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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1. 좋아요 (24/28)

5부-1. 좋아요

음식을 앞에 두고 명선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다음은 뭐지? 그냥 서울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솔직히…… 보자마자 매달리면서 주접떨고 싶긴 했는데, 나름대로는 의젓하게 행동했잖아.

그 정도면 마지막 모습으론 괜찮은 거 아닌가?

그래도 나는, 이대로 헤어지고 싶진 않은데.

명선은 그릇 안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맛은 없지?”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재강이 맞은편에 앉았다.

명선은 퍼뜩 고개를 들고 재강을 바라보다 어색하게 살짝 웃어 보였다.

“아니야. 맛있어.”

“…….”

재강이 가만히 명선을 응시했다.

명선은 재강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재강의 검은 넥타이는 조금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 뒤로 셔츠 맨 윗단추도 풀린 것이 보였다.

명선은 애틋한 마음과 함께 강렬하게 성욕이 치솟는 걸 느끼며 침을 삼켰다.

“그런 옷 입은 건, 처음 보네.”

명선의 말에 재강이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멋있다.”

“…….”

“상황에 안 어울리는 말이긴 하지만, 암튼, 멋있는 건 멋있는 거니까, 뭐.”

재강이 피식 웃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테이블 위를 내려다봤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재강의 말에 명선이 고개를 들어 재강과 눈을 맞췄다.

명선은 입 안을 지그시 깨물며 재강을 바라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준원이 알려 줬어.”

재강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가든에…… 밥 먹으러 왔었거든.”

“…….”

“어쩌다 보니 이준원인 걸 알게 돼서, 너 어디 가면 볼 수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졸랐어.”

“…….”

“뭐, 말이 조른 거지, 실제로는 내가 먼저 개지랄을 좀 떨었던 거지만. 야, 무슨 바텀 기갈 싸움 난 줄 알았다니까. 그런 건 맨날 구경만 했지, 그 한복판에 내가 있을 거라고는 전엔 상상도…….”

장례식장에서 지금 뭔 얘길 하는 거야.

갑자기 자각이 든 명선은 공연히 헛기침하며 말을 멈췄다.

눈치를 살피니 재강은 살짝 찡그린 채 명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입가에 어쩐지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던 미소는 곧 크게 번졌다.

재강이 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수그렸다.

명선은 얼른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밥 먹는 곳에선 웃어도 괜찮은 건가?

아니, 지금 웃는 거야, 우는 거야?

얼굴을 감싸 쥔 재강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숯불 같은 인간이 장례식에서 웃을 리가 없는데.

근데 우는 것도 상상은 안 돼.

그래도 우는 쪽이 더 상황에 맞아 보이긴 하잖아?

달래 줘야 하나?

명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재강이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지긴 했지만 운 것 같진 않았다.

이쪽을 보는 재강의 눈빛이 어쩐지 다정해 보였다.

“한잔할래?”

재강의 목소리 역시, 한없이 다정하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명선은 멍하니 재강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재강이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던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멈칫하고 도로 내려놨다.

“아…… 혹시 차 갖고 왔어? 언제 올라가?”

명선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명선은 입술을 말아 넣어 축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내일까지…… 같이 있어도 돼?”

“…….”

“귀찮게 안 하고 조용히 있을게. 그냥, 주위에.”

“…….”

“혹시 도와줄 게 있을지도 모르고.”

“…….”

재강은 얼마간 명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곧 소주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여는 재강을 보며 명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둘은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고 말없이 들이켰다.

병이 빌 때까지 거푸 그렇게 하고 재강이 새 병을 땄다.

명선은 마음속에서 점점 더 확신이 드는 듯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

매일매일 재강을 보기 위해 왕복할 수 있다는 생각.

그래도 재강이 귀찮아할지 모르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자제해 보겠다는 생각.

꼭 섹스하지 않아도, 그냥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

재강을 보며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생각.

* * *

재강이 상주 자리를 지키는 동안 명선은 근처에 앉아 있다 장례식장 안을 어슬렁거렸다.

괜히 식탁을 정리하며 어정대다 직원들로부터 돕지 않아도 된다는 얘길 듣고 머쓱하게 물러나기도 했다.

그래도 명선은 재강의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려고 애썼다.

혼자 장승처럼 서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걸 보고 있자니 재강이 너무 고독해 보여,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계속 알리고 싶었다.

그게 재강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재강은 그런 명선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밤이 깊어가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노인 몇 외에 더는 조문객이 없는 듯 보이자 재강은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재킷과 넥타이는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다.

같은 차림의 명선이 그 곁에 조금 사이를 띄우고 다가가 슬그머니 앉았다.

둘은 그 자세로 나란히 앉아 있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을 보낸 다음 날, 어쩌다 보니 명선은 발인의 모든 과정을 재강 곁에서 함께 했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 어느새 명선은 재강의 가장 친하고 충실한 동생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지난한 과정이 끝나자 시간은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명선과 재강 둘 다 얼굴은 피곤함으로 퀭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명선이 생각하기도 전에 재강은 명선을 가만히 붙들었다.

“눈이라도 좀 붙이고 가.”

재강과 명선은 비몽사몽인 채 재강의 할아버지 아파트로 왔다.

재강은 들어서자마자 어둑한 아파트 거실 한 가운데에 이불을 펼치고 베개를 두 개 놓았다.

둘은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쓰러지듯 누워 바로 곯아떨어졌다.

* * *

명선이 눈을 뜬 건 한밤중이었다.

식탁 위에 켜진 등 외에 주변은 어두웠고, 그 등 아래에 재강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구깃한 흰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이곳저곳이 곤두서고 눌린 머리.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명선의 얼굴에 사르르 미소가 떠올랐다.

