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재강 (14/28)

2부. 재강

“어후, 씨.”

명선의 몸에서 내려온 재강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 안은 훤하고,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두 차례나 요란한 짓을 벌였으면서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명선은 또 달려들었고 재강은 또 말려들었다.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도 명선이 스르르 다가와 건드리면 몸 곳곳에 금세 불이 붙었다.

명선은 재강의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그 불을 켤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섹스를 원하는 명선도 놀라웠지만, 거기에 계속 장단을 맞추는 자신도 놀라웠다.

재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간 대비 섹스를 자주 하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주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는 건 좋았다. 그러니 자꾸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명선은 뭐든지 왕성했다. 성욕도, 식욕도 왕성하고 말도 늘 많았다.

그런 명선과 붙어 있다 보니 재강도 섹스를 많이 하고, 많이 먹고, 많이 마시고, 평소의 두 배는 되는 양의 말을 했다.

명선이 거침없이 내뱉는 욕정 어린 말들도 재강을 흥분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는데, 가장 강렬한 건 그의 오럴 섹스 능력이었다.

경험이 없어 비교할 곳도 없으니 명선이 유달리 잘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맨 처음 명선이 자신의 것을 빨았을 때, 재강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준원의 몸 안으로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그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입술과 혀의 감촉. 목구멍 끝까지 깊숙이 들어가 닿았던 말랑한 근육의 감촉. 뜨겁게 젖어 있던 점막의 감촉.

그 와중에 단단한 이가 가끔 스칠 때마다 선득하던 느낌.

준원과 섹스할 땐 늘 재강이 준원의 것을 열심히 빨았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준원이 원하는 만큼.

그래서 준원이 흥분하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흥분이 되고 만족스러웠다.

준원이 같은 걸 해주길 바란 적이 있긴 했지만, 요구하거나 티를 낸 적은 없었다. 준원이 상대에게 해주는 것보단 받는 걸 좋아한단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런데 명선에게서 오럴을 받고 나니, 재강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준원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흥분시키고 만족시키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지.

그리고 준원과의 섹스가 정말 좋기는 했는지, 자신에게 반문하는 수순에까지 이르렀다.

재강이 아는, 그리고 경험해 본 섹스는 준원과의 것이 전부였고, 준원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그 섹스도 최상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명선과의 섹스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재강은 이제야 비로소 ‘두 사람이 함께하는’, ‘상호 작용하는’ 섹스를 하게 된 것만 같다고 느꼈다.

재강에게 반응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한없이 달아올랐음을 표현하는 명선의 몸.

명선의 몸에서 흥분을 끌어올리는 힘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자신은 그에 적셔지는 듯했다.

준원에 의해 흥분하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에 더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명선이 곁에 있으면 도중에 깨거나 뒤척대지 않고 깊이 잘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준원과 떨어져 있을 때 재강은 늘상 수면 장애를 앓듯 했다.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무리해가며 두어 개씩 하게 된 건 그 때문이기도 했다. 피곤해 기절하듯 잠이 들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약을 먹거나, 술을 잔뜩 마시고 억지로 잠이 오게 만들기도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안 오는 날이 있고, 약이 매번 잘 드는 것도 아니었고, 매일 곯아떨어질 때까지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대체로는 그저 자다 깨다 반복하며 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명선 곁에선 도중에 깨지도 않고 편안하게 잘 잤다.

그걸 처음 깨달은 건 명선과 두 번째로 연꽃 모텔에 갔던 날 아침이었다.

도중에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편히 자다 일어난 것이었다.

숙면의 필수 요소가 준원이 아니라, 단지 옆에 누군가 있으면 됐다는 건가 싶어 잠시 혼란에 빠졌던 재강은 그날 밤 퇴근 후 찜질방에 가기까지 했다.

수면실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자며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결국엔 멀쩡한 집 놔두고 뭐 하는 건가, 한심한 마음이 들어 씻기만 하고 곧장 나오긴 했지만.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와 평상에서 소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명선이 나타난 것이었다.

말 걸지 말라는 미션 때문에 안달하다 갑자기 무시하더니 불현듯 그렇게.

