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재강 (20/28)

3부. 재강

휴가 얘기를 꺼낸 이후 명선은 뭔가를 검색하느라 바빴다.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서 힐끗 보면 화면엔 펜션이나 호텔 등의 리뷰가 떠있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한 명선의 말대로 재강은 모두 명선에게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늘 충동적으로 떠났던 준원과의 여행은 일단 가서 그냥 눈에 띄는 숙소에 들어가 묵는 식이었으나, 명선은 달랐다. 중요하게 따져보는 것이 정말 많은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따져보느라 골머리를 앓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히 신나 보였다.

“아, 여긴 조식이 괜찮네.”

이른 아침의 섹스 후, 재강은 명선의 몸을 안은 채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졸다 명선이 중얼대는 소리에 깼다.

명선은 최근 계속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숙소 리뷰를 열심히 읽는 중이었다.

재강은 명선의 어깨너머로 그 화면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명선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명선의 몸 냄새가 그 무엇보다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젠 잠에서 깼을 때 명선이 주변에 있지 않은 상황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재강은 그 사실을 얼마 전, 준원에 관한 얘길 하다 말다툼하다시피 하고 억지로 자 버렸던 날 잠에서 깼을 때 깨달았다.

그때 재강은 고요한 방 안을 둘러보며 그대로 있다가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고, 옥상으로 나와 둘러보고, 계단 쪽으로 가서 골목 끝까지 살폈다.

명선이 보이지 않고, 아무런 메모도, 문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갑자기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밀려와 재강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릴없이 빨래를 걷어 개고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대문이 여닫히는 소리,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를 들으며 재강은 준원이 아닌 명선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계단 위로 명선의 얼굴이 나타나기를.

그리고 정말로 명선의 얼굴이 나타났을 땐 좀 전 느꼈던 상실감만큼이나 큰 안도감이 순식간에 몸을 감쌌다.

곧장 그 안도감 가득한 표정으로 웃어 주고, 명선을 끌어안고 어딜 갔다 왔냐고 묻고 싶었지만, 재강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명선에게 끌리는 마음, 그걸 표현하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어차피 자신의 몸과 섹스 때문에 명선이 이렇게 곁에 있다는 건, 명선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말해 재강도 잘 알고 있었다.

달라붙어 다정하게 구는 것도, 그저 평소 성격일 뿐, 재강에게 더 특별하게 구는 것 같진 않았다.

재강이 사우나 청소 아르바이트를 결국 그만둔 건 명선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였지만, 사실 그 후 얼마간 고민했다.

운동이 아닌 생활 패턴으로 만들어진 ‘100퍼센트’ 몸이었는데, 이 변화로 인해 몸이 달라지기라도 할까 봐.

살이 찌거나 근육량이 줄어들면 명선이 떠날까 봐.

재강은 종종 혼란스러웠다.

명선과 궁극적으론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 ‘연애’라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재강이 보기엔 명선과 이렇게 지내는 게 연애 같기도 한데, 그럼 지금 둘이 하고 있는 이건 정말 뭔지.

우리 사귀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며칠 전, 취한 명선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자 재강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다급하게 차를 세우고 편의점에 들어가 서성이다가 물을 살 땐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어쩐지 설레면서 동시에 화도 났다.

취해서 뱉는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나마 마음이 동했던 게 치욕스러웠다.

계산한 생수를 바로 따 찬물을 들이켜며 서둘러 진정시키는 자신의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열 번 넘게 사귄 사람들도 다 차버렸다는 명선이, 자신 역시 그렇게 가볍게 차버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너도 원이처럼 훌쩍 떠나 버릴 텐데.

재강은 생각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애초에 그런 걸 시작도 할 리가 없잖아. 너랑 나는 그냥 원이가 오기 전까지 즐기면 그만인 사이인데.

얘는 그냥 말이 많은 애야. 말이 많아서 이런저런 얘기가 다 튀어나오는 거고.

