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촬영은 종료할게요.”
“고생하셨습니다!”
길고 긴 하루가 끝났다. 객실로 돌아온 이지운은 옷도 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턱을 괴었다. 흡사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같은 모습으로 그는 아까부터 추측 중이었다.
본부장은 과연 누굴 찍었을까. 아, 궁금해.
“알고 싶다… 그것이 알고 싶어.”
이지운이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BBG였다.
“아, 놀래라.”
그와 전화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건만, 괜히 찔리다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이지운은 흠흠, 목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쥐었다.
“여보세요.”
-객실입니까.
“네. 그런데요?”
-지금 나와서 복도 끝 비상구 쪽으로 와 봐요.
“네?”
-지금요.
전화가 끊겼다. 이지운은 이게 뭔가 싶었지만 일단 살그머니 문을 열고 복도 끝으로 갔다. 비상구 문을 열자 서태천이 서 있었다.
“어?! 본부장님.”
“가죠.”
“네? 가긴 어딜 가요.”
“잊었습니까. 오늘 침대 셀카 찍는 날이잖아요.”
“아, 맞다!”
하루 종일 바쁘고 딴생각에 잠겨 있느라 큰일을 빼먹을 뻔했다.
서태천의 객실은 바로 위층이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연결되었다. 바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이지운은 씻지 않은 게 신경 쓰였다.
“제 방에 들러서 씻고 올라갈게요.”
“뭐하러 그럽니까. 내 방에서 씻고 누우면 되지.”
“아니, 저 억제제도 먹어야 하고….”
“아. 그러면 씻고 만나죠.”
이지운은 30분 내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몸을 씻고 억제제를 꿀꺽 삼킨 다음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누굴 마주치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태천의 객실 앞까지 도착한 이지운은 소심하게 벨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서태천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늘 입던 검은 가운 차림 대신 회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어라? 웬일로 시커먼 가운 안 입었네. 이 리조트에는 검은색이 구비돼 있지 않나? 아냐. 개인적으로라도 꼭 가져올 인간인데….
“들어와요.”
“네.”
호화로운 스위트룸 안으로 발을 들인 이지운은 멋진 가구와 운동장만 한 응접실을 구경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옆 테이블에는 마시다 말았는지, 코르크가 열린 와인이 한 병 놓여 있었다.
“어? 와인 드시고 계셨어요?”
“네.”
“향기가 장난이 아닌데… 맛있겠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라벨에 그윽한 향기까지. 맛있는 것이라면 음식이고 술이고 가리지 않는 이지운이었기에 관심이 갔다.
“한번 마셔볼래요?”
“진짜요?”
“잔 하나 더 있습니다.”
서태천이 미니바에서 와인 잔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지운은 얼렁뚱땅 서태천의 맞은편에 앉아 술을 받았다.
“와… 진짜 색깔도 예쁘고 맛있어 보여요.”
“이곳 총괄 주방장 추천이니 좋은 와인일 거예요. 입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셔 봐요.”
이지운은 호록, 와인 한 모금을 삼켜보았다. 너무 쓰지 않으면서도 입안에서 향기가 확 퍼져 끝 맛이 감미로웠다.
“우와! 진짜 최고예요!”
“괜찮습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대박이에요.”
“그럼 한 잔 더 드리죠.”
서태천이 두 번째 잔을 건넸다. 이지운은 좋다고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그러고 있자니 얼굴에 열이 오르고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다.
“아… 조오타. 한 잔 더!”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만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도 안 취했는데 무슨 소리! 어허!”
이지운은 병을 통째로 들고 자기 잔에 와인을 콸콸, 부었다. 서태천이 말려 보려 했으나 술에 취한 이지운은 막무가내였다.
“이래 가지고 셀카 찍겠습니까? 그만 마셔요.”
“세엘카?! 그거 왜 못 찍어! 찍으면 되지!”
이지운이 서태천의 목을 휘감았다. 낭만적으로 끌어당긴다기보다는 낚아채는 동작에 가까웠다.
“이 주임, 잠깐만.”
“찍자! 한번 화끈하게 찍자고!”
이지운이 낄낄거리며 서태천을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누워 보자. 너도나도 한번 누워 보자.”
이지운은 취기가 제대로 올라, 정체불명의 노래까지 불러 젖히며 흐느적거렸다. 침대가 아니라 테라스 쪽으로 향하는 그의 손목을 서태천이 확, 휘어잡았다.
“어?!”
딸꾹. 이지운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딸꾹질을 했다.