그런 명선을 보고 당황하면서도, 재강은 동시에 다행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준원과 통화 후 핸드폰을 부순 날도 그랬다.

그런 엉망인 기분인 채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갑자기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명선은 굳이 재강이 배려하거나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고, 최대한 저자세로 나오기까지 했다.

재강은 명선을 거절할 수도,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명선은 자꾸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희미한 반가움을 불러일으키며 틈을 파고들었다.

“어젯밤에…….”

옆에 가만히 누워 같이 숨을 고르던 명선이 입을 떼자 재강은 얼른 생각을 멈췄다.

“난 진짜 좋았다.”

“…….”

재강이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제어를 못 하고 명선에게 리밍을 하고 말았다.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다’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도 계속 유혹적으로 보이던 엉덩이였다.

거길 빨았을 때 명선의 반응이 어떨지도 적잖이 궁금했던 차였다.

볼 때마다 준원에게 하던 대로,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리고서 얼굴을 파묻고 그 구멍을 핥는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혀를 넓게 펼쳐 핥고, 쯥쯥, 소리를 내며 빨고, 혀끝으로 할짝대고, 혀를 꼿꼿이 세워 밀어 넣고, 쪽, 소리를 내며 빠는 그 행동.

물론 명선의 반응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명선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재강은 꿋꿋이 천장만 바라봤다.

“난 누구한테 해주기만 했지 당한 건 처음이거든. 근데 너 잘하더라.”

“…….”

“야, 그거 받을 때 반응도 내가 네 애인보다 낫지 않냐?”

재강이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

“여기서 걔 얘기가 또 왜 나와?”

준원을 ‘애인’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재강은 굳이 고쳐 주고 싶지도 않아 명선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냥 흘려보냈다.

준원과 자신이 누군가에겐 연인 사이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제 확실히 마무리를 못 지었잖아. 나는 그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

“뭔 마무리?”

“아니, 네가 계속 전 애인 편들면서 거짓말을 하니까.”

명선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 얼굴을 노려보던 재강이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출근하게.”

“대답은 하고 가야지.”

명선이 재강의 가슴을 눌러 도로 눕혔다.

“무슨 대답?”

“반응은 내가 나아, 걔가 나아?”

“아니 씨발, 왜 이리 집착이야?”

재강이 명선의 손을 쳐내고 일어났다.

“넌 왜 전 애인 편들기에 집착하는데?”

“뭔 좆같은 소리야?”

“사안을 객관적으로 좀 보라고요.”

“객관이고 나발이고, 꺼지라고.”

둘은 얼마간 일어나려 하고 붙잡으려 하며 투닥거렸다.

“놔라.”

“대답하면 보내 준다.”

명선은 재강을 붙잡고 늘어져 키득거렸다.

“안 놔?”

“객관적으로.”

“걔가 나아. 걔가 낫다고. 걔가 낫다고 몇 번을 말해, 씨발.”

“거짓말이잖아.”

“아, 꼴 보기 싫은 새끼. 왜 이래?”

“키스할래?”

“새끼가 진짜.”

재강은 곧장 명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돌진했다.

“푸아옥!”

“우웁!”

둘은 입술이 부딪치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놓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아오…….”

입을 틀어쥔 채 일어나 앉은 둘은 손을 떼며 서로의 입술을 봤다가 동시에 흠칫하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 봤다.

“헐, 피.”

명선이 자신의 입술을 빨면서 다시 재강을 쳐다봤다.

재강도 얼얼한 아랫입술을 빨았다. 찝찌름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아니, 뭔 키스를 그렇게 격정적으로 해?”

명선이 찡그린 채 입맛을 다셨다.

“아침부터 더럽게 쫑알대니까 입 막으려다 그런 거 아냐.”

“아이고, 제 잘못이라굽쇼?”

“그러니까 넌 입 좀 다물고 있어.”

“입을 막아도 좀 부드럽게 막을 수 있는 거지, 사람이 왜 저렇게 극단적이야?”

명선이 앞니를 이리저리 만져 봤다.

