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2. 애틋해요
땀범벅이 된 둘은 벌거벗은 채 바닥에 늘어져 누워 한참 숨을 골랐다.
명선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 들여다봤다. 손에선 아직도 복숭아 냄새가 났다.
옆을 보니 재강은 눈을 감은 채였다. 재강의 얼굴과 몸에도 땀이 가득했다.
명선이 손을 뻗어 재강의 관자놀이 위에 맺힌 땀을 살짝 문지르자 곧 재강이 스르르 눈을 떴다.
“숯불.”
“…….”
내가 걔보다 더 잘해 줄 수 있어.
명선은 내내 생각하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내일 11시에 어떤 할아버지랑 병원 가지?”
“……따라올 생각 하지 마라.”
“나도 내일 스케줄이 있거든?”
재강이 멈칫했다가 명선을 쳐다봤다.
“네가?”
명선이 킥 웃었다.
“아, 뭘 또 그렇게 놀라, 사람 민망하게. 나도 나름 바쁜 사람이야.”
재강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네 몸을 만난 이후론 거기에 집중하느라 맨날 너한테 붙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 엄청 바빴던 사람이라고.”
“한량 주제에 무슨.”
“알차게 노는 것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다는 거 아냐?”
“알고 싶지도 않아.”
“나 내일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알고 싶지도 않다고.”
“관심 좀 가져 줘.”
재강이 입을 다물고 천장만 바라보는 동안 명선은 재강의 얼굴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느릿느릿 쓸었다.
한참 만에 재강이 입을 열었다.
“뭐 하는데.”
명선이 캬하하 웃었다.
“역시 궁금했군.”
“됐어. 말하지 마.”
“친구랑 밥 먹으러 가는 거야.”
“…….”
“전에 너 게이인지 아닌지 감별하러 가든에 왔던 친구.”
“아.”
“걔한테 자랑할 거야.”
재강이 이마를 찡그렸다.
“뭘 자랑해?”
“걔는 알거든, 내가 너 같은 몸에 얼마나 푹 빠져 있고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지. 내 꿈이 실현된 걸 자랑해야지.”
재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내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숯불. 고통은 두 시간 정도면 끝날 거야.”
“……두 시간?”
“11시에 만나서 밥 먹고 좀 놀다 1시쯤 헤어지려고. 너도 병원 가면 그 정도 있다 오겠지? 특별히 네 스케줄에 맞췄어.”
“무슨…… 쓸데없는 짓이야?”
“쓸데없긴, 효율적인 거지. 최대한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드는 거야. 아니, 네 몸.”
“…….”
“두 시간 동안 헤어져 있었던 걸 뜨겁게 만회하면서 섹스하고 출근하면 되겠다. 아우, 완벽하지 않냐?”
재강은 말없이 천장을 보다 가슴에 난 땀을 문질러 닦았다.
“내일모레 개 산책 같이 가고, 또 뭐였지…… 금요일엔 가구 조립하러 가지? 그것도 같이 갈래? 도와줄까?”
“됐어. 걸리적거려.”
“손이 하나 늘면 확실히 편하고 빨리 끝날 텐데. 나한테 돈 나눠줄 필요 없다니까? 그냥 무급 인턴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해.”
“잔말 말고 집에 좀 있어라. 어?”
“어느 집? 너와 나의 작은 집?”
명선이 히죽거리자 재강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 네가 정 그렇다면야. 알았어. 나는 우리의 작고 귀여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대신 너 일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와야 돼.”
“…….”
“바로 들어올 거지?”
재강이 계속 대답이 없자 명선은 재강의 어깨를 꾹꾹 찔렀다.
“야, 딴 데로 안 새고 바로 들어오는 거지?”
“아, 샐 데도 없어, 새끼야. 되게 볶아대네.”
재강이 명선의 손을 쳐냈다.
“아니, 첨부터 그렇다고 얘길 하면 되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볶아대는 거 아냐. 처음부터 대답을 제대로 했으면 내가 계속 물었겠어?”
“으휴, 알았다고. 바로 들어온다고.”
“굿 보이.”
재강이 얼굴을 문지르다 명선을 등지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명선은 땀이 난 그 등을 바라보다 손으로 부채질을 몇 번 해주었다.
“야, 근데 너 토요일에도 일 있지 않냐?”
“……베란다 청소.”
“어휴, 쉴 새가 없네, 쉴 새가.”
“너만 아니었으면 알아서 잘 쉬었어.”
“자기도 즐겼으면서 또 그런다.”
