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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121화 (121/201)

121화

호접몽

게이트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풍경이 바뀌었다. 백루찬은 어느새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서 있었다.

“…하.”

실소가 터져 나왔다. 횡단보도가 띵띵 소리를 내며 빨간불로 바뀌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갔다. 백루찬은 고개를 들었다.

그 풍경이었다.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기억 속 광경.

자동차 경적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백루찬은 죽은 눈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춰 섰다.

그리고 그때였다. 건물의 외벽에 붙은 커다란 전광판이 깜박거리더니, 화면이 하얗게 아웃되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경고음.

-삑! 삑! 삑!

호출기가 울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울리는 재난 알림음에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광판에 불길함을 닮은 붉은 글씨로 대피 안내가 떴다.

-명동 사거리 게이트 발생! 게이트 발생!

등급 측정 불가! 당장 대피하십시오!

“으… 으아악….”

“저… 저게….”

안내를 확인하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뒷걸음치고, 서로를 밀치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흡사 썰물이 빠지는 것 같았다.

“피, 피해! 도망쳐!”

도망치는 사람들 틈에서 어깨를 치이며, 백루찬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봤다.

빌딩 사이로 생긴 거대한 홀. 새까만 동공. 요동치는 마력 파장.

“…X발….”

악마의 눈동자가 그의 앞에 있었다.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섰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게이트에 진입했는데, 과거의 풍경이 보일 리가-.

‘루찬아, 엄마 좀 구해 줘….’

‘루찬아….’

‘루찬아…!’

환청이 고막을 뚫을 것처럼 커져 갔다. 백루찬은 귀를 틀어막았다.

***

“흐음….”

나는 한야로 동굴 벽을 감싸고 있는 이끼들을 긁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덧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동굴 안은 어둡지 않고 밝았다. 은은하게 내려앉은 노란빛은 꼭 황금빛 같기도 했다.

여기… 대체 뭐지.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을 대비해 감각에 날을 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걸었지만,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킁.”

코가 간지럽다. 공기 중에 미세한 가루가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인데, 약, 가루 하면 케이든이 생각나 절로 긴장했지만, 체감상 수십 분이 지나도 별문제는 없었다. 마력도 돌려 보고 했으나, 가루가 무언가 영향을 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긴 대체 무슨 게이트냐…. 루미네스의 동굴이란 이름만으로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일단 시스템이 나비 여왕이라고 했으니, 보스 몹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구와 멀어진 상태였다. 종유석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들려왔다.

…다행히 백루찬은 따라 들어오지 않은 거 같네. 다해 길드랑 각본 소속 각성자들이 가득 몰려왔었으니, 혼자 있을 일도 없을 거고 위험에 처하진 않겠지. 제발 홍희랑 딱 붙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보스 몹 빨리 잡고 여기서 나가고 싶다.

마치 이세계 같은 풍경이었지만 고요하고 불안했다. 처음 들어갔던 악몽의 참견 게이트만큼 징그럽지는 않았지만 거부감은 똑같았다.

또 한 십 분은 걸었을까, 드디어 동굴의 끝으로 예상되는 곳이 보였다. 더 환한 빛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한야를 꽉 쥐고 조심스럽게 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뭐야.”

도착한 곳은, 게이트 입구가 있던 곳보다 더 큰 동공이었다. 천장 부근이 둥글게 뚫린 그곳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잎사귀를 길게 늘어트리며 세워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예상외의 풍경이었다. 몬스터라든가, 몬스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신의 나무라도 되는 것 같은 위용을 뻗치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니.

혹시 저게 보스 몹…인가? 의심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다가가는데, 볼에 차가운 무언가가 살짝 닿았다. 살짝 놀라서 움찔하는 순간, 팔랑이는 작은 날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비?”

나비였다. 새하얀. 그러나 자세히 보니, 몸통 부분이 꼭 사람 같았다. 다리와 팔, 판타지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뾰족하고 날카로운 얼굴. 초록색 동공으로 꽉 찬 눈. 그리고 머리 위에… 더듬이?

-꺄아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사방에 붙어 있던 나비의 날개를 단 그것들이 일순간 날아올랐다.

“윽-!”

나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실눈을 뜨고 앞을 살폈다. 요정인지, 나비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것들이 빛무리를 내뿜으며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미친, 저게 대체 몇 마리야…! 나는 한야를 들고 얼어붙은 칼날을 시전했다. 그리고 공격적으로 뭉쳐서 날아오는 것들에게 휘둘렀다. 한기로 뒤덮인 칼날이 소용돌이를 가를 때마다 작달막한 그것들이 얼어붙어서 툭툭 바닥에 떨어졌다.

이게… 1급 게이트 몬스터야? 너무 쉽게 해치워지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나무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불쌍한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거라. 저들은 외부인을 신기해하는 것뿐이란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린아이였다. 긴 금발 머리에 초록 눈을 가진…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 분간이 안 가는 어린아이.

