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2. 졌지만 잘 싸웠어요
“언…… 뭐? 언제……?”
명선은 들고 있던 메모지를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었다.
“잉, 너 모르고 있었니? 재강 씨가 너한테 얘기 안 했어?”
“아니, 언제 갔냐고? 왜?”
“너 재강 씨랑 진짜 싸운 거야? 이제 서로 연락도 안 해?”
“아오, 엄마!”
“오늘 아침에 급하게 내려가면서 전화했더라고. 할아버지 쓰러지셨다고.”
“…….”
“경황이 없어서 너한테까지는 얘길 못 했나 보다. 하긴, 그럴 수 있지. 네가 먼저 문자라도 보내. 할아버지 좀 어떠시냐고.”
명선은 멍하니 눈만 껌뻑이며 서 있다가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양자는 다시 몸을 숙이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재강 씨가 일은 참 잘했는데. 그만한 사람이 또 구해지려나.”
“무슨…… 왜 그런 말을 해? 사람을 왜 새로 구해? 갔다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야? 다시 여기 와서 일해야 되는 거 아니야?”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기다려. 빨리 새로 구해서 적응시켜야지.”
명선의 미간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도 한동안은 너를 꼬박꼬박 데리고 나와서 좋긴 했는데. 영찬 씨도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하면 그렇게 나이 많은 거 아니니까 친하게 지내 봐. 새로 뽑을 사람도 가급적이면 좀 젊은 사람으로…….”
“형이, 언제 온단 얘기 안 했어?”
“자기도 잘 모르겠대. 가 봐야 알겠다고. 그럼 우리가 마냥 기다려 줄 순 없잖아.”
“왜 이렇게 인간들이 의리가 없어!”
양자가 놀란 얼굴로 명선을 쳐다봤다.
명선은 씩씩대며 양자를 마주 보다 시선을 내렸다.
“명선이, 왜 그래? 형이 전화 안 한 게 속상해?”
양자가 다가오려 하자 명선은 물러서서 얼굴과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데 경황이 있었겠니? 네가 문자라도…….”
명선은 양자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밖으로 뛰어나왔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식은땀이 났다.
단숨에 차까지 와 올라타 문을 쿵 닫은 명선은 얼굴을 감싸 쥔 채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하자 명선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 계속해서 떠올랐다.
제발 문자 하나만. 딱 하나만이라도 보내놨기를.
정말 짧고 퉁명스러워도 괜찮으니까, 딱 하나만.
속초에 간다는 말 한마디.
지금은 정신이 없으니 나중에 연락하자는 말 한마디.
언제쯤 다시 오겠다는 말 한마디.
보고 싶을 거라는 말 한마디.
아니, 그냥 아무 욕이라도 좋으니까, 문자 하나만.
명선은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켰다.
재강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써니
[숯불 9:55에 남자화장실 두번째칸으로 와 천국 보내줄테니깐]
숯불
[ㅗ]
준원이 옥탑방에 돌아온 날짜에 멈춰 있는 둘의 대화.
명선은 다시금 그 대화를 읽고 또 읽었다.
[숯불, 속초 갔다며?]
[숯불, 할아버진 괜찮으셔?]
[야, 갔다 언제 오냐?]
[너 잘렸어ㅋㅋ]
[사람 새로 뽑으면 너 돌아오는 날에 맞춰서 내가 쫓아내 줄게.]
[언제 와?]
[보고 싶겠다. 너 말고 네 몸.]
…….
명선은 재강에게 보낼 문자의 내용을 떠올려 보며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껐다.
오늘 밤까지만 기다려 보고, 그때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으면 문자를 보내자.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잖아. 완전히 남도 아닌데.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감이 가득했다.
계속 아무 연락이 없다면, 재강이 자신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는 뜻으로 보일 것이었다.
게다가 어제 일로 인해 재강이 자신에게 더욱더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필이면 재강이 속초에 가기 전 마지막 만남이 그런 식이었다니.
너는, 인간이 너무 역겨워.
