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5. 가져요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에 명선이 눈을 떴다.
방 안은 새벽빛으로 온통 푸른색이었다.
곧 재강이 화장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왔다. 머리카락은 역시나 이리저리 곤두서고 눌리고 구겨진 채였다.
재강은 침대 아래로 돌아와 바닥에 털썩 누웠다가 어제처럼 명선을 등지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에서 막 깨서 보는데도 몸이 참 완벽하네…….
명선은 눈을 반만 뜬 채 재강을 응시하다 다리 한쪽을 먼저 침대 아래쪽으로 뻗고 몸의 다른 부분들도 조금씩 움직여, 마치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듯 재강의 뒤쪽으로 미끄덩거리며 안착했다.
“뭐야, 씨…….”
흠칫했던 재강이 뒤를 돌아보고 피하려 하자 명선이 얼른 그 몸을 팔과 다리로 끌어안았다.
“잠깐만 안고 있을게. 다시 잠들 때까지만.”
명선이 재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그래.”
“그럼 끄든가, 이불을 덮든가…….”
재강은 잠긴 목소리로 투덜대며 명선의 팔을 몇 번 쳐내는 듯하다가, 명선이 계속 달라붙자 한숨을 내쉬고 결국 몸에 힘을 뺐다.
명선은 눈을 감고 재강을 다시 편하게 고쳐 안았다.
“새벽에 잠 덜 깬 상태에서 이러고 있는 거 되게 좋거든.”
재강의 몸은 막 잠에서 깬 몸 특유의 기분 좋은 따끈함과 나른한 말랑함이 섞인 채였다.
아무리 단단한 몸이어도, 아침엔 그런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둘 다 팬티만 입은 채여서, 맨살이 맞닿는 느낌도 좋았다.
명선은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얼굴로 그 몸을 만끽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막 지랄하면서 쳐내진 않네.
역시, 너도 싫지는 않지? 잠결에 하면 뭐든지 다 그럭저럭 좋은 법이야.
재강의 몸이 제 몸에 맞닿자 가볍게 흥분되긴 했지만, 명선은 일단 그러고 있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워 더 나아가진 않고 일단 안고만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던 재강도 점차 다시 잠에 빠져드는 듯했다.
* * *
명선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잠결에 재강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고 그 뒤통수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방 안은 아까보다 한층 더 밝아져 있고, 바깥에선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명선의 손이 재강의 가슴을 느릿느릿 쓸었다. 아래쪽에선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재강의 엉덩이에 잔뜩 선 성기를 문지르는 중이었다.
아…… 자다가 눈을 떴는데 이 몸이 내 팔 안에 있다니.
재강도 서서히 잠에서 깨는지 조금 꿈틀거렸다. 그러다 명선이 가슴을 애무하자 작게 움찔하며 희미한 소리를 냈다.
잠에 취한 그 낮은 목소리를 듣자 명선은 갑자기 몸에 불이 확 붙는 기분이었다.
명선은 재강의 뒤통수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다가 입술을 목덜미 쪽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재강의 가슴과 배를 어루만지던 손을 아래쪽으로 쓸어내렸다.
재강의 것 역시 빳빳하게 선 채였다.
명선이 그 앞섶을 가볍게 누르며 문질렀다. 재강의 몸이 점점 더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팬티 터질 것 같은데 벗으면 어때.”
명선이 살짝 쉰 목소리로 목덜미에 대고 속삭이는 동시에 재강의 속옷 밴드 부분을 잡고 살짝 끌어 내렸다.
재강은 반사적인 동작인 듯, 그런 명선의 손을 탁 잡았다가 살짝 밀쳐내더니 직접 속옷을 끌어 내렸다.
우, 예스.
명선도 얼른 자신의 속옷을 끌어 내리며 다시 재강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벼댔다.
재강은 얼마간 그대로 있다가 돌아누우며 명선 역시 자신을 등지고 돌아눕도록 했다.
재강의 뜨끈한 성기가 뒤에 와 닿고 그 손이 자신의 골반을 꽉 쥐는 게 느껴지는 순간,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한숨을 길게 뱉어냈다.
재강은 씨근대며 명선의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대고 문질렀다.
침대와 재강 사이에 낀 명선은 눈을 감은 채 할딱였다.
재강의 손이 명선의 것을 잡았다가 놓고 아랫배에서 가슴으로 천천히 쓸어 올라왔다.
명선은 팔을 들어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아서 재강의 손이 자신의 몸 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했다.
등과 엉덩이에서 재강의 몸, 그 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벌써 미치게 좋았다. 목덜미에선 재강의 씨근대는 콧김이 느껴졌다.
명선은 침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뒤로 뻗어, 재강의 머리통을 꽉 붙잡았다.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아, 이대로 내 목에 키스 좀 해줬으면. 정말 자국 남겨도 상관없는데.
목도 빨아 주고, 귀도 빨아 주고, 입술도 빨아 주고…….
한동안 그렇게 성기를 문지르던 재강이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추고 몸을 살짝 일으키려는 듯하자 명선이 얼른 그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왜, 어디 가. 왜. 잠깐만.”
재강이 명선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일어나려 했다.
“콘돔…….”
“여깄어, 여깄어.”
명선이 얼른 침대 위쪽으로 손을 뻗어 베개 밑을 더듬었다.
어젯밤 재강이 샤워하는 동안 명선이 숨겨놨던 콘돔 다섯 개가 침대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
재강이 몸을 반쯤 일으키고 앉은 채 콘돔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명선이 콘돔 하나를 집어 입구를 찢고 재강에게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도구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한댔잖냐.”
“……너 진짜 이상한 놈이야.”
재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콘돔을 꺼내 자신의 성기에 끼웠다.
명선은 얼른 재강을 등지고 돌아누워 허리를 휘어서 엉덩이를 바짝 내밀었다. 침을 뱉어 뒤에 흥건하게 문질러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재강이 명선의 뒤에 눕고, 그의 성기가 와 닿았다.
재강은 성기 끝을 느릿느릿 문지르고 조금씩 넣었다 뺐다 하길 반복하다가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하아, 씨…….”
명선이 침대 가장자리를 움켜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강도 명선의 어깨에 대고 떨리는 숨을 뱉어냈다.
재강은 주먹을 쥔 팔뚝으로 명선의 몸을 꼭 안고 있었다. 명선이 그 단단한 주먹을 어루만졌다.
명선은 재강과 침대 사이에 낀 채, 재강이 밀어붙일 때마다 들썩였다.
허벅지 중간쯤에 돌돌 말려 걸쳐져서 조이는 속옷 때문에 어쩐지 묶인 듯한 기분도 들었다.
묶이고 갇힌 채로 대책 없이 밀쳐지는 그 느낌이 명선의 흥분을 더욱더 배가시켰다.
