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재강
할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은 건, 명선과 연꽃모텔에서 그 난리를 치르고 돌아온 후의 새벽녘이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별 친밀감이 없었고, 서로를 챙기며 사는 사이도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비상 연락망 첫 번째는 손자인 재강으로 되어 있었다.
다른 가족이 없어, 둘은 어쨌든 서로의 서류상 보호자이기도 했다.
서둘러 짐을 챙기는 재강의 뒤에서 준원은 비몽사몽이었다.
“……어디 가?”
“할아버지 쓰러지셨대.”
“우리 고모한테 전화할까?”
“괜찮아.”
준원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나른한 눈으로 재강을 바라봤다.
배낭을 멘 재강이 침대 곁으로 다가가 머뭇대다 준원의 어깨를 살짝 쓰다듬었다.
“여기…… 있을 거야?”
준원은 재강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눈을 비볐다.
“글쎄.”
재강은 준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반쯤 감긴 눈을 한 준원이 손을 뻗어 재강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재강은 준원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가면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준원이 계속 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지 역시, 알 수 없었다.
* * *
버스 터미널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길 기다리다 양자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린 후, 재강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명선을 떠올렸다.
오래전에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어떤 상태일지 모를 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문득 지독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명선이 필요했다. 명선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납게 넘실거렸다.
명선의 목소리, 얼굴, 냄새, 미소, 보조개, 손짓과 발짓, 그의 모든 것이.
명선만 곁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안정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물론 둘이 이런 상황에서 서로에게 연락할 정도의 사이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명선은 ‘그럼 언제 와? 섹스는 언제 하지? 몸 보고 싶겠다.’ 같은 말이나 하고 말 것이 뻔했고, 그게 재강에게 상처가 될 것도 뻔했다.
아니면, 평소 성격대로 너무나 다정하고 친근한 말을 건네서, 이렇게 멀어지는 걸 더욱더 힘들어지도록 만들거나.
그 힘듦 역시 상처가 될 수 있었다.
재강은 명선이 어젯밤 물었던 곳을 내려다보다 가만히 쓸었다.
잇자국이 난 곳은 울긋불긋 멍이 든 채였고 아직 살짝 쓰라렸다.
속초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 사실상 가든에서의 아르바이트는 끝난 거라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명선과의 관계도 이렇게 끝나는 거라 볼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어젯밤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면 마지막 만남으론 거의 최악인 듯 보이긴 했지만, 재강의 마음 한편에선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은밀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명선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완벽하게 떨어져 나올 기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그 ‘진리’를 시험하고 증명해 볼 수 있는 기회.
재강은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대다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명선의 번호를 차단했다.
* * *
재강의 할아버지는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재강을 알아보는지 어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쓰러지면서 부딪친 곳 외엔 별 외상도 없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했다.
재강은 의사와 대화하고 이런저런 서류들을 읽었다.
할아버지는 재강 앞으로 아파트와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비롯해 모든 재산을 남기는 유서를 3년 전에 벌써 작성해 둔 채였다.
자신이 죽으면 뭘 어떻게 할지 알리는 것도 모두.
시골 노인답지 않게 꽤 사무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몸 안 좋다고 한 지 한 3년 됐어.”
재강이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할아버지를 대신 돌보던 이웃이 말했다.
“손에 마비도 몇 번 오고, 기억력도 오락가락하고. 치매가 오나 싶었는데 병원은 끝내 안 가더라고. 쇠고집이어 갖고.”
“…….”
재강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1년에 두어 번 나누는 안부 전화에서 서로 그런 걸 말하는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보호자이자 상속인이 된 재강은 정보들을 건네받고 처리한 후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무언가 변화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강이 늘 해오던 일.
그때부터 재강은 병원에서 먹고 자다시피 했다.
며칠에 한 번, 할아버지의 아파트에 들러 빨래를 하고 짐을 다시 챙겨 돌아오는 일상이 계속됐다.
시간이 지나도 할아버지는 처음 봤을 때의 상태 그대로였다.
결국 의사의 입에선 퇴원해 요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재강은 그 말을 듣고 문득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마침내, 일산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일산을 떠나고, 준원에게서도, 명선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아파트에 머물며 근처에서 일을 구하고, 매일 요양원에 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다 돌아오는 삶이 그려졌다.
아예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따 그 요양원에서 일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요양원에 틀어박히듯 하면 준원도 명선도,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용기는 기척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속초에 온 지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무렵, 재강은 요양원에 가 절차 등을 의논하고 나오는 길에 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강아.
준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자고 있었어?”
-좀 전에 깨서 누워 있었어.
“…….”
-할아버지는 어떠셔?
“요양원으로 옮길 거야.”
-아…….
“…….”
-강아,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우리 고모한테 연락해. 번호 있지?
“……응.”
-언제쯤 와?
재강은 요양원 입구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밭을 바라보다 담장 그늘로 걸어 들어갔다.