“이 나갈 뻔했네…… 넌 괜찮냐?”

재강도 혀로 앞니를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일이 또 하나 늘어났다.

재강은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바람 빠지는 소리에 슬쩍 보니 명선이 터진 아랫입술을 핥으며 피식대고 있었다.

“뭘 처웃어.”

명선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재강을 응시하다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재강은 그만큼 벽 쪽으로 스르르 물러났다.

벽에 머리가 닿아 재강이 멈추자 명선도 멈췄다.

“키스할래?”

명선의 목소리는 은근하면서도 다정했다.

“이번엔 부드럽게 입을 막는다고 생각하고.”

“…….”

재강의 시선이 명선의 입술로 내려갔다. 아랫입술 가운데쯤 빨갛게 피가 맺혀 있었다.

그 입술이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재강은 처음이자 오직 하나뿐인 키스 상대, 준원의 입술을 떠올렸다.

재강은 키스를 좋아했다. 키스 자체가 좋은지, 상대가 준원이어서 좋은지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하려 했던 적도 없지만.

명선과의 섹스가 익숙해질수록 키스를 향한 갈망도 함께 커지긴 했으나, 선뜻 하기는 어려웠다.

섹스와 키스는 어쩐지 다르게 느껴졌다.

명선과의 섹스도 쉽게 생각하며 했던 건 아니지만, 키스는 좀 더 친밀하고 밀접한 느낌이 섞인 접촉이라는 생각이 재강에겐 강했다.

섹스는 최소한 자위하듯 할 수도 있지만, 키스는 그럴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에.

얼굴을 맞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누군가와 입술을 맞붙이고, 그 입술과 혀를 조금씩 움직이는 행위.

재강은 명선의 숨이 와 닿는 순간 눈만 옆으로 돌렸다.

둘의 코끝이 맞닿고, 살짝 미끄러지며 입술도 맞닿았다.

얼얼한 입술이 닿자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명선의 입술은 재강의 다문 입술 위에 잠시 가만히 머물러 있다가 곧 살짝 벌어지며 가볍게 빨았다.

재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난생처음으로 키스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명선의 입술은 계속 가벼운 놀림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재강의 입술을 건드렸다.

‘저기, 문 좀 열어 줄래?’하고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멀리서 웨에에엥, 하고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강의 입술이 머뭇거리며 차츰차츰 열리자 그 위를 더듬던 명선의 입술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올 것처럼 바싹 달라붙었다.

아랫입술이 살짝 찌릿하면서 피 맛이 느껴졌다.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이 둘의 입술 사이에서 번지고 빨렸다.

재강은 입술을 좀 더 벌려 명선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았다. 명선의 입에서 탄식하듯 나온 숨이 재강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 왔다.

명선이 고개를 기울이자 둘의 입술이 더 깊숙하게 맞붙었다.

재강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매미 우는 소리는 사라지고 명선의 숨소리와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질 때 나는 젖은 소리만이 재강의 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재강은 명선의 아랫입술을 한껏 물고, 빨기도 했다.

준원과 하던 것과 다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같은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런 건 이 순간 중요하지도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한동안 그렇게 하다, 명선의 혀가 재강의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재강은 퍼뜩 눈을 뜨고 입을 뗐다.

명선은 재강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따라오려다 재강이 가슴팍을 턱 잡자 멈췄다.

“…….”

재강은 자신의 입술을 한 번 빨고 침을 삼켰다.

한동안 재강의 입술을 응시하는 명선의 눈에선 꼭 불꽃이 이글대는 것 같았다.

그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듯하더니, 명선이 눈을 들어 재강과 시선을 맞췄다.

재강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명선의 눈을 쳐다봤다.

곧 명선의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가 번졌다.

“입술도 100퍼센트였네.”

명선이 낮게 말했다.

재강은 순순히 물러나 앉는 명선을 얼마간 응시했다.

미소 띤 명선의 입가 양옆에 있는 작은 보조개. 언젠가부터 자꾸 그 보조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손으로 꾹 찔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혀도 100퍼센트인지는 다음에 알아봅시다.”