저 모습이 진짜, 보고 싶었는데.

명선은 얼마간 재강을 바라보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아파트는 재강의 옥탑방만큼이나 단출하고 깔끔해 보였다.

알 수 없는 한문이 크게 쓰인 액자와 큼지막한 농협 달력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게 다른 점이랄까.

“여기, 너 어릴 때 살던 아파트야? 네가 어린 시절에 쓰던 물건들도 다 그대로 있고 그런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명선이 입을 열자 재강이 뒤를 돌아봤다.

“나 떠나고 나서 한 번 이사하셨고, 내 물건도 다 버렸어.”

재강은 무심히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이, 추억을 좀 더듬어 볼까 했더니.”

명선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 재강 곁으로 갔다.

식탁엔 반쯤 빈 소주병과 작은 잔이 있었다.

“뭐야, 혼자 마시고.”

명선이 싱크대 쪽으로 가 기웃대다 머그잔을 하나 들고 와 재강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재강이 명선의 잔에 소주를 조금 따라 주고, 명선이 이어 재강의 잔에 따랐다.

“수고 많았어.”

명선이 잔을 들어 올리자 재강이 거기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너도.”

“내가 수고는 무슨.”

“지루했을 텐데.”

“아니야. 새로운 경험이었어.”

둘은 소주를 들이켰다.

“아, 또 안주도 없이 먹네.”

명선이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다 냉장고 앞으로 갔다.

안에는 무언가 들고 꽁꽁 묶인 비닐봉지 뭉치들과 반찬통들이 빼곡했다.

“여긴 그래도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근데 이건 다 뭐야?”

봉지들은 주로 검은색이어서 속에 뭐가 든지 잘 알 수 없었다. 명선은 봉지 몇 개를 꾹꾹 눌러 봤다. 뭔가 물컹거렸다.

“윽.”

“정리해야 되는데……. 먹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거야.”

재강이 잔에 소주를 더 따르며 중얼거렸다.

“오이도 없구만.”

명선은 고개를 젓고 냉장고 문을 닫은 후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둘은 얼마간 말없이 서로의 잔에 번갈아 소주를 따라 주며 마셨다.

“너 일하던 시간대에 숯불 알바 하나 새로 뽑았어. 그 사람은 한…… 마흔다섯쯤 됐을라나?”

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재미는 없어. 나랑은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

“그럼 너 계속 카운터에서 일하는 거야?”

“어, 뭐, 좀 빠지다 며칠 꾸준히 나가긴 했지.”

“다시 한량 짓이나 하는 줄 알았더니.”

“한량 짓도 질리더라고.”

둘은 낮게 피식거렸다.

“잠깐 일산 갔다가…….”

“…….”

“가든에 한번 들렀는데.”

“……알아.”

“…….”

“옷 챙겨 줘서 고마워.”

“그때 없길래, 그만둔 줄 알았어.”

“내가 원래 그랬잖아. 내킬 때만 좀 하다 말고. 엄마 아빠가 사장이니까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알긴 아는구나.”

재강이 소주를 마시고 빈 잔을 식탁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철 좀 들었나 보네.”

잔을 내려다보는 재강은 살짝 미소를 띤 채였다.

명선은 그 옆얼굴을 바라봤다.

“철 좀 들었으면, 다시 나랑 놀아 줄 거야?”

“…….”

재강이 고개를 돌려 명선을 마주 봤다.

명선은 재강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다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재강의 시선이 명선의 입술로 내려가는 순간 명선은 재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소주 냄새와 함께, 그 익숙한 온도와 촉감이 명선의 입술에 맞닿았다.

명선의 떨리는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첫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재강은 입술이 닿는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조금 숙이긴 했지만 피하진 않았다.

얼마간 그대로 있던 명선이 입술을 살짝 벌리자 재강의 입술도 벌어졌다.

명선이 더 가까이 다가붙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둘의 벌어진 입술이 깊숙이 달라붙었다.

재강이 명선의 어깨를 잡았다가 꽉 쥐었다.

명선은 재강의 입술을 다급하게 빨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재강을 잡아먹듯 했다.

코끝에 재강의 코와 뺨이 스치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명선이 재강의 가슴을 움켜잡는 순간 재강이 그 손을 탁 잡았다가 떼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의자가 뒤로 쿵 나동그라졌다.

명선이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재강이 한쪽으로 물러나 벽을 등지고 섰다. 시선은 바닥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재강은 그대로 선 채 손등으로 입을 문질렀다.

“일단 자고…… 내일, 가라. 아침에. 내가 밖에서 잘게.”

“……야.”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

“숯불.”

명선이 눈을 부릅뜨고 재강을 똑바로 쳐다봤다.

머뭇거리던 재강이 눈을 들어 명선을 마주 봤다.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허벅지를 꽉 쥐었다.

“나 일주일에 한 번씩 여기 올 수 있어.”

“…….”

“매일 올 수도 있는데, 네가 귀찮아할 수도 있으니까. 암튼,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너랑 있다 가는 건 일도 아니야.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

“너도…… 이제 이준원도 없고, 가끔 성욕은 생길 거 아냐. 애인도 따로 없는 것 같고. 그러니까…….”

“야, 그만 좀 해, 이 씨발 새끼야.”

재강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재강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쑤셔 넣고 힘겹게 문질렀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당황한 얼굴이던 명선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야…….”

“섹스니 몸이니 그딴 얘기 좀 그만하라고. 나는 이제 그런 거 신경 쓰기도 싫어. 지긋지긋해.”

재강은 몸을 수그린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럼…….”

명선이 입을 열자마자 재강이 홱 고개를 들었다. 눈이 새빨갰다.

