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 좀 넣어 주세요
3권 [완]
3부-3. 다녀와요
방 안은 새벽의 푸른빛이 가득했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화장실에 다녀온 명선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침대 아래 바닥에 누워 자는 재강을 내려다봤다.
속옷 차림인 재강은 이불도 덮지 않고 몸을 다 드러낸 채였다.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에서 보니 몸의 윤곽이 더 고혹적이었다.
명선은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재강의 몸 위로 엎드렸다.
바나나보트에 타듯 몸을 부여안으며 달라붙자 재강이 흠칫하며 깼다.
“왜…… 뭐…….”
재강은 눈도 못 뜨고 잠긴 목소리로 중얼대며 명선을 붙잡았다.
“자는 동안 보고 싶었으니까.”
명선이 재강의 어깨에 뺨을 댄 채 역시나 잠긴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재강은 말없이 나른한 손으로 명선의 등과 엉덩이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명선은 재강의 손길과 호흡을 한껏 만끽했다.
얼마간 그러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지 재강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지고 곧 툭 떨어졌다.
명선도 재강의 몸 위에서 그런 자세로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명선은 얼마 있다 옆으로 쓰러지며 깼다.
“뭐야…….”
명선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들었다. 명선을 밀쳐낸 후 옆으로 돌아눕는 재강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완전히 아침이 되었는지 방 안은 훤했다.
“숯불…….”
명선이 꿈틀대며 재강에게 가까이 가 몸을 꼭 안았다.
“아휴, 더워.”
재강이 팔을 쳐내자 명선은 다시 안았다. 둘은 얼마간 툭탁거렸다.
“아, 보고 싶었단 말이야. 보고 싶었다고.”
명선이 재강의 몸통과 팔을 모아 단단히 안으며 목덜미에 대고 중얼거렸다. 재강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뭘 자꾸 보고 싶대.”
“자는 동안 못 봤잖아. 그러니까 보고 싶지.”
“그럼 그냥 봐, 지분대지 말고.”
“오늘 낮에 또 생이별해야 되는데 얌전히 좀 있어 줘.”
명선이 재강의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목덜미에 입술을 문댔다.
“……오늘은 안 따라오냐?”
“목소리에서 기쁨이 느껴지는 건 그냥 내 기분 탓인가?”
“계속 붙어 다녔잖아. 개 산책도 따라오고, 조립하는 데도 따라오고. 아, 왜 이렇게 따라다녀?”
“가구 조립할 땐 집에 같이 안 들어가고 그 앞 카페에서 기다렸는데.”
“무슨 빚쟁이도 아니고.”
“너의 정액을 빚졌다고 생각해.”
명선이 키득거리며 재강의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암튼, 나도 오늘은 외부 스케줄이 있어서 나가 봐야 돼. 내가 말했지? 원래 바쁜 몸이라고.”
“……뭐 하는데.”
“누구 좀 만나.”
“그 친구?”
“걔 말고, 다른 사람.”
“…….”
명선은 재강의 눌리고 솟은 머리카락에 코를 비볐다. 재강은 조용했다.
“더 안 물어봐?”
“뭘?”
“내가 누굴 만나서 뭐 하는지 더 안 물어보냐고.”
“네가 알아서 하겠지.”
“궁금할 텐데.”
“아니.”
“궁금하면서.”
명선은 킬킬대며 재강의 몸에 팔과 다리를 두르고 쥐어짜 댔다. 재강이 몸부림을 치자 더 달라붙었다.
둘은 뒤엉킨 채 이불을 헤집으며 몸싸움을 벌였다.
얼마간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 명선이 재강의 양팔을 붙잡고 내리누르며 위로 올라왔다.
“잡았다, 이쁜이.”
명선이 재강의 얼굴 여기저기에 쪽쪽 대며 입을 맞췄다.
재강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긴 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명선은 광적인 입맞춤을 끝내고 잠시 재강을 내려다봤다.
곧 재강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명선이 빙그레 웃었다.
“숯불, 우리 이제부터는 침대에서 같이 자자.”
“……좁아.”
“뭐가 좁아, 킹사이즈인데. 아니 퀸사이즈인가?”
명선이 침대 위쪽을 슬쩍 봤다가 다시 재강을 내려다봤다.
재강은 양 손목을 잡히고 깔려 누운 채 명선을 바라봤다.
“정 그러면 내가 벽에 붙어서 잘게.”
“…….”
“이준원이랑 있을 땐 둘이 침대에서 같이 잤을 거 아냐. 그때도 좁았어? 아니지? 아니면, 혹시 이준원 몸이 되게 마르고 작아?”
