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몸이 게이트를 넘어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가 봐서 느낄 수 있었는데, 현실과 확연히 공기가 달랐다.
뺨에 닿는 아스팔트 도로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으어… 어….”
한솔이가 울며불며 나를 끌어안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달싹이는데, 자꾸 단어를 내뱉지 못한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 건가. 아니면….
하, 몸이 아프고 자꾸 눈이 감겼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솔이에게 괜찮다고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악몽의 참견 게이트를 닮은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닌다.
“후어… 으….”
“괜찮… 괜찮아.”
내 품에 얼굴을 묻는 한솔이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전개는, 시나리오에 나와 있던 모든 내용과 다르게 흘러갔다.
시나리오에선 데빌루데스라는 놈이 게이트에 강림까지 하지는 않는다.
마계의 후작이라니, 정말 거창도 하다. 하지만 그놈의 분신이 게이트에 강림했을 땐, 정말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죽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힘에 그대로 짜부라질 것 같았다.
‘차해준’은 나탈리스 앞에서도 쫄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아팠다.
“쿨럭- 크….”
기침하다가 목구멍을 넘어오는 핏물을 삼켰다.
한솔이가 펑펑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런 한솔이를 보며, 나는 상태창을 다시 불렀다.
[(now!) 상태창
이름: 정한솔
칭호: 탐욕의 도살꾼]
클래스: 테이머
등급: S
스킬: 테이밍(Lv.30), 탐식(Lv.1)….]
초월자의 눈을 켜자마자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미치도록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한솔이의 상태창을 읽었다.
이 세계에서 각성자는 예상치 못한 계기를 통해 각성하게 된다.
그 계기가 어떤 일이냐에 따라 가지게 되는 클래스와 칭호가 다양했다.
일부는 일부러 전투 스킬을 얻기 위해 게이트에 몰래 따라 들어가기도 했다.
백이면 백 전부 죽어 갔지만, 개중에도 개천에 용이 났다는 말처럼, 각성하는 놈들도 더러 있긴 했다.
한솔이도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기긴 했다.
하지만 테이머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클래스였다.
아까 그리고 또, 각인에 대해 뜨지 않았었나.
나는 게이트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뜬 시스템창을 떠올렸다.
분명, 각인이라고 했다.
각인이라니, 메인 캐릭터만 각인되는 게 아니었나?
아니, 그러면 한솔이가 메인 캐릭터 중 하나란 뜻인가?
시나리오에서는 아니었다. 난 분명 여기서 동생을 잃고 폭주해 죽는 정희수가 메인 캐릭터인 줄 알았다.
나는 바로 퀘스트창을 불러냈다.
[퀘스트: 초전 박살의 메인 캐릭터들을 구하라!
다섯 명의 메인 캐릭터! ‘신’인 작가가 만들어 낸 이 캐릭터들은 세계를 구축하는 기둥이다. 이들이 죽으면 초전 박살 게이트! 세계는 부서지고 마는데-!
: 원래 시나리오를 통해 캐릭터들의 주요 에피소드를 보고 그들의 죽음을 막으십시오.
메인 캐릭터 –백루찬, ●Å■,■■■….
보상: 세계 평화, 귀환
실패 시: 세계 멸망, 죽음]
…이름에 변동이 없는데? 그럼 한솔이는 뭐지?
아까 각인에 대해 나올 때도 한솔이 이름 앞에 오류처럼 떠서 앞 내용이 가려져 있었다.
대체… 씨발놈의 시스템은 지들이 불러왔으면서 친절하지 않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시스템창을 아웃시켰다. 이제 눈앞조차 몽롱하다.
이대로 길바닥이지만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솔아! 정한솔!”
눈을 감을락 말락 하며 아픔을 참고 있는데, 누군가 한솔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나를 끌어안고 있던 한솔이를 한 남자가 덥석 끌어안았다.
“으아… 아아…. 진짜, 너… 내가….”
남자가 한솔이를 끌어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한솔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끌어안고 확인하기를 반복한다.
한솔이도 울먹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며 피하지 않았다. 나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어우… 어… 아….”
한솔이가 그런 나를 보더니 울상을 지으며 남자를 떼어 내고 내 품에 답삭 안겼다.
질질 짜던 남자는 방울방울 흐르던 눈물을 닦아 내고 나를 보며 대뜸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숫제 경배하는 자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엉엉 울면서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나는 멍하게 남자를 바라봤다.
“한솔이 형이에요. 정희수라고 합니다. 진짜, 정말… 진짜로, 정말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흐윽….”
어… 정희수?
시나리오에 나왔던, 그 정희수? 동생의 죽음에 폭주하게 되는 정희수?
짙은 눈썹과 스포츠머리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내 또래거나 더 어려 보였다.
시나리오엔 정희수가 여기서 열린 게이트에서 각성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한껏 당황해서 남자를 살펴봤다.
…전혀 각성자가 아니다. 어딘지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울어서 붉어진 눈가를 벅벅 닦아 내는 이 남자는.
나는 한솔이를 바라봤다.
정한솔. 정희수.
……시나리오가 나 때문에 뒤바뀌어서, 지금 원래 각성해야 할 놈이 각성 안 하고 동생이 각성한 거야?
그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캐릭터, ‘정■■%^’을 확인했습니다! 캐릭터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고, 그를 죽음에서 구해야 합니다!]
