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저는 좀 씻겠습니다.”
“아, 네…! 얼마든지.”
서태천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욕실로 향했다. 걸음이 묘하게 불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지운은 모른 척 허공을 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서태천의 걸음이 불편한 것이라면 부끄러워서 접싯물에 코를 콱 박고 싶었다.
“하… 겨우 살았네.”
곧 욕실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자, 이지운은 탈력감을 느꼈다.
“방금은 좀 위험했어.”
완전히 야릇야릇한 그런 분위기였어!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직전에 진짜 힘들게 탈출했어.
이지운은 자신을 구원해 준 택배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이것 때문에 산통이 다 깨졌지. 아니야, 지금은 산통을 깨는 게 다행이었을지도….”
이지운은 복잡한 머릿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택배 상자나 뜯어 보기로 했다.
나 요새 따로 시킨 것도 없는데 이게 뭘까. 내 건 아니니 태천C 택배일까? 흠… 온라인으로 쇼핑하는 습관은 없는 것 같던데.
실제로 서태천은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비서를 시켜 사 오게 하거나, 백화점에서 퍼스널 쇼퍼와 함께 물건을 구입했다. 그 외에 식료품은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책임지고 다 챙겨 주었기 때문에 그가 나서서 택배 주문을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럼 대체 정체가 뭐냐, 너.
이지운은 택배 상자를 들어 올려 주소란을 보았다.
“어? 발신인이… 건강 가족부?”
가만 보니 발신인은 건강 가족부 산하 이혼 숙려 사업단 홍보팀이었고, 수신인은 서태천-이지운이었다.
우리한테 온 거네. 그런데 여기서 왜 택배를 보냈지…?
“설마.”
순간 이지운의 머릿속을 스치는 강렬한 이미지가 있었다.
원활한 부부 관계 유지를 위한 야시시한 물건이구나!
방금의 스킨십으로 머릿속이 썩어 버린 이지운은 물건의 정체를 시뻘건 색안경을 쓰고 보았다.
어른들의 물건이야. 틀림없다. 지난번에 보니까 안전한 히트-러트 사이클 보내기 방법도 홍보하고 어쩌고 하던데… 숙려 커플들은 역으로 많은 밤을 함께 보내야 하니 위험한 물건을 보냈을 거야.
이지운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새빨개졌다.
태천C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얼른 뜯어 보자.
이지운은 거실 서랍장에서 서둘러 커터 칼을 찾아와 상자를 좍좍 뜯기 시작했다. 만약에 부끄러운 물건이라면 서태천이 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처리를 하든지 활용을 하든지, 어쨌든 자신이 먼저 검수를 하고 싶었다.
“뭐야!”
하지만 상자를 열어 본 이지운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내용물은 그가 상상했던 야리꾸리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주 건전하면서도 쓸모없는 내용물로 상자 속이 가득 차 있었다.
“죄다 숙려둥이 굿즈야.”
이지운은 인상을 쓰며 하나씩 물건을 꺼냈다. 제일 위 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숙려둥이 솜인형이었다.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노란색으로 가만 보니 아래쪽에 손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보였다.
“인형 놀이 하라는 건가. 세금 낭비 제대로 하네.”
나머지 물건도 두통을 유발하는 것들이었다. 숙려둥이 머리통이 달린 볼펜, 숙려둥이 포스트잇, 숙려둥이 캐릭터가 각인된 양치 세트 따위가 자질구레하게 들어 있었다. 또한 상자 맨 밑바닥에는 알록달록한 컬러의 인쇄 엽서가 들어 있었다.
숙려를 시작한 커플들에게 숙려둥이 굿즈 세트를 보내 드립니다.
사랑이 가득한 숙려둥이와 함께 부부 사이!
한번 The 숙려해 보세요♥
“하… 허무해.”
별것도 아니구만, 거창한 척 가족 건강부 이름을 달고 보냈어.
김이 팍 샌 이지운은 욕실 쪽을 쳐다보았다. 서태천은 평소보다도 훨씬 길게 샤워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지운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나올 때까지 숙려둥이 인형이나 가지고 놀아야겠다. 인형에 솜을 아주 빵빵하게 넣었나? 통실통실 느낌 좋다.
할 일이 없었던 이지운은 양손에 숙려둥이 인형을 하나씩 끼웠다.
혼자서 원맨쇼를 하려니 좀 어색하고 뻘쭘하기는 했지만 평소 드라마를 틀어 놓고 역할에 빙의해 대사를 읊는 것이 이지운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습관 어디 안 간다고 바로 과몰입이 나왔다.
난 노란색 숙려둥이, 아니 서태천의 애인 이지운이다. 단지 숙려둥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파란색의 숙려둥이? 너는 바로 태천 씨다.
“여보, 사랑해요.”
이지운이 얼마 전 보냈던 메신저 이모티콘을 흉내 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노란색 숙려둥이를 살살 흔들며 입을 벙긋거리는 시늉을 하니 나름 애교 넘치는 비주얼이 연출되었다.
오, 이거 나름 재밌는데? 그럼 이번엔 파란색 숙려둥이 차례지.