“…….”
재강의 침묵에 명선은 슬그머니 웃음을 삼켰다.
자기도 동의를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근데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해. 진짜 골병 나는 거 아니야?”
“원래 이 정도는 아니야. 폰 망가진 동안 의뢰가 좀 밀려서 이렇게 된 거지.”
“다음 주부턴 사우나 청소 일도 다시 하잖아.”
“넌 무슨 내 매니저도 아니고,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어?”
“그 몸이랑 놀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명선은 재강의 젖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싹싹 쓸어 다듬었다.
“사우나 청소는 일주일 내내 가?”
“수요일 빼고 매일.”
“음…… 섹스 스케줄을 좀 조정해야겠네.”
“뭔 소리야.”
“이렇게 하자. 가든 일 끝나고 나는 여기로 오고, 너는 사우나로 가. 일 끝나고 집에 올 때쯤이면 너도 많이 피곤할 테니까 그냥 안고 잠만 자고, 아침 10시쯤 일어나서 한 판 하고, 점심 먹고 나서 한 판 하고 가든에 가는 거야. 어때.”
“혼자 딸이나 쳐.”
“내가 네 앞에서 혼자 딸치고 있으면 너도 흥분해서 미칠걸?”
재강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명선은 재강이 코웃음을 치기 전, 아주 짧게 멈칫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상상하니까 자기도 꼴리긴 한 거지. 몸은 거짓말을 못 해.
명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너도 나랑 같이 있고 싶잖아, 짜샤. 자기도 나 좋아하면서.
……아니, 내 몸. 나랑 섹스하는 거.
명선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명선은 재강의 뒤통수와 목덜미, 등을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가 그 등에 슬그머니 이마를 붙였다. 재강은 가만히 있었다.
명선은 얼마간 그대로 있다가 좀 더 다가붙어 재강의 몸을 안았다. 재강의 등에 명선의 배와 가슴이 찰싹 붙었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몸을 붙이고 말없이 누워 있었다.
* * *
써니
[숯불 일끝나고 바로 들어오는거 잊지마라]
숯불
[몇번을 얘기해??? 차단하기 전에 닥쳐좀]
대용의 원룸텔 입구 화단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보며 놀던 명선은 화면에 재강의 답 문자가 떠오르자 씨익 웃었다.
답 보내는 거 보니까 병원에 도착했나 보네. 접수하고 기다리는 중인가 보다.
이때를 노려서 또 들들 볶아야징.
써니
[잊지마 1시까지 우리의 작은 집에서 만나는거야]
[1분이라도 늦으면 보상해]
[30초 정도는 봐준다]
재강은 명선의 문자를 읽은 듯했지만 답이 없었다.
써니
[야 오늘아침에 진짜 좋았다]
[너 뒤 진짜 잘빨아]
[킹 오브 리밍]
[내가 인정할정도면 그건 진짜야]
[내가 특히 섹스쪽에서는 누굴 그렇게 쉽게 인정하질 않거든]
[너는 내 인정을 받은 특별한 인간이야]
[상 같은 거라도 주고 싶다 진짜]
[리밍의 달인을 위한 상 그런거]
[자랑스럽지 안냐?]
[응? 응?]
숯불
[어쩌라고 시바라]
[닥치라고]
명선이 킥킥 웃었다.
써니
[그냥 자랑스러워하라구]
[그리고 이따 또 빨아줘]
[난 니입만 떠올려도 몸이 짜릿짜릿해]
[혹시 지금 사진 찍을수 있어? 입만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줄래? 혀 내밀고]
[가슴도 찍어서 보내주면 더 조아]
[보고싶단말야]
숯불
[변태새끼가]
[징그러운소리 그만하고 친구한테나 가봐라]
써니
[친구 아직 안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야]
[그냥 안 나오고 계속 너랑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치?]
숯불
[이제 답안할거니까 혼자 떠들든지말든지 맘대로해]
써니
[숯불]
[숯불]
[숯불]
[숯불]
[아잉 숯불]
[숯불]
“써니.”
신난 얼굴로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계속 문자를 보내던 명선은 귓가에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는지 대용이 명선의 핸드폰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명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핸드폰을 껐다.
“오래 걸렸네, 용이 용이.”
명선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대용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서서 명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런치를 조지러 가 보실까.”
명선은 시선을 피하고 앞서 걸었다.
대용은 조용히 명선의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아 씨, 언제부터 보고 있었지? 문자 내용을 봤나?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도 봤나?