명선이 재강의 허벅지를 토닥이고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갔다.

재강은 명선의 뒤로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다 숨을 길게 내쉬며 입술에 손등을 대고 꾹 눌렀다.

* * *

“아, 숯불. 번호 좀 따자.”

가든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려는데 명선이 재강을 붙잡았다.

“직원 정보에서 보라니까 왜 자꾸 물어?”

“그건 너무 인간미가 없잖아.”

“네가 인간미란 단어를 입에 올려?”

“아, 좀 교환하자, 숯불. 원활한 섹스 라이프를 위해서.”

명선이 핸드폰을 켜 재강에게 내밀었다.

재강이 마지못해 받아 들고 자기 번호를 찍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귀찮게 굴지 마라. 차단하는 수가 있으니까.”

“나를 귀찮아하는 사람은 없어.”

명선은 재강이 돌려주는 핸드폰을 신나서 받더니 이름을 입력하고 뭔가 뚝딱거렸다. 곧 재강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명선이 문자를 보낸 게 분명해 재강은 일부러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

“야, 문자 왔어.”

명선이 재강의 뒤를 따랐다.

“알아.”

“확인 안 해?”

“뭔 상관이야.”

“사람이 저렇게 냉랭하고, 참.”

둘은 홀 건물로 들어가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아침이 차려진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명선이, 입이 왜 그러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양자가 명선의 입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재강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아, 이거.”

명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킬킬 웃었다.

“형이랑 노래방 가서 마이크 하나 갖고 둘이 설치면서 부르다가 박았잖아.”

명선이 재강을 쳐다보자 재강은 말아 넣고 있던 입술을 얼떨결에 스르르 풀었다.

양자가 둘의 입술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으이구, 조심히 좀 놀지. 그게 뭐야.”

“오랜만에 갔더니 텐션이 업돼서리. 아, 진짜 웃겼지, 형.”

명선은 태연하게 웃으며 재강의 팔을 쿡 찌르고 밥을 먹었다.

재강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그런 명선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명선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명선이 자연스럽게 양자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재강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식사했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정식이 따라붙어 소곤거렸다.

“재강 씨, 명선이 괜찮아요?”

“네?”

“아니, 명선이가 너무 귀찮게 굴지는 않나 해서.”

“아…….”

둘은 건물 입구로 나와 서서히 걸음을 멈췄다.

“벌써 며칠째 재강 씨네서 신세 지고 있잖아요. 다 큰 애 외박한다고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근데 계속 거기서 신세를 지니까.”

“신…… 세는요. 괜찮습니다.”

“혹시 너무 도를 넘으면 따끔하게 뭐라고 한마디 해줘요. 애가 곱게 자라갖고 좀 제멋대로일 때가 있어서. 우리는 집안에서 막둥이라 오냐오냐했는데, 재강 씨 같은 형이 버릇을 잡아 주면 좋…… 지이이…… 큼흠.”

정식이 옆쪽을 보더니 말을 흐렸다. 명선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빠, 뭐 해, 우리 형이랑.”

“일 얘기 하지, 뭘 해.”

정식이 허허 웃었다.

“형 쉬어야 되니까 가급적이면 시간을 뺏지 마.”

“어어, 명선이, 오늘도 형네서 자니?”

“어. 오늘도 같이 노래방 갈 거야.”

명선이 말하며 재강을 보고 히죽 웃었다.

재강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정식을 향해 짧게 묵례한 후 뒤뜰 쪽으로 갔다.

“어제 집에 들렀다 갔던데, 복숭아 가져갔니? 그거 되게 달지?”

“어, 꿀이더라.”

“그게 동철이네가 농사지은 건데…….”

뒤에서 명선은 계속 정식과 대화 중이었다.

* *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요일이었다.

정신없는 점심 피크타임을 지나 조금 한가해지자 재강은 숨을 돌리며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닦았다.

숯불 방은 구조상 에어컨을 설치할 수 없는 데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숯불 착화기 덕에 더 찜통이었다.

8월엔 더 더워질 텐데,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에어컨 틀어진 실내에서 하는 거라도.

