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만약에 태천 씨를 잃는다면? 아니면 내가 이 남자의 곁을 떠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고라든가 병이라든가…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니까 말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했듯이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우릴 찾아온다면 어떡하지.
마음이 어수선해,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니야.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불길한 생각해 봤자 좋을 게 뭐 있다고. 지금 이렇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걸.
이지운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스리려 하면서 서태천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하여 그 생각은 아주 짧게, 순식간에 지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찝찝한 뒷맛을 남겼다.
“그나저나 슬슬 추워지는데 안으로 들어가죠. 지운 씨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됩니다.”
“아, 그래요.”
두 사람은 어묵탕을 후루룩 먹고 와인을 마저 마셨다.
“태천 씨, 저 그럼 씻고 올게요.”
“저도.”
캠핑장은 설비가 잘 되어 있어 깔끔한 샤워실을 갖추고 있었다. 이지운은 세면 도구를 들고 샤워장으로 가 공들여 씻었다.
야외라 끝까지 가진 못하겠지만 쪼물딱 정도는 이뤄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이 든 탓이었다.
처음도 아닌데 떨리네. 지난번에 집에서도 진하게 키스했었는데… 오늘 분명히 하겠지? 아, 미치겠다.
머리를 박박 문질러 감으며 이지운은 도저히 벅찬 감동을 견딜 수 없어, 찬물을 틀었다.
장장 30여 분에 걸친 샤워가 끝나고 이지운이 돌아왔다. 텐트 안은 서태천이 손을 봐 둔 덕에 적당히 따뜻했으며, 아늑한 불빛을 쬐어 주는 랜턴이 달려 있었다.
2인분의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텐트 안을 둘러보다가 이지운은 자기도 모르게 딴청을 부렸다. 늘 같은 침대를 쓰는 사이였지만 오늘은 야외라서 그런지 기분이 너무 묘했다.
“어… 태천 씨. 그런데 베개가 하나뿐이네요? 하나 더 받아 와야 할 것 같은데요.”
공기를 주입해서 빵빵하게 부풀려 쓰는 베개가 하나뿐이었다.
“음. 꼭 그래야 할까요?”
“네?”
“여기 베개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서태천이 자기 팔을 가리켰다.
“아, 맞네.”
다정하게 잠들면 되겠구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이지운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지운 씨는 내 팔 베고 자요.”
“그래도 될까요?”
“당연한 거 묻지 뭘 묻습니까.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요.”
서태천이 매트 한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럼… 누워 볼게요.”
이지운이 슬그머니 몸을 눕혔다. 방수포를 깔고 폭신한 에어매트를 설치해 은근히 잠자리가 포근했다.
아, 눕자마자 음흉한 마음이 밀려 들어온다. 마치 성난 파도와도 같아.
이지운은 자신이 지나치게 밝히는 오메가처럼 보일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서태천과 나란히 자리에 누우니 자꾸만 음험한 마음이 들었다.
“내 팔 베요.”
“네, 태천 씨.”
이지운이 서태천의 팔을 벴다. 단단하고 굵직한 팔뚝의 감촉이 오늘따라 환상적이었다. 서태천이 이지운을 마주 보고 끌어안은 자세에서 허리를 감싸 왔다. 두 사람의 간격이 아주 좁아졌다.
“아 좋다… 천국이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설마 제가 소리 내서 말했나요?”
“예.”
“시, 실수예요.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갔어요.”
아, 쪽팔려. 이지운은 창피한 나머지 서태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태천이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이지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정말 좋긴 좋아. 천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은은한 텐트 안의 랜턴 조명, 날 감싸 주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등을 쓸어오는 은근한 손길. 다 너무 환상적이란 말이야.
이지운은 스리슬쩍 서태천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 위아래로 등을 쓸고, 서태천이 별다른 말이 없자 과감하게 손을 놀려 굵직한 등줄기와 성난 근육들을 주물럭거렸다. 아, 바로 이 맛이야. 끝내주는 감촉이다.
서애천의 등을 흠뻑 맛보고 있는 와중에, 서태천이 이지운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지운 씨. 손 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은데요. 야외에서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헉.”
나도 모르게 시그널을 보냈구나. 내가 너무 과했나?
이지운은 민망했고 또 조금 창피했지만,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저… 위험한 일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이지운이 정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했다. 그 순진하고도 단순한 수에, 서태천은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이런 거요.”
서태천이 대답에 이어 이지운의 입술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이지운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짜릿하게 온몸을 휘감는 쾌감에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눈을 감았다. 그다음부터는 서태천이 모든 것을 이끌었다. 혀를 섞고, 진하게 몸을 더듬으며 다소 조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으음….”
