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루찬은 김세영 옆에 딱 달라붙어 나를 견제했다. 쳐다보는 눈이 살벌했지만, 나는 지지 않고 김세영 옆에서 진짜 친구처럼 떠들었다.
“그래서, 그때 루찬이가 저에게 그러는 거예요. 형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아니 루찬이가 정말?”
“네. 그… 아시죠? 그 눈빛? 울먹이는 눈빛으로 애달프게 매달리는데… 차마 거부할 수가 없더라고요.”
물론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떠들었다만. 그렇게 좀 보지 마라. 더 놀리고 싶으니까.
나는 노려보는 백루찬을 흘겨보며 씨익 웃었다. 이거 좀 재밌네. 선동과 날조. 근데 네가 진짜 그랬다고. 잊어버린 건 좀 서운하잖아. 계속 붙잡고 오라고 했던 건 너였다고…. 물론 길드로 오라고 한 거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홍희가 피식피식 웃었다. 백루찬은 그것에도 조금 뿔이 나 보였지만 우리는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아니면 언제 저놈을 이렇게 놀려 보겠어.
백루찬의 집은 단조로운 주택 빌라였다. 처음엔 생각보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놀랐다. 백루찬이 원래 이런 곳에 살았구나. 동화하면서 보았던 반지하 셋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충분히 업그레이드되어 있는 걸 보자 백루찬이 그동안 얼마나 힘썼는지가 보였다. 이 녀석… 각성하고부터 살벌하게 움직였겠구나. 여기도 아마, 김세영의 눈치를 보며 마련한 거겠지. 더 크고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세영에게 위화감을 줄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평범한 가정집 같은 그 집에서 김세영과 홍희, 백루찬과 함께 고기도 먹고 된장찌개까지 얻어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집 밥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심상 세계인데도 너무 맛있고 따듯해서 또 혼자 울컥했지만 잘 삼켰다. 여기 들어와서 이상하게 감성적으로 변한 것 같단 말이야.
“어머니! 저 한 그릇 더 먹어도 되나요!”
“당연하지! 더 먹어, 더 먹어. 어휴, 홀쭉하니 말라서는….”
김세영은 자신의 모습은 생각도 않고 나를 보며 안쓰러워했다. 옆에서 백루찬이 작작 먹으라며 그릇을 뺏었지만 나는 결국 두 공기를 챙겨 먹었다.
“아, 김 여사~!”
“왜에. 형아 먹이려고 하는 거야. 아들은 다 먹었으면 설거지 좀 해.”
“아 진짜!”
재워 놓은 갈비까지 꺼내어 구워 주는 김세영을 보며 백루찬이 앙탈 아닌 앙탈을 부려 댔지만 김세영은 말끔히 무시하며 내 그릇에 고기를 가득 담아 주었다.
계속 봐도 백루찬이 애교떠는 모습은 적응되지 않았다. 와씨, 너무 잘 어울리긴 한데…. 평소 이미지와 너무 다르잖아. 백루찬은 툴툴대면서도 순순히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진짜 새로운 모습이네…. 가끔가다 보이는 눈빛을 보면, 김세영을 위해 일부러 더 오버해서 연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 모습 또한 나쁘지 않아 보였다.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졌으니까.
“힘들어? 엄마가 할까?”
“아냐.”
백루찬은 제 어머니가 조금 걱정되었는지 김세영이 다가가자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김세영이 훨씬 작은데도,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굴자 그녀는 그것이 또 기쁜 듯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나는 가만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런 모습 때문에 백루찬이 저렇게 행동하는 거구나. 더 느껴졌다. 어쩐지… 절박함도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또 울컥했다. 아 진짜… 동화해 자꾸 감정 기복이 널뛰고 난리다.
“잘 먹고, 잘 놀다 갑니다!”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와!”
밥에다가 후식으로 과일까지 챙겨 먹고 백루찬네 집을 나섰다. 배웅해 주는 김세영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내 팔을 으스러트릴 듯 꽉 붙잡고 잡아당기는 백루찬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홍희는 김세영과 더 얘기하고 가겠다고 집에 남은 상태였다. 백루찬은 빌라 단지 밖까지 나를 끌고 오더니, 손을 놓고 앞으로 휘적휘적 나아갔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뒤를 쫓았다. 오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도 봤다. 이걸 현실에 가서 놀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현실로 깨어나면 백루찬은 나를 보기는 할까. 약간 울적해져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밤공기 탓인지, 지금 있는 곳이 심상 세계가 아닌 현실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백루찬이 깨고 싶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버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깨어나야 한다. 꿈은, 꿈이기 때문에. 현실을 마주 봐야, 결국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어느덧 사람들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백루찬의 뒤만 쫓았다가 갑자기 멈춰 선 녀석 때문에 나도 걸음을 멈췄다. 녀석이 몸을 휙 돌렸다.
“이렇게까지 맞춰 줬으면, 이제 알아서 토해 낼 때도 됐지.”
다시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뭘 토해 내. 먹은 거?”
“또 장난하네.”
휙 손이 뻗어 왔다. 백루찬이 내 멱살을 잡아당겼다. 상당히 화가 난 눈빛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테지. 모르는 사람이 제 친구인 척 집까지 쫓아와서 연기하고 말이야. 그것을 일일이 맞춰 주었으니까.
“어디 소속이야? 이젠 똑바로 말해 봐.”
“아까 말했잖아.”
