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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16화 (116/201)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16화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범람하는 것 같았다. 시스템이 적선하듯 하나둘 풀었던 기억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짜 맞춰져 갔다. 갑자기 열린 제로급 게이트. 몬스터 웨이브.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게… 일부러 열어서 그렇게 만든 거라고? 그 많은 희생들이, 차해준이… 내가 정신을 갉아먹는 개고생을 하면서 닫으려 애썼던… 그 게이트가….

넋이 나가려 하는 내 얼굴을 보고 홍희가 급히 말했다.

“말했잖아. 진짜로 그들이 제물을 바치고 연 것인지는 몰라!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게이트 마력 감지 시스템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 그렇지.”

각성자라도 게이트를 열 수는 없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게이트는 인간이 여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몬스터의 등급을 마음대로 올리고, 게이트 등급까지 조절하는 놈을. 시스템이 오류라고 불리는 세계의 언노운을.

진마하.

시스템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던 듯이 말했던 그놈. 설마, 혹시… 놈은 게이트의 등급을 조종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게이트를 여는 것까지 할 수 있는 건가. 의문이 쏟아져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는데, 진마하가 게이트를 열 수 있는 거면 말이 된다. 미치광이 박사 케이든이 나왔던 오염된 지하 도시가 게이트 시스템에 잡히지 않고 웨이브를 일으켰던 것도, 한일고 게이트가… 마침 딱, 다인 방어 시스템이 해제되었을 때 학교 위에서 열렸던 것도.

놈은 메인 캐릭터들을 노리고 있었다. 오염된 지하 도시 때도 나와 함께 있었던 두 명이 메인 캐릭터였고.

진마하…. 어쩌면 더 예전부터 얽혀 있던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눈동자. <초전 박살 게이트>의 시작부터 얽혀 있었던 건가.

“그리고 그 사건엔… 우리 길마도 일이 있었어.”

홍희는 유하늘을 힐끔 보곤 그 이상은 얘기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루찬이가 그렇게 과민 반응을 했던 건가.”

“트리거 버튼이야. 그 조직 이름은.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다해 길드 쪽으로 그쪽에서 계속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어. 그래서 다해 길드장도 우리 길드로 찾아온 거고.”

유하늘이 턱을 괴고 콧잔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상부상조하려고 했던 거죠~ 좋은 의도였으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요. 우리도 설마 그럴 줄 알았나.”

…좀 놀리는 거 같다. 이쪽은 심각한데…. 내가 짜게 식은 얼굴로 쳐다보자 유하늘은 어쩌라는 듯 눈썹을 으쓱했다.

“우리도 당했거든요? 그리고 호의로 알려 주려고 온 거고. 미워하지 말라니까.”

내가 계속 빤히 보자 유하늘도 띠꺼움을 느꼈는지 자세를 바로 했다.

“솔직히 나는 우리가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 집단 좀 성가셔요. 그리고 제물이, 모두 각성자이기도 하고.”

“제물이 각성자라고?”

“높은 등급을 열려고 할수록 그만한 급의 각성자가 필요하단 거예요. 그 집단의 생각으로는.”

검은해는 높은 등급의 각성자를 노리는 거고, 그래서 시나리오에서 백루찬이 제물로 잡혀 있었던 거였다. 정말 미친놈들이었다. 그럼 악마의 눈동자 때는 대체 누가 희생되었던 거야…. 그 큰 게이트를 대체….

머릿속이 복잡하다. 따로 진마하와 검은해 둘의 연관성도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더 확신이 들 테니. 하지만… 어떻게 확인을 해야 하지. 그놈은 정신 조종에 능한 놈이고, 제멋대로 얼굴도 숨기는 놈인데.

“그래서, 협력이다 이거야.”

“일시 동맹이라고 해 두죠.”

“우리가 도와주는 걸 고맙게 알아라!”

“다해만으로도 충분한데 검은해가 몰젠 길마를 노리고 있으니까 와 준 거거든요!?”

유하늘과 홍희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생각하다가 그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해 길드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도 백루찬이 제물로… 노려지고 있어서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노려보는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어쨌든 미친놈 상대하려면 같이 힘을 보태는 게 낫지. S급 각성자를 제물로 삼겠다는 거면 상대하기 까다로울 만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거니까.”

시나리오엔… 잡혔었다. 확실히 좋은 정보였고, 알아야 할 얘기였다. 홍희는 휙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꼈다. 불퉁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홍희도 알고 있는 거다. 협업이 더 쉽고 안전하게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길마는 내가 대충 말은 해 놨어. 모르는 건 안 되니까. 해준은 최대한 도와줘. 뭔가 눈치채고 길마 옆에 붙어 있었던 거지?”

