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1. 깨달아요
“아으, 씨, 존나 좋아…….”
명선은 재강의 가슴을 쥐어짜며 거의 흐느끼듯 했다. 재강이 몸을 부딪쳐올 때마다 침대가 들썩들썩 흔들렸다.
힘을 쓰고 와서 그런가, 가슴이 더 땡땡하고 쫄깃쫄깃하고, 어휴.
명선은 헐떡이며 재강의 울끈불끈하는 자잘한 근육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샅샅이 살펴봤다.
재강은 명선의 몸 양옆으로 손을 짚은 채 엎드려, 특유의 그 ‘입 꾹 다물고 씨근대기’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핏줄이 선 붉은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명선의 손이 홀린 듯 그 이마로 올라가 땀을 문질러 닦고 머리로 쓸어 올라갔다가 뺨으로 내려와 감싸 쥐었다.
명선의 배 쪽만 내려다보던 재강이 눈을 들어 명선과 시선을 맞췄다.
명선은 재강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입술을 혀로 축였다. 땀이 난 재강의 뺨 위에서 명선의 손이 가볍게 미끄러졌다.
아침부터 떽떽거리다 나갔다 오더니, 살짝 건드리니까 섹스는 또 금방 끌려와서 하고 있고.
잠깐 떨어져 있어 보니까 나의 소중함을 알겠지, 짜샤?
명선이 손을 쓸어 올려 재강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나도 그 짧은 사이에 네가 좀 보고 싶더라.
명선이 끌어당기자 재강은 그대로 끌려왔다. 둘의 입술이 찰싹 달라붙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서로의 입 안을 떠돌고, 벌어지는 틈새로 간신히 새어 나가기도 했다.
명선은 재강을 꼭 끌어안고 등을 더듬어댔다. 둘은 한참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얼마간 그러다 재강이 살짝 물러나려는 듯하자, 명선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입술을 핥았다.
두어 번 핥자 재강의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명선은 그 벌어진 입술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이도 핥다가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재강은 작게 소리를 냈지만 피하지 않고 명선의 혀에 자신의 혀를 뒤섞었다.
명선은 입 안에서 팡팡 터지는 가루사탕을 떠올렸다. 그런 것들이 몸 곳곳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구석구석이 온통 100퍼센트인 새끼…….
명선은 흥분과 만족감으로 몸서리를 쳤다.
명선의 목에서 흘러나온 신음이 재강의 입 안을 꽉 채웠다.
그렇게나 벼르고 벼르던 키스여서인지, 키스 자체를 오랜만에 해서인지, 아니면 재강이 키스 역시 잘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황홀할 뿐이었다.
* * *
사정 후에도 명선은 재강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키스했다.
재강은 비록 명선을 마주 안지는 않았지만, 명선의 위에 엎드린 채 그의 혀 놀림에 맞춰 자연스레 섞이면서 오래도록 키스했다.
그렇게 느릿느릿 부드럽게 키스하다 재강이 먼저 물러났다.
명선은 더 하고 싶었지만 눈을 감은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재강을 놓아주었다.
재강이 명선의 곁에 털썩 누우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얘는 시작이 어렵지, 일단 길을 트고 나면 진도는 순조롭게 나가는구나. 후후.
명선은 여운을 최대한 곱씹다가 스르르 눈을 떴다. 한쪽에 걸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 왜 벌써 2시야. 이제 좀 있으면 출근해야 하잖아. 오늘은 그냥 종일 떡이나 치고 수박이나 먹으면서 굴러다녔으면 좋겠구만.
만족스러웠던 명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난 굳이 안 가도 되지만, 얘는 꼭 가야겠지. 얘만 혼자 보내면 나는 심심할 거고.
명선은 작게 한숨을 쉬고 옆을 쳐다봤다.
재강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명선은 그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숯불.”
“…….”
“무슨 생각해?”
“……신경 꺼.”
“맨날 신경 끄래.”
명선이 윗몸을 슬쩍 일으키고 재강에게 가까이 갔다.
재강의 한쪽 뺨을 살짝 감싸 쥐고 끌어당기는데 재강은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명선은 재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키스했다. 재강은 명선의 키스를 받아주었다.
명선은 재강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살짝 눈을 떠보니 재강은 눈을 감은 채였다.
명선은 계속 키스하며 재강의 얇은 눈꺼풀과 속눈썹을 응시했다.
저기도 왠지 핥아보고 싶은데.
순간 스르르 떠진 재강의 눈이 명선의 눈과 마주쳤다.
“으어, 씨!”
재강이 펄쩍 뛰며 명선을 밀쳐냈다.
“아, 깜짝아. 뭘 그렇게 놀라?”
명선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재강에게 붙어 누웠다.
재강이 얼굴을 돌리고 머리를 문질렀다.
“재수 없게 뭘 쳐다봐, 키스하는데.”
“그게 왜 재수 없어?”
“키스하는데 왜 눈을 뜨고 있냐고.”
“난 자주 뜨는데? 키스할 때 얼굴 보는 거 좋지 않아? 상대가 눈 꼭 감고 있는 거 보면 좀 섹시하기도 하고. 눈 마주치면서 하는 것도 좋고.”
“…….”
재강은 옆에 있는 벽만 쳐다보며 머리를 느릿느릿 문질러댔다.
“애인이랑 키스할 때 얼굴 본 적 없어? 넌 지금까지 키스할 때마다 항상 눈을 감고 있었던 거야?”
“…….”
“헐? 진짜?”
“아, 몰라. 기억 안 나. 그런 걸 왜 일일이 기억하고 다녀.”
“키스할 때 애인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정도는 보고 싶었을 텐데.”
“…….”
명선은 재강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그의 가슴 위로 팔을 둘렀다.
재강은 흠칫했지만 명선의 손을 쳐내진 않았다.
“애인 얘기 좀 해봐.”
“……뭐?”
재강이 명선을 쳐다봤다.
“전 애인 얘기. 어떻게 만나서 얼마나 사귀었는지, 그런 거.”
“그걸 너한테 왜 얘기해?”
“얘기 못 할 건 또 뭐야?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고 나발이고 짜져 있으라고.”
재강이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교환할까? 네 전 애인 얘기 하나, 내 전 애인 얘기 하나.”
“네 전 애인 얘긴 궁금하지도 않아.”
“내 첫 애인은…….”
명선은 머릿속을 재빨리 헤집다가 대용이 사귄 적 있었던 사람을 떠올렸다.
“고1 때 사귄 사람이고, 같은 학교 3학년.”
“…….”
“내가 보고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는데, 좀 사귀어 주더니 졸업하고 연락이 뜸한 거야. 그리고 대학 들어가자마자 여자랑 CC 되더라.”
“…….”
“그게 내 첫 애인. 내가 그렇게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는 거 아니냐. 이제 네 차례.”
재강의 입술이 살짝 달싹인 게 명선의 눈에 들어왔다.
귀여운 놈. 슬슬 찔러 주면 주저주저하면서도 어쨌든 넘어오긴 한다니까.
명선은 재강 몰래 미소를 지었다.
재강은 입을 우물거리면서도 잠시 말이 없었다.
“너무 포괄적인가? 그럼…… 어떻게 만났어?”
“……걔가 우리 반에 전학 오면서.”
“고딩 때?”
“중 2.”
“중 2?”
명선의 눈이 커졌다.
뭐야. 되게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건가?