“너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그런 것밖에 없어? 또 100퍼센트 타령이나 하는 걸 내가 듣고 있어야 돼?”

“이 씨…….”

명선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럼 무슨 말을 해! 그런 거 아니면 들어 주는 것 같지도 않은데! 너랑 같이 있으려면 섹스하는 것밖에 없는데 어떡하라고! 보고 싶어 죽겠는데 어떡하라는 거야, 도대체!”

명선의 눈에서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졌다.

재강이 멍한 얼굴로 명선을 바라봤다. 재강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와 뺨을 타고 내려갔다.

명선은 헐떡대면서 서럽게 울었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라 감당이 안 됐다.

재강은 젖은 눈을 껌뻑이며 명선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마 후 호흡이 좀 진정된 명선이 얼굴을 양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지금, 몸…….”

재강이 턱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말하는 거 맞아? 내 몸이…….”

“몸은 무슨 몸. 네가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명선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섹스 안 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랑 같이…….”

다시 울컥 눈물이 나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명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다가 겨우 그쳤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만나주면 안 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재강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그래.”

“……언제부터?”

“한참 됐어.”

“…….”

“아니, 좋아한다는 말을 얼마나 더해야 알아먹을 건데, 도대체!”

“뭐? 몸만 좋다고 했잖아, 계속!”

“그건 내 잘못이 맞긴 해도!”

둘은 잔뜩 젖은 얼굴인 채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봤다.

“그래도 너 좋아한다고 했으면 부담스럽다고 같이 안 놀아 줬을 테니까.”

“…….”

“그리고 너는 이준원 섬기느라 정신이 없었잖아, 이 팔불출 새끼야! 말도 없이 도망가더니 내 번호도 차단하고!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냐? 최소한의 의리라도 있어야지, 꽁꽁 숨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럼 어떡하냐, 나도 겁나서 죽겠는데!”

“뭐가 겁나!”

“네가 너무 좋아졌는데 너는 그 씨발, 맨날 몸이 어쩌고…….”

재강이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재강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소리도 없이 굴러떨어졌다.

명선은 젖은 눈을 껌뻑대며 얼마간 재강을 바라보다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옥!”

아까 전 쓰러진 채 놓여 있던 의자에 발이 걸린 명선이 온몸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며 엎어졌다.

놀란 재강이 후다닥 달려왔다.

“괜찮아?”

명선은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다가 무릎을 싸쥐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흐아아씨이발! 아고오오오…….”

“가만있어 봐.”

뒤늦게 꽥꽥대는 명선의 손을 토닥이며 재강이 바짓자락을 걷어 올려 안을 들여다봤다.

누워 있던 명선도 고개를 들어 다리 쪽을 봤다.

아픈 부분은 발갛게 되어 있을 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재강이 그 위를 손으로 살살 쓸었다.

“많이 아파?”

명선은 울상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찜질…….”

“아니, 그보다, 잠깐만.”

일어서려는 재강을 명선이 얼른 붙잡아 앉혔다.

“아후, 씨. 하던 얘기 좀 마저 해봐. 아오, 아파라.”

“찜질 먼저 해.”

“제발. 잠깐만. 가지 말고. 제발.”

명선이 재강의 허리를 안으며 파고들었다.

머뭇거리던 재강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결국 그대로 슬그머니 앉았다.

재강이 명선의 등을 쓰다듬자 명선은 재강의 몸에 더 찰싹 달라붙었다. 무릎과 정강이가 여전히 얼얼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명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강은 한참 말이 없다가 작게 대답했다.

“어.”

“좀 구체적으로 말해 봐. 조금만 더 길게.”

재강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 미적대다 입을 열었다.

“너는 그냥 내 몸만 밝히는데 나 혼자 다른 감정이 생겨 버려서, 그때부터 힘들어졌어.”

“언제부터?”

“……잘 모르겠다. 나도 꽤 된 것 같은데.”

“근데 너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땐 그냥 무시했잖아.”

“진지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고, 너도 취기에 그런 거라고 얘기했으니까, 뭐.”

“취했다고 둘러댄 거야. 난 말해 놓고 얼마나 떨렸는데.”

명선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입을 쥐어뜯었다.

“으이구, 이놈의 입, 진짜. 도움이 안 돼. 인간이 진지하질 못 해가지고.”

재강이 찡그린 채 웃으며 명선의 손과 입술을 어루만졌다.

명선은 재강의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틀어 재강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정하고 친숙하게 보였던 그 얼굴은, 재강이 정말로 자신에게 다정하고 친숙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저절로 나온 것이었던가 싶었다.

재강도 명선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다리 괜찮아?”

“괜찮아.”

둘은 얼마간 서로를 바라봤다.

갑자기 재강이 킥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웃어.”

“아까 넘어질 때…….”

재강은 말을 잇지 못하고 끅끅대며 웃기 시작했다.

“야, 나 아직 아프다구.”

재강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 공감 능력이 없냐? 남의 고통이 웃겨?”

재강은 웃다가 결국 드러누웠다.

명선은 위아래로 들썩대는 재강의 배에 달라붙은 채 그 웃는 얼굴을 바라봤다.

겨우 진정이 된 재강이 눈물을 닦으며 숨을 골랐다.

젖은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던 재강이 스르르 미소 지었다.

“너랑 있으면 자꾸 웃게 돼.”

재강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명선은 재강의 배에 뺨을 붙이고 누웠다. 따스하고 단단한 배가 명선의 얼굴을 받친 채 호흡에 맞춰 느릿느릿 움직였다.

“네가 좋아질수록 네 옆에 있는 게 더 힘들어졌어. 네가 떠나면, 원이가 떠났을 때보다 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

“차라리 그 전에 내가 먼저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왜 떠나. 기를 쓰고 너랑 붙어 있으려고 했던 건 내 쪽이었는데.”