“신경 꺼.”
재강이 손목을 빼내려 하자 명선은 얼른 그 손목을 놓고 재강을 와락 안았다.
“아잉, 숯불.”
“안 닥쳐?”
“나 때문에 네가 계속 바닥에서 자니까 미안해서 그러지.”
“그럼 네가 바닥에서 자든가.”
재강이 명선의 어깨를 잡고 뜯어내자 명선은 다시 달라붙었다.
“손님을 바닥에서 재웠다고 네가 미안해할 테니까.”
재강이 코웃음을 쳤다.
“넌 이제 손님도 아니야.”
“그럼? 인생의 동반자? 아름다운 동행?”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난 너한테 뭔데? 숯불.”
재강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명선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명선의 얼굴로 머쓱한 표정이 빠르게 스쳐 갔다.
뭐야? 뭐긴 뭐야?
……뭔데?
재강은 명선의 등을 잡고 가만히 누운 채였다.
이 타이밍에 얘는 또 왜 말이 없어.
말할 가치가 없어?
말할 수가 없어?
말하고 싶지가 않아?
아예 아무 생각이 없냐!
명선은 괜스레 재강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비비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재강은 여전히 조용했다.
“숯불, 빨아 줄까?”
명선이 재강의 목에 대고 속삭였다.
재강이 말이 없자 명선은 그의 가슴과 배에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아래쪽으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골반쯤에 다다르자 속옷을 잡고 허벅지로 끌어내렸다. 재강의 성기는 반쯤 선 채였다.
그것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재강은 배를 살짝 떨었다.
명선은 성기를 쥐고 입술로도 꽉 조인 채 빠르게 움직였다. 성기는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재강이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했다.
“이게 내 입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딱딱해지고 뜨거워지면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명선이 고개를 기울여 기둥에 대고 입술을 문지르면서 속삭였다.
재강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흥분하는 걸 보고 느끼는 게 너무 좋아.”
명선의 성기도 이미 단단하게 선 채였다.
명선은 재강의 것을 다시 입 안에 넣고, 손과 입으로 세게 자극하며 재강의 속옷을 더 아래로 끌어내렸다.
목구멍 깊숙이 넣고 삼키듯 하자 재강이 헐떡이며 윗몸을 일으켰다. 명선은 더 세게, 자극적으로 손과 입을 움직여댔다.
곧 재강이 명선의 뒤통수를 턱 잡더니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재강은 잔뜩 젖은 명선의 입술을 세게 빨았다. 명선은 키스하며 재강의 배와 가슴을 쓰다듬다가 다시 그의 성기를 쥐고 빠르게 문질렀다.
“아하아…….”
재강이 어깨를 움츠리며 입술을 떼고 작게 신음했다. 재강의 손이 명선의 목덜미 위에서 미끄러졌다. 재강은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아, 씨발. 저 표정 좀 봐.
“네가 이런 소릴 낼 때도 너무 좋아.”
눈을 뜬 재강이 달려드는 명선을 바닥에 눕혔다.
명선은 자연스레 양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 사이로 몸을 붙여오는 재강을 꼭 끌어안았다.
재강은 명선의 성기에 자신의 것을 세게 누르고 문지르며 명선에게 키스했다.
둘의 손이 젖고 뜨거운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더듬어댔다. 찰싹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입술 주위로 흥건하게 침이 묻어났다.
명선이 긁어내린 재강의 등 위로 옅은 자국이 길게 났다가 사라졌다.
뭘까.
나는 얘한테 뭘까.
근데, 나도 네가 나한테 뭔지 잘 모르겠어.
* * *
써니
[숯불 벌써부터 내가 보고 싶지 안냐?]
[청소하다 안 미끄러지게 조심해]
[근데 몇시쯤 들어와? 청소만 하고 바로 와?]
[나는 한 3시쯤]
[숯불 베란다 청소할때 가장 위험한 게 뭔지 알아?]
[끝나고 제시간에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위험해지는거야]
[그러니까 딴데로 새지말고 집에 가서 얌전히 나를 기다려]
[아니 3시까지는 너 가고싶은데 가고 하고싶은거 해도 되는데 내말은]
[우리의 작고 귀여운 집에서 3시에 나랑 만나는 약속을 하자는거지]
[그게 너의 오늘 최종스케줄이야]
[근데 몇시쯤 들어와?]
숯불
[몰라 암튼3시에 봐 그럼]
써니
[ㅇㅇ 조금 늦을수도 있는데 나도 최대한 빨리 가께]
[숯불 넌 나 안보고싶어?]
[보고싶지?]
[보고싶지?]