“그때 만났다 헤어지고 어른 돼서 사귄 그런 케이스?”
“그냥 계속 같이 지냈는데.”
“아, 그럼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이 된 케이스? 언제부터 사귄 건데?”
“…….”
재강은 또 한동안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무의식중인지 명선의 팔뚝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명선은 자신의 팔 위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재강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사귄…… 건 아니고.”
“응?”
“…….”
명선이 눈을 끔뻑댔다.
“애인 아니라고?”
“애인이 아니라…….”
“그럼 친구?”
재강은 또 입을 다물고 천장만 바라봤다.
“섹파?”
“……됐어. 그만 물어봐.”
재강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명선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뭐야? 뭔데?
그냥 절절한 짝사랑인 건가?
아닌데. 전화 통화나 이런저런 행동으로 봐선 되게 애지중지하는 애인 대하는 것 같았는데.
아, 근데 얘 속초에서 할아버지랑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다 걔랑 같이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나 뭐 그랬던 것 같은데.
어지간히도 붙어 있었나 보네. 지역까지 옮기는데 같이 다니고.
그럼 거의…… 13년을 붙어 있었다고 봐야 되는 건가?
헐, 근데 그런 상태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도 쌈 싸먹고 야반도주를 하고……?
이 커플 도대체 뭐야?
왠지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자꾸 생기는데…… 얘가 술술 얘기해 줄 리도 없고 잘못했다간 괜히 심기를 거슬러서 입을 꼭 닫아 버리게 만들 수도 있어.
아, 답답하네.
“내 두 번째 애인은 고2 때 같은 학교 친구. 걔랑은 두 달 정도 사귀다가 좋게 헤어졌어. 성격 차이로.”
명선은 서둘러 대충 이야기를 지어냈다.
“동거는 언제부터 한 거야?”
재강은 한참 말이 없었다.
명선은 보채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재강의 등만 바라봤다.
아니, 그게 저 정도로 오래 기억을 더듬어야 할 문젠가? 이제 스물일곱인 놈이 벌써 기억력에 문제가 왔니?
“모르겠다. 동거라고 보기도 좀 애매하고.”
한참 만에야 재강은 숨을 길게 내쉬듯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명선은 조급한 티를 내지 않도록 애쓰며 재강을 붙잡았다.
“무슨 말이야?”
“됐어, 이제. 나 씻을 거야.”
재강이 명선의 손을 쳐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하던 대화는 마저 끝내고 가야지!
명선은 속으로 포효하며 재강의 완벽한 뒷모습을 바라봤다. 재강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아, 저 답답한 새끼.”
명선이 중얼거리며 도로 털썩 드러누웠다.
자기 얘길 이 정도라도 한 건 꽤 큰 발전이긴 한 것 같다만, 그래도 인간이 좀 풀어지는 맛도 있고 그래야지 말이야.
한 번뿐인 연애 얘기 좀 터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아니, 애인은 아니랬지.
그럼 뭔데? 진짜 섹파인가?
근데 나는 그 인간 얘기가 왜 이렇게 궁금한 거지?
명선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천장을 바라봤다.
하긴 뭐, 숯불이 워낙에 특이한 놈이라 인간관계는 어떤가 궁금해서 그런 거겠지.
게다가 알면 알수록 미스터리한 커플이잖아. 10년 넘게 연애인지 섹파인지를 하다가 야반도주를 하다니…….
저 새끼 인생도 참 스펙터클하네.
* * *
차에 타 얼마간, 재강은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달력을 확인하고 날짜를 중얼대는 거로 봐선, 잡일 의뢰 문자인 것 같았다.
얘는 친구도 없나 봐.
이런 거 말고 문자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명선은 운전하며 잠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그 덕에 나랑 놀 시간이 널널한 건 좋긴 하지만.
명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또 뭘 혼자 처웃고 있냐.”
재강이 핸드폰을 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낮게 말했다.
“너 내 미소를 좀, 이 세상을 밝히는 빛과 같다고 생각해 봐라.”
“밝히든지 말든지.”
“실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단 걸 알고 있냐.”
정말 있었다.
명선의 섹스 파트너였다가 짝사랑에 빠지면서 마음고생을 했던 사람 중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
“형이 웃는 걸 보면 세상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아. 적어도 내 세상은.”
내가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홀리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알 게 뭐야.”
“넌 그 몸뚱이 하나 덕분에 지금 얼마나 대단한 분을 옆에 뒀는지를 알아야 해.”
“내가 알 게 뭐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라, 숯불.”
재강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아, 또 일 들어온 거야?”
“그래.”
“뭔데? 언제 해?”
“내일이랑 목요일 오전에 개 산책.”
“우오, 재밌겠다. 나도 같이 갈까?”
재강이 곧장 이마를 찌푸렸다.
“뭔 소리야, 네가 왜 가?”
“귀찮게 안 하고 그냥 옆에서 따라다니기만 할게.”
“됐어.”
“개 몇 마리야? 한 마리?”
“두 마리.”
마침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운 명선이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씨, 딱이네. 너 한 마리, 나 한 마리.”
“아, 좀…….”
“둘이 있으면 컨트롤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겠어? 개 산책이라고 뭐 그렇게 평화롭고 유유자적하기만 한 건 아니잖아. 때로는 같이 달리고 뭐 이상한 거 주워 먹으려고 하면 재빨리 저지도 해야 되고, 게다가 남의 개이기까지 한데 신경이 좀 쓰이겠냐? 역시 개 산책은 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두 사람이 하는 게 더 낫지.”
“…….”
“혹시 돈 때문에 그래? 나는 그냥 놀러 가는 거니까 수당 안 줘도 돼. 그건 당연히 네가 다 받아야지. 나는, 음…… 견학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어때?”
“…….”
명선의 말이 솔깃하긴 했는지, 재강은 망설이는 표정인 채 창 앞을 바라보기만 했다.
명선은 재강의 눈치를 살피다가 몰래 피식 웃고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말발이 너무 좋은 것 같아. 얘는 그 말발에 너무 잘 넘어가고.
우린 역시 환상의 짝꿍?
“……뭐라고 쫑알거리면 바로 돌려보낸다.”
한참 만에 재강이 말했다.
“알았엉.”
명선이 빙그레 웃으며 핸들을 돌려 가든 주차장 안으로 부드럽게 진입했다.
내일은 종일 같이 있을 수 있겠네. 신난다.
* * *
“오늘이야말로 리넨이네, 리넨이야.”
명선이 옷장에서 리넨 셔츠를 꺼내 흔들었다.
재강은 냉장고 앞에 앉아 오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명선을 바라봤다.
어젯밤 소주와 위스키를 나눠 마시고 섹스한 후 비몽사몽 씻고 그대로 자, 재강의 머리는 늘 그렇듯 사방으로 뻗치거나 눌려 있었다.
“엄마랑 아빠 둘 다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나는 어릴 때도 개 안 키워 봤거든. 개 산책시키는 것도 한 번도 안 해봤고.”
명선은 들떠서 다리미를 집어 들고 들여다봤다.
“근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코드 꽂고 문지르면 되나?”
“야, 다림질도 못 하는 게 종잇장은 왜 입고 다녀.”
“원래 세탁소에 맡기면 금방이야. 어떻게 하는 건데?”
“아휴, 저거 진짜.”
재강이 먹던 오이를 내려놓고 일어나 다가왔다.