“안 돌아갈 것 같아.”
준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응?
“이제 여기서 지내려고.”
준원은 또 얼마간 말이 없다가 짧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원아.”
-어.
“우리는…….”
-…….
“나는, 너한테 뭐야?”
-네가 나한테 뭐냐고?
준원의 말투엔 가벼운 웃음이 서려 있었다.
-김재강이지. 내 친구.
“…….”
-내 거.
김재강. 친구. 소유물.
그 외엔……?
“이준원.”
-어.
“내가 여기서 같이 살자고 하면, 그렇게 할래?”
-속초?
“응.”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니.
“…….”
-난 거기서 살고 싶진 않은데.
재강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답이었다. 이런 답이 나올 줄 알면서도 물었다.
늘 재강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던 준원이니, 어쩌면 이곳으로도 오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그리고 준원이 곁으로 온다 해도, 명선의 빈자리가 채워질 리는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물었다는 사실이 준원에게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고, 잠깐이나마 준원을 명선의 대용품처럼 생각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그래.”
-정말이야? 정말 속초에서 아예 살 거라고?
“일산 집은 정리해야 될 것 같다.”
-…….
“혹시 지금 거기 있으면 그전까진 계속 거기서 지내도 돼. 집주인이랑 통화하고 너한테도 알려 줄게.”
-김재강.
“…….”
-너 왜 그래?
재강은 담장에 등을 기댔다. 그늘진 담벼락은 시원하고 단단했다.
“이제 우리…….”
-…….
“각자 인생 살자.”
사실 ‘함께’였다고 볼 수도 없지만.
-나랑 절교하는 거야?
준원은 피식 웃는 듯했다.
“…….”
-강아.
“응.”
-할아버지 때문에 갑자기 깨달음이 왔어?
“…….”
-인생이 허무하고 사후 세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고 그런 거야?
“…….”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하고 그래.
너한텐 갑작스럽겠구나.
너랑 같이 있는 동안 난 내내 시달렸던 문제였는데.
“너는…….”
재강은 입을 다물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넌 속초에 와서 살 생각이 없고, 나는 일산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지. 그게 다야. 이제 각자 살고 싶은 데서 살면 되는 거야.”
-…….
“집 정리 상황은 문자로 알려 줄게.”
재강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듯했다.
이 정도가, 재강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재강은 핸드폰을 꼭 쥐고 앞에 펼쳐진 너른 밭을 바라봤다.
준원과 처음 만난 속초.
이곳에서 준원에게 마침내 작별을 고했다.
* * *
재강이 준원과 처음 만난 건 열네 살 여름이었다.
어수선한 월요일 아침, 교실 안으로 담임이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한 학생이 들어왔다.
담임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졌던 교실은, 그 학생의 등장으로 인해 고요해졌다. 여러 쌍의 눈이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연예인인가?’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다. 친하게들 지내.”
담임의 말이 끝나자 준원은 싱긋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살짝 흔들었다.
“안녕. 이준원이야.”
그 손엔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준원이는 저 끝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면 돼.”
재강의 옆 분단 자리였다. 어쩐지 아침에 왔을 때 빈 책상이 하나 있더라니, 전학생을 위한 자리였다.
준원은 1분단과 2분단 사이를 지나 재강 가까이 왔다.
준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아이들이 그를 힐끔댔다.
준원과 눈이 마주치자 재강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준원의 팔이 재강의 어깨에 가볍게 스쳤다.
준원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고 교복 셔츠는 깨끗했다.
그날, 점심때가 채 되기도 전에 준원에 대한 소문은 학교 전체로 퍼졌다.
몇몇 아이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벌써 준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쟤네 집 되게 부자래. 부잣집 외동아들.”
“아침에 시커먼 차 타고 와서 내렸잖아.”
“서울에서 사고 쳐서 여기로 보냈다며. 잠깐 숨어 있으라고.”
“깁스한 거, 저 손으로 누구 죽기 직전까지 패서 그렇다고 하던데.”
“그렇게 안 생겼는데 싸움 진짜 잘하나 봐.”
전학생이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소문 때문인지 주뼛댔고, 여자아이들은 의외로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소문이 어떻든, 준원은 친절하고 싹싹했다.
곁에서 그런 소문과 상황이 흘러가는 동안 재강은 자리에 앉아 책에 낙서만 하고 있었다.
딱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는 재강의 곁에서, 인기 폭발 준원의 자리는 더욱더 화기애애해 보였다.
준원은 그날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재강에게 말을 걸었다.
“넌 이름이 뭐야?”
흠칫한 재강은 멍하니 준원을 바라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김재강.”
“전 시간에 필기한 거 보여줄 수 있어? 이것 때문에 잘 못 적었는데.”
준원이 깁스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재강이 교과서 가장자리를 머뭇머뭇 만지작거렸다.