자꾸 혼자 다른 생각을 하지 말자.

혼자 앞서나가지 말자.

재강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던 마음을 차근차근 추슬렀다.

명선이 자신과 똑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리는 없고, 준원은 언젠가는 돌아올 테고, 이 관계도 그때가 되면 끝나고 말 터였다.

먹지 말라는 간식을 몰래 먹고 조마조마해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인 건 여전했다.

그에 더해, 이왕 들킬 거면 빨리 들켜서 혼나고 말았으면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준원이 빨리 돌아와 버렸으면 싶다가도, 이번만은 돌아오는 것이 좀 더 늦춰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명선과 조금만 더 함께 지내면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을 조금만 더 만끽한 후였으면.

사실 준원이 돌아오면, 명선과 재강 각자가 돌아갈 자리는 명백해 보였다.

자신은 준원과 함께 하는 생활로, 그리고 명선은 다른 100퍼센트의 몸을 찾아 즐기는 생활로.

그게 맞지 싶다가도, 명선이 그 다른 100퍼센트의 남자에게도 자신에게 굴던 것과 똑같이 할 거란 생각을 하면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왁싱 숍에서 찍어 보낸 사진들, 모텔 방으로 착각했던 그 사진들을 본 것만으로도 온갖 망상으로 얼마나 질투가 일었던가.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생소하고, 참담하게 느껴졌던가.

이렇듯 명선과 함께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지만, 재강은 어쨌거나 계속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명선과 좀 더 오래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것.

“음, 여긴 바다랑 너무 먼데.”

명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재강은 문득 피식 웃었다.

명선은 한없이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

재강은 그런 명선이 부러웠다.

아마 자신이 명선 같은 성격이었다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모든 일이 훨씬 더 쉬웠으리라고.

* * *

꾸물꾸물한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다 그치길 반복하는 이상한 날씨가 연일 계속됐다.

“예보 보니까 다행히 휴가 기간엔 해 쨍쨍이더라. 휴가 계획은 착착 진행 중이니까 걱정 마, 숯불.”

퇴근길, 운전하던 명선이 흐흐 웃으며 말했다.

“걱정은 무슨.”

“근데 작년 여름휴가 땐 어디 갔었어?”

재강은 앞 유리 너머를 보며 작년 여름을 떠올려 봤다.

떡집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고, 호주에 갔던 준원이 돌아왔고, 그리고…….

“어디 가진 않았는데.”

“재작년엔?”

“그때도 딱히.”

“그럼 역시 이번 휴가가 아주 기대되고 설레고 그러겠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이 짠 계획인데 안 재밌을 수가 없거든. 오랜만에 제대로 놀아보게 해줄게.”

명선이 싱글싱글 웃었다.

재강은 명선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특유의 보조개를 한껏 만들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

쌍꺼풀이 없는 명선의 눈은, 웃을 때 가늘게 감기고 꼬리 쪽이 살짝 처지면서 굉장히 순한 인상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화려하고 웃을 땐 더없이 화사해지는 준원의 것과는 판이한 분위기였다.

재강은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가여서 기대된다기보다는, 명선과 둘이 어딘가로 간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아르바이트도 집안일도 모두 뒤로하고, 준원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옥탑방도 뒤로 한 채 완전히 다른 장소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아, 숯불. 위스키 남은 거 오늘 다 마셔 버리자.”

“……다 마셔 버릴 양이 아닐 텐데? 꽤 많이 남지 않았나?”

“아니야. 오늘 아침에 확인해 봤는데 둘이 일요일 밤에 나눠 마시기에 딱 좋게 남았더라.”

“그걸 왜 아침부터 확인하고 있는 거야.”

“하루의 계획을 짜는 거지. 오늘 하루 동안 뭘 먹을까, 뭘 할까, 그런 거. 너는 그런 거 안 하지? 그래도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걱정 마라. 내가 네 취향도 고려해 가면서 아주 균형 있게 짜고 있거든.”

