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냐고!”
“몰라도 돼!”
“몰라도 되는 표정이 아니잖아!”
“아, 몰라도 된다고!”
“야!”
“야? 야라고 했어?”
“…아니 부길마님.”
홍희가 눈을 치켜뜨자 나는 깨갱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 진짜 저렇게 쳐다보면 무섭다니까….
이게 거대 길드 부길마의 박력인가…. 나보다 한참 어린애에게 밀린 나는 꿍얼대며 가지고 온 책들을 살펴봤다. 아, 뭔데 궁금하게….
홍희가 나를 힐긋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한가하게 책이나 볼 때가 아니라고.”
“한가해서 보는 거 아니다. 이게 내 학점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나한텐 졸업이 중요하다.”
“아아니!”
“아니 뭐. 뭔데 그래.”
“…모르겠다. 직접 봐.”
홍희가 버럭 소리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자신이 보고 있던 패드를 건넸다. 뭐야, 안 보여 줄 것처럼 굴더니. 나는 순순히 패드를 받아 화면을 확인했다. 헌터X헌터 사이트? 나는 페이지를 가득 메운 내 이름에 놀라서 홍희를 다시 돌아봤다. 홍희가 소파에 늘어지며 울상을 지었다.
“이게 뭐야?”
“어떡해.”
온통, 진짜 온통 다 내 이름이었다. 대충 봐도,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한야, 긍기사, 동일 인물, 차해준. 이 이름들이 게시 글에 올라와 있었다.
이젠 소파에 볼이 짜부 되도록 드러누운 홍희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 끝났어. 내 한야가 준 씨라는 거 다 알아 버렸어. 나 혼자 한야를 독차지할 수 있었는데!!”
“…넌 지금 상황에.”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냐고오!”
나는 발광하는 홍희를 보다 게시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온갖 의혹들이 즐비하게 떠 있었다. …솔직히 그동안 게이트 처리하면서 안 들킬 거란 생각은 접었다. 이미 아는 사람도 많고, 대놓고 검 들고 싸워 댔는데 의혹이 안 생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숨겨 놓고 싸울 만큼 게이트가 만만하지도 않았고.
근데 그래도 이 정도로 시끄럽진 않았던 거 같은데. 왜 갑자기 이렇게 다들 난리가 난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홍희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하던 길드장실 밖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백루찬이 이렇게 소란스럽게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딱 봐도 외국인이잖아?
“오우!”
남자는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지. 외국인이 왜…. 그보다 길드장실이 이렇게 아무 사람이나 막 들어와도 되는 곳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대뜸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마이 허니!”
그렇게 외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남자의 품에 끌어안긴 채 일어서야 했다. 뭐야 대뜸? 이 사람 뭐야? 혹시 힘쓰면 다칠까 봐 제대로 밀치지도 못하고 버둥대는데, 어쩐지 이 사람, 팔 힘이 심상치 않다. 각성자인가? 시스템으로 확인을…. 아니 일단 좀 떼어 놓고.
“아, 저… 저기요? W, Who are you?”
“나의 한야! 보고 싶었어!”
“예?”
영어로 말해야 하나 싶어서 더듬거리며 말했는데, 남자는 너무도 선명한 한국어를 내뱉었다. 나는 더욱 당황해서 바짝 굳어 버렸다. 뭐야, 이 사람. 내가 한야인 걸 어떻게… 아, 이미 소문 다 났지. 아니 그보다 대체 여길 어떻게 온 거야?
그때였다. 불쑥 들어온 손이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나에게서 떨어트렸다. 평소와 다르게 예민함이 가득한 얼굴을 한 백루찬이 짜증 내며 남자를 떨쳐 냈다. 남자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으아악 폭력, 나빠요!”
“진짜 폭력이 뭔지 보여 줘?”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백루찬을 보며 남자가 못 알아들을 척했지만 소용없었다. 능글맞게 웃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린 백루찬이 뺨을 움찔거리며 뭐라 하려고 하자, 홍희가 백루찬의 팔을 잡고 말렸다.
