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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35화 (35/201)

35화

[오염도 67%]

“헉….”

공기가 탁하다. 중력이 내리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발 떼는 것도 모래주머니를 단 듯 무거웠다.

벽을 짚으며 한 발씩 나아갔다.

“X발…….”

백루찬까지 사라졌다. 다른 놈들처럼 몬스터가 잡아간 걸까. 스킬도 못 쓰는 상태에서 몬스터를 상대하기 벅찰 텐데.

그들이 걱정되었다. 죽었나. 죽었을까. 헌터, 그것도 S급인 놈들인데 설마….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남았지?

아무런 기척도, 몬스터도 보이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이곳을 한참 동안 걷고 있었다.

하, 미쳐 버리기 딱 좋은 환경이네.

쓴웃음이 입가에 맺혔다. 몸은 디버프에 당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고, 같이 들어온 놈들은 하나씩 납치당했다.

시스템창이 들어가야 붕괴를 멈춘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붕괴를 멈추기 전에 내가 돌아 버릴 것 같다.

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벽면에 기대고 주저앉았다.

바닥은 축축하고 이끼가 껴 있어서 미끄러웠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앞을 노려봤다. 생각은 계속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키이이!

그때였다. 벽면을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 B342. 아까 우리를 덮쳤던 거미를 닮은 실험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널 한 면을 꽉 채우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한야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눈앞을 가득 채우며 덮쳐 오는 거대한 앞발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날에 둘로 갈라진 발에서 초록색 피가 터졌다. 상처 입은 놈은 크게 비명을 지르다가 다시 또 덮쳐 들어왔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부딪치며 벽에 지탱해 있는 거미 몬스터의 밑으로 미끄러지듯 몸을 날렸다. 털로 뒤덮인 몸통이 보인다.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푹 꿰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여덟 개의 다리가 위협적이다. 나는 찔러 넣었던 한야를 더 위로 누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움직임에 더 깊숙이 박히는 검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줘서, 안쪽에서 밖으로 한야를 끌어 내렸다.

----!!!

툭, 투둑 하며 질긴 가죽이 갈라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빠른 속도로 한야를 빼내고 다시 놈의 몸통에 박아 넣고 깊숙이 들어간 검을 앞으로 내려쳤다.

점액 같은 초록 피가 후두둑 떨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등 부분이 통째로 뜯긴 몬스터가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헉… 허억….”

놈의 뒤에서 나는 피와 살점이 엉겨 붙은 검을 털어 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순수 힘만으로 놈을 죽인 거다.

“윽-.”

한야를 땅에 박아 기대려다 힘이 빠져 실패하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을 짚고 한참을 헐떡이다가, 얼굴을 훔치고 다시 일어났다. 쉴 때가 아니다.

백루찬, 송류진, 우반희.

놈들을 찾고, 정화석을 파괴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죽었을 리가 없다. S급 헌터가 그렇게 쉽게 죽는다면 뉴스에서도 비웃음을 살 테다.

빌어먹을 자식들, 그러게 누가 따라 들어오라고 했냐고.

나는 경련하는 거미 몬스터의 다리를 쳐 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 몬스터는 계속 튀어나왔다. 오염된 실험체들은 게이트 밖에서 본 몬스터와 똑같았다. 턱이 갈라진 근육 덩어리들. 슬라임 같은 덩어리들.

그리고 거미.

X발, 이제 나가면 벌레란 벌레는 다 극혐할 것 같다…. 아니 원래 싫어하긴 했는데… 이제 보는 족족 밟아 버릴 것 같다고.

손쉽게 베어 버렸던 것들은 점점 더 버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숨을 틀어막는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터널에 가득했다.

이놈의 오염 물질…!

[오염도 80%]

오염도가 올라갈 때마다 몸을 짓누르는 중력이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간간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터널을 떠돌기 한참, 나는 터널 끝에서 쇠창살로 가로막힌 공간을 발견했다.

안에는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중앙에, 공중에 부유하며 빙글빙글 도는 커다란 원석이 있었다. 쇠사슬로 칭칭 감긴 것은 점쟁이나 주술사가 술법을 부릴 때 사용하는 것같이 생겼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저건 정화석이다.

미친, 드디어, 드디어 발견했어!

나는 이를 악물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뗄 때마다 몸이 무거워서 미칠 것 같다.

힘겹게 쇠창살 앞에 도착했을 때, 희뿌연 연기 사이로 둔중한 발소리가 들렸다.

“…….”

정화석 주변을 맴돌고 있는 몬스터가 있었다.

고가 높은 공간의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커다란, 검은 근육질의 괴물.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실험체 A- 어쩌고의 확대 버전으로 생긴 놈이 그어어거리며 움직이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스르륵 돌렸다.

꼼짝없이 서 있던 나는, 쇠창살을 움켜잡으려는 자세로 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그 순간 놈이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괴성을 질렀다. 나는 흠칫 떨다가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씨…부럴 새끼야, 쇠창살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우리는 만날 수 없어!

안심하며 놈을 관찰하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정화석 앞을 가로막고 있던 쇠창살이 위로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기함했다.

