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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57화 (57/100)

57화

상대방은 그럼 그렇지, 두 분은 정말 잘 맞는 한 쌍인 것 같다며 덕담을 해 주었다.

남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지운은 이렇게 다른 커플들한테서 ‘서태천과 참 잘 어울린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지운에게 있어서 서태천과의 만남은 소행성과의 충돌 급으로 충격적이고, 또 우연했으며, 피해갈 수 없는 재해와도 같은 만남이었다. 처음 가족 관계 증명원을 떼어 보고 잠시 혼절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소행성이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아 주었으면 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위성이었던 것처럼.

잘 씻은 상추와 깻잎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니 서태천은 잘 달궈진 숯불 앞에서 이지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먹지 뭐 했어요!”

“지운 씨 기다렸죠.”

그 말이 또 듣기 좋아 이지운이 생긋 웃었다.

“저 고기 구워 볼래요.”

“조심히 해요. 이 장갑 끼고.”

서태천이 건네주는 장갑을 끼고, 이지운은 집게를 쥐었다. 먹음직스러운 한우를 그릴 위에 올리자 맛깔스러운 연기가 확 피어오르면서 육즙이 좔좔 끓었다.

“와! 진짜 맛있겠다. 냄새 좀 봐.”

“같이 뒤집을까요?”

“네!”

두 사람은 웨딩 케이크 자르듯이 서로 손을 겹쳐 고기를 뒤집었다. 그게 뭐가 재밌다고 하하 웃고 난리가 났다.

서태천이 가위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이지운의 입에 넣어 주었다.

“너무 맛있어요. 와, 눈앞에 막 대관령 목장이 스쳐 가는 듯한 느낌.”

“그 정도입니까?”

“태천 씨도 얼른 먹어 봐요.”

이지운이 상추 물기를 탈탈 털어 소고기를 야무지게 세 점 쌌다. 서태천의 입에 들이밀어 주니 그가 잘 받아먹었다.

“쌈이 맛있군요. 역시 지운 씨가 싸서 그런가 봅니다.”

“그래요? 그럼 하나 더 드세요.”

서태천과 이지운은 서로 한입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요란스럽게도 고기를 먹었다.

바비큐를 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서태천이 장작을 가져와 텐트 앞 화로에 작은 모닥불을 만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둘만의 캠프파이어인 셈이었다.

이지운은 코펠로 어묵탕을 끓이고, 집에서 가져온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접이식 테이블과 휴대용 와인잔을 곁들이니 소박한 술상이 완성되었다.

“어묵탕에 와인이라, 좋네요.”

“잘 어울릴까 모르겠어요.”

“도수 낮은 화이트 와인이라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일단 이거부터 먹어요.”

서태천이 마시멜로 꼬치를 이지운에게 건넸다. 모닥불에 잘 그을린 마시멜로가 빵빵하게 부풀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와! 너무 귀엽다. 저 이거 사진 찍을래요.”

“잡아 줄게요. 찍어요.”

서태천이 마시멜로 꼬치를 들고 있는 동안 이지운이 사진을 찍었다.

“저 이런 거 처음이거든요. 특히 SNS에서 모닥불이랑 마시멜로 꼬치 같은 거 보면 얼마나 따라 하고 싶던지.”

“그랬어요?”

“네. 캠핑을 와 본 적이 없어 가지고… 저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컸거든요. 그것도 엄청 시골에서요.”

회상에 잠기는 이지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도 성인 되고 나서 해외에서 아웃도어 캠핑장 가 봤지, 국내에서는 가족 캠핑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부모님이 저 어릴 때 이혼하셔서요. 놀이공원이든 어디든 세 명이 놀러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 죄송해요.”

“뭐가 죄송합니까. 사실인데요. 대신 앞으로 우리 둘이 많이 오면 되죠. 아이 생기면 그 아이까지 함께하고요.”

앞으로 우리 둘이. 그리고 먼 미래에는 아이까지. 그렇게 말하는 서태천 때문에 이지운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연하게 그려 왔던 두 사람의 미래가 조금씩 구체화되는 것 같았다. 같은 집에 살면서 같이 출근하고, 주말이면 이렇게 공기 맑은 캠핑장에 와서 맛있는 것을 먹고.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도 이지운과 서태천의 일상에 편입될 것이다. 아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안, 서태천의 검은 가운 자리를 비우고 가득 찰 아기 옷.

나 좀 울컥할 것 같은데…?

이지운은 코끝이 시큰해 자꾸만 눈을 깜빡이게 됐다.

“그런 의미로 말입니다, 지운 씨.”