곧 재강의 주먹이 서서히 펼쳐지더니 명선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그 손등을 명선의 손이 감쌌다.
재강은 명선의 가슴을 움켜쥔 채 조금씩 더 세게, 그리고 빠르게 몸을 부딪쳐대기 시작했다.
명선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명선의 입에서 짧게 끊어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재강 역시 입을 벌린 채 뜨거운 숨이 헉헉 나오는 그 입을 명선의 등에 바짝 댔다.
자신의 등 위에서 재강의 입술과 이가 짓눌러지는 느낌에 집중하며 명선은 재강의 손을 꼭 붙잡았다.
재강은 거칠게 성기를 박아 넣다가 느릿느릿 깊숙하게 밀어 넣고, 그리고 다시 빠르게 박아 넣으며 명선의 뒤를 끝없이 자극해댔다.
얼마간 그러다 재강이 손을 쓸어내려 명선의 성기를 잡자 명선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 하아, 하아아…….”
명선은 침대 아래로 신음을 질러대고, 재강은 명선의 등에 대고 헐떡이며 명선의 것을 세게 문질렀다.
아, 씨발, 더럽게 좋아.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우리 아침마다 이렇게 할까? 매일 밤 이렇게 할까?
어때? 그렇게 할래? 너 나랑 이렇게 매일매일 붙어 있을래?
나랑 매일매일…….
사정하는 순간 명선은 몸을 발작적으로 떨어댔다. 곧이어 재강이 명선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사정했다.
둘은 몸을 꼭 붙인 채로, 부들부들 떨어대며 간간이 짧은 신음을 뱉어냈다.
명선은 여전히 자신의 어깨에 닿아 있는 재강의 얼굴, 엉덩이에 닿아 있는 그 몸을 느끼며 호흡을 골랐다.
재강의 호흡도 명선의 것과 함께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잔뜩 젖은 명선의 성기를 쥐고 있던 재강의 손이 곧 부드럽게 명선의 허벅지 쪽으로 쓸어 올라갔다.
재강이 명선의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놓고 가볍게 찰싹, 토닥인 후 손을 떼자 명선이 스르르 눈을 떴다.
“…….”
재강이 성기를 빼내고 몸을 떼는 동안, 명선은 침대 밑의 시커먼 어둠을 바라보며 방금 엉덩이를 스쳐 간 재강의 손길, 그 여운을 곱씹었다.
무심하면서도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지는 손길.
애인한테 저렇게 하던 거였을까.
언제부턴가 들리는지 아닌지도 몰랐던 매미 울음소리가 갑자기 웨엥, 하고 귀에 꽂혀 들어왔다.
명선은 가만히 눈만 깜박이다 스르르 뒤를 돌아봤다.
재강은 뒤에 앉아 막 빼낸 콘돔의 입구를 묶는 중이었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뻗쳐 있고 등 한쪽에는 구겨진 이불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명선은 등을 대고 누워 재강의 완벽한 등과 새집 같은 머리, 이불 자국을 찬찬히 바라봤다.
콘돔을 빈 봉지에 도로 쑤셔 넣어 한쪽에 던져둔 재강은 잠시 그대로 가만히 허공을 보며 앉아 있다가, 그때까지도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속옷을 꾸물꾸물 벗었다.
“숯불, 잘 잤냐?”
재강이 힐끗 돌아봤다가 숨을 길게 내쉬며 드러누웠다.
“어.”
“나도 잘 잤어.”
“…….”
“혹시 궁금해할까 봐.”
재강은 말없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명선은 여전히 허벅지에 걸쳐져 조이는 속옷을 벗어 던지고, 재강 쪽으로 길게 누워 그 몸을 훑어봤다.
목에 붙여놨던 밴드는 어젯밤 샤워하며 뗐는지 없어진 채였다.
“가슴에 몇 개 좀 더 만들어도 돼?”
명선의 말에 재강이 얼굴을 문지르다 말고 명선을 쳐다봤다.
“뭘 만들어?”
명선이 재강의 목 옆을 가리켰다. 재강이 곧장 찡그렸다.
“꺼져.”
“왜, 가슴은 어차피 옷 입으면 가려지는데.”
명선이 킬킬 웃었다.
“아니면 겨드랑이나 등에 할까? 엉덩이나 허벅지도 괜찮고.”
“다시 자라, 그냥. 넌 잘 때가 제일 맘에 든다. 닥치고 있을 때.”
“내가 맘에 들긴 하는구나?”
“…….”
“그게 ‘제일’ 마음에 들 때면, ‘그냥’ 마음에 들 땐 언젠데?”
“없어.”
“아무거나 꼽아 봐.”
“없다고.”
“네 밑에서 낑낑대고 있을 때도 맘에 들지 않아?”
명선이 히죽대며 가까이 다가가자 재강이 그만큼 옆으로 물러났다.
“네 좆 빨고 있을 때랑 네 가슴 빨아 줄 때도.”
명선이 다시 가까이 가고 재강은 또 그만큼 물러났다.
“마음에 드는 짓 좀 해볼까?”
명선이 가슴 쪽으로 돌진하자 재강이 얼른 밀쳐내고 벌떡 일어났다.
명선은 침대 아래쪽으로 데굴 굴러가 처박혔다.
“먼저 씻는다.”
재강은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앙큼 떨기는.”
명선은 피식 웃고 벌렁 누워 빈둥대다가 집안을 둘러봤다.
집에 텔레비전도 없고…… 핸드폰도 망가졌는데 그럼 뭘 하고 노는 거지?
근데 저 상자들은 뭐야? 곧 이사 가나?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계속 눈에 들어오던 풍경이었다. 크지도 않은 집안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며 차곡차곡 쌓여 있는, 다양한 크기의 상자들.
명선이 느릿느릿 일어나 상자들 앞으로 가 들여다봤다. 상자는 모두 봉해지지 않은 채였다.
명선은 맨 위에 있는 상자를 슬쩍 열어 봤다.
안에는 노트북과 두꺼운 스케치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아래쪽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니 앰프가 있고, 다른 상자엔 요리책이 잔뜩 들어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 공통점이나 일관성이 전혀 없었다.
홈쇼핑 중독 같은 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서 쌓아두는?
그런 타입으론 안 보이는데.
털실 뭉치와 뜨개바늘, 뜨다 만 것 같은 무언가가 가득 든 상자를 보자 명선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마침 재강이 욕실에서 나왔다.
“숯불, 이거 다 뭐야?”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던 재강은 명선 쪽을 보고 바로 눈을 부라렸다.
“넌 뭔데 남의 집을 뒤져?”
“그럼 테이프 붙여 놓기라도 하든가. 다 열려 있던데, 뭐.”
