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반짝. 이지운은 오늘따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한약 복용 효과인가… 하나도 안 피곤하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직장인의 벗, 만성 피로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운은 가뿐한 몸으로 침대를 벗어나 씻은 후 거실로 나왔다.
항상 이지운보다 한발 빠르게 일어나 준비를 하는 서태천은 오늘도 샤워 후 덜 마른 머리를 한 채 회색 가운을 입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흠. 요즘 들어 검은 가운 잘 안 입네? 내가 드레스룸에 예쁘게 정리해 놨는데 왜지?
이지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은 가운 사랑이 덜해진 서태천이 의아했지만, 딱히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다.
어차피 그는 제 딴에 정리랍시고 해 놓은 결과물을 서태천이 다시 헝클어 차곡차곡 개어 놓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잘된 일이었다.
“이 주임. 일어났습니까.”
“네. 본부장님 오늘도 블랙커피만 드세요?”
서태천의 앞에는 밥도, 빵도, 하물며 물도 없었다. 시커먼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에 머리를 말리며 아메리카노 원샷. 그게 바로 서태천의 모닝 루틴이었다.
“이게 체질에 맞습니다.”
“아하… 네. 그럼 저 얼른 밥 차려 먹을게요. 기다려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지운은 타고나길 한식 체질이었다.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가 미리 해 놓고 가신 밑반찬, 미역국, 인스턴트 밥을 데우고 간단하게 계란프라이를 부치니 나름 그럴싸한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수저를 들려던 이지운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저… 계란이 좀 많이 있던데. 계란 부쳐서 토스트 하나 해 드릴까요.”
“토스트요?”
“네. 빵 사이에 끼워서요. 어떠세요?”
“음… 한번 먹어 볼까요.”
서태천이 웬일로 오케이를 했다.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한번 실력 발휘해 볼게요!”
이지운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에 섰다. 얼마 전에 사놓은 식빵이 두 장 남아 있기에 일단 그것부터 토스터에 집어넣고, 빵이 구워지는 동안 계란을 지질 생각이었다.
먼저 식빵을 토스터에 넣은 후, 이지운은 기름을 듬뿍 두르고 계란프라이를 만들었다. 그런데 뒤집는 타이밍을 놓쳐서 흰자 부분이 약간 탔다.
“아이고.”
이거 어떻게… 탄 부분 가위로 좀 잘라내면 되겠지?
그런데 오늘따라 주방용 가위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서랍이며 찬장을 뒤적이는 동안, 다 구워진 빵이 통하고 튀어 올랐다.
“노릇함이 부족해. 넌 다시 들어가라.”
이지운은 빵을 다시 굽기로 했다. 타이머가 다시 작동하는 동안 그는 겨우 가위를 찾아내 계란프라이를 살려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빵이 너무 과하게 구워졌다.
“헉!”
통! 하고 튀어나온 식빵은 숯에 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지운은 크게 당황하며 다시 새로운 빵을 넣으려 했지만, 남는 식빵이 없었다.
“어… 어떡해.”
“그냥 주셔도 됩니다.”
모든 정황을 뒤에서 지켜본 서태천이 덤덤하게 말했다.
“아… 아니, 이게 이러려는 건 아니었는데 살짝 탔네요.”
살짝이 아니라 많이 탔고 무척이나 시커멨지만, 서태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숯검댕이 된 빵을 가져다가 입에 넣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그냥 검은 것들을 좋아하는 걸까? 검은 가운, 블랙커피, 그리고 검은 빵….
“맛 괜찮네요.”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해요. 또 해 드릴게요!”
이지운은 자신의 요리 실력도 꽤 쓸만하지 않냐는 착각에 빠져 씩 웃었다. 서태천은 너무 딱딱한 빵에 목이 메어, 아메리카노를 한 잔 더 마셨다.
아침부터 숯을 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최대한 맛있게 먹는 척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대문 밖으로 나오니 서태천 집안의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차가 준비되어서 가져다 드릴 겸 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회사까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타던 차보다도 훨씬 삐까번쩍한 외양에 한 등급 업그레이드된 클래스를 보며, 이지운은 속으로 캬 소리를 냈다. 이지운과 서태천은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출근길에 나섰다.
“기사님. 전 여기 버스 정류장에 내려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그게… 그런 사연이 있어요.”
이지운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출근길의 직장인들, 그리고 개강을 맞이한 대학생들과 버스에 올랐다.
아까까지 마이바*를 타다가 버스를 타려니 급서러움과 불편함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섯 정거장만 가면 회사 앞이란 사실이었다.
“후우… 오늘도 치열했다.”
찌든 꼴이 되어 버스에서 내린 이지운은 머리를 손질하고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테이크아웃했다. 이지운의 취향대로 달달한 커피였다.