“예?”

“잠시만 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뭔데요?”

“기다려 주십시오.”

갑자기 서태천이 캠핑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차로 향해 무언가를 꺼내왔다. 바로 태블릿 PC였다.

“이걸 왜…? 같이 영화 보자고요?”

화질도 좋고 화면도 큼직한 태블릿이라, 영화 같은 것을 봐도 괜찮을 듯했다. 그런데 서태천이 실행한 것은 동영상이 아니라 웬 문서였다. 그것도 아주 딱딱한 양식에 무려 고딕체로 작성된….

이력서였다.

“이게 뭐… 헉. 본부장님 이력서잖아요!”

“예. 맞습니다.”

“이… 이걸 왜 보여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대화를 통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사전에 정보를 알아 두고 그걸 바탕으로 이야기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이게 적합하다는 판단이 들더군요.”

서태천이 문서를 확대시켰다. 그러자 조각처럼 잘난 증명사진부터 생년월일, 혈액형, 형질, 서울특별시 출생 등 오만가지 개인 정보가 촤라락 펼쳐졌다.

“이거 대외비 아니에요?”

“그렇겠죠.”

무려 한 그룹의 임원이자 차기 회장의 이력서를 들여다보고 있다니, 이거 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나 비서실 끌려가서 몽둥이 찜질 당하는 거 아니겠지. 이지운은 기겁하며 눈을 돌리려 했다.

“괜찮습니다. 배우자한테는 모든 걸 공개해야지요.”

“아… 그렇… 그러면 제 것도 보여 드려야 하나요?”

“나중에 보여 주든지 하세요. 일단은 제 정보부터 오픈하겠습니다.”

“음. 그럼… 그래요.”

이지운이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무뚝뚝한데 또 다정하고, 로봇 같으면서 또 엉뚱한 면이 넘쳤다. 그리고 연애를 안 해 봤다는 말은 진짜 같았다. 이렇게 이력서부터 들이대는 걸 보면, 정말로 경험이 없는 게 맞아 보였다.

이렇게 멋지고 사랑스러운 남편을 얻다니. 나 참 행운아네.

“일단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외동아들입니다.”

“아… 네.”

“부모님은 제가 다섯 살 때 이혼하셨고요. 아버지 쪽에서 자랐죠. 어머니는 그해 미국으로 출국하셨습니다.”

서태천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이지운은 조심스러웠다. 가족을 잃어 본 사람에게는 누구나 큰 상흔이 남는 법이니까.

“저… 이런 말씀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부모님은 왜 헤어지셨어요?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면 그냥 패스해 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지금 막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서태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좀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잠시 아버지 곁을 떠나서 혼자 출산하셨어요. 그래서 출생 신고도 늦어졌습니다.”

“어, 그러면 이 생일이 진짜 생일이 아닌 건가요? 전에 봄에 본부장님 생일 기념 회식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

“그건 법적 생일이고 실제 생일은 따로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서류상으로는 6월생입니다만, 실제로는 1월생입니다.”

“네?!”

이지운이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전혀 몰랐어요. 말을 해 주셔야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지 않습니까.”

서태천이 씩 웃으며 이지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 어쩌나. 1월 되면 생일파티 빡세게 준비해야겠네… 허투루 보낼 수 없어. 잘 준비해서 축하해 줘야겠다. 선물은 뭐 하지? 밥은 어디서 먹어?

이지운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지운 씨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나요.”

“네. 맞아요. 그러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도 제가 학생일 때 돌아가셨어요. 그 후로 쭉 혼자 살았고요.”

“힘들었겠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정성 있는 체온이 묻어나, 이지운은 그의 위로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요. 절 정말 아껴 주셨어요… 철부지 손자가 뭐 그리 좋다고 예뻐해 주셨는지 모르겠네요.”

할아버지 할머니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지운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졌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의 마음을 알았는지 살짝 그의 어깨를 감쌌다.

독신을 결심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가족을 잃었을 때의 아픔이 너무 컸다. 그래서 다시는 가족을 만들지 않고 혼자서 살아갈 것이라 결심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지. 인생 참 알 수 없네.

“이제 내가 지운 씨의 가족이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서태천의 눈빛이 너무나 다정해, 이지운은 그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렇구나, 이제 이 사람이 내 가족이 되는 거야. 같이 살아가고, 같이 웃고 우는 그런 가족.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만약 이 사람을 잃게 된다면….

순간 이지운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근본적인 두려움, 가족을 잃는 것에 대한 아픔이 어렴풋하게 되살아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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