재강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 후 가까워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준원이 돌아온 후엔 모든 것이 그 전보다 더 안 좋은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명선은 재강을 만나기 전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왜 이렇게 역겹게 굴지?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 먹었지?
재강을 알게 되고 정을 주기 전까진 떠올려 보지도, 떠올릴 일도 없던 질문.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 이준원 같은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억울해졌다.
이준원도 역겨운 인간이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왜 그는 되고 자신은 안 되는 건가.
그러고 있자니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다.
명선이 아는 예전 자신의 모습대로라면 이런 상황에서 바로 재강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왜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가 버리냐고. 걱정했다고. 잘 다녀오고, 계속 소식 주고받자고.
그런데 명선은 이제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다.
예전엔 쉽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 *
“나 차단당한 것 같아…….”
명선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대용은 가운데 놓인 팬 위에서 지글대는 곱창을 뒤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됐군.”
“전화도 해보고 문자도 보내 봤는데 정황상 빼박 차단이야. 인터넷 다 뒤져 봤어. 착각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해서 진짜 다 뒤져 봤는데 정황상 차단이야.”
“너 어제도 그 얘기 했어. 그저께도 했고.”
“대용아, 나 차단당한 거니?”
“그런 것 같다.”
대용이 곱창 하나를 집어 소스에 찍어서 들이밀자 명선은 멍한 얼굴인 채 받아먹었다.
“속초에 있는 병원을 다 뒤져 볼까? 하루에 하나씩, 그 앞에서 잠복하다 보면 그중에 하나는 걸리지 않을까?”
“써니…….”
대용이 한숨을 내쉬며 명선을 바라보다 일어나 한쪽에 걸린 앞치마를 가져왔다.
“옷에 기름 다 튀네.”
대용은 명선의 몸에 앞치마를 입히고 허리 뒤에서 끈을 단단히 묶어 주었다.
대용이 그러는 동안 명선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주 말도 안 되는 얘긴 아니잖아. 안 그래?”
“아이고, 써니. 떠난 지 2주가 넘었는데 따로 연락도 없고 차단까지 한 거 보면 뻔하지 뭘 그래. 그만하라는 뜻인 거잖아.”
“아픈 사람 돌보느라 바빠서 그럴 수도 있지. 내 번호만 차단한 게 아니라 아는 사람 번호를 다 차단한 거야.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아?”
“너 그 정도 눈치는 있었잖아. 왜 그래.”
명선이 울상을 지었다.
“희망을 좀 줘, 대용아…….”
“됐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어. 식음을 전폐하고 그리움에 몸부림치며 매일 밤 울다 지쳐 잠들기. 넌 폐인이 될 거고, 그 상태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달도 갈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겠지.”
명선은 곱창을 씹는 대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난 너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염 대용.”
“2주일 내내 네 징징거림을 받아 주고 있잖아. 이것도 내가 쏘는 거고. 구워 주고, 먹여 주고. 이런 친구가 어딨니.”
대용이 다시 곱창 하나를 소스에 찍어 내밀자 명선은 대용을 노려보면서도 받아먹었다.
“질겨. 질기고 맛없어.”
“괜히 곱창에 화풀이한다.”
명선은 곱창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고 지글거리는 팬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까…… 숯불이랑은 곱창 한 번도 안 먹었네.”
“갑자기 슬픈 음악 깔리는 소리 좀 하지 마.”
“곱창 잘 먹었을 것 같은데. 왜 같이 안 먹었지? 이것보단 전골 쪽을 더 좋아했을 것 같기도 하고.”
대용이 말없이 소주병을 들고 잔 쪽으로 손짓하자 명선이 잔을 들어 내밀었다.
대용이 따라 준 소주를 단번에 들이켠 명선이 빈 잔을 내려다봤다.
“걔가 저녁엔 늘 소주로 반주를 했어…….”
“다시 슬픈 음악 깔림.”
“대용아, 그거 알아? 나한테 반하지 않은 건 걔가 처음이라는 거?”
