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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4화 (4/100)

4화

서태천의 스위트룸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서태천은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이지운에게 베개를 받쳐준 다음, 한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찍습니다.”

“쿠…울….”

“…지운 주임?”

서태천이 옆을 보니 이지운은 이미 눈을 감고 숙면 모드에 들어간 상태였다.

“…쿨….”

이 짧은 사이에 잠들었다고?

서태천이 이지운을 흔들어 깨워 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태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은 이지운과 사진을 찍은 뒤, 숙려 일지 앱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러는 동안 이지운은 알딸딸한 술기운에 이끌려 야무지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벽녘, 이지운은 뭉근한 열감 때문에 일어났다.

“아… 더워.”

왜 이렇게 온몸이 뜨겁지. 찬물 마시고 싶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방인데 정신마저 비몽사몽 하니 눈앞이 안 보였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이마는 뜨겁고, 하다못해 손발에도 열기가 넘쳐났다.

나 자꾸 왜 이러지. 몸이 자꾸 더워 미치겠다.

가만 보니, 이건 숙취와는 근본적으로 느낌이 달랐다. 단순히 목이 마르거나 머리가 아픈 느낌이 아니라, 몸속 아주 깊은 곳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목말라. 시원한… 시원한 거 마시고 싶어. 아주 차가운 게 내 몸속의 열기를 앗아가 줬으면 좋겠어.

점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지운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가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곧 놀라울 만큼 시원하고 촉촉한 손길이 그의 뺨을 스쳤다.

“아….”

꿈속인데도 감각이 엄청나게 생생했다. 마치 녹지 않는 얼음처럼 냉기를 머금고 있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시원해….”

이지운은 그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얼굴을 비볐다. 어디선가 싸한 향기가 피어올라 코끝을 간질이는 것만 같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향긋하고 또 아찔한 향이었다.

“…더 해 줘….”

차디찬 기운과 아찔한 향이 섞이니 더욱 갈증이 치솟았다. 이 감각을 내 몸속에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꿀꺽 삼켜버린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그 생각을 하는 찰나, 입술에 서늘한 것이 와 닿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했다.

“으음….”

숨이 턱 막히는가 싶더니, 이내 시원한 기운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키스. 내가 누구랑 키스를 하고 있는 거지?

멍한 머리로도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술과 꿈의 기운이 너무 강했다.

이지운은 온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알딸딸한 기운에 휩싸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다가 손끝 발끝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들 때마다 상대와 맞닿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가만히.”

몸을 바르작거리는 이지운의 손목을 잡아채, 상대를 침대 매트에 짓눌렀다. 손의 자유를 잃은 이지운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얼음 같은 기운과 밀려드는 향기를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아….”

가끔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한숨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몸 안의 열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면서, 이번에는 엉뚱한 기운이 샘솟았다. 몸이 간지럽고 은근하게 예민해졌다. 상대가 타고 올라 짓누르는 허리춤과 함께 손목 안쪽, 뺨과 귓불이 온통 간질간질했다.

“여기까지.”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데서 들리나 싶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꿈 한번 끝내주네.

이지운은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햇빛이 창밖에서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름 햇빛에 눈이 부셔 이지운은 힘겹게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비비고 사방을 둘러보니 자신은 태평양처럼 넓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시야에는 광활한 방과 함께 저 멀리 응접실이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야….”

짐을 풀 때는 분명 이런 방이 아니었는데. 그냥 아담한 객실 아니었나? 여긴 무슨 서른 명이 뒹굴어도 될 만한 방인걸.

이지운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서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잘 자더군요.”

“어? 여기 본부장님 방이에요?”

“그렇죠.”

“내가 왜 여기… 있지?”

“사진 셀카 숙제하다가 잠들었는데 기억 안 나나 보군요.”

서태천이 사이드 테이블 옆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이지운은 그제야 드문드문 간밤의 기억을 재생시킬 수 있었다. 술을 잔뜩 먹고 취해서 서태천에게 끌려왔었다. 사진을 찍자마자 잠들었고….

잠깐. 나 새벽에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 시원한 인간과 키스했다. 숲속의 냄새가 나는 사람. 세상에 그렇게 기분 좋은 냄새가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신비로운 감각이었는데….

이지운은 자기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보았다. 전혀 뜨겁지 않았고, 딱 좋은 온도였다. 몸이 불덩이처럼 끓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개꿈이네.”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아침밥이나 먹고 천천히 나와요.”

“밥이요?”

벽시계를 보니 시간은 8시. 씻고 직원용 조식당으로 내려가도 배식을 받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시간 모자랄 것 같은데요.”

“곧 룸서비스가 올 겁니다.”

“예?”

“내가 임원진 미팅이 있다는 걸 깜빡하고 시켜버렸어요. 메뉴도 마침 황태해장국이네. 음식 남기긴 뭐하니까 이 주임 먹어요.”

“진짜요?”

이지운은 뒤통수를 긁으며 눈을 끔뻑였다. 나 운이 좀 좋네? 따로 해장 안 해도 되고.

“그럼 오늘도 열심히 모르는 척합시다.”

“이하 동문입니다.”

서태천이 주름 하나 없이 완벽하게 다려진 셔츠를 거울에 비춰보더니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

“아, 희한한 꿈 뒤에 공짜 밥이라. 이거 오늘 운수가 길할 징조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몸도 가뿐하고, 페로몬 문제도 없는 것 같아. 잘 됐어.

