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나는 응급실에서 두 시간을 숙면했다. 일어나니까 벌써 오후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옆에 있겠다던 송류진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옆 탁자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자 메모지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
-문자 또 안 볼까 봐 쪽지로 남겨. 네 이마에 붙여 놓고 싶었지만, 그냥 폰에 붙여 놓는다. 호출이 와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해준아, 몸 잘 챙기고, 꼭 연락해. 이번에도 읽씹하면 내가 집까지 쫓아갈 거야.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송류진 말투였다. 송류진은 텍스트에도 걱정을 그득 담고 전해 왔다. 아휴, 짜식. 차해준이 그렇게 좋냐. 물론, 과거의 짠한 첫 만남을 생각하면 네가 날 신경 쓰는 게 당연하긴 한데 말이야….
차해준은 송류진에게 비밀이 많다. 송류진은 차해준을 어렸을 때부터 알아 왔던 사이였지만, 차해준이 각성자고 각성할 때 집과 그 일대를 터트린 주범이라는 걸 몰랐다.
차해준은 그것에 대해 전혀 말할 생각이 없고…. 그래서 송류진을 피해 다녔지.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면서도.
아 또 차해준이 짠해지려 하네.
나는 가라앉는 기분을 고개를 휘휘 저어 없앴다.
상태 이상도 완벽하게 해제되어 상쾌한 몸이 되었는데 우울한 생각으로 죽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송류진이 없는 동안 나를 살펴 준 간호사에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이제 슬슬 해가 길어지는 여름이 다가와서인지 밖은 훤했지만 은은하게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상하게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음, 갑자기 좀 울컥하는 기분인데? 나는 이상하게 벅차는 기분에 작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는다는 건 느낌이 색달랐다. 더군다나 계속 혼자였던 차해준으로서는 말이다.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 그리고 아직 환하지만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을 보면서,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스킬을 쓰면 집까지 순식간이지만, 지금은 조금 감성에 젖고 싶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내 시한부 수명과, 메인 캐릭터를 찾는 일. 아직 백루찬밖에 못 찾았으니 빨리 다음 메인 캐릭터를 찾아야 하는데….
시나리오를 읽었지만,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듯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이 날로 먹으라는 듯 랭킹 1위로 설정해 놓더니, 날의 ‘ㄴ’ 자도 안 보여 주더라고….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걸어가는데, 병원의 야외 벤치에 눈에 띄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예또, 우반희였다. 저놈은 왜 저기에 저러고 있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피곤한 안색으로 멍청히 있던 우반희는 내가 그를 보고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자마자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인사했다.
“여- 태자마마 친구. 잘 잤어?”
우반희가 몸을 일으켜 설렁설렁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떨떠름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삐딱하게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우반희는 지나치는 나를 따라왔다.
“설마 나 기다린 건가?”
“아니.”
“질척이는 남자 매력 없는데.”
“난 함부로 매력 발산 같은 거 안 해. 비싼 몸이라.”
…개짜증 나네. 근데 납득돼서 더 짜증 났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분위기 좋았는데, 나의 갬성을 우반희가 산산조각 냈다. 짜증 섞인 내 목소리에도 우반희는 별생각 없는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말했지. 개코라고.”
“…….”
길거리 도인도 아니고 같은 말을 왜 이렇게 주입식으로 새겨 넣는 건지 모르겠다.
구원은 셀프다, 짜샤….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아, 예. 좋은 냄새 많이 맡으세요.”
걸음을 빨리해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졸졸 쫓아오는 우반희가 느껴졌다. 씨벌, 집착 봐…….
솔직히 내심 걱정도 들긴 했다. 냄새 어쩌고 하는 거 보면 분명 특수 스킬이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랭킹 1위의 힘숨찐이니까 혹시 다른 게 느껴지나 싶어서.
여태껏 잘 숨겨 왔는데 설마, 걸리겠어? 괜히 드는 불안한 생각을 휘휘 지워 버리고 등을 돌려 우반희를 쳐다봤다.