숯불
[아파트 다왔어 문자그만보내]
명선은 필살기 미소를 한껏 지어 보이며 셀카를 찍어서 재강에게 보냈다.
써니
[사진]
[보고싶을때를 대비해서 좀 찍어봤어^^]
[당분간은 이걸로 참아]
[이따 집에서 더 좋은걸 보여줄테니까]
[니몸사진도 몇장찍어서 보내주면 좋을텐데]
[가는게 있으면 오는것도 있어야지]
[특히 가슴이랑 배쪽이 잘 나오게]
사진도 보고 문자도 읽었을 텐데 재강은 답이 없었다. 일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명선은 핸드폰 카메라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다가 셀카를 몇 장 더 찍어 재강에게 보냈다.
왁싱숍 대기실의 아늑한 조명과 톤 다운된 벽지는 셀카 찍기에 아주 제격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어디서 뭘 하는지 재강에게 말하고 생색까지 내고 싶어 좀이 쑤셨지만 깜짝 이벤트를 생각하며 계획한 일이니 지금은 비밀로 해야 했다.
어차피 재강은 뭘 하느냐고 적극적으로 물어보지도 않았고, 별 관심도 없는 듯 보였지만.
흥. 그래도 이벤트 하면 좋아하긴 할걸.
막상 빽자지를 꺼내서 보여 주면 좋아하면서 달려들 거라고. 빽자지 빨 때랑 박을 때 얼마나 좋은데.
그리고 이준원 같은 인간이 이런 이벤트를 해줬을 리가 없어.
야, 숯불. 내가 순전히 너한테 관심 좀 받자고 이렇게 생털까지 뽑아가며 유난을 떨고 있다.
“권명선 님, 들어오세요.”
시술실 문이 열리고 왁서가 부르자 명선은 얼른 핸드폰을 끄고 일어났다.
가볍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명선은 멈칫했다가 느릿느릿 시술실로 갔다.
문득 좋은 이벤트가 될 거란 생각이 들어 후다닥 예약하고 재강과 함께 있을 수 있는 황금 같은 토요일 시간까지 빼 가며 왔는데, 재강이 이런 걸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내내 자신만만했던 명선의 얼굴에 주저하는 표정이 서서히 퍼졌다.
이제 와 무를 수도 없었다.
숯불이 좋아해야 하는데…….
움츠러든 명선의 등 뒤로 시술실 문이 닫혔다.
* * *
계단을 오르는 동안 위쪽에서 철썩대는 소리가 났다.
명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재강이 빨래를 너는 소리임이 분명했다.
“빨래하셨구만.”
명선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건들대며 옥상 안으로 들어갔다.
빨랫줄 앞에 서 있던 재강이 이쪽을 힐끗 보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았다.
“역시 착실하고 조신해.”
빨래를 너느라 두 팔을 위로 뻗고 있는 재강의 뒤에서 명선이 그 몸통을 와락 안았다.
“더워.”
재강은 곧장 명선을 밀쳐냈다.
“새침하긴.”
명선은 몇 발짝 물러나 재강의 등을 바라보다, 바구니에서 티셔츠를 집어 건넸다.
“보고 싶었어.”
재강은 말없이 티셔츠를 받아 허공에 몇 번 턴 후 빨랫줄에 널었다.
“나 딱 10분 늦었다. 더 늦을까 봐 헐레벌떡 왔네.”
재강은 명선이 건네는 옷들을 받아 널 뿐 계속 말이 없었다.
왜 저기압이야. 일하다 무슨 일 있었나?
뭐, 저러다 말겠지.
명선은 바구니에 있던 마지막 옷을 건넨 후 어슬렁어슬렁 평상으로 가 앉았다.
왁싱은 역시 아프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참을 만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살짝 얼얼한 정도였다.
오히려 왁싱 자체보다는 사후 관리가 더 번거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늘은 섹스를 해서도 안 됐다.
명선은 왁서가 알려 준 주의 사항들을 떠올려 보며 무심히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은 빈 바구니를 집어 들고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잠시 서 있더니 곧 느릿느릿 평상으로 와 앉았다.
명선과 좀 사이를 띈 채여서 재강의 몸은 반은 그늘에, 반은 햇빛 아래에 있었다.
“그늘에 앉아.”
명선이 옆으로 조금 움직이며 손짓했다.
재강은 무릎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있다가 그늘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둘의 몸이 더 가까워졌다.
“언제 왔어?”
“……그냥, 아까.”
“내 사진들 봤어? 보면서 딸 안 쳤어?”
“안 쳤어.”