대용은 말없이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독하고 무서운 놈이지? 어떻게 그래? 어떻게 나를 안 좋아할 수가 있어? 나를 왜 싫어해? 난 왜 걔 앞에선 자꾸 역겨운 인간이 되는 거야? 난 왜 그래? 나도 내가 싫어!”
대용은 찌푸린 채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식당 안은 왁자지껄한 편이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 써니가 또 생각을 해봤구나.”
“혹시 내가 이렇게 못 헤어 나오는 게, 내 첫 100퍼센트와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해서인가 싶은 거야.”
“첫 100퍼센트?”
“왜 그 터미널 화장실에서 만났던 아저씨 있잖아.”
대용이 눈을 껌뻑거렸다.
“마무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나? 어차피 지나가는 섹스 한 번인데.”
“아니야, 대용아, 들어 봐. 내가 그 몸을 못 잊고 진짜 무슨 첫사랑 찾아다니는 것처럼 헤매고 다녔잖아. 결국 못 찾았고. 그 한이 남아 있어서 숯불한테도 평소답지 않게 무섭게 빠지고 쉽게 잊지를 못하는 거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는 거지. 그때 상처받은 감정이 치유가 안 된 거야.”
“네가 상처를 받았어? 박고 싸고 갑자기 무서워져서 도망쳤던 네가? 네가 왜? 어떤 상처?”
“……난 너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염 대용.”
“써니, 쓸데없이 깊이 생각하지 마. 너의 심리 분석은 네 게이다만큼이나 후져.”
명선은 턱을 울먹대다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별별 생각이 다 들어. 미치겠어.”
“그래서 뭐, 그 첫 100퍼센트를 다시 찾아내서 살풀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럼 나아질 거라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
“안될 거야. 마음 접어.”
“냉혹한 새끼.”
명선이 얼굴을 감싸 쥐고 문질러댔다.
“써니, 일단 먹어.”
대용이 써니의 앞접시에 곱창을 놓아주었다.
“왜 연락을 안 하지? 어? 왜?”
눈을 부릅뜨고 그 곱창을 노려보던 명선은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자마자 펄쩍 뛰었다.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본 명선의 얼굴에 곧장 실망감이 떠올랐다.
“어, 엄마…….”
-명선아, 너 혹시 카운터 책상에 포스트잇 있던 거 못 봤니? 노란색이고 맨 위에 김복용이랑 전화번호 적혀 있던 거.
“김보굥이 뭐야?”
-김복용이라고, 사람 이름이야. 아니, 못 봤어? 너 있을 때 그거 못 봤어?
“못 본 것 같은데…… 무슨 사람 이름이 그래?”
-너 여기 있던 지난주에 내내 책상 구석에 있었단 말이야. 왼쪽 구석……. 어, 창선 아빠, 그거 이따 재강 씨 오면 줘.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명선의 눈이 갑자기 활짝 커졌다.
-암튼, 왼쪽 구석에…….
“엄마, 지금 뭐라고 했어?”
-응?
“재강? 김재강? 그 형? 온다고? 어디? 가든에?”
-어, 오늘 일산 왔다고 잠깐 들른…….
“아!”
명선은 바로 전화를 끊고 벌떡 일어섰다.
통화를 듣고 있던 대용은 눈이 마주치자 체념한 얼굴인 채 가보라는 손짓만 짧게 했다.
명선은 그대로 후다닥 달려 나가 우왕좌왕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최고 속력으로 달려달라는 명선의 간절한 부탁대로 기사는 나름 속력을 내는 것 같았으나, 명선에겐 1분 1초가 천년만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재강이 속초에 가 버린 후 가든 카운터 일을 아예 그만둬 버린 것에 대한 지독한 후회가 계속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든에 계속 붙박여 있기라도 할 것을.
택시가 달리는 동안 다리만 달달 떨고 있던 명선은 가든에 거의 도착할 때쯤 되어서야 자신이 곱창집의 앞치마를 그대로 입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씨발, 이게 뭐야.”