“그러든지.”

“아, 너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랑 그 위스키랑 먹으면 진짜 맛있는 거 알아? 아이스크림 사야겠다. 집에 없지?”

“없어.”

주차하는 동안에도 명선은 계속 ‘아이스크림’이라고 중얼거렸다.

“먼저 들어가서 세팅해 놓고 있어. 아이스크림 사갖고 갈게. 또 뭐 필요한 거 있나? 물 있고…… 아, 오이 사야 되는데. 편의점에 오이가 있으려나?”

“없으면 그냥 와. 내일 아침에 사 올 테니까.”

재강이 돌아서는데 명선이 앞쪽으로 훌쩍 뛰어들더니 재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크게 나는 동시에 재강이 뒤로 홱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야.”

“말을 또 예쁘게 하니까 그러지.”

“빨리 꺼져.”

“아효, 참, 내가 그랬지. 나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시야가 남다르다고. 아무도 안 본다니까.”

명선은 비실비실 웃으며 재강의 얼굴을 감싸 잡고 다시 다가와 입을 맞췄다.

재강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쨌든 명선이 주위를 스캔하는 능력은 제법 치밀하고 뛰어나 보이긴 했다.

“이따 집에서 제대로 키스하자.”

명선이 속삭였다.

“그리고 입에 아이스크림 물고 오랄하면 되게 좋아.”

말할 때마다 깊이를 달리하며 패는 명선의 보조개에서 꼭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빨리 갔다 오기나 하라고.”

재강이 명선을 가볍게 밀쳐냈다.

“술상 봐 놔라.”

명선은 재강의 엉덩이를 팡 치고 편의점 쪽으로 달려갔다.

재강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명선이 사라진 쪽을 보다 짧게 한숨을 쉬고 집 쪽으로 향했다.

그 위스키, 쟤 아버지 건데.

같은 거로 새로 한 병 사 드려야 하나. 은근히 신경 쓰이네.

쟤는 왜 자꾸 자기 집에서 뭘 가져오는 거야.

정식과 양자가 여기서 거의 숙식을 해결하는 아들 명선 때문에 재강에게 적잖이 미안해하는 걸 재강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명선을 통해 음식도 보내 주고 돈도 따로 챙겨 준다는 것 역시.

그 때문에 재강 역시 민망하고,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 중간에서 명선은 아무 생각이 없고 그저 해맑기만 했다.

“우리 집에 냉장고 총 네 댄데, 아예 한 대를 여기다 갖다 놓을까?”

재강의 집 냉장고가 너무 작아 가져온 음식들이 다 들어가질 않는다며 불평하다 나온 명선의 어이없는 말이 떠오르자 재강은 문득 픽 웃었다.

웃기는 새끼.

암튼 먹는 건 되게 신경 써.

작은 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른 재강이 우뚝 멈춰 섰다.

재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평상에 준원이 누워 있었다.

“…….”

재강은 저도 모르게 계단 난간을 콱 움켜잡았다.

준원은 배낭을 베고 등을 보인 채 모로 누워 있었다. 늘 그렇듯, 자고 있는 듯했다.

재강은 준원의 등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갑자기 뛰기 시작한 심장이 몸 전체를 쾅쾅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재강이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대문을 여는 순간 재강은 막 문을 열려던 명선과 마주쳤다.

“어, 숯부웁…….”

재강은 저도 모르게 명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명선은 재강에게 입을 잡힌 채 서서 눈만 끔뻑거렸다.

명선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작게 났다.

재강은 명선의 눈을 마주 보다 얼른 손을 떼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왜 그래?”

명선이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재강은 명선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최대한 집에서 멀리멀리 떨어지다, 그대로 완전히 떠나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야, 왜 그래?”

명선은 저항 없이 재강에게 끌려 걸으면서 계속 그의 얼굴을 살피고 주위를 둘러봤다.