“아, 저 개념 없는 새끼.”
재강이 혀를 차며 서랍장 앞으로 가 속옷을 꺼내 입었다.
“뭔데? 너 홈쇼핑 중독 같은 거야? 아니면 사업 이것저것 벌이다가 말아먹은 케이스?”
“신경 꺼.”
“궁금하잖아. 물건들이 다 서로 별 연관도 없고…… 와, 근데 너 기타도 쳤냐?”
상자들 뒤쪽에서 기타 케이스를 발견하고 명선이 집어 들려 하자 재강이 척척 다가와 명선의 팔을 잡고 끌었다.
“너 집에 가.”
명선은 재강이 끄는 대로 순순히 욕실까지 갔다.
“씻고 꺼져.”
“같이 폰 고치러 가기로 했잖아. 태국 음식도 먹고.”
“너 혼자 그러기로 한 거지.”
“어제 분명히 네가 ‘알았어’라고 했거든?”
“알 게 뭐야, 난 기억도 안 나는데.”
“그래? 그럼 지금 다시 얘기할까? 같이 폰 고치러 가자. 밥 내가 살게.”
재강은 명선을 욕실로 밀어 넣고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가는 거다, 숯불. 태국 음식 싫으면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놔.”
명선이 칫솔에 치약을 묻히며 문을 향해 외쳤다.
“빨리 씻기나 해.”
문밖에서 재강이 나직이 말했다.
내숭쟁이.
명선은 피식 웃고 이를 닦기 시작했다.
* * *
“너 이사 가는 건 아니지?”
집을 나와 골목을 지나며 명선이 물었다.
“뭐, 지금?”
“어. 상자를 막 쌓아놨길래. 혹시 짐 싸둔 건가 해서.”
재강은 얼마간 말없이 걷다 입을 열었다.
“안 가.”
“아, 다행이네. 너 가면 난 심심해서 안 되지.”
“네가 심심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야. 내가 네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곤 할 수 없지만, 훌륭한 섹스 토이 정도는 되겠다. 안 그래?”
“안 그래.”
“혹시 이사할 거면 서울로 와. 우리 옆집으로.”
재강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
“아니면 우리 집에서 하숙하는 건 어때? 방도 남는데. 그럼 맨날…… 허, 야 씨, 대박인데? 대박 아니냐!”
“문이나 열어.”
재강이 피곤한 표정인 채 조수석 문 옆에 섰다.
명선은 문을 열어 주고 자기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엄마 아빠한테 말해서 싸게 해줄게. 네 덕분에 내가 자꾸 출근해서 지금 두 분이 설레고 있는데 완전히 너랑 붙어 있다고 생각해 봐. 엄마 아빠도 대환영일걸?”
“…….”
“서울에 오면 에그 베네딕트도 맨날 먹을 수 있다, 시골 쥐야.”
“너나 매일 먹어.”
“아,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봤어?”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어. 난 가리는 거 없으니까.”
명선은 차를 운전해 골목을 빠져나가며, 무심한 재강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별거 아닌데 저런 말이 참 이쁘게 들린단 말이지.
명선은 재강에게 앞으로 먹이고 싶은 걸 떠올려 보느라 조용해졌다. 재강도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또 서울로 가냐?”
한참 조용하던 재강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
“그냥 근처로 가지 왜 또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해. 폰 가게가 일산에 없는 것도 아니고.”
“난 서울이 편해. 시골 쥐 데려가는 재미도 있고.”
“암튼 서울 놈들은.”
“암튼 서울 놈들이 잘 빨지. 그치.”
명선이 킥킥 웃었다. 재강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나온 김에 솔직히 말해 보자. 나 잘 빨지 않냐? 아니야?”
“…….”
재강의 답이 즉각 나오지 않자 명선은 웃음을 삼켰다.
그간 보아온 이놈 말버릇이라면 바로 ‘아니야’라고 했을 텐데, 가만히 있는 것 좀 봐.
너도 인정하긴 하는 거지. 내가 잘 빤다는 것을.
누군들 인정을 안 하겠냐. 난 너무 잘 빨아서 내가 내 걸 빨아 주고 싶을 정도야. 자급자족만 해도 다른 사람의 입이 평생 필요 없을 정도라고.
“지금까지 잔 사람들이랑 비교해 보면 어때? 적어도 내가 세 손가락 안에는 들지 않냐? 나 같으면 나한테 일등 주겠지만 뭐, 너는 나한테 죽어도 일등 준다는 말은 안 하겠지.”
“…….”
재강은 창밖만 바라봤다.
“그럼 네 전 애인들이 빨아 주던 거랑 비교하면 어때? 그중에서도 내가 세 손가락 안에는 들지?”
“입 닫고 운전만 좀 해라, 어?”
“너 애인 몇 명 사귀어 봤어?”
“신경 꺼.”
“섹스는 지금까지 총 몇 명이랑?”
“신경 끄라고.”
“아니, 왜 저렇게 비밀스러운 척이야, 계속.”
“넌 몇 명인데. 그렇게 떠들고 싶으면 네 얘기나 존나 처하든가.”
명선은 입을 다물고 이제껏 짧게 만나 섹스하고 헤어진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와. 그러고 보니까 꽤 많긴 하네. 지금 짧게 기억나는 것만 그 정도면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은 거겠지?
진짜 열심히 살았다, 권명선. 그렇게 해댔는데 스킬이 안 늘 수가 없지.
아닌가? 스킬이 좋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며 수없이 해댄 건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거군.
“다 기억나진 않는데.”
명선이 입을 떼자 재강이 흠칫하며 치를 떨었다.
“으, 입을 좀 다무나 했더니.”
“오륙십 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니, 육칠십 명?”
재강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명선을 쳐다봤다.
“……뭐? 애인이?”
“아니, 섹스한 사람.”
“…….”
“그리고 연애는 한…….”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려던 명선은 예전에 재강을 설득하던 도중 ‘연애를 하도 많이 해봐서 질린다’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단 걸 아슬아슬하게 기억해 내고 얼른 말을 멈췄다.
“한…… 열 번 정도?”
“…….”
“많이 하니까 질려. 이제 그런 거 뭐 하러 하나 싶기도 하고.”
“…….”
“연애는 질리는데, 섹스는 아무리 해도 안 질리는 것 같다.”
재강은 말없이 다시 창밖을 봤다.
“내 얘기했으니까 이제 너도 말해 줘야지. 기브 앤 테이크.”
“자진해서 말해 놓고 뭐가 기브 앤 테이크야.”
“에이, 그래도 예의상 좀 풀어 놔라. 나만 너무 털었잖아.”
“…….”
“대화라는 게 서로 오가는 맛이 있어야지,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사회 부적응자처럼 입 닫고 있을 건데?”
