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음 촬영은 수영장입니다. 같이 자연스럽게 노는 모습을 연출해 볼게요.”
조연출의 말에 이지운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혼란한 상황에서 서태천의 벗은 몸까지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지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배탈이 났다고 할까? 아냐. 그런 것 치고는 아까 너무 잘 먹었다.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서태천과 제작진은 바보가 아니야.
몸살기가 있다고 해 봐? 슬쩍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지만 오늘따라 혈색이 좋았고 얼굴에는 건강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자. 탈의하고 나오시고요.”
제작진이 이지운을 남자 오메가용 탈의실로 밀어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갑자기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는 이지운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쥐… 쥐가 났나 봐요! 다리가 말을 안 들어요!”
필사적으로 생각해 낸 핑계가 이거였다. 쥐가 났다면 수영은 무리. 오메가를 내버려 두고 알파 혼자 물에 둥둥 떠다니면 그림이 웃길 테니 촬영이 취소될 것이다.
“으윽. 너무 아프다.”
이지운은 종아리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며 오만상을 썼다. 과연 수법이 먹혀들었는지 스태프들은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때 생쇼를 하고 있는 이지운 앞으로 서태천이 다가왔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이지운의 다리를 붙잡아 제 무릎을 딛게 했다.
“어어…?!”
서태천이 이지운의 종아리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뜨거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여 있어 남자 느낌이 물씬 났다.
“주물러 드리죠.”
“으아악!”
이지운은 아파서가 아니라 흥분돼서 소리를 꽥 질렀다.
“많이 아픈가 보군요.”
하필이면 손도 커서 이지운의 발목이 그의 손아귀에 딱 맞게 들어찼다. 서태천은 한 손으로 이지운의 발목을 단단히 고정하고 나머지 손으로는 반바지 아래 드러난 매끈한 종아리를 주물렀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타고난 악력이 강한 탓에, 격한 마사지가 이루어졌다. 제작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그림 잘 나오겠다며 당장 카메라를 들이댔다.
졸지에 알파 1호님과의 야릇하고도 정겨운 한때를 박제당하게 된 이지운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이 로봇 왜 자꾸 돌발행동을 해. 고장 난 거야?!
***
“물에 들어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요. 대신 선베드에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대화하는 장면 찍죠.”
그거라면 이지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동의하자 제작진들이 선베드와 음료수를 세팅했다.
이지운은 선베드에 벌렁 누워 수영장 물을 쳐다보았다. 야외수영장이라 그런지 탁 트인 느낌이 시원했다. 쪼륵. 음료수를 한잔하며 이지운은 옆 베드에 기대어 있는 서태천을 훔쳐보았다.
그의 깎은 듯한 옆모습은 감탄이 나올 만큼 매끄럽고 또 남자다운 윤곽이었다.
아까 저 얼굴로 환하게 웃었단 말이야…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다니 정말 의외다. 진짜 근사했어.
이지운은 아까부터 서태천을 자꾸만 관찰하고 있었다. 한번 매력이 눈에 들어오자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관심을 가진다 한들 의미가 있을까? 저쪽은 나한테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쳐 봤자 뭐해.
시무룩해진 이지운은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서태천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아직도 다리 아픕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이러고 있는 게 편해서.”
이지운은 계속해 생각했다. 내일은 최종 선택이 있는 날. 과연 서태천은 누굴 선택할까. 어제 데이트했던 오메가 3호님일까…?
그녀는 누가 봐도 눈부실 만큼 화려한 오메가였다. 성격도 활달해 보였고, 첫날부터 서태천에게 대놓고 호감을 표현했었다. 그렇다면 서태천 역시 그녀가 신경 쓰이지 않을까.
가짜 남편을 선택하느니 새로 만난 오메가에게 마음이 끌릴 가능성이 더 높아. 그리고 그 현실에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
…난 본부장에게 있어서 불쑥 생겨난 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나 역시도 얼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잖아.
심란해진 이지운은 에이드를 꼴깍꼴깍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 순간부터 마음을 비우자. 서태천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처 입지 않으려면 그 방법이 제일이니까.
***
수영장 촬영이 끝난 후, 잠시 쉴 시간이 주어졌다.
“이따 5시까지 컨퍼런스 룸으로 모여 주시고요. 그때까지는 본인 객실에서 쉬면 되십니다.”
스태프가 두 사람을 각자의 객실로 올려보냈다. 이지운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태천에게 말을 걸까 말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따가 누구 고를 거예요? 혹시 나는 가능성 없나요.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기왕 마음을 비우기로 한 것, 호기심을 죽이기로 했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궁금증을 꾹 누르며 이지운은 침묵을 견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럼 이따 봬요.”
“그래요.”
이지운은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대 자로 뻗었다. 한나절 만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감정이고 육체고 진이 빨렸다.
“하아… 피곤해.”
그때 핸드폰에서 일정 알람이 울렸다. <꼭꼭 숙려 일지 쓰기! 까먹으면 죽음뿐~> 이라는 제목을 단 알람이었다.
“아차. 오늘치 지금 써 놔야겠다.”