“필기 안 했는데.”
준원이 피식 웃었다.
“하나도?”
준원은 참 화사하게도 웃었다. 큼지막한 눈과 코와 입이 작은 얼굴을 가득 채우며 우아하게 발레라도 추는 듯했다.
“……어.”
재강은 갑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거 볼래?”
대화를 들었는지 재강의 짝이 자기 교과서를 준원 쪽으로 내밀었다.
재강은 자신의 가슴 앞에 있는 교과서를 내려다봤다.
“괜찮아. 얘가 안 했다는 거 보니까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나 봐. 어쨌든 고마워.”
준원의 목소리와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재강의 짝이 고개를 끄덕이며 교과서를 도로 가져갔다.
재강은 준원 쪽을 슬쩍 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돌렸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재강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준원의 뒤를 지나 서둘러 나왔다.
교문을 벗어나는 순간 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재강.”
재강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준원은 그 화사하고 우아한 미소를 띤 채 가까이 오더니 재강의 어깨를 살짝 잡아끌어 같이 걷도록 했다.
“네가 이 학교에서 싸움 제일 잘한다며?”
“…….”
싸움을 잘하는 애들은 따로 있었다. 고등학생 형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그런 무리.
재강도 거친 편이긴 했지만, 그런 ‘전문적인’ 애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그러던데. 네가 숨겨진 제왕이라고. 어쩐지 포스가 남다르더라.”
재강은 살짝 찡그린 채 눈만 깜박였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김우철이라고 알지?”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철이야말로 이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애였다.
“걔가 내일 날 좀 보고 싶다던데. 근데 내가 지금은 이래서.”
준원이 깁스한 손을 들어 보였다.
“네가 나랑 같이 가서 걔를 만나보면 어때?”
“…….”
“내 대신 대화를 나눠보면.”
“걔랑…….”
재강이 멈추자 준원도 멈췄다.
“싸우라고?”
“싸우게 될지 뭘 할지는 아직 몰라.”
“…….”
“그래도 네가 걔보단 훨씬 더 잘 싸울 테니까, 너랑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별로 걱정은 안 될 것 같아.”
“…….”
준원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다시 어깨를 잡아끌고 걸었다.
“꼭 싸우진 않아도 되고, 그냥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돼. 보디가드처럼.”
“…….”
“깁스 풀기 전까지만.”
“…….”
“생각해 보고 알려 줘. 내일 보자.”
준원이 재강의 어깨를 토닥이고 앞쪽 길가에 선 검은 차 쪽으로 달려갔다.
뒷좌석에 올라타기 전 준원은 뒤를 돌아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서서 준원을 바라보던 재강은 얼떨결에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재강의 머릿속엔 준원의 말이 맴돌았다.
너랑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별로 걱정은 안 될 것 같아.
다음 날 방과 후, 학교 근처 공터에서 재강은 우철과 투견처럼 싸웠다.
한쪽엔 우철의 일행이 서고, 다른 한쪽엔 준원이 서서 뒤엉킨 둘을 말없이 지켜봤다.
재강과 우철 둘 다 얼굴은 곤죽이 되었지만, 결국 쓰러져 못 일어난 쪽은 우철이었다.
눈치를 보던 우철의 일행이 그를 부축해 끌고 갔다.
다리를 휘청대며 간신히 서 있던 재강에게 준원이 다가왔다.
준원은 싱긋 웃으며 재강의 코 아래쪽을 손으로 훔치고 작게 말했다.
“소문이 진짜였구나.”
한쪽 눈두덩이가 잔뜩 부어오른 재강은 어깨를 씩씩 들썩이며 준원을 바라봤다. 준원의 손에 감긴 붕대에 자신의 피가 새빨갛게 번져 있었다.
그날 준원은 그 검은 차에 재강을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재강을 본 그의 할아버지는 저녁 내내 화를 냈고, 다음 날 학교에 와야 했다.
상담실엔 우철의 아버지, 재강의 할아버지, 각 담임, 준원의 고모, 준원, 재강, 우철이 모였다.
우철의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우철은 준원과 재강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치료비는 저희 쪽에서 다 부담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준원의 고모가 한 말에 재강의 할아버지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재강과 우철은 사흘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다.
재강은 어른들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준원의 손을 바라봤다.
준원은 내내 보란 듯이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붕대엔 여전히 재강의 피가 묻어 있었다.
어제는 새빨갰던 피가 이제는 거의 검은 색이 되어 있었다.
준원은 피가 말라붙어 빳빳해진 부분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우철이 알고 지내는 형들이 재강을 찾아오지 못하게 잘 처리한 게 준원의 부모였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됐다.
* * *
사흘 후, 재강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재강을 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준원은 재강을 본체만체했다.
재강은 평소처럼 자기 자리에 웅크린 채 지냈고, 그 곁에서 준원은 시시때때로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대화를 나누거나 장난을 쳤다.