“줘봐.”
명선은 재강에게 셔츠와 다리미를 내주고 재강이 앉아 있던 자리로 와 앉아서 오이를 집어먹었다.
재강이 준비를 끝내고 셔츠를 다리기 시작했다.
“숯불, 너 근데 옷 다릴 줄은 아는 거지?”
“아니까 하지, 모르면서 남의 옷을 건드리겠냐. 생각 좀 하고 말해.”
“역시 재주가 많네.”
“…….”
“야, 우리 부자 프리랜서 게이 커플처럼 입고 나가자. 개 데리고 우아하게 돌아다니면서 인테리어 얘기하고 좋은 원두 얘기하고, 진짜 개 주인인 척하면서 막.”
명선이 키득거렸다.
“너 걸리적댈 거면 따라오지 마.”
“좀 릴랙스 해. 아무리 돈 때문에 하는 거라지만 너도 좀 즐기면서 할 수 없겠냐?”
“네가 걸리적대는 순간 전혀 즐겁지 않게 된다고, 새끼야.”
재강은 금세 다림질을 끝낸 셔츠를 명선에게로 던졌다.
다리를 덮으며 떨어진 셔츠를 명선이 집어 들어 들여다봤다.
“와, 숯불. 너 세탁소 차려도 되겠다.”
“밍기적대지 말고 먼저 씻어. 30분 있다 나갈 거니까.”
명선은 미소를 띤 채 자리를 정리하는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은 반바지 하나만 입어 상체가 훤히 드러난 채였다.
정리를 끝낸 재강이 명선의 앞으로 와 털썩 앉아서 오이를 집어 들었다.
“씻으라니까?”
“응, 알았어.”
명선은 셔츠를 한쪽에 잘 놓아두고 스르르 일어났다가 곧장 재강의 앞으로 다가갔다.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앉아 입술을 맞붙이자 재강은 움찔하면서 살짝 피했다.
“잠깐만. 한 10초 정도만 하자.”
명선이 빠르게 속삭이고 그 입술을 따라가며 고개를 깊숙이 기울였다.
재강은 명선의 팔을 붙잡고 있다가, 마지못해서 한다는 듯 명선과 입술을 맞댔다.
둘은 얼마간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젖은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오이 냄새가 이렇게 좋은 냄새였다니.”
명선이 재강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재강이 고개를 돌리며 명선의 가슴팍을 밀었다.
“가서 씻어, 이제.”
명선은 순순히 재강을 놓아 주고 물러났다.
“너랑 키스도 하게 돼서 너무 좋아.”
“뭐가 좋은지 자꾸 일일이 말하지 좀 마.”
“내가 좋다는데 뭔 상관이신지.”
명선은 클클 웃으며 욕실로 갔다.
* * *
“마셔.”
편의점에서 나온 재강이 테이블에 아이스커피가 든 플라스틱 컵을 내려놓자 엎드려 있던 명선이 몸을 일으켰다.
명선은 퀭한 얼굴로 컵 뚜껑과 빨대를 빼내고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재강은 그 맞은편에 앉아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선이 잔을 내려놓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개 산책이 이렇게 힘든 건 줄은 몰랐네.”
“부잣집 게이 커플이니 뭐니 종잇장 입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
“대형견이 힘이 진짜 센 거였구나. 하긴, 원래 야생 동물이었는데.”
재강은 짧게 한숨을 쉬고 생수 뚜껑을 따 마셨다.
“야, 너 오늘 나 아니었으면 진짜 힘들 뻔했다, 그치. 나랑 같이 오길 잘했지?”
“나랑 개 두 마리는 문제없었거든? 네가 끼어들어서 번잡스러워진 거지.”
“근데 진짜 예쁘긴 했어. 처음 보는 사인데도 사람을 그렇게 반겨 주고. 개는 정말 놀라운 동물이야.”
“모레는 따라 나오지 말고 집에 있어라.”
“아니? 그때도 같이 올 건데?”
“너 때문에 번잡스럽다고, 새끼야. 왜 자꾸 개들을 흥분하게 만들어? 너 때문에 다 신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거 아냐.”
명선이 아이스커피를 들이켜고 얼음을 입 안에서 굴렸다.
“알았어. 그땐 얌전히 있을게. 진짜.”
“…….”
“목줄도 두 개 다 네가 잡아. 나는 네 옆에서 개 궁뎅이만 보면서 걸을게.”
“왜 저렇게 따라오질 못해 안달이야, 진짜…….”
재강이 중얼거리며 물을 마셨다. 명선이 킬킬 웃었다.
“아휴, 또 지 좋다는 얘기 듣고 싶어서 유도하는 거 봐라.”
재강은 물을 마시며 눈만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러지.”
“…….”
“원래 좋아하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 법이거든.”
“…….”
“아, 그 몸이랑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런다고 명확하게 해줘야 우리 예민한 분께서 짜증을 안 내실라나.”
재강은 싱글거리는 명선을 물끄러미 보다 생수 뚜껑을 닫고 일어섰다.
“다 쉬었으면 가자.”
“좀 더 쉬자. 다리가 후달거려. 스쿼트 한 삼천 개 한 것 같아.”
“아니, 그러게 왜 지가 개처럼 뛰어댕겨.”
재강이 도로 의자에 앉았다.
“개랑 일대일로 놀아 본 게 처음이라 그래. 넌 안 신났어?”
“너만큼은 아니야.”
“어릴 때 집에 개 있었지? 그래서 그렇게 덤덤한가 보다.”
“없었어.”
“시골집에선 다들 개 한 마리씩 기본으로 키우지 않나?”
“뭔 시골집. 나 아파트 살았거든?”
명선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정말? 시골에서 할아버지랑 살았다길래 난 그냥 기와집 같은 거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울 촌놈 새끼…….”
“그럼…… 할아버지랑 부모님이랑 너랑 넷이서 산 거야?”
“할아버지랑 나만.”
“부모님은?”
“엄마가 나 낳고 도망가서 아빠는 폐인 됐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데려다 키운 거고.”
“…….”
명선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컵을 내려다봤다.
재강은 무심히 앉아 주변 풍경을 보며 남 얘기하듯 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인생에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는 놈이었잖아.
“……어…… 아버지는, 이제 괜찮으셔?”
“할아버지랑 같이 살고 나선 계속 못 봤는데, 나 4학년 때인가, 술병 나서 죽었다더라.”
씨발, 괜히 물어봤나 봐. 뭐야. 왜 이렇게 울적해…….
명선은 찝찝한 얼굴로 목을 긁적였다.
둘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킥, 하는 소리에 명선이 재강을 쳐다봤다. 재강은 명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알아서 입을 다물 줄도 아네? 남의 불행한 가정사 괜히 건드렸지?”
“아니…… 당연한 거 아니야? 민망하잖아. 미안하기도 하고.”
“애인 얘기 꼬치꼬치 물어볼 땐 언제고.”
“그거랑 이거랑 같냐고요.”
재강은 미소 띤 얼굴로 생수 뚜껑을 열어 물을 마셨다.
재강이 물을 끝까지 마시고 숨을 길게 내쉬며 뚜껑을 도로 닫는 모습을 명선은 가만히 지켜봤다.
“……전 애인…… 아니, 통영 그 인간도 이런 걸 아는 거야?”
“뭘? 불행한 가정사?”
“응.”
