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부. 재강 (27/28)

5부. 재강

[강아 나 금요일에 미국가는데 그 전에 잠깐 볼래? 마지막 인사로]

[이번에 가면 몇 년은 거기 있을 거야. 아예 안 들어올지도 모르고]

[그냥 작별인사나 하자. 생각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오랜만이네]

[그럼 내일 낮에 시간 괜찮아?]

[저녁때로 하자]

[같이 저녁 먹어]

[먹고 싶은 거 있어?]

[혜화동 식당에서 볼까?]

[8시]

[그래]

* * *

재강은 혜화동에 있는 밥집에 먼저 도착해 구석 자리에 앉았다. 저녁 시간이지만 다행히 두 자리 정도는 비어 있었다.

준원은 평범한 한식 메뉴를 파는 이 식당을 꽤 좋아해서, 서울에 올 때마다 꼭 들르곤 했다.

재강은 컵에 물을 따라 한 번에 마시고 다시 물을 따라 절반쯤 마셨다.

컵을 만지작대며 앉아 있다가 명선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명선은 친구들과 ‘마라탕’이라는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재강은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었다.

어차피 명선이 언젠가는 자신을 데려가 먹일 것이고, 지금 딱히 궁금한 것도 아니었으나 재강은 공연히 인터넷에 ‘마라탕’을 검색해 사진을 봤다.

얼핏 짬뽕처럼 보이는 음식이었다.

재강은 새빨간 국물이 가득한 사진들을 멍하니 넘기며 한쪽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사실 마라탕 사진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준원과는 거의 세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속초로 갑자기 가야 했던 밤에 본 게 마지막이었고, 요양원 앞에서 한 통화 후엔 아예 교류도 없었다.

그런 준원에게서 갑자기 날아든 문자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문자를 지우고 번호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선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재강은 명선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생각도 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준원에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와 ‘정말로’ 헤어지기 위해서는.

식당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여닫히자 재강이 고개를 들었다.

실내를 휘 둘러보던 준원이 재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재강은 가까워지는 준원을 응시하며 물컵을 지그시 잡았다 놓았다.

“언제 왔어?”

준원이 재강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좀 전에.”

“이거 두 개요.”

준원은 재강에게 묻지도 않고 곁으로 지나가던 서버에게 주문했다.

둘은 여기 오면 늘 같은 걸 먹었다. 준원이 좋아해서 항상 먹는 메뉴가 있었고, 재강은 그와 같은 걸 먹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속초 떴다며?”

“어.”

“그럼 이제 어디 살아? 일산으로 다시 왔어?”

“……서울에.”

준원이 턱을 괸 채 재강을 가만히 바라봤다.

재강은 준원의 눈을 마주 보다가 컵 안으로 시선을 내렸다.

머뭇거리던 재강이 준원의 앞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 주자 준원이 반쯤 마셨다.

곧 둘의 앞에 음식이 놓였다.

재강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가 그 손을 테이블 모서리에 걸치고 준원을 바라봤다.

준원은 무심히 밥을 먹고 있었다.

재강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애인이 생겼어.”

재강은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재강의 말에 준원이 눈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음식을 씹던 준원의 턱이 조금씩 느려지다 멈췄다.

“혹시 그 카운터?”

“…….”

준원이 피식 웃었다.

“나 걔 만난 적 있는데.”

“…….”

“걔가 너한테도 얘기했지? 우리 만난 거.”

“……어.”

“뭐라고 얘기했어?”

“식당에 밥…… 먹으러 왔었다고.”

“흠.”

준원이 찌개 국물을 퍼서 후후 불다가 조심스럽게 후룩 먹었다.

“아…… 미국 가면 이거 먹고 싶어서 어떡하지.”

“친구 일하던 곳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그랬다며.”

“어.”

재강이 밥그릇을 내려다보다 눈을 들어 준원을 봤다.

“정말?”

“어.”

“왜?”

“왜긴. 그 정도는 궁금해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준원이 킥킥 웃었다.

재강은 준원이 떠나 있을 때마다 하염없이 화면을 문질러대며 바라보던 지도 속 풍경들을 떠올렸다.

도시와 도로, 건물, 나무들.

나중에는 모두 다 비슷한 장소로 보이게 되어버린 그 풍경들.

당연하지만, 지도 속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준원.

재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허벅지 위에 두 손을 내려놨다.

“내가 속초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지, 넌.”

“응.”

“그런데 속초가 아니라 왜 거기로 갔어?”

“말했잖아. 네가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궁금했다고. 마침 근처 지나던 길이었고.”

“넌 내가…….”

“…….”

“보고 싶긴 했어?”

준원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떠올랐다.

“넌?”

재강은 준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난 보고 싶었어.”

사실이었다.

그런 식으로 길들여졌다 해도, 그저 버릇이 되었다 해도, 그 감정을 부인할 순 없었다.

“나랑 같이 미국 갈래?”

준원의 말에 재강은 곧장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같이 가자, 김재강.”

“…….”

“간다고 하면 준비는 내가 다 도와줄게. 넌 몸만 와.”

재강의 미간이 서서히 찡그려졌다.

“내가…… 애인 있다고 얘기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재강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짝 댔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상관이 없다고?”

