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럼 우리 이제부터 사… 사….”
“네. 사귑니다.”
“연… 연애를….”
“네. 잘해 보죠.”
이지운의 얼굴이 홍시빛으로 달아올랐다. 잡힌 손이 너무 뜨거워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네. 지운 씨.”
“헉. 무슨 씨요?”
지금 날 지운 씨라고 부른 거야?
이지운은 너무 놀라 정색했다. 서태천이 주먹으로 입을 막고 헛기침을 했다.
“지운 씨를 지운 씨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사귀는 사이인데 이 주임은 좀 건조하잖아요.”
무려 결혼한 사이에도 이 주임이라는 칭호를 달고 살았는데. 연애라는 것은 대체 뭐길래 로봇 서태천에게서 달달한 호칭을 이끌어내는 것일까. 이지운은 신기했고, 또 조금 감동적이었다.
“지운 씨도 날 본부장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줘요.”
“네?”
“삭막하지 않습니까.”
“그,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럴 때 서로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
에라이, 모르겠다.
“그, 그러면… 본부장님. 저도 본부장님… 앞으로 태천 씨라고 부를게요.”
이 정도면 되겠지? 무난한 것 같다.
“음… 일단은 그렇게 하죠.”
“일단은…이라뇨? 이다음에 뭐가 있어요?”
“나중에 여보나 자기란 표현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컥.”
이지운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누가 보면 돌고래가 수면으로 올라와 물줄기를 뿜는 광경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로 물을 아주 기똥차게도 뿜었다.
“이런.”
지배인이 황급하게 다가와 흰 냅킨을 건넸다. 서태천이 직접 그것을 받아 이지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아직은 면역력이 없나 보군요. 실은 나도 그렇습니다.”
“없…는 정도가 아니에요. 상상도 못 한 단어라서.”
“부담된다면 여보나 자기는 결혼식 이후에 다시 고려해 보는 걸로 하죠.”
그렇게 말하며 서태천이 웃었다. 이지운은 홀린 듯 그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에게는 뭐든지 긍정의 답을 끌어내는 힘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 식사 마저 하시죠.”
“네? 네.”
이지운은 창피함과 쑥스러움, 민망함을 못 이기고 접시에 코를 박았다. 방금 서태천이 냅킨으로 닦아 준 얼굴뿐 아니라 맞잡았던 손, 그가 스쳤던 모든 곳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
사귄다.
누구랑?
BBG랑 내가.
“그 사람이랑… 나랑… 연애를….”
이지운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승용차와 버스가 느릿하게 걷는 그를 향해 빵빵거렸다.
“아, 빨간불이네.”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길을 건너 회사 건물 앞에 섰다. 아까 집에서부터 따로 출발했지만 그쪽은 차를 타고 왔을 테니 이미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기분 이상해….”
회사 건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묘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원래도 아무것도 아닌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애인’ 사이가 되어 버린 남자가 저 빌딩 안에 있다니. 그렇다. 애인.
나 이지운과 서태천은 애인 사이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몰라.”
혼자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말았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 이지운을 보며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눈을 흘겼다. 하지만 이지운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온몸을 휩싸고 도는 강렬한 감동의 에너지를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을 뿐.
왜요. 제가 마케팅 본부장 서태천씨 애인 겸 배우자 되는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그렇게 묻기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이지운은 감정이 과잉한 상태였다. 오죽하면 월요일 9시를 맞이한 사무실의 암울한 분위기마저도 장밋빛으로 보였다.
발밑에는 구름이 깔린 듯 걸음이 사뿐하고, 손에 들린 서류 가방은 깃털 같구나!
“여러분! 좋은 아침입니다!”
“이 주임, 아침부터 기운이 펄펄 넘치나 보네. 젊어서 좋겠어.”
“아, 제가 그래 보이시나요?”
그가 활기차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더니 팀장의 얼굴이 썩어 있었다. 파티션 너머 부장은 웬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는데, 그의 표정 또한 눈에 띄게 어두웠다.
어…? 뭐지. 분위기 안 좋아.
이지운도 최소한의 눈치 정도는 탑재하고 있었기에, 사무실 분위기가 ‘영 아니올씨다’라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민혜경 대리에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분위기가 안 좋아 보이는데… 기분 탓인가요?”
“주임님. 메신저로 이야기해 줄게.”
민 대리가 주변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이지운은 서둘러 컴퓨터를 켜고 사내 메신저에 접속했다. 민 대리가 빠르게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민혜경
팀장님 자리 교체될 것 같아요.
네? 왜요? 오신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고 지금 인사 발령 철도 아니잖아요.
민혜경
그래서 팀장님 부장님 얼굴이 안 좋은 거예요. 실은 그냥 떠나시는 게 아니라 감사팀에서 조사 나온다고, 대기 발령 조치 되셨어요.