“나는 네가 적어도 보답으로 가슴 정도는 찍어서 보내 줄 줄 알았는데. 너 진짜 냉정하다. 내가 사진을 백 장 보내는 동안 어떻게 한 장도 안 보내냐.”
“누가 사진 보내 달랬냐고. 그리고 문자 좀 작작 보내.”
명선이 미소를 띤 채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보고 싶어서 그랬지.”
“…….”
재강은 고개를 돌려 먼 쪽을 바라봤다.
“숯불, 이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거다. 대신 오늘은 꼭 안고 잠만 잘게. 섹스 프리.”
가만히 있던 재강이 곧 명선을 쳐다봤다. 약간 당황한 듯 보이는 얼굴이었다.
명선이 킥 웃었다.
“사람 민망하게 또 화들짝 놀라기는. 그냥 하루 쉬게 해주려고 그래. 너도 피곤할 테니까.”
아흐, 빨리 보여 주고 싶어서 좀이 쑤시네. 이벤트 그거 그냥 지금 해버리면 안 되나?
그래도, 오늘은 섹스하지 말랬는데. 젠장.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잖아. 눈앞에 이런 100퍼센트가 버젓이 앉아 있는데.
갑작스레 목이 타는 듯해 명선은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명선의 얼굴과 목을 훑어보는 듯하던 재강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너…… 어디 갔었냐.”
“어, 그냥 뭐, 볼일 좀 보러.”
“무슨 볼일?”
말할까? 말해 버릴까? 말하고 바지 확 벗어 버리고 ‘서프라이즈!’ 해버릴까? 아, 답답해. 나는 이벤트형 인간이 아닌가 봐!
명선은 재강에게 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허벅지 옆쪽을 꽉 꼬집었다.
“나도 가끔은 볼일이 있는 거지…….”
“…….”
“어쨌든, 하루 휴가라고 생각해.”
재강은 명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집 쪽으로 갔다.
“어디 가?”
“빨래할 거 더 있어.”
재강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숨겨서 화났나?
에이, 그럴 리가. 어차피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아, 근데 진짜 너무 보여 주고 싶네. 바로 얼굴 붉히면서 흥분할 것 같기도 한데.
아닐 수도 있지만.
왜 내가 이렇게 흥분하지? 이러면 쟤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이벤트가 되는 거잖아.
그러네. 애초에 내가 더 흥분되는 이벤트였어.
섹스하고 싶다. 섹스. 섹스. 섹스…….
명선은 다리를 달달 떨다가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재강은 침대 옆에 서서 창에 붙은 커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거 빨려고?”
재강이 명선 쪽을 봤다가 갑자기 커튼을 움켜잡았다.
“어.”
“별로 더러워 보이지도 않는데. 근데 그것도 세탁기에 빠는 거야?”
“…….”
재강은 커튼 끝을 만지작대며 내려다보다 놓더니 몸을 돌려 싱크대 쪽으로 갔다.
명선은 침대에 털썩 앉아 싱크대 앞에서 서성이는 재강을 바라봤다.
“뭐 찾아?”
재강이 고개를 살짝 젓더니 생수병을 꺼냈다.
“사진에…… 있던 데가 어딘데.”
컵에 물을 따르며 재강이 나직이 물었다.
명선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재강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내 행적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아님 그냥, 자꾸 숨기니까 더 알고 싶어져서 그러는 건가?
재강이 물을 끝까지 마시더니 다시 컵을 채웠다.
“……모텔?”
재강의 말에 명선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어? 숯불 너…….”
재강이 뒤를 돌아봤다.
“지금 혹시 내가 다른 놈이랑 모텔에서 뒹굴다 왔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거야?”
재강이 미간을 구겼다.
“뭔…… 개소리야?”
“질투하는 거지!”
명선이 와하하 웃으며 일어나 재강에게 척척 다가갔다.
명선이 가까워지자 재강은 컵을 움켜잡은 채 주춤 물러섰다.
“질투하는 거잖아. 빨리 질투한다고 말해. 내 몸을 독점하고 싶다고 말하라구.”
명선이 재강의 가슴을 간질이며 키득댔다.
재강은 명선의 손을 이리저리 쳐내며 계속 물러나다 벽에 쌓인 상자들과 명선 사이에 껴 멈췄다.
재강의 손에 들린 컵에서 물이 출렁대다 둘의 발등 위로 흩뿌려졌다.
“질…… 투는 뭔 질투, 그냥 배경이 모텔 방처럼 보여서 물어보는 거지. 그런 것도 못 물어봐? 그냥 일상적인 대화도 못 해?”
“나를 독점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널 왜 독점해? 네가 누구랑 뭘 하고 다니든 내가 알 게 뭐야?”
