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내가 명색이 독신주의자인데…! 연, 연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렇지? 지운이 너 연애 절대 안 하잖아. 소개팅도 다 거절하고.”
강희주가 이지운의 팔짱을 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동기들도 이지운은 독신주의자가 아니냐며, 절대 결혼할 일 없다고 소리 내 웃었다. 이지운은 영혼 없이 따라 웃었다.
렛츠월드까지는 놀이공원 측에서 제공한 셔틀을 타고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본부장과 팀장 이상 임원급들은 별도 차편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었다.
“흠… 우리 직원끼리만 같이 가는구나.”
“당연하지. 꼰대들이랑 같이 타느니 난 지하철 타고 가련다.”
이지운은 새삼 지난여름 워크숍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지금은 옆자리에 동기가 앉아 재잘재잘 떠들고 있지만, 그때는 서태천과 짝이 되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꿀 같은 시간이었는데… 하필이면 태천C랑 짝꿍 되었지. 그땐 그렇게 짜증이 났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린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혼자서 또 아련한 상념에 잠겨 있는데, 난데없이 송 팀장이 버스에 올랐다.
“지운 주임. 여기 있었군요.”
“어, 팀장님…? 아까 임원분들 의전 때문에 자차로 이동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하. 그럴까 했는데, 지운 주임하고 같이 가고 싶어서 난 빠졌지.”
“네?”
“강희주 주임, 잠깐 비켜 봐요. 내가 지운 주임 옆에 앉을 테니까.”
“아, 잠시만요…!”
송 팀장이 막무가내로 이지운의 동기를 몰아내려 했다. 강희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황당해하면서도 상사의 명령이기에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를 비켰다. 꼼짝없이 송 팀장과 나란히 앉아 가야 하는 순간, 기현진 대리가 나타났다.
“어? 지운 주임!”
“기 대리님.”
“나이스. 지운 주임 옆자리 비었네.”
그러면서 기현진이 이지운의 옆자리를 강탈했다. 한순간에 자리를 뺏긴 송 팀장이 기현진을 째려봤다.
“쳇.”
송 팀장이 열 받은 티를 내면서 뒷좌석으로 물러갔다. 이지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쉰 다음,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기현진 대리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죄송한데 희주 주임이랑 자리 좀 바꿔 주시겠어요.”
“응?”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대리님.”
기현진은 부담스럽게 들이대긴 해도 순정파였으므로, 이지운을 좋아하는 마음은 어쨌든 진심이었다. 간곡하게 부탁하는 이지운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 그는 결국 이지운의 동기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덕분에 쾌적하게 렛츠월드에 도착한 이지운은 차에서 내리면서 짝꿍 강희주에게 양해를 구했다.
“희주야, 미안한데 먼저 애들하고 놀고 있어. 나 들를 데가 있어 가지고 어디 좀 가야 돼.”
“가긴 어딜 가? 같이 놀아야지.”
“미안해. 좀 있다가 연락할게!”
이지운은 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일등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뒤에서 송 팀장과 기 대리가 이름을 부르며 쫓아오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세화 호텔 그룹 임직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행복한 밤 되세요.> 라고 쓰인 매표소 창구로 돌진한 그는 사원증을 내밀고서 놀이공원 직원에게 입장 팔찌를 받았다. 직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입장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쌩하니 달려 입장 게이트를 통과한 그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미친 듯이 달려서 머리띠를 판매하는 작은 숍으로 들어갔다.
“저, 머리띠요!”
“네. 어떤 걸로 찾으시나요?”
아르바이트생이 다가와 이지운을 머리띠 진열대로 안내해 주었다.
“천사, 악마 있죠?”
“아. 그거라면 딱 하나씩만 남아 있는데.”
“정말요? 그럼 얼른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천사 링과 악마 뿔 머리띠를 하나씩 꺼내 이지운에게 건넸다. 실물로 보니 아주 그럴싸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 더욱 맘에 들었다.
와! 손에 넣었다. 이제 태천C한테 씌우기만 하면 되겠네.
이지운은 먼저 천사 링 머리띠를 쓰고, 서태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하셨어요? 전 안에 입장해 있어요.
ㅌㅊC
렛츠월드 임원진들하고 간단하게 인사 중입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렛츠월드 측하고 미팅 중이었어. 방해하면 안 되겠는데.
일하는데 죄송해요. 다 끝나면 회전목마 앞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조금 기다리자 답장이 왔다. 알겠다며,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지운은 악마 뿔 머리띠를 주머니에 대강 욱여넣고, 풀쩍풀쩍 뛰어서 회전목마 앞으로 갔다. 다행히 회전목마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역시나 스트레스 폭발 직전의 직원들은 롤러코스터나 화끈하고 와일드한 놀이기구에 몰려 있는 듯했다.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서태천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이 혼자였다.