“난 한 명이야.”
재강이 귀찮음 가득한 투로 말하고 팔짱을 꼈다.
명선은 살짝 찡그린 채 눈만 깜박이며 운전하다 재강을 몇 번 힐끔거렸다.
재강은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있었다.
“한 명?”
“그래.”
“……뭐가? 애인? 섹스?”
“……섹스.”
“…….”
잠깐만.
그 통영으로 도망간 애인이랑 섹스한 게 전부란 건가?
평생 한 명이랑 섹스했는데, 그런 애인이 그런 식으로 도망가기까지 한 거라고?
뭐야, 이 좆같은 인생은?
명선은 한참 혼란스러운 표정인 채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애인 말하는 거지? 통영으로 도망간 애인.”
“…….”
“그 애인이 유일한 섹스 상대였…….”
“그래.”
재강이 얼른 명선의 말을 끊었다.
……정말?
씨발, 뭐야, 이거. 불쌍해서 어떡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주님, 이 어린양 좀 어떻게 해줘 봐요.
이 사람이 누구냐면 주님의 열성 팬 임양자 씨 막내아들의 섹파거든요? 그 정도면 건너건너 축복 좀 내려 줄 수 있지 않아요?
와, 이거 뭐야, 이런 인생 뭐야, 도대체.
명선은 진심으로 안 됐다는 표정이 스며 나오는 걸 필사적으로 감추며 묵묵히 운전했다.
섹스할 사람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통영까지 도망가 버린 거면…… 핸드폰 빠갤 만하네.
그래, 기분 진짜 처참하겠지. 인정. 핸드폰 정도로 그친 게 대단한 거다.
어, 잠깐만…… 혹시 그 하나뿐인 애인과의 섹스가 별로였던 건가? 그래서 내가 빨아 주고 만져 줄 때마다 그렇게 활활 타오른 건가?
아아. 그렇지? 역시 그렇지?
웬일이니. 애인이랑 재미없는 섹스만 하다가 내가 강림하고 나서 너한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지롤지롤하면서도 나를 끝끝내 쫓아내질 못하고.
그렇게 보면 주님이 축복을 내려 주시긴 한 거네. 나를 너의 곁으로 보내서.
야, 너도 우리 엄마한테 고마워해야겠다. 우린 다 우리 엄마 신앙심에 빚을 진 거야.
어느새 뿌듯함이 솟아오른 얼굴로 명선은 푸후훗 웃었다.
재강이 미간을 찡그린 채 명선을 쳐다봤다.
“또 기분 나쁘게 혼자 처웃어?”
“아유, 왜 그래. 오늘 아침 섹스 떠올리니까 기분 좋아서 그러는 건데.”
“…….”
너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하나뿐인 애인 도망가서 섹스도 못 하고 혼자 늙어 죽을 뻔했는데.
뭐, 나도 네 애인 도망간 덕에 너랑 이렇게까지 즐겁게 살게 됐고. 서로서로 고마워하면서 살아야겠네.
“우린 참 잘 맞는 것 같다.”
명선이 나직이 말하고는 재강에게 필살기 미소를 따사롭게 날려 주었다.
재강은 찡그린 얼굴 그대로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 * *
“새 폰 생기니까 좋아?”
음식을 주문한 후 명선이 재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재강은 좀 전에 새로 산 핸드폰을 켜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좋을 게 뭐 있어. 그냥 폰이지.”
“성질을 좀 죽이고 살았으면 폰 빠개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
재강이 눈만 들어 명선을 한 번 노려보고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아니야. 근데 괜히 길 가는 사람 때리는 것보단 훨씬 나은 행동이었다고 봐. 자기 물건 부수기. 딱 너만 손해 보는 거잖아.”
“네 의견 필요 없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명선이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아 한숨을 쉬었다.
“아, 나도 내 폰이 필요해.”
“두 시간 있다 오랬는데 그것도 못 참냐?”
“반려동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봐. 맨날 붙어 있다가 갑자기 두 시간이나 떨어져 있으면 그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어. 난 지금 내 폰이 너무 걱정된다.”
“애초에 반려동물이 아닌데 왜 반려동물 취급을 해.”
“너 비유법 몰라?”
“어휴, 시끄러워.”
재강이 핸드폰을 끄고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 빨리 네 반려동물이 있어야 네가 좀 닥치고 있겠다.”
“그치.”
명선이 킬킬 웃었다.
“야, 근데 아까 나는 솔직히 네가 액정 수리비 내준다고 할 줄 알았거든? 웬걸? 견적 낼 때 옆에서 존나 입 다물고 있더라?”
재강이 코웃음을 쳤다.
“네 뻘짓으로 박살 난 걸 내가 왜 내.”
“진짜 찍으려고 했던 거 아니라니까?”
“네 의도를 내가 알 게 뭐야? 어쨌든 카메라 들이대고 있다가 걸렸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고지식해?”
“그게 고지식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 변태 새끼야.”
음식이 서빙되는 동안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골 쥐야, 이게 바로 태국 음식이야.”
서버가 떠난 후 명선이 음식을 가리키며 한껏 친절한 투로 말했다.
재강은 아무 말 없이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저었다.
“너 고수 먹어?”
명선이 추가 주문한 고수를 자신의 국수 그릇 안에 듬뿍 넣으며 물었다.
재강은 명선의 그릇을 힐끗 봤다가 고수 그릇을 쳐다봤다.
“맛봐 봐. 맛보고 괜찮으면 넣어. 난 고수 좋아해서 왕창 넣어 먹어.”
“…….”
재강이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수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맛 특이하지?”
재강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그릇에 남은 고수를 모두 국수 그릇 안에 털어 넣었다.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더니 정말 그러네. 나랑 식성도 맞고.”
명선이 클클 웃고 식탁 구석에 있던 양념통을 뒤적였다.
“국물 한번 먹어 보고 이런 거 추가해도 돼. 냄새 맡아 보면 대충 뭔 맛인지 알 거야. 이건 그냥 설탕이고.”
명선이 국수 그릇 안에 이것저것 넣는 동안 재강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자신의 그릇을 들고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맛이 어때? 먹을 만해?”
재강이 고개를 끄덕이고 국수를 듬뿍 집어 입에 넣었다.
명선은 흐뭇한 얼굴로 그런 재강을 바라봤다.
“잘 먹는 사람한테 밥 사주는 게 제일 좋다니까.”
“그만 쳐다보고 네 거나 먹어.”
“알았엉.”
아, 시골 쥐한테 경험을 선사하는 맛이란 게 또 있네. 인간이 은근히 무던해서 잘 따라오기도 하고. 후후.
“그럼 너 데이트할 땐 주로 뭘 먹었어?”
