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3. 증명해 봐요
옆으로 돌아눕던 명선은 뒤에서 안아오는 재강의 기척에 살짝 잠이 깼다. 방 안은 새벽의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강은 나른하면서도 강한 팔로 명선의 몸을 꼭 끌어다 안고 목덜미에 코와 입을 문질렀다.
“음…….”
명선은 배를 휘감은 재강의 팔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등과 엉덩이에는 재강의 몸이 바싹 와 닿아 있었다. 재강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 명선의 몸 전체를 감싸는 듯했다.
너는 섹시한 쌈 채소. 나는 행복한 삼겹살.
나를 꼭꼭 감싸고 여며라. 쌈 싸 먹어라.
명선은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 떠올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재강도 그대로 잠이 드는 듯했다.
명선은 재강이 몸을 다시 고쳐 안는 바람에 깼다. 방 안은 어느새 환해져 있었다.
명선이 재강의 팔뚝을 쓰다듬자 재강은 명선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잠이 잔뜩 묻은 소리를 작게 냈다.
“명선아…….”
그 작은 소리 끝에 웅얼대는 말에 명선이 스르르 눈을 떴다.
“……너무 사랑해.”
재강은 나른하고 조금은 몽롱한 목소리로, 명선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이듯 했다.
명선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명선은 눈앞의 벽을 바라보며 얼마간 느릿느릿 눈만 깜박였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네.
그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크게 다가오며 수줍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짝사랑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을 아는 체하며 이름을 불러 주는 상황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재강이 자신을 ‘야’라거나 ‘가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아무 불만도, 별생각조차도 없었는데, 막상 그의 목소리로 ‘명선아’하고 부르는 소릴 듣고 나니 가슴이 설렜다.
몸이 점차 점차 가벼워지며, 공중으로 조금씩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온몸이 투명해지고 맑아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렇게 투명하고 맑은 존재가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재강의 몸에 착지해 구석구석 스며드는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어딜 가든 무얼 하든 함께 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명선이 조심스레 재강의 팔을 풀어내면서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재강을 마주 보고 누워 자신을 안도록 만든 후 그 얼굴을 가까이서 응시했다.
찡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인 재강은 명선이 하는 대로 팔을 움직이며 여전히 비몽사몽이었다.
내 이름이 이렇게 예뻤나?
딱히 좋아한 적도 없고, 가든 간판에 붙어 있는 걸 볼 땐 짜증 나기까지 했던 이름인데.
얘가 불러주니까 왜 이렇게 좋지?
꼭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특별한 이름인 것 같잖아.
명선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재강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 찡그린 미간을 살살 문질러 폈다. 미간이 평평해지고 곧 재강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명선이 활짝 웃었다.
재강은 눈을 껌뻑대다가 배시시 웃으며 낮게 흐흥대는 소리를 냈다.
“김재강.”
명선이 속삭였다.
“……응?”
“이제부턴 네 이름 부를래.”
“내 이름?”
“김재강.”
“아.”
재강은 잠이 덜 깨 멍한 얼굴이었다.
“내 이름 다시 불러 봐. 아까처럼.”
“……권명선?”
“아깐 다르게 불렀잖아.”
“아.”
“정신 좀 차려 봐요, 아저씨.”
재강이 피시식 웃었다가 명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명선아.”
“어, 재강아.”
“……어색한데.”
“이젠 우리 좀 바뀔 때도 됐어. 네가 숯불 알바 그만둔 지가 언젠데.”
“음…….”
“아니면 형이라고 부르는 게 나아? 형아? 형님? 브라더? 그것도 아니면 이준원처럼 ‘강이’?”
“됐어.”
재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생각에 잠겨 있던 명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따라 할 게 없어서 이준원을 따라 하냐. 이제 와서 갑자기 형이라고 하는 것도 뜬금없고. 나는 내 스타일대로 그냥 네 이름 부를게.”
“그래.”
“재강아, 나 좀 불러 봐. 재강아.”
“명선아.”
“그래, 재강아. 잘 잤니? 재강아. 너도 내 이름 부르면서 답해.”
“야, 작작 좀 해.”
“우리 재강이가 저혈압이라 아침에 까칠한 거지?”
“좀 닥쳐, 권명선.”