이따 저녁에는 최종 선택이니 저녁 식사니로 바쁠 예정이므로 지금 일지를 작성해 두는 게 도움이 될 터였다. 이지운은 핸드폰을 쥐고 엎드려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 앱에 접속했다.
-지난 1주일간의 기록입니다.[사진 5건]
-지난 1개월간의 기록입니다.[사진 26건]
접속할 때마다 뜨는 타임라인이 오늘따라 이지운의 눈을 끌어당겼다. 썸네일에 담긴 밥상 사진, 침대 셀카, 가끔은 마트 셀카, 지난번 간담회에서 선물 받은 이지운의 초상화까지. 앱은 다양한 기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열심히도 썼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쓸까. 감독관이 볼 테니까 제주도에 온 건 티 나지 않게 써야 하고, 동시에 서태천이 읽을 예정이니 솔직한 감정을 토로해서도 안 된다. 꾸미고, 다듬고, 정제된 이야기만을 가식적으로 풀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에게도 대나무숲이 필요해.
이지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폰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기 시작했다.
오늘, 남편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항상 무뚝뚝하고 표정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해맑게 웃는 그는 소년 같았다. 그냥 한번 웃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기분이 이상하다니.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고 있지만… 내 남편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남편은 내게 티끌만 한 감정도 관심도 없다. 그러니 사심 갖지 말자. 쓸데없는 감정낭비 해 봤자 나만 손해야.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훌훌 털어 버리자.
여기까지 썼을 때 차임벨이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룸서비스입니다, 손님.”
“저는 시킨 적이 없는데요?”
문에 대고 대답을 했지만 룸서비스 직원은 한사코 이 객실을 위한 것이 맞다며 문을 열어달라 했다.
“저 진짜 안 시켰는데.”
“이 객실 앞으로 서빙 요청이 있었습니다. 계산도 완료되었고요.”
“그래요?”
때마침 이지운의 핸드폰이 울렸다. 제작진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식사들 하시고 5시 정각까지 빠짐없이 모여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 식사 시간이 부족하니 미리 밥을 주나 보다. 이지운을 그렇게 생각하고 룸서비스 직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한테 온 게 맞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메뉴를 보니 흑돼지 김치찌개부터 옥돔구이, 전복 초무침처럼 제주 특산물을 이용한 밥상이 푸짐했다. 낮에 양식을 먹은 터라 한식이 절실했던 이지운은 군침이 돌았다.
“이 프로그램 밥 잘 먹이네.”
그는 메뉴가 날아갈라 사진부터 찍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든든하니 배가 불러, 허한 속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었다.
대망의 저녁이 되자 전 출연자가 컨퍼런스 룸에 모였다. 이미 몇몇은 커플이 된 듯, 바짝 붙어 앉아 연신 하하 호호 하고 있었다. 서울 가서는 어떻게 데이트를 하자고 속닥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미 마음이 통했구나. 부럽네.
이지운이 커플들을 보는 동안 기현진 대리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지운은 록발라드 사건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슬금슬금 그를 피하고 있었지만, 매몰차게 걷어찬 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땐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시련이 있어야 오메가 1호님의 심장을 얻어냈을 때 짜릿함이 더 큰 법이죠.”
“심장요?”
보통 사랑이나 마음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표현이 너무 과해….
이지운이 그의 시선을 피하자, 기현진이 몸을 더 바짝 붙여오며 물었다.
“오늘 데이트는 어땠어요? 알파 1호님하고 하루 종일 시간 보냈잖아요.”
이지운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가 나의 코끝을 터치했을 때 심장이 쿵쾅거렸다? 벗은 몸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쥐가 난 척했는데 그러다가 다리를 붙잡혀서 기분만 야릇했다?
그 사람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고, 어떨 때는 소년 같기도 했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이지운은 말을 아꼈다. 기현진은 계속 대답을 채근했다.
“어땠어요. 별로였나요? 역시 내가 낫죠? 얼른 대답해 줘요.”
“그냥… 어렵네요.”
그것이 지금의 이지운이 대답할 수 있는 전부였다.
놀러 와서 두통만 얻어 가네. 부정맥, 아니… 아직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랑.
“다들 착석해 주세요. 이제 최종 선택 시간입니다!”
조연출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며 스크린에 PT 자료를 띄웠다.
“지금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최종 선택은 알파 분들이랑 남자 베타 분들이 일렬로 서고요. 맞은편에 오메가 분들이랑 여자 베타 분들이 쫙 서서 마주 보실 거예요. 맨 처음에 자기소개 시간처럼요.”
“네!”
“그러면 알파 1호부터 최종 고백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고백 받으신 분이 예스다, 노다 이야기를 해 주시고요. 커플이 탄생하거나 아니면 차이겠죠? 그다음으로는 오메가 1호님 차례. 한 줄씩 교대로 선택하는 방식이에요.”
“알겠습니다.”
자기소개 때와 똑같은 순서였기에 헷갈릴 일은 없었다. 다만 이지운은 손바닥에 땀이 차고 목이 깔깔하게 말랐다.
과연 서태천은 누굴 선택할까. 그가 순번으로 1번이기에 이지운은 더욱 긴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