“왜 쫓아오세요?”
우반희는 피곤한 안색으로 입꼬리만 씨익 올렸다.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였으나 다크서클이 심해서 탈락. 아쉽게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빨리 꺼져 주세요.
내가 구겨진 얼굴로 쳐다보자 우반희가 말했다.
“스킬을 쓰면 냄새가 남는 거 알아?”
“…예?”
“마력도 안 그래 보이는데, 흔적이 남아. 냄새도 나. 막, 좀, 약품 냄새 같은 거?”
“…….”
안 궁금한데요. 내가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자 우반희는 다시 또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조금 찔리고 말았다. 이 새끼는 대체 나한테서 어떤 냄새를 맡아서 이러는 거지.
차해준이 흔적을 남기고 다녔다면 지날 세월 동안 각성자임을 숨길 수도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거 남들도 다 맡아요?”
“아니. 나만.”
아, 예. 괜한 걱정이었구만.
우반희는 지치지도 않는지 대로변으로 나가서도 나를 졸졸 쫓아왔다. 나는 일부러 그를 무시하고 걸었다. 집에 가서 밥 먹고 잔다. 바로 잔다. 또 잔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경을 안 쓰려고 애를 쓰는데, 우반희가 또 말을 걸어 왔다.
“태자마마랑 친해?”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우반희는 흐음- 거리며 내 옆으로 와 걸음을 맞추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집착적인 시선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탐정이라더니, 셜록 뺨치는 집착이다. 짜증 나서 한번 노려봐 주곤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한데요.”
“태자마마한테 일반인 친구라니, 말이 안 되잖아.”
“그게 왜 말이 안 되나.”
“친구도 급이 맞아야 어울릴 수 있지 않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니꼬운 눈으로 우반희를 쳐다봤다. 인간이 다 똑같은 인간이지, 급수 따져 가며 친해져야 하나? 이거 돌려서 나 멕이는 거지? 태자마마라고 불리는 각본의 황태자 송류진이랑 어울리는 일반인. 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놈은 내 이브이라고!
우반희는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안 어울려,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닌데. 어쩌라고.”
“오. 말이 짧다?”
“급 안 맞는 놈은 대우해 주지 않아서.”
“이러니까 좀 태자마마랑 친구 같네?”
“하…. 이제 관심 끄고 꺼져라. 형이 바빠요.”
흥미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걸 파리 쫓듯 손사래를 치고 걸음을 옮겼다. 냄새든 흔적이든 너 혼자 열심히 찾아보시고요.
나는 우반희를 지나쳐 횡단보도 앞에 섰다. 이제 막 빨간불로 바뀐 참이었다.
코너에 있는 횡단보도라 옆에 대기하던 차들이 우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폰을 찾아 꺼냈다.
그때, 뒤에서 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함께 끼익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킥보드를 탄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바뀐 신호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바로 잡히지 않아 횡단보도 선을 넘어갈 것 같았다. 이러면 교통사고 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내 몸이 움직였다.
나는 반동으로 멈추지 않는 킥보드 바퀴에 발을 걸고 손잡이 가운데를 붙잡아 세웠다. 앞을 막자 킥보드의 뒷바퀴가 돌아가며 남학생의 몸이 킥보드를 막고 선 내 반대쪽으로 쏠렸다.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넘어지려는 남학생의 상체를 붙잡고 세웠다.
“헉-.”
“어휴, 애기야. 위험했다. 엉?”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내 손에 목덜미를 붙잡힌 남학생이 안도한 얼굴로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헬멧은 왜 안 썼어. 확 신고해 버릴까?”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다. 횡단보도엔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잡아챘던 옷깃을 놓아주고 교복 재킷을 탁탁 털어 주었다. 남학생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남학생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감이 안 잡힌 듯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곤, 횡단보도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킥보드를 끌고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게 뭐냐.
씨, 씨벌… 몸이 존나 자동으로 반응하네.