진짜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말인데.
“아주 행복한 얼굴로 문자를 주고받으시는 것 같던데.”
어느덧 명선의 곁에서 나란히 걷던 대용이 나직이 말했다.
명선은 대용을 슬쩍 봤다가 핫, 하고 웃었다.
“당연하지, 100퍼센트 몸이랑 섹스 얘기하는데.”
“…….”
“안 행복할 수가 있나?”
“꼭 애인이랑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명선은 다시 핫, 하고 웃었다.
“솔직히, 애인이랑 섹파의 경계가 되게 애매하지 않냐? 섹스만 하면 섹파고 섹스하면서 데이트도 하면 애인인가? 근데 섹파랑, 어? 그냥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어? 마침 섹파도 그 영화를 보고 싶어 하고 마침 시간이 돼. 그래서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었어. 그럼 뭐야, 그때부턴 애인이야? 아니잖아. 그 경계가 되게 불명확하다는 거지. 난 그 경계에 좀 의심을 보내는 편이야.”
권명선, 뭐래? 횡설수설 씨발.
“야, 너 뒤에 빨려 봤냐? 너도 안 빨려 봤지? 언제 너도 한번 빨려 봐. 해줄 땐 몰랐는데 직접 받아 보니까 진짜 환상이야. 걔가 기술이 좋더라고. 몸도 100퍼센튼데, 능력까지 100퍼센트더라니까. 나 완전 로또 맞은 기분이야.”
“흠.”
“그리고 내가 말했지, 성격이 나랑 완전 비슷해서 사람한테 정을 안 줘. 걔도 그냥 깔끔하게 내 몸만 원하고, 나도 깔끔하게 걔 몸만 원하고. 진짜 잘 만난 것 같아. 최고의 섹파야.”
“그렇구나.”
“박히는 것도 진짜 좋아. 박히면서 그 몸 만지작대고 구경하고 있으면 진짜 천국이야. 너도 알지, 우리 엄마가 나는 교회 안 다녀서 천국 못 가는데 자기가 기도해서 꼭 천국 보낼 거라고 맨날 그러는 거. 근데 엄마 때문이 아니라 그냥 걔 때문에 내가 하루에도 천국을 몇 번씩 왔다 갔다 한다니까.”
“아, 그러니.”
“뭐, 사실 걔를 만나게 된 게 애초에 엄마가 기도 열심히 한 덕에 나한테 곁다리로 보상이 떨어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걷는 동안 명선은 계속 떠들어댔다.
* * *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이렇게 완벽한 커플로 자리를 잡았다 이거지.”
이른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동안 명선은 대용에게 그간 재강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무의식중인지 의도적인지, 준원에 관한 부분은 쏙 빼놓은 채였다.
대용이 빙그레 웃었다.
“이야, 써니, 말하는데 계속 눈빛이 반짝반짝하네?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나 봐.”
“아, 행복 전도사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명선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시계를 봤다.
“암튼, 나 1시까진 들어가 볼게. 걔도 그때쯤 올 거야.”
“뭐 이런 쓰레기 같은 친구가?”
“출근 전까지 섹스 좀 하려고. 4시까지 출근이니까 두 번은 할 수 있어.”
“오늘 아침에도 했다며?”
“더 하고 싶은데 어떡해.”
“그렇다고 오랜만에 본 친구를 이렇게 막 대해?”
“염 씨, 내 마음 알면서.”
명선이 대용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한껏 눈웃음을 쳤다.
대용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을 향한 너의 마음은 잘 알겠다.”
“완전 사랑하지. 완전 사랑스러운 몸이라.”
명선이 킬킬 웃고 커피를 들이켰다.
“써니 써니 명써니…….”
대용이 웃음 띤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명선은 잔 가장자리를 입에 댄 채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잔 표면에 맺혀 있던 물이 도르륵 굴러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네가 워낙에 이런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한번 변하니까 그게 눈에 확 띈다.”
명선이 잔을 내려놓고 물 묻은 손을 휴지로 닦았다.
“무슨 소리신지?”
“그 사람 좋아하지?”
“당연하지, 100퍼센트 몸인데.”
“몸 좋아하는 거 말고. 몸도 좋고 마음도 좋고.”
“마음? 마음이 왜? 뭐, 인간적으론 괜찮은 것 같더라. 말했잖아, 나랑 비슷해서 깔끔하게 먹고 떨어지는 그런 타입이라고. 그런 게 편하지. 질척대는 거 없고. 그런 거로 생각해 보자면 좋지.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 섹파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써니.”
