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버스는 막힘 없이 달려 금세 가평에 도착했다. 리조트에 도착한 직원들은 각자 키를 배부받은 다음 짐을 풀러 흩어졌다. 대부분 직원은 2층에서 5층을 배정받았는데 이지운만 서태천과 같은 6층이었다.
그래도 객실이 다르니까 아무 상관없다. 난 만족스러워.
이지운은 서태천과 함께 6층까지 다이렉트로 운행하는 VIP 엘리베이터를 탔다.
“뭘 그렇게 가득 싸 왔습니까?”
서태천이 이지운의 터질 듯한 캐리어를 보며 물었다.
“맛있는 거요. 참고로 안 나눠 드려요.”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서태천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실제로 캐리어의 상당 부분을 초콜릿 쿠키가 채우고 있었는데, 이지운은 이 맛있는 걸 서태천에게 나눠 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6층 도착을 알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문밖으로 걸어 나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살겠구만.”
이지운은 침대에 몸을 던진 다음 온몸을 쭉쭉 스트레칭했다. 불편한 짝꿍과 옆자리에 앉아서 오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어깨와 뒷목이 다 결렸다.
“단 거나 먹고 기분 풀어야지.”
이지운이 침대에서 내려와 캐리어를 열고 옷더미 사이를 헤집었다. 쿠키를 꺼낸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바삭, 한입을 베어 무는 순간이었다. 쿠키 옆에 마땅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할 흰 통이 보이지 않았다.
“어…?”
설마 안 챙겼을 리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이지운은 당황이 가득한 손길로 짐가방 안을 마구 뒤졌다. 가방을 탈탈 털어 내용물을 다 끄집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페로몬 억제제 통은 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열성 오메가인 그는 페로몬 조절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성들이야 히트 사이클도 꼬박꼬박 규칙적으로 오고, 긴급 상황에서도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다지만 열성들은 그런 조절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아… 어떡하지. 오메가 페로몬 억제제 가져온 사람 아무도 없을 텐데.”
그가 알기로는 오늘 워크숍에 참석한 인원 중에 오메가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또한 형질인용 억제제는 주치의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급하게 약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한 마디로 쌩으로 밤을 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에이…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자.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 나겠어?”
성인이 되고 나서 단 한 번도 약을 빼먹은 적이 없었기에, 사실 이지운은 억제제를 먹지 않으면 자기 몸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몰랐다. 그래도 생각건대 내리 약을 성실히 복용한 몸이 하루 건너뛴다고 별일 생기겠나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잊어버리고 재밌게 놀자.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는 고민해 봤자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잊기로 하고, 편안한 셔츠에 여름 슬랙스 차림을 한 채로 밖으로 나갔다.
***
세미나실에 모인 직원들 앞에 종이 책자가 한 묶음씩 놓였다.
“성격 유형 테스트를 할 건데요. 시중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정밀하고 정확한 테스트 기법으로 만든 문항들이에요.”
강사가 이번 시간은 자신의 성격을 짚으면서도 나는 어떤 동료와 궁합이 잘 맞는지 알아보는 시간이라고 커리큘럼을 설명했다.
“오. 재미있겠어요.”
“그렇지? 이걸로 성격 궁합도 알 수 있다니까 신기하네. 너랑 나랑 잘 맞는다고 나오지 않을까?”
이지운의 옆에 앉은 기현진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네. 아마 대리님하고 저하고는 환상의 궁합일 것 같아요.”
이지운이 생각하기에 이 회사에서 가장 쿵짝이 잘 맞는 사람은 기현진이니, 당연히 성격 유형 궁합도 잘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조합은? 당연히 BBG다.
이지운은 가장 앞자리에 앉아 강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서태천을 보며 눈을 흘겼다.
“자. 그러면 앞에 놓인 답안지를 꼼꼼하게 작성하세요. A, B, C, D, 네 분야에 셀프로 점수를 매기시고요.”
강사의 설명에 따라 직원들과 서태천, 이지운이 성격 유형 점검을 마쳤다. 차곡차곡 강사 앞으로 답안지가 모여들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제출한 답안 카드를 읽다가 눈을 반짝 떴다.
“어머. 굉장히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네요. 이 반에 궁합 99%짜리 조합이 계세요.”
“정말요? 신기해라.”
“누군가요?”
직원들이 놀라워했다. 이지운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두 분은 같이 무슨 일을 해도 다 잘 해낼 분들입니다. 막말로 도둑질을 해도 손발이 쿵짝쿵짝 맞고 말을 하지 않아도 텔레파시가 통한다고나 할까요? 같이 프로젝트를 하면 대박이 터질 것 같은데요.”
강사는 연신 신기해하며 두 장의 답안 카드를 뽑았다. 직원들의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누군지 알려 드릴게요. 한 분은 바로 이지운 주임님이고요!”
“저, 저요?”
뜻하지 않게 불린 제 이름에 이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나랑 환상의 궁합을 이룰 사람이 과연 누구지? 기 대리님일까?
“짝꿍은 바로 서태천 본부장님이세요.”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지운과 서태천이 정색했다.
“네. 두 분이 찰떡궁합이에요. A, B, C, D 요소 모두 완벽하게 상호작용을 이루는 성향으로 드러나셨거든요.”