“걔야 뭐, 모를 수가 없지.”
왜 도망갔을까.
뭐가 문제였을까.
명선은 대뜸 묻고 싶은 걸 참으며 얼음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굴렸다.
재강은 빈 생수병 뚜껑 부분을 쥐고 가볍게 흔들며 그걸 바라봤다.
재강의 뒤로 사람 몇이 간간이 편의점 입구를 드나들었다.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사람인데.”
한참 만에 재강이 나지막이 말했다. 명선이 눈을 들어 재강을 쳐다봤다.
“왜 도망갔어?”
재강의 손에서 흔들리던 생수병이 우뚝 멈췄다.
명선은 재강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하는 모습, 재강이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는 모습을 세세하게 응시했다.
왜 도망을 가?
역사를 그렇게 잘 알고 같이 시간을 그렇게 오래 보내고 나서도, 왜 헤어지는 방법이 도망이어야 하는 거야? 왜 그렇게 의리 없는 방법인 건데?
네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거야, 아니면 걔가 나쁜 놈인 거야?
명선은 재강을 바라보며 참을성 있게 답을 기다렸다.
재강의 입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재강의 눈꺼풀만큼이나 느리게 열렸다.
“……원래 그래.”
명선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원래 그래?”
재강이 다시 생수병을 이리저리 흔들며 거리 쪽을 바라봤다.
“원래 그렇다고.”
“아니, 뭐가 원래 그러냐고.”
“그냥…… 아, 뭘 또 꼬치꼬치 물어?”
“자기가 말을 이상하게 해놓고 그래? 이해를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뭐가 원래 그러냐고.”
“걔는 원래 그렇다고. 그냥 떠났다 돌아왔다 한다고, 씨발.”
재강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빈 생수병으로 자기 허벅지를 한 번 퉁 쳤다.
명선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눈만 깜박이며 재강을 바라봤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재강이 명선의 멍한 얼굴을 힐끔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 일도 자주 벌이고. 그럴 땐 그냥 떠났다가 그 일에 관심 없어지면 다시 나한테 오는 거야.”
“…….”
“원래 그래. 그냥, 옛날부터.”
“그럼 통영에 간 것도, 뭐 딴 걸 하러 간 거라고?”
“……고깃배 타겠다고.”
“고깃배? 돈 벌려고?”
“집은 부자야. 근데 그냥 성격이 그래. 뭘 갑자기 해보고 싶으면 무조건…….”
“뭐야, 존나 이기적인 새끼 아냐.”
재강이 곧장 눈을 부라렸다.
“야, 말조심해라.”
“아니, 그렇잖아. 존나 뭐야? 그럼 간다고 말하고 의논하고 나서 가든가 하지, 그것도 밤에 너 몰래 쑝 도망가는 것처럼 한 거 아니었어?”
“…….”
재강은 부릅뜬 눈으로 명선을 얼마간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혹시 네가 무슨 학대라도 해서 기회 보다가 도망간 건가 그러고 있었네. 나쁜 놈은 그쪽이었잖아?”
“…….”
“야, 잠깐만. 그럼 뭐야, 가서 고기 잡다가 싫증 나면 다시 너한테 돌아오는 거라고?”
“……그렇겠지.”
“언제 오는데?”
“몰라.”
“안 오면 어떻게 되는데?”
“올 거야.”
“…….”
“언젠가는 와.”
돌아온다고? 떠난 게 아니었어?
그래서 옷도 다 안 버리고 끌어안고 있었던 거야?
걔도 걔지만…… 넌 도대체 뭐야? 뭐 하는 거야?
명선이 착잡한 얼굴로 재강을 쳐다보는 동안 재강은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며 거리를 바라봤다.
명선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야, 그럼…… 너 정말 그냥 짝사랑이야? 너 혼자만 좋아하는 중인 거야? 걔는 섹스랑 먹고 자는 곳 필요할 때만 너 찾는 거고? 사귄 거 아니라고 했던 게 그런 뜻이야?”
재강이 말없이 눈만 깜박이다가 체념하듯 피식 웃었다.
“그런가 보다.”
“그런 새낄 왜 좋아하면서 질질 끌려다녀? 걔가 완전 이기적으로 너 이용하고 있는 거 몰라? 지금 진짜 멍청한 짓 하고 있는 거 모르겠어?”
재강이 고개를 돌려 명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관계 맺는 방식은 다 다른 거 아니냐? 남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명선은 입을 다문 채 재강을 마주 보다 시선을 내렸다.
혼자 인생 쿨하고 시크하게 사는 것처럼 굴더니 존나 구질구질해가지고, 멍청한 소리나 해대고…….
이용당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좋아 죽겠다고?
곧 재강이 일어섰다.
“난 갈 거니까 넌 더 쉬든지 해.”
명선은 멀어지는 재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일어나 그쪽으로 뛰었다.
재강의 곁에 다다르자 명선은 속도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 명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함부로 지껄인 건 미안하긴 한데, 너도 인정하지? 걔가 나쁜 놈이라는 거.”
재강이 우뚝 멈춰 명선을 마주 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자꾸 걔, 걔 할래?”
명선도 멈춰 섰다.
“그럼 뭐라고 불러?”
“네가 부를 일이 없다고, 씨발아. 없으니까 신경 끄라고.”
“지금 이런 식으로 대화할 땐 뭐라고 부르긴 해야 하잖아. 그럼 뭐, 형이라고 불러? 통영 도주남? 숯불 짝남? 이기적인 놈? 개쓰레기?”
“으.”
재강이 몸서리를 치고 다시 걷자 명선도 따라 걸었다.
“이름 뭐였지? 김종원이었나?”
“……이준원.”
“그럼 그냥 이준원이라고 부를게.”
재강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선 둘은 말없이 앞쪽을 바라봤다.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맞잡은 두 손을 세게 쥐어짜대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 이준원이란 작자를 향한 분노가 거세게 타올랐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명선은 재강의 얼굴을 붙잡고 달려들었다.
재강은 기습에 놀란 듯하면서도 키스를 받아 주었다.
명선은 재강을 벽에 밀어붙인 채 몸을 바싹 붙이고 키스했다.
명선의 등을 붙잡고 있던 재강의 손이 곧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를 꽉 쥐었다 놓고 어루만졌다.
둘은 서로의 입술을 느릿느릿 부드럽게 빨고 혀를 뒤섞었다.
눈을 살짝 뜬 명선은 감은 채인 재강의 눈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섹스할 때 말고는 키스하고 싶었던 적 없는데.
얘가 그만큼 키스를 잘하는 건가…….
고요한 집에서 한참 동안 젖은 점막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만 울렸다.
입술을 떼자 재강의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너 나 연기 잘하는 거 알지?”
명선이 재강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댄 채 낮게 말했다. 재강은 그대로 서서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혹시 여기 같이 있다가 이준원 온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 술김에 내가 꼬셔서 그렇게 됐다고 둘러대 줄게. 그냥 취해서 서로 꼴리는 바람에 그랬다고 말해 줄게.”
“…….”
“집 나와서 떠도는 후배라고 하자. 집 구할 때까지 잠깐 신세 지는 거라고.”
재강은 말없이 있다가 곧 몸을 돌리더니 냉장고 쪽으로 갔다.
명선은 물을 마시는 재강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디서 만난 후배인지 정도만 입을 맞춰 놓을까? 어떻게 할래? 군대?”