재강은 집에서 멀어지다, 옆쪽으로 난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멈춰 섰다.

“원…….”

“…….”

“준원이가 왔어.”

명선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준원? 지금 왔다고?”

명선이 집 쪽을 보고 다시 재강을 봤다.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있다고? 지금?”

재강은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재강은 명선을 똑바로 못 보고 그 뒤쪽의 벽을 바라보는 채였다.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몸 안에서 회오리바람처럼 거세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

갑자기 킥, 하는 소리에 재강은 명선을 바라봤다.

명선은 웃고 있었다.

“뭐야, 되게 쫄았네?”

“…….”

“이준원한테 이 정도로 잡혀 사는 거였어? 이렇게 겁먹을 정도야? 너 혹시 뭐 잘못하면 얻어맞기라도 하는 거냐?”

“…….”

“애인 사이도 아니면서 뭘 이렇게 벌벌 떨어? 걔가 너 다른 사람 아예 못 만나게 단속해?”

“…….”

휘몰아치던 회오리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안에 갇혀 함께 빙글빙글 돌던 집과 황소, 나뭇잎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듯했다.

“네가 이러니까 어떤 사람인지 진짜 궁금해지는데? 잘 됐다. 온 김에 소개나 좀 해줘. 여럿이 마시면 더 좋지, 뭐.”

명선이 집 쪽으로 가려 하자 재강이 얼른 명선의 가슴을 탁 밀쳤다.

그냥 멈추게 하려고만 했던 건데, 힘 조절이 제대로 안 됐는지 세게 밀치는 꼴이 되어 버려, 명선이 벽에 등을 부딪쳤다.

명선이 벽에 기댄 채 재강을 쳐다보며 눈썹을 한 번 추어올렸다 내렸다.

재강은 명선을 밀었던 손을 허공에서 꽉 주먹 쥐었다가 펴고 바지에 문질렀다.

“오늘은…… 너 그냥 가야겠다.”

“…….”

“미안.”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뭐…… 미안할 것까진 없고.”

“……내일 보자.”

재강은 휙 돌아서 빠르게 걸었다.

단숨에 집 앞까지 온 재강은 대문을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다 뒤를 돌아봤다.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재강은 노란 가로등이 여기저기 켜진 젖은 길을 멍하니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느릿느릿 올랐다.

준원은 아까 전 모습 그대로 누운 채였다.

재강은 평상 곁으로 가 서서 준원을 내려다봤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살이 많이 빠진 준원은 곤하게 자고 있었다. 머리가 좀 덥수룩해 보이고, 어쩐지 남의 것인 듯 보이는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재강은 준원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다 그를 등지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재밌다는 듯 웃고 있던 명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반짝이는 눈과 보조개.

“뭐야, 되게 쫄았네?”

그러게.

걘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 땀이나 삐질삐질 흘리면서.

재강은 손으로 얼굴 가장자리에 난 땀을 쓸어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어차피, 원이가 돌아오면 이렇게 하기로 했던 거였으면서.

뒤쪽에서 기척이 들리자 재강은 움찔했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준원이 이쪽으로 돌아누운 듯했다.

“……강이 왔네.”

준원의 손이 등에 와 닿았다.

살짝 잠긴 그 목소리와 손길.

익숙한 것들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온 것들.

재강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준원이 스르르 웃었다.

순간 재강은 저도 모르게 준원의 입가를 바라봤다. 준원에게 보조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잘 있었어?”

준원이 재강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재강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요즘은 무슨 일 해?”

“계속 고깃집에서 일해.”

“아, 그거랑…… 사우나 청소였나?”

“사우나는 그만뒀어.”

“옥상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던데.”

“…….”

재강이 주위를 둘러봤다. 파라솔 하나만으로도 옥상은 달라 보였다.

재강의 눈이 빨랫줄에서 우뚝 멈췄다.