“…씨팔….”

존나 인생아!

- 그어어어어!

뒷걸음질 치다가, 나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놈의 발소리가 쿵쿵 대지를 울렸다!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에서 시스템창이 두근대는 내 심장 박동에 맞춰 빨갛게 깜박거렸다.

[오염도 95%]

“젠자아앙!!”

발에 추가 달린 것처럼 무겁다. 몸이 둔해지며 뜀박질 뛰던 다리가 점점 느려졌다. 뒤에서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따라붙는 실험체가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잡힌다. 그냥, 밟혀 죽을 수도 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한야를 세운 채 뒤를 돌아봤다.

거대하고 검은 손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날아왔다.

“컥-!”

한야와 놈이 휘두른 주먹이 부딪치고, 몸이 붕 떴다. 침을 흘리는 놈이 입 안에 가득 찬 이빨을 드러내며 눈을 번뜩인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려지기 시작했다.

붕 뜬 몸이 느리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거대한 실험체의 발이, 내 위로 떨어진다.

아, 이대로,

이대로 끝인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띠링! 띠링!

“…….”

띠링!

“……엥?”

시간이 한참 지나도, 실험체가 나를 밟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이 나를 짓밟아 몸이 으스러지는 고통도 없다.

동시에, 귓가에 계속 띠링거리면서, 시스템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너무 한 방에 죽어서… 고통을 못 느꼈나? 허튼 생각을 하며 눈을 떴지만, 눈을 뜨니 웬걸,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는 순간이었다.

시스템창이 눈앞에 범람하듯 가득 뜨며 연달아 띠링띠링 울었다.

[오류!]

[오류!]

[오류!]

[위기!]

[위기!]

[긴그으읍! 퀘스트!(수_수정_최종)

환각을 깨고 미치광이 박사 케이든을 죽여 오류를 수정하세요!

보상: 생존(백루찬, 송류진, 우반희, 차해준), ???]

…환각? 환각이라고?

나는 눈을 깜박였다.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흰 조명 때문에 눈이 너무 부셨다.

인상을 찡그리며 상황을 파악하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축축하고 어두운 터널이 아니었다. 약품들과 비커들, 수상한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알코올램프.

나는 웬 실험실에서 눈을 떴다.

***

뭐냐, 이건 대체.

어느새 나는 수술실에서나 쓰는 것 같은 의료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는 묶여 있었고, 입가에는 웬 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호흡기에서 뿌연 연기가 새어 나온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당황스러웠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 시야.

그리고 시스템창.

일단 묶인 것부터 좀 풀어야겠다. 나는 몸을 비틀어 압박하고 있는 것을 뜯어냈다. 왼팔부터 힘을 주자 아까까진 쓸 수 없었던 마력이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흘렀다. 아주 미약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팔을 풀고, 다리를 구속한 구속구도 풀어냈다.

그대로 일어서려 했지만, 바닥을 딛자마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천천히 상체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칙칙한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곳은 마치 실험실 같았다. 이상한 기계들과 약품들, 그리고 원통형 수조로 보이는 것들이 벽면에 길게 늘어서 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늘어선 원형 수조 안에, 놈들이 있었다.

호흡기를 단 채 알 수 없는 액체에 담가진 백루찬과 우반희가!

“미… 미친….”

이 무슨 B급 호러 영화에서나 볼 광경이냐!

소름이 등을 따고 쫙 돋았다. 그 순간 누가 뒤통수를 내려친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이명이 삐- 소리를 내며 울렸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움츠렸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헐떡이다가 간신히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눈앞에 다시 시스템창이 떠올라 있었다.

[미치광이 박사 케이든의 ‘몽중몽’에 당했습니다!]

[위기!]

[위기!]

[정신 공격 ‘돌아가는 미로’로 인해 심각한 상태 이상이 발동됩니다!]

[‘착시의 교란’ 발동으로 인해 능력치 감소!]

[케이든의 ‘수상한 약품’으로 인해 알 수 없는 상태 이상이 지속됩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긴그으읍 퀘스트!

환각을 깨고 미치광이 박사 케이든을 죽여 오류를 수정하세요.

보상: 생존(백루찬, 송류진, 우반희, 차해준), ???]

“하….”

그제야,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에 하나씩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게이트에 들어오는 순간, 케이든이 퍼트린 환각제에 당해 쓰러졌던 순간이!

게이트에 입장했던 송류진이 창백하게 질려 나를 부르고, 백루찬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입장한 우반희가 코를 막고 소리쳤다.

‘조심해, 지금 여기 온통-!’

마력이 섞인 강한 환각제로 가득한 게이트 앞에서, 우리는 약에 당해 쓰러졌다.

그리고 시작된, 꿈.

하 어쩐지… 스킬 명이 몽중몽이라 했었나. 그래서 마력도 못 쓰고 스킬도 사용할 수 없었구나.

어처구니가 없다. 랭킹 1위라면서…. 시스템아 너 왜 사기를 치냐. 랭킹 1위가 겨우 환각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게 말이 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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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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