“살이 찌거나 빠져서 내 몸이 변하면 당연히 떠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명선이 재강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근데 솔직히 몸만 좋아한다는 걸 계속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너도 문제가 있어. 한 번 정도는 확인차 물어볼 수도 있었던 거 아니냐?”

“네가 항상 내 몸이 좋은 거라고 강조했으니까.”

“…….”

“착각할 뻔한 적이 몇 번 있긴 했는데, 하도 변태 같고 이상한 놈이어서 그냥 정말 그런 취향이 있나 보다 했지.”

“……내 입이 또 잘못했네.”

재강이 낮게 웃으며 명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명선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염없이 그리워했던 손길이었다.

이준원에게 저렇게 해주는 거겠지, 싶어 질투가 일면서도 너무나 좋았던 그 다정한 손길.

얘를 향한 감정이 어떤 건지 알아차렸을 때 그냥 평소 성격대로 돌진했더라면 더 좋았을까?

그럼 이렇게 서로 삽질하는 시간도 없었을 거고.

근데 그땐 뭐라도 잘못될까 봐 엄청 겁이 났었어. 그나마 같이 있는 시간이라도 사라지게 될까 봐.

와, 그래도…… 삽질이 진짜 길었다.

둘이 뭐 한 거야, 대체.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가는가 싶더니 재강이 몸을 일으켜 명선을 눕히며 위로 올라왔다.

명선의 얼굴 위로 재강이 만든 그늘이 드리워졌다. 명선은 갑작스레 두근대는 심정으로 재강을 올려다봤다.

재강은 눈만 움직여 명선의 얼굴을 천천히, 구석구석 훑었다.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명선이 속삭여 물었다.

재강은 쑥스러운 표정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너 많이 좋아해.”

“…….”

“너도 이렇게 말로 해줘.”

“…….”

“숯불, 말로 해봐. 너 목소리도 좋잖아.”

불안하게 떠돌던 재강의 눈동자가 옆쪽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좋아해.”

명선이 머리를 움직여 그쪽으로 갔다.

“내 눈 보고 얘기해야지. 뭘 좋아하는지도 얘기하고.”

“…….”

“그냥 좋아한다고만 하면 소주를 좋아한다는 건지, 오이를 좋아한다는 건지, 내 팬티를 좋아한다는 건지 정확히 알 수가 없잖아.”

재강이 다시 명선과 눈을 맞췄다.

“네 팬티가 여기서 왜 나와?”

“너 내 작스트랩 좋아했잖아.”

“…….”

“암튼 확실히 말을 하라고.”

“너를 좋아해. 너를.”

“흐흥.”

명선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나 오늘 네 옆에서 자도 되는 거지?”

명선이 묻자 재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강이 명선의 뺨을 살짝 감쌌다가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어루만졌다. 명선의 보조개가 있는 곳이었다.

재강은 바로 고개를 수그려 명선의 입술에 키스했다.

명선은 눈을 감고 재강의 목을 끌어안았다.

둘은 느릿느릿 서로의 입술을 정성 들여 빨았다. 얼마간 그러다 재강이 입술을 살짝 떼자 명선이 눈을 떴다.

재강은 명선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들여다보다 입술 옆에, 뺨에, 턱에 차례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명선은 갑자기 울컥 울음이 나와 목을 꿀럭댔다.

“뭐야, 왜?”

놀란 재강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명선은 재강을 얼른 붙잡고 꽉 끌어안았다.

“아니, 그냥,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너는 더럽게 외로웠을 거고, 나는 나대로 힘들고, 우리 대체 뭐 한 거야…….”

“…….”

재강은 말없이 명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사람이 왜 이렇게 독해, 씨, 적어도 차단 정도는 풀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눈물이 명선의 관자놀이와 귀를 적시며 줄줄 흘러내렸다.

재강이 그 젖은 부분을 손끝으로 가만히 문질렀다.

“물론 문자에도 몸 좋아한다는 얘기만 잔뜩 쓴 것 같긴 하지만, 암튼, 그게 꼭 내 잘못이기만 한 건 아니잖아. 너는 이준원한테 정신이 나가 있고, 독한 인간인데 대책 없이 순정남이기까지 해가지고. 짜증 나게.”

“……원이를 좋아했던 게 잘못이라고?”

“큰 잘못이야. 대신 그 순정 나한테도 바쳐 주면 용서는 해준다.”

“그게 너한테 용서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

“그럼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 내가 여기까지 와서 들러붙지 않았으면 결국엔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따로 떨어져서 외롭게 살았을 거 아냐.”

“…….”

“생각해 보니까 내 공이 진짜 커. 엄청나게 커.”

명선은 코맹맹이 소리로 나불거렸다.

재강은 한동안 말없이 명선의 젖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래. 고맙다.”

“뭐가 고맙다고?”

“아, 새끼 정말…….”

재강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이렇게 끝까지…… 질척대 줘서.”

“대단하지? 내가 최고지? 이제 질척댄다고 싫어하지 않을 거지?”

재강이 쿡 웃었다.

“그때도 싫어한 건 아니야.”

“아, 정말?”

“거슬리고 좀 짜증 날 때가 있긴 했지만.”

“그게 싫은 거지 뭐야.”

“난 너 싫어한 적 없어.”

말하는 것 좀 봐, 숯불, 이 귀엽고 착한 놈!

명선은 행복감에 몸서리치며 재강을 다시 꽉꽉 거듭해 안았다.

“너 코 좀 풀어라. 안 되겠다.”

몸을 떼고 일어나려는 재강에게 명선은 계속 달라붙었다.

