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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이혼을 위한 신혼생활-76화 (76/100)

76화

“태천 씨랑 숲속 걸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패러글라이딩 못 해서 아쉽진 않아요?”

“어… 처음엔 그랬는데, 그냥 쉬엄쉬엄 걷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어요.”

실은 이지운은 속으로 잠깐 딴생각을 했다. 아까 집에서 느낀 격렬한 배의 통증. 그게 뭘까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고 싶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그렇게 아랫배가 당기고 아플 수 있는 걸까? 겨우 일주일 괴롭힘을 당했다고 바로 몸에 영향이 올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체질적으로 알파보다 약한 오메가라고는 해도, 이지운은 원체 건강한 편에 속했다. 평생 큰 병을 앓아 본 적이 없었고 잔병치레도 거의 겪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까지 쉽게 무너진다라. 이지운은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기에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로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걸까. 그러면 무슨 과로 가야 하지…? 내과가 좋을까. 아니면 가정 의학과부터 가 봐야 하나…?

기왕이면 서태천 몰래 병원에 다녀오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지운은 이전에 살던 동네의 종합 병원을 떠올려냈다. 그 병원은 규모가 크고 각 과가 세분화되어 있어 일단 가면 뭐라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나 혼자 병원에 가 보자. 검사든 검진이든 받아 보고 생각하는 거야.

이지운은 병원 야간 진료 시간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

이튿날, 이지운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일주일 내내 집과 회사만 햄스터 쳇바퀴 굴리듯 반복해 움직이다가 멀리 나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것도 무려 서태천과 함께 예쁜 숲속을, 이렇게 맑은 날씨 속에 걸을 예정이라니…!

그는 창문을 열어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12월 초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날씨가 온화하고 화창했다.

태천 씨는 욕실에 있나 보네. 그럼 나는 도시락이나 싸 봐?

오늘 주최 측에서 도시락과 음료수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래도 이지운은 자기 손으로 도시락을 마련하고 싶었다.

“일단 마실 거… 음, 과일 주스가 좀 있네. 이걸 보냉백에 챙겨 가자.”

냉장고의 음료수 칸에 유리병에 든 주스가 여러 개 있어 있는 대로 꺼냈다. 본인이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 레몬 스파클링을 야무지게 챙긴 다음 이지운은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모카 포트는 어떻게 다루는지 잘 몰라 엄두도 안 났고, 그나마 캡슐 머신이 만만해 보였다.

기계 옆에 진열된 에스프레소 캡슐 중 가장 지독해 보이는 시커먼 놈을 선택해 꽂았다. 전원을 켜고 추출 버튼을 누르자 우웅 소리와 함께 크레마 가득한 에스프레소 원액이 흘러나왔다.

“아차차, 흘리지 말고 잘 담아야지.”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이지운은 꼼꼼하게 에스프레소를 컵에 잘 받고, 얼음물을 섞어 커피를 완성했다. 튼튼한 텀블러에 넣으니 멋진 테이크아웃 커피가 완성되었다. 향긋한 커피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게 너무 기분 좋았다.

그럼 이제 음료수랑 어울리는 도시락을 싸야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야심 차게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저녁 냉장고를 열었을 때, 김밥 김과 맛살 단무지 등 김밥 재료를 한 뭉치 발견했었다. 그걸로 김밥을 싸면 될 것이라고 그는 아주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김밥은 만만한 요리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요리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무공을 뽐내기 위한 상위 클래스의 음식. 고수들만이 얇은 김밥 김과 데친 시금치, 흐믈텅한 계란 지단을 다룰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재료를 길쭉하게 썰어 준비하고 깨소금과 소금, 참기름을 섞어 밥을 뭉치기까지는 성공했으나 둘둘 마는 과정에서 실력이 들통났다. 밥을 너무 많이 넣고 싸는 바람에 연약한 김밥 김이 툭, 툭 터졌다. 옆구리 한두 군데만 터지면 애교 있게 봐줄 수 있겠으나, 꼬리부터 몸통 전체가 다 갈라진 김밥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어떡해…! 펼쳐졌어.”

두 번째 시도에서 김밥은 아예 말리지도 않고 활짝 열리며 허공에 재료를 뱉어 냈다. 세 번째 김밥은 소심한 손짓으로 모든 재료를 새 모이만큼 넣고 말았는데, 그 결과 극세사 김밥이 탄생했고 그 비주얼은 전혀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아악!

이지운이 망한 김밥들을 앞에 두고 한창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달칵,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냄새는.”

“태천 씨.”

회색 가운을 입은 서태천이 주방으로 다가왔다. 그는 엉망진창이 된 주방과 널브러진 김밥 재료를 살핀 다음, 있는 힘껏 웃음을 참았다. 이지운의 정성과 노력이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지운 씨.”