재강은 강풍 모드 선풍기 앞에 의자를 갖다 두고 앉아 바람을 쐬었다.

곧 건물 모퉁이에서 명선이 나타났다.

재강은 가까워지는 명선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가 여길 그만두면, 쟤도 카운터 일을 그만둘까.

“숯불, 덥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명선이 재강 앞에 서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물 얼린 거야. 쉴 때 목 같은 데 대고 있어.”

“…….”

꽝꽝 얼린 생수병이 수건에 야무지게 감싸인 채였다.

재강이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너 그거 아냐? 목이랑 손목이 사람 체온이랑 연관이 깊대. 더울 때 거기만 시원하게 해줘도 전체 체온이 좀 내려가는 거지.”

“……그래. 고맙다.”

재강이 생수병을 만지작대다 목 뒤에 갖다 댔다.

명선은 그대로 서서 빙글빙글 웃으며 재강을 내려다봤다. 재강이 명선을 힐끗 쳐다봤다.

“왜.”

“우리 잠깐 저기 가서…….”

명선이 숯불 방 안쪽 구석을 가리켰다. 재강이 그쪽을 봤다가 다시 명선을 쳐다봤다.

명선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쪽쪽 소리를 냈다.

재강이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야, 꺼져.”

“아잉.”

“뭐, 씨발?”

명선이 키득키득 웃었다.

“난 아까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일이 안 된다.”

“그럼 관두고 집에 가든가.”

“네 혀도 100퍼센트인지 너무 궁금해.”

“…….”

갑작스레 명선의 입술 감촉이 재강의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비릿한 피의 맛. 입 안으로 빨려 들어오던 뜨거운 숨. 잠깐이나마 느껴졌던 말랑말랑한 혓바닥.

곧장 아랫배가 뜨끈해졌지만, 재강은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을 애써 지어 보이고 시선을 돌렸다.

“부끄러워하긴.”

명선은 재강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 찌르더니 바로 뒤돌아 홀 건물 쪽으로 달려갔다.

“아, 혹시…….”

모퉁이쯤에서 멈춘 명선이 뒤를 돌아봤다.

“그거 얼음 다 녹으면 말해. 주방에 몇 개 더 얼려놨으니까 교환해 줄게.”

재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선은 곧 건물 모퉁이로 사라졌다.

재강은 명선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목덜미에 생수병을 문지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켰다.

[넌 날 차단할 수 없어 숯불♥️]

명선의 문자를 확인한 재강이 킥 웃었다. 글만 보는데도 명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재강은 얼마간 그 문자를 바라보다 핸드폰을 껐다.

재강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가셨다.

연애를, 열 번 정도 했다고 했던가.

사귀었던 사람들한텐 어떤 식으로 행동했던 거지? 특별한 사람을 대할 땐 어떤 모습인 거야?

특별한 사람이랑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 사이에 분명히 차별을 두긴 할 텐데.

여기서 더 친근해질 수가 있나?

이 이상 지분댈 수도 있다고? 그게 가능해?

……내가 연애를 안 해봐서 뭘 모르는 건가?

재강은 다시 핸드폰을 켜서 명선의 문자를 내려다봤다.

문장 끝에 붙은 하트 모양에 자꾸 눈이 갔다.

연애를 열 번이나 하는 건…… 어떤 거지?

어떻게 그렇게 하지? 어떻게 열 번이나 헤어진 거지? 한 번 헤어지는 것도 더럽게 힘든 거 아닌가?

많이 해서 익숙해지는 건가? 많이 하다 보니까 감정 표현하기도 쉬워지고, 빈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가뿐한 마음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재강은 얼마간 계속 그 문자를 내려다보다 무전기에서 치직대며 주문이 들어오는 소리에 서둘러 일어섰다.

* * *

“야, 너 숯불 방 좀 그만 들락거려.”

조수석에 오르며 재강이 툴툴거렸다.

“왜?”

명선은 시큰둥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맸다.

“자꾸 와서 이상한 소리 하고, 그러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조금 전, 재강이 청소를 하는 중에도 명선은 숯불 방에 나타나서 몸이 예쁘다느니 혀가 궁금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한참 해댔고 재강이 쫓아냈다.