준원의 새 붕대에는 반 아이들이 해주었는지 이런저런 낙서가 가득했다.
내내 재강 쪽을 쳐다보지도 않던 준원은 지난번처럼, 방과 후 교문을 나서는 재강의 곁에 갑자기 따라붙었다.
“잘 쉬었어?”
준원을 힐끗 본 재강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오늘은 버스 탈 거야. 같이 가자.”
재강은 왠지 좀 불쾌하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인 채 말없이 정류장으로 걸었다.
버스에 오른 둘은 맨 뒷자리 끝에 나란히 앉았다. 준원은 재강을 창가 쪽에 앉게 했다.
“너 꼭 복싱하는 사람 같다.”
준원이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키득댔다.
“다 이기고 챔피언 먹은 사람.”
“…….”
“진짜 쎄보여.”
재강은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난 여기…….”
자신이 내릴 역에 가까워질 때쯤 재강이 일어나려 하자 준원이 몸을 바싹 붙이며 도로 앉혔다.
“우리 집은 세 정거장 더 가야 되는데.”
준원은 싱글싱글 웃으며 재강과 눈을 맞췄다. 재강이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근데 뭐.”
“너 내 보디가드잖아.”
“…….”
재강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내릴 역은 이미 지나쳐 버렸다.
재강은 별수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준원이 내리는 역에서 함께 내렸다.
준원은 주위를 둘러보다 재강을 이끌고 짧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가자, 보디가드.”
재강은 짧게 한숨을 쉬고 준원을 따라 걸었다.
“근데 그때, 김우철이 나한테 보자고 했던 거 아니다. 내가 보자고 했던 거지.”
“…….”
발끝을 보며 걷던 재강이 준원을 쳐다봤다.
준원이 킥 웃었다.
“걔가 제일 세다길래, 기선 제압은 빨리해 놔야 할 것 같더라고.”
“그럼 나를 왜…….”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재강이 스르르 걸음을 멈추자 준원도 멈춰 섰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재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준원을 쳐다봤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재강을 마주 보는 준원의 치뜬 눈은 평소보다 더 커 보였다.
반질거리는 눈알 위에서 깜박, 깜박, 움직이는 눈꺼풀은 그 끝의 속눈썹 때문인지, 꼭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크고, 어쩐지 사나워 보이는 나비였다.
준원은 그런 눈으로 말없이 재강의 눈만 응시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하던 재강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찍이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길 한가운데에 마주 보고 선 채였다.
재강이 준원을 봤다가 다시 자전거 쪽을 봤다.
자전거가 오는 걸 알 텐데도 준원은 미동도 없이 서서 재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까워지는 자전거가 벨을 찌릉찌릉 울리자 재강이 결국 손을 뻗어 준원을 자기 옆쪽으로 잡아끌었다.
둘의 앞으로 자전거가 쌩 지나갔다.
“화난 거 아니지?”
준원이 깁스한 손으로 재강의 팔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난 여기 오자마자 네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는데. 친구 하고 싶은 사람으로.”
“…….”
“넌 나랑 친구 하는 거 별로야?”
“…….”
재강은 머뭇대며 준원을 마주 보다 시선을 떨구고 고개만 살짝 저었다.
준원이 다시 재강을 잡아끌고 걷기 시작했다.
“……근데, 왜 나를?”
한참 있다 재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멋있잖아. 싸움 잘하는 거.”
“김우철이 나보다 더 잘하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네가 이겼잖아.”
“…….”
“네가 제일 세.”
“…….”
준원이 2층짜리 단독 주택 앞에서 멈췄다.
“여기 우리 집.”
재강도 멈춰 집을 올려다봤다.
“난 고모네 식구랑 같이 살아.”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저 버스 정류장에서 볼까?”
준원이 그쪽을 가리키며 재강의 눈을 들여다봤다.
재강은 말없이 준원의 눈을 마주 보다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준원이 활짝 웃고 대문 앞 계단을 올랐다. 벨을 누르자 한동안 멜로디가 들리고 곧 지잉, 소리와 함께 큼직한 대문이 열렸다.
“잘 가.”
준원은 재강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닫힌 후 재강은 돌아서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버스 세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그만큼의 거리를 걸어 약속한 정류장에 가니 보도블록 가장자리에 선 준원이 보였다.
재강은 준원을 응시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준원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고개를 숙이고 몸을 조금씩 앞뒤로 흔들며 빗물 배수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침을 모아 그 안으로 똑, 똑, 떨어뜨렸다.
재강이 더 가까워지자 준원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무표정이던 준원의 얼굴 위로 갑자기 환한 미소가 펼쳐졌다.
재강은 공작새의 꼬리가 펼쳐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색색깔의, 반짝이는, 화려한 깃털.
“안녕.”
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재강도 인사했다.
둘만의 등하굣길 규칙이 생긴 날이었다.