재강은 명선을 등진 채 컵에 물을 한 번 더 따라 끝까지 들이켰다.
“가든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되잖아.”
컵을 비운 재강이 생수병을 도로 냉장고에 넣으며 말했다.
“아, 그러네. 어쨌든 사실이고.”
재강은 티셔츠를 훌렁 벗으며 침대 쪽으로 갔다.
“그럼 나 계속 여기서 놀아도 되는 거지?”
명선이 재강의 뒤를 따랐다. 재강은 그대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맘대로 해.”
재강이 베개를 이리저리 고쳐 베며 벽을 보고 누웠다.
명선은 침대에 손을 짚고 엎드려서 재강의 몸을 들여다봤다.
“야, 자려고?”
“출근 전까지 잘 거니까 배고프면 나 깨우지 말고 알아서 뭐 먹든지 해.”
재강이 눈을 감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알았어.”
명선은 얼마간 재강의 몸과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바닥에 앉아서 침대에 팔을 걸친 채 기댔다.
“근데 준원이 돌아오면…….”
낮게 말한 재강이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뗐다.
“넌 너희 집에 가야 되는 거 알지.”
“아, 당연하지.”
“…….”
으, 씨.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지? 돌아오면, 얼마나 같이 지내는 건데? 일주일? 한 달?
한창 재밌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근데 어차피 그렇게 이상한 관계로 지내는 거, 다시 돌아와도 나랑 계속 밖에서 섹스하고 지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준원은 지 꼴릴 때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한다며. 그러면서 다른 놈들이랑 떡도 치고 다닐지 어떻게 알아.
……뭐, 문제는 숯불 이 인간이지. 새끼가 의외로 좀 꽉 막힌 데가 있어서.
이준원 물건에 손만 대도 발끈발끈하는 거 봐. 버려진 개처럼 집이나 지키면서.
“근데…… 이준원 오면 나랑 섹스도 안 하는 거야?”
“그걸 왜 해, 너랑.”
“아, 정말? 몰래 만나서 하는 것도 안 되나? 네 몸도 못 만져?”
명선이 재강의 등을 쓰다듬자 재강이 얼른 꿈틀하며 쳐냈다.
“에이, 안 왔으면 좋겠네. 네 몸도 못 만지고 무슨 낙으로 사냐.”
“……헛소리하지 마라.”
“이번엔 돌아오지 마세요, 이준원 씨. 이 몸은 제 겁니다.”
명선이 고개를 쳐들고 손나팔을 만든 채 허공에 외쳤다.
재강이 질렸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안 닥쳐?”
명선이 킥킥 웃었다.
“아, 뭐 통영까지 들리겠냐고. 그것도 바다 위에 떠있을 사람한테.”
“으휴.”
재강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돌아누웠다.
“걱정하지 마. 이준원 돌아오면 매너 있게 자리 비워 줄 테니까.”
“…….”
“어쨌든 왔다 갔다 한다며. 떠날 때마다 나랑 놀면 되겠네.”
“…….”
“근데 너랑 못 놀 땐 심심하긴 하겠다. 100퍼센트 몸을 찾는 게 진짜 쉬운 일은 아닌데. 전국을 떠돌면서 찾아봐야 하나? 이번엔 애인 확실히 없는 사람으로. 아니, 짝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사람. 뭔 말인지 알지?”
명선은 침대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자꾸 짜증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너만큼 나랑 잘 맞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네 몸을 보거나 만지는 건 정말 좋아해도, 너를 막 애인 상대로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잖아. 네 몸 아니었으면 너한테 그렇게 질척대지도 않았을 거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겠지.”
“…….”
“그리고 너도, 나랑 하는 섹스는 좋긴 좋아도 딱 거기까지인 거잖아. 나한테 다른 감정을 품을 리도 없고, 게다가 이준원까지 있는데.”
“…….”
“어찌 보면 성격적으로 우리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이 관계가 잘 어우러지는 게 아닌가 싶다. 원래 섹파란 게, 이런 사람 둘이 만나야 안 삐걱대고 안정적으로 가는 건데. 그치?”
“…….”
명선이 고개를 들고 재강의 등을 톡톡 두들겼다.
“야, 안 그래? 네 생각은 어때?”
“……뭐가.”
“우리 섹파로 되게 잘 맞는 것 같지?”
“몰라, 생각 안 해봤어.”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 멋대로 왔다 갔다 하는 이준원 없을 때 성욕도 풀어야 했을 텐데. 이제부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이준원 왔을 땐 이준원이랑 놀고, 이준원 떠나면 나랑 놀고.”
재강이 한숨을 내쉬고 살짝 웅크리며 머리를 문질렀다.
“뭘 하든 내가 알아서 하니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참견 좀 하지 마.”
“근데 너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냐? 이준원 떠났을 때 섹스하고 싶으면 어떻게 했어?”
“뭘 어떻게 해, 안 하는 거지.”
“너의 성욕은?”
재강이 고개를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
“그거 하나 제어가 안 돼? 그냥 혼자 딸치고서 좆 잡고 잠이나 조용히 처자면 되는 거 아냐, 씨발아. 성욕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
명선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뱉어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리 발끈?”
재강이 일어나 앉아 명선을 내려다봤다.
“나를 왜 너랑 같은 부류로 엮어? 다들 너처럼 대가리에 좆물만 꽉꽉 차서 인간을 섹스 상대로만 보는 줄 알아? 원이가 떠났을 때 섹스 같은 건 아쉬워해 본 적도 없어. 섹스 때문에 걔랑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섹스 때문에 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
명선은 멍하니 재강의 빨간 얼굴을 올려다봤다.
“걔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떤지 아냐? 속이 정말로 썩어 들어가고 타들어 가는 기분이야. 다 타고 문드러져서 뻥 뚫린다고. 걔가 다시 돌아올 때까진 그냥 그렇게 훤히 뚫린 채로, 사는 것 같지도 않게 사는 거야. 인생의 그 부분은 그냥 통째로 아무 의미도 없고 감정도 없어. 근데 뭐, 섹스? 성욕? 차라리 멍청하게 그런 것만 걱정하고 있는 거면 나도 좋겠다. 넌 상실감이라는 것도 모르지? 네가 그런 식의 좆같은 기분을 알기나 해? 평생 알 일도 없을걸? 그런 걸 모르고 사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는 알아?”
말을 끝낸 재강의 어깨와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재강은 물기가 조금 서린, 충혈된 눈으로 명선을 노려보다 고개를 홱 돌리고 입가를 문질렀다.
눈만 깜박거리고 있던 명선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명선은 침대를 짚은 재강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엄청 사랑하나 보네.
그럼 뭐, 그냥 그렇다고 짧게 말하면 되지, 거품 물고 주절대기는…….
근데 아무리 사랑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
이준원한테 그 문드러지고 뻥 뚫린 가슴에 관해서 얘기해 본 적은?
왜 그런 인간을 계속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곧 재강이 명선을 등지고 도로 누웠다. 재강은 웅크리고 벽에 바싹 파고들듯 했다.
명선은 복잡한 심경인 채 재강의 등을 바라봤다.
문득 이준원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을 모두 끄집어내 불태우고 ‘그런 놈은 잊고 나와 신나게 놀자!’라고 하고 싶었으나, 물론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선은 멍하니 앉아 있다, 슬그머니 일어나 옥상으로 나왔다.