“아으아아 안 돼! 질투하지 마, 찬!”
“질투 아니야. 이게 지금 자꾸 나대잖아.”
팔뚝에 들러붙어 웅얼대는 홍희가 뭐라 속닥거리자, 백루찬은 떫은 표정으로 그제야 남자를 놓아줬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백루찬도 저 놈을 아는 거 같은데.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서 나한테 윙크했다.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 저 사람 대체 뭐야.
[이름: 바탈 루스번
칭호: 공허한 압살자
클래스: 머니펄레이터(manipulator)]
초월자의 눈 발동으로 남자의 상태창이 눈앞에 떴다. 머니펄레이터…는 무슨 클래스인 거냐. 어쩐지 이름이 낯이 익었다. 바탈, 바탈이라….
이상한 기시감에 고심하고 있는데 활짝 열린 문으로 다른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제복과 은색 흉장을 단… 송류진?
“손님에게 무례한 행동은 제발- 어?”
잔뜩 굳은 얼굴로 백루찬에게 한 소리 하려던 송류진도 같이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님은 무슨 갑자기 찾아와 가지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놈이….”
그런 송류진의 뒤로, 우반희가 피곤한 안색으로 들어오더니 길드장실에 함께 있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이리저리 눈치 보며 있는데 백루찬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곤 남자를 가리켰다.
“형, 인사해.”
“어? 어….”
서슬 퍼런 얼굴로 인사하라고 하면 잘도 인사가 나오겠다, 이놈아. 나는 어색한 얼굴로 바탈을 쳐다봤다. 바탈, 아무리 생각해도 익숙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는데, 바탈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해맑은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국식 인사를 깜박해 버렸네. 안녕하세요?”
낭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어를 듣자니 완벽한 미국 남자 얼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눈도 파랗고, 잘생기긴 했는데 뭔가 할리우드에 가서 히어로 짓이나 해야 할 것 같은 각성자가… 여긴 대체 왜 온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떨떠름하게 손을 맞잡았다.
잡는 순간 바탈이 내 손을 꽉 붙잡고 불쑥 당겼다. 백루찬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있어서 끌려가지 않자, 바탈이 내 팔을 잡고 되레 얼굴을 붙여 왔다. 그리고 내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허니, 잘 지내고 있었어? 보고 싶었잖아.”
소름이 쫙 올라오고,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다. 우반희가 썩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고, 송류진은 움찔하며 말리려는 듯 한 발 다가왔다. 하지만 백루찬이 가장 빨랐다. 주둥이 내민 바탈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아 떼어 내 버린 뒤 경계하듯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미친, 뭐 하는 짓이야…. 내 볼의 순결… 아니 이게 아니라.
“무… 뭐 하는 새끼야?”
내 어이없는 물음에 백루찬이 콧방귀를 뀌었다.
“기억 안 나요? 이 사람.”
“나를 잊었어? 허니 그러면 서운해!”
바탈이 백루찬의 손에 잡혀 웅얼댔다. 홍희가 한숨을 푹 쉬며 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억 안 날 리가 없지. 그치, 한야.”
아… 아니 누군데.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껌벅이며 바탈을 쳐다보고, 홍희를 쳐다봤다. 마침 고개를 돌린 홍희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 뭔데.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야? 초면에 너무 질척대서 당황스럽기만 하다고. 내 무언의 시선에 홍희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가 말했다.
“뭐야, 진짜 까먹었어? 미국 랭킹 1위잖아.”
“미국 랭… 뭐라고?”
갑자기 미국 랭킹 1위는 왜 나와…. 아니 잠깐만. 그제야 떠오르는 기억에 흠칫해서 바탈을 쳐다봤다. 바탈!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했더니!
“나한테 개처발린 그놈?”