어제 빨래한 옷들이 주르르 널려 있고, 그중엔 명선의 옷도 물론 섞여 있었다.

특유의 그 화려한 속옷들도 함께.

명선에 관한 것들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버젓이 노출되어 있었다.

준원이 저런 것들을 봤는지 못 봤는지, 봤다 해도 신경이나 쓰긴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지?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원아, 다른 놈이랑 했어.’ 그렇게 말하면 넌 뭐라고 할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준원을 잘 알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실제로 어떤 말을 할지, 재강은 알 수 없었다.

“나 열쇠 잃어버렸어.”

준원이 스르르 일어나며 말했다.

재강도 함께 일어나 준원의 배낭을 집어 들었다.

“통영은…… 어땠어?”

재강이 열쇠로 문을 열고 준원을 들여보냈다.

“별로 재미없었어. 힘들고.”

준원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옷을 모두 훌훌 벗었다.

재강은 배낭을 들고 현관에 선 채 준원의 몸을 바라봤다.

“정말 고깃배 탔어?”

“타긴 탔지. 그러다 도망쳤고.”

준원이 욕실 앞에서 돌아보며 씩 웃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그대로 열어둔 채였다.

재강은 샤워기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서 있다가 미적미적 신발을 벗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옷도 모두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 아래에 서 있던 준원은 재강이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양팔을 벌렸다.

재강은 준원을 꼭 안고 머리를 감싸 잡았다. 준원이 재강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재강은 준원의 젖은 머리에 입을 맞추고,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지진으로 마구 흔들리던 땅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둘은 쏟아지는 물을 받으며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다 몸을 씻었다.

“이거 내가 쓰던 건가?”

준원이 컵에 꽂혀 있던 명선의 칫솔을 집어 들고 물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던 재강이 얼른 그 칫솔을 빼앗았다.

“어, 아니.”

“…….”

준원은 무심히 수납장을 뒤져서 새 칫솔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재강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 준원의 눈치를 보다, 빈 포장재와 명선의 칫솔을 모아들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머뭇거리던 재강은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럼 그게 누가 쓰던 칫솔인지는, 궁금하지 않은 건가?

그걸 궁금해하기를 내가 바라고 있는 건가?

재강은 수건으로 머리를 느릿느릿 문지르며 서 있다가 퍼뜩 침대로 서둘러 가 시트를 벗겼다.

오늘 아침까지도 명선과 뒹굴던 곳이었다. 거기서 준원을 자도록 둘 순 없었다.

재강이 허둥지둥 시트와 베갯잇을 가는 동안 준원이 욕실 밖으로 나왔다.

베개 밑에 있던 명선의 콘돔 세 개가 우루루 쏟아지자 재강은 얼른 그것들을 침대 밑으로 차 넣었다.

“옷이…….”

준원의 말에 재강이 고개를 돌렸다.

준원은 옷장을 열고 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는 채였다.

재강은 침대 위로 몸을 기울인 그대로 준원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선물 받았어? 너 이런 셔츠 안 입잖아.”

준원이 옷걸이 하나를 꺼내 재강 쪽으로 들어 보였다.

개중 유난히 화려한 패턴으로 뒤덮인, 명선의 하와이안 셔츠가 걸려 있었다.

재강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시트를 정리했다.

“같이 일하는…… 동생이 잠깐 여기서 지냈어.”

“같이 일하는 동생?”

“……고깃집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준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재강은 괜히 베개를 만지작대다 준원을 힐끔 쳐다봤다.

준원은 명선의 셔츠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옷장 안에 넣더니 재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재강은 베개를 내려다봤다.

“네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지냈다고?”

“……어.”

“여기 누구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준원이 서랍을 열고 뒤적이다 자신의 속옷을 꺼내 입었다.

“그럼 이것도 그 사람 거야?”

보지 않아도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려한 무늬가 있거나 눈에 확 띄는 원색이 주를 이루는 명선의 속옷들.