날씨는 쨍쨍하고 맑아 동네가 멀리까지 잘 보였다.
날씨는 왜 또 좋고 난리야.
명선은 울적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다 검은 장우산을 펼쳐 들고 평상에 올라가 앉았다.
찌푸린 채 핸드폰을 켜 SNS 이곳저곳을 떠돌다 키득대기도 했다.
[써니 내일 점심이나 저녁 같이 할래?]
대용의 문자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명선은 문자를 보자마자 곧장 달력을 열고 전에 메모해 둔 재강의 스케줄을 살폈다.
내일 11시에 어떤 할배를 데리고 병원에 가네.
얼마나 걸리려나? 노인이니까 좀 오래 걸릴지도.
그럼 11시쯤 대용이랑 브런치를 때리고 놀다가 1시쯤 돌아오면……?
아니, 그냥 나도 병원에 따라갈까?
……방금 전에 화낸 게 내일까지 가면 어떡하지?
만에 하나 쫓아내기라도 하면 이 평상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위할 순 있는데.
여름이니까 가능하긴 해. 겨울이 올 때까지 화나 있다면 좀 어려워지는 거지.
명선은 미간을 찌푸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퍼뜩 대용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친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네.
대용이랑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얘가 서운해할 거야.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명선은 별수 없이 답 문자를 찍었다.
써니
[용이 용이 점심 콜]
[11시 어때?]
대용용
[그렇게 일찍? 점심인데?]
써니
[브런치라고 생각하지 머 ㅎ]
대용용
[낮에 일있어? 그럼 저녁으로 해도 되는뎅]
써니
[어 요새 저녁에 일해서리]
대용용
[무슨 일??]
써니
[아 내가 얘기 안했나?ㅎㅎ]
[나 요새 가든에서 카운터봐]
대용용
[????????]
[니가???????]
[왜??????]
써니
[돈벌라고 하지 왜해 ㅋㅋ]
대용은 놀라고 경악하는 이모티콘을 연달아 다섯 개나 보냈다.
대용용
[써니 철들엇숴???????]
[왜 철들어??????]
[안돼ㅠㅠㅠㅠㅠ]
[이 시대의 마지막 철부지여ㅠㅠㅠㅠ]
써니
[ㅋㅋㅋ]
[해보니까 나름 재밋더라고]
[그리고 모텔비가 좀 나가야 말이지]
대용용
[아,,,,,,,, ㅋ]
[하긴 그럼 그러치]
[써니의 목적은 그거지]
[써니 철 안들엇넹]
[다행이다~]
써니
[너무 그러지마 나도 내몫을 하는 어른이라구]
대용용
[그래서 요새 계속 바빳구만]
[왜그렇게 연락도 뜸하고 얼굴보기 힘든가했네]
써니
[그래 형아가 요새 바빠]
대용용
[어 그럼 그 숯맨? 숯남자? 그 사람도 너랑 같이 일하는 거야?]
흡.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니, 염대용…….
음…… 뭐라고 하지? 괜히 숨기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아니, 하긴 뭐, 있는 그대로 얘기해도 상관없잖아. 뭐 어때서?
내가 애초에 왜 숨기려고 했지?
명선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가 문자를 찍었다.
써니
[나 요새 걔랑 자잖아 ㅋㅋ]
보내 놓고 왠지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려 명선은 살짝 찡그렸다.
대용은 문자를 읽고 나서도 얼마간 답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아 씨, 깜짝이야.”
명선은 펄쩍 뛰었다가 공연히 창문 쪽을 살피고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르고 계단 쪽으로 달려갔다.
-써니!
핸드폰 너머에서 대용이 소리쳤다.
“어, 어.”
명선이 멋쩍게 웃으며 작게 대답하고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뭐야! 너 그래서 돈 버는 거야? 남창한테 돈 갖다 바치느라고?
대문 밖으로 나온 명선은 멈칫했다가 길을 내려갔다.
아, 얘한테 거기까지만 얘기했나? 업데이트할 거 엄청 많잖아?
“음…… 남창은 내가 오해한 거였고, 지금은 약간 좀, 섹파처럼.”
-뭣!
명선이 흐흐 웃었다.
“정기적으로 하는 사이가 돼 버렸지.”
-뭐야! 게이야? 아님 네가 이 세계로 초대를 해버렸어? 눈을 뜨게 해줬어?
“알고 보니까 게이더라고.”
-뭣!
대용이 소리칠 때마다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오, 너 지금 어디야, 가게야? 이렇게 소리 질러도 돼?”
-지금 손님 없고 나랑 승규 형만 있어. 아 뭐야, 써니, 썰 좀 풀어 봐. 지금 승규 형도 궁금해하고 있단 말이야. 아니지, 형, 스피커폰으로 돌릴까? 아, 잠깐만, 어서 오세요. 형, 나 잠깐만. 써니, 잠깐만.
손님이 들어왔는지 우왕좌왕하던 대용은 곧 매장 밖으로 나온 듯했다.
-빨리 썰 풀어 봐. 어떻게 알았는데? 바이도 아니고 게이라고? 진짜?
“어떻…… 게 알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암튼, 게이야. 바이 아니고 게이.”
-웬일이니! 야! 왜 이걸 지금 얘기해? 언제 잤는데?
명선은 날짜를 따져보며 시선을 올렸다가 자기가 우산을 그대로 쓰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깨닫고 얼른 우산을 접었다.
“일주일 좀 넘었나? 지난주 월요일에 처음 했네.”
와, 되게 오래 같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밖에 안 됐다니.
맨날 붙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처음부터 좀 차근차근 얘기해 보라니까? 아니, 써니, 지금 뭐 하는데? 당장 여기로 올래? 출근은 언제 해?
“아이고 선생님, 진정 좀 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 써니가 자진해서 섹파를 만들었다는데. 너 그런 것도 싫어했잖아, 자꾸 정붙여서 귀찮아진다고. 아, 잠깐만. 근데 그 사람도 너랑 섹파하는 거에 동의한 거 맞아? 혹시 너 또 플러팅해대고 꼬시고 있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은 너한테 마음 생기고 너 혼자 섹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 반대인 것 같은뎅.”
무심히 말을 내뱉었다가 명선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막았다.
뭔 소리야?
-……음?
“…….”
뭔 소리야, 권명선, 씨발?
-……여보세요? 써니?
“어?”
-뭐라고?
“뭐가?”
-…….
권명선, 뭐야? 뭔 소릴 한 거야? 그런 말이 왜 나와?
“아, 반대라고 한 거? 혼자 설레발 치던 이전 섹파들이랑 성격이 정반대라는 얘기지. 그렇게 반대라고. 걔도 나랑 좀 비슷해. 연애 관심 없고 몸으로 말하는 거. 그러니까 계속 섹파로 지내는 거지, 뭐. 안 그러면 했겠냐, 아무리 몸이 100퍼센트여도.”
-아…….
염 대용 이거 눈치가 빨라서 금방금방 캐치하는 놈인데.
-야, 그러지 말고 지금 가게로 오라니까. 와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얘기 좀 해봐.
휴. 일단 넘어가는 건가.
“안 돼. 지금 걔 자는데 깰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란 말이야. 이따 같이 출근할 거야.”
-뭣!
핸드폰 너머에서 대용이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명선은 찜찜한 표정인 채 우산 꼭지로 담장 구석을 콕콕 찌르며 대용이 진정하길 기다렸다.