“여기예요, 여기!”
“기다렸습니까.”
서태천이 미소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모습이 무슨 패션쇼 중인 모델의 워킹 같아, 이지운은 입을 틀어막았다. 환청이겠지만 멋진 배경 음악도 들리는 것 같았다.
렛츠월드 마스코트 오소리 동상아, 봤니? 저 사람이 내 남편이야. 듣고 있어? 우리 결혼했다고. 결혼식만 안 올렸지 살림 차렸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오소리 동상에게 과시를 하며, 이지운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게 뭐예요.”
서태천은 이지운 앞에 서자마자 그가 쓰고 있는 천사 링을 툭, 튕기며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귀엽죠?”
“말로 해야 압니까.”
“원래 놀이공원 오면 이런 거 한 번씩 해 주는 거래요.”
이지운이 천사 링이 흔들리도록 톡톡 튕기자, 서태천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왜 이런 데 있어요. 놀이기구 타지 않고. 아까 보니까 주임, 대리들은 다 바이킹 앞이던데요.”
“실은 태천 씨랑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랑요? 뭔데요.”
“저… 태천 씨, 이거 써 주시면 안 될까요.”
이지운이 주머니에서 악마 뿔 머리띠를 꺼내 서태천에게 건넸다. 서태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커플 머리띠예요. 오늘 같이 다니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끼리라도 비밀스럽게 하고 다니면 재밌을 것 같아서… 무리시려나요…?”
이지운이 소심하게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방금 렛츠월드 관계자들과 미팅을 했다는데, 어쩌면 그 사람들과 돌아다닐지도 몰라. 그 자리에 이런 머리띠를 끼고 있으면 격식에 안 맞겠지…? 내가 생각이 짧았나.
그냥 하지 말자고 할까, 이지운이 눈치를 보던 중이었다. 서태천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귀엽습니까?”
“네?”
“지운 씨가 씌워 줘요. 직접.”
“저, 정말요?”
“네. 태어나서 머리띠 처음 써 보는 거라 제가 하면 잘 못할 것 같군요.”
어떡해. 해 준대!
이지운은 너무 좋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광대가 봉긋 솟아오르도록 활짝 웃으며, 이지운이 까치발을 들었다. 서태천은 키를 낮춰 이지운과 눈높이를 맞췄다. 악마 머리띠를 씌우고 머리카락을 잘 정돈해 주니 이게 웬걸. 생각보다 그럴싸하고 깜찍했다. 잘생긴 어른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지운 눈에는 지금의 서태천이 세상 누구보다도 귀여웠다.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네. 보세요.”
이지운이 핸드폰을 거울삼아 서태천에게 자기 모습을 보여 주었다. 서태천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씩 웃었다.
“우리 이렇게 머리띠 쓴 기념으로 사진 찍을까요.”
“진짜요?”
“특별한 모습이니까 간직하고 싶습니다.”
“저도요! 좋아요.”
빠르게 핸드폰 카메라를 열어, 이지운은 자신과 서태천을 프레임 안에 담았다. 두 사람 다 활짝 웃었다.
“그럼 이따가 시간 되면 봐요. 붙어 다니면 안 되니까, 동선 겹칠 때만 보기로 해요.”
“알겠습니다. 저도 다시 임원들하고 합류해야 할 것 같군요.”
원래도 붙어 다닐 수는 없었지만 커플 머리띠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눈에 띌 것이라 염려되었다. 이지운은 서태천에게 자주 연락하겠다고 하며 동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태천도 왔던 길을 되돌아 렛츠월드 관계자 와 세화 호텔 그룹 임원진들이 대기하고 있던 장소로 갔다. 김 부장은 멀리서 걸어오는 서태천을 보고 눈을 비볐다.
“보, 본부장님…!”
머리에 달린 그 뿔 뭐죠. 김 부장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렛츠월드 관계자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 봤을 때는 세상 진지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경영자였는데, 갑자기 뿔을 달고 나타났다…!
“렛츠월드에서 판매하는 머리띠더군요. 기왕 렛츠월드에 왔으니 긴장 풀고 편하게 즐기고 싶어서 한번 써 봤습니다. 그래야 렛츠월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렛츠월드 CEO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아부 떨기를 좋아하는 김 부장은 급하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도 쓰겠습니다. 얼른 사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김 부장은 부리나케 기념품 숍으로 뛰어갔다. 그를 보면서 다른 임원들도 경쟁심에 불타올랐다. 본부장님한테 잘 보일 기회다. 나도 질 수 없지…!
우르르, 임원진들이 먼지를 풀풀 피우면서 기념품 숍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젊은 직원들이 탈탈 털어간 이후라 인기 없는 돼지 귀 머리띠나 곤충 모양 머리띠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