* * *
준원은 여름 방학이 지난 후 오른손의 깁스를 풀고 나서야 재강에게 말했다.
“다쳐서 깁스했던 거 아니야. 그리고 나 사실 양손잡이다.”
재강은 멍한 얼굴로 준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간 자신을 비롯해 여러 아이들이 준원의 필기를 도와주고 자잘한 수발을 들기도 했는데.
“안 다쳤는데 왜 깁스를 해?”
“관심 끌려고.”
“…….”
“너만 알고 있어.”
준원은 킥킥 웃기만 했다.
둘만 아는 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났다.
준원은 서울에서 누군가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 사고를 치고 이곳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을 부인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재강에게는 다른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형 자살하고 나서 내가 한동안 좀 정신이 나갔었거든.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다녔더니 여기로 보냈어. 그나마 내가 고모랑 친해서.”
“……형이, 몇 살이었는데?”
“열아홉.”
“…….”
“자기 방에서 목매서 죽었는데, 내가 발견했어.”
“…….”
재강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너희 아버지도 제정신 아니었다며.”
준원이 낮게 말했다.
재강이 고개를 돌려 준원을 바라봤다.
“너희 엄마가 너 낳고 도망가서.”
“…….”
“그래서 너희 아버지는 술병 나서 죽고, 할아버지가 너 데려다 키운 거라고 들었는데.”
“…….”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이제껏 누구도 이렇게 재강 앞에서 담담한 투로 얘기한 적은 없었다.
“너 혹시 뭐, 죄책감 같은 거 있는 건 아니지?”
“…….”
“근데 그거 네 잘못은 아니잖아. 부모들 잘못이지.”
“…….”
“난 네가 할아버지랑 살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우리 형이 죽고, 내가 고모네 집으로 온 것도. 그래서 너랑 만나게 된 거.”
이런 말 역시, 누구도 재강에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준원이 하는 말은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강은 준원이 김우철과의 일에 관해 거짓말했던 것, 그리고 왼손 사용이 서툰 것처럼 굴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곧장, 별 상관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준원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재강을 가장 세다고 생각하고, 재강의 존재를 다행이라 여기는 준원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 * *
둘은 평범한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준원의 기분에 따라 이상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준원은 갑자기 재강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왜 그러는 거야?”
재강이 용기를 내어 물었을 때 준원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너무 붙어 다니니까 다른 애들이랑은 못 놀잖아.”
그럼 다 같이 놀면 안 되나, 싶었지만 재강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준원은 좋아했지만 재강은 무서워했다.
재강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저 준원이 하는 대로 따랐다. 모른 체하면 혼자 지내고, 돌아오면 별말 없이 어울렸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무력했다.
준원은 별것도 아닌 일에 갑자기 꽂혀 파고들며 사람을 쥐 잡듯 하길 잘했고, 실질적으로 폭력은 가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 일에 재강의 존재는 필수였다.
준원은 가끔 과시하듯 재강을 데리고 다니며, 다른 아이들에게 괜히 시비를 걸었다.
“나보고 예쁘장하다고 했다며?”
어느 점심시간, 준원이 3반의 강진호에게 가 다짜고짜 물었다.
한창 무리 지어 얘기 중이던 진호가 준원과 그 곁에 선 재강을 올려다봤다.
“그랬…… 나? 옛날에…… 근데 욕으로 한 말 아닌데.”
“누가 욕으로 했대? 그냥 묻는 거야.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했다며?”
“……어.”
“왜 뒤에서 남 얘기를 하고 다녀?”
“…….”
진호는 준원과 재강을 번갈아 쳐다보며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 아이들에게서도 긴장감이 맴돌았다.
“응? 왜 뒤에서 남 얘기를 하고 다녀?”
“그냥…… 어쩌다 나온 거야. 미안.”
“미안할 짓을 왜 해?”
“…….”
“미안할 짓을 왜 하냐고.”
“…….”
“왜 말을 안 하지? 귀가 막혔나 보다. 재강아, 뚫어 줄까?”
준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강은 진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동시에 책상에 있던 샤프를 들어 그 귀에 꽂아 넣을 것처럼 홱 휘둘렀다.
“아……!”
진호가 눈을 질끈 감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부들부들 떨던 진호가 눈을 떴다.
샤프의 뾰족한 끝은 진호의 귓구멍 입구 바로 앞에 와 멈춰 있었다.
진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준원이 고개를 까딱하자 재강이 진호의 머리를 놓아주고 샤프를 책상에 던졌다.
“청각은 한 번 망가지면 재생이 안 된대. 귀가 두 개니까 앞으로 우리는 두 번 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거야. 그치.”
준원이 싱글거리며 말한 후 자리를 뜨고, 재강이 그 뒤를 따랐다.
재강은 준원이 대체 저런 협박성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그 충동적인 행동은 뭔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준원이 필요로 하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뭐든지 했다.
