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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20화 (20/201)

20화

나는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예서 몇 번 깜박거리니, 뒤늦게 초점이 돌아왔다.

베이지 색 벽지. 병동이었다. 몸이 여전히 무겁긴 한데, 끔찍하리만치 아팠던 고통은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기절하기 전에 왔던 힐러가 A급인 건 봤는데, 역시 모르젠트라고 해야 하나.

대한민국 5대 길드라고 불릴 만하다고 해야 하나. 효과 죽인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생각을 이어 가는데, 누군가 이불 위에 곱게 놓여 있던 내 손을 붙잡았다.

“…한솔이?”

“……아….”

한솔이였다. 피로 얼룩졌던 모습이 아닌, 말끔하게 정리된 얼굴은 하얗고 볼이 발갰다.

동그란 눈이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치료 잘 받았어?”

“우으….”

“잘 쉬었고?”

끄덕끄덕. 한솔이는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게이트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내심 나왔을 때도, 웅얼대기만 해서 혹시나 했는데….

나는 쓰게 웃으면서 한솔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등엔 간호사가 놓아 주고 갔는지,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도 포션 재료 섞인 건가.

“괜찮아. 잘했어.”

뭘 잘했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솔이는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마, 살아 나온 것 자체가 잘한 거다. 버틴 게 용해. 기특해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줬다.

“헛…! 일어나셨어요?”

물을 가지러 갔었는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희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보니 한솔이랑 형제 맞네. 순하게 빠진 눈꼬리가 똑같다.

정희수는 갑자기 깨어난 나를 보고 당황했는지 주춤대며 다가왔다.

“…그거 저 주려고?”

“예? 예!”

목이 말라서, 정희수가 들고 온 물병을 가리키며 물었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큼큼대며 목을 가다듬고, 정희수가 뚜껑까지 따서 물 잔에 따라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하, 이제야 좀 정신이 번쩍 든다.

“…이틀 만에 깨어나셨어요.”

“이… 뭐라고요?”

정희수가 꺼낸 말에, 나는 놀라서 물 잔을 놓칠 뻔했다.

한솔이가 물을 다 마신 것을 확인하고 내 손에서 물 잔을 뺏어 들어 탁자에 올려놨다.

정희수는 그런 한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조금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루 내내 힐러가 붙어 있었어요. 다리는 골절상이었고, 허벅지는 근육이 찢었었고, 등은….”

“어, 괜찮아. 그만 말해도 돼요.”

직접 겪었던 몸이니 나도 안다.

다 안 들어도 내 몸이 종잇조각처럼 갈가리 찢겼었다는 건 알겠다.

“다행히 마력이 흐르면서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치료도 다 마쳤고, 근데 이틀을 못 깨어나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어….”

“정말 감사합니다. 한솔이 구해 주셔서.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정희수는 한솔이의 어깨를 붙잡고 불쑥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당연한 일인데. 괜찮아요.”

내가 들썩이며 말리자 그제야 숙였던 허리를 들고 나를 본다.

정희수는 참 남자답게 생겼으면서 눈물이 많은지, 눈이 그렁그렁했다.

…코를 풀 휴지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훌쩍대는 꼴이 심하게 감격한 모양새였다. 나는 멋쩍어서 볼만 긁어 댔다.

“말 놓으셔도 돼요! 생명의 은인이신데요. 얘기 들어 보니 한국대 체교과시라고… 들었습니다. 아, 이거 뭐 조사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홍희 씨가 알려 줬습니다. 저 해준 씨 학교 후배예요. 이번 연도에 입학했는데….”

“……아, 음, 그래….”

난 홍희에게도 대학교 다닌다고 알려 준 적 없는데. 홍희는 어떻게 알았지.

이 사기꾼이 뒷조사도 했었나 보다.

쑥스러워하는 정희수를 보고 앞에서 욕을 할 순 없어 그냥 하하 웃었다.

후배라니, 대학교 생활을 지옥의 아싸처럼 한 차해준에게 후배라니.

이보다 더 어색할 수가 없다. 나는 시스템창을 불러서, 정희수의 상태창을 살폈다.

[상태창

이름: 정희수

칭호: (비어 있음)

클래스: 비각성자]

음. 여전히, 기절하기 전에 확인한 대로였다.

비각성자. 시나리오에서 봤던 절망이나 암울한 기운이 그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희수 대신 정한솔이 각성을 해 버렸는데, 시스템창에선 한솔이가 메인 캐릭터라고 확실하게 명시하지 않았다. 퀘스트창에도 메인 캐릭터 명단에 이름이 없었고.

이건 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내용이 단단히 비틀어진 것 같지만 뭐 어쩌랴.

자책과 슬픔으로 제 목숨을 내던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진짜, 한솔이에게 큰일이 났었다면, 저도 죽었을지도 몰라요….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또 한솔이 각성도 하게 되었고….”

정희수는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놨다.

한솔이가 S급으로 각성한 것을 알아챈 홍희가 정희수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긴 나도 놀랐다. 무려 S급으로 각성하다니.

그간 홍희가 학교 문제도 처리해 주고, 한솔이 치료며 검사 비용까지 싹 다 대 줬던 모양이었다.

