁘네.”
명선은 재강을 따라 뒤뜰로 가며 핸드폰 스케줄러에 아까 외운 재강의 스케줄을 입력했다.
재강은 숯불 방으로 오자마자 배낭을 걸어두고 앞치마부터 입었다.
“야, 좀 쉬었다 해. 뭘 그렇게 부지런을 떨어? 4시밖에 안 됐는데.”
“넌 부지런 좀 떨어라.”
“또 훈계질.”
재강이 불판을 세척하는 동안 명선은 의자에 앉아 방금 입력한 스케줄을 보며 나름의 섹스 스케줄을 짰다.
이삿날은 아무래도 피곤할 테니까 넘어가 주고, 장롱 조립은, 흠…… 해봤자 이케아 같은 거 아닌가? 뚝딱하겠지, 뭐. 그땐 섹스해도 되겠다. 끝나고 바로 집에 와서 섹스하고 출근하는 거지.
윙윙거리던 세척기 소리가 꺼지고 재강이 이쪽으로 오자 명선은 얼른 핸드폰을 껐다.
재강은 젖은 목장갑을 벗어 선반에 널어두고 앞치마를 벗었다.
명선이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 재강의 목을 가리켰다.
“이리 와 봐. 목에 그거…….”
재강이 목에 붙은 밴드를 만지작대며 다가오자 명선이 일어섰다.
“아, 만지지 말고. 비뚤어졌다.”
밴드는 키스 마크를 완전히 가리며 잘 붙어 있었지만 명선은 재강의 손을 쳐내고 괜히 그곳을 더듬거렸다.
재강의 목은 땀이 조금 배어나 있고 뜨거웠다.
명선이 매만지는 동안 재강은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한 채 얌전히 서 있었다.
명선은 재강의 눈치를 슬쩍 보고 얼른 고개를 기울여 재강의 목에 입을 맞췄다.
“야, 이……!”
재강이 목을 싸쥐고 후다닥 뒤로 물러나 주위를 살폈다.
명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무도 없는 걸 아니까 그랬지, 누구 있는데 그랬겠냐.”
재강은 말없이 명선을 노려보다 벽에 등을 대고 붙어서더니 홀 건물 쪽을 가리켰다.
“꺼져.”
명선은 일부러 느적느적 걸어 재강의 앞을 지나치다 우뚝 멈춰 섰다.
“키스할래?”
재강이 다시 홀 건물 쪽을 가리켰다.
“꺼지라고.”
“미션 줄래? 키스 걸고?”
“안 꺼져?”
“아, 그거 또 비뚤어졌…….”
명선이 다시 밴드 쪽으로 손을 뻗으며 다가가자 재강이 단단히 세운 손바닥으로 명선의 명치 쪽을 퍽 쳤다.
“케헥!”
명선이 가슴을 싸쥐고 뒤로 물러났다.
명선이 허약한 노인처럼 기침해대는 동안 재강은 그대로 벽에 붙어선 채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우, 저 승질머리…… 간다, 가.”
간신히 숨을 고른 명선이 가슴을 문지르며 돌아섰다.
아, 쏘는 맛이 있어. 톡톡 쏘는 게 웃겨서 자꾸 건드리게 된다니까.
뒤뜰을 지나는 명선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넘실거렸다.
* * *
“형, 힘들었지. 수고 많았어.”
저녁 식사 시간, 재강이 곁에 와 앉자마자 명선이 미리 소주를 따라둔 컵을 두 손으로 집어 들이밀었다.
“……힘들긴.”
재강이 컵을 받아들며 낮게 말했다.
명선은 재강의 인상이 살짝 찌그러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속으로 푸후후 웃었다.
교직원 회식으로 인해 가든은 평소보다 더 북적였고 명선 역시 몸과 정신이 나달거리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앉아 재강을 놀려먹자니 피로가 싹 달아나는 듯했다.
“형이 제일 수고했어. 형이 최고야.”
명선이 어깨를 재강의 어깨에 갖다 붙인 채 남들에게도 다 들릴 만한 데시벨로 속삭였다.
재강은 맞닿은 곳에 힘을 꽉 준 채, 이번에도 소주를 끝까지 다 마셨다.
명선은 컵을 내려놓는 재강이 이를 악물어 턱의 근육이 불쑥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용이 말이 맞나 봐. 직원이랑 친해지면 말뚝 박는다고 그랬거든.”
