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14화 (14/100)

14화

기습 전화에서 점수를 따려면 두 사람이 한 프레임에 들어와 전화를 받아야 한다. 이지운은 제작진이 아직 카페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여기며 빠르게 통화를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서태천은 느긋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받지 말죠.”

“네? 받지 말자뇨. 이거 받아야 점수 따잖아요.”

“지금은 촬영 중이지 않습니까. 받지 말아요.”

“안 받으면 10점 감점이잖아요. 이번 달 점수 간당간당한데,”

“나중에 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은 데이트에 집중해 봅시다.”

이지운은 말문이 막혔다. 100점 만점에 10점 감점은 결코 작은 비중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숙려 미흡’으로 처리되어 결혼 기간이 한 달 연장될 수도 있었다.

“아니, 이거 못 받으면 감점되….”

그러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이지운이 서태천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하필 그때 제작진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이혼이니 결혼이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평이한 대화를 했다. 주말엔 뭘 하시냐, 최근에 본 드라마는 뭐가 있으시냐, 요새 맛있게 드신 음식은 무엇이냐 등등.

서로가 답을 빤히 아는 질문을 주고받으며 “아, 그러시구나.” 및 “진짜요?”와 같은 리액션을 몇 번 반복했더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제 리조트로 이동하실게요. 거기서 조금 더 촬영하고 프라이빗 데이트는 종료하겠습니다.”

“네.”

이지운과 서태천은 카페를 나와 다시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정오의 햇빛이 눈부시기 이를 데 없어, 이지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메가 1호님. 저랑 자리 바꿔서 걷죠.”

“네? 왜요.”

“제가 바다 따라서 걸으려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태천은 이지운에게 인간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이지운은 괜스레 민망하고 마음속 어딘가가 간지러운 기분에 시선을 회피했다.

10여 분을 걸어 리조트로 돌아온 다음, 이지운이 제작진에게 물었다.

“다음 장면은 어디서 촬영하나요?”

“저깁니다.”

“네?!”

제작진이 가리킨 곳은 알파인 코스터, 즉 무중력 롤러코스터 비슷한 놀이기구였다. 탑승객의 체중을 이용해 가속도를 붙여나가므로 수 KM를 달리는 동안 극한의 스피드를 맛볼 수 있다는 제주 리조트의 명물.

저기서 내 생을 마감하는 것인가…!

레일도 너무 높이 설치돼 있고 쌩쌩 달리는 속도도 자동차 못지않아 이지운은 덜컥 겁이 났다.

“저, 저거를 탄다고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아, 저희도 다 계획이 있죠. 함께 무서운 곳을 가거나 위험한 레포츠 체험을 하면 사랑에 빠질 확률이 확 올라간다고 하네요. 공포 상황을 함께 체험했다는 유대감도 생기고, 또 생존본능이 번식본능으로 전환되기도 하고요.”

식겁하는 이지운을 제작진이 달랬다.

아니, 그거 과학적으로 신빙성 있는 말인가요? 전 그냥 저거 타면 꽥하고 죽을 것 같은데요…!

이지운은 제작진에게 따져 묻고 싶었으나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순수 연애에 덧붙여 ‘제주 리조트 시설 홍보를 통한 기업 이미지 제고’ 였다.

명색이 마케팅팀 직원인데 저 롤러코스터 못 타겠어요, 저거 타다가 죽는 것 아니에요? 이런 소리를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이지운은 그냥 얼굴만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태천이 이지운의 옆으로 와 가만히 속삭였다.

“무서우면 나한테 딱 붙어 있어요.”

“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눈 꽉 감고 그냥 있으라고.”

서태천이 이지운의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지운은 순간 멍해졌다.

뭐지? 든든했어, 방금.

“탑승 준비하세요! 알파 1호님, 오메가 1호님 서둘러 와 주세요!”

제작진의 부름에 이지운은 한발 늦게 탑승장으로 향했다. 승강장에는 맨몸으로 타는 2인승 썰매 한 척만이 놓여 있었다.

“뒤에 타실 분, 알파 1호님이 안정감 있게 리드해 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서태천이 먼저 썰매에 오른 다음, 이지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지운은 눈을 질끈 감고 그 손에 의지해 썰매에 탔다.

“자, 갑니다! 출발!”

그리고 슝- 소리와 함께 썰매가 힘차게 출발했다. 이지운은 자신을 뒤에서 감싸고 있는 알파 1호님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었다.

***

“하아… 하아….”

결승지점에 도착한 이지운은 식은땀을 흘리며 썰매에서 내렸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는 그를 서태천이 부축해 주었다.

“내 말대로 하니까 괜찮았죠?”

“…네.”

이지운은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정통으로 마주쳤다. 가슴에 쿵, 하고 북소리가 울렸다.

“어…?”

“왜 그래요.”

“저 가슴이….”

“가슴이 왜요.”