준원의 곁에 있으면 정말로 중요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준원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자 준원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
준원은 그렇게 가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짓을 하면서도 늘 인기가 많았다.
평소의 준원은 호기심 많고 웃음도 많고 재밌고 상냥하기 그지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준원에게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당한 적이 있는 아이도 준원을 여전히 좋아했다.
* * *
준원과 재강은 중학교 3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해 또 같은 반이 되었다.
고2 겨울 방학을 앞둔 겨울, 하루 내내 재강을 무시하던 준원이 하교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복도에 누군가와 서 있다 교실을 돌아봤다.
재강은 배낭을 든 채 자리에 앉아 준원을 보고 있었다. 준원이 무시할 때 늘 그랬듯, 사이를 띈 채 뒤를 따라 준원이 집까지 들어가는 걸 보고 집에 갈 참이었다.
“김재강.”
눈이 마주치자 준원이 손을 까딱였다.
재강이 얼른 일어나 그쪽으로 갔다.
준원과 마주 보고 있던 학생이 약간 주눅 든 얼굴로 재강을 바라봤다.
명찰의 색을 보니 같은 2학년이었고 이름은 오진영이었다.
“짖어 봐.”
준원이 진영을 가리키며 재강에게 말했다.
재강은 살짝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영을 봤다가 입을 열었다.
“……멍?”
“진짜 개처럼.”
준원이 다시 진영을 가리켰다. 진영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재강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진영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웍! 웍웍웍! 우웍! 웍! 웍웍!”
복도 창과 재강 사이에 껴 경직된 채 선 진영의 얼굴에 침이 마구 튀었다.
복도를 지나던 아이들이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보다 ‘이준원네 개 또 미쳤나 보네’ 따위를 중얼거리며 멀어졌다.
재강은 눈을 크게 뜨고 살짝 씨근대며 진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진영은 시선을 피한 채 얼마간 그렇게 있다가 준원을 힐끔 보더니 간신히 몸을 빼내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준원은 그 뒷모습을 보며 킥킥대다가 재강을 잡아끌었다.
“가자.”
“누군데?”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길래.”
“……응?”
“쟤 우리 옆 반이야. 우리 반에 친구가 있어서 자주 오는데, 올 때마다 계속 너만 쳐다보더라. 친구는 핑계고, 너 보러 오는 것 같아. 몰랐지?”
준원이 웃으며 재강을 쳐다봤다.
재강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준원을 마주 보다 고개를 돌렸다.
둘은 그대로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 계속 저기 서서 네 쪽만 보는 게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더라고. 가서 김재강 보러 왔냐고 하니까 맞대. 그 전에 우리 개 짖는 거 볼 거냐고 했더니 무슨 말이냐고 해서 너 부른 거야.”
재강이 난간을 잡은 채 스르르 멈춰 섰다.
몇 계단 더 내려간 준원도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재강이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준원은 재강을 바라보며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였다.
“꼭 너한테 고백이라도 할 것처럼 보였단 뜻이야.”
“…….”
“근데 넌 내 거잖아, 김재강.”
“…….”
“너한테 그런 걸 하려면 나를 먼저 거쳐야지.”
“…….”
이해할 수 없는 준원의 행동들, 그리고 그런 준원 때문에 뜬금없는 일을 겪은 진영과 몇몇 학우들, 모두 재강의 머릿속엔 남아 있지도 않았다.
몇 계단 아래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준원의 큰 눈과 그 입에서 나온 말 외에는.
넌 내 거잖아, 김재강.
당연히, 난 네 거지.
재강은 준원을 가만히 마주 보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 * *
둘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인 채 지냈다.
기막힌 우연인가 싶었는데, 준원은 한 번도 그게 신기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재강은 어렴풋이 준원의 부모 측에서 손을 쓴 것인가 생각했다.
준원의 집이 대체 얼마나 부자인지, 부자가 뭘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원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고 재강은 떨어지면서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듯했으나, 준원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나랑 서울에 같이 갈 거지?”
그 한마디에 재강은 바로 짐을 챙겨 할아버지와 살던 아파트를 나왔다.
준원이 서울에 있는 부모 집에 머무는 동안 재강은 고시원에서 지내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성인이 된 준원은 본격적으로 방랑하기 시작했다. 휴학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재강의 고시원 방에 와 머물다 가곤 했다.
나이를 조금 먹었기 때문인지, 주변에 괜히 괴롭힐 학우들이 없어서였는지, 준원은 어쩐지 조금 유해졌다.
재강에게 이상한 짓을 시켜 놓고 키득대던 짓은 이제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잘해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강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준원은 면회 한 번 오지 않았다. 둘은 간신히 통화만 몇 번 했다.
재강은 제대했을 때 준원이 파주 어딘가에서 뭔가를 배우며 처박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재강은 파주에서 집을 알아보다, 그나마 아르바이트 자리가 파주보다는 더 있을 듯 보이는 일산으로 가 옥탑방에 세를 얻었다.