“…….”
명선은 미소 띤 얼굴은 간신히 그대로 유지한 채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은 상자에 기댄 채 서 있다가 젖은 발등을 양쪽 종아리에 차례차례 문질렀다.
재강의 뒤에 있는 그 상자들 안엔 준원의 물건이 들어 있을 터였다.
재강의 사랑. 재강의 사이비 교주. 재강이 기다리는 사람.
하긴.
내가 누구랑 자든 얘가 알 바도 아니고 질투할 일도 아니지. 얘는 이준원 빠돌인데.
갑자기 흥분해서 확대 해석해 버렸네.
쪽팔리게.
“에이, 숯불, 못 참겠다.”
명선이 갑자기 히히 웃으며 바지 버클을 풀었다.
“내일 터뜨리려고 했는데 진짜 안 되겠네.”
흠칫했던 재강이 멍한 얼굴로 명선을 쳐다봤다.
“여기 손 좀 넣어 봐.”
바지 지퍼도 내린 명선이 속옷 밴드를 살짝 당겨 사이를 띄웠다.
“……뭐?”
재강이 명선의 속옷과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아, 손 넣어서 만져 보시라고요.”
명선이 재강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재강은 짧게 한숨을 쉬고 체념하는 얼굴인 채 명선의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명선이 밴드를 더 잡아 늘였다.
“…….”
성기를 향해 손을 뻗어 내려가던 재강이 멈칫했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명선은 싱글싱글 웃으며 재강의 얼굴을 바라봤다.
재강은 더 깊이 손을 집어넣어 더듬대다가 명선의 바지와 속옷 허리춤을 잡아 늘여서 안을 들여다봤다.
“뭐야.”
재강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명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죽이지?”
명선이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재강은 명선의 말끔한 성기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아, 반응 괜찮네. 다행이다. 혹시라도 싫어할까 봐 좀 걱정했는데.”
“…….”
“나는 탑할 때 빽자지 바텀 되게 좋아했거든. 빨 때도 편하고, 만질 때 느낌도 좋고. 그래서 너도 한번 경험해 보라고 벌초를 좀 해봤어.”
“…….”
“사진 찍어 보낸 데가 왁싱숍 대기실이야. 모텔 방처럼 보였을 것 같긴 하다. 내가 가운도 입고 있었고.”
명선이 킥킥 웃었다.
“왁싱은 처음 해봤는데, 아주 못할 정도는 아니더라. 다음에 또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근데 이거 한 날엔 섹스하지 말라고 해서 그게 좀 아쉽게 됐지. 하필 토요일에. 내가 이걸 꼭꼭 숨기고 있다가 내일 섹스할 때 짜잔 하면서 보여 주려고 하고 있었는데, 아 진짜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못 참겠는 거야.”
말하는 동안 명선의 매끈한 성기는 조금씩 발기했다.
가만히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는 재강을 보고 있자니 자꾸 흥분됐다.
“너 일단 놀란 건 알겠는데, 싫은 게 아닌 건 맞지? 확실히 구분이 안 가네.”
재강이 문득 한쪽 손을 그쪽으로 천천히 뻗었다.
“……만지면, 아파?”
재강은 계속 같은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명선이 재강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프진 않아.”
“…….”
“만져도 돼. 너를 위해서 한 거야.”
“…….”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서.”
“…….”
재강은 이제 완전히 선 채인 명선의 것을 슬며시 쥐었다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차가운 컵을 들고 있었던 덕에 손이 조금 서늘했다.
명선은 재강의 그 손을 내려다보다 눈을 들어 얼굴을 바라봤다.
광신도 같은 놈이니까, 쉽게 마음이 바뀌진 않겠지.
이렇게 나랑 하는 짓이라도 좋아해 주는 거에 만족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언제까지고 만족할 수 있을까?
“숯불, 마음에 들어?”
명선이 속삭이자 재강이 명선과 눈을 맞췄다.
둘은 얼마간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재강의 부드러운 손놀림에 명선의 눈꺼풀이 조금씩 떨렸다.
곧 재강은 들고 있던 컵을 상자 위에 올려놓더니 명선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겼다. 둘의 입술이 찰싹 맞붙었다.
목덜미에 닿아 있는 재강의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재강이 명선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놓고 어루만졌다.
명선은 재강의 어깨를 붙잡았다. 입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재강의 혀와 숨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명선의 아랫입술을 세게 빤 재강이 뺨과 턱을 지나 목으로 입을 맞추며 내려갔다.
명선은 찡그린 채 숨을 몰아쉬다 스르르 눈을 떴다.