대기 발령이라면 잠시 팀장 직급을 박탈당한다는 뜻으로, 중징계가 내려지기 직전 상황에 속했다. 이지운은 적지 않게 놀랐다.
설마 징계 건이에요?
민혜경
그 시조카인지 누군지 먼 친척이 한다는 업체에서 우리 팀이고 다른 팀이고 다 홍보 물품 맞췄던 거 알죠?
지운 주임도 저번에 허접한 현수막 때문에 개고생했잖아.
창립기념일 행사 때 팀장의 친척이 하는 업체에 현수막을 맡겼다가 말도 안 되는 물건이 뒤늦게 도착해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때 서태천이 자신을 보호해 주고 편을 들어줘서 고마웠던 기억도.
아… 알죠. 설마 그 업체 때문에 감사 뜬 거예요?
민혜경
아직은 루머일 뿐이긴 한데, 거기로 일감 몰아 주고 자기한테 30%씩 리베이트가 떨어지게 했었나 봐요.
그게 어떻게 해서 본부장님 귀에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 본부장님이 아까 직접 오셔서 팀장님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어요.
뭐? BBG, 아니 태천 씨가 방금 사무실에 그런 선언을 하고 갔다고?
이지운은 놀란 티를 내지 않고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팀장 교체도 교체고, 팀 분위기며 부 분위기며 당분간 최악일 테고. 감사팀은 죄 없는 우리팀을 쥐 잡듯 잡겠구나.
…그리고 태천 씨 마음도 안 좋을 거야. 티를 안 내서 몰랐는데… 이런 일을 남몰래 처리하고 있었구나.
이지운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지운은 메신저 창을 껐다. 대신에 핸드폰 메신저 앱에 접속해 서태천을 찾았다. [BBG]라는 호칭 대신 간밤 [ㅌㅊC]로 변경된 프로필을 터치한 다음 조용히 타이핑을 쳤다. 분위기가 흉흉하니 핸드폰 만지는 것도 눈치가 보여, 아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자판만 건드렸다.
이야기 들었어요. 힘내세요.
이렇게 쳤다가 이지운은 메시지를 싹 지웠다.
내가 부하인데 본부장한테 힘내라고 위로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이거 말고 좀 더 다정다감하면서 힘을 돋워 주는 그런 표현은 없을지….
머리를 조금 굴려, 이지운은 그냥 발랄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팀장 관련한 이야기는 굳이 입에 올려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이모티콘이나 하나 쏴 줘야지. 활기찬 아침입니다. 월요일 이겨내 보아요. 이런 이모티콘 없나?
이지운은 메신저에서 제법 많은 이모티콘을 보유 중이었다. 대다수는 돈을 주고 유료 다운로드 받은 것이지만, 일부는 공공기관이나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웹툰 연재처에서 무료 배포한 것도 섞여 있었다. 귀엽거나 기발하면 일단 다운로드 받고 보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적재적소에 알맞은 이모티콘을 잘 써 왔다.
어디 보자… 되도록이면 귀여운 걸로 보내 주고 싶은데. 어느 이모티콘이 좋을까?
사귀는 사이가 되다 보니, 말 한마디 메시지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었다. 간밤에도 리조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극히 말을 아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수다를 떨었을 텐데 괜히 어색하고 데면데면해 무슨 말을 할까 생각만 하다 보니 어느덧 집이었다.
“흠….”
아무리 뒤적여 봐도 알맞은 이모티콘이 보이지 않았다. 이지운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탭까지 들어가 샅샅이 이모티콘을 뒤졌다.
아이고,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그가 자포자기하면서 핸드폰을 거꾸로 엎었다. 그러는 바람에 검지가 화면을 터치해, 한 이모티콘이 서태천에게 전송되었다.
나중에 연락해야겠다. 점심시간 이모티콘 찾아서 밥 맛있게 먹으라고 해야지.
이지운은 살며시 올라가는 광대를 꾹꾹 눌러준 다음 업무망에 접속했다. 그다음 무심코 핸드폰을 확인했다가 경악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수, 숙려둥이 이모티콘이 전송됐잖아!
[여보. 사랑합니다.]
숙려둥이가 답지 않게 눈을 그윽하게 뜨고 입술을 쭉 내민 다음,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이모티콘이었다. 숙려둥이 머리만 한 대형 말풍선에서 <여.보.사.랑.합.니.다.>라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악! 보내도 왜 이런 걸!
태천 씨! 방금 이모티콘은 실수예요. 죄송합니다.
우다다 타이핑한 후 이지운은 머리를 감싸 안고 책상에 엎드렸다. 심지어 서태천은 읽어 놓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제발 답장해…! 차라리 놀리거나 웃어 줘…!
그게 그들이 연인이 된 후 처음 주고받은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