준원은 옥탑방을 꽤 맘에 들어 했다.
어느 순간 둘의 관계는 다시 공고한 패턴을 만들어 냈다.
재강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불면증과 싸우며 준원을 기다리고, 준원은 언제든 이 옥탑방에 돌아오면 재강을 만날 수 있음을 아는 것.
준원은 함께 있을 땐 재강이 복사해 준 옥탑방 현관 열쇠를 사용하다, 갑자기 떠났을 땐 늘 어딘가에 잃어버리고 돌아왔다.
그러면 재강은 열쇠를 새로 복사해 주었다.
재강은 가끔 그 열쇠들이 일본에, 호주에, 한국의 도시 이곳저곳의 거리와 누군가의 방에서 나뒹구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 집어 들었다가도, 어느 문을 여는 열쇠인지 알 수 없으니 무용지물일 것이 뻔해 그냥 버리고 말 그 열쇠들.
재강이 언제든 복사해서 줄 터이니, 준원에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을 그 열쇠들.
언제든 대체 가능한, 그 열쇠들.
재강은 언제부터인가 필사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도 준원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라고.
여전히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미친개’ 같은 존재라고.
* * *
지금 갖고 있는 열쇠도 곧 잃어버리겠지.
재강은 속초에 갈 채비를 하며 마지막으로 본 준원의 나른한 얼굴을 떠올리다, 한참 만에야 요양원의 서늘한 담장에서 몸을 떼고 걸었다.
통화가 그렇게 끝났는데도 준원은 재강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재강의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간 날엔 준원의 고모가 꽃바구니를 보내왔다.
안에는 짧게 안부가 적힌 카드가 꽂혀 있었다.
건너 건너 대부분이 아는 사이인 이 동네에서, 준원의 고모가 이미 재강과 그의 할아버지의 동태에 대해 알고 있을 건 뻔했다.
준원이 고모를 통해 그 정보를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터이나 준원은 찾아오지도 않았다.
집 문제에 관해 집주인과 통화하면서, 상황을 준원에게 알려 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재강도 결국 준원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일주일이 지난 후, 짐을 정리하기 위해 일산에 갔을 때 준원은 그곳에 없었다.
“열쇠는 친구가 한 벌 주고 가긴 했는데, 더 있나?”
옥상에 나와 있던 집주인이 물었다.
재강은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얼른 자기 열쇠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게 다예요.”
준원이 열쇠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게다가 돌려주기까지 하고 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짐은 오늘 뺀다고?”
“네.”
“도배 싹 새로 하고 창문도 갈고 난 다음에 세입자 새로 들여야지, 화장실도…….”
집주인이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동안 재강은 멍하니 평상 위에 설치된 파라솔을 바라봤다.
어차피 큰 물건들은 모두 버리거나 집주인에게 넘기고 갈 생각이라, 속초로 가져갈 짐은 자신의 옷가지 정도가 다였다.
옷장을 열었다가 재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늘 그곳에 있던 준원의 옷들은 거의 사라진 채였다.
준원은 한쪽에 쌓인 그의 갖가지 ‘체험’ 물건이 담긴 상자는 그대로 두고, 옷을 챙겨갔다.
준원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했을 물건인, 옷들.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은 준원과 이렇게나 쉽게 헤어질 수 있었다니.
대신 명선의 옷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강은 파라솔을 바라보던 심정으로 그 옷들을 망연히 보고 있다가 자신의 옷을 챙겼다.
그러다 불현듯 명선의 옷들을 모두 모아 세탁했다.
8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여름옷들은 금세 바삭하게 말랐다.
재강은 폴딩 파라솔을 펼쳐두고 평상에 앉아 명선의 옷들이 바람에 살랑대며 마르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속초에 있을 때보다 명선과의 물리적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재강은 다시금 충동적으로, 잘 마른 명선의 옷들을 곱게 접어 쇼핑백에 차곡차곡 넣었다.
원래는 집주인과 아래층 이웃들에게 주려고 속초의 시장에서 사 왔던 특산품 뭉치에서 몇 가지를 조금 빼 챙기고, 옷이 든 쇼핑백을 든 채 집을 나섰다.
명선이 카운터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없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걸 알면서도, 재강은 실낱같은 희망을 쥔 채 명선 가든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하며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을 때 양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강은 더욱더 힘이 빠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녁 장사가 시작된 때라 직원들은 바빴다.
재강은 짧게 인사하고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양자가 건네는 반찬 보따리를 안은 채 서둘러 가든을 나왔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명선에 관한 얘긴 묻지도 못하고, 옷만 간신히 전했다.
재강은 가든에서 멀어질수록 몸속을 채운 것들이 사르륵, 사르륵, 사라지며, 자신이 텅 빈 종이 인간이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얇고, 견고하지 못하고, 아주 쉽게 구겨지거나 젖어 버릴 수도 있는 종이.