아까 차 안에서 한 대화 때문인지, 명선은 거리낌 없이 질문했다가 아차 하며 재강의 눈치를 살폈다.
짜증 내려나?
아니, 근데 뭐 짜증 내면 어때.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하는 거고, 해도 상관없으면 하겠지.
재강은 얼마간 말없이 그릇만 보며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걘 한식 파야.”
“‘걘’? 그럼 넌? 넌 무슨 파야?”
재강이 눈을 들어 명선을 쳐다봤다.
“뭐?”
“넌 뭘 좋아하냐고. 그냥 그쪽이 먹자는 대로 먹는 거야?”
“뭘 그런 걸 따져. 아무나 먹고 싶은 걸 먹으면 되는 거지.”
“근데 그 아무나가 항상 네가 아니라 그쪽이었냐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뭐, 남들은 연애를 어떻게 했나 궁금해서리.”
명선이 배시시 웃고는 샐러드를 입에 넣고 아작아작 씹었다.
“연애를 열 번 넘게 했다는 놈이 궁금할 게 뭐가 있어?”
재강이 투덜거리며 춘권 튀김을 집어 한입 물었다가 얼른 뱉었다.
“뜨거, 씨벌!”
명선이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섰다.
“맨날 쓸데없이 비밀스럽게 구니까 그렇게 벌 받는 거야.”
“아, 씨.”
재강이 찌푸린 채 물을 마시는 동안 명선은 주방에 부탁해 얼음 띄운 물을 가져왔다.
“마셔.”
재강은 컵을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봤다가 후릅 후릅 마셨다.
“……고맙다.”
“나 오늘도 너희 집에서 자야징.”
“뭐?”
“오늘 자고 내일 같이 출근하자.”
“넌 으리으리한 집도 있는 놈이 왜 자꾸 우리 집에서 자려고 해?”
“으리으리한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뻔하지, 뭘.”
“하긴, 너희 집에 비교하면 으리으리하긴 해. 인정.”
재강은 한숨을 내쉬며 얼음을 으적으적 씹었다.
“언제 놀러 와. 우리 집 투어 시켜 줄게.”
“됐어.”
“서울 온 김에 지금 갈래?”
“됐다고.”
“먹고 나서 뭐 할까?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집에 갈 거야. 빨래해야 돼.”
“그럼 내 폰 찾은 다음에 같이 너희 집 가서 빨래하고 섹스하면 되겠다.”
“넌 너희 집으로 가. 나는 버스 타고 갈 테니까.”
으이그, 또 딴소리 한다. 나랑 같이 있고 싶으면서 아닌 척은.
“일단 먹자.”
명선은 웃음을 삼키며 춘권 튀김을 하나 집어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 좀 데려가 보실까.
* * *
“뉴 버전 오브 반려동물.”
명선이 말끔히 수리된 핸드폰을 재강의 얼굴 앞에 흔들어댔다.
재강은 말없이 명선의 팔을 걷어냈다.
“숯불, 너는 이걸 교훈 삼아서 성질을 좀 죽여. 네 성질 때문에 네 폰도 빠개지고 내 액정도 빠개졌잖아.”
“이걸 교훈 삼아서 너나 변태 짓 좀 그만해.”
명선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자 재강도 곁에 섰다.
명선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집에 혼자 버스 타고 간다고 하더니만 내 폰 수리 끝날 때까지 같이 얌전히 기다려 주고, 내 차 주차된 곳으로 가는 지금도 내가 가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고 있단 말이지.
나한테 완전히 말렸어.
야, 증말, 귀여운 짓 좀 그만해.
츤데레라고 놀려대고 싶긴 하지만, 인간이 고집스러운 데가 있으니까 괜히 상기시켜서 망치지 말고 얌전히 차까지 데리고 가자.
재강은 계속해서 명선을 무심히 따라 걸어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왔다.
재강이 차를 보고 갑자기 마음을 바꾸며 이만 헤어지자고 고집이라도 피울까 봐 명선은 잠시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재강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명선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고 운전석에 올랐다.
오늘 착하네, 숯불.
이대로 우리 집에 갈 때까지 계속 착하게 굴어 주면 참 감사할 거야.
어차피 내가 운전대를 잡은 이상 네가 뭐 어쩔 수는 없겠지만.
명선이 운전하는 동안 재강은 누군가와 문자 대화를 하는 듯했다.
“숯불, 친구 있어? 누구랑 대화해?”
“신경 꺼.”
“동네 사람? 의뢰 들어온 거야?”
“그래.”
“오늘 뭐 해달래?”
“월요일에.”
“뭔데?”
“화분 좀 옮겨달라고.”
재강은 계속 상대와 문자 대화를 나누며 명선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뭔데? 꽃집?”
“가정집인데…… 베란다 공사하느라 들여놨던 걸 다시 베란다로 옮기는 거야.”
“그런 걸 돈 주고 누구 시키기도 하는구나.”
“화분이 많으니까. 무거운 것도 있고.”
아이고, 대답도 잘하네, 우리 착한 숯불.
명선은 그런 재강을 몰래 힐끔대며 조심스레 자신의 집 쪽으로 운전했다.
한동안 문자 대화에 집중하던 재강은 어느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택가와 도로, 항구 등의 모습이 화면 위로 얼핏얼핏 스쳐 가는 듯했다.
“뭐 찾아? 어디 가게?”
명선이 묻자마자 재강은 퍼뜩 핸드폰을 껐다.
“그냥.”
말없이 창밖을 보던 재강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자 명선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 씨, 그냥 지도나 보게 둘걸. 거의 다 왔다구, 거의.
명선은 두리번거리는 재강을 옆 시선으로 느끼며 계속 앞만 보고 운전했다.
“……뭐야? 여기…….”
“잠깐 우리 집에 좀 들렀다 가려고.”
명선이 얼른 재강의 말을 가로막았다. 눈은 여전히 앞쪽만 보는 채였다.
재강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뭐?”
“속옷 좀 챙기게. 계속 네 거 빌려 입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너한테 줄 것도 있고.”
명선이 흐흐 웃었다.
“……줄 거?”
“어. 좀 무거운 거라.”
“뭔데?”
“일단 가서 봐.”
명선이 재강을 슬쩍 보고 짧게 미소를 날렸다.
재강은 뒤통수를 긁적이다 다시 스르르 시트에 기대앉았다.
혹했네, 혹했어. 역시 너도 어쩔 수 없구나. 짜식.
그래, 얌전히 있어라.
명선은 흐뭇한 마음인 채 열심히 운전해 자신의 아파트로 갔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엔 그냥 차 안에서 기다리겠다는 재강을 부득부득 끌고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냥 갖고 내려오라니까, 도대체…….”
재강이 한쪽 구석에 기대서서 툴툴거렸다.