S++급 각성자는 반사 신경이 어마무시했다.
상태 이상이 완전히 풀리니 몸이 아주 날아다니잖아. 나는 겉으론 한껏 태연한 척하면서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쳤다 진짜, 힘숨찐 쵝오…!
나는 혼자 연신 감탄하다 휙 뒤를 돌아봤다. 우반희가 졸졸 따라오고 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혹시 방금 전 내 모습을 봤다면 그의 의심에 확신을 주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긴장하며 주변을 살펴봤다.
다행히 지나온 길에 우반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구만. 그제야 나는 쾌적해진 마음으로 신나게 집으로 향했다.
***
-삐빅- 삐빅 -삐빅.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려 댔다. 우반희는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호출기를 꺼내 확인했다.
-역삼동 —사거리, 게이트 5급 발생.
게이트 등급은 보통 5개의 등급으로 나뉘고, 마력 파장을 읽어서 등급을 측정한다. 각성자들에게 지급되는 호출기가 게이트가 발산하는 마력을 읽고 게이트에 대한 설명을 해 준다. 5급 게이트는 등급도 낮고, 출현하는 몬스터도 잔챙이들이었다. 물론, 잔챙이라도 민간인에겐 아주 큰 위험이지만.
5급이라면 굳이 우반희가 가지 않아도 알아서 정리될 터였지만, 우반희를 부른 건 그의 능력 때문이었다.
라스트레아도르(rastreador).
수색자. 마력 파장을 읽고, 감지할 수 있으며 ‘흔적’을 보는 자.
게이트는 대지진 이후 여진이 오는 것처럼 규모가 큰 게이트가 열리고 나면 작은 등급의 게이트들이 잇달아서 열렸다. 지금 열린 5등급 게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2년 전, ‘악마의 눈동자’로부터 파생된 게이트였다.
우반희는 그런 마력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여태껏 등록된 각성자 중 마력을 읽을 수 있는 각성자는 꽤 있었지만 우반희는 좀 특별했다. 호출기가 없어도 게이트가 몇 등급이고, 안에서 나오는 지형이나 몬스터의 등급 등을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다 들어맞는 건 아니었지만 적중률이 꽤 높아서 그가 맡은 업무 중 하나였다.
우반희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차해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각본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S급 각성자 송류진의 친구. 우반희는 그 송류진의 친구라는 게 신기해 차해준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털어 봤자 나오는 게 먼지뿐이었지만, 어쩐지 수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다시 만난 지금 그 느낌이 더욱 강하게 오고 있었다.
보통 대부분 들어맞았던 자신의 촉을 생각하면, 차해준은 그냥 보통 ‘친구’가 아니다.
‘약품 냄새.’
우반희는 코를 킁킁거렸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잔향.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따라붙는 인위적인 향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냄새가, 차해준에게서도 나고 있었다. 아주 희미해서 긴가민가하지만….
아까 횡단보도에서 자신이 본 게 떠올랐다.
“어휴, 애기야. 위험했다. 엉?”
저런 몸놀림이라면, 각성자가 아닌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우반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사라지는 차해준을 끝까지 응시했다.
“냄새가 나, 냄새가.”
동작역에서 맡은 마력 냄새와 같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 냄새는, 이 년 전, 나탈리스가 한야의 손에 쓰러졌던 현장에서 나던 냄새와 같았다.
처음엔 사칭범이라고 생각했지만 냄새를 맡고 나서 우반희의 생각은 달라졌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때의 ‘흔적’.
차해준을 더 파고들어야 할 여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호출기는 아직도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우반희는 피곤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다 현장에 파견된 요원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너 지금 가고 있냐? 나 픽업 좀 해 가라. 뭐? 귀찮아? 이게 뒤질려고….”
눈앞에 저런 놈이 있는데 수사를 못 하고 그냥 보내야 한다니. 이럴 땐 각본에 얽혀 있는 게 귀찮았다. 우반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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