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25화 (25/201)

25화

껌 딱지 모임

창문 너머로 어두워진 밤거리가 보인다. ‘차해준’은 무릎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팔을 겹치고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자의로 인한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

그저 한 겹이었지만 차해준은 숨도 참고 그렇게 있었다. 발끝이 말리며, 차해준은 외면한다.

아니야.

“아니야….”

작은 방 안의 가장 구석에 틀어박힌 몸이 파르르 떨리며, 차해준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속삭임을 반복했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원해서….”

‘나’는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니었지만, 차해준은 지금 그 누구보다 작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차해준이 품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충혈되고 눈물이 아롱아롱 맺힌 얼굴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흠칫 놀랐다. 차해준은 정확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

“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또 꿈이었다. 차해준의 꿈. 나는 연한 베이지 색 천장을 확인하고는 잔뜩 힘주었던 몸을 풀었다.

자면서 긴장을 했는지 등이 배긴 것처럼 아프다.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니, 웬 방 안이었다.

단출한 붙박이 옷장이 하나 있고, 침대만 딸랑 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목이 지층을 뚫을 정도로 잠겼다. 큼큼대며 목을 가다듬고, 탁자엔 누가 준비해 둔 건지 물 잔이 있어서 그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마시기 전까진 몰랐는데 목이 무척 말랐나 보다. 나는 한 번에 원샷을 때리곤 물 잔을 들고 침대를 벗어났다.

처음 보는 방 안이었다. 여긴 어디지. 하암- 하품이 나와 거하게 입을 찢어 주고, 방문을 열었다.

방 밖으론 넓은 거실이 나왔다.

화이트로 깔끔하게 단장된 거실 한가운데엔 모르젠트 길드장 사무실처럼 소파가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솔이와 백루찬이 티브이를 시청하고 있었다.

“…엥.”

[속보입니다. 오늘 길드 모르젠트에서 새로운 S급 각성자, 정한솔을 영입했습니다. 정한솔은 신당 5동에 발생한 2급 게이트를 닫은 각성자입니다. 아직 나이가 만 12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에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이라 국민들은 여론이 갈리고 있습니다…….]

안경을 낀 앵커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백루찬이 나를 발견하곤 웃었다.

한솔이가 활짝 웃으며 나에게 양손을 뻗었다. 안아 달라고?

“일어났어요?”

“뭐야?”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솔이를 안아 들고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만 12살…. 와 진짜 어리다. 그 생각을 하며 한솔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다시 뉴스를 봤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 백루찬의 손을 잡은 한솔이의 모습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인사를 하고 밴에 타는 것까지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잔뜩 몰린 기자들을 홍희가 상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최연소 S급 정한솔. 클래스는? 길드 얼라이브. 영입 의사를 밝혔으나 미성년 각성자 후견인 ‘백루찬’으로부터 거절당해]

각성자 후견인? 내가 저게 뭐냐는 얼굴로 백루찬을 보자 백루찬이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말 그대로 미성년 각성자의 ‘각성자’ 후견인이에요. 정희수는 일반인이잖아요. 없으면 너도 나도 자기네가 데려가겠다고 난리를 피워 대니까요. 납치는 예사고, 협박, 인질, 별짓 다 해요. 그래서 제가 나선 거고요.”

“그건 아는데, 그걸 왜 네가 맡았냐는 눈빛이었다.”

말 그대로 헌터 세계에서 후견인이라는 뜻이다. 송류진이 각성하고 만났던 후견인처럼 말이다. 내 말에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길드에 영입하려고 빠르게 선점한 거겠지. 그래도 한솔이에겐 좋은 일이었다.

백루찬은 참…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이런 건 또 보고도 못 본 척할 줄 알았는데 일일이 신경을 쓰고.

역시 한솔이가 S급이라 그런가. 전 세계적으로 S급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니까.

“저건 대체 언제 찍었냐.”

백루찬은 아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형이 공주님처럼 내 품에서 쓰러져 잠들었을 때?”

백루찬은 생글생글 예쁘게도 웃었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런 백루찬을 흘겼다.

“졸라 느끼해. 그런 말 하지 마라. 얼굴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짜증 나니까.”

왕자님 시켜 줄 뻔했잖아, 하…. 나는 그렇게 대꾸하곤 소파에 등을 푹 기대고 뉴스를 시청했다.

한솔이는 제 모습이 나오고 있는데도 전혀 관심이 없는지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한창 게임 좋아할 때라 그런지 또 게임을 켜고 있다.

쓰읍, 너무 자주 하는데. 말릴까 하다 관두고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줬다. 어휴, 창창한 S급인데 뭘 말려. 더 해, 더 해.

뉴스에선 이번엔 정희수에 대해 나오고 있었다. 게이트 앞에서 각성한 동생이 어린 나이에 열심히 싸울 것을 걱정하며 눈물로 기다리는 형… 모먼트였다.

뭔 드라마를 써 놨냐. 원래 시나리오에서도 얘넨 눈물 없이 못 볼 드라마긴 한데. 저건 스토리가 너무 구리잖어.

와 근데, 정말 나에 관한 건 말끔하게 지워져 있다.

현장 사진에서도 나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고 송류진과 우반희, 그리고 한 예카테리나라는 헌터의 얼굴만 선명했다.

가장 선명한 건 당연히 백루찬이었고.

내 얼굴만 어떻게 절묘하게 가렸지? 분명 홍희가 나서서 고생을 좀 했을 것 같다.

오면 뭐라도 좀 해 줘야 할까.