컵 아래쪽에 맺힌 물이 상자의 표면을 진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명선은 문득 상자들이 흠뻑 젖고 젖고 젖어 들어가다가 깊고 어두운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상자들의 뒤를 이어 어부 차림의, 얼굴도 모르는 이준원이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 * *
아침부터 창밖에선 매미가 거세게 울어댔다.
명선은 잠에서 깨자마자 재강에게 뒤를 빨리다 한바탕 격하게 섹스하고 기진맥진해 누운 채였다.
멍하니 매미울음 소리를 듣던 명선이 문득 중얼거렸다.
“아…… 오늘부터네.”
곁에 누워 있던 재강이 명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사우나 청소.”
“아.”
“열두 시부터 두 시까지라고 했지? 두 시간.”
“어.”
“그럼 집에 오면 두 시 반? 세 시? 그 정도 되나?”
“그래.”
“시간도 되게 애매하네. 그동안 난 뭐 하지? 잠이 올 것 같진 않은데. 어차피 너 오면 깰 거고.”
“……너희 집에 가서 자, 이제.”
명선이 고개를 돌려 재강을 쳐다봤다.
아직 잠이 묻어 있는 재강의 얼굴은 사랑스러웠다. 명선의 뒤에 얼굴을 파묻고 빨아대느라 입가가 아직도 살짝 붉었다.
명선은 애틋한 기분으로 손을 뻗어 그 입가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난 여기 있을 건데.”
재강이 천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도 없는 빈집에서 뭐 하게.”
“나도 주인이지. 서브 주인.”
“뭔 소리야.”
“난 이제 손님도 아니라며. 그럼 주인이지. 근데 집 계약은 일단 네 이름으로 했을 테니까 한발 물러나서 서브 주인 정도로 해둘게.”
재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내가 알아서 뭔가 하고 있을게. 친구랑 수다를 좀 떨든지, 저 앞에서 푸시업을 하고 있든지. 그러니까 너는 일 끝나자마자 바로 집에 오기나 해.”
“지가 왜 오라 마라야.”
“서브 주인인데 그 정도 잔소리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명선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재강의 가슴 위로 팔을 올렸다. 재강은 다시 한숨만 쉬었다.
“근데 가든 일 끝나고 그렇게 또 일하면 안 힘들어?”
“힘들어.”
“그만두고 가든 하나만 하면 안 되나? 사람들 잡일 해주는 것도 있는데.”
“…….”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해? 돈 때문에? 혹시 빚 갚는 중이야?”
재강은 얼마간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깜박였다.
명선은 재강의 가슴 근육을 만지작대며 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어쩌다 보니.”
재강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밤에 잠도 안 오고.”
“잉? 아기처럼 새근새근 잘 자던데?”
“…….”
“아닌가? 나 잠들고 나면 깨는 거야?”
“혼자 있을 땐 밤에 잠이 잘 안 와. 그러다 원…… 준원이 오면 괜찮아지고.”
“…….”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일을 많이 해서 피곤하게 만들거나 아예 밤에 일하거나 그러는 거야. 그게 습관이 된 거고.”
명선은 재강의 눈동자가 천장을 훑으며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병원엔 안 가봤어? 수면제 같은 거 먹을 수도 있을 텐데.”
“준원이랑 있으면 잘 자는데, 뭐.”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다며. 그럼 대체로는 못 자는 거잖아.”
“어쨌든 원이는 오긴 오잖아.”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답이 없어?
명선은 이를 악물었다 풀었다.
“……이준원도 이런 걸 알아?”
“……글쎄.”
“…….”
“말한 적은 없으니까 아마 모르겠지. 어차피 걔랑 있을 땐 잘 자기도 하고.”
대체 이준원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뭐야? 인생의 절반을 함께 했다며.
알면 알수록 맘에 안 드는 놈일세?
근데 내가 여기서 이준원 욕하면 또 발끈하면서 편들겠지? 팔불출 새끼…… 짠하다, 진짜.
“그래도 그렇지, 너무 몸을 혹사하는 거 아닌가? 그러다 골병 나면 어떡해.”
“골병 나면 나는 거지, 뭘.”
“어디 회사 같은 데 취직할 생각은 안 해봤어? 사무직 같은 거.”
재강이 피식 웃었다.
“가진 게 몸뿐인 놈을 그런 회사에서 왜 뽑겠냐? 학력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가진 거 하나가 이렇게나 훌륭한데. 예쁘고 건강하고. 술은 처마셔도 담배도 안 피우고…… 어, 그러고 보니까 너 의외로 담배를 안 피운다? 육체노동에 담배는 필수 아니야?”
“담배 안 피워.”
“피우다 끊은 거야?”