“그런 길드 들어 본 적 없어. 그리고, 너 왜 나한테 들러붙은 거지? 뭘 노리고?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줄이는 뒷말이 무서웠다. 이 녀석은 진짜 실행할 놈이라. 나는 멱살을 잡은 백루찬의 손을 감싸 쥐고 진정하라는 듯 토닥였다.
“아까 말했잖아. 나는 그냥 너를 만나려고-.”
“목적을 말해. 너 뭘 알고 나한테 접근한 거지? …내 가족까지 만났으니, 쉽게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거 아니다. 진짜야. 나는….”
“뭔데 그럼.”
“어….”
아까 말했는데. 미친놈 취급이나 했으면서. 약간 서럽긴 했지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난 너를 도우려고 하는 거야.”
“하, 누가 날 도와.”
“S급은 인간 아니냐?”
“S급을 도와준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나도 S급이라면?”
“뭐?”
“네가 앞으로 뭘 할지 모르겠지만, 그 일 나도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이가 없네.”
백루찬이 잡은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덕분에 몇 걸음 뒤로 물러났는데,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입매를 비뚤게 틀며 다가왔다.
그 얼굴이 불안해서 뒷걸음질 치자, 곧바로 따라붙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홍채가 옅은 회색 눈동자에 나는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야, 인마… 얼굴이 너무 가깝잖아.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씨 내가 지 얼굴에 약한 건 어떻게 알아 가지고…. 이건 본능인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고개를 돌렸는데, 그만 턱이 잡히고 말았다. 백루찬이 피하려는 내 눈을 강제로 마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아.”
“뭐… 뭔데.”
“그건가?”
“나 지금 굉장히 불쾌해. 너 약간 오해를 한 거 같은데-.”
“헛소리는 아까부터 네가 했고.”
“일단 손부터 놓고 말하자.”
“내 얼굴 보고 쫓아다니는 건가?”
“뭐?”
지 입으로 지금… 뭐? 내가 입을 떡 벌리자 백루찬이 싱긋 웃었다.
“그런 애들이 꽤 있거든. 나한테 반해서, 쫓아다니는 놈들. 한 번만 자 달라고 들러붙어선….”
“…아니라니까.”
“꼭 다들 너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
애써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 묻어두었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백루찬을 노려봤다. 키스고 뭐고, 다 지가 먼저 나한테 했으면서. 솔직히 억울했다. 내가 뭘 했다고, 내 눈빛이 어땠는데….
백루찬은 시선을 마주치다가 얼굴을 훑어 내리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자세히도 보인다. 어쩐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키스해 주면 떨어질래?”
“…미쳤냐.”
“네 얼굴 정도면 나도 나쁘지 않아.”
“징그럽게 말하지 마라….”
“뭐가 징그러워. 내가? 진짜로 그렇게 느껴?”
“…….”
“아니면서.”
야, 이… 말문이 턱 막혔다. 네, 네가 무슨 오천 원만 주면 키스해 주는 그놈이냐고! 어이가 없어 놈의 어깨를 퍽 밀쳤다. 백루찬이 내 얼굴을 보고 코웃음 치며 물러섰다. 귓불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 젠장…. 진짜 나는 저 녀석 얼굴에 너무 약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말했잖아. 불순한 의도 아니라고.”
“S급 각성자면 모를 리가 없는데 너 같은 얼굴 본 적 없어. 사기를 치려거든 적어도 제대로 꾸며 내고 쳐야 하지 않겠어?”
“그건….”
“원하는 게 그쪽도 아니야. 그럼… 너 진짜 나 말고 내 가족을 노리고 온 건가?”
백루찬의 눈이 사나워졌다. 그의 발밑에서 황금빛 전류가 튀고, 안광에 금빛이 일렁였다. 야, 야… 왜 갑자기 능력을 사용하고 그러니.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라고 몇 번 말해! 나는….”
아씨 뭐라고 말해야지.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 S급인 네가 길드 만든다고 해서 같이 활동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뭐?”
내 말에 금방이라도 전격을 터트릴 것 같던 백루찬이 멈췄다. 그리고는 미간을 좁히며 허-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내가 길드 만들 거란 걸 어떻게 알았지?”
“찌라시가 그렇게 도는데 모를 리가 있냐! 지금까지 길드 캐스팅 다 거부하고, 세력 넓히려고 활동하고 있었잖아!”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녀석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에 백루찬은 이내 못마땅한 표정으로 콧등을 구기다가 손을 털었다.
“어쩐지… 최근에 각성자 놈들이…. 그래서였나.”
백루찬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채 납득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믿어 주는 거냐! 다행히 지금 길드 만들려고 애쓰고 있던 상황과 내 말이 맞아떨어졌나 보다. 하마터면 놈하고 심상 세계에서 싸울 뻔했다. 백루찬은 나를 관찰하듯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 말을 다 믿는 거 아니야. S급이라고 했지. 내가 본 적이 없으니 등록 안 된 각성자일 테고, 네가 진짜 원하는 게 그거라면… 나한테 증명해야 할 거야.”
“하, 할게. 뭐든. 난 진짜니까.”
빤히 쳐다보는 눈에 불신이 가득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내 투명성을 증명하기 위해 최대한 웃었다. 믿어라… 믿어, 좀. 증명이든 뭐든 같이 있으면 알 테니까.
“너, 지금부터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백루찬은 살벌하게 턱을 들고 나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떨어질 생각 없었는데?
“김 여사에게 네 얼굴을 보였으니, 김 여사는 네가 접근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테지. 네가 들러붙은 이유가 내 가족을 이용하려는 거라면, 혹시나… 그런 틈을 보인다면.”
목을 손날로 죽 긋는 시늉을 하는 놈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무서운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