이름은 또 왜 저래. 왜 오류가 난 거야? 설마 내가 시나리오를 바꿔서?
[‘정한솔’이 당신을 의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강한 애착심을 느낍니다.]
[※각인 주의: 대상의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컨트롤 비정상 확률: 50%]
뭔가…. 굉장히 잘못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습관처럼 마른침을 삼켰다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에 쿨럭이며 기침을 연발하고 말았다.
한솔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본다.
아 어쩐지, 바로 앞에 달려온 형이 있는데도 과하게 나에게 들러붙는다고 생각했는데, 각인 때문이었나.
나는 한솔이를 보며 괜찮다는 표시로 작게 웃어 줬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을 인식했다.
“…….”
헤드라이트 불빛과 가로등이 켜진 도로변엔, 가슴에 흉장을 단 사람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구급대원으로 보이는 요원 하나가 다가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들고 있는 담요를 쥐어짜며 갈등했다.
멀리서 오토바이가 그릉그릉대며 엔진 울음을 토해 낸다.
“…….”
시팔, 뭔…. 도떼기시장이냐, 이건.
***
“…살아 있다.”
“와… 나 시체인 줄 알았어.”
지켜보던 헌터가 식겁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가 튀어나온 줄 알 정도로 게이트 마지막에 나온 남자의 겉모습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잔뜩 찢기고, 피로 거뭇하게 물든 옷. 체온이 없는 것처럼 불빛에 하얗게 보이는 손까지.
이상하게도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묘하게 떨리는 가슴은 범접할 수 없는 우상을 보는 기분을 만들어 냈다.
남자는 토할 것처럼 기침하다가 피를 잔뜩 토해 내고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흰 얼굴로 피가 붉게 번진다.
상태를 보니, 남자가 게이트를 닫은 이임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각본 헌터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금 2급 게이트를 각성자 한 명이 닫은 거 실화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3급 게이트조차 A급 각성자 3명은 있어야 했고, B급은 10명, C급 20명 정원 한 부대가 들어가야 안전하게 끝낼 수 있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가 지랄 맞게 강한 것도 있었지만, 튀어나오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었다.
“…뭐야, S급이야? 어떻게 2급을 혼자….”
“처음 보는 사람인데.”
보통 S급 각성자라고 하면 언론에 주목을 받고 관심의 중심에 서기 마련이다.
초야에 묻혀 있던 각성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S급 정도면 체격이 달라서 숨길 수조차 없다.
그리고 웬만해선 숨기지 않는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뒤따라오는 최상의 길인데 누가 S급인 걸 숨길까.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보통은 그랬단 말이다.
“저거 날아다니는 거,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모르겠다, 뭔…. 저런 몹도 있었나?”
크게 원을 그리던 마력 파장이 사그라들었지만, 게이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둥글게 자리를 차지하고 남아 있었다. 원래 건물이 있던 그 자리엔 버석하게 마른 땅바닥만 드러나 있었다.
게이트가 삼킨 것은 직접 꺼내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다.
보스도 튀어나오지 않았고, 생존자들만 나왔다. 그런데 게이트는 그대로였다. 이상함을 느낀 각본 관리팀 헌터 몇이 게이트를 보며 무언가를 체크했다.
“비켜요, 비켜 봐!”
다들 수군거리며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남자를 지켜보기만 할 때, 구급대원 하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간이침대를 혼자 든 구급대원은 성큼성큼 남자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키이이!
팔랑거리며 날고 있던 나비들이 이를 드러내며 모여든다.
누가 다가오자 아이가 잔뜩 경계하며 구급대원을 노려봤다.
눈물이 맺혀 핏발 선 눈동자가 독기를 담고 있었다.
나비들이 허공을 빙빙 돌며 구급대원을 위협했다.
“치료부터 하자! 치료!”
구급대원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아이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옆에 있던 정희수가 그런 정한솔을 보며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솔아, 이거 네가 조종하는 거야?”
한솔이는 대답하지 않고 정희수를 힐끔 보고 다시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아 안겼다.
상처투성이 남자가, 그런 한솔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무어라 귓가에 속삭이면서 아이를 달랬다.
경계심 가득했던 아이가 그제야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을 가로막았던 나비들이 다시 느리게 날갯짓하더니, 이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제야 구급대원이 한숨을 쉬고 남자와 아이에게 다가갔다.
외상이 심한 남자는 정한솔을 먼저 구급대원에게 보였다.
정희수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정한솔을 살폈다.
우반희는 그 광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숨길 생각도 없다, 이거지.”
얼굴을 다 드러내고, 마력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해준아?”
우반희가 다가가려 걸음을 옮기는 그때, 송류진이 당황에 찬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본인의 이름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송류진?”
쯧, 혀를 찬 우반희가 앞으로 나섰다.
“미등록 각성자. 게이트 법에 따라 각본이 인도합니다. 실무팀!”
“예, 예!”
“법령에 따라 미등록 각성자는 1급 범죄자로 간주. 발견 즉시 체포와 함께 영장 발부됩니다.”
우반희가 정신 차리라는 듯 송류진의 어깨를 치고, 남자, 차해준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차해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우반희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먹듯이 내뱉었다.
“제압하지 못할 시, 법령에 따라 사살 가능. 험하게 갈까, 곱게 갈까. 결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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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