“원래 안 했어. 원이가 안 좋아해서.”
“…….”
넌 네 인생이 없니?
너를 위해서 하는 건 뭐야?
명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니, 근데 네가 왜 능력이 없어. 싱크대도 고치고 그러더만.”
“그러니까 네가 말한 사무직에서는 그런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 좀 하고 말해라.”
“섹스 능력도 뛰어난데.”
“……됐다.”
“내가 주변에 사람 구하는 데 없나 한번 알아볼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어차피…….”
재강은 말을 멈추더니 입을 다물었다.
명선은 재강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 옆얼굴을 바라봤다.
“어차피, 뭐?”
“…….”
“어차피 뭔데?”
“……어차피, 준원이랑 있으려면 이런 일을 하는 게 낫다고.”
“……무슨 말이야?”
재강이 벽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이마를 문질렀다.
“이런 일은, 힘만 있으면 누구나 하니까 그만둬도 사람은 금방금방 새로 뽑을 수 있어. 그래서 갑자기 그만두게 돼도 후임자 올 때까지 오래 안 기다려도 되고…… 어느 지역에 가서든 구해서 할 수 있고.”
“음……?”
“일에 발이 묶이지 않는다는 얘기야. 원이랑 있으면 내가 유동적인 편이 좋으니까.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뭐가 어떻게 돼?”
“아,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재강이 명선의 팔을 뜯어내자 명선은 다시 재강의 가슴을 안으며 달라붙었다.
“너는 왜 대화를 갑자기 끊어, 잘하다가.”
“그냥…… 그렇다고. 걔랑 있으면 상황이 좀 급변해. 그런 게 있어. 돈이 많이 필요할 때도 있고 갑자기 여행을 가기도 하고.”
“…….”
“그런 거야. 그냥.”
재강이 중얼거리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명선은 얼굴을 우그러뜨린 채 재강의 등을 노려보다가 그 등에 달라붙어 몸을 안았다.
땀이 식어 조금 끈적해진 둘의 피부가 찰싹 붙었다.
인생이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이준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만.
이준원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 거지? 뭐가 그렇게 특출난 거야? 나보다 키도 작고 잘 빨지도 못 하는 게.
물론 얼굴도 나보단 덜 잘생겼을 게 뻔하고.
숯불 같은 놈이 사람 외모를 보고 빠질 리가 없어. 외모를 그렇게 중시하는 놈이었으면 나한테 벌써 빠졌겠지. 근데 아니잖아.
이준원만의 매력…… 뭘까?
사람을 애태우는 기술이 특출난가? 그게 유난히 숯불이랑 잘 맞아떨어지고?
아, 혹시 둘이 SM 관계 같은 건가? 이준원은 계속 괴롭히고 숯불은 그걸 즐기면서 갈구하고…….
아니지. 즐긴다고 보기엔 숯불 상태가 너무 구질구질하고 처량해 보여.
명선은 입을 씰룩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어, 야. 그럼 너 나랑 있을 때도 잘 자는 거네? 맨날 나보다 먼저 숙면에 빠지고 그러던데.”
“……그래.”
“이준원 있을 때랑 똑같아? 나랑 있을 때도 그 정도로 숙면이야?”
“어.”
“흠.”
명선은 재강의 목덜미에 느릿느릿 입술을 문질렀다.
“너 혹시…… 지금까지 잠 푹 자려고 나 안 쫓아냈던 거야?”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 그럼.”
서운하네.
“음…… 섹스는?”
“…….”
“섹스도 너무 좋고, 꿀잠도 자고. 그치? 그래서 그런 거지? 근데 섹스의 비중이 더 큰 거야. 그치?”
“네 맘대로 생각해.”
“칫.”
명선은 쯥쯥 입맛을 다시다가 재강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그럼 섹스 95, 꿀잠 5 정도로 생각해야지. 맘대로 생각하라고 하면 난 진짜 맘대로 생각한다.”
재강은 한숨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만 짧게 냈다.
* * *
“숯불, 내가 사우나까지 데려다줄게.”
숯불 방 뒷정리를 끝내고 직원들에게 인사한 후 주차장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됐어. 그냥 집으로 가. 거기서 자전거 타고 가게.”
“에이, 뭐 하러 그래. 번거롭게.”
“끝나고 집에 올 때 자전거를 타고 와야 할 거 아냐.”
“아, 그런가.”
둘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럼 내가 거기로 데려다주고, 너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사우나로 데리러 가면 어때? 그게 더 편하지 않겠냐?”
재강이 안전벨트를 쭉 잡아 빼 쥔 채로 명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하고 집으로 갈래?”