질척한 소음이 조용한 텐트 안을 울렸다. 이 공간 안에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 서로가 서로를 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벅찰 수가 없어 이지운은 까무룩 정신을 놓칠 뻔했다. 자기도 모르게 키스를 조르며 서태천의 허리와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서태천이 이지운의 위로 올라와 자세를 잡았다.
“태천 씨… 잠깐, 너무 숨막,”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에 이지운은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서태천은 이지운을 봐주지 않고 몰아세웠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빨며 한 손으로는 이지운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손바닥이 어쩜 그렇게 뜨거운지, 이지운은 화들짝 놀랐다.
“아…!”
그러다가 손바닥이 티셔츠 아래로 들어와 마른 배를 스쳤다. 맨살과 맨살이 닿자 자극의 강도가 너무 셌다.
“자, 잠시만….”
“부드러워요.”
서태천이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숨길 수 없는 흥분감이 묻어났다. 이지운은 서태천이 자신을 만지며 달아올랐다는 사실에 다시 흥분했다.
“태천 씨….”
“만지게 해 줘요.”
이지운은 대답 대신 몸에 힘을 뺐다. 그러자 손바닥이 배 위쪽으로 올라왔다. 예상치 못한 과감하고 노골적인 손짓에, 이지운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옷이 말려 올라가 찬 공기에 피부가 노출돼 소름이 돋기도 했다.
정중하고 젠틀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서태천은 육식동물이 사냥감을 유린하듯 이지운의 몸을 마음껏 만졌다. 제 것이 맞으니 주저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는 식이었다. 그 손길에 오히려 이지운은 더 피가 달아올랐다. 자신을 유리 인형처럼 대하지 않고 생생한 욕정의 대상으로 여겨 주는 서태천이라니, 끔찍할 정도로 황홀했다.
끈적한 키스가 오갔다. 서태천이 억눌린 한숨을 내쉬며 이지운에게서 손을 뗐다.
“태천 씨…?”
“여기서 더 하면 안 될 것 같네요.”
“아… 괜찮…으시겠어요?”
“참아야죠.”
서태천의 몸뚱어리는 열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이지운은 그제야 자신이 서태천을 과하게 자극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여기서는 끝까지 가지도 못할 거면서 너무 건드렸나 싶기도 했다.
야외인 게 한이다, 한.
이지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서태천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이지운에게 입 맞췄다. 그러면서 강한 힘으로 이지운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기분 좋고 달콤했다.
“우리….”
“예.”
“다음엔… 꼭….”
“알아요. 알아들었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뺨에 쪽, 키스했다. 이지운은 서태천의 품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완벽할 정도로 행복한 밤이었다.
***
새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햇빛이 비추었다. 이지운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런데 에어 매트 위에 누워 있는 건 자신뿐, 서태천이 보이지 않았다.
“음…? 어디 갔지.”
이지운은 하품을 크게 하고 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빗은 다음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 다른 텐트들도 하나둘 기상해 밖에 나오거나 아니면 이미 나무 테이블에서 밥을 해 먹고 있었다.
“지운 씨.”
“어? 어디 갔었어요.”
서태천이 냄비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라면 물 받으러 갔었습니다. 일어나면 끓여 주고 싶어서요.”
“아, 진짜요? 제가 끓여 드리려고 했는데!”
“내가 해 줄게요.”
“실은 저 캠핑 라면 엄청 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한번 해 보면 안 될까요?”
이지운이 손가락으로 숫자 1까지 만들며 묻자, 서태천이 피식대며 웃었다.
“그래요. 우리 지운 씨가 끓인 라면 맛 좀 보겠습니다.”
“저 후다닥 씻고 와서 해 드릴게요!”
이지운은 어젯밤과 달리 초스피드로 씻고 샤워장에서 텐트까지 뛰어왔다.
“머리 덜 말랐어요.”
“자연건조 할게요. 지금은 라면이 급해서.”
“감기 들어요. 지금 11월인데, 안 되지.”
서태천이 텐트 안에서 수건을 찾아와 이지운의 등 뒤로 가서 섰다. 이지운도 자그마한 키는 아니었으나 서태천이 워낙 커서 키 차이가 꽤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감싸 안는 듯한 자세가 나왔다. 서태천은 물기가 묻어 햇빛에 반사되는 이지운의 목 뒤와 쇄골을 쳐다보다가 이성을 차리려 노력하며 그의 머리에 수건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