이지운은 혹시 몰라 이곳저곳에 코를 가져다 대보았지만,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억제제 빼먹어도 아무 일 안 생기는구나. 그래. 걱정할 일이 아니었어.

이지운은 천하 태평하게 생각했으나, 여기에는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교란되어 신체 외부로 흘러나왔을 때, 알파 페로몬과 밀접하게 접촉하면 에너지가 중화된다.

쉽게 말해 알파와 스킨십을 하면 향기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지운은 두 번째 가능성은 전혀 생각도 못 한 채 즐겁게 룸서비스를 기다렸다.

***

“오늘의 하이라이트! 팀워크 자랑 체육 대회입니다!”

사회를 맡은 김 과장이 실내 체육관 안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60명 참가자는 총 6개 조로 나뉘어 열띤 응원전을 펼치고 구호를 외쳤다.

이지운과 기현진은 같은 1조였다. 둘은 줄다리기나 공굴리기 같은 단체 게임에서도 협동심을 발휘해 팀을 잘 이끌었고, 미니 축구에서도 1등을 차지해 톡톡한 활약을 했다.

“1조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이대로라면 우승을 차지하겠는데요? 하지만 마지막 게임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2인 3각입니다! 여기서 우승하면 역전도 가능합니다!”

“와아!”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기 대리님이랑 이 주임님이 나가세요! 두 분 합이 잘 맞던데!”

“맞아, 맞아. 둘이 나가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지.”

직원들이 기현진과 이지운더러 짝을 이루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지운도 기현진과 2인 3각을 하면 우승 확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조에서는 저랑 기 대리님이 출전하겠습니다.”

이지운이 진행 본부로 가서 출전 신청을 했다. 그런데 진행요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안 되는데.”

“왜요, 과장님?”

“1팀은 출전 선수에 본부장님을 껴야 돼. 피날레니까 기념해야지. 아까 못 들었어요?”

직원의 말에 이지운은 당황했다. 아니, 아무리 보여 주기 식 대회라 해도 너무하네. 임원이 껴서 체육대회나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기 대리님하고 본부장님이 뛰는 걸로,”

“나랑 이 주임이 뛸 겁니다.”

“네?”

언제 다가왔는지 서태천이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니. 저랑 뛰시겠다고요?”

“못 할 게 뭐죠? 아까 보니까 전 종목에서 골고루 활약하던데.”

“어… 그건 맞는데.”

“자자, 시간 없습니다. 본부장님! 지운 주임! 출발선으로 가 주세요.”

진행 요원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이지운은 뭐라고 따질 겨를도 없이 출발선으로 끌려갔다. 서태천이 슥슥, 두 사람의 발목을 묶고 이지운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왼쪽부터 나가요, 아니면 오른발부터 나가요?”

“안쪽 발부터 나갑시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맞출 때마다 완벽한 칼각이 나왔다.

뭐야. 왜 이렇게 잘 맞아?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이상했다.

성격 유형 검사 때 ‘두 사람이 프로젝트를 하면 아주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던 강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설마 그 검사 진짜였던 건가?

이지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 기분 나빠. 온 세상이 나랑 이 인간을 엮고 있는 것 같네.

두 사람의 2인 3각은 볼 것도 없이 압도적인 1등으로 끝을 맺었다. 결승선에 다다른 이지운과 서태천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단합니다! 본부장님과 주임이 합작해서 1등을 만들어냈어요. 경품은 바로… 호텔 이용권입니다!”

“와아! 부럽다!”

“잘했다!”

계열사 호텔 이용권 1매가 이지운의 손에 쥐어졌다.

아니, 어차피 직원 할인가로 싸게 이용할 수 있는 호텔이잖아. 이런 쿠폰 별로 기쁘지 않은데요… 그래도 즐거운 척 웃어야 사회인이겠죠.

얼떨떨해하는 이지운과 여유로운 서태천의 모습이 사진으로 박제되었다.

***

다사다난했던 1박 2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퇴근 시간과 맞물려 차가 밀렸다. 서울에 진입하자 교통체증은 더욱 심해졌고, 느려터진 차 안에서 이지운은 꾸벅꾸벅 졸았다.

“으음….”

아, 좋다.

이지운은 제 머리에 닿은 정체불명의 물건이 몹시도 맘에 들었다. 적당한 쿠션감과 딱딱함이 편안한 잠을 선사해 주었다.

“아… 너무 빵빵해.”

그가 손을 뻗어 쿠션을 주물럭거렸다. 탄력이 엄청난지 세게 누르고 탁탁 손바닥으로 쳐도 전혀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체 이거 소재가 뭐야?

하고 눈을 뜬 순간. 이지운은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서태천과 눈이 마주쳤다.

“헉. 죄송해요.”

“…만지는 건 둘째치고 제 어깨에 침 묻었을까 두렵네요.”

“침 안 흘렸거든요?”

후다닥 서태천의 어깨에서 몸을 뗀 이지운은 혹시 몰라 핸드폰 액정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다행히 침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강남역입니다. 다들 조심히 내리세요.”

드디어 차가 멈췄다. 이지운은 먼저 내려 짐칸에서 캐리어를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수십 명의 사람 가운데 서태천을 바쁘게 찾았다. 그런데 그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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