명선의 곁에 앉아 있던 정식이 그 옆에 앉은 양자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게. 쟤가 뭘 이렇게 오래 끈덕지게 한 적이 없었는데.”
“우리 재강 씨 덕에 명선이가 말뚝 박게 생겼어.”
정식이 몸을 기울여 명선 너머의 재강을 보며 화통하게 웃었다.
아빠, 내가 박는 게 아니고 숯불이 박는 거야. 나한테.
명선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드립 욕구를 잠재우며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재강도 예의상의 미소만 지은 채 정식과 짧게 눈을 맞추고는 얼른 밥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나 오늘도 형 집에 가서 놀 거야.”
“너 너무 귀찮게 구는 거 아니니? 재강 씨, 괜찮아요? 재강 씨도 바쁘고 피곤할 텐데.”
“……괜찮습니다.”
“내일 우리 둘 다 쉬는 날이니까 오늘은 맘먹고 놀아야지.”
아래에서 재강이 명선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명선은 발을 빼지 않고 힘을 줘서 발등을 들어 올렸다.
내리누르는 재강의 발과 들어 올리는 명선의 발이 소리 없이 신경전을 벌이다 떨어졌다.
“나 집에 안 들어가면 그냥 형이랑 있나 보다 생각해. 형 집이 워낙에 아늑하고 편안해서 그런지 되게 정이 가네. 출퇴근 같이하는 것도 너무 좋고.”
“그렇지. 출퇴근 같이하면 좋지.”
정식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명선이 너 그래도 그렇게 신세 지면 신세 진 만큼 보답을 해야 하는 거다. 어지르지 말고, 청소도 하고.”
“아, 당연하지.”
“재강 씨, 명선이가 너무 귀찮게 굴면 따끔하게 뭐라고 해줘요. 너무 오냐오냐하면 못 써.”
“네.”
재강이 곧장 대답했다.
따끔하게 박아 줘, 형. 오냐 오냐 말고 오랄 오랄.
명선은 또 드립을 날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미소 지었다.
재강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선 어쩔 수 없이 명선을 참아 주다가 둘만 있게 되면 폭발했다.
“너 앞으로 저녁 먹을 때 내 근처에 앉지 마.”
재강이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명선은 어깨를 으쓱하고 시동을 걸었다.
“어디 앉든 내 맘이지.”
“너 때문에 소화도 안 돼. 밥 먹을 땐 밥이나 처먹지 왜 이렇게 질척대고 시끄럽게 굴어?”
“키스할래?”
“어으으.”
재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을 닥치게 하는 마법의 주문이네.
명선은 킬킬 웃으며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진입했다.
“야, 좋아서 그러는 거야. 저녁 내내 힘들어서 진이 다 빠져 있다가 네 몸을 보니까 기운이 나서. 네 몸이 내 활력소라니까. 거기에 자부심을 좀 가져 봐.”
“난 너 때문에 기운이 빠진다고, 이 새끼야.”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말 안 걸게. 너도 기력 보충은 해야지. 그래야 이따 시원하게 박아 줄 거 아냐.”
재강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어, 숯불.”
명선은 재강의 허벅지를 가볍게 토닥이고, 정말로 입을 꾹 다물고 운전만 했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재강의 머리가 어느 순간 옆으로 스르르 기울었다.
정말 피곤했나 보네.
명선은 잠든 재강의 옆얼굴을 슬쩍 봤다가 몇 번 더 힐끔거렸다.
작은 흉터들이 스치듯 나 있는 재강의 손은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채였다.
횡단보도 앞에 부드럽게 차를 세운 명선은 재강의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기울이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재강은 미간을 약간 찡그린 채 자고 있었다. 내쉬는 숨에서 소주 냄새가 약하게 났다.
지금 보니까 코가 꽤 잘생겼네. 반듯하고.
눈썹 선도 예쁘게 잘 빠졌고…….
명선은 생전 처음 보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재강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재강은 명선이 주차를 하고 나서도 계속 잠든 채였다.
명선은 얼마간 재강을 바라보다 귀 가까이 입을 들이대고 숨을 후우우 내뱉으며 속삭였다.
“숯부우우울.”
재강이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명선이 킬킬 웃으며 물러났다.
“어르신, 꿀잠 주무셨어요?”
“아, 저 가든 새끼.”
재강이 얼굴을 문지르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에서 내렸다.
“일단 자자, 오늘은.”
명선이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
“뭐?”