두근두근. 미친 듯한 속도로 가슴이 뛰었다. 동시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열사병이 난 사람처럼 머리도 어지러웠다.

“아, 아니에요. 순간 너무 힘이 들었나 봐요.”

이 두근거림은 방금 전에 느꼈던 속도감 때문일 거야. 몸이 놀라서일 거야.

이지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휙 하니 몸을 돌려 그늘로 걸어갔다.

“본부장님. 잠시 회의 좀.”

“아, 네.”

PD가 걸어와 알파 1호님이 아닌 서태천 본부장을 찾았다.

“저희 촬영 협조 사항 때문에 그런데요.”

“네, 말씀하시죠.”

PD와 진지하게 대화 중인 서태천을 멀리서 바라보며, 이지운은 가슴께에 손을 짚어 보았다. 아직도 가슴이 아까처럼 뛰고 있었다.

뭐지? 이때쯤이면 흥분이 가라앉을 만도 한데 계속 뛰네.

나 설마 젊은 나이에 심장병이라도?

이지운은 핸드폰을 열어 검색창에 들어갔다. 그런데 [심장 두근거림], [얼굴 달아오름], [어지러움] 을 한꺼번에 검색하자 <사랑에 빠졌을 때>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사랑에 빠지면 신진대사가 빨라지고 신경계가 예민해지며… 에이, 이건 아니지.”

이지운은 검색 결과들을 무시하고 계속해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부정맥>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끌었다.

“헉. 심혈관계 질환이라고? 이거 아닌가?”

인터넷에서 질병 증상 검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지만, 지금의 이지운은 이 두근거림의 원인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었다. 원인은 결코 서태천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날 저녁, 리조트 뒤뜰에 전 참가자가 모였다.

“오늘의 마지막 코너는 모든 분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저희가 리조트 이곳저곳에 그림 카드를 숨겨 놓았어요. 똑같은 그림이 2개씩, 총 10쌍이 숨어 있는데요, 같은 그림 카드를 지닌 분끼리 오늘 저녁 커플이 되시는 겁니다.”

조연출이 출연자들에게 카드가 있는 곳들의 힌트를 주었다. 분수대, 레스토랑 입구의 조각상, 화려한 로비 등 카드는 리조트에서 자랑하고 싶은 곳들에만 숨겨 놓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출발 신호와 함께 출연자들이 우르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지운 역시 빠르게 뛰면서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로비 이곳저곳을 탐색하고 있자니 어린 시절 소풍 때 했던 보물찾기가 연상됐다.

빨리 찾고 싶은데. 어디 있을까.

이지운은 컨시어지부터 프런트 데스크, 미술품이 위치한 곳 등 다양한 장소를 뒤졌다. 그러다가 로비 소파에 놓인 카드를 발견했다.

“찾았다!”

그가 찾은 카드에는 커다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또 다른 별 카드를 지닌 사람과 오늘 저녁 파트너가 된다는 의미였다.

“누가 내 파트너일까… 설마….”

머릿속에 가장 빨리 떠오른 인물은 알파 1호였다.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그냥 그런 우연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이지운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저녁 데이트는 역시 밥이지. 고기에 파스타에 튀김은 한 다섯 종류쯤. 아, 어제 마신 와인 또 마시자고 할까?

아무런 근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별 카드의 주인공이 서태천일 것이라 생각하며 이지운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메가 1호님. 카드 찾으셨죠? 다시 집결지로 와 주세요.

귀에 차고 있던 인이어에서 무전이 울렸다.

“네! 지금 갈게요.”

이지운은 카드를 꼭 쥐고 빠르게 달려 다시 뒷마당으로 갔다. 출연자들은 제각기 카드를 찾아와 홍조 가득한 얼굴로 매칭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지운도 스태프에게 카드를 보여 주고 체크를 받았다.

곧 조연출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쥐고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커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별 무늬 카드를 뽑으신 분은, 우선 오메가 1호님이시고요! 이분의 파트너는….”

조연출은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다음 라운드 진출자를 발표하듯이 뜸을 들였다. 이지운의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긴장감이 차올랐다.

“알파 2호님입니다!”

엇. 서태천이 아니네. 기현진 대리님이잖아.

이지운의 얼굴이 굳었다. 기현진은 대놓고 쌍수를 들며 환호했다.

“와! 오메가 1호님. 저희 운명인가 봐요!”

“아… 네. 알파 2호님.”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상대방이 크게 기뻐하니 이지운도 얼굴을 구길 순 없었다. 그는 애써 웃으며 기현진과 나란히 섰다.

그럼 서태천은 누구랑 되는 거지. 내가 아닌 사람과… 되는 건데.

이지운의 관심사는 이제 서태천의 결과 발표로 향했다. 몇 쌍의 호명이 지나고 나서, 조연출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서태천을 가리켰다.

“알파 1호님! 이분은 하트 카드를 찾으셨는데요. 그럼 하트 카드를 찾으신 다른 분은….”

조연출이 또 뜸을 들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