허리끈은 대체 얼마나 단단히 묶인 건지, 명선이 급한 마음에 허둥거려 더 그런 건지 영 풀리질 않았다.
“아오, 씨!”
결국 포기하고, 명선은 요금을 치른 후 택시 밖으로 굴러 나오다시피 해 가든 안쪽으로 달렸다.
카운터에선 정식이 한창 손님과 대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친 정식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명선은 헐떡이며 우뚝 서서 그 모습을 살피다 홀 안쪽을 재빨리 둘러봤다.
아직 안 왔나? 왔다 갔나?
제발 아직 안 왔기를.
“안녕히 가십쇼.”
떠나는 손님들을 향해 인사하는 정식에게 명선이 스스슥 다가갔다.
“명선이, 이 시간에 웬…… 응? 앞치마는 뭐야?”
“아니, 아빠, 그…….”
숯불 왔었냐고 물어보면 또 둘이 싸웠냐느니 연락도 안 하냐느니 딴소리해댈 텐데. 젠장.
“엄마는?”
“홀에 있지. 왜?”
“…….”
“너 어디서 일하다 왔어? 앞치마는 뭐야? 우리 건 아닌데…….”
아우, 답답.
“형, 온다며, 참. 재강 형.”
명선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를 최대한 짜내며 공연히 입구와 홀 쪽을 둘러봤다.
“벌써 왔다 갔지.”
“뭐!”
명선이 눈을 크게 뜨고 카운터에 바짝 붙어 섰다.
정식이 살짝 몸을 뒤로 젖혔다.
“왔다 인사하고 갔어, 아까…… 한 삼사십 분 됐나?”
“…….”
“집 정리하러 온 김에 인사나 한다고 들렀더라고. 젓갈 세트랑 이것저것 사갖고 왔어. 우리 식사 때 먹으라고.”
“집을…… 정리한대?”
“어, 속초로 아예 이사한대. 할아버지 보살필 사람도 자기밖에 없는 것 같고. 젊은 나이에 참, 의젓해, 사람이. 김치랑 반찬 좀 싸 들려 보냈네.”
“…….”
명선은 피부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질척하게 녹아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눈만 깜박였다.
“아, 이거 대신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정식이 카운터 뒤쪽에서 쇼핑백을 꺼내자 명선은 바짝 긴장하며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연락이 잘 안 돼서 따로 전해 줄 기회가 없었다며.”
명선이 쇼핑백을 받아 안을 들여다봤다.
눈에 익은 무늬와 색이 보였다. 차곡차곡 곱게 접힌 자신의 옷들.
“뭐가 그렇게 바빠서 형이 오랜만에 왔는데 만나지도 못해?”
“…….”
쇼핑백 안에선 재강의 집 세제 냄새가 옅게 났다.
그 별것 아닌 것에서도 재강의 손길이 가득 느껴져 명선은 가슴이 아렸다.
세탁해 잘 말리고 단정하게 접어 넣어둔, 재강의 성정이 느껴지는 그 방식.
“근데 명선아, 앞치마는 왜…… 아, 어서 오세요.”
손님 무리가 우루루 들어오고 정식이 그들을 안내하며 홀 쪽으로 갔다.
명선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대로 서 있다가 봉투를 놓아두고 느릿느릿 걸어 정원으로 나왔다.
곧 숯 통을 쇠막대에 꿴 남자가 홀 건물로 들어갔다. 새로 구한 사람은 4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명선은 정원 한쪽에 서서 왁자지껄한 가든 건물을 바라보다 뒤로 손을 돌려 앞치마 허리끈을 만지작댔다.
얼마간 그러고 있으니 끈이 풀렸다.
명선은 앞치마를 벗어 뭉쳐서 쥐고 있다가 정원을 나가 길을 걸어 내려갔다. 옆으로 차들이 쌩쌩 지나다녔다.
한참 그렇게 걷다 핸드폰을 꺼내 켰다.
써니
[숯불 9:55에 남자화장실 두번째칸으로 와 천국 보내줄테니깐]
숯불
[ㅗ]
써니
[너 속초 갔다며? 다시 오는 거야?]