명선이 꾸깃꾸깃한 휴지 뭉치를 대용의 가슴팍으로 던졌다.
“아휴, 아는데, 지금 또 이상하게 몰아가고 계시다고요.”
“이상하네? 그냥 좋으면 좋다고 얘기하면 안 되나? 나한테는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네가 더 이상하거든? 왜 몇 번을 말해도 자꾸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데?”
“행동이랑 말이 따로 노니 그렇지.”
“무슨 행동?”
대용이 명선 쪽으로 살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명선이 대용의 얼굴과 머리를 멀뚱히 훑어봤다.
“아, 머리색 바꿨네?”
대용은 곧장 ‘이거 봐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명선은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물 묻은 손을 마주 잡고 비볐다.
“색 잘 빠졌네. 어디서 했어?”
“예전 같으면 보자마자 바로 내 머리 얘기부터 했을 텐데, 지금 우리 만난 지 한 시간도 넘었는데 너는 한 게 그 사람 얘기밖에 없거든? 심지어 내 안부조차 묻질 않았어.”
명선은 눈을 끔뻑이다가 피식 웃었다.
“아, 우리 대용이가 그게 서운했어? 못 만난 사이 잘 지냈니, 대용아? 머리색도 예쁘게 나오구. 너무 보고 싶었다. 얼굴 좀 만져 보자아아…….”
명선이 대용의 얼굴을 향해 양손을 쭉 뻗었다.
“포인트는.”
대용이 그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네가 너무나 허둥대며 주절거리고 있다는 거야. 근데 나는 알거든. 우리 써니가 뭔가 꺼림칙할 때 말이 이런 식으로 아주 많아진다는 걸.”
“…….”
“네가 뭔가를 깨달았는데 그걸 부정하면서 애써 억누르는 건지, 아니면 네가 아직 네 감정을 몰라서 이러는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다만.”
“야, 그 새끼 애인 있어.”
“…….”
“아니, 애인 같은 거.”
명선은 대용을 마주 보다 살짝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와락, 서러워졌다.
얼음만 남은 유리잔 밑엔 물이 흥건했다.
명선이 그 물을 내려다보는 동안 대용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애인 ‘같은 거’라니?”
대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명선은 대용의 얼굴을 봤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오래 사귄…… 친구 같은, 아니, 섹파라고 봐야 되나, 얘가 그냥 짝사랑하고, 복잡해. 뭐 암튼, 있어, 이준원이라고, 이상한 새끼. 같이 지내다가 갑자기 꼴리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그런대. 근데 떠나 있는 사이에 나랑 만나게 돼서 섹스도 한 거고.”
“…….”
“일단 지금은 나랑 같이 놀긴 해도, 어쨌든 이준원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대. 언젠지는 몰라도. 돌아오면 나는 나가리 되는 거고.”
“…….”
“걜 엄청 사랑하는 것 같아.”
말을 끝낸 명선이 얼굴을 우그러뜨렸다가 풀었다.
둘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그럼 지금 네 문제는…….”
대용의 말에 명선이 눈을 들어 대용을 쳐다봤다.
“그 사람이랑 사귀고 싶은데 그 사람 마음은 그 이준원이란 사람한테 가 있어서 널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뭐 그런 거야?”
대용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듯, 느릿느릿 또박또박 말했다.
명선은 다시 시선을 내리고 잔 안의 얼음을 바라봤다.
명선이 그러고 있는 동안 대용은 아무 말 없이 명선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도 내가…….”
명선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
“…….”
“그냥 계속 같이 있고 싶어. 이준원이 이번엔 안 돌아오면 좋겠고, 내가 걔를 독점하면 좋겠어. 걔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했으면 좋겠고. 적어도 나는 걔한테 이준원보다 훨씬 잘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
“이런 게 사귀고 싶은 거야? 난 누구한테 그런 감정 느껴 본 적 없어서 잘 몰라.”
대용은 명선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준원을 엄청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자기 입으로 얘기한 거야?”
“꼭 집어 말한 건 아닌데, 그냥 그게 보여. 말도 함부로 못 하게 하고, 물건도 다 그대로 바리바리 싸 들고 있고,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고. 되게 충성이야.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는 줄 아나, 씨. 내가 그 인간 물건을 왜 훔쳐? 뭐에 쓴다고.”
“…….”