“금요일이라 좀 불태워 보고 싶은데, 오늘 너나 나나 진짜 빡셌잖아. 집에 도착하면 착한 어린이처럼 싹싹 씻고 일단 잠부터 자자고.”
“너도 지칠 때가 다 있냐.”
“나야 뭐, 영감님 체력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고마워 죽겠네.”
둘은 드문드문 불이 켜진 상점 골목을 말없이 지났다.
재강의 집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해 명선은 위를 올려다봤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옥외 계단과 옥상 가장자리가 보였다.
바로 어제 여길 혼자 와서 습격했는데, 오늘은 같이 들어가고 있네.
문득 어제 일이 갑자기 먼 옛날의 일이라도 되는 듯 느껴졌다. 하루 사이에 재강과의 사이에서 꽤 큰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사람 일이 참 모르는 거라니까.
재강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명선이 흐흐 웃었다.
“변태 새끼.”
앞에서 재강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 왜 또 뜬금없이 디스를?”
“혼자 처웃고 있으면 네가 뻔하지.”
“미소의 소중함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 같으니.”
재강은 집안에 들어가 에어컨부터 켰다.
집은 오전에 둘이 떠나던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갑작스레, 진한 친숙함이 명선의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안녕, 작고 귀여운 집아, 잘 있었니?”
“시끄럽고, 너 먼저 씻어.”
“말투가 상스럽다, 시골 쥐야.”
“씻으라고, 서울 쥐새끼야.”
“잘 있었니, 내 칫솔아?”
“으휴, 시끄러워.”
명선이 욕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재강은 치를 떨며 문을 닫아 버렸다.
귀여운 녀석.
명선은 흐뭇한 얼굴인 채 옷을 벗고 샤워했다.
* * *
샤워를 끝낸 재강이 속옷을 입고 다가왔다.
명선은 침대에 누워 재강이 침대 아래 바닥에 눕는 모습을 응시했다.
“숯불, 머리 말리고 자.”
“놔두면 말라.”
“젖은 머리로 자는 거 두피에 되게 안 좋은데.”
“네 두피나 신경 써.”
재강이 명선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야, 내일 같이 핸드폰 고치러 가자.”
“…….”
“내 폰 액정도 갈아야 돼. 개박살 났잖아.”
“……알았어.”
“내일 점심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너 태국 음식 좋아하냐?”
“그걸 왜 벌써 생각하고 있어. 내일 봐서…… 땡기는 걸 먹으면 되는 거지…….”
재강의 말이 조금씩 나른하게 늘어졌다.
“인생의 즐거움이란 것도 모르는 인간이네.”
“…….”
재강은 어느새 깊이 잠에 빠져든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명선은 재강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저녁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가든의 뒤뜰과 홀을 수없이 오가던 재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눈만 깜빡이던 명선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젖은 채인 짧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쓰다듬던 명선의 손가락이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재강의 따끈하고 촉촉한 두피가 명선의 손가락 끝에 와 닿았다.
애인이랑 살 땐 둘이 침대에서 꼭 붙어 잤으려나?
애인한텐 설설 기는 것 같았으니까 침대 내주고 하인처럼 바닥에서 잤을지도 몰라.
밥도 해다 바치고 빨래도 해다 바치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안됐네. 애지중지하던 애인이 그렇게 야반도주를 해버렸으니.
근데 그 애인은, 얘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싫었으면 일산에서 통영까지 도망을 가냐. 그 사람도 참 대단하다.
아니, 사실은 알고 보니까 애인이 아니라 여기 감금당해서 노예처럼 살던 사람이었던 거 아냐?
그 사람은 힘들고 무서워 죽겠는데 얘만 혼자 지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거지, 변태 사이코 살인마처럼…….
재강이 잠결에 몸을 흠칫 떨며 웅크리자 명선은 얼른 그 머리에서 손을 뗐다.
명선은 재강의 벗은 등을 바라봤다. 늘 그렇듯, 신이 주신 선물 같은 등판이었다.
명선의 눈꺼풀이 점점 느리게 오르내렸다.
다시금 저녁 내내 바쁘게 일하던 재강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엔 마냥 조폭 같았는데, 좀 알고 보니 나름 착한 놈인 것 같긴 해. 그리고 되게 성실하잖아.
애인한테 간도 빼주고 쓸개도 빼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줬을 거야.
그냥…… 그 애인이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싶어서 도망간 거 아니었을까…….
통영에 있는 부잣집 남자가 캐비아를 사주면서 유혹하는 바람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명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두 눈은 끔뻑끔뻑하다 스르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