“코는 그냥 먹으면 돼. 가지 마. 우린 계속 안고 있어야 돼. 이제 떨어지면 안 된다구우우.”

재강은 말도 없이 명선과 실랑이를 벌이다 간신히 떼어놓고 식탁 위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와 내밀었다.

명선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인 채 앉아 코를 풀었다.

“냉정한 건 그대로네. 좀 달라지나 했더니.”

재강은 툴툴대는 명선의 앞에 앉아 있다가 명선의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원이가 너랑 있을 때의 나를 보면 정말 다르다고 할 거야.”

“이준원의 감상 따위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뭐, 나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뜻이긴 하니까 받아들여 주겠어.”

재강은 잠시 명선이 코를 마저 풀고 닦는 모습을 지켜봤다.

“준원이랑…… 무슨 얘기 했냐?”

“말했잖아, 기갈 싸움 났었다고. 그 인간이 보통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

“아니지. 그땐 네가 걜 훨씬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뭘 하든 결국엔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알고 보니까 아닌 거잖아. 그럼 내가 이긴 거네. 뭘 하든 내가 승자였어.”

명선은 허공을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놀라긴 했는데, 키는 확실히 나보다 작고 몸도 내가 더 좋은 것 같았어. 섹스도 내가 더 잘하는 것도 맞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얼굴 나보다 잘생긴 건 인정하긴 해도, 그래도 어쨌든 너는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이긴 거야. 내가 승자라고. 야, 근데 너 혹시 얼빠야? 걔 얼굴 때문에 좋아한 거야?”

“꼭 얼굴 때문은 아니야.”

“하긴, 네가 얼빠였으면 처음에 나를 보자마자 반했을 거야. 얼빠인 사람이 나한테 안 반할 리가 없어.”

“넌 말이 많아지는 게 문제야.”

“좋으면서 그런다.”

명선이 재강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들이밀었다.

둘은 마주 앉은 채 서로의 얼굴을 감싸 잡고서 부드럽게 키스했다.

“발인 날에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이상하다.”

입술을 뗀 재강이 작게 말했다.

“옷도 거기서 입던 거 그대로 입고 있는데.”

“음…… 너희 할아버지가 대노하시려나?”

“그건 모르겠지만, 돌아가실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났는데 너 때문에 질질 짠 건 좀 죄송스럽네.”

“아니야. 할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우리 외로운 순정파 손자가 드디어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되었구나, 호우호우호우. 기특한 녀어서억. 그 섹시하고 귀여운 친구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거라.’”

명선은 과장된 노인의 목소리를 지어내 떠들었다.

재강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명선을 바라봤다.

“목소리 안 그랬거든.”

“뵌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그러게 진작에 나한테 고백을 하고 여기 같이 와서 인사도 드리고 했으면 좋았잖아. 너희 할아버지도 날 좋아하셨을걸?”

입을 다문 재강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재강은 찡그린 채, 조금 웃는 듯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강의 눈가와 코가 금세 붉어졌다.

명선은 얼른 재강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재강도 명선의 허리를 꼭 안았다.

* * *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오늘은 정말 꼭 안고 잠만 자는 거야.”

명선이 재강의 옆구리 쪽에 바싹 붙어 누우며 말했다.

“알았어.”

재강이 자신의 가슴에 올라와 있는 명선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여기 와 있는 동안 잠자는 건 어땠어? 여기서도 잘 못 잤어?”

“그냥 그랬어.”

“나랑 있으니까 잘 잘 수 있겠네.”

“그래.”

재강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명선의 몸을 안았다. 명선은 재강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 그럼, 여기 있는 동안 계속 병간호만 한 거야?”

“그런 셈이지.”

“힘들었겠다.”

“힘들긴.”

“속초 왔는데 바다는 가 봤어?”

“아니.”

“헐.”

명선이 재강의 등을 문질렀다.

“우리 숯불, 쉬지도 못하고.”

“아, 너 휴가는 다녀왔어?”

“휴가?”

“같이 가기로 했다가 일이 좀, 그렇게 됐잖아.”

“아…….”

“그…… 97 친구랑 같이 간 거야?”

명선이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 얘길 했었구나, 참. 그거 뻥이었는데.”

“……뭐?”

“97퍼센트 만나서 밤새 떡 치고 놀았다는 거 다 뻥이라고.”

민망해진 명선이 재강의 가슴에 더 파고들었다.

“무슨…… 왜 그런 뻥을 쳐?”

“일단 질투로 제정신도 아니었고, 네가 이준원이랑 노는 동안 나도 같이 놀 사람 있으니까 질척댈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티 내려고 했던 거야. 당당한 모습 보여 주려고.”

“당당……? 근데 너 계속 질척댔잖아.”

“뭐, 나도 사람인데 마냥 완벽하기만 할 순 없잖아?”

“…….”

명선이 갑자기 재강의 등을 철썩 때렸다.

“내 뻥보다 네가 더 나빠. 말도 없이 속초 가더니 차단을 하질 않나, 독해 빠진 새끼.”

“말했잖아, 나도 겁이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다짜고짜 눈 뽑는다고 협박도 하는 인간이 겁은 왜 내.”

“어째 얘기가 또 빙빙 도는 것 같다.”

“그러게.”

둘은 말없이 있다가 서로의 몸을 보듬어 안았다.

“암튼, 휴가는 안 갔어. 예약했던 것도 다 취소하고.”

“……미안.”

“아니야. 너랑 같이 가는 게 아니었으면 어차피 의미도 없었을 거고. 지금이라도 같이 있게 돼서 난 너무 좋아.”