[오면 연락해 한판 하자ㅎㅎ]
써니
[할아버진 괜찮으셔? 간호하느라 바쁘냐?]
써니
[야 바빠? 전화 좀 받아보지?]
써니
[몸은 잘 있냐?]
차단당해 재강이 읽을 수도 없을 명선의 문자들은 대화창을 공허하게 혼자 떠돌고 있었다.
파라솔은…… 어떻게 됐을까.
그 정글 같은 화분이랑, 귀여운 냉장고랑, 베개 밑에 넣어놨던 콘돔은.
울컥, 눈물이 나오며 명선의 몸이 휘청거렸다.
명선은 길가로 물러나 서서 손에 쥔 앞치마 뭉치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간 그러고 있던 명선이 얼굴을 들고 앞치마를 내려다봤다.
앞치마는 명선의 얼굴 윤곽대로 젖어 있었다.
“에휴, 곱창 냄새…….”
명선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폐인이 될 거라는 대용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 * *
명선에게 유난히 소란스럽게 느껴졌던 여름은 재강의 부재 속에서 기척도 없이 물러갔다.
매미가 고요해지고, 바람의 온도와 냄새도 달라졌다.
재강을 그렇게 놓친 후 명선은 한 달이 넘도록, 가든에 매일 같이 나와 카운터를 지켰다.
재강이 집까지 정리한 후 속초로 가 버린 걸 알면서도, 가든은 명선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어차피 둘 사이의 공통점은 가든 밖에 없으니, 이렇게라도 죽치고 있으면 재강이 언젠간 한 번이라도, 전화하거나 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명선의 속도 모르고 신난 쪽은 양자와 정식이었다.
그 변덕스러운 한량 아들이 이번엔 한 달 넘게, 오픈 타임부터 클로징 타임까지 내내 카운터에 붙박여 있으니 신날 만도 했다.
명선은 손님을 맞이할 때만 억지 미소를 짓고 그 외의 시간엔 무표정인 채 늘어져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에도 흥미가 없고, 입맛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성욕마저 사라진 기분이어서, 예전엔 수시로 켜대던 앱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재강에게선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딱 한 번, 용기를 내 가본 재강의 옥탑방은 한창 공사 중인 듯했다. 파라솔은 보이지 않았다.
* * *
그렇게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중,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저녁 시간에 누군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인사하며 무심히 고개를 든 명선이 눈을 크게 떴다.
우어, 씨발.
정말로, 욕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작은 얼굴에 큼직한 눈, 코, 입이 꽉 찬 듯하고 얼굴도 몸도, 솜씨 좋은 화가가 매끈한 선으로 단숨에 그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뭐야…… 연예인인가? 저런 연예인이 있었나?
남자는 천천히 걸어 들어와 잠시 멈춰서 홀 안쪽을 눈으로 훑었다.
“저, 식사…… 하러 오셨나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가 살짝 웃었다.
“네.”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뭐 저렇게 잘생겼어. 웃는 것도 대박 싱그러워.
“몇 분이세요?”
“둘이요.”
남자가 말함과 동시에 뒤에서 덩치 큰 남자가 가볍게 뛰어 들어왔다.
덩치는 곧장 잘생긴 남자의 곁에 와 등을 쓰다듬었다.
명선의 형편없는 게이다로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둘은 연인 사이임이 분명해 보였다.
“1층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명선이 카운터 밖으로 나와 홀 안쪽을 가리켰다.
둘은 한산한 홀 안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남자가 주문하고 홀 안을 둘러보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동안, 덩치는 턱을 괸 채 잘생긴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명선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앉아 핸드폰을 켜고 빈둥댔다.
둘의 식탁에 숯불이 놓이고, 숯불 알바가 밖으로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잘생긴 남자가 카운터 앞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명선은 그 뒷모습을 힐끗 봤다가 무심히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핏 남자가 뒤뜰 쪽으로 향하는 걸 본 것 같았다.
화장실 찾나?
명선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다시 앉았다.
