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우선 제일 중요한 건 업체 섭외였다. 이지운은 민혜경 대리를 통해 작년도 행사의 현수막을 제작했던 업체를 알아냈다. 당시에 민혜경 대리의 친한 동기가 해당 업무를 맡았다고 했다.
“아, 그런데 여기 팀장님이 아는 분이 하는 업체여서 작년에도 여기서 하자고 억지로 밀어붙였단 얘기가 있어.”
“진짜요?”
“응, 다행히 별 탈 없이 끝나긴 했다는데, 태도가 좀 그랬다나 어쨌다나… 말로는 팀장님 시조카가 대표라는 이야기도 있고… 뭐, 그렇긴 한데 일단은 업체 번호 줄게.”
이지운은 마음속으로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도 일은 일, 행사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면 되겠지란 생각으로 업무에 임했다.
현수막 제작을 위해서는 우선 문구를 잘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팀원들과 팀장, 부장에게 여러 차례 의견을 구해 <세화가 걸어온 21년, 앞으로 날아갈 100년의 꿈>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결정한 후, 디자이너에게 시안을 맡겼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고급스러우면서도 무난한 시안이 나왔다. 이지운은 그대로 인쇄해서 행사 이틀 전까지 배달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 업체 측에서 별안간 전화가 걸려 왔다. 일정이 밀려 행사 당일 오전에나 완성이 될 것 같다며, 대신 현장으로 퀵서비스 배달을 해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저희 중요한 행사라서 현수막 꼭 사전에 받아야 하는데요.”
-저희가 안 드린다는 게 아니잖아요. 당일 아침에 퀵으로 보내 드린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적반하장인 업체 측의 논리에 이지운은 불길함을 느꼈다. 전임자가 말했다는 태도 문제가 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행사 당일이 되어서도 오전에 나타나기는커녕 식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배송기사를 보냈다.
꽃 배달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우왕좌왕 달려서 퀵 기사를 만나고, 영수증을 끊고, 이지운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리고 호텔 로비에서 현수막을 확인한 이지운은 제품을 확인함과 동시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폰트가 과장 조금 덧보태서 손톱만 했다. 시안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무척이나 옹졸한 모양새로 와 버린 것이다.
“이 주임! 이게 뭐야. 나랑 장난해?”
로비에 같이 서 있었던 팀장이 이지운에게 삿대질을 했다.
“일을 시켰으면 똑바로 하란 말이야. 미리 준비했다면 이런 꼴 안 봤을 거 아닌가!”
민머리에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를 높이는 탓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래 가지고는 본부장님 얼굴을 어떻게 봐!”
팀장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 순간이었다. 갑자기 로비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이지운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서태천이 저벅저벅 다가와 무심한 얼굴로 현수막을 쳐다보았다.
“전 상관없습니다만.”
“보, 본부장님!”
팀장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글씨가 작으면 더 집중해서 쳐다보게 되지 않을까요? 전 도리어 좋다고 봅니다.”
“그, 그러십니까? 제가 차마 본부장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이고.”
팀장이 바로 태도를 바꾸어 굽실거렸다.
“그리고 우리 직원 기죽이지 마세요.”
“예?”
팀장과 이지운이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은 마케팅 1팀 직원이기에 앞서서 저희 행사 T/F 소속 직원입니다. 화를 내고 꾸짖어도 제가 해야지 않겠습니까, 팀장님.”
“아… 아,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이 주임. 이거 가서 달아요.”
이지운은 놀란 얼굴로 서태천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서태천은 슬쩍 고갯짓을 해 보였다.
“어서 가요. 늦겠습니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이지운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서둘러 메인 연회장으로 향했다. 현수막을 설치하고 사다리에서 내려온 다음, 그는 비상구로 향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공간이 필요했다.
“….”
회사 생활 너무 힘들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도 없이, 책임을 따지기도 전에 이지운은 전신에 힘이 쫙 빠졌다. 가끔씩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이지운은 강한 회의감을 느꼈다.
“하… 힘들어.”
그래도 꽃 검수하려면 얼른 다시 나가야지. 마음을 가다듬은 이지운은 입술을 꾹 깨물고 비상구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서태천이었다.
“이 주임.”
“본부장님.”
잠깐 적막이 흘렀다. 이지운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말을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요. 잊어버려요.”
“…정말 감사해요.”