-와, 써니, 뭐야, 너 연애하니?
“……무슨 끔찍한 소릴?”
-확실해? 둘이 섹파라고 관계를 정의한 거 확실한 거야?
“너 나를 모르냐?”
-연애 좀 하면 어때, 써니.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아니, 그건 아는데, 그런 거 아니라고요.”
-흠.
대용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연애하면 한다고 너한테 얘길 했겠지, 굳이 숨길 이유도 없잖아.”
-하긴. 그러네.
“얘는 완전 섹파야. 몸도 잘 맞고, 100퍼센트 몸 물고 빨 수 있는 것도 진짜 좋고.”
-성격은 괜찮아? 전에 너한테 험한 말도 했었잖아.
“나름 귀여워.”
-허어얼…….
늘어진 말끝에 또다시 끅끅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존나 웃으세요?”
-귀여우면 끝난 건데. 너무 반하지 않게 조심하셈.
“뭐?”
-잘생긴 거, 섹시한 거, 다 필요 없고, 누가 귀여워 보이면 그건 진짜 완전 깊게 빠지는 거야. 통상적으로 매력 있게 보이는 부분을 넘어서서 이제 그 사람이 너의 취향에 쏘오옥 들어오는 순간인 거지.
“…….”
명선이 눈을 껌뻑거렸다.
다 뻗친 머리를 하고 앉아 오이를 우적우적 씹던 재강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잘생김이나 섹시함과는 현저히 거리가 있던, 그 ‘귀여운’ 모습.
“뭔 소리야……. 개나 고양이가 귀여워 보인다고 해서 연인 사이가 되고 싶어 하진 않지.”
-그런 예를 끌고 온다면 굳이 반박하지 않겠어.
휴.
-써니, 근데 이러다 혹시라도 감정 생기면 괜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 사람한테 사실대로 얘기하고 관계 정리해. 너도 알지? 너의 섹파들이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다 떠나갔는지.
“아이고, 걱정 마십쇼. 제가 워낙에 몸만 밝히는 놈이라.”
-하긴. 그래, 그럼 내일 보자고. 이야기보따리를 두둑이 챙겨가지고 와.
“어, 내일 봐.”
전화를 끊고 명선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우산 끝만 내려다봤다.
자기도 모르게 떠돌던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니 상황은 갑자기 선명해지면서도, 더 혼란스러워진 것만 같았다.
* * *
명선은 뙤약볕 아래에서 검은 장우산을 질질 끌며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발끝을 보며 멍하니 걷다가 마트에 들어가 어슬렁대고 다시 나와 걸었다.
과일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홀린 듯 과일을 사기도 했다.
한참 그러다 돌아와 옥탑방 계단을 오르자 곧장 평상에 앉은 재강이 보였다.
재강은 입을 살짝 벌린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갑자기 가슴이 크게 두근 뛰는 듯해 명선은 배를 움찔 떨었다.
“아, 숯불, 일어났네.”
명선은 아무렇지 않은 척 헤헤 웃어 보이며 옥상 안으로 들어갔다.
재강은 그대로 앉아서 가까워지는 명선을 응시했다. 머리 위쪽 옆으로 머리카락이 비죽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잘 잤어?”
재강의 머리를 꼭 안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명선은 과일 봉지와 우산을 평상에 내려놓고 재강 옆에 걸터앉았다.
재강은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빨래 걷었구나.”
재강의 뒤쪽으로 바싹 마른빨래들이 곱게 접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명선은 맨 위에 있는 수건을 손으로 쓸었다.
“잘 말랐네.”
“……어디 갔었냐.”
재강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아, 산책했어. 맛있어 보이길래 좀 사고.”
명선이 봉지를 가리키자 재강이 힐끗 그쪽을 쳐다봤다.
명선은 허벅지 위에 봉지를 올려놓고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발긋발긋한 얼룩이 있는 큼직한 황도 다섯 개가 봉지 안에서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안을 들여다본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숭아 알레르기 같은 거 없지?”
“없어.”
“다행이네.”
명선은 봉지를 도로 내려놓고 무릎을 가볍게 흔들며 앞쪽을 바라봤다. 재강도 앞쪽 어딘가를 바라봤다.
“또 이런 식으로 햇빛 아래에 소중한 몸을 방치하고 있네. 백억 파운드짜리 몸을.”
명선이 문득 우산을 펼쳐 둘의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늘이 작아 명선은 재강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야,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건 양산도 아니고 검은색이라 자외선 차단엔 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긴 해.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만. 그러니까 빨리 여기 파라솔을 놓든지 하자고.”
“…….”
“왜 일어났어? 출근 전까지 잔다더니.”
“그냥 깼어.”
“내가 없으니까 너무 조용해서 잠도 안 왔구만.”
명선이 키득대며 재강의 팔을 쿡쿡 찔렀다.
“지가 시끄럽다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네.”
“시끌벅적하면 좋지 뭘 그래. 사람 사는 데가 좀 그런 맛도 있어야지.”
“메모라도…… 해놓고 가지 그랬냐.”
“무슨 메모?”
“어디 가는지, 그런 거. 짧게.”
“어, 숯불. 그사이에 내가 너무 보고 싶고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막 그랬던 거야?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 진짜? 잠에서 깨서 내가 없으니까 너무 서럽고 슬프고 그랬어?”
재강이 찡그리고 명선을 쳐다봤다.
“너는 한마디로 끝내도 될 말을 몇 마디씩 늘어놔서 그렇게 시끄러운 거야.”
“한마디로 끝낼 말이었나? 어떤 한마디?”
“그냥 담부턴 메모라도 해놓겠다고 하면 끝나는 거잖아. 왜 그렇게 주절거려?”
명선이 재강을 마주 보다 빙그레 웃었다.
“알았어. 담부턴 메모해 놓고 나갈게.”
“…….”
명선의 얼굴을 훑어보던 재강이 곧 고개를 돌렸다.
명선은 그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준원이 자꾸 도망가서, 그것 때문에 불안감 같은 게 생겼을 수도 있겠네.
나를 걱정했던 게 아니고, 그냥 기본적으로 그런 거겠지.
이준원 때문에.
“아까는, 미안했어.”
명선이 작게 말했다.
“내가…… 그런 걸 느껴 본 적이 없긴 하지.”
“…….”
재강이 시선을 스르르 내리고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내가 좀 그래. 섹스밖에 모르고, 사람을 몸으로밖에 안 보고. 그래서 생각하는 게 그냥 다 그런 쪽으로만 쏠렸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남의 관계를 너무 가볍게 본 것 같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
“미안해.”
“……미안할 것까진…… 없고.”
재강이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문질렀다.
“나도 발끈해서 좀…… 이상하게 굴었어. 괜히 너한테 화풀이한 게 됐다.”
“…….”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
“나도 미안해.”
명선이 몸을 기울여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재강은 흠칫했다.
“그럼 나 싫어진 거 아니지?”
“……뭐?”
“나 싫어진 거 아니지?”
명선이 배시시 웃었다. 재강의 시선이 명선을 피해 떠돌았다.
“싫…… 어지고 자시고. 똑같지.”
“그럼 좋아?”
“누가 좋대?”
“그럼 싫다고?”
“좋지도 싫지도 않아. 그냥 똑같아.”
“그 똑같은 게 뭔데?”
“무슨…… 씨발, 됐어.”