명선이 재강의 가슴에 입을 맞추자 재강은 말없이 명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편할 것 같은 자세인데도 재강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명선은 꿈을 꾸는 기분인 채, 꿈이라면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채 재강의 숨소리를 기분 좋게 듣다 뒤이어 잠들었다.

* * *

명선이 잠에서 깬 건 새벽녘이었다. 푸르스름한 빛 속에서 재강의 입술이 느껴졌다.

재강은 명선의 한쪽 뺨을 감싸 잡은 채 입술에 가볍게 촉, 촉,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재강의 뜨거운 숨이 명선의 입과 코 주위를 뒤덮었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으음…….”

영문도 모르고 눈만 끔뻑대던 명선은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재강의 목덜미를 잡고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둘의 입술이 뭉개지듯 맞닿았다. 젖은 입술과 혀가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짤깍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명선이 재강을 눕히며 몸 위로 올라갔다.

둘 다 몸이 벌써 후끈해져 있었다.

재강의 티셔츠 안으로 명선이 손을 집어넣은 순간 재강이 그 손을 탁 잡았다.

“나 살…….”

“…….”

“살도 좀 빠지고, 근육도 아마…….”

“상관없다니까, 바보야.”

명선이 재강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이리저리 문질렀다.

“그런 거 이제 정말 상관없어.”

“…….”

“나한텐 너만 있으면 돼.”

“…….”

재강이 머뭇머뭇 명선의 손을 놓아주었다.

명선은 재강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배와 가슴을 어루만졌다.

재강의 피부는 뜨겁고 팽팽했다.

살이랑 근육 빠진 게 이 정도라니, 겸손한 놈 같으니라구.

으, 너무 좋다.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어쨌든 좋은 건 좋은 거지.

명선의 손길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재강의 티셔츠를 목까지 걷어 올린 명선이 맨가슴에 얼굴을 파묻자 재강이 몸을 들썩였다.

가슴을 쪽쪽 빠는 명선의 머리를 꽉 붙잡고 있던 재강이 곧 그대로 몸을 돌려 명선을 눕히면서 위로 올라왔다.

재강은 명선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목과 귀, 뺨에 수없이 입을 맞췄다.

명선은 눈을 꼭 감고 숨만 헐떡헐떡 몰아쉬며 재강의 등을 헤집었다.

명선이 두 다리로 재강의 허리를 감싸자 재강은 성기를 맞대고 세게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명선은 덜컥덜컥 흔들리며 작게 신음했다. 입가를 더듬는 재강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붙이고 물어뜯듯 빨아댔다.

흥분감과 함께 행복감이 가득 차올라서 몸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인생에서 벌어진 일 중에 가장 멋진 일인 것 같다고, 명선은 거듭 생각했다.

* * *

잠에서 깬 명선의 눈에 들어온 건 재강의 베개였다.

가운데가 살짝 움푹하고 조금 딱딱한 원통 모양의 ‘시골’ 베개.

명선은 눈을 끔뻑이며 베개를 바라보다 손으로 꾹 눌러 봤다.

할아버지가 쓰던 베개겠지? 메밀 같은 거 들었나?

그러다 명선은 문득 귀를 기울였다. 사방은 조용했고 닫힌 방문 밖에선 아무 기척도 없었다.

명선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은 속옷만 입은 채였고 이불 주변은 깨끗했다.

어제 싸고…… 휴지로 대충 닦고 다 던져 놓고 잤던 것 같은데.

명선은 속옷 밴드에 말라붙은 작은 정액 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일어섰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거실 창 앞에 앉은 재강이 보였다.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의 재강은 책상다리를 하고 약간 구부정하게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채였다.

아침엔 늘 그렇듯, 머리카락은 비죽비죽 솟거나 눌린 채였다.

명선은 문틀을 붙잡고 서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저 모습이 왜 이렇게 좋지?

아침에 잠에서 깬 직후의 저 모습.

문득 가슴 속에서 뜨거운 사랑이 퐁퐁 샘솟는 듯했다.

명선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버럭 외치며 재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숯불!”

“씨벌, 깜짝이야.”

명선의 팔 안에 포박당하듯 갇힌 재강은 흠칫하면서도 명선을 밀어내진 않았다.

“왜 혼자 나와 있어, 잠든 날 지켜보지 않고.”

명선이 재강의 머리와 귀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벼댔다.

재강은 살짝 찡그린 채 명선의 손을 토닥였다.

“자는 사람을 뭐 하러 지켜봐.”

“지켜보다 눈 마주치면 바로 아침 인사를 하는 거지.”

“아침 인사는 무슨.”

“굿모닝. 알러뷰.”

“…….”

명선은 두 다리로도 재강의 몸을 포박했다.

재강은 시선을 창밖에 그대로 둔 채 말없이 명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숯불, 굿모닝. 알러뷰.”

명선이 재강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참고로 굿모닝은 아침 인사고, 알러뷰는 사랑한다는 뜻이야.”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어, 혹시 못 알아들어서 답이 없나 하고.”

“……너도 굿모닝 하든지.”

“하긴,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듣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걸 강요할 수는 없지.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도망쳐서 번호를 차단한 전력이 있기까지 하잖아? 그런 걸 따져보면 사실 나는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하긴 한 걸까 좀 의문을 품게 되는…….”

“아휴, 좀 닥쳐, 좀. 사랑하니까 좀 닥쳐.”

명선이 키득대며 재강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목을 한쪽으로 빼며 명선에게서 떨어진 재강은 머뭇대다 눈만 돌려 명선을 쳐다봤다.

명선은 필살기 미소를 띤 채 재강을 똑바로 봤다.

곧 재강의 표정이, 무언가 사르르 녹듯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재강은 명선의 입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눈을 맞췄다.

“……사랑한다고.”