***
쓰레기와 건물 잔해, 흙더미로 가득한 재건축 구역. 오래된 현수막이 바람에 찢기고, 그 사이로 검은 생머리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을씨년스러운 풍경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커다란 후드 티에 워커를 신고 있었는데, 가슴팍에 스크래치 무늬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고, 바지엔 은색 체인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러 액세서리가 달린 옷을 입고도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걸어 골목으로 나온 유하늘은 고개를 들었다.
“휘유, 우리 언니 또 무리하네.”
어두운 밤하늘에는 마치 금방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붉은 불꽃 무리가 허공에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이내 사람이 하나 없는 텅 빈 재개발 구역에 소낙비처럼 떨어졌다.
낙하하는 모습이 꼭 별똥별들이 차례로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저것은 불의 여왕 예카테리나가 떨어트리는 광염의 불꽃이었다. 시전자의 의지가 꺼지지 않는 이상 저 불꽃도 꺼지지 않는다. 유하늘은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려다가 손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작게 한숨 쉬며 벽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아, 지겨워~ 이것들은 벌레도 아니면서 잡으면 잡을수록 더 튀어나온다니까?”
카리나와 유하늘, 길드 다해는 몇 달 전부터 한 조직을 쫓고 있었다. 사이비 종교 행세를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한 악질인 ‘검은해’ 조직을 말이다.
계속해서 다해의 상부 길드원에게 접촉을 시도해 대는 놈들의 꼬리를 잡아 벌써 몇 번째 그들의 뒤를 쫓았다. 오늘도 그들이 지금 있는 재개발 구역에서 모임을 진행한다는 소리에 야밤에 사람 하나 없는 재개발 단지를 헤매고 있는 참이었다.
모임은 10명 이내의 소수 인원이 모였고, 방금 유하늘은 그 조직원 두 명을 해치웠다. 나머지는 도망쳤는데, 도망치면서 인원이 갑자기 두 배로 늘어 버렸다. 카리나는 사방으로 도망치는 놈들을 해치우기 위해 지금 전방위 스킬을 시전한 것이었고 말이다.
-쾅! 콰쾅!
불꽃들이 사정없이 지면을 때리고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들도 부서지고 날아갔다.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카리나가 움직이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였다.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부서진 2층 건물 위에 숨어 있던 검은해 조직원이 유하늘을 향해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손에 검은 마력을 담은 날붙이가 쥐어져 있었다. 뚝 떨어지는 남자를 보며 유하늘은 웃었다.
그녀의 왼발이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손아귀에 붉은 마력이 일었다. 카리나와 비슷한 색깔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직원에게 날려 버리려 하는 그 찰나의 순간, 사아악- 소리와 함께 시퍼런 낫이 공중에서 조직원을 베어 냈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죽어 버린 조직원의 뒤로, 카리나가 커다란 낫을 어깨에 기대며 유하늘을 쳐다봤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유하늘이 환하게 웃었다.
“언니~”
살기 돋았던 아까와 달리 살랑살랑 부르자 카리나가 훌쩍 뛰어내렸다.
“다 처리한 거예요?”
“어. 일부러 시간 내서 나섰더니만 쓸모 있는 놈들이 없네.”
“한 명이라도 살려 두면 입을 열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고문한다고 입 열 놈들이었으면 진작에 찾았지.”
“그건 그래.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몰라.”
카리나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검은해 조직 말단 놈들의 모임을 파훼한 지 그 정도가 되었는데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유하늘이 말했다.
“하나 건지긴 했잖아요. 그들이 ‘제물’로 누굴 노리고 있는지.”
카리나는 후- 하며 앞머리를 불어 넘겼다. 검은해 조직은 게이트를 열기 위해 제물을 바친다. 그것으로 그들은 게이트를 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게이트는 이상향의 세계로 가는 통로라고 여긴다.
카리나는 바짝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자, 모르젠트로.”
그들이 노리는 제물에게 언질이라도 해 줘야 속이 편할 테니. 검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유하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 커다랗게 달이 떴다. 만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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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