재강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명선이 우산을 집어 던지고 재강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숯불! 나 싫어하지 마라.”
“안 싫다고.”
재강이 가볍게 몸을 뒤틀었다. 명선은 재강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더 단단히 달라붙었다.
“나는 네 몸이 정말 좋단 말이야.”
“…….”
명선의 팔을 꽉 잡았던 재강의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니까 이준원 없을 땐 꼭 나랑 노는 거다. 혼자 있거나 다른 놈 부르지 말고, 나를 불러야 돼.”
“…….”
“내가 재밌게 해줄게.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하고.”
“…….”
“알았지? 꼭 나랑 있는 거야.”
“……알았어.”
재강이 명선의 팔을 몇 번 쓰다듬었다.
명선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재강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비벼대다가 놓아주고 일어났다.
“복숭아 씻어 줄게.”
명선이 봉지를 들고 현관 쪽으로 갔다.
집안은 상대적으로 어두웠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싱크대 앞으로 가며 명선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명선은 봉지에서 복숭아를 꺼내 조심스럽게 물에 씻었다.
어떤 기분을 느끼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게 맞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겠다는 거야.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준원만 기다리면서 그냥 이렇게 지내겠다고?
그게 괜찮긴 한 건가? 말이 되는 상황인가?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재강의 팔이 가슴 쪽으로 쑥 들어왔다.
“으어?”
명선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복숭아를 콱 쥐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복숭아 안으로 명선의 손가락이 푹 들어갔다.
재강은 한 팔로 명선의 가슴을 안고 붙어 서서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비벼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곧장 느껴졌다.
복숭아에서 흘러나온 즙이 싱크대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 아아…… 씨, 너 자다가 꼴려서 깼구나?”
명선이 키득 웃었다.
재강의 가쁜 숨이 명선의 목덜미 위를 덮었다.
재강이 엉덩이를 움켜잡자 명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꿈에 이준원이라도 나왔나?
명선은 재강에게 조금씩 밀쳐지며 싱크대 가장자리를 붙잡았다가 수돗물을 잠갔다.
“숯불…… 발전하고, 있는데?”
명선의 숨도 차츰 거칠어졌다.
재강이 명선의 바지 앞섶을 더듬었다. 명선의 것 역시 단단하게 부푼 채였다.
재강은 명선의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하, 아아…….”
명선이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명선의 손에서 거의 문드러지던 복숭아가 싱크대 안으로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이렇게라도 흥분하게 만든 걸 이준원한테 고마워해야 하나?
재강은 명선의 성기를 거칠게 문지르면서 목덜미에 입술을 문댔다. 명선이 헐떡이며 고개를 젖혀 재강의 어깨에 기댔다.
재강의 입술 아래에서 명선의 목이 꿀렁꿀렁 움직였다.
명선의 가슴을 꽉 쥐고 있던 재강의 손이 위로 올라오며 명선의 목을 지나 턱을 감싸 쥐었다.
재강은 명선의 얼굴을 돌려 바로 키스했다.
한껏 벌어진 둘의 입이 블록 장난감처럼 꼭 끼워 맞춰졌다.
둘은 서로의 뜨거운 숨을 빨아들이고, 입술을 세게 빨고, 혀를 뒤섞었다.
명선은 재강에게 포박당하듯 단단히 안긴 채 흔들리며 재강의 팔뚝을 쓰다듬었다.
재강이 입술을 맞댄 채 명선의 몸을 돌려세워 자신을 향해 서도록 했다.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잡으려다 복숭아즙으로 범벅된 손을 멈칫하자, 재강이 문득 그 손을 잡더니 엄지손가락을 물었다.
재강은 명선의 엄지를 뿌리 끝까지 삼키듯 하며 빨다가 다른 손가락도 하나씩, 두 개씩 빨았다. 구석구석, 복숭아즙을 모두 빨아 없앴다.
씨근씨근 숨을 몰아쉬면서 명선의 손바닥에 입술을 문지르기도 했다.
명선은 눈을 크게 뜨고 헐떡이며 재강의 입술과 옴폭 팬 뺨을 응시했다. 복숭아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간 지켜보던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둘은 다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재강의 입에서도 복숭아 냄새가 났다. 명선은 흥분감에 벅차올라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명선은 키스하며 재강의 얼굴을 정신없이 어루만졌다. 턱과 뺨, 귀, 광대뼈 부근. 뼈의 윤곽을 매만지고 피부를 깊이 누르며 쓸었다.
곧 재강이 명선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리더니 조금은 난폭하게, 명선의 입술을 물어뜯듯 빨다 턱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내려갔다.
재강이 무릎을 꿇고 명선의 성기를 입 안 가득 집어넣었다.
“아후, 씨발…….”
명선이 몸을 움츠리며 재강의 머리를 붙잡았다.
재강은 명선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성기를 빨았다. 세게 삼켰다가 뱉고 핥아 올리고 다시 쭉쭉 빨았다. 명선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으으…… 더럽게 잘, 빠네…….”
명선은 싱크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서서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야…… 나, 그냥 싸도 돼? 이대로? 그 안에?”
잔뜩 찡그린 명선이 쉰 목소리로 씨근대며 말했다.
재강은 대답 대신 입술 끝을 더 꼭 조이고 성기를 입 안 깊숙이 박아 넣듯 했다.
명선의 아랫배에 재강의 이마가 파고들었다. 곧 그 아랫배가 경련하듯 떨렸다.
명선은 눈을 감고 재강의 머리를 꽉 붙잡은 채 사정했다.
다리가 휘청거려 명선은 재강과 싱크대를 움켜잡고 버텼다.
고개를 수그리고 헐떡이던 명선이 곧 숨을 길게 뱉어내며 눈을 떴다.
재강은 여전히 성기를 입에 문 채로, 눈을 치켜떠 명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얼마간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재강이 입을 떼자 명선의 성기와 재강의 입술 사이에서 길고 가느다란 액이 주르르 늘어졌다가 끊어졌다.
명선은 몸을 움찔했다가 활짝 웃었다.
“기절하는 줄 알았어.”
“…….”
“너무 좋아서.”
재강은 손등으로 입을 문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 입이…….”
명선이 재강의 어깨를 붙잡고 살짝 밀면서 몸을 기울였다.
“키스할 때만 100퍼센트인 건 아니었구나.”
재강은 명선에게 밀리며 주춤주춤 바닥에 드러누웠다.
“목구멍 안쪽까지 구석구석 100퍼센트였네.”
명선은 재강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고 양다리를 조금 벌린 후 그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네 것도 마셔 줄게.”
명선이 잔뜩 선 채인 재강의 성기를 입에 물고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재강은 턱을 쳐들고 눈을 감으며 숨을 뱉어냈다.
명선의 손이 재강의 배를 쓰다듬다 가슴으로 올라가 세게 움켜쥐었다. 재강은 명선의 움직임에 맞춰 골반을 조금씩 쳐올렸다.
명선은 다시 몸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저기요. 주님. 엄마가 사랑하는 주님.
나 이 정도로도 만족하고 불평 없이 붙어 있을 테니까, 이준원 영영 돌아오지 않게 해주면 안 되나요?
엄마가 주님 때문에 들인 돈도 있고 정성도 있는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니면, 숯불한테 너무 가혹한 소원인가? 그래서 안 되나?
근데 나는 얘한테 이준원보다 훨씬 더 잘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