“무거워서 혼자 못 든단 말이야. 가볍게 심부름센터 일처럼 한다고 생각해.”
12층에 내려 명선이 앞서고 재강이 따라왔다. 명선은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 몇 호게?”
“내가 알 게 뭐야.”
“1203호야.”
명선이 1203호 앞에 멈춰 키패드를 눌러서 문을 열었다.
“지금 아무도 없어.”
“여기 있을 테니까 가지고 나와.”
재강이 문을 잡고 서자 명선이 그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참, 무거워서 혼자 못 든다니까요. 좀 도와주십쇼, 예?”
“…….”
“돈 줘야 되는 거야? 얼마 줘야 되는데?”
“……됐어.”
재강이 한숨을 쉬고 명선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집에 아무도 없고, 늦게까지 아무도 안 오니까 걱정 마.”
“걱정을 왜 해.”
“여기가 현관이고, 이쪽이 내 방, 저긴 서재, 저기가 옷방…….”
“야, 소개 필요 없으니까 준다는 거나 빨리 가져와.”
“뭐 좀 마실래?”
명선이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재강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와, 내 방 진짜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
명선이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옷들을 주워들며 방 안쪽으로 갔다.
명선은 옷들을 의자에 걸쳐두고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은 어쩐지 어색한 표정인 채 문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집안은 넓고 고요했다.
그러고 보니 섹스 상대를 집에 데려온 건 처음이었다.
재강이 머뭇머뭇 방 안을 힐끔대는 모습이 명선의 눈에 들어왔다.
“숯불, 이리로 와.”
재강이 명선과 눈을 맞췄다.
“뭐 준다며.”
“아, 이리로 와야 주지. 혼자 못 든다고 몇 번을 말했냐.”
재강은 조금 망설이다 명선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재강이 가까워지자 명선은 곧장 재강의 가슴을 턱 붙잡았다.
“뭐, 씨발.”
재강이 뒤로 물러나자 명선은 얼른 그만큼 가까이 다가붙었다.
“줄 거 있다고 했잖아, 숯불. 받아야지.”
“아, 그게 뭐냐고, 씨발아.”
“나라고, 씨발아.”
명선이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낮춰 재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 이런 미친놈이……!”
주춤주춤 밀리던 재강이 침대에 걸리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물론 명선은 재강이 이렇게 침대에 걸려 넘어지리라는 것도 모두 계산을 해둔 위치에서 움직인 참이었다.
“장소만 바뀌어도 느낌 확 달라지는 거 알지? 어제도 모텔에서 느끼지 않았냐?”
명선이 재강의 위에 엎어져 그 몸을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러댔다. 재강이 명선의 양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둘은 서로를 부여잡고 침대 위에서 몸을 뒤틀어댔다.
“여기서 하고 같이 너희 집 가자. 거기서 하고, 같이 자고, 내일 아침에 하고, 점심에 하고, 그리고 같이 출근하는 거야. 어때?”
“뭔…… 사람, 말려 죽일 일 있냐!”
“난 너랑 그렇게 매일 하고 싶어. 말라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명선이 재강의 목에 입술과 코를 바싹 붙이고 헐떡였다.
명선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재강의 손이 등으로 미끄러졌다.
명선은 재강의 목에 입을 맞추다 그 위에 붙어 있던 밴드 끝을 혀와 이로 열심히 뒤채 살짝 뜯어냈다.
“야, 뭐 하는, 거야.”
재강이 명선의 등을 쥐고 꿈틀거리며 낮게 말했다.
어느새 둘의 성기는 서로에게 바짝 붙어 열심히 문질러대는 중이었다.
명선은 밴드 끝을 이로 물고서 완전히 떼어냈다. 찌익, 소리가 나고 재강이 작게 신음했다.
명선은 밴드를 푸, 뱉어내고 곧장 재강의 목에 난 키스 마크 위로 입술을 덮었다.
뜨겁고 얇은 피부가 명선의 이 사이로 빨려들어 왔다.
“윽…….”
재강이 부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명선은 입천장이 아플 정도로 그 피부를 힘껏 빨면서 성기를 재강의 것에 맞대고 문질러댔다.
얼마간 그렇게 세게 빨다가 입을 떼고 거의 검붉게 변한 그 자욱 주위를 돌며 가볍게 키스했다.
조금씩 옮겨가 귀 뒤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입술 끝으로 간질이다 쪽 빨았다.
재강의 손이 명선의 등을 꽉 쥐었다 놓고 다시 꽉 쥐었다 놓으면서 아래쪽으로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손이 명선의 엉덩이를 움켜쥐자 명선은 작게 탄성을 지르듯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아. 숯불.
나를 줄게.
나를 가져가.
* * *
“아, 하아, 하, 씨…….”
명선은 재강이 미는 대로 밀리며 거칠게 신음했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누운 채 한쪽 손은 위로 올려 시트를 그러쥐고, 다른 손으론 자신의 성기를 문질러댔다.
재강은 명선의 가슴과 배, 명선이 문질러대는 그 붉은 성기를 훑어보며 몸을 부딪쳐댔다.
명선의 무릎 뒤쪽이 땀에 젖어, 그곳을 쥔 재강의 손이 미끄러졌다.
곧 명선이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재강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가 더듬거렸다. 그 손이 재강의 팔뚝과 배, 가슴을 차례로 더듬으며 올라갔다.
재강은 가볍게 흔들리는 명선의 가슴을 바라보다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피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퍽퍽 밀쳐지는 명선의 이마 위에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흔들렸다.
명선은 재강의 입술로 시선을 내렸다.
살짝 벌어진 재강의 입술 사이에서 곧 혀가 나와 그 입술을 축이고 도로 들어갔다.
아 저 입술.
너무 빨고 싶다.
저 혀랑 입술.
도대체 언제 할 수 있는 거지.
명선은 재강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달싹거렸다.
이제껏 이 정도로 키스를 원했던 적이 없었다. 키스를 이 정도로 거부하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넌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걸 대체 어떻게 참아? 섹스하면서 어떻게 키스를 안 할 수가 있어?
명선이 다시 재강의 눈을 봤다.
재강은 여전히 명선의 얼굴을 바라보는 채였다. 손이 미끄러지자 재강이 명선의 무릎 뒤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
“키스, 할래?”
명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강이 벌어져 있는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저것 봐. 너도 하고 싶잖아.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 아니냐구.
도대체 뭐 땜에 이런 걸 참아야 되는데.
“하자…… 잠깐만. 응?”
“…….”
“정말, 짧, 게라도, 제발.”
툭툭 끊어지는 명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강은 한쪽 손을 쓸어내려 명선의 성기를 붙잡았다.
재강은 명선의 성기 끝부분에 침을 뱉고 대충 훑어 적신 후 빠르게 문질렀다.