서태천이 이지운의 등 뒤로 가 팔을 벌렸다. 서태천의 품에 폭 안긴 이지운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서태천에게서는 바디 워시와 알파의 체향이 어우러진, 남자다우면서도 중독성 강한 향기가 났다.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기운이 베이스에 깔려 있었지만, 동시에 유혹하고 탐미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겨 아찔하기도 했다.

이지운은 눈을 감고 서태천의 품에 몸을 기댔다.

나랑 똑같은 샴푸랑 바디 워시를 쓰는데도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다니… 정말 신기하고 좋아.

“김밥 만들고 있었어요?”

“아… 네! 일단 세 줄 싸 봤는데, 하하. 어때요?”

“잘했어요.”

서태천이 이지운의 뺨에 붙어 있는 밥풀을 떼어 주며 피식 웃었다.

“맛있어 보입니다.”

“진짜요?”

“전 빈말 안 합니다.”

서태천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선의의 거짓말에 감동받은 이지운이 용기를 얻었다.

“그럼 저 김밥 많이 싸 드릴게요.”

“그래요. 잔뜩 만들어 줘요.”

“기대하세요!”

이지운은 다시 어설프게 김을 펼치고, 몇 가지 재료를 빼먹어 가면서 김밥을 말았다. 서태천은 그런 이지운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뺨에 키스하기를 반복했다.

엉망진창 도시락과 멀쩡한 음료 보냉팩을 잘 챙겨, 두 사람은 일찌감치 출발 준비를 마쳤다.

경기도 외곽에 있는 축령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또 지금은 토요일 아침이었으므로 나들이객들이 하나둘 도로로 쏟아져 나올 타이밍이라 조금만 지체하면 차가 막힐 수 있었다.

“가죠.”

“네!”

이날을 위해 준비한 운동화를 신고 이지운이 조수석에 올랐다. 서태천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엇비슷한 디자인의 운동화를 신어 커플 아이템 느낌을 냈다.

차가 강남을 빠져나와 속도를 붙이자, 풍경이 빌딩 숲에서 자연으로 바뀌었다. 이미 단풍은 다 떨어져 나무들이 앙상했으나 배경 음악을 잔잔하고 따스한 선율의 캐럴로 맞춰 놓아 그런지 딱히 삭막해 보이진 않았다.

“창문 좀 내릴게요.”

이지운이 조수석 쪽 창문을 내려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잠깐이 아니라 꽤 오래 창을 열어 놔, 서태천은 이지운을 걱정하게 됐다.

“감기 걸릴 것 같은데요. 이만 닫으면 어떻습니까.”

“조금만 더요. 공기가 너무 신선해서요.”

이지운은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실은 바깥 공기가 신선해서 들이마시고 싶은 게 아니었다. 현재 그는 체온 조절이 안 되었다. 아까는 일순간 오한이 끼쳤다가, 지금은 체온이 확 올라 배 속 깊은 곳이 절절 끓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체온 때문에 얼굴도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체온도 낮추고, 홍조도 숨길 겸 창을 연 것이다.

어제 갑자기 배 아프면서 열 올랐을 때랑 느낌이 비슷한데… 나 또 배 아프진 않겠지. 걷다가 쓰러지는 불상사는 없어야 할 텐데.

몸아, 월요일까지만 버티자. 월요일에 야간 진료 갈 테니까 조금만 힘내자고.

그는 애써 스스로를 토닥이며 점차 굳어 가는 얼굴을 숨겼다.

차로 1시간여 달려 축령산 기슭에 도착했다. 시에서 잘 가꾸어 놓았는지, 등산로도 멋지게 조성돼 있고 자연 휴양림, 체험용 통나무집 등도 깔끔하게 갖춰져 있었다.

집결 장소는 등산로 초입의 <숲 해설 안내소>였다. 차에서 도시락과 간단한 겉옷만 가지고 내린 다음 안내소 앞으로 가니, 숙려 센터 공무원들과 다른 커플들이 이미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개중에는 지난번 재결합 프로그램에서 이지운과 서태천더러 잘 어울린다고 해 준 사람도 있었다. 숙려 센터 감독관은 지난번에 이어 성실하게 또 참가해 준 이지운과 서태천이 아주 보기 좋다며, 단체 박수를 유도했다. 이지운은 쑥스러웠으나 또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숙려에서 반려로. 이혼 타파 재결합 프로그램, 뻔뻔한 숲속 트래킹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감독관이 외치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해 주었다.

“지금부터 설명 잘 들으세요. 오늘 코스는 잔잔한 힐링 여행 컨셉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무얼 할 거냐, 바로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요?”

“예. 초등학교 때 소풍날마다 했던 그 보물찾기입니다. 저희가 숲길 구석구석에 보물찾기 쪽지를 숨겨 놓았습니다. 두 분이 힘을 합쳐서 그 쪽지를 가져오시면 상품을 타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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