당사자 말고 보호자에게 찝쩍대는 모양이 한솔이를 모르젠트로 데려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아는데, 설마 정희수는 모르겠나- 싶었지만 순수한 얼굴을 한 정희수는 정말 ‘순수’한 호의로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참 영광입니다. 국산 피- 아니, 백루찬 길드장님하고도 인사했고요. 이번에 각성자 센터에서 검사하는 것도 직접 도와주시겠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정희수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쓰윽쓰윽.

“…어.”

짧뚱한 스포츠머리가 스치는 느낌이 가슬가슬하다.

정희수는 잠깐 굳었다가, 이내 내가 쓰다듬기 편하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옆에서 한솔이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한솔이도 해 줄게. 형아가 기특해서 그래. 기특해서.”

아니 기특이라기보단 귀엽다고 해야 하나. 발그레해져서는 말이야.

한솔이랑 닮은 놈이 덩치는 큰데 하는 행동이 귀여웠다.

속이 새까만 놈들만 보다가 이런 친구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시나리오 속 정희수가 매우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 불쌍하게 가족을 잃고 죽음까지 내몰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까.

비록 한솔이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정희수는 나쁜 기분은 아닌지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래, 너도.

“…내 포겟몬 해라.”

“네?”

“아냐. 혼잣말.”

까슬까슬하니, 귀여우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 또다시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백루찬이었다.

백루찬은 내가 정희수 머리를 쓰다듬고 한솔이까지 쓰담쓰담 해 주자, 가까이 다가와 나한테 자기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내가 구해 줬는데, 나도 해 줘요. 칭찬.”

“네가 얘들이랑 같냐?”

“형 안 그렇게 보였는데 사람 차별하네요? 나한테 막 살- 웁.”

나는 다급하게 백루찬의 목덜미를 당겨 그의 입을 막았다.

아니 쪽팔리게 쓸데없는 말을 여기서 꺼내려고 그러냐!

내가 당황하자 백루찬이 씩 웃었다.

우리 피카츄… 미모는 여전하네.

나는 한숨을 쉬고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 줬다.

다 큰 놈이 허리 굽히고 이러는 꼴 사진으로 찍어서 박제해 놔야 할 텐데. 그래야 두고두고 놀려 먹지.

백루찬에게 타격은 안 갈 것 같긴 하지만….

“뭐야! 뭐 하는 거야? 나도!”

이번엔 두두두 달려온 홍희가 병실 문을 쾅 열고 들이닥쳤다.

내 앞에 있는 어린이와 어른 놈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것을 본 홍희가 자신도 해 달라며 나한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백루찬이 홍희를 쓰담쓰담 해 줬다. 홍희가 질색하며 백루찬의 손을 쳐 냈다.

“나도 한야에게 받을 거라고! 길마는 꺼져!”

매몰차게 백루찬의 손을 쳐 낸 홍희가 방글방글 웃으며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돌적인 그 몸짓에 나는 어이가 없어 홍희의 이마에 딱콩을 먹였다.

“너 인마, 내가 다니는 학교는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있어?! 한느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신도인 내가 모를 수야 없지!”

기가 막힌 헛소리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신도? 신도오? 그럼 신도가 지금 교주 사생활 사찰한 거야?”

“교주우? 따지면 교주는 나지! 한느님은 신이라고!”

“…….”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홍희의 광적인 외침에 한솔이가 흠칫하며 놀랐다.

뭐라 더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우물거리는데… 나는 홍희의 머리를 꾹 눌러서 칼같이 정리된 머리칼을 잔뜩 흐트러트렸다.

어린애한테 이상한 거 보여 주지 말자….

“하, 한느님이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정희수가 화들짝 놀라며 나와 홍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반응이 영 심상치 않아서 나도 살짝 놀랐다. 왜, 왜 인마….

“한느님이요? 한야요?”

“후훗. 이제야 알아채다니-.”

너 인마 네가 마치 한야인 것처럼 웃지 말라고!

홍희의 머리를 꾹 누르고 이제는 입을 떡 벌리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하는 정희수를 바라봤다.

정희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아, 이렇게 내가 한야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 가면 곤란한데….

그보다 뭐냐, 이 반응?

“하, 한야! 미친! 대박!”

“…….”

너무 과하게 놀라는데?

정희수는 한참을 허둥대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휙 쳐다보곤 감격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팬이에요!”

“…….”

“와 대박! 세상에 무슨 일이야! 저 이 년 전부터 팬이었어요! 팬 카페도 가입했었다고요! 으아아-.”

“설마 ‘지존 우주 최강 한야를 경배하라’ 지최경? 거기?”

“아악! 설마!”

“설마가 설마다!”

홍희가 아는 척을 하며 눈을 반짝 빛내자 정희수는 호들갑을 떨며 홍희가 내민 손을 맞붙잡았다.

둘이 아주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나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지존 우주… 뭐냐, 그건 또….

백루찬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인기 많은 남자 만나면 피곤한데.”

“난 지금 피곤해. -그리고 만나긴 뭘 만나?”

“내가 형 책임지기로 했잖아.”

“무슨 소리야?”

뚱한 얼굴로 반문하자 백루찬이 가까이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닥거렸다.

“내가 형 구해 주기로 약속했었잖아요.”

그러고선 귀에 훅 숨을 불어넣는다.

나는 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질색했다. 언제, 새끼야! 언제!

살려 달라는 소리 한번 했다고 보리차 끓이듯 우려먹네, 이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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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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