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며칠 지나지 않아, 이지운에게는 야근할 일이 생겼다. 호텔 및 리조트별로 웨딩 시행 건수와 예약 현황을 취합해 보고하는 업무가 할당되었다.
다들 퇴근하고 어둠에 잠긴 사무실. 이지운 자리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이렇게들 결혼을 많이 해?”
화면을 빡빡하게 채운 엑셀 표의 숫자를 들여다보며 이지운이 중얼댔다.
“나 빼고 다 결혼하는 것 같네.”
이지운의 회사가 워낙 웨딩 쪽으로 특화된 호텔 리조트 기업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현황 통계상 분기 당 수십 건의 결혼식은 예사로운 숫자가 아니었다.
“후우….”
나도 결혼하고 싶다. 아무 놈이랑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서모 씨랑.
이지운은 이제 마음의 가닥이 섰다. 서태천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엉뚱한 오메가와 새로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피가 차갑게 식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폴인 러브. 아이 러브 유.
일이 그렇게 됐다, 심장아.
하라는 일은 하지 않고 자꾸 딴생각을 하며, 이지운은 혼자 얼굴을 붉혔다.
“일은 어느 천년에 다 하나? 엑셀이 끝이 없네.”
스크롤을 쭉쭉 내리고 탭을 왔다 갔다 하며, 이지운은 앞으로 몇 시간이나 더 앉아 있어야 퇴근할 수 있을지 대략적인 일의 얼개를 가늠해 보았다.
“지난 웨딩 현황은 다 정리가 됐는데… 예약 건 정리가 시간 좀 걸리겠구나.”
무심코 혼잣말을 하던 이지운이 얼굴을 굳혔다.
식장 예약…! 왜 잊고 있었지.
서태천이 예약이 빈 식장을 직접 수소문하고 있다는 루머를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뷔페 줄을 서면서, 근처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걸 두 귀로 똑똑히 들은 이지운이었다.
서, 설마… 이 엑셀 파일 안에 그 정보가 있는 건 아니지.
갑자기 심장이 덜컥하고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지운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마우스를 쥐었다.
“설마… 아닐 거야. 설마.”
탭을 눌러 메인 호텔의 식장 예약 현황을 알아봤다. 그때 들은 루머에 의하면 서태천이 알아보고 있는 홀은 최고급 VIP용으로, 하루에 딱 한 커플만 받는 특별한 곳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럼 더 파악하기가 쉬울 터였다.
탭을 누르자 앞으로 대략 1년간, 해당일에 VIP 식장을 빌릴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날짜 칸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 6개월 후쯤에 예약한 사람이 있긴 한데… 누군지를 모르겠네. 마스킹 처리가 돼 있어서….”
그런데 가만 보니 모든 웨딩홀을 3월 한 달간 통째로 빌린 사람이 있었다. 봄은 극성수기에 속하는 시기였으므로 홀 하나를 잡는 것도 엄청난 금액이 필요했다. 그런데 모든 식장을, 그것도 한 달 내내 비워두었다니? 이건 예사롭지 않았다.
이지운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더 자세히 표를 훑어보았다. 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구체적인 예식일이 정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름도 연락처도 다 가려져 있으므로, 이 파일만 가지고는 그게 누구인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이게 서태천은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한다.
나와의 이혼 시기에 맞춰서 외간 오메가와 식을 올린다면…! 부숴 버리겠어.
이지운은 갑자기 혼자서 눈을 부라리며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아냐. 아니야. 요새 우리 잘 지내고 있잖아.”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외간 오메가를 만난다고 치기에 서태천은 너무 바빴다.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대부분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내는데 언제 다른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주말도 웬만해서는 출근 아니면 이지운과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서태천이었다.
게다가 이지운을 대하는 태도도 크게 변함이 없었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했고, 무뚝뚝하지만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며, 딱히 눈에 띄는 일이 없는 요즈음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는 법. 이지운은 괴소문의 진실을 속 시원하게 밝히고 싶었다.
“본인한테 물어봐?”
씁. 만약에 맞다고 한다면…? 다른 오메가와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으니 너는 이혼 협조나 잘하라고 한다면 나 완전 망하는 건데.
“그건 안 돼…!”
이지운의 주특기인 망상이 도졌다. 상상 속 서태천은 미모의 배우자와 팔짱을 끼고서, 결혼식에 와서 축의나 듬뿍 하라며 비릿하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하아… 일하기 싫다. 집에나 가자.”
이지운은 자체 파업을 선언하고 어지러진 책상 위를 치웠다. 컴퓨터 전원을 막 끄려는데, 모니터와 데스크톱 본체 사이 사각지대에 웬 음료수가 하나 놓여 있었다.