지난 일주일간 꽃다발 컨셉을 손수 정하느라 새벽 화훼 시장에 가고, 시간을 쪼개 현수막 시안을 고르고, 배송받는답시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을 서태천은 다 알고 있다. 그런 노력이 함께 사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고생 많았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거, 다 알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이제 나가죠. 식 시작됩니다.”
“네!”
서태천의 말에 이지운은 마음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기분 탓인지 이지운의 씩씩한 대답에 서태천이 미소를 지은 것도 같았다.
이지운은 서태천과 시간 차를 두고 비상구에서 나갔다. 연회장으로 들어가, 원형 테이블의 지정석에 앉자 곧 식이 시작되었다.
“서형호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맞추어 서 회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직원들이 만들어내는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단상에 선 그는 곧 연설을 시작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자택에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던 인자한 회장님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최고 경영자의 위엄이란 게 저런 걸까. 이지운은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서 회장의 연설을 경청했다.
“친애하는 세화 가족 여러분. 지난 21년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다 같이 번영할 수 있는 세화의 미래를 위해 오늘 새로운 직원 복지 혜택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복지 혜택? 갑자기 무슨 소리지. 이지운은 귀를 쫑긋 세웠다.
“요즘 출생률이 크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세화 가족들은 자녀 양육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내 어린이집, 당장 확충하겠습니다.”
와. 좋은데? 주변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소곤거리면서 서 회장의 정책을 칭찬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산모, 산부 보호! 세화가 앞장섭니다. 산전 육아휴직을 적극 실시해 임신이 확인되는 즉시 휴직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와아!”
직원들이 크게 박수를 쳤다. 산후 휴직 기간 중에서 일부를 가져와 출산 직전 한두 달을 쉬는 게 직장인들의 현실이었다. 배가 잔뜩 나올 때까지도 회사에 나와야 하니, 심적 육체적 부담감은 말로 하기가 어려웠다.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타진해 나가고자 하는 서 회장의 의지에 사람들은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지운은 이 정책이야말로 다른 오메가나 여자 동료들에게 큰 보탬이 될 것이라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자신이 임신해서 그 혜택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
본부장과 이사의 인사 말씀, 그리고 포상과 표창이 끝나자 이지운이 할 일도 끝났다. 꽃다발 100여 개를 나눠주느라 고생한 그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 위벽에서 시위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으으… 배고파.”
인원이 워낙 많으니 식사가 준비되는 데 시간이 오래 소요되었다. 세화 데이즈드 호텔 연회팀의 자랑, 이탈리아식 뷔페가 시작되었다.
이지운은 가장 먼저 뛰쳐나가 1등으로 접시를 채우고 싶은 욕망을 겨우 잠재우며 긴 줄에 합류했다.
와. 완전 내 취향이야. 아침에는 한식을 사랑했지만 지금 나는 파스타와 티라미수를 사랑한다.
이지운은 맛있어 보이는 카나페와 파스타를 한 움큼 집은 다음 라이브 바비큐 코너로 이동했다. 세프가 즉석으로 스테이크를 구워서 한 조각씩 나누어 주는 곳이라 인기가 좋았다.
오, 육즙 좀 봐라. 장난 아니네.
이지운이 순서를 기다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대화가 귓가를 자극했다.
“근데 그거 진짜야? 본부장님 이야기.”
“진짜라니까. 내가 동기한테 직접 들었다고.”
본부장이 뭘 어쨌다는 거지?
이지운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목소리가 낯선 것으로 보아 한 건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서태천 본부장이 웨딩홀 비는 날짜 싹 파악해서 자기한테 보고하라고 했다는 거지?”
“응. 근데 그걸 공식 채널이 아니라, 연회 팀장한테 개인적으로 물어봤대. 아주 은밀하게.”
“진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본부장이 호텔 예식장을 왜 알아봐?
이지운은 얼떨떨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내 생각인데, 본인 결혼식일지도 몰라. 비밀리에 진행 중인 거지.”
“에이, 설마. 그런 거면 이미 소문 쫙 났겠지. 열애설도 없잖아.”
“우리 같은 평사원이 뭘 알겠니, 두고 봐. 내 생각이 맞을걸.”
보이지 않는 손이 이지운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은밀하게 예식장을 알아보고 있다고? 서태천이 누군가랑 결혼을 해?
톡, 데구르르.
이지운의 접시에서 방울토마토 한 알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