아 씨, 귀찮은데. 어차피 못 찾고 다시 들어와서 물어보겠지.
명선은 핸드폰을 도로 켰다가 결국 끄고,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뜰로 가보니 남자는 잔디 한가운데 서서 숯불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는 숯불 알바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채였다.
명선은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화장실, 찾으세요?”
남자가 명선을 돌아봤다.
아, 진짜 눈부시게 잘생겼네, 씨발.
“친구가 여기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요.”
“…….”
“어떻게 일했는지 궁금해서 와 봤어요.”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명선의 입술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준원 씨.”
이준원.
명선의 온몸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준원이 명선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사해.”
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명선의 곁을 지나 홀 건물 쪽으로 갔다.
명선은 멍하니 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준원을 앞세우고 걷던 덩치가 어쩐지 경계하는 얼굴로 명선 쪽을 슬쩍 돌아보고 모퉁이로 사라졌다.
말로만 듣던 그 이준원.
상상 속에서 몇 번씩이나 죽고, 사라지고, 소식이 끊기길 반복했던 그 이준원.
그가 명선의 눈앞에 나타났다.
명선은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얼마간 서 그대로 서 있다가 느릿느릿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때부턴 신경이 온통 그쪽에 쏠려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준원은 딱히 음식을 제대로 먹는 것 같지도 않고, 열심히 먹는 덩치와 대화만 나누는 듯했다.
명선은 다리를 달달 떨어대다 결국 정식에게 잠시 카운터를 봐 달라고 부탁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아마도 그 둘이 타고 왔을 것으로 보이는 차가 있었다.
명선은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며 주차장과 정원을 하염없이 오갔다.
그러고 있자니 곧 준원이 밖으로 나왔다.
명선은 카운터 앞에서 계산하는 덩치를 힐끗 보고 준원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준원이 가만히 멈춰 섰다.
“저기, 잠깐…….”
명선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준원은 별로 놀라는 얼굴도 아니었다.
“지금요?”
“네, 시간 되시면.”
마침 계산을 끝내고 나온 덩치가 그 경계하는 표정으로 명선을 응시한 채 준원의 뒤에 섰다.
“뭐야?”
준원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덩치의 몸을 살짝 밀었다.
“차에 먼저 가 있을래? 얘기 좀 할 게 있어서.”
“무슨 얘기?”
“가 있어. 이따 말해 줄게.”
덩치는 명선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도 순순히 주차장 쪽으로 갔다.
명선은 잠시 망설이다 머뭇머뭇 정원 바깥을 가리키며 몸을 돌려 걸었다. 준원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길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명선의 심장은 계속 거세게 펄떡이고 있었다.
옆쪽의 도로를 따라 차들이 간간이 지나갈 때마다 길가에 쌓인 낙엽들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쓸려 다녔다.
명선이 가든 담장 모퉁이쯤에 멈춰 서자 준원도 섰다.
“그…….”
명선은 고개를 숙이고 구부정하게 선 채 공연히 담 아래쪽을 발끝으로 톡톡 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데리고 나오긴 했지만,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재강이 집에서 같이 지냈던 동생 맞죠?”
준원의 말에 명선이 홱 고개를 들었다.
“어…… 어, 네.”
준원이 명선의 가슴께를 바라보고 다시 눈을 들었다. 명선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 큼직한 눈이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
“옷 스타일이 거기 옷장에서 본 거랑 비슷해서 혹시나 했는데 맞네요.”
준원은 명선의 얼굴을 훑어보는 듯하더니 살짝 웃었다.
명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축였다.
“지금…… 속초에 있죠? 숯…… 재강, 형.”
“네.”
“……잘 있어요?”
“잘 있겠죠.”
준원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무슨, 남 말하듯이…… 아니, 같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아뇨.”
“네?”
“강이는 속초에 있고 나는 서울에 있어요.”
“뭐? 왜요?”
준원은 그 큰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명선을 잠시 응시했다. 명선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곧 준원의 얼굴에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다.