재강이 명선을 눕히며 위로 올라왔다. 명선은 곧장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가 재강의 몸을 결박했다.
재강은 명선의 가슴과 어깨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아까 네가 잠결에 내 이름을 부르는데, 막 짜릿짜릿한 거야.”
명선이 재강의 등을 이리저리 쓸며 낮게 말했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서 더 좋았고.”
명선의 피부도, 재강의 입술도 금세 뜨거워졌다. 그 입술이 목으로 올라오자 명선은 턱을 살짝 쳐들고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내 이름이 좋아졌어, 아하아…….”
재강이 목 옆을 한껏 물고 빨자 명선이 어깨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재강은 그렇게 조금씩 물고 빨아들이길 반복하며 명선의 귀 쪽으로 올라와 귓불을 깊게 빨았다.
명선이 두 다리로 재강의 몸을 힘껏 조였다. 아래에선 이미 바짝 선 둘의 성기가 찰싹 붙은 채 비벼지고 있었다.
“아, 김재강…….”
명선은 재강에게 귀를 빨리며 헐떡였다.
“나도 너를, 너무 사랑해.”
재강은 말없이 씨근대며 명선의 뺨을 쪽, 쪽, 빨아들이면서 입술 쪽으로 와 바로 깊게 키스했다.
명선은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기분인 채 재강의 짧은 머리카락을 꽉 쥐고 그와 거칠게 혀를 뒤섞었다.
* * *
섹스 후 둘은 팔다리를 이리저리 겹친 채 널브러져 숨을 골랐다.
곧 재강이 일어나자 명선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어디 가. 우리 재강이 어디 가.”
“화장실 가잖아.”
“재강아, 빨리 와야 돼. 김재강. 알았지?”
“아으, 저 새끼…….”
재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명선은 킬킬대다가 벨 소리가 울리자 침대 구석에 처박혀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차주 맞으시죠? 여기 차 좀 빼 주세요.
“아, 네. 갑니다.”
전화를 끊고 명선은 핸드폰을 재강의 베개 쪽으로 던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으, 귀찮아.”
재강이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명선이 고개만 살짝 들고 말했다.
“차 빼 달래.”
재강은 시큰둥한 얼굴인 채 침대 쪽으로 왔다.
“가서 빼, 그럼.”
“네가 빼 줘.”
“네 차잖아.”
“너는 일어났잖아. 나는 아직 누워 있고. 합리적으로 행동하자, 합리적으로.”
“이게 뭐가 합리적이야, 씨벌.”
재강은 툴툴대면서도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명선은 누운 채 뒹굴뒹굴하며 미소 지었다.
“갔다 와, 재강아. 빨리 와야 돼.”
“으.”
재강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차키를 챙기며 밖으로 나갔다.
명선은 얼마간 천장을 바라보며 그대로 누워 있다 하품을 쩍 하고 침대 위쪽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씨.”
재강의 핸드폰이었다.
둘이 같은 기종인 것도 아닌데 재강은 실수로 명선의 핸드폰을 가져간 모양이었다.
“이 아저씨 정신 못 차리고.”
명선이 중얼대며 잠금 화면을 풀었다. 인터넷을 이리저리 떠돌다 음악을 튼 명선은 다시 벌렁 누워서 천장을 보다, 둘의 메시지 대화창을 열고 타이핑했다.
김재강
[야이폰도둑놈아]
[내폰 내놔라 엉엉]
권명선
[야 넌 무슨 차를 족같은데다 대놨어]
명선이 킥킥 웃었다.
김재강
[어머 족같다니요 도둑놈이 말도 험하게 하네 교양없이]
권명선
[앞뒤로 꽉꽉 막혀있잖아]
[원래 대던 데 놔두고 왜 갑자기 일로 왔냐고]
김재강
[누가 거기 토해놔서 잠깐 근처에 댓네]
[도둑놈 승질머리하고는]
[차 뺐어? 오는 중이야?]
권명선
[지금 다른 차도 빼야돼서 차주 기다리는 중이야]
[왜이렇게 안나와]
김재강
[수고가 많넹]
공연히 키득대던 명선은 갑자기 화면 위로 문자가 떠오르자 멈칫했다.
[강아 나 금요일에 미국가는데 그 전에 잠깐 볼래? 마지막 인사로]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이준원임을 바로 알 수 있는 문자였다.