나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게이트에 무슨 어린애가 있어?

잠깐 넋을 빼놓고 있다가 휘두르던 한야를 내렸다.

아이는 나무 뒤편에서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나비 날개를 단 몬스터인지 모를 작은 ‘그것’들이 까르르 웃으며 흩어졌다.

참나… 무슨 요정 세계 온 거 같네. 예전에 게임에 한창 빠져 있었을 때가 떠올랐다. 페어리였던가? 더듬이 달린 놈들은 집중 안 해서 보면 그냥 벌레… 아니 이건 좀 심하네. 나비 같았는데 집중해서 보면 신비로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게이트 안이라 기괴해 보이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를 유심히 살폈다.

“아-.”

아이는 짧은 다리로 다가오다가, 울퉁불퉁한 바닥 이끼를 밟고 삐거덕 넘어졌다. 한걸음에 다가가 나도 모르게 몸을 잡아 줘 버렸다.

“…….”

“친절하구나.”

…이 아이가 갑자기 열린 게이트에 휘말린 민간인인지, 뭔지도 모르는데 너무 팔을 덥석 잡은 거 아닌가 싶지만,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아이를 잡아 일으켰다. 양손을 잡혀 위로 번쩍 든 아이는 대롱거리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티 없는 얼굴이다.

떨떠름하게 얼굴을 마주하며 물었다.

“…너 누구니.”

“나?”

순진하게 웃던 아이가, 순간 요사스럽게 눈빛을 발했다.

[‘나비 여왕’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시스템의 알림이 울리고,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내가 붙잡은 아이의 팔에서부터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와 내 팔을 감쌌다. 작달막했던 아이의 눈이 초록색 동공으로 가득 차면서, 등 뒤로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날개가 튀어나왔다.

주변으로 인분(날개 가루)가 날리고, 순식간에 날아다니는 작은 나비들처럼 인간 같지 않은 모습으로 변한 아이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

-내가 누구일 것 같니?

***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예상했어. 진짜로 예상했다고.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거대한 날개와 더듬이, 그리고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모습으로 변한 놈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힘으로 내 팔을 감싼 촉수 같은 것들을 뿌리쳤다. 나뭇가지 같기도 한 그것들은 옭아매려고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뒤로 몸을 빼며 한야를 휘둘렀다.

-크아악!

차갑게 얼어붙은 칼날이 나비 여왕이 뻗어 낸 촉수들을 베어 냈다. 잡힌 팔이 미끌미끌하다. 노란색 인분이 잔뜩 묻어서 찝찝했다.

나비 여왕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바닥을 딛고 뛰어올랐다.

다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놈의 날개를 찢어 버리기 위해 놈이 팔을 벌린 밑 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아아!

찔러 넣은 틈새로 긴 검신에 날개가 뚫렸다. 나는 그대로 위로 쳐올렸다. 나비 여왕이 몸을 뒤틀어 피했지만 한쪽 날개와 함께 팔 하나가 서걱 잘려 나갔다.

“이제 이것들이 머리도 쓰고 말이야….”

혼자 중얼대며 기가 막힌 상황에 어이없음을 표출했다. 순진해 보이는 인간 아이로 변하다니, 저런 놈이 만약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면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뒤로 물러나며 인분이 붙은 검을 털어 냈다. 공기 중으로 희뿌연 것들이 잔뜩 날아다녔다. 코가 시큰거린다. 아, 재채기 나올 것 같아.

날개가 찢긴 나비 여왕이 비틀대면서 나와 멀찍이 떨어졌다. 여왕이 괴물답지 않은 우아한 몸짓으로 옆으로 쓰러져 바닥을 짚었다. 놈은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 이상하네….

“왜. 네가 너무 쉽게 당했냐?”

그건 당연한 거거든. 내가 워낙 강해서. 나는 왼발을 뒤로 빼고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여왕이 곤충의 그것같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왜 네게는 통하지 않을까?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날렸다. 한 방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뛰어들면서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여왕의 사방을 점령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아악!

여왕이 도망치려 애를 썼지만 내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피가 분수처럼 터진다. 갈라지는 놈의 몸체는 어떤 방어도 없이 연약하여 종이 쪼가리만도 못했다. 손쉽게 피륙을 도륙 내 놓고 나는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제 흔적도 없이 찢긴 날개를 펄럭이던 여왕이 중얼거렸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구나.

“몹 따위가 뭐라 떠들어 봤자 안 듣는다.”

-분명 너의 가장 괴로운 기억에 잠식되어야 할 텐데….

여왕이 말하자 주변으로 작달막한 요정…이 아니지. 나비 모양을 한 몬스터들이 떼거지로 여왕에 붙었다. 여왕이 기괴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는 잠겨 있구나.

그러고선 제 머리를 툭 건드렸다.

-여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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