“어.”

“요란하네.”

“…….”

“지금은 어딨는데? 이제 같이 안 살아?”

준원이 티셔츠를 입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재강은 벗겨낸 시트와 베갯잇들을 모아 한쪽으로 치우며 준원에게서 멀어졌다.

“집에…… 문제가 있어서 잠깐 여기 있다가 다시 들어갔어. 어제.”

준원이 침대로 올라갔다.

재강은 옷장 앞으로 가 서랍을 열고 속옷을 꺼내 입었다.

“짐은 나중에 내가 챙겨다 주기로 했어.”

“무슨 문제?”

움찔했던 재강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고 침대로 갔다.

“……자세한 건 안 물어봤는데.”

재강이 침대로 가 누웠다.

걔라면 뭐라고 했을까. 훨씬 더 그럴듯하게 둘러댔겠지.

재강이 자리를 잡자마자 준원이 몸 위로 올라왔다.

재강은 곧장 몸이 경직되는 듯했지만 자연스럽게 굴려고 애썼다.

“너도 변하긴 하는구나, 김재강.”

재강의 턱을 잡은 준원이 작게 말하고 곧장 입술을 맞댔다.

재강은 눈을 감으며 준원의 등을 쓰다듬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속에서도, 재강은 문득 죄책감을 느꼈다. 준원이 아닌 명선을 향한 죄책감이었다.

꼭 명선을 뒤에 두고 준원과 바람을 피우는 것만 같았다.

* * *

가든 주차장 한쪽에 자전거를 세운 재강이 주위를 둘러봤다. 명선의 차는 없었다.

명선은 홀 건물 안에도 없었고, 재강이 숯불 방에서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저녁 장사가 시작된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카운터에는 양자가 앉아 있었다.

재강은 속이 탔다.

출근할 때 늘 명선과 함께이던 자신이 오늘은 혼자였는데도 양자와 정식이 별말 없었던 걸 보면, 둘은 명선이 안 나온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왠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재강은 일하는 도중에도 계속 주위를 살피고 핸드폰만 수시로 켰다 껐다 했다.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문자로 지분대던 명선이 오늘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안 오면 안 온다고 문자라도 주지. 뭐야, 대체.

숯불 방 청소를 하다 말고 재강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대다 명선과의 문자 대화창을 열었다.

[야 가든]

머뭇대던 재강은 도로 지우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썼다.

[너 왜 안 나와]

써놓고 다시 한참 우물쭈물하던 재강은 그것도 지워 버리고 핸드폰을 껐다.

준원에게 자신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며 술을 잔뜩 마시고 뻗어버린 명선의 모습을 문득 상상했다가, 재강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냥 어디서 놀다가 자빠져 자느라 못 나온 거겠지.

어제도 원이 왔다는 얘기 듣고 픽픽 웃기만 했잖아. 걔가 속상할 게 뭐 있어.

……물론 나랑 섹스 못 한다는 거엔 실망하겠지. 그럴 거라고 계속 지 입으로 말했으니까.

그래도, 그게 일까지 빠질 정도로 걔한테 대단할 일일까?

너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재강은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날도 명선의 차는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식도 없었다.

재강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속을 간신히 도닥이며, 쌓여 있는 불판들을 세척했다.

기계를 끄고 돌아서는 순간 재강은 흠칫하며 우뚝 섰다.

뒤뜰 잔디 한가운데에 명선이 서 있었다.

재강은 반가움에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멈추고 팔뚝으로 공연히 얼굴을 훔쳤다.

“깜짝이야…….”

“잘 있었냐, 숯불?”

명선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어, 너…… 어제 안 나왔더라.”

재강이 젖은 장갑을 벗으며 선반 쪽으로 갔다.

명선이 느릿느릿 숯불 방 앞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왠지 핼쑥해 보이네. 이준원이랑 회포 좀 빡세게 푸셨나 봐?”