“내가 그런 것도 계산을 안 하고 나불댈까 봐? 원래 그 시간엔 그쪽으로 아무도 안 오는 거 아니까 그러는 거지.”

“언제까지 운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치밀하니까 나만 믿어, 숯불. 우리의 비밀 연애는 영원할 거야.”

재강이 흠칫하며 명선을 쳐다봤다. 얼굴에 금세 열이 올랐다.

“뭔…… 개 같은 소리야?”

명선은 마침 주변을 살피며 도로로 진입하던 차여서 재강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재강은 얼굴이 뜨거워진 걸 느끼고 얼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가 앞쪽을 봤다.

차 안이 어두워서 어차피 명선은 재강의 얼굴색이 달라졌단 걸 눈치챌 수 없을 터였다.

“발끈하긴.”

명선은 특유의 미소를 머금은 채 여유롭게 운전했다.

“연애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 그리고 나의 완벽한 몸과 너의 100퍼센트 몸은 섹스를 매개로 한 연애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씨발 너랑 연애를 왜 해?”

“일반적인 연애가 아니고 여러 가지 방식 중에 하나라니까?”

“방식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으니까 쉬어 빠진 소리 하지 마라.”

“어젠 뭐 좋아하건 사랑하건 맘대로 표현하라며?”

“그것도 하지 마. 역겨우니까 하지 마.”

“아, 되게 변덕스러우시네.”

명선이 혀를 찼다.

재강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단단히 꼈다.

명선이 하는 그런 말이 모두 자신의 몸만을 향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왜 ‘연애’란 단어에 발끈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얘랑 뭘 하는 거지.

생각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뜬금없는 곳으로 가 꽂혔다.

명선에게 휘둘리며 여기까지 어찌어찌 오긴 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말이 안 됐다.

명선과 벌이는 일은 이제껏 살아온 인생 속 김재강이라는 사람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씨발 새끼들.

재강은 속으로 으르렁거렸다.

명선과 준원 둘 다, 씨발 새끼들이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이상하고 불명확한 상황으로 자꾸 몰아넣는, 씨발 새끼들.

갑자기 엄청난 피곤함이 몰려왔다. 육체가 피곤한 것과는 별개였다.

재강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문질렀다.

“숯불, 피곤해?”

“…….”

재강은 손으로 턱과 목을 감싼 채 앞쪽만 바라봤다.

명선이 재강의 옆얼굴을 힐끔댔다.

“오늘은 섹스하지 말고 그냥 잘까?”

“…….”

“키스만 좀 하고.”

“……싫어.”

“그냥 잠만 자는 게 싫다고?”

“그냥 잘 거라고.”

“키스만 좀 하고?”

“싫다고 했지.”

명선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종일 일했으니까 봐준다. 알았어.”

재강은 눈을 감고 창에 기댔다.

그 와중에도 명선의 뒤를 빨고, 입술을 빨고, 몸 안으로 들어가는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가자 자신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 * *

명선은 재강이 아침에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재강은 침대 옆에 서서 곤히 잠든 명선을 내려다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 원색의 속옷 하나만을 입고,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운 채 옆으로 누워 자는 모습.

어젯밤 명선은 정말 고분고분하게, 집에 오자마자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주는 침대에 얌전히 눕고, 재강이 바닥에서 자는 동안 내려와 파고들며 귀찮게 굴지도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젯밤 명선이 또 지분거렸다면 정말로 무슨 욕을 늘어놓으며 무슨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어젠 섹스도 키스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텐데 왜 굳이 여기 와서 잔 거지?

여기 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면서.

나 같으면 그냥 집으로 가 버렸을 텐데.

재강은 한동안 명선을 내려다보다가 시계를 봤다.

화분 옮기는 작업이 10시로 예정되어 있는데 벌써 9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재강은 잠시 망설이다 명선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명선은 꿈틀했다가 눈을 반쯤 뜨더니 끄으으응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재강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트는 명선을 내려다봤다.