…사인이라도 해 줄까. 좋아할 거 같은데. 홍희가 자꾸 반짝거리는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니까 이런 생각이 다 든다.

뉴스에서는 이제 더 나아가 한솔이네가 거주하는 아파트까지 나오고 난리가 났다. 하여간 대한민국 남에게 관심 많은 건 알아줘야 돼.

“사찰 쩐다…. 나도 한솔이 집은 모르는데. 희수는 뭐 얘기 없었냐?”

“연락 왔어요. 기자들이 너무 쫓아다녀서 당분간 못 올 거 같다고 하네요. 한솔이도 차라리 우리 길드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여기 있기로 했어요.”

“잘 생각했네.”

“음, 형도 알고 있나 모르겠는데, 한솔이 이모네 집에서 살았더라고요. 아버지가 있는데 연락 두절 상태고….”

백루찬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정한솔은 자기 얘기를 하는데도 일절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또 잡음 생길까 봐 홍희가 나섰어요.”

잡음이라니? 그리고 홍희가 나섰다는 그 말 어째 좀 불안하게 들리는데.

“좀 뒤집어엎었죠. 이모라는 사람이 한솔이 계약금으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요구하길래.”

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얼마 요구했는데?”

“소시민인 우리 형은 꿈도 못 꿀 금액?”

“…야, 나도 나름 헌터거든?”

“그래서 10억 가지고 그렇게 놀랐나 봐요?”

백루찬이 실실 웃으며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게임을 하던 한솔이가 털을 바짝 세운 야생 동물처럼 백루찬을 째려봤지만 그는 쫄지 않았다.

점점 다가와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이제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몸을 아예 돌려 나를 보고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티브이로 시선을 고정했다. 옆얼굴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훅 고개를 내 쪽으로 들이미는 놈 때문에, 나는 손바닥으로 백루찬의 뺨을 밀어냈다.

백루찬이 억울해했다.

“한솔이에겐 잘만 해 주면서. 뽀뽀도 해 주고, 안아 주고, 맨날 옆에 붙어 있게 해 주면서.”

“징그럽게 다 큰 새끼랑 우리 한솔이가 같아?”

“이거 봐. 나는 왜 우리 루찬이라고 안 불러요?”

“…술 마셨냐?”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밀어내도 들러붙으려 아주 애를 쓴다.

S급이라 쉽게 밀리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내 손바닥에 뺨을 착 붙인 꼴이 아주 웃겼다. 장단 맞추라 이거냐.

아니 이거 각인 때문인가? 나는 심각한 얼굴로 한솔이와 백루찬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솔이가 내 팔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매우 짜증 난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원인은 백루찬 때문이었다.

이눔아, 아까 티브이에선 사이 좋아 보이더니만…….

“징그러워, 새끼야!”

“루찬이도 상처받아요. 마음의 상처. 마상.”

존나 잘생긴 얼굴로 안 어울리게 그딴 줄임말 쓰지 마!

정말 솔직히, 나에게 공주 어쩌고 했지만 공주라는 단어는 백루찬이 더 어울렸다.

그런 얼굴로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울먹울먹한 ‘척’을 하는데…… 아씨, 짜증 나게 마음이 약해진다.

야, 잘생겨서 봐준다. 백루찬의 뺨을 살짝 툭 치고는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백루찬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무릎에 제 한쪽 다리를 올렸다. 미친놈이, 나보다 덩치도 더 큰 놈이….

못마땅했지만 드잡이질 하는 게 귀찮아서 포기했다.

한쪽은 미소년 한쪽은 미청년…. 흠. 원치 않은 하렘이로구나.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각인하면 원래 이렇게 각인 대상자에게 들러붙고 싶어지나.

확실히 알겠는 건 이놈들이 나에게 분노나 미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들이 느끼는 ‘컨트롤하지 못하는’ 감정이 궁금해졌다. 뭐 물어본다고 저도 각인이니 뭐니 못 깨닫겠지만….

나는 들러붙은 애들과 함께 늘어지다가 쓰러지기 직전, 등록 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그’ 한라동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우반희.

우반희 때문에 트라우마를 씨게 자극받은 나, ‘차해준’.

그때 재생되었던 장면은 참 충격이었다. 뭔가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의 영화를 본 것 같달까. 인물은 내가 주인공이었는데도, 내가 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물론, 난 빙의했으니까.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 꿈에서도 나는 차해준을 지켜보는 모양새로 나왔고.

근데 왜 이렇게 무언가 께름칙하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이상한 초조함이 자꾸만 속에서 기어오른다.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 왤까.

나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넌 왜 아무 말이 없냐.”

“뭐라고 말해 줄까요.”

백루찬은 다 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빠른 새끼. 척하면 그냥 척하고 알아채 버린다.

나는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백루찬이 내 턱을 잡고 다시 자신을 보게 고개를 돌린다.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 나를 보며 말했다.

“물어보면 답해 줄 거 아니잖아.”

…맞는 말이긴 한데.

“우반희 팀장님이랑 지독하게 얽힌 사이라는 것은 알겠어요.”

지독하게 얽히긴 했다. 나는 설마 우반희가 과거에서 튀어나올 줄 몰랐다.

어쩜 그렇게 마주쳤었냐. 나는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백루찬은 천천히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질투 나니까, 나랑도 지독하게 얽혀 보자고.”

“…….”

나는 놈의 이마를 탁 소리 나게 밀었다.

얽히기는 개뿔 얽혀. 엉?

어차피 넌 메인 캐릭터라고! 네가 안 그래도 내가 딱 달라붙어 있을 예정이다, 이놈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5)============================================================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