“거의 반평생 알고 지냈대. 둘 사이에 뭐 되게 특별한 게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좀 재수 없어. 어떻게 보면 무슨 사이비 교주 따르는 광신도 같기도 하고. 교주는 자기 이득 얻는 거 외에는 이쪽에 별 관심도 없는데 얘 혼자 숭배하고 찬양하고 난리 난 거야. 멍청하게.”
“와…….”
“그치? 웃기지?”
대용이 피식 웃었다.
“아니, 그 사람 말고 너한테 와 한 거야.”
“내가 뭘.”
“드디어 너의 그 벗은 몸과 좆물만 가득한 황무지에 사랑이 날아드는 것인가.”
“……무슨 황무지요?”
“진정한 친구라면 너의 가슴 찢어짐을 예견하고 어서 이 관계를 끝내라고 할 것 같지만 말이야…….”
대용은 턱을 괸 채 명선을 응시하다 미소 지었다.
“너도 이런 걸 한번 경험하고 속 좀 썩어 봤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네.”
“속이 왜 썩어.”
“너 때문에 속 다 버리고 떠난 네 섹파 세 명을 떠올려 봐. 너도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는지 정도는 이해하지? 공감까지는 안 바라지만.”
“음…… 뭐.”
“때가 됐지, 때가 됐어. 사랑에 울고 웃는 찌질이 인생에 흠뻑 빠져 봐.”
“야, 그 정도까진 아니야.”
대용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어쨌든, 앞으로 그 사람이랑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둬. 사랑이 네 머리채를 잡고 어디든 질질 끌고 갈 거야. 그게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거고. 그것만 알아두쇼.”
명선이 코웃음을 치며 등받이에 길게 기대 팔짱을 꼈다.
“아이고, 누가 사랑하쟀나요, 계속 붙어살면서 떡이나 치자는 거지. 이준원은 아예 안 돌아오거나 어디서 뒤져 버리면 더 좋고.”
“…….”
“이준원만 안 돌아오면 난 지금 이대로 지내는 거에 아무 불만 없어. 일도 같은 곳에서 하고, 맨날 같이 있고.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아니야.”
“…….”
“어쨌든 걔도 나랑 섹스하는 걸 되게 좋아하긴 하거든. 그 집에 내가 죽치고 있어도 안 쫓아내는 거 봐. 맨날 쫑알대고 시끄럽다고 하면서도 또 슬슬 만져 주면 흥분해서 달려든단 말야. 솔직히 걔도 머리 아프게 만드는 이준원이랑 있는 것보다 나랑 있는 게 더 좋을걸? 내가 훨씬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나랑 사귀면…….”
명선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가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대용이 명선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흐흥, 하고 웃었다. 명선이 눈을 들어 대용을 쳐다봤다.
“또 횡설수설하네, 써니.”
“…….”
“근데 뭐, 원래 그래. 누굴 좋아하는 건 그런 거야. 논리 같은 건 쌈 싸 먹게 되고.”
“…….”
명선은 대용을 빤히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대용은 여전히 즐겁게 웃는 채였다.
“이쯤 되니까 어떤 사람인지 되게 궁금하네. 우리 써니를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
명선은 불현듯 겁이 날 정도로 재강이 보고 싶어졌다.
숯불.
집에 왔으려나.
나를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 했으려나.
* * *
후다닥 뛰어온 명선이 재강의 집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맞은편에 띄엄띄엄 늘어선 공장 건물 안쪽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 외에 사방은 대체로 조용했다.
명선은 옥외 계단을 올려다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 염 씨 놈, 간다는데 계속 붙잡아갖고 30분이나 지체됐잖아. 심술도 심술도 참.
명선은 계속 숨을 고르며 핸드폰을 꺼내 켰다.
써니
[숯불 집에 왔어?]
[나좀 늦어]
[혹시 제시간에 들어왔으면 시계랑 같이 인증찍어보내]
[그럼 내가 늦은벌로 네가 시키는 거 하나할게]
[단 섹스에 관련된 거여야 함ㅋㅋㅋ]
카페를 나오며 보냈던 문자에 재강은 여태 아무 답이 없었다.
“아, 또 읽고 씹어, 버릇없는 놈…….”
명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1시까지 집에 들어오라고 한 건 명선 혼자 떠들어 댄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진지하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어디 딴 데 가서 놀고 있는 거 아냐?
나는 자기랑 같이 있으려고 칭얼대는 불알친구도 떼어 놓고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에이, 정 없는 놈.
명선은 입맛을 다시며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사람이 참, 그렇게 매정해서야. 그래도 섹스는 잘하니까 봐준…….