명선은 문득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걸 느꼈다. 눈과 코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재강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울어?”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명선이 훌쩍이며 방글방글 웃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뭐가 들어갔냐면, 네 사랑이 들어갔지.”

명선은 재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렵게 어렵게 얻어내서 그런가, 사랑이 어찌나 매콤한지.”

“……매웠구나.”

재강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리며 명선의 팔을 쓰다듬었다.

“넌 어때? 내 사랑은 달콤하지? 싸구려 단맛 말고 고급스러운 단맛 있잖아. 진짜 제대로 잘 만든 비싼 초콜릿 먹었을 때처럼.”

“…….”

“아니면, 달고 약간 상큼한 그런 건가? 달콤 상큼? 아니, 달콤 새콤? 과일 셔벗 같은 거. 네가 그런 걸 즐겨 먹을 것 같진 않지만. 아니, 먹어는 봤어? 시골 쥐야, 너 셔벗 먹어 봤니?”

재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랑은 너무 시끄러워.”

“좋으면서.”

명선은 재강의 몸을 터뜨릴 것처럼 꽉 안았다가 풀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지? 너 내 애인 할래, 남친 할래?”

재강이 눈을 끔뻑대며 명선을 멍하니 쳐다봤다.

“…….”

“하나 골라. 애인이야, 남친이야?”

“애인…… 뭐? 차이가 뭔데?”

“없어. 근데 뭘 하든 어쨌든 나랑 사귀는 거야.”

“근데 왜 고르래?”

“의미 없어. 원래 연인 사이에선 의미 없는 말이 대화의 구십 퍼센트 이상이야. 그냥 헛소리하면서 꽁냥대고 노는 거라고.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재강이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넌 많이 해봐서 잘 알겠구나.”

흡.

명선이 입을 꾹 다물고 찡그렸다.

연애 경험이야 명선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찝찝한 명선의 표정을 보고 재강이 묻는 얼굴을 했다.

명선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 사실…….”

“…….”

“연애 한 번도 안 해봤어.”

“……응?”

“열 번 넘게 했다고 했던 거, 그거 다 거짓말이야.”

“…….”

“같이 잔 사람은 많은데 연애는 해본 적 없어. 관심도 없었고.”

눈만 깜박이던 재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또?”

명선이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 난 왜 자꾸 이런 뻥을 치냐.”

“…….”

“연애 너무 많이 해보고 질려서 너한테는 그런 감정 없다는 거 드러내려고 그런 것도 있고, 그렇게 인기 많은 인간이란 걸 어필하려는 마음도 있었고…… 존나 유치한데 암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

“근데 어쨌든, 살면서 내가 그런 감정 가진 건 네가 처음이야. 누구랑 사귀고 싶다는 마음.”

재강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내가 두 번째겠지? 계속 이준원의 애인이 되고 싶었을 거 아냐. 둘이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다고 했고.”

“……준원이에 대한 감정이랑 너에 대한 감정은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너는…….”

재강이 생각하는 동안 명선은 그 얼굴을 살펴보다가 관자놀이에 촉, 촉,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명선의 입술이 재강의 눈가와 광대뼈 위를 천천히 오르내렸다.

“너랑은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걸 아니까.”

“하긴, 이준원한테는 네가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지.”

재강이 살짝 웃었다.

“솔직히 나는 걔한테 별로 해준 것도 없어. 일방적으로 준 건 걔 쪽이지.”

“뭘 줬는데?”

“상실감이나…… 외로움 같은 거.”

“오…… 은근히 시적인데, 숯불.”

명선이 키득대며 재강의 머리 옆에 이마를 가만히 갖다 댔다.

“근데 지금 끝까지 이준원 편드는 거 알지. 네가 이준원한테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집도 주고 돈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음…….”

“탈탈 뜯어 먹힌 건 인정을 좀 하시지?”

“……모르겠다.”

“암튼 순정파들은 이게 문제야.”

“…….”

“나는 너 안 뜯어먹을 거니까 걱정 마. 근데 나 이제부터 여기 살아도 돼?”

가만히 있던 재강이 머리를 떼고 명선을 쳐다봤다.

“뭐라고?”

명선이 배시시 웃었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

“…….”

재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다 명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가끔 수줍어하는 거 알아? 존나 웃겨.”

재강이 명선을 외면하며 팔을 뜯어냈다.

“뭘 수줍어해?”

“얼굴 살짝 빨개지면서 눈알 떨리는 거. 지금 내 말 듣고 심장 떨렸지?”

명선은 재강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재강은 결국 떼어내길 포기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됐어. 집도 내놨고, 어차피.”

“어? 이 집 내놨다고? 왜? 이사 가는 거야? 어디로?”

“정한 건 아닌데…… 더 남쪽으로 내려갈까 생각하고 있었어.”

“남쪽에 뭐가 있는데? 친척?”

재강은 무릎을 내려다보며 조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지만 그냥,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살려고 했지.”

“속초에서 멀리?”

“……너한테서.”

“뭐! 왜!”

명선의 비명에 재강이 찡그리고 귀를 문질렀다.

“빨리 잊고 혼자 살려고 했던 거야. 멀리 있으면 마주칠 일도 거의 없을 거고.”

명선이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슬픈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잖아. 네가 나를 떠나면 원이 때보다 더 힘들 것 같아서 겁이 났다고.”

“…….”

“아예 혼자 지내면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이준원, 이 사악한 새끼야.

네가 뭔 짓을 한 건지 좀 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잘난 얼굴 쳐들고서 돌아다니고 있겠지.

벼락 맞아 죽는 것까진 아니어도 그 여파로 대머리 정도는 되길 기원한다, 이 개새끼야.