“…그렇긴 해.”

홍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 것을 상세하게 말할 수 없어서 이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홍희는 더 묻지 않았다. 비밀이 많은 건 나뿐 아니라 모르젠트도 마찬가지니까. 악마의 눈동자…. 백루찬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게 궁금했지만, 홍희는 말해 줄 거 같지 않았다.

“그놈들 잡을 때까지 잘 부탁해요.”

유하늘이 샐쭉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홍희가 유하늘을 째려봤지만, 유하늘은 가뿐히 무시했다. 이 둘… 어지간한 앙숙이다, 진짜. 나는 한숨을 쉬며 내민 손을 붙잡았다.

***

잠깐의 소동 같은 만남이 끝나고, 나는 다시 길드장실로 향했다. 노크했지만 대답이 없어 순간 깜짝 놀라 문을 벌컥 열었는데, 백루찬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자냐…. 잘 거면 좀 편하게 좀 자지. 왜 좁은 곳에서 누워서…. 물론 소파가 좀 크긴 한데. S급이라 문 여는 소리에도 깰까 싶었지만, 백루찬의 숨소리는 고요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코트를 이불 삼아 잠든 얼굴은 아까보단 평온해 보였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아주 휘몰아치는구나. 나는 조심히 백루찬의 옆에 앉았다.

악마의 눈동자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런 틈도 없을 것 같던 놈에게도 상처가 있었다. 매번 여유롭고 능글맞아서 그런 것 따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인지,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티를 한 번도 내지 않아서인지 나는 더욱 불안했다. 백루찬이, 그렇게 강한 백루찬이 무력하게 당해 버리는 순간이 올까 봐. 위험해질까 봐.

하, 진짜 그런 순간이 안 오게 하려고 옆을 지키고 있는 건데 왜 이렇게 불안해하냐. 송류진도, 천새벽도 결국 잘 지켜 냈잖아, 차해준.

하지만… 진마하에게 당한 송류진은 결국 나를 잊어버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려운 건가.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 된 건데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자꾸 걱정이 된다.

나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이 제거되었던 송류진, 학창 시절부터 쌓아 왔던 순간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만 송류진.

백루찬도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때도 괜찮을 수 있을까.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더욱 중요한 건 백루찬의 안위다. 기억 쪼가리야 잊어도,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다.

곱게 잠들어 있는 녀석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내가 지켜 줄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이만큼이나 소중해져 버렸다. 메인 캐릭터, 세계의 기둥. 그런 모든 것을 제치고도, 이들은, 백루찬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었다. …지켜 냈지만 잃어버린 송류진처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내 다짐을 속삭였다.

***

적막으로 가득 찬 사무실에 작은 숨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백루찬은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제 머리맡에서, 등받이에 팔을 기대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차해준이 보였다.

속삭이던 목소리는 가슴속에서 울리는 거 같았다. 백루찬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불편한 자세로 잠든 차해준을 제 허벅지 위에 눕혔다. 뒤척임에 차해준이 살짝 실눈을 뜨더니, 백루찬이 깬 것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백루찬은 옅게 웃으면서 그런 차해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편하게 자요.”

“…응.”

조금만. 잘게. 작게 웅얼거리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곧이어 다시 숨소리가 느려졌다. 백루찬은 그런 차해준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느리게 토닥였다.

…지켜 준다고.

이상하게 맹목적으로 들리는 말이다. 지켜 준다니.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켜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루찬아, 엄마를 잊은 건 아니지?’

백루찬은 음울하게 잠긴 얼굴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야경을 비추는 유리창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맺혔다. 아아, 이제는 환각까지 보이는 건가. 백루찬은 자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봤다.

‘엄마를 죽인 게 누군지, 잊지 않았지?’

귓가에 속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환청이 이어졌다. 백루찬은 실소했다. 죽였다니, 누가. 그가 죽인 게 아니다.

차해준이 죽인 게 아니다. 백루찬의 반문에 창문에 비치는 여자가 웃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입꼬리.

‘그 애가 게이트를 닫았잖아. 네가 구하러 오지 못하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랬지.

그래서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백루찬은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유리창에 비치던 환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살고 싶었어. 루찬아. 살려 줘.’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백루찬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노려봤다. 벗어난 적 없던 지옥이 자꾸 말을 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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