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저… 저, 말씀… 그냥 편히 해 주셔도 돼요. 저는 미혼… 네, 결혼 안 했고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혼자입니다.”
“그럼 보호자가 없는 거군요.”
“…네.”
서태천을 불러내선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지운은 일단은 오롯이 혼자서 이야기를 감당해 보자 싶었다.
“이지운 환자… 만 26세, 5월 1일생. 형질 열성 오메가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기대 여명이 1년 미만입니다. 생존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의사가 바로 눈앞에 있건만 멀리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혈액 수치가 어쩌고, 전이가 어쩌고. 의사가 복잡한 용어를 섞어 설명을 하는데 한국어인지 외국어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모든 것이 멍했다. 마치 이명이 생긴 것처럼 윙윙거릴 뿐, 뇌가 정보를 처리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지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잘못 보신 거 아닌가요? 저 평소에 굉장히… 건강한데요.”
“이 병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멀쩡한 듯 일상 생활하다가, 한순간에 나빠질 겁니다.”
“…네…?”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고통을 덜어 주는 치료를 받으실 건지, 그런 과정을 생략하실 건지.”
“그러니까 치료나 회복은… 전혀 불가능한 건가요.”
“죄송하게도, 그렇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머리가 돌아갔다.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자신은 시한부였다.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 완치될 길은 없었다.
이지운은 비틀거리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병원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난 건강해. 감기조차도 잘 안 걸리는 체질인데… 내가 시한부라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지운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이지운의 앞으로 응급 환자를 태운 침대가 휙 하고 지나갔다.
“서둘러!”
“응급환자입니다! 비켜 주세요!”
의료진이 빠르게 지나가자,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떡하냐, 젊은 사람인 것 같던데 봤냐. 안타깝다. 그렇게 말하는 환자나 보호자들도 있었다.
이지운은 응급 환자가 지나간 방향을 한참 쳐다보았다.
잠깐만,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야? 한순간에 쓰러져서… 다시는 못 일어날 수도 있다고?
그는 몇십 분을 그렇게 서 있다가, 수납 데스크를 거쳐 바깥으로 나왔다. 검사비와 처치비가 빼곡히 적힌 영수증이 너무 보기 싫어, 이지운은 그것을 구겨 코트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
병원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섞인 축축한 비였다.
나 우산 없는데… 정류장까지 어떻게 가지. 택시 탈까?
병원 앞이라 빈 택시가 많았다. 이지운은 택시를 타러 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눈물이 왈칵 솟아 나와 눈가를 뜨겁게 적셨다.
태천 씨.
이지운의 머릿속에는 오직 서태천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본부장님, 저랑 이혼해 주세요!’
본부장실로 쳐들어가 다짜고짜 가족 관계 증명서를 들이밀었을 때 황당해하던 얼굴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사기 치지 말라며 시비가 붙었었지. 그러다가 본부장님도 행정 착오를 알게 되고… 같이 혼인 무효 소송을 알아보다가, 그러다가 우린 사랑에 빠졌어.
그렇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지운은 결국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머리 위로 차갑다 못해 시린 비가 자비 없이 내렸다. 밑도 끝도 없이, 이지운의 온몸을 적셨다.
***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지운이 집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11시가 넘어 있었고, 서태천은 보이지 않았다.
회사 일 때문에 늦게 돌아오는 건가. 차라리 잘 됐다. 얼굴을 안 보여 줘도 되니까.
이지운은 힘겹게 집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때마침 문자 수신음이 지잉 울렸다.
ㅌㅊC
갑자기 거래처와 미팅이 잡혀서 연락을 못 했군요. 병원은 잘 다녀왔습니까? 어땠어요?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구나. 사업 얘기로 바쁠 텐데 이 와중에도 날 신경 써 주고 있네.
이지운은 다정다감한 문자를 쳐다보며 한참 말없이 앉아 있었다.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까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 사람에게 진실을 털어 놓는다면 뭐가 달라지지? 고통과 슬픔, 아픔만 줄 뿐 아닌가. 난 예정대로 죽을 것이고 태천 씨는 허망하게 남겨지겠지.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잃었을 때의 괴로움을, 태천 씨가 느끼는 게 싫다.