명선은 멍하니 그 문자를 보고 있다가 입을 다물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번에 가면 몇 년은 거기 있을 거야. 아예 안 들어올지도 모르고]
[작별인사나 하자. 생각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명선은 무언가에 머리를 쾅쾅 얻어맞는 기분인 채로 핸드폰 화면만 노려봤다.
더 이상 문자가 도착하지 않고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명선은 핸드폰을 침대에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지울까.
그치. 지워야지.
명선은 핸드폰 위로 손을 뻗었다가 홱 거두고 주먹을 쥐어 입에 댔다.
그대로 앉아 무릎을 달달 떨어대던 명선은 문득 고개를 돌리고 현관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재강이 돌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아, 씨…….”
명선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가 세게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뭐야, 이준원, 도대체!
갈 거면 그냥 곱게 가지, 무슨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앉았냐고!
지가 아직도 우리 재강이한테 되게 특별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씨발, 대머리 새끼! 곧 대머리가 될 새끼!
아니, 진짜 웃기는 새끼 아냐,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 놓고 죄책감도 하나 없이 지 미국 간다고 인사하러 나오래?
어디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네가 나오라고 하면 우리 재강이가 나가야 돼? 너랑 작별 인사하러?
네가 뭔데? 어? 너 따위가 감히 우리 재강이한테, 어?
싸가지도 없고 예의도 없는 새끼.
명선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대다가 다시 핸드폰 위로 손을 뻗고 곧장 그 손을 거뒀다.
바로 지워 버리면 그만일 것을, 끝내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지 모를 것이 명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명선은 손가락을 잘근대며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이걸 내가 아니라 재강이가 본 거였으면 걘 어떻게 했을까.
나한테 숨겼으려나?
그리고 몰래 만나러 나가서, 마지막으로 섹스도 한 판 거하게 하고?
그러고 나선 미국에 간 이준원이랑 장거리 바람을 피우려나?
진짜? 김재강 같은 사람이? 나를 두고 바람을? 설마.
……아니야. 이준원이잖아. 김재강의 교주였던 이준원이라고.
사람 정신을 또 어떻게 홀릴지 모르는 거야. 몇 년을 그런 식으로 갖고 놀아왔는데.
그럼 내가 지금 문자 다 지워 버리고 번호도 아예 차단해 놓으면 되는 거 아니야?
김재강은 이준원이 미국에 갔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나랑 평화롭게 사는 거지.
그렇지.
……그렇긴 한데.
“으으.”
명선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 후 아무것도 모르는 재강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절대로 편할 리가 없다는 건 자명했다.
그 ‘편치 않을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 이준원 존나 싫어…….”
명선이 몸서리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좆같이 굴고 이제부터 착하게 살면 되지 않으려나?
나 원래 좆같은 인간이었잖아. 역겹다는 말도 들었고. 그런 내가 갑자기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 됐겠냐구.
맞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냥 나답게! 당당하게! 자신 있게! 문자 지워 버리고! 번호 차단하고! 쌩까는 거야! 그게 권명선이지!
“…….”
명선은 손을 쓸어내려 턱을 감싸 쥐고 재강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한참 동안 미동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다 계단을 오르는 재강의 발소리가 들리자 명선은 눈을 감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명선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재강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안 명선은 느릿느릿 돌아앉아 방문 쪽을 봤다.
재강은 얼마간 현관 바닥에 이리저리 널린 신발과 신발장을 정리하는 데 열중했다.
우리 재강이는 참 성실해.
명선은 재강의 움직임을 세세히 지켜봤다.
관계에 대해서도 정말 성실할 거야.
명선의 머릿속에 자꾸만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아니라, 네가 이 문자를 본 거였다면.
넌 어떻게 했을까?
“재강이, 차 잘 뺐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명선은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넌 아직도 벗고 있냐.”
재강이 침대로 다가와 명선을 안았다. 명선은 재강의 배에 귀를 대고 그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일부러 그런 거야. 네가 내 벗은 몸을 좋아하니까.”
재강은 낮게 웃으며 명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싸움 나서 말리다 오느라 늦었다.”
“뭔 싸움?”
“아, 그 늦게 온 차주. 가뜩이나 늦게 나타나서는 아침에 깨웠다고 구시렁대잖아. 차 빼 달랬던 사람 빡치고 갑자기 분위기 험악해지고.”