“나도 사랑합니다, 여보.”
목소리를 그윽하게 깔며 서태천의 목소리를 흉내 내 보았다. 닭살이 쫙 돋으며 말초 신경이 짜릿하게 자극되었다.
“악!”
어떡해, 이거 생각보다 재밌어!
이지운이 발버둥을 치며 소파를 뒹굴었다. 재미가 들린 그는 내친김에 응용 연기를 해 보기로 했다.
“여보, 우리 2세 말이에요. 이름은 뭘로 지을까요?”
노란 숙려둥이를 파란색 숙려둥이의 어깨에 기대게 하며 이지운이 물었다.
“흠. 글쎄요. 우리 사랑하는 지운 여보는 어떤 이름이 좋습니까?”
“전 여보가 하자는 대로 하겠어요.”
“그럼 일단 아이부터 만들어야겠군요. 애도 없는데 이름은 지어 뭐 합니까.”
“아, 맞네요! 그러면… 오늘 어때요?”
이지운이 키득거리며 인형극에 푹 빠져 있는 사이, 욕실의 물소리를 그쳤다. 저벅저벅, 실내화를 신은 발소리가 등 뒤로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이지운은 계속 떠들어 댔다.
“지금 뭐 합니까?”
“아악!”
불쑥 뒤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뒤를 돌아본 이지운은 회색 가운 차림의 서태천을 보고 자지러졌다. 손을 파닥거리자 파랗고 노란 인형이 허공을 날았다.
“다… 다, 보셨어요?”
“음. 처음부터는 못 보고 작명을 위해 관계를 갖자는 데부터,”
“아악!”
너무 창피해!
이지운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시뻘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지만, 한번 달아오른 얼굴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진 않았다.
“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습니다. 그런데 2세 이름을 벌써 고민하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 그냥!”
“작명이라면 그쪽으로 저명한 선생님께 부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음… 말마따나 애도 없는데 이름만 지을 건 아닌 듯하군요.”
“네?!”
이지운이 팔로 엑스 자를 그려 몸을 막았다.
“으아! 안 돼!”
중심을 잘못 잡는 바람에 기우뚱, 뒤로 쓰러지려는 찰나 서태천이 그의 허리를 받쳤다.
“오늘 밤 만들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아… 아니, 그게… 죄송, 고맙… 아니.”
이지운은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있기 힘들어 차라리 얼굴을 돌렸다. 서태천이 이지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죄송할 일도 고마울 일도 아닙니다. 그냥 언제냐의 문제일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다음, 서태천은 수박 속살처럼 뻘겋게 익은 제 애인을 보며 웃었다.
“씻고 와요. 인형 정리는 내가 해 놓겠습니다.”
“네… 네!”
이지운은 욕실로 도망치듯이 달려갔다. 날은 추웠지만 몸에 열이 너무 올라 냉수마찰을 해야 할 듯했다.
***
부끄러움과 창피함으로 범벅이 되어 그런지 거울 속 이지운은 폐인 몰골이었다. 힘겹게 샤워를 하고 욕조에 찬물을 받아 몸을 푹 담갔다.
“이게 뭐야… 동네 창피하게.”
욕조 안에서도 자꾸만 오늘의 수치스러운 일들, 서태천과의 위험 야릇한 텐션이 떠올라 첨벙첨벙, 이지운은 발장구를 쳐야 했다.
“후우… 그렇지만 태천 씨 말마따나 언젠가는 닥칠 일이야.”
안 해 봤다고, 무섭다고 피하기만 하면 그건 부부 사이라고 할 수 없지. 우린 무려 연애 중인 부부 사이… 결혼 중인 애인 사이? 뭐, 여튼 그런 거니까 어른의 사랑은 필수!
“언제 할까… 미리 2주 전쯤 예고하고 마음 준비할 시간 줬으면 좋겠다.”
이지운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께에 손을 얹어 보고, 또 부풀어 오른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모든 일이 꿈 같았다.
한참 찬물에서 목욕을 하고 잠옷을 걸친 다음, 이지운은 침실로 직행하지 않고 주방으로 갔다. 하루 사이 기운이 허해진 것 같아 건강 음료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가 잘 정리해 놓으셨네.”
냉장고를 열어 보자 야채 칸에 팩에 포장된 한약이 빼꼭히 수납돼 있었다. 지난여름 서태천의 어머니가 아들 먹이라고 전해 준 것으로, 여차저차 이지운이 훔쳐먹다가 중독되어 지금도 2-3일에 한 번씩은 마시는 중이었다. 서태천은 한약 따위 관심 없다고 말했었고 그 이후로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언급이 없었다.
간만에 이거나 한잔해야겠다. 이걸 먹으면 이상하게 기운이 도는 느낌이란 말이야. 양기가 가득 찬달까…?
오메가인 자신이 양기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몰랐지만, 이지운이 느끼기에는 딱 그 느낌이었다. 웅장한 양기가 몸 안에 들어차는 그런 감각 말이다.
“크아. 좋다.”
시원하게 약을 들이켜고 입안을 헹군 다음, 이지운은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