“아아아하아…….”
뒤에선 정확한 곳을 찔러대고, 앞에선 정확한 곳을 꽉 조이는 자극에 명선의 미간이 더 찡그려졌다.
아휴, 이 섹스 마에스트로 새끼.
명선은 턱을 점점 더 치켜올리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재강의 허벅지를 잡은 명선의 손가락이 그 피부를 뚫고 들어갈 듯했다.
재강은 사정하는 순간 명선의 그 손을 꼭 쥐었다.
* * *
휴지로 몸을 닦은 명선이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재강의 배에 머리를 댔다.
눈을 감은 채인 재강은 그런 명선을 밀쳐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명선은 재강의 배를 베고 누운 채 몸속에서 나른함과 간질거림의 잔여물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재강이 숨을 쉴 때마다 명선의 머리가 가볍게 오르내렸다.
살짝 열린 창을 통해 아래쪽 멀리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아득하게 흘러들어오고, 천장 한쪽엔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비쳐 가볍게 일렁이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아, 천국이다.”
명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100퍼센트 몸의 식스 팩을 느긋하게 베고 눕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누가 알았겠냐.”
“…….”
“내가 올해 운이 좀 트이나 봐. 하긴, 나도 나름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았거든. 엄마가 교회 다니면서 쌓은 마일리지도 좀 한몫하는 것 같고.”
“…….”
“여기서 키스까지 하면 딱 좋은데, 고건 아직도 영 안 내키나 봐?”
“어으, 시끄러워. 혼자 쫑알쫑알…….”
재강이 투덜거렸다. 명선이 킥킥 웃고 일어났다.
“마음 바뀌었나 확인해 본 거야. 계속 체크할 거라고 했잖아. 뭐, 아직은 아닌가 보네.”
명선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 이곳저곳을 뒤적거렸다.
“덥지? 에어컨 틀어 줄게.”
베개 아래에서 리모컨을 겨우 찾아낸 명선이 에어컨을 틀고 바닥에 흩어진 옷들을 주워 모았다.
“숯불, 뭐 좀 마실래? 시원한 거 줄까?”
“……됐어.”
명선이 옷들을 의자에 걸쳐두고 침대로 갔다.
침대에 두 손을 짚고 기대자 재강의 몸이 살짝 기울어졌다.
“너 아까 데인 곳은 괜찮아? 얼음물 줄까?”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재강은 명선을 힐끗 보고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입 벌려 봐. 한번 보자.”
명선이 재강의 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을 들이밀자 재강이 곧장 밀어냈다.
“아, 괜찮다고. 오바 떨지 마.”
물러난 명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문 쪽으로 갔다.
“사람이 걱정을 하면 좀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수작 부리는 거 누가 모르냐?”
“은근히 눈치가 빠른데?”
명선이 킬킬 웃으며 방을 나갔다.
후딱 씻고 또 질척대야징.
신난 얼굴의 명선은 최대한 빠르게 샤워하고 밖으로 나오며 괜히 고래고래 재강을 불러댔다.
“숯불! 숯불!”
재강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숯불, 숯불.”
명선은 머리에 수건을 덮은 채 방으로 총총 달려들어 갔다.
재강은 침대에 그대로 늘어져 누워 천장을 보는 채였다.
“샤워하려면 해. 씻고 같이 너희 집 가자.”
명선이 재강의 배를 가볍게 문지르고 서랍장 쪽으로 갔다.
“넌 왜 가. 집에 온 김에 여기 있지.”
“내가 줄 거 있다고 했고 너는 받았잖아. 그거 집에 안 가져갈 거야? 준 사람의 성의도 생각을 좀 해야지.”
명선은 속옷을 꺼내 입으며 재강을 향해 빙글빙글 웃었다.
재강이 느릿느릿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 팬티 갈아입을 거면 내 거 입어. 이번엔 내가 빌려 줄게.”
방을 나가는 재강의 뒤에 대고 명선이 외쳤다.
“아, 욕실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집이 너무 넓어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
명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재강은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길 잃으면 바로 전화해! 아, 너 내 번호 모르지! 소리를 꽥 질러도 되고!”
명선은 계속 나불거리며 배낭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속옷과 옷, 향수, 로션 따위를 선별해 넣고 주방에 가 찬장과 냉장고를 뒤적대기도 했다.
“목에 붙일 거 내놔, 이 새끼야.”
얼마 후 샤워를 끝낸 재강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으르렁거렸다.
재강의 목에 있는 키스 마크는 더 진해지고 커진 상태였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보던 명선이 침대 옆 탁자에 있던 큼지막한 밴드를 집어 흔들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놨어.”
재강이 그 밴드를 낚아채 거울 앞으로 가 목에 붙이는 동안 명선은 서랍장 앞으로 갔다.
“빨간 팬티 줄까, 파란 팬티 줄까?”
명선이 두 가지 색의 속옷을 양손에 들고 재강 쪽으로 내밀었다.
재강은 그 앞을 지나쳐 가 말없이 자신의 속옷을 집어 들어 입었다.
“너는 참 소통을 못 해.”
명선이 속옷들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고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난 밀린 빨래랑 청소도 해야 하고 바빠. 다 하고 나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쉴 거야.”
재강이 옷을 입으며 명선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괜히 옆에서 손님 접대가 형편없다느니 뭐라느니 시끄럽게 굴 거면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라.”
“갑자기 안 어울리게 남 걱정을 하고 계세요. 내가 알아서 하는 거지.”
“암튼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재강이 옷을 다 입고 곧장 방문 쪽으로 가자 명선은 서둘러 에어컨을 끄고 배낭을 메며 그 뒤를 따랐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은 재강이 뒤쪽을 힐끗 봤다가 흠칫하며 돌아섰다.
“씨발, 배낭 뭐야? 뭐가 이렇게 뚱뚱해?”
명선은 속이 가득 찬 큰 배낭을 등에 멘 채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뚱뚱하다고 지적을 해? 암튼 아저씨들 빻아가지고.”
명선이 시큰둥한 얼굴로 재강을 살짝 밀어내고 신발을 신었다.
“배낭…… 아니, 뭘 잔뜩 가져가냐고, 새끼야. 너 이거 우리 집에 가져가는 거야?”
“필요한 것 좀 챙겼어. 내가 손을 좀 많이 타서리.”
명선은 피식 웃어 주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재강은 대체 뭔 개소리냐는 표정인 채 명선을 따라 나왔다.
“오늘은 위스키 마시자. 같이 먹으면 좋은 초콜릿도 몇 개 챙겼어.”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명선은 그저 신난 얼굴이었다.
“야,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쉴 거라고 얘기했지.”