“잘 해결됐어?”
“어.”
“비둘기 같은 우리 재강이가 평화를 지켰네.”
재강이 킥킥 웃더니 명선의 얼굴을 감싸 쥐고 몸을 수그렸다.
재강은 명선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았다. 명선이 재강의 목을 끌어안고 뒤로 드러눕자 재강은 명선의 몸 양옆으로 무릎을 하나씩 대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침대에 누운 명선의 어깨 밑에 재강의 핸드폰이 깔렸다. 차갑고 딱딱한 그 감촉이, 마치 명선의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는 듯했다.
얼굴을 감싸 쥔 재강의 손은 따스하고 아늑했다. 몸 위로 엎드린 재강의 체온도 그랬다.
명선이 눈을 뜨고 재강에게서 입술을 뗐다.
“문자 왔어.”
재강이 눈만 돌려 명선의 어깨 밑에 깔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다시 명선과 눈을 맞췄다.
“나한테?”
“응. 아까 너 나가 있는 동안에.”
“알았어.”
명선은 다시 키스하려는 재강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중요한 문자 같던데.”
“…….”
재강이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명선도 일어나 앉았다.
재강은 명선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 핸드폰을 켰다.
재강이 문자를 읽는 동안 명선은 재강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눈썹이 살짝 들렸다 내려가고 미세하게 꿈틀거린 것 외에 재강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흥분감이 명선의 가슴 속에서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곧 재강이 눈을 들어 명선을 마주 봤다. 명선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재강이 한참 있다 먼저 입을 열었다.
“너도 본 거지?”
명선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재강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번호를…… 바꿀 걸 그랬나 봐. 미안하다.”
“…….”
“안 만날 거야.”
“…….”
“걱정…… 혹시 걱정했으면, 안 해도 돼.”
“가서 만나.”
재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명선은 조금 구겨진 그 미간과 재강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뭐?”
“가서 만나라고.”
“…….”
“만나서 작별 인사해.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보지 말자는 얘기도 하고.”
“…….”
“도망갈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럴 때마다 가슴에 얼마나 큰 구멍이 뚫렸는지, 피가 얼마나 바짝바짝 말랐는지도 다 얘기해.”
명선이 가운뎃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를 뾰족하게 세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인중 한 번 정확하게 가격해 줘도 좋고.”
“…….”
재강은 멍한 얼굴인 채 그 손을 봤다가 다시 명선을 봤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 얘기하고 오라고. 지금 네가 걔랑 같이 있지 않아서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지도 얘기해. 내가 행복하게 해줘서 행복하다고도 하고.”
“…….”
“나는 네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재강은 한참 동안 말없이 명선을 바라보다, 명선의 허벅지에서 내려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명선은 그런 재강을 가만히 응시했다.
늘어놓은 말은 모두 진심이었지만, 명선은 끝내 그 아래 깊은 곳에 넓고 거대하게 깔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가서 모두 다 그렇게 쏟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돌아와.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해 봐.
이준원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나한테든 너 자신한테든 증명해 보라고.
전혀 어려울 게 없잖아.
너는 이제 잠결에도 내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는데.
명선이 스르르 몸을 기울여 재강의 세운 무릎 위에 턱을 살짝 걸쳤다.
재강과 명선의 눈이 마주쳤다.
“근데 너 나랑 있어서 행복한 게 맞긴 한 거지?”
재강은 가볍게 찡그리며 피식 웃더니 명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런 말을 평소에 자진해서 해주질 않으니까 난 잘 모르지.”
“보채지 마라.”
“가서 이준원이랑 작별 인사해.”
“…….”
“금요일에 간댔지? 오늘 벌써 화요일인데, 빨리 연락해 봐야겠네.”
재강은 명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잠시 머뭇댔다.
“이거 혹시…… 테스트 같은 거야?”
“테스트?”
“이렇게 가라고 막 떠민 다음에 정말 간다고 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갑자기 화를 낸다거나…….”
명선이 킥 웃었다.
“어디서 또 본 건 있네. 야, 나는 그 정도로 졸렬하고 음습한 인간은 아니야.”
정말 아닐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는 이게 네가 이준원과의 관계를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네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
명선이 재강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앉았다.
