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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34)화 (134/201)

백루찬

빗방울이 미스트처럼 흩뿌려지고 있는 어두운 밤. 

“하아….”

천새벽은 심호흡을 하며 두 손을 바닥에 댔다. 이미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지라, 옷은 다 젖었고 급격한 마력 방출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허공에 구멍 난 듯한 게이트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차해준이… 자신의 선생님이 저곳에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악물었다. 천새벽은 게이트를 보며 다시 또 스킬을 전개했다.

오각형을 그리는 투명한 흰 선이 허공에 겹겹이 쌓이면서, 거인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꼭 오망성을 그리는 것 같기도 했고, 특이한 마법진 같기도 했다.

상대의 운신 폭을 좁히는 결계는 몸집과 다르게 빠르게 움직이는 거인을 중앙에 잡아 놓았다.

회색 거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으나, 단숨에 머리 위로 튀어 오른 송류진이 가르덴의 송곳을 집어 던지는 덕분에 괴물의 신경을 돌릴 수 있었다.

- 콰아앙!

송곳 같은 창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거인 위로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폭발이 터졌다. 불꽃으로 된 용이 그 위에 한 번 더 내리꽂혔다.

- 끼이익.

급격한 충격에 비가 흩뿌려짐에도 일대에 분진이 자욱하게 퍼졌다. 연기가 가시자 도시 중앙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긴 것이 보였다. 이어링이 지직거리다가 소리를 토해 냈다.

- 해치웠나?

“아직 확인 불가.”

송류진은 간략히 대답하며 저릿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발밑은 건물의 잔해였던 것들로 가득했다. 두꺼운 콘크리트 잔해 위에 서서 크레이터 안을 내려다보고 있자, 옆으로 카리나가 다가왔다.

그녀는 푹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 공격에도 즉사가 아니라면 빡쳐서 뒤질 듯.”

카리나의 말에 송류진이 긍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S급 각성자의 합동 공격이었다. 쓰러지지 않았다면 더욱더 불행한 재앙이었고, 게이트가 활짝 열려 있으니 또 다른 놈이 튀어나온다면 더 위험했다.

송류진은 진중한 눈으로 거인이 파묻힌 구덩이를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에, 차해준 씨가 들어갔습니까?”

“진입했겠지. 여태 싸우는데 없는 거 보면 몰라?”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랑 나눠서 처리하기로 했어.”

“혼자… 말입니까.”

“아직 게이트가 멀쩡한 것을 보니 혼자 영웅 행세하기엔 그른 거 같지?”

카리나가 히죽 웃었다. 송류진은 그녀를 잠시 보다가 다시 거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잔해와, 땅을 뒤집어서 삼켰으니,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움직임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손을 뻗자, 가르덴의 송곳이 날아와 송류진 앞에 꽂혔다. 마력을 미친 듯이 압축해 날려 보냈지만 무기는 멀쩡했다. 이것으로… 놈을 끝낼 수 있어야 하는데.

“더 늦으면 그놈 위험하다.”

차해준을 얘기하는 것이다. 튀어나온 놈이 이 정도로 강했다면 안에 있는 보스 몬스터는 얼마나 강할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카리나가 늘어트렸던 낫을 어깨에 걸쳤다. 송류진도 가르덴의 송곳을 다시 집어 들었다.

“게이트로 갑시다.”

진입해서 차해준을 도울 생각이었다. 이어링으로 각본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들렸다.

- 바탈 루스번, 게이트 진입을 위해 중앙으로 이동 중입니다.

- 천새벽 결계사 진입 요청.

- 안 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전해 드려라. 그리고 아직 학생이야.

저쪽에서도 대충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보는 것 같았다. 송류진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게이트로 가시죠.”

“좋아….”

카리나와 함께 게이트로 향하기 위해 한 걸음 떼었을 때였다.

“…아 X발.”

카리나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휙 뒤를 돌아봤다. 움직였던 걸음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잡힌 듯 멈춰 선 채였다.

그리고 깊게 파인 구덩이에서 검은 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까맣게 타 버린 거대한 몬스터가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놈은… 죽지 않았다. 

송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 …미친.

- 투입하던 요원들 다시 뒤로 빼!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놈이 웅크린 몸을 펴자, 피부에서 각질이 떨어져 나가듯, 몸의 표면이 갈라지며 안에서 새로운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회색빛이던 피부는 강철 같은 단단한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손에 든 가르덴의 송곳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송류진은 그것을 고쳐 잡았다. 카리나가 굳은 얼굴로 거인을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 몬스터가 다시 눈을 떴다. 검게 물들었던 눈은, 이제 형형한 붉은빛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어두운 황무지 같던 풍경이 녹아내리듯 변해 갔다.

