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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45화 (45/100)

45화

연이어서 생소한 요리들이 하나씩 서빙되었다. 낯선 재료에 익숙하지 않은 비주얼이라 맛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지운의 입맛에 찰떡이었다.

“진짜 맛있어요!”

“좋아하니 다행입니다.”

“스테이크 소스 너무 맛있네요. 여기다가 밥 비벼 먹으면 딱이겠는데….”

감칠맛 나는 소스가 입맛을 돋워,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밥을 찾았다.

“아차. 이런 데서는 밥 찾는 거 아니죠. 빵도 아니고… 창피하네요.”

“아닙니다. 창피할 게 뭐 있어요.”

서태천이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렀다. 그러더니 뭐라 뭐라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주문을 넣었다.

“지금 뭐하신 거예요?”

웨이터가 자리를 뜨자 이지운이 물었다.

“샤프란 넣어서 찐 밥이 있냐고 물었어요.”

“네? 밥이요?”

“이 레스토랑이 위아래층으로 나뉘어서 부부 쉐프가 운영하는 곳이더라고요. 아래층이 스패니시 레스토랑이라 혹시나 하고 여쭤본 겁니다. 그쪽 요리에는 쌀을 많이 써서요.”

“진짜요?”

“일단 주방에 의사 전달은 되었으니 기다려 보죠.”

스테이크 소스에 밥 비벼 먹는다고 창피해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날 부추기고 있잖아? 이 알파, 최고다.

이지운은 가슴속에서부터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아로스(쌀밥) 드리겠습니다.”

잠시 뒤 웨이터가 작은 접시에 담긴 밥을 들고 왔다. 노릇한 비주얼에 향긋한 냄새가 나,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웠다.

“우와….”

“흰 쌀밥은 아니지만 그래도 먹어 봐요. 맛있을 것 같네요.”

“진짜… 진짜 밥이다.”

한입 떠먹어 보니 쌀이 쫄깃하고 고소했다.

“본부장, 아니 태천 씨도 드세요.”

“그래요. 나도 한번 먹어 보죠.”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밥을 나누어 먹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이 아닐까. 이지운은 행복해하며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입에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식사 다했으면 테라스 나가서 칵테일이라도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서태천이 레스토랑에서 문 하나 너머에 위치한 테라스를 가리켰다. 유리문 바깥으로 비치는 풍경을 보니 야외에 벤치형 테이블을 놓고 곳곳에 난로와 인공 조명을 아름답게 장식해 분위기가 남달랐다.

“좋아요. 나가요.”

“그럼 이동하죠.”

서태천이 앞장서며 테라스로 걸어갔다. 이지운이 뒤를 따랐다. 프라이빗한 구조의 테라스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으며, 분위기가 아늑했다.

요즘 해가 일찍 지다 보니 벌써 어둑어둑한 가운데, 고지대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어 뷰가 환상적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강 다리가 있었고 그 위로 달리는 차들이 브레이크등을 붉게 밝혔다.

강 건너로는 반짝반짝, 고층 빌딩들이 제각기 노랗고 하얗고 또 파란 빛깔을 뿜어냈다. 야근과 교통 체증으로 인해 빚어진 빛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었다.

“뷰가 괜찮죠?”

“너무 예뻐요.”

“좋아하니 다행입니다. 좀 앉을까요?”

“네!”

이지운은 서태천이 이끄는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 두 명이 나란히 앉는 벤치식 좌석이었다. 연인끼리 방해받지 않고 한강 뷰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의자를 배치한 것 같았다.

“저, 그런데 우리 말고는 사람이 없네요? 아까 밥 먹을 때도 그렇고 여기 테라스도 그렇고.”

고급스럽고 맛도 있어서 장사가 잘될 것 같은데 아닌가? 테라스 뷰도 좋아서 칵테일이나 와인 마시면서 데이트하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파리 날리지? 이지운이 아까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었다.

“우리가 통으로 빌려서 그렇습니다.”

“네?”

이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레스토랑은 최소 5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땅값 비싼 이 지역에서도 유난히 비싼 곳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이 식당을 다 빌려?

“오늘은 우리 말고 아무도 못 들어와요.”

“태천 씨….”

“단둘이 조용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런 분위기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지운은 장밋빛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서태천은 메뉴판을 이지운에게 양보하고 천천히 읽어 보라고 한 다음 위스키 온 더 록을 주문했다.

“맞다, 술 잘 드셨죠.”

“그냥저냥 합니다. 지운 씨는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전 좀 신 맛 나는 게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심하게 시고 단 것은 별로고… 저기, 어떤 게 괜찮을까요? 추천 좀 해 주세요.”

“다이키리가 라임즙이 들어가서 괜찮을 거예요. 럼을 조금 덜 넣어 달라고 하면.”

“아, 그럼 그렇게 할게요.”