“아무 생각 없이 쉬어.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아무 생각 없이 떡도 치고. 그럼 되잖아.”
“…….”
한숨을 쉬는 재강을 바라보며 명선은 싱글거렸다.
“마시라고 강요는 안 할게. 근데 나는 그 루프탑 바에서 이걸 좀 마셔 봐야겠어. 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옆에서 쉬고 있어도 돼. 정말 아아아무 생각 없이.”
“한심한 새끼…….”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재강이 먼저 나갔다.
“이쁘게 찹찹 박는 인간이라 그런가 말도 참 이쁘게 하네?”
명선은 앞서가는 재강의 뒤를 따르며 킬킬댔다.
재강이 조수석에 오른 후 명선은 뒷좌석에 배낭을 던져 넣고 운전석에 탔다.
재강은 그 뚱뚱한 배낭을 바라봤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넌 도대체 왜 이렇게 우리 집에 못 와서 안달이야? 그냥 저 시원하고 널찍한 데서 편안히 빈둥댈 것이지.”
“뭔 소리래, 집 때문에 가나? 네가 있으니까 가지.”
명선은 시동을 걸고 앞 유리 너머로 양옆을 둘러봤다.
“네가 우리 집에 계속 있겠다고 했으면 나도 여기 있었겠지. 근데 너는 자꾸 너희 집으로 간다고 칭얼대고, 나는 너랑 같이 있고 싶고. 그럼 내가 움직여야지. 안 그래?”
“…….”
명선이 운전해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재강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창밖만 바라봤다.
* * *
“뭐 하는 새끼야, 저거.”
명선이 배낭에서 수박 한 통을 꺼내 냉장고에 넣자 재강이 낮게 탄식했다.
명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뒤이어 초콜릿과 음료 따위도 꺼내 차곡차곡 넣었다.
“냉장고가 텅텅 비어서 채워 넣는 맛은 있네. 야, 저녁에 뭐 먹을까?”
재강은 말없이 현관 쪽에 있는 세탁기 앞으로 가 옷들을 집어넣었다.
“저기 골목 들어오는 쪽에 있던 삼겹살집 괜찮아 보이던데. 아니면 차 타고 시내 나가서 먹을래?”
“뭘 또 멀리 나가.”
“저 삼겹살집 가 봤어? 어때?”
“그냥 평범해.”
“그럼 저기 가서 1차 하고 2차로 위스키 따자.”
“네 팬티나 가져와. 빨게.”
“얼마든지 빨아 주세요.”
명선이 침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신의 속옷을 재강에게 가져다주며 히죽댔다.
재강은 옷들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입고 있던 티셔츠도 훌렁 벗어 넣었다.
“어휴, 몸 좀 봐라.”
명선이 감탄하며 재강의 등을 훑어봤다.
재강은 명선을 무시하며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명선은 얼마간 재강이 침대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재강은 베개를 집어 들었다가 명선이 그 밑에 뒀던 콘돔들을 발견하고도 치우지 않고 도로 베개를 그 위에 내려놨다.
귀여운 녀석.
지금 시작해서 세탁기 돌아갈 시간 정도만 한 판 하면 딱 좋을 텐데.
근데 내가 덤비면 분명 청소해야 되네 어쩌네 하면서 짜증 내고 빼겠지? 그리고 좀 전에 우리 집에서 하고 오는 바람에.
아…… 그냥 벗고 서로 몸 빨면서 누워 있어도 좋겠고만. 분명 그건 고분고분하게 할 리가 없고.
체력을 비축해 뒀다가 이따 술 좀 들어갔을 때 찔러보는 게 나으려나.
명선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배낭 앞으로 가 짐을 마저 풀었다.
“아 씨, 리넨 옷은 괜히 가져왔나? 숯불, 집에 다리미는 있지?”
명선이 리넨 셔츠를 탈탈 털고 주름진 곳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종잇장 같은 걸 뭐 하러 입고 돌아다니는지.”
재강이 옷장 구석에서 다리미를 꺼내 명선에게 보여주고 서랍장 위에 내려놓았다.
“패션도 모르는 게 뭐라고 떠드는지.”
명선이 고개를 저으며 옷걸이에 셔츠를 걸고 옷장 안에 넣었다.
“너는 잘 알아서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냐?”
“숯불. 이 세상에서 패션에 관해 훈계할 자격 없는 첫 번째 사람이 바로 너야. 어디다 함부로 의견을 내?”
“훈계하는 거 아니고 욕하는 거야.”
“자리가 별로 없는데…… 야, 이거 네 옷 아니지?”
옷장 안을 뒤적이던 명선이 오른쪽에 걸려 있던 셔츠를 빼 들여다봤다.
오른쪽과 왼쪽을 나눠 어쩐지 재강이 입을 법하게 보이지는 않는 옷들이 오른쪽에 모여 있었다.
재강이 돌아보고는 바로 눈을 부라렸다.
“야, 손 안 떼?”
“발끈하긴. 애인이 놓고 간 옷이구만?”
명선이 킥킥 웃었다.
“손대지 말라고, 새끼야.”
재강이 이쪽으로 오려고 하자 명선이 얼른 셔츠를 제자리에 걸었다.
“아이고, 알았어요. 안 건드려.”
“…….”
재강은 우뚝 서서 못마땅한 얼굴로 명선을 노려보다 다시 몸을 돌리고 침대를 마저 정리했다.
“여기 왼쪽에 있는 건 다 네 옷 맞지?”
명선은 재강의 것으로 보이는 재킷과 저지 따위를 옷걸이에서 훌렁훌렁 빼내고 그 자리를 자신의 옷으로 채워 넣었다.
빼낸 재강의 옷들은 한쪽에 쌓인 상자 위에 대충 올려놓고 서랍 안에 속옷과 티셔츠, 양말도 살뜰히 넣었다.
“아,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지루한 팬티 빌려 입는 것도 별로였고.”
“…….”
“사람이 어디 한구석은 화려하게 꾸미는 재미가 있어야지 말이야.”
침대 정리를 끝낸 재강은 아무 말 없이 상자 위에 걸쳐져 있던 자신의 옷들을 접어 한쪽에 쌓았다.
은근히 무던하면서 또 은근히 까다롭단 말이지.
명선은 침대에 누워 건들대며, 이것저것 쓸고 닦고 정리하는 재강을 구경했다.
애인 것만 터치 안 하면 내가 자기 집을 점거하건 말건 크게 신경 안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도망간 애인 옷은 왜 다 끌어안고 있는 거야.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그딴 식으로 도망간 사람이면 다시 돌아와서 받아달라고 싹싹 빌어도 걷어차야지.
으이구, 넌 자존심도 없냐? 처량한 놈.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님 순정파라고 봐야 하는 건지 원.
그 애인이란 인간도 참……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