“당신이 가야 할 침대는 여기가 아니라 저쪽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태천의 눈빛은 짙고 깊었다. 이지운은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남자의 강한 악력, 풍겨 나오는 체취, 위험한 분위기를 캐치할 수 있었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갔다.
“이리 따라와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목을 끌고 침대로 향했다. 보폭을 크게 해서 걷는 통에 이지운은 어어,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순간. 휙, 시야가 돌아간다 싶더니 이지운은 침대에 똑바로 누웠다. 그러고는 곧장 양 손목이 결박당해 침대에 꽈악 짓눌렸다.
“어…?”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면 다치니까.”
서태천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이지운의 손목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순간 이지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 미쳤나 봐. 두근거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서태천은 지독하게도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턱선, 우뚝하고 남자다운 코, 쌍커풀 없는 눈매에 가려진 검은 눈동자.
거기에 알파 특유의 다듬어지지 않은 향기까지 풍기자, 이지운은 더욱 얼굴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많이 취했군요. 얼굴이 빨개요.”
“아… 그, 그게.”
“괜찮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셀카 찍자는 소리였지만, 이지운의 귀에는 그 소리가 묘하게 야릇했다.
“일단 준비를 하죠.”
“준…비.”
“신중하게 해야 하니까요.”
“신중….”
“가만히 있어요. 편안하게, 그렇죠. 그렇게 나한테 몸을 맡겨요.”
몸을 맡기래. 내 몸을.
이성을 잃은 이지운은 눈앞의 남자가 본부장인지 뭔지 구분도 하기 어려웠다. 취기가 급격하게 오른 탓이었다.
“…알아서 해 주세요….”
“좋습니다. 자, 편하게 누워요.”
이지운이 온몸에서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손목을 놓아주고 그의 옆에 누웠다. 맞닿은 어깨와 팔뚝이 뜨거워, 이지운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입술 깨물지 말아요. 상하니까.”
“아, 네….”
서태천이 핸드폰을 들어 두 사람을 프레임에 담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졸립니까.”
“네… 너무.”
“자요, 그럼.”
“으응….”
이지운이 사르르 눈을 감았다. 뜨거운 손이 이지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이마를 매만져주었다.
아득한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지운은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다음 날 아침, 이지운은 머리가 아파서 깼다. 와인의 후유증 탓인지 숙취가 어마어마했다.
“아이고야….”
지끈지끈한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침대가 너무 따끈따끈했다.
제주 리조트는 온수 매트라도 깔아 놓나…? 격이 다르군. 포근하고 너무 좋다.
그렇게 생각하며 따뜻한 매트에 온몸을 비비적거리려는데, 눈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헉.”
이지운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온수 매트가 아니라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태천이 한쪽 팔로 이지운의 몸을 휘감은 채,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잠들어 있었다.
이… 이 자세 뭔데. 내가 왜 여기서 이 사람하고 끌어안고 자고 있나?
이지운은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서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제 와인 마시다가 너무 취해서 그대로 자버렸구나.
아이고 민망해. 도망이라도 쳐야 하나? 이지운은 진땀을 흘리며 서태천의 품을 빠져나오려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때 서태천의 굵직한 팔이 턱 뻗어 나오더니, 이지운을 붙들었다. 강한 악력에 이지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뭐, 뭔데…!
“더 자….”
서태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조용해졌다.
뭐야. 잠결에 이러는 거야? 나라는 건 알고 붙잡은 건지.
이지운은 너무 놀라 가슴이 벌렁거렸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눕기야 했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만 또렷해졌다. 시야도 맑아져 마주 본 서태천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새벽의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객실 안은 무척이나 어두웠지만, 진한 연필로 그린 듯한 윤곽과 날카로운 선은 감춰지지 않았다.
부부로서 같은 침대를 쓴 지 한 달도 넘었지만, 이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관찰하는 건 처음이다. 보통은 이지운이 먼저 잠들고 늦게 일어나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면 서태천은 이미 씻고 나와 빈속에 블랙커피를 붓고 있는 터라, 단 한 번도 그의 잠든 모습을 관찰할 수가 없었다.
얌전히도 잘 자네. 코도 안 골고, 숨소리도 조용해. 나 끌어안는 것만 빼면 잠자리 상대로 괜찮은…,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지운은 제 몸을 휘감은 무거운 팔뚝을 치워내고 살살 침대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서태천은 깊게 잠이 든 듯, 다시 눈을 뜨지도 않았고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