“…….”

재강은 장갑을 선반에 걸고 앞치마를 벗었다.

준원이 돌아온 후 키스는 했지만 아직 섹스는 하지 않았다. 준원은 며칠 못 잔 사람처럼 잠을 잤고, 깨어 있을 때도 졸려 보였다.

재강은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준원에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았어? 뭐 했어?”

“어젠, 왜 안 나왔냐.”

“아…… 오랜만에 오프하고 술판 좀 벌였더니 술병이 나 버렸네.”

“…….”

재강은 앞치마를 벽에 걸고 끈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명선이 숯불 방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너랑 헤어지고 그냥 집에 가려다가, 아, 도저히 안 되겠는 거야. 원래 계획이 너랑 술 먹고 섹스하는 거였잖아. 섹스라도 꼭 해야겠더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앱 좀 켰는데, 너는 그런 거 안 쓰지? 그런 앱이 있어. 발정 난 게이들 모이는 앱. 거기서 하나 매칭돼서, 바로 만나서 신나게 박고 박혔지.”

재강이 쌓여 있던 숯 상자 중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야, 근데 대박인 게 뭔지 아냐? 걔 몸이, 거의 100퍼센트인거야. 딱 너만큼은 아닌데, 한…… 97퍼센트 정도? 대박이지? 네 덕이다. 아니, 마침 그날 돌아와 준 이준원 덕이라고 봐야 하나? 밤새우면서 거의 다섯 번 정도는 한 것 같아. 너 그날 내가 아이스크림 샀던 거 알지? 그걸 걔랑 섹스하면서 다 먹었다니까. 걔 몸에 처바르고 핥아먹고, 내 몸에도 처바르고.”

등 뒤에서 명선이 키득거렸다.

재강은 숯 상자에 묶인 비닐 끈을 살펴보다 일어나 선반에 있던 커터 칼을 찾아들고 다시 앉았다.

“그러고 나서 새벽에 갑자기 술 땡겨가지고 사 와서 마시다 잤네. 체크아웃 시간 넘은 줄도 모르고 자다가 겨우 일어나서 나왔잖아. 그러고 집에 갔는데 와, 도무지 일할 컨디션이 아니더라. 온몸이 쑤시고. 그래서 그냥 계속 잤어. 어차피 나야 뭐 꼭 돈 벌려고 와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너랑 섹스하는 거 때문에 나오는 건데 이제는 이준원도 왔고, 뭐 그렇잖아.”

재강은 숯 통을 늘어놓고 그 안에 숯을 조금씩 나눠 담았다.

“암튼 나는 당분간은 그 97퍼센트짜리랑 놀려고. 너보단 3퍼센트 부족해도 97이면 꽤 훌륭한 거거든. 이참에 걔랑 연애나 해볼까? 나한테 폭 빠진 것 같던데. 좀 전에도 걔랑 한 시간 넘게 통화했다니까.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뭐, 네가 그런 걸 걱정까지 할 리는 없겠지만. 이준원은 언제 간대?”

숯을 옮겨 담던 재강의 손이 우뚝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패턴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며칠 정도 있다가 떠나서 얼마나 있다가 돌아오고, 그런 거. 그걸 잘 파악해 두면 그저께 밤 같은 불상사는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재강은 다시 동작을 멈췄다가 고개를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

“네 눈엔 내가 걔 떠나는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냐?”

“…….”

“걔가 영원히 안 떠나길 바라는 쪽이란 생각은 안 들어?”

재강은 명선의 눈을 쏘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말이 없던 명선이 일어서서 숯불 방을 나갔다.

“날이 더워서 또 예민하신가……? 어쨌든, 이준원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가고 나면 바로 알려 줘. 97퍼센트보단 100퍼센트가 그래도 좋으니까.”

명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아.

저런 새끼였지.

역겨운 새끼.

명선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재강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나는 혼자 뭘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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