계단을 다 오른 명선이 우뚝 멈춰 섰다.
명선은 그대로 서서 눈을 느릿느릿 깜박이며 옥상을 바라봤다.
평상 위엔 큼지막한 흰색 폴딩 파라솔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 그늘에 재강이 누워 자고 있었다.
막 뜯은 듯한 택배 박스가 옥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고, 하얗게 빛나는 파라솔은 첫눈에 봐도 새것으로 보였다.
박스 더미와 파라솔, 그 아래에 누운 재강을 차례차례 보며 명선은 몸이 사륵사륵 녹아내리는 듯했다.
모든 경계심과 의심이 녹아 사라지고, 애틋함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우는 것만 같았다.
명선의 입가에 스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파라솔 하나 놓자던 내 말을 듣고 있긴 했나 보네. 맨날 시끄럽다고 뭐라 그러더니.
명선은 햇빛에 달궈진 계단 난간을 만지작대며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옥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재강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명선은 평상 곁에 서서 재강의 잠든 얼굴을 응시하다 몸을 훑어봤다.
파라솔의 그늘 너머로 재강의 두 발이 비죽 나와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으이그.”
명선은 피식 웃고 그쪽으로 가 재강의 발을 붙잡았다. 재강이 화들짝 놀라며 깼다.
“발만 태닝하냐고요, 아저씨.”
명선이 재강의 뜨거운 두 발을 모두 잡아 그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재강은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머리만 쳐들고 명선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왜 이렇게 귀엽고 난리야.”
명선이 키득대며 재강의 몸 위로 와락 달려들었다.
“아, 씨.”
재강은 명선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완강히 밀어내진 않았다.
명선은 재강의 몸 양옆으로 두 손을 짚고 엎드려 고개를 기울여서 재강과 눈을 맞췄다.
“특히 잠에서 깼을 때 진짜 귀엽다니까.”
“……언제 왔냐.”
명선이 재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한참 됐지. 강아지처럼 새근새근 자서 못 깨웠네.”
“…….”
“넌 언제 왔는데?”
명선은 말을 끝내고 다시 재강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열두 시 반쯤.”
“일찍 왔구나. 진짜 끝나자마자 바로 왔나 보네. 내가! 보고! 싶어서!”
명선은 한마디씩 끝낼 때마다 재강의 얼굴에 입을 쪽쪽 맞췄다.
“아, 더워.”
어느 정도 참아 주는 듯하던 재강이 명선을 밀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명선은 순순히 물러나 앉아서 눈을 빛내며 재강을 바라봤다.
“잘 샀다, 이거.”
재강은 명선이 가리키는 파라솔을 힐끗 봤다가 시선을 돌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여름엔 여기 자주 나와 있으니까.”
으이그. 수줍어서 나를 위해 샀단 말은 못 하고.
말 안 해도 나는 다 아니까 괜찮아.
명선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사네. 흰색이라 깔끔하고.”
“…….”
“이제 우리의 피부는 안전할 거야.”
재강은 여전히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였다. 뒷머리가 비죽비죽 뻗쳐 있었다.
명선이 손을 뻗어 그곳을 쓰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재강은 명선이 그러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닌가. 다 알긴 해도, 말로 해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입 밖으로 꺼내면 진짜가 되니까.
네가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
그러니까 정말로, 나 때문에 파라솔을 산 건지, 아니면 원래 사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이렇게 맞아떨어진 건지.
재강이 하품을 쩍하고 무릎을 긁적였다.
명선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재강의 무릎과 그 손을 내려다봤다.
아니면, 곧 올 이준원을 위해서, 혹시 몰라 설치한 건지.
이준원의 피부가 타는 게 걱정돼서.
명선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넌 친구랑 점심 먹은 거지?”
재강의 말에 명선이 고개를 들어 재강과 눈을 맞췄다.
“음…… 말하자면 아점이지. 간단히. 넌 아직 점심 안 먹었어?”
“어.”
재강이 평상 아래로 내려갔다. 명선도 얼른 내려가 현관 쪽으로 향하는 재강의 뒤를 따랐다.
“그럼 같이 먹으면 되겠넹.”
명선이 재강의 등에 풀쩍 매달렸다.
“아, 좀 떨어져. 더워.”
“난 안 더워.”
“내가 덥다고, 내가.”
“아잉. 내 열정을 좀 느껴 봐.”
“아으, 오자마자 또 번잡스럽게.”
둘은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엉켜서 비틀비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숯불 좀 넣어 주세요』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