말도 안 돼. 이지운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서태천도 상당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버스에서도 같이 앉더니 성격 유형도 환상의 파트너시네. 하하!”
박 부장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지운은 입가에 억지 미소를 띠면서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지운이 아련하게 웃으며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성격 분석 클래스는 막을 내렸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각 팀끼리 모의 경영 게임을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이지운이 속한 마케팅1팀은 전략을 잘못 세워 대패했고, 벌칙으로 저녁 바비큐 준비를 맡게 되었다.
“아… 고기도 구워야 하고, 상추도 씻어야 하고 미치겠네.”
물론 리조트에 딸린 식당이 있어 얼마든지 재료는 제공해 주었지만,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반찬을 세팅하는 모든 일은 마케팅 1팀이 직접 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이지운은 채소 씻기에 당첨되었다. 그는 리조트 정원 뒤편에 있는 수돗가에서 물을 틀어 놓고 소쿠리에 가득 담긴 상추를 씻었다.
“60인분 상추를 씻다니,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허리를 애매하게 구부리고 물을 다 튀겨 가며 상추를 꼼꼼하게 씻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누굴 탓할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씻어서 6시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근처에서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태천이 멀뚱히 서 있었다.
“지금 구박하러 오신 거예요?”
“능률이 안 나는 직원이 있다면 기꺼이 모진 말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서태천은 수돗가로 다가와 이지운과 나란히 섰다. 이지운은 손사래를 치며 그가 더 가까이 못 다가오도록 했다.
“물 다 튀는데 뭐 하세요.”
“능률 부족한 직원한테 지원 좀 해 주려고요.”
“네?”
“내가 깻잎이랑 고추 할게요.”
“절 도와주신다고요?”
“돕다니요. 이지운 주임 때문에 늦어서 다른 직원들이 밥 못 먹을까 봐 그렇습니다.”
서태천이 수돗물에 깻잎을 촤르륵 씻더니 탈탈, 물기를 털었다. 엄청나게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어라? 깻잎 잘 씻으시네요.”
“깻잎만 잘 씻나. 고추는 더 잘 씻지.”
서태천은 중구난방으로 담겨 있는 고추를 일렬로 세운 다음 시원하게 물세례를 날렸다. 순식간에 깻잎과 고추를 씻어낸 그가 상추에까지 손을 뻗었다. 단 5분 만에 모든 일을 클리어한 그는 이지운의 품에 소쿠리를 안겨 주고는 말없이 떠났다.
“뭐야. 이런 재주가 있는지는 또 몰랐네.”
이지운은 헛웃음을 지으며 바비큐장으로 향했다.
바비큐 파티는 흥겨움과 웃음소리가 넘쳐흘렀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술도 한 잔씩 주고받고, 간부들을 피해 주임과 대리끼리 뭉치니 재미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이지운은 소맥을 연속으로 세 잔 말아먹고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그만 마셔야 하는 거 아니야?”
기현진이 이지운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아니야. 저 더 마실 수 있어요.”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은데. 괜찮겠어?”
“괜찮다니까요.”
이지운은 헤실헤실 웃으며 기현진과 마주 봤다. 기현진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대리님 왜 귀가 빨개요?”
“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술 먹자!”
이지운이 다시 한번 소맥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동료들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님!”
서태천이 이지운의 바로 등 뒤에 와 있었다.
“딸꾹!”
이지운은 딸꾹질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주임님 많이 취하신 것 같군요.”
“안 취했습니다.”
“음… 제가 보기에는 취한 것 같아요.”
“아니라니까요. 저 더 마실 수 있어요.”
이지운이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서태천이 그 잔을 낚아챘다. 여직원들이 자그맣게 꺅 소리를 냈다.
서태천은 그대로 술잔을 원샷하더니, 테이블에 탁 내려놨다.
“더 마시면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지운을 일으켜 세워, 자연스럽게 끌고 갔다. 같이 있던 직원들은 벙쪄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뭐지. 순식간에 분위기 메이커를 잃었다.”
“주임님 돌아와요!”
***
서태천이 이지운을 끌고 온 곳은 리조트 로비였다.
“왜 사람을 질질 끌고 가세요오.”
“우리 중요한 일 있으니까.”
“아, 그게 뭔데요.”
“오늘 셀카 업로드가 늦는다고 감독관한테 연락 왔습니다.”
“헉.”
이지운은 그제야 오늘치 침대 셀카를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에 업로드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올려야 감점이 없고, 늦게 올리면 1시간마다 1점을 깎는다.
감점이 무서운 이유는, 일정 이상으로 누적 감점이 이뤄지면 숙려 기간이 연장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6개월이 아니라 7개월, 8개월, 길게는 1년까지도 숙려 기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요리 만들어 먹기, 침대에서 셀카 찍기, 숙려 일지 쓰기를 해 왔건만 술에 절어서 숙제를 빼먹는다고? 이지운은 술에 취해 헤롱헤롱한 와중에도 아찔했다.
“어서. 어서 저랑 누워요. 한 침대! 어서!”
“안 그래도 지금 올라갈 겁니다.”
“나랑 한 침대에 눕자고!”
“그렇게 크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프런트 직원은 애써 둘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며 허공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금방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두 사람은 6층까지 금방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