“나도 걔랑 연락 안 한 지 좀 됐어요. 그래도 어디 있는진 아니까 주소를 알려 줄 순 있어요.”
명선이 눈을 크게 떴다.
“연락을…… 안 해요? 왜요? 아니, 어딨는지 안다면서 왜 혼자 둬요? 걔는 아픈 할아버지 간호 중이라 힘들고 외로운 거 아닌가? 반평생 알고 지냈다면서 그런 것도 몰라요? 인간적으로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왜 그래? 맨날 힘들게만 하고, 정작 도움 필요할 땐 완전 쌩까고?”
명선은 씨근대며 준원을 노려봤다. 정말로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걸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준원은 말간 눈으로 명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웃음이 살짝 떠오르며 비틀린 명선의 입술과 미간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할아버지 같이 간호하자고 할까 봐 미리 발 뺀 건가? 드럽고 추한 꼴은 보기 싫고 곱게 살고 싶어서? 근데 걔가 그럴 리 없다는 건 본인도 알지 않나? 아니면, 지금 꼴리는 대로 도망가 있는 시기? 이러다 내키면 기어들어 가서 같이 지내려고? 와, 그럼 저 육덕이는 새로 만든 꼬붕인가 보네.”
준원이 씩 웃었다.
“미친 개새끼처럼 달려드네요. 처음 보는 사이에.”
“당신 하는 짓이 더 개 같았거든? 그리고 난 숯불한테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처음 보는 사이 같지도 않고.”
“아, 재강이가 내 얘기 많이 했어요?”
“당연한 거 아냐? 사람 피를 그렇게 말려대는데.”
“강이는 나한테 네 얘기 한 적 없는데.”
명선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단번에 완패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재강의 마음을 온통 차지했던 건 준원이었을 테니.
명선은 코로 씩씩 숨을 내뿜으며 준원을 노려보다 스르르 눈을 내리깔았다.
순식간에 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아주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하긴, 잠깐 같이 지냈던 알바 동생 정도 외에는 숯불이 얘한테 내 얘기를 따로 할 필요도 없지.
나랑 했던 짓을 숨기려고 그렇게 애쓰기까지 했는데.
문득 가을바람이 유달리 춥게 느껴지며 등이 살짝 떨렸다.
명선은 시무룩한 얼굴로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어딨는지나 알려 줘요. 내가 직접 찾아가게.”
진 건 진 거고,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으니까.
마지막이 되든 뭐가 되든.
날 아직도 싫어하든 어쩌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라도 하고 싶어.
“재강이 할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준원의 말에 명선이 눈을 들었다.
“……네?”
“상주는 재강이고.”
명선이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준원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켜서 명선에게 내밀었다.
병원 이름과 발인 날짜 따위가 쓰인 문자였다.
“우리 고모가 아직 속초에 살아요. 어제 아침에 고모가 받아서 전해 준 문자예요.”
명선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얼른 핸드폰을 꺼내 그것을 메모했다. 발인은 내일이었다.
준원은 명선이 메모하길 기다렸다가 핸드폰을 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강이랑은 이제 서로 안 보고 살기로 했어요. 안 괴롭힌 지 좀 됐으니까 너무 그렇게 짖어댈 거 없고.”
명선이 미간을 구긴 채 다시 준원을 노려봤다.
“왜요? 단물 다 빼먹었으니까 버린다 이건가? 자기한테 쏟아야 되는 관심을 아픈 할아버지한테 쏟는 게 기분 나빠서? 그새를 못 참아서?”
“재강이가 그만 보자고 한 건데.”
“…….”
준원은 재밌는 영화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명선을 응시했다.
“재강이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명선은 얼얼한 기분인 채 준원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장례식도 안 가요?”
“부의금은 고모가 넉넉히 보낼 거예요.”
돈만 보내면 다냐, 씨발놈아?
명선은 바로 나올 뻔한 말을 꿀꺽 삼켰다.
둘은 얼마간 말없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봤다.
곧 준원이 살짝 웃는 듯하더니 먼저 몸을 돌렸다.