회사로 들어가 마케팅 1팀이 있는 19층으로 올라가니, 평소와 달리 팀장이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이 주임! 안 그래도 언제 오나 하고 있었어.”
“아, 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어. 얼른 이리 와 봐.”
이지운은 커피만 대충 자리에 내려놓고 쪼르르 팀장에게 달려갔다. 팀장은 모니터에 낯선 문서를 하나 띄워놓고 있었는데, 이지운더러 대뜸 화면을 보라고 했다.
<창립기념일 행사 준비 T/F의 건- 발신: 비서실 수신: 각 팀장>
“어… 창립기념일 행사요?”
“그래. 알다시피 일주일 뒤가 우리 세화 호텔 앤 리조트 그룹 창립 기념일이잖아. 서울 데이즈드 호텔에서 만찬 연회 열 거거든. 근데 각 팀에서 행사 준비할 실무자를 좀 차출해 달래.”
“아… 그렇군요.”
이지운은 영혼 없이 대답하며 슬그머니 눈을 깔았다. 나 시키려고 하는구나.
작년 이 행사 때 민혜경 대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아는 이지운이었기에, 되도록이면 T/F에 끼지 않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백전노장 팀장은 입바른 소리를 내어놓으며 주임에게 은근한 압박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게 엄청 중요한 행사 아니겠어. 여기서 일 제대로 하는 모습 보이면 윗분들이 자넬 얼마나 좋게 보겠나. 안 그래?”
“네.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운은 영혼 없이 대꾸했다. 팀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특히 이건 이번에 우리 서태천 본부장님이 주도해서 치르는 행사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우리 마케팅 1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다, 이 말이지.”
켁. 이지운은 아직 마시지도 않은 커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알지? 서 본부장님이 우리 회사 내에서 갖고 있는 입지. 미래의 오너잖아. 그런 분 눈에 드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아… 그렇, 그렇습니다.”
“우리 같은 팀장급도 어디 가서 같이 차 한 잔, 식사 한번 하기 어려운 분이셔. 부장급 이상 돼야 독대가 가능할 정도지. 그러니까 이번 기회 놓치지 말고 우리 이 주임이 잡는다, 알겠나?”
독대를 넘어서서 아침에 그 양반 입에 숯검댕이를 쑤셔 넣은 사람이 바로 전데요….
하지만 그런 말은 결코 할 수 없기에, 이지운은 열정과 야망에 가득 찬 척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어차피 거절 권한 따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네. 마케팅 1팀 이지운입니다.”
-저 비서실 김민지 대리입니다. 이 주임님, 잠시 뒤에 T/F 모임 있거든요. 두 시에 20층 소회의실 3번 룸으로 모여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출을 받은 이지운은 바짝 긴장하며 회의실로 향했다. 얼마나 많은 업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한동안 얼마나 바빠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회의실에는 재경팀, 인사팀, 기획팀에서 차출된 인물들과 기현진 대리, 그리고 서태천의 비서인 김민지 대리가 있었다.
기현진 대리가 이지운을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다. 이지운은 대충 고개를 숙여 보이고 최대한 기현진과 먼 자리를 골라서 앉았다.
모두가 제자리에 앉자 서태천이 들어왔다. 아침에 봤던 익숙한 검은 슈트 차림이었다. 그는 대충 회의실 안의 인원을 훑어보더니, 상석에 앉아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내외 사정으로 T/F 구성이 늦어진 점 사과드립니다. 그래도 비서실에서 진행해 오던 부분이 있는지라 여러분은 당일에 현장 진행 요원이라고 생각하고 소임을 다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김 비서가 설명하세요.”
“네.”
김민지 대리가 모여든 직원들에게 간단한 안내문을 나눠주었다. 비상 연락망과 함께 각자의 업무 분장이 적혀 있었다.
식순 준비, 표창과 포상 담당, 의전 총괄 등 각자에게 중요한 일이 하나씩 배정되었다. 기현진은 의전 총괄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머리를 싸맸다. 그런데 이지운은 달랐다.
[이지운 주임-현장 장식용 현수막 준비, 기념 꽃다발 업체 섭외.]
어, 나는 일이 딱 두 개네.
이지운이 살짝 눈을 들어 서태천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침에 밥 좀 해 줬다고 날 배려해 준 건가요? 이런 친절까진 필요 없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내심 걱정이 컸던 이지운은 생각보다 적은 업무량에 만족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T/F 업무를 맡으면서 평소 업무까지 소화할 생각에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럼 행사 당일까지, 진행 및 보고 사항은 다 김 비서에게 취합해 주세요.”
“네. 본부장님.”
이지운은 생긋 웃으며 업무 분장표에 적힌 현수막부터 멋지게 만들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겉보기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