단둘만을 위한 레스토랑이라는 말이 가짜는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칵테일과 위스키가 나왔다.

“엄청 빨리 나왔네요.”

“마셔 봐요. 꽤 새콤하면서도 맛있을 겁니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달콤한 맛 조금에 새콤함 많이, 그러면서도 술맛이 아주 없지는 않은 칵테일 맛이 괜찮았다. 이지운은 쭉쭉 술을 들이켜며 연신 감탄했다.

“쿠바 사람들이 좋아하는 칵테일이라고 하더군요.”

“쿠바에 가 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들 입맛이랑 저랑 통하는 건 알겠어요.”

기분 너무 좋다. 야경 보면서 태천C와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니, 세상에. 이건 진짜 완벽한 데이트잖아.

그러고 보니까 제주 러브 빌리지에서 기 대리와도 칵테일을 마셨었다. 그때는 조그마한 술 한 잔에 뭐 이렇게 비싸게 받나, 맛도 음료수 같고 별로다 싶었는데 지금은 칵테일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료 같았다.

“그렇게 맛있습니까? 계속 웃네요.”

“네. 진짜 맛있는데 한번 드셔 보실래요?”

“흠, 그러죠.”

서태천이 이지운이 건네는 잔을 그대로 받아들고 칵테일을 마셨다. 하필이면 이지운이 입술을 댔던 부분에 입술을 가져다 댔기에, 이지운은 살짝 놀랐다.

간접 키스다! 으악!

일전에 페로몬이 흘러나와 이성을 잃고 키스한 적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이지운으로서는 이 간접 키스가 놀라웠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리고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맛이 괜찮군요.”

서태천은 상대적으로 무감하게 대답했다. 맛을 품평하는 로봇 같기도 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이지운의 눈에는 멋있어 보였다.

“저도 태천 씨 거 마셔 볼래요.”

한 번 더 간접 키스 해야지.

이지운은 음흉한 마음을 먹고 서태천의 잔을 가리켰다.

“이건 좀 독할 텐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이지운은 호기롭게 술잔을 목구멍으로 탁 털어 넣었다.

“으아!”

화르륵, 목구멍이 지져지는 느낌에 이지운이 괴로워했다.

“이런. 괜찮아요?”

“아… 제 입맛은 아니네요. 그래도 맛있었어요.”

그래도 은근슬쩍 2회차 간접 키스를 해냈기 때문에 이지운은 보람찼다.

난 너무 음흉한 오메가인가? 하지만 어쩌겠어. 좋은걸!

“취기가 오르나 보군요. 얼굴이 빨갛습니다.”

“아… 그래요?”

“뺨이 빨개졌어요.”

서태천이 이지운 쪽으로 고개를 틀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갑작스런 접촉에 이지운은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벤치식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기 때문에 무릎이 자연스럽게 닿았고, 몸이 가까워진 만큼 서태천이 풍기는 향기도 더욱 진하게 쏟아졌다.

‘과감하게 덮쳐.’

그때 민 대리의 조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용기를 내서 먼저 덮친다라…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하셨지. 그래. 지금 이 무드, 분위기… 딱 좋아. 태천C가 뭔가를 해 주기만 기다리지 말고 나도 용기를 내 보자.

이지운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마침 이 야외 공간에는 웨이터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일을 벌이기 좋다는 말이었다.

어…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갑자기 덮쳐? 아니 그런데 여기서는 입술을 갖다 댈 각도가 안 나오는데…. 잠깐 앞쪽에서 얼쩡거리다가 확 덮칠까?

이지운이 고민하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때였다.

“지운 씨.”

“네?”

“애인 사이가 되니까 어때요?”

“아… 저희… 사귀니까 어떻냐는 거죠?”

“네.”

서태천의 질문에 이지운은 쭈뼛거리며 눈을 깔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실감이 안 나요. 며칠이 지났는데도 본, 아니… 태천 씨랑 저랑 애인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고 꿈 같아요.”

“왜 그렇죠?”

“음….”

조금 솔직해져 볼까. 취기가 올라서인지 이지운은 마음속에 묻어 놨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우린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집에 살고 있고, 한 회사에서 가끔 얼굴을 마주치잖아요. 어떤 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냐 하면, 아직까지는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려워서요. 호칭이 바뀌었다 정도?”

“음… 그 점이 서운하지는 않았습니까?”

서태천이 이지운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쌀쌀한 바람과 뜨거운 손의 기운이 한 번에 자신을 스치자, 이지운은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까 마신 술의 취기가 점점 더 올라오면서 얼굴은 달아올랐고 심박은 빨라졌다.

“서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요. 저한테는 우리가 애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랬군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고마울 것까지는….”

“아무래도 내가 지운 씨한테 실감을 줘야겠군요.”

“네?”

“가만히 있어요.”

뭐지?

이지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태천을 올려다본 때였다. 서태천의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쪽, 하고 입술에 입맞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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