넌 죽어서 불지옥을 면치 못할 거야.

명선은 재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재강이 고개를 들어 명선과 눈을 맞췄다.

“솔직히 지금도 겁이 안 나는 건 아니야. 사귀는 사이가 돼도 언젠가는 헤어질 수 있는 거고, 한쪽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

“근데 결국 마음이 변하고 떠나는 쪽은 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명선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가 재강을 와락 안으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아, 씨!”

재강은 명선에게 꽉 안긴 채 명선이 구르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숯불, 숯불.”

“아 왜 이래?”

“방금 넌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한 거야.”

“뭔 개소리야?”

“변하는 건 나일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넌 절대 안 변할 자신감으로 만땅이라는 거지.”

“…….”

명선은 구르기를 멈추고 잠시 멍한 재강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다시 거실 바닥을 굴렀다.

“아, 놓으라고!”

“그 맹세 잊지 마라. 네 완벽한 좆에 대고 맹세 안 깨겠다는 맹세를 해.”

재강이 명선의 팔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그럼 너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거야? 네 마음은 변할 거라고? 근데 어쨌든 떠나는 쪽은 너니까 별로 상관은 없다고?”

명선은 바닥에 엎드린 채 재강을 쳐다봤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네가 될지 내가 될지 아니면 둘이 합의하에 좋게 헤어질지, 아무것도 몰라.”

“…….”

“근데 나는 그런 걱정 안 하고, 지금 너랑 같이 있고 싶어.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재강은 명선을 마주 보다 자신의 무릎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명선이 슬그머니 재강의 허벅지를 베고 누우며 그 시야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나도 겁나는 건 마찬가지야.”

“…….”

“도망가서 번호 차단까지 한 거 보고 진짜 독한 놈이란 걸 알게 되니까 더 그래. 너 같은 사람이 마음 변하면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겠지.”

“…….”

“그리고 이 정도로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든 사람이 없었어. 정말로.”

“…….”

재강이 명선의 이마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명선은 그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뜨고 재강을 바라봤다.

“그래도 결국엔 이렇게 만났잖아. 안 그래?”

“……그래.”

“내 덕으로.”

“…….”

“그 모진 수모를 다 참아내면서 여기까지 꿋꿋이 달려온 이 몸이 아니었으면, 너 지금쯤 저기 어디 남쪽 바닷가 내려가서 혼자 술이나 푸면서 살고 있겠지. 안주도 없이. 그러다 알콜 중독 오고, 고독사했을지도 모르는 거야.”

“…….”

“고맙지?”

재강이 명선의 머리카락을 북북 쓸어내려 다시 이마를 덮었다.

“말이 너무 많아.”

“좋으면서, 왜에에.”

재강은 명선의 얼굴을 짓누르고 명선은 그 손을 치우려 하며 둘은 얼마간 투닥대고 키득거렸다.

결국 재강이 명선의 몸 위로 올라와 엎드리고, 둘은 마주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럼 같이 남쪽으로?”

명선이 묻자 재강이 피식 웃었다.

“서울 쥐새끼가 지방에서 어떻게 살려고.”

“나는 적응력 강한 쥐새끼라 괜찮아.”

“일단 서울 가 있어. 나는 여기서 처리할 것들도 있고…… 너희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내가 일곱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뭔 걱정을 해.”

“하도 일곱 살 먹은 애처럼 굴어서 헷갈렸네.”

“그래 놓고 박았다는 건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말을 말자.”

재강이 명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숯불. 나는 너랑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어. 서울에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쪽으로 갈게. 어차피 너랑 떨어져 있으려고 남쪽 생각했던 거고.”

“어, 그럼 서울 와서 사는 거야?”

“서울이나 경기도…….”

“서울로 와!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

“뭐?”

명선이 벌떡 일어나며 재강을 앉히고 그 앞에 앉았다.

“우리 집에 남는 방도 있고, 엄마 아빠한텐 내가 얘기할게. 너 집 구할 때까지 잠깐만 있을 거라고. 그러다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거지.”

“말이…… 되는 소릴 해. 뭐야?”

“말이 왜 안 돼? 엄마 아빠도 너 좋아하잖아.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맨날 칭찬하고.”

재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명선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집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라.”

“아잉, 숯부우울.”

재강은 명선에게 와락 안기며 나자빠졌다.

“저리 안 가?”

“숯불, 제발. 제발 나랑 같이 살아. 너랑 같이 살고 싶어.”

명선이 재강의 얼굴에 머리를 이리저리 비벼댔다.

“아니, 그러니까 일단 집을 구한다고.”

명선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같이 살긴 한다는 뜻이야?”

“뭐…… 괜찮은 데 구하면…… 근데…….”

“근데가 왜 나와. 근데가 왜 필요해. 같이 살면 사는 거지. 그 옥탑방에서도 같이 잘 지냈는데.”

“…….”

“나는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어.”

재강은 미간에 살짝 힘을 준 채 명선을 바라보다가, 그 머리를 끌어다 안았다.

명선은 재강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의 어깨를 안으며 달라붙었다.

재강은 명선의 등과 머리를 만지작대며 한참 있다 작게 말했다.

“……네가 왜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어.”

“왜냐니. 좋으니까 그런 거지. 좋으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거 아니야?”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좋은데 이유가 어딨어.”

“…….”

“넌 내가 왜 좋은데?”

“좋은데 이유가 어딨냐며.”

“넌 왠지 따로 생각해둔 게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러지.”

재강은 또 한참 동안 명선을 만지작대기만 했다.

“그냥 좋아.”

재강의 말에 명선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뺨이 닿은 가슴에서 재강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쿠궁, 쿠궁, 하고 진동했다.

둘은 말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안고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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