“헤어지면 되잖아.”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넌 내 거니까.”

갑자기 분노가 거세게 치밀어 올라 재강은 이를 악물었다가 고개를 수그리고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허벅지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강이 그러는 동안 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곧 재강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다.

준원은 그 큼직한 눈을 가볍게 깜박이며 재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준원.”

“응.”

“너 정말, 미국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하려고 연락한 거야?”

“겸사겸사.”

“겸사겸사?”

“내 소식도 알리고, 네 소식도 듣고, 미국에 가는 얘기도 하고.”

재강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니까, 낚시 같은 걸 한 거네.”

“갈 거지?”

“넌 내가 걔랑 같이 있어서 행복한지 같은 건 묻지도 않는구나.”

준원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행복하겠지.”

“……뭐?”

“잠깐 봤지만 걔가 너를 꽤 아끼고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너한테 잘해 주겠지. 너는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거고.”

“…….”

“근데 재강아, 그런 행복이 얼마나 가겠어. 연애란 게 그렇잖아. 언젠간 식어.”

“…….”

“근데 너랑 나는, 식는다는 거랑은 거리가 멀지.”

“아이고, 뭔 좆같은 소리세요. 분위기가 짜게 식는다, 식어.”

갑자기 명선이 이런 상황에서 던질 법한 말이 떠올라 재강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재강은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폭소가 나오려는 걸 애써 진정시켰다.

아주 이상한 순간이었다.

교리처럼 따라왔던 준원의 논리가 명선의 관점에선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어떻게 그것을 비웃으며 가볍게 넘길 수 있는지, 그리고 명선의 그 관점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재강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깨닫게 되는, 이상하고도 놀라운 순간이었다.

재강은 이 시각 서울 어딘가에 있을 명선을 떠올렸다. 짬뽕같이 생긴, 마라탕이란 음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조잘대고 있을 터였다.

철저히 무시당했으면서도 재강을 보기 위해 속초까지 꿋꿋이 내려왔던, 그리고 재강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함께 다양한 것을 접하고 싶어 하는 명선.

준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명선.

집에 돌아가면 명선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재강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는 듯했다.

곧 재강이 고개를 들고 준원을 마주 봤다.

새삼, 준원이 정말 조각같이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준원은 재강에게 조각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소통할 수 없고, 온기도 느낄 수 없는 존재.

재강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걜 정말 좋아해. 걔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

“너 때문에 헤어지는 건 더더욱.”

“…….”

“누굴 이 정도로 좋아해 본 적도 없고, 걔랑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아. 물론 그게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몰라. 근데, 언젠가 감정이 다 식어서 헤어진다고 해도, 그건 내 사정이지, 안 그러냐? 나는 적어도…….”

재강은 말을 끊고 마른 침을 삼켰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적어도 널 기다리면서 개처럼 집이나 지키고 사느니, 그렇게 평범한 관계를 맺고 끊으면서 사람처럼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

말간 눈으로 재강을 바라보던 준원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개 같다고 느꼈어?”

“…….”

“‘이준원의 미친개’가?”

“그땐 너도 나도 어렸어.”

“그때랑 비교해서 뭔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한텐 안 보이겠지만 난 그렇게 느껴.”

“너 나 원망해?”

재강은 입을 다물었다.

둘은 잠시 서로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재강이 먼저 입을 뗐다.

“이제는 안 해.”

준원이 한쪽 눈썹을 살짝 추어올렸다 내렸다.

재강은 작은 도시의 유명한 박물관을 둘러보고 떠나는 듯한 기분으로, 준원의 얼굴을 구석구석 훑어봤다.

그곳의 명물인, 아름다운 조각상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듯.

곧 준원이 재강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강아. 나 정말 가.”

준원은 중대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낮게 말했다.

“다신 안 올지도 몰라.”

“…….”

재강은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준원은 재강의 눈을 들여다보다 다시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댔다.

“나도 너 보고 싶었어. 당연하잖아. 네 생각하다가 네가 어떤 곳에서 일했는지 궁금해져서 아는 곳은 다 찾아가 보기도 했고.”

“…….”

“너 할아버지 돌보다 보니까 피곤해져서, 홧김에 그런 전화한 거잖아. 그래서 난 네가 마음 고쳐먹고 돌아올 시간을 준 거야. 지금도 기회를 주고 있는 거고.”

재강은 표정 없이 준원을 마주 보기만 했다.

“내가 떠나 있는 게 그렇게 싫었어?”

“…….”

“안 떠나고 너랑 계속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면?”

재강이 살짝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원아, 네가 하는 약속은 이제 아무 힘이 없어.”

“…….”

준원의 얼굴 위로 어쩐지 난생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나 먼저 갈게.”

재강이 일어서자 재강의 얼굴에 붙박여 있던 준원의 시선이 따라 올라왔다.

“잘 지내, 이준원.”

준원은 재강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를 붙잡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재강은 카운터에 가 음식값을 내고 곧장 식당을 나왔다.

준원이 미국에 간다고 했던 게 사실이긴 했을까, 하는 질문이 문득 떠올랐지만, 뭐가 됐든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재강의 인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