뭐지?
집어 들어 확인해 보니 소화제인 명스까스였다.
“어…! 명스까스.”
내가 산 게 아닌데…? 난 오늘 또 체할까 봐 무서워서 점심시간에 약을 먹긴 했지만 그건 알약이었다고. 이건 드링크제잖아.
고개를 갸웃하며, 이지운은 혹시 이걸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짐작해 보았다.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옆자리 민 대리에게 지난 주말 체해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다. 하지만 민 대리가 그 이후로 약을 사 오거나, 의무실에서 명스까스를 얻어다 준 기억은 전혀 없다. 인성이 썩어 문드러진 팀장이 남몰래 선행을 베풀었을 리도 없고. 과장님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고.
“흠… 설마 기 대리님? 내가 아팠다는 걸 소문으로 들었을 수 있겠지.”
아니다. 기현진 대리라면 분명 쪽지를 남겼을 거야. 그 사람은 자기 어필에 목숨 거는 성격이니까….
그렇다면 대체 누굴까…?
서태천이 일반 직원 자리까지 와서 명스까스를 두고 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일단 마시자.
이지운이 드링크 뚜껑을 딴 다음 시원하게 원샷을 했다. 체기가 싹 가시면서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이지운에게는 작은 미스터리가 생겨났다.
“…어? 또다.”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책상 위에 명스까스가 올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웬 공짜냐 싶어 신나서 마셨지만,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기분이 묘해졌다.
누가 날 위해 이런 수고를 하는 거지?
너무 궁금하고 수상해, 꼭 범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아주 짧은 찰나 다녀가는 것인지 이지운은 번번이 범인을 놓쳤다. 그렇게 닷새째인 금요일이 되자, 그는 아예 점심을 포기하고 잠복해 범인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 주임님. 식사 안 해?”
“저 오늘 또 속이 안 좋아서요.”
“그래? 한번 체한 게 오래 가네. 그럼 오는 길에 죽이라도 사다 줄까?”
“아니에요. 편하게 드시고 오세요.”
“알았어, 그럼.”
민 대리와 팀원들이 우르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지운은 잠시 뜸을 들이며 사무실을 슥 살펴본 다음 일어서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에서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빼면 자신의 자리가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누가 내 소화기 건강을 챙기고 있는 게냐. 어디 얼굴이나 보자!
이지운은 부산스럽게 탕비실 안으로 숨었다가 고개를 내밀었다가를 반복하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기 대리님일 수도 있긴 해. 솔직히 말해서 가능성이 높지.
그렇지만 그분은 남몰래 슬쩍 음료수를 놓고 가느니 약국에서 박스째로 약을 구해 와서 쩌렁쩌렁 노래를 부르며 나타날 위인인데?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소화가 안 되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진 않아. 아무래도 팀이 떨어져 있다 보니 내가 점심을 겨우 소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오후가 되면 속이 부대껴 고생한다는 사실도 잘 모를 것 같은데…?
흠. 아니면 날 흠모하는 제3자가 있을 수도 있다.
이지운은 새로운 가능성을 도마 위에 올렸다. 기 대리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을 조용히 챙겨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은 나름 합리적이었다.
에이, 아니야. 난 평범 무난상인 걸.
가설은 즉각 폐기되었다. 이지운은 스스로의 외모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기에, 누가 자신을 탐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날 좋아한다면 나타나서 고백하거나 잘해 줄 것이지 소화제를 줘? 명스까스를 주면서 대시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걸. 커피면 모를까.
탕비실 안을 서성이며 가설을 정리했더니 시간이 좀 흘렀다. 아직 직원들이 식사에서 돌아오기 전이라 바깥은 조용했다. 아무런 기척 없는 바깥을 의식하며 이지운은 상념에 잠겼다.
…이렇게 조용하다는 건? 범인은 지금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그때였다. 저 멀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 소리는 외부에서 사무실로 들어올 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쳐다보는 본부장실, 분명 그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본부장이 아직 식사하러 안 갔었구나. 혼자 일하고 있었나 본데?
서태천이 외부 약속이나 임원들과의 미팅을 위해 따로 식사하는 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시간에 그가 본부장실에 있는 건 자연스러웠다. 이지운은 그냥 가만히 탕비실 안에 있기로 했다.
“…?!”
발소리가 들렸다. 본부장실 바깥으로 나온 서태천이 점점 이지운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왜 이쪽으로?
이지운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바깥 동태를 살폈다. 서태천이 한쪽 팔에 재킷을 건 채로 이지운의 책상에 다가가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저, 저건…! 명스까스다.
이지운이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