미신적이고 실낱같은 희망이 무색하게, 명선과의 인연은 그냥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그걸 고통스럽게 재확인한 듯했다.
재강은 멍하니 다시 옥탑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끄집어내고 한동안 서 있다가 떠났다.
* * *
속초에 돌아온 재강은 여전히 종이 인간이 된 심정인 채 요양원과 할아버지의 아파트를 오가며 고요히 지냈다.
할아버지 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외에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명선이 떠오르면 그냥 명선에 대해 생각했다.
명선을 향한 그리움을 억누르며, 권명선이라는 사람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다.
그 생김새, 행동거지, 말투, 성격 따위를, 목록을 작성하듯 하나하나 떠올렸다.
쌍꺼풀이 없고, 웃을 땐 입술 양옆으로 보조개가 생기고, 말이 많고, 애정도 많고, 가만히 있다가 문득 ‘싱긋’ 소리를 내는 것처럼 웃고, 화려한 무늬의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든 채 거리를 걷고…….
명선에 관한 목록은 한도 없이 이어지다가 사라지고, 다시 이어지다 사라졌다.
멍하니 서울과 일산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서둘러 핸드폰을 끄는 일도 반복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그 ‘진리’는, 적어도 재강에겐 진리가 아니었다.
명선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쓰라린, 그 통증의 강도는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았다.
꼭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더욱더 짙어지거나.
재강은 종잇장 같은 자신의 몸에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 구멍으로 바람과 먼지가 드나드는 듯했다.
어쩌면, 명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격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준원을 대할 때도 집 지키는 개처럼 굴지 않았던가.
그저 정이 든 사람을 대할 때의 기질이 그 모양이어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지도.
그러나 그에 관해 재강이 손 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늘 그렇듯 견디는 것 외에는.
그리고 그렇게 견디며 재강이 말없이 지켜보던 재강의 할아버지는 요양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어 사망했다.
명선이 나타난 건 장례식 둘째 날이었다.
* * *
명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재강은 헛것을 보았나 생각했다.
급하게 장례식을 진행하고 홀로 상주 자리를 지키며 많이 피곤한 상태이긴 했다.
재강은 눈만 깜박이며, 입구 쪽에 선 명선을 바라보기만 했다.
우뚝 서서 이쪽을 보던 명선이 움직여 다가오자 그제야 현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쟤가? 속초에? 장례식에? 왜?
명선이 가까워지는 동안 재강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재강은 분향소 앞으로 와 선 명선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명선의 표정은 조금 경직돼 보였다.
명선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 머뭇대다가 어쩐지 고장 난 로봇처럼 어색하게 움직이며 헌화를 하고 절도 했다.
눈을 내리깐 명선이 재강의 앞으로 와 고개를 꾸벅했다.
“삼가 고인의 명봉…….”
버벅대던 명선이 찡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어이없게도 웃음이 터질 뻔한 재강 역시 찡그린 채 이를 악물었다.
곧 명선이 눈을 뜨고 작게 목청을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명선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그…… 뭐냐, 우리 식당 대표로 왔어. 명선 가든.”
“…….”
“같이 일했던 사람인데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재강은 애틋한 심정으로 명선을 바라봤다.
너는, 나타나자마자 나를 이렇게 만드는구나.
재강이 손을 내밀자 명선이 얼른 두 손으로 재강의 손을 잡았다.
명선의 손은 따스했지만 땀이 조금 배어나 축축하기도 했다.
둘은 악수도 뭣도 아닌 동작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얼마간 손만 내려다봤다.
얼마 후 재강이 다른 손으로 명선의 손을 감싸 잡았다가 몇 번 토닥였다.
“와 줘서 고마워.”
둘은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재강을 마주 보던 명선은 살짝 웃었다가 눈치를 살피며 얼른 미소를 지웠다. 보조개가 옴폭 패였다가 사라졌다.
재강은 명선의 얼굴을 느릿느릿 훑어봤다.
이것으로 어쩌면, 연꽃 모텔에서의 그 마지막 만남보다는 나은 마지막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라도 되어 다행이라는.
재강은 명선의 익숙한 몸을 꼭 끌어안으며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억누르고 손을 부드럽게 빼냈다.
“밥…… 먹고 가.”
“…….”
재강의 얼굴을 응시하던 명선이 고개를 끄덕이고 느릿느릿 돌아섰다가 다시 재강을 향해 서더니 아까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몇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장례식장 예절을 되새기며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명선은 뒷걸음질을 치다 발이 꼬여 비틀대고 새빨개진 얼굴로 조의금을 상자에 넣고는 간신히 옆방으로 갔다.
재강은 그런 명선을 바라보며 다시 이를 악물고 있어야 했다.
웃음을 참는 재강의 배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보드랍게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명선의 존재감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