나는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외부인인 클리어런스가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시간은 이곳의 기준으로 24:00:00입니다!

정말 중요할 때에 간섭하세요. 자칫하다간 백루찬의 심상 세계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텍스트가 물에 지워지듯 사라지고 두통이 이는 것처럼 관자놀이 부근이 조이더니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이는 순간, 나는 백루찬에게 동화된 것을 느꼈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깜박이는 눈꺼풀에 나풀거렸다.

가장 먼저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놀이터에는 커다란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 어린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벤치에 앉아 있던 백루찬은 다리를 까닥이며 품 안의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무심한 시선이 어우러져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주변엔 그들의 부모가 아이들이 혹여나 다치지 않는지 지켜보고 있었고, 이따금 한 번씩 혼자 있는 백루찬을 힐끔대며 서로 무어라 수군대기도 했다.

“저 보세요. 지금 몇 시간째…….”

“이상하게 껄끄럽지 않아요? 애가 꼭 애가 아닌 것처럼…. 어쩜 저렇게 울지도 않고….”

“나는 어째 좀 무서워요. 우리 아이도 저 애 좀 이상하다고… 무섭다고 말하면서 떨어지려고 하더라고요.”

“저 애 부모는… 대체…….”

그들이 수군대는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아이의 귀에도 들어왔지만, 백루찬은 아무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도 선생님들은 물론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내뿜는 묘한 기운은 먹이 사슬 꼭대기에 위치한 인간을 나약한 피식자로 만들어 버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회색 눈은 무기질적으로 빛나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아닌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임에도 아이는 그런 느낌을 풍겨 왔고, 모두가 본능처럼 아이를 외면했다.

지금 있는 이곳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백루찬이 홀로 다섯 시간을 넘게 벤치에 앉아 있음에도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점심도 굶었고, 앞으로 저녁도 굶을 예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추위에 혼자 떨고 있어도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동행자도 없이. 앞으로도 몇 시간을 계속 저렇게 앉아 있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관심 두지 않으려 애썼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백루찬에게는 너무도 익숙했다.

그래서 엄마도 그렇게 가 버린 걸까?

백루찬은 생각했다. 엄마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자신을 벤치에 앉히고 사라졌다. 머뭇대는 뒷모습에서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엄마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는 괜찮아.”

백루찬은 자신이 일반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무서워했다는 것도. 그래서 괜찮았다.

“진짜야… 로로.”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무섭다는 감정이 대체 무엇일까? 어린아이는 홀로 고민했다. 감정이란 것을 제대로 느껴 보지 못한 탓일까. 무섭다는 것도, 지금 이 상황이 아이라면 서러워서 엉엉 울며 엄마를 찾는 게 보통의 반응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고요히 제 앞의 세상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수군대던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손을 맞잡은 가족들을 보면서, 그때 조금 이상한 감정이 들었지만, 백루찬은 그게 뭔지 정의 내리지 못했다. 다만 그냥, 마음이 조금 이상해서 그것을 부러운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만 봤을 뿐이다.

엄마는 정말 오지 않는 걸까?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코끼리 인형 로로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백루찬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이제는 텅 빈 놀이터를 바라보았다. 사위는 어느새 어둑어둑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곧 완전히 까매지면… 그땐 어떡하지?

두렵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백루찬은 그런 감정을 잘 느끼지 못했다.

“…루찬아!”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자가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엄마였다.

백루찬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엄마는 다시 안 올 거라 생각했는데.

달려온 여자는 아이가 자신이 앉힌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백루찬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흐으… 오래, 오래 기다렸지?”

울먹거리는 목소리. 따듯한 품. 백루찬은 그 품에 안겨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움직임을 느끼고 여자는 더욱 크게 오열했다.

“미안해…. 미안해……. 어, 엄마가….”

백루찬은 여자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엄마는 나를 버린 게 아니야. 그리고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고 힘껏 안겼다. 닿은 심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기분은 뭐지? 이게 기쁘다는 걸까?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아서…. 아, 나를 버리지 않아서.

백루찬은 또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고, 이것을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루찬아… 우리 루찬이.”

가엾은 내 아들. 여자의 목소리는 안타까움과 함께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백루찬은 그것에 대해 정확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나도, 혼자가 아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집으로 가자. 가서….”

여자가 속삭이며 어린 루찬의 손을 잡았다. 백루찬은 따듯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까, 나도, 버리지 않을래.

백루찬은 홀로 그렇게 다짐했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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