이지운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그 혹독한 고통을 서태천은 몰랐으면 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이니까.
“태천…씨.”
미안해요. 정말 미안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급성 위경련이 온 거래요. 커피랑 매운 것 금지당했어요. 야근도 하지 말라는데요.
입술을 꽉 깨물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타이핑했다. 거짓을 고하는 자신이 미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 싶었다.
ㅌㅊC
큰 병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많이 걱정했어요.
눈물이 솟구쳤다. 이지운은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까 비에 젖었던 탓에,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흠뻑 젖은 옷 때문에 몸도 차가워졌다. 집안은 분명 따스한데, 이지운은 전신이 추웠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좀 좋아질까.
이지운은 이를 딱딱거릴 정도로 떨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을 받아 욕조에 몸을 담갔지만 체온이 쉽사리 올라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한기가 차오르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물 자국을 여러 차례 세수하며 지워 내고, 이지운은 침대에 웅크려 누웠다. 눈을 감고 두려움, 슬픔과 싸우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태천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절대로 긴장하거나 두려워하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지운은 초조해졌다.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하며 가만히 있었더니, 잠시 뒤 서태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지운과 똑같은 샴푸 향을 풍기면서였다.
“자고 있네.”
서태천이 조심히 침대에 걸터앉아, 이지운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이지운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지운은 순간 눈물이 솟아 나올 것만 같아 몸을 돌려 벽 쪽을 보고 누웠다.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지만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제발 내 눈물을 태천 씨가 몰랐으면. 이대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면….
다행히 서태천은 아무런 기척 없이 고른 숨소리를 냈다. 이지운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베개를 적셨다.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이지운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얼마 못 잤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창밖에는 새벽을 맞아 점점 동이 터 오르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서태천이 누워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아침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지운의 기분은 전혀 달랐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서태천의 잠든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지운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서태천이 잠들어 있는지 확실하게 확인한 다음, 서재 겸용으로 쓰는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의 장식장에는 주말 트래킹에서 받아온 인공 지능 숙려둥이가 놓여 있었다.
그동안 바빠서 아무것도 녹음해 보지 못했지만, 그때 사용법을 익혀서 어떻게 하면 메시지를 녹음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지운은 숙려둥이를 껴안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숨을 내쉰 다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제부터 서태천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겨야 했다.
“…태천 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면 좋겠어요.”
***
한 시간 뒤, 서태천이 일어났다. 그는 식탁 위를 빼곡하게 채운 커피와 주스, 계란프라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언제 일어난 겁니까.”
“방금 일어났어요. 빵 굽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가 할게요.”
“아니에요, 거의 다 됐어요! 토스터가 다 구워 주는데 무슨.”
이지운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내며 토스터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타이머를 엉망으로 맞춰 놓은 탓에, 빵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어떡하죠? 탔어요.”
“거봐요. 내가 한댔잖아요.”
서태천은 이지운을 가볍게 끌어안아 뺨에 입 맞춘 다음,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화려하게 손을 놀려 아침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척척 오믈렛이 탄생하고 눈 깜빡할 사이에 프렌치토스트가 나왔다. 이지운은 바쁘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며 토스트를 먹었다.
“너무 맛있어요!”
“근데 위 안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많이 먹어도 돼요?”
서태천이 묻자, 이지운은 흠칫했다.
“아, 그게… 위장 보호제 처방해 주더라고요. 그거 먹었더니 괜찮아졌어요. 매운 거랑 자극적인 것만 피하면 된대요. 스트레스 안 받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오히려 밥 거르면 안 된다고 하던데.”
아무 말이나 내뱉었는데, 그게 먹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서태천은 진심으로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지운의 뺨을 감싸고 다정하게 말했다.
“실은, 큰일일까 봐 걱정했어요. 어제도 바이어들과 미팅하는데 계속 신경 쓰이더군요.”
“태천 씨….”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혹시라도 지운 씨가 잘못되면 저는 너무 힘들 겁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배우자가 아픈데 아무렇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지운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