명선이 잔뜩 찡그린 채 등을 대고 눕더니 재강을 올려다봤다.

“숯불…….”

명선이 배시시 웃자 입가 양옆으로 보조개가 폭 팼다.

“잘 잤어?”

명선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재강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재강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일어나.”

“모닝 섹스 한 판?”

“일어나서 너희 집에 가라고. 나 나가야 돼.”

명선이 느릿느릿 눈을 문질렀다.

“어디?”

“일하러.”

“아, 그 화분 옮기는 거?”

“그래. 지금 나가야 돼.”

“갔다 와.”

명선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누웠다.

“야, 집에 가라고.”

재강이 명선의 어깨를 잡고 다시 돌려 눕혔다.

“왜? 너 다시 여기로 올 거 아니야?”

명선은 한가롭게 하품을 쩍 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얼마나 걸려? 너 일 끝나면 같이 밥 먹자.”

“주인 없는 집에 누구 있는 거 싫으니까 꺼지라고, 씨발아.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먹어?”

재강이 명선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아니, 아침부터 왜 이렇게 뾰족해? 저혈압이야?”

명선은 재강에게 끌려 침대 아래로 비틀비틀 내려왔다.

재강이 의자에 걸려 있던 옷들을 집어 명선에게로 던졌다.

“빨리 입어. 나가야 되니까.”

“너 혈압 체크해 봐. 문제 있어.”

명선이 옷을 입는 동안 재강은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고 섰다.

문득 옷장 안에 있는 명선의 물건들도 모두 끄집어내 옥상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재강은 문고리를 꽉 잡고 선 채 자신의 발만 내려다봤다.

“숯불, 아침 먹었어?”

“빨리 안 나와?”

“아, 거참.”

겨우 바지를 입고 티셔츠를 반만 걸친 명선이 핸드폰을 들고 현관으로 나왔다.

재강은 명선의 팔을 잡아 내보내고 얼른 현관문을 열쇠로 잠갔다.

“왜 이렇게 보채? 그렇게 급하면 좀 더 일찍 깨우든가 하지.”

“알아서 꺼져. 네 짐은 나중에 다 챙겨서 갖다줄 테니까.”

재강은 명선을 쳐다보지도 않고 옥상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등 뒤에서 명선이 뭐라고 구시렁댔지만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재강은 한쪽에 세워 놓았던 자전거를 끌고 서둘러 나왔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뭐 때문에?

재강은 자전거를 타는 동안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준원. 이번엔 얼마나 걸리는데? 언제 올 건데?

대체 너는, 왜 자꾸 나를 떠나는데?

준원을 향한 원망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밀려왔다.

너만 아니었으면, 나한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너라는 게 내 인생에 없었으면, 나는 정말로 아무 일도 겪지 않으면서 살았을 거라고.

얼마간 달려 목적지인 아파트 단지 앞에 자전거를 멈춘 재강은 핸들을 꽉 잡은 채 서서 한동안 거칠게 숨을 골랐다.

문득 사방이 아주 고요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이 세상에 혼자만 남은 것처럼.

그러고 보니 거의 사흘 내내 명선과 꼭 붙어 있다가 멀리 떨어져 나온 셈이었다.

……사흘밖에 안 됐나?

재강은 명선이 갑자기 옥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헤아려 봤다.

섹스하고, 함께 밥을 먹고, 모텔에 가고, 핸드폰 가게에 가고, 차를 타고,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키스까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런 일들을 했다.

그리고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마음에도 이상한 변화들이 생겨 버렸다. 준원이 있을 곳의 지도를 습관처럼 망연히 훑어보던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애초에 왜 같이 어울려서는…….

재강은 풀죽은 얼굴인 채 자전거를 끌고서 느릿느릿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일을 끝내고 나오는 재강의 표정은 조금 밝아져 있었다.

일하는 내내, 호기심 많고 친근한 고양이가 계속 참견을 하고 몸을 비벼대서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사실 그런 행동은 명선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지만, 고양이와 달리 명선은 인간이고 말이 많다는 게 문제였다.

고양이랑 그런 새끼를 어떻게 비교해.