“지 몸 편하게 해준다는데 왜 또 눈으로 욕을 하실까?”
“누가 편하게 해달랬어? 왜 이렇게 못 헤어져서 안달이야?”
“너는 또 내가 네 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듣고 싶어서 안달이구나?”
“아, 시동 걸고 출발이나 하라고, 씨발.”
“갑니다, 가요. 아저씨, 진정하세요.”
명선은 혀를 쯧쯧 차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도로를 얼마간 달리는 동안 재강은 말없이 앞만 보다가 창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겠다, 숯불.”
“너 때문에 피곤해. 너 때문에.”
“정말 사우나에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제발 좀 집으로 가라.”
“네가 어디서 일하는지 정도는 알아놔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러지.”
“으.”
명선이 킥킥 웃었다.
“짜증 내는 것도 귀여워.”
“……입 좀 다물고 있어.”
“두 시간 동안 보고 싶어서 어쩌냐. 아니, 두 시간도 아니지. 넉넉잡아 세 시간 정도는 되겠다.”
“…….”
“영화라도 하나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려나.”
재강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명선 보라는 듯 창 쪽으로 더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명선은 곁눈질로 재강의 얼굴과 몸을 힐끔거렸다.
저녁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푹푹 찌는 사우나 가서 또 땀 뻘뻘 흘려야 하잖아. 힘들어서 어째?
어이, 이준원. 이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이기적인 새끼야. 알고 있냐? 너 때문에 지금 우리 숯불이 이렇게 밤낮으로 몸을 혹사하고 있다고. 너 때문이야, 너.
물론…… 그렇게 해서 이 100퍼센트의 몸이 만들어지긴 한 거지만.
어, 그러고 보니 우리 가든에서 숯불을 만나게 된 것도 결국 근본적으론 이준원 덕이라고 볼 수 있겠네? 숯불이 게이라는 걸 알게 된 거랑 섹스까지 가게 된 것도 나름 이준원의 영향이었고.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나쁘다고 볼 수도 없는 건가?
명선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코를 씰룩이며 말없이 운전했다. 갑자기 준원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명선이 준원에 관한 생각으로 꽉 찬 채 주차하는 동안, 재강은 스르르 일어나 앉았다.
둘은 차에서 내려 말없이 집을 향해 걸었다.
대문 안으로 명선을 들여보낸 재강이 한쪽에 세워둔 자전거 앞으로 갔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돌아서서 명선에게 왔다.
명선은 계단 난간을 붙잡고 선 채 재강을 바라봤다.
재강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꺼내 명선에게 내밀었다.
재강의 손바닥엔 현관문 열쇠가 있었다.
명선이 그 열쇠를 내려다보고 다시 재강을 쳐다봤다. 재강은 자기 손에 든 열쇠를 보는 채였다.
“……가져가라고.”
“…….”
“안에, 들어가 있어야 될 거 아냐.”
명선의 눈이 커졌다.
“아, 정말?”
“…….”
명선이 입만 벌리고 있자 재강은 살짝 찡그리더니 명선의 손에 열쇠를 쥐여 주고 다시 자전거 쪽으로 가 자물쇠를 풀었다.
명선은 손에 쥔 열쇠를 내려다봤다가 재강의 등을 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와…… 나 그냥 평상에서 빈둥대려고 했는데. 솔직히 집안에 들어가게 해줄지는 몰랐지. 진짜 나한테 열쇠 맡기는 거야?”
재강은 말없이 자전거를 끌어냈다.
명선이 대문을 활짝 열어 주고 밖에 나와 섰다.
“완전 감동인데?”
명선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앙큼 떠는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응?”
“법석 떨 거면 도로 내놔.”
자전거를 끌고 나온 재강이 손을 내밀자 명선은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줬다 뺏으면 안 되지.”
“잃어버리면 가만 안 둔다.”
“왜 잃어버려, 우리의 보금자리 열쇠를. 걱정 마. 이거 아예 하나 복사해 둘까?”
재강이 자전거를 살짝 들어 올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든지.”
명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꿈도 꾸지 말라는 답을 예상했는데, 재강은 순순했다.
“이구, 예쁜 것.”
명선이 엉덩이를 두들기자 재강이 펄쩍 뛰며 주위를 둘러봤다.
“죽고 싶냐?”
“아무도 안 봐.”
명선이 얼른 다가서서 재강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둑하고 고요한 골목길에서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명선이 재강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빙그레 웃었다.
재강은 명선의 입술과 눈을 차례차례 보고 시선을 돌렸다.
명선은 재강이 자전거를 끌고 좀 걷다 올라타서 멀리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