준원은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명선은 준원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 자리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명선은 그날 저녁 장사고 뭐고 무시한 채 곧장 속초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계속 망설이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교주처럼 떠받들던 준원과의 관계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셔 상주 노릇을 하는 중인 재강의 앞에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게 괜찮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재강이 과연 지금 어떤 정신 상태일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인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재강을 보고 싶다는 자신의 그 욕심 하나만을 채우기 위한, 정말 이기적인 행동인 건 아닌지.
이준원이 늘 하던 그런 이기적인 행동.
게다가 속초로 가면서 내 번호를 차단하기까지 했으니까, 자기 뜻은 충분히 전달됐다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또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없던 정이 더 떨어질지도 모르고.
그래도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이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적어도, 최소한, 뭔가를 정리하는 대화 정도는 해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걱정되는 것도 있고.
혹시…… 자살이라도 하려고 준비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잖아.
그렇게나 아끼고 사랑하고 숭배하는 이준원을 마침내 밀어낸 게, 혹시 자기 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과감한 결단력 같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게다가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이런 상황에.
그렇다면 나라도 가서 막아야지 어떡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이 뭐라도 해야지.
이준원은 숯불한테 크게 관심도 안 쏟는 인간이니까 그런 거 눈치 못 챘을 거야.
이준원 때문에 우울증이나 뭐, 그런 게 왔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럼 내가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고 그래야지.
할아버지 돌보느라 분명 자기 몸은 신경 쓰지도 않고 그냥 막 내버려 뒀을걸?
숯불이 그렇잖아. 남 보살펴 주고, 뒤치다꺼리해주고.
그러니까 촐랑대지 말고, 쫑알대지도 말고, 가급적 착하게 굴자.
조용히 있으면 숯불이 그렇게 싫어하진 않을 거야.
봐서 도와줄 게 있으면 도우면 되는 거지.
그렇게 옆에 있다가 얼굴만 좀 보고…… 그리고…….
그리고 그다음은 뭐지?
* * *
장례식장은 처음이었다.
향냄새가 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하로 들어서는 순간 음식 냄새가 먼저 났다.
명선은 자꾸 땀이 나는 손바닥을 맞대고 문지르며 서성이다 화장실 안으로 서둘러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섰다.
급하게 찾아 입고 온 것 치곤, 질 좋은 흰 셔츠와 검은 블레이저는 몸에 잘 맞았다. 어깨와 가슴선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머리 스타일도 수수하니 괜찮았고, 피부도 깨끗했다.
그런데도 명선은 계속해서 거울 속의 자신을 살피며 호흡을 골랐다.
양손으로 두 눈을 꼭 눌렀다가 들여다보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명선은 찬물에 손을 여러 번 씻고 또 씻었다.
재강을 결국엔 만나게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그냥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했다.
만나자마자 와락 끌어안고 주접이라도 떨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니면, 재강의 차가운 눈길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혹은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만으로 재강이 자신을 이제는 정말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등등.
걱정은 한도 없이 늘어났다.
명선은 손을 아예 씻어 없앨 것처럼 문질러대다가 겨우 수도꼭지를 잠그고 종이 타월에 젖은 손을 닦았다.
그냥 마지막 인사를 한다고 생각하자.
정말 마지막으로, 제대로 인사하러 왔다고.
고인에 대한 예의도 잊지 말고.
그래. 맞지. 고인에 대한 예의. 나는 일단 장례식에 온 거야.
명선 가든을 대표해서.
명선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복도 양옆으로 주르르 늘어선 방마다 입구 옆에 작은 전광판이 있고 고인과 상주의 이름이 떠있었다.
재강의 이름이 보이자 명선은 멈춰서 침을 꿀꺽 삼켰다.
입구를 통해 분향소 옆에 선 재강이 보였다.
명선은 재강을 가만히 바라봤다.
사납게 뛰던 속이 갑자기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완장을 차고 검은 정장 차림인 재강은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이 조금 야윈 듯했다.
곧 명선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재강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명선의 미간이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