“김재강. 갈 거지?”
“……모르겠어.”
“…….”
“생각해 볼게.”
명선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기울이자 재강은 명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서 다 말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와.
아니, 가지 마. 넌 흔들리게 될 거야.
가서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해.
아니, 가면 안 돼.
가서 이준원을 말로 완전히 조져 버려.
아니, 가지 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에 혼란을 느끼며 명선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집에 돌아온 명선은 잠시 현관에 그대로 서서 텅 빈 집안을 바라봤다.
들어올 때 저절로 켜진 등이 꺼질 때까지 서 있다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 개의 방과 욕실을 차례로 들여다보며 불을 켜고, 괜히 냉장고도 열었다 닫았다.
그러다 소파에 털썩 앉아 텔레비전을 켠 명선은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재강이 준원을 만나러 가는 날에 맞춰 명선도 친구들을 만났는데, 내내 어수선한 마음인 채로 겉돌기만 하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거의 재강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고 내내 쿨한 척했으면서,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속에선 재강이 굳건하게 준원을 내치고 돌아올 거란 마음과 결국 준원에게 돌아갈 거란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이었다.
명선은 핸드폰을 꺼내 재강과의 대화창을 다시 열어 봤다.
써니
[도착했어?]
재강
[어]
[기다리는 중이야]
써니
[야 설레지 마라 ㅋㅋ]
재강
[설레진 않고]
[그냥 좀 이상하다 기분이]
써니
[독해질 준비하고]
[인중을 찍어 인중]
[가운데 손가락 마디 세워서]
재강
[넌 지금 어디야?]
써니
[밥먹으러 이동하는 중]
[애들이랑]
재강
[뭐 먹어?]
써니
[마라탕 먹을거야]
재강
[마라탕이 뭐지?]
써니
[중국음식이야]
[나중에 언제 같이 먹자]
재강
[그래]
그 후로 친구들이 말을 거는 바람에 명선은 문자를 더 보내지 못했고,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명선은 그 대화를 계속해서 훑어보다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 대화가…… 마지막이 돼 버리면 어떡하지?
이준원한테 설득당해서 같이 미국 가버리면?
얘 여권은 있나? 비자는? 그냥 막 그렇게 가버릴 수는 없잖아?
근데 속초 갔을 때 진짜 독하게 나 차단했던 놈인데?
그런 놈이 또 독하게 뭔 짓을 못 하겠어?
명선이 이마를 철썩 때렸다가 짚고 눈을 부라렸다.
뭔 짓을 한 거야, 권명선! 야, 이 정신 나간 놈아!
왜! 왜 그랬어, 왜! 무슨 자신감으로!
증명하긴 뭘 증명해! 그런 걸 왜 증명해! 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아으으…….”
명선은 얼굴을 싸쥔 채 소파에 쓰러져 누워 신음했다.
준원을 향해 몇 년간 이어져 온, 재강의 사랑인지 충성인지 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그 감정을 이렇게 쉽게 지워 버리기란 절대 불가능하단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준원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면 더더욱 그에게 말려들기 쉬울 터였다.
그걸…… 내가 판을 깔아 줬네.
아주 대놓고 이준원한테 가서 또 그렇게 살라고 떠민 꼴이 돼 버렸네.
내가 왜 그랬지…….
명선은 소파 위에서 축 늘어진 채 눈만 끔뻑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소파 팔걸이에 재강의 티셔츠가 걸쳐져 있었다.
명선은 그 티셔츠를 끌어다 코 가까이 댔다. 명선 자신의 냄새, 둘이 함께 사는 집의 냄새가 섞인 재강의 냄새가 났다.
돌아와, 김재강.
제발.
내가 잘못했어.
명선은 티셔츠 뭉치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크렸다.
명선의 저주대로 대머리가 된, 그래도 여전히 충격적으로 잘생긴 이준원과 그 곁에서 울적하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강이 함께 미국 어딘가의 수영장 딸린 저택에서 노년을 보내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상상 속 저택은 밝고 아름다웠으나,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으니 명선이 몰래 가서 재강을 훔쳐볼 수도 없을 터였다.
그 상상 속의 나이 든 명선은 재강과의 마지막 문자만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며 쓸쓸하게 살고 있었다.
지독한 후회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