재강은 고양이의 귀여운 얼굴을 계속 떠올리며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아마도 집은 텅 비어 있을 테고, 지금 이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가든에 일하러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려면 집에 가긴 가야 했다.

체력이 늘 남아도는 것도 아니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화분 옮기는 작업은 의외로 강도 높은 노동이었다. 양도 엄청나게 많았고, 어떤 것은 꽤 무거웠으며,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야 해서 시간도 오래 걸렸다.

고양이의 방해 덕에 더 오래 걸리기도 했다.

재강은 자전거를 타고 집 쪽으로 향하며 다시금 고양이의 몽실몽실한 몸을 떠올렸다.

준원은 결혼 얘기를 꺼내며 고양이를 한 마리 입양하자고 했었다.

결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고양이 입양은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일하러 나가면 계속 혼자 있어야 할 텐데.

그건 고양이한테 못 할 짓이겠지.

집에 도착한 재강은 대문 안에 들어서서 자전거를 안쪽에 세워두고 옥외 계단을 올랐다.

아까 일한 집에서 내준 음료수 외엔 먹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니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고 좀 자야지. 오랜만에 정말 조용하게.

옥상에 가까워질수록 라면 냄새 같은 것이 나 재강은 무의식중에 킁킁거렸다.

“…….”

계단 맨 위에 선 재강이 멍한 얼굴을 했다.

시커먼 우산을 쓴 명선이 평상 한가운데 앉은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 주위로 컵라면과 과자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어, 왔냐?”

재강을 힐끗 본 명선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내렸다.

그러다 핸드폰을 허벅지에 내려놓고 몸을 기울여 라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 먹었다.

“……너 뭐야.”

멍하니 서 있던 재강이 명선 가까이 갔다.

“아, 문을 잠가놔서 뭘 먹을 수가 있어야지. 유리를 깰 수도 없고. 이거 내가 편의점에서 뜨거운 물 담은 다음에 여기까지 갖고 온 거 아냐?”

명선이 컵라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것도 사 왔어. 너는 문 열고 들어가서 끓인 물 부어 먹어.”

재강은 명선이 턱짓한 곳을 바라봤다. 뜯지 않은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

재강은 그 컵라면을 내려다보다 다시 명선을 바라보고, 그가 쓰고 있는 우산을 바라봤다.

“너 내가…… 집에 가라고 했잖아.”

“뭘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해, 어차피 여기서 출근할 건데.”

“…….”

영원히 꺼지라는 뜻이었는데.

못 알아들은 거야, 아님 무시하는 거야?

재강은 라면을 입 안 가득 넣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명선을 바라보다 기운 빠진 웃음을 내뱉고는 평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얘는 정말…… 뭐지?

“일은 어땠어? 화분 옮기는 거.”

명선이 핸드폰을 끄고 라면 용기를 집어 들어 국물을 후룩 마셨다.

“……그냥 그랬어.”

“그런 거 하면 얼마 받아?”

“신경 꺼.”

재강이 컵라면 용기를 집어 들고 비닐을 뜯었다.

“나도 집에 그런 일 있으면 너 부르려고 그러지.”

“서울까지 왜 가? 차비가 얼만데.”

“내 차로 실어다 주면 되잖아.”

“아, 그러니까 그런 일을 왜 네 차로 실어다 주면서까지 하냐고,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명선이 엉덩이를 꾸물꾸물 움직여 재강 가까이 와서 우산을 그 머리 위로 씌웠다.

“사람이 가끔은 좀 비효율적으로 살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안 그러냐?”

명선이 음흉한 손길로 허벅지를 더듬자 재강이 얼른 쳐냈다.

“시끄러. 너희 동네 사람으로 찾아봐.”

명선이 낄낄 웃었다.

“아쉽넹.”

재강은 무릎 사이에 라면 용기를 끼워놓고 그 안에 라면 스프를 털어 넣었다.

아까 계단을 올라와 명선을 봤을 때, 무엇보다도 안도감이 크게 들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재강의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명선이 또 한 번 틈을 파고든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로 깊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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