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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48)화 (147/201)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심상 세계에서조차 바뀌지 않는 걸까.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이 과거에 희생당했던 사람들을 구했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김세영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걸까. 

고작 꿈인데.

꿈같은, 그저 잠시라도 위안을 얻고 싶은 내면의 세계인데도.

백루찬이 안타까웠다.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노력을 하고 애를 써 봐도 저것이 열린 이상 결말은 정해진 것이다.

죽음. 회귀.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몸을 돌려 3관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안에서 사방을 울리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마력의 기운. 보스 몬스터다.

중앙 현관을 지나 콘서트홀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온몸에 금빛을 두른 백루찬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녹아내리는 얼굴을 한 괴수가 비명을 지른다. 백루찬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하늘의 심판 발동]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터져 나오는 금빛 섬광이 홀을 가득 채우며 보스 몬스터를 감싸기 시작했다. 섬광은 사슬처럼 몬스터를 칭칭 감싸 안았다.

[제우스의 창]

백루찬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에 거대한 금빛 창이 떠올랐다. 백루찬이 이렇게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녀석은 S+급이라는 등급에 어울리게 무척이나 강했다.

전류가 휘감긴 거대한 창이 포효하는 네스트로프 보스를 꿰뚫었다. 전류가 홀 앞 단상을 메울 정도로 커다란 보스 몬스터를 지지며 놈을 태우기 시작했다.

괴물의 고통 어린 비명에 고막이 나갈 거 같았다. 그 사이에서 백루찬은 멀쩡히 서서 전능한 모습으로 보스 몬스터를 척살했다.

심각한 와중에 나는 감탄을 하고 말았다. 내가 S++급인데… 저놈보다 강한 게 맞을까. 백루찬이 제대로 스킬을 사용하는 모습은 그만큼 뇌리에 콱 박혀 버렸다.

이렇게 강한 놈이 진마하 그 새끼 때문에…. 또다시 가라앉는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 차려, 차해준.

섬광의 빛이 잦아들고, 보스 몬스터가 척살된 게이트는 마력 파장이 점점 약해지면서 닫히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홍희가 멀쩡한 객석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리는 바람이 없는데도 비산하던 머리카락이 가라앉고, 백루찬은 눈을 깜박이다가, 과한 힘의 사용에 비틀거렸다. 재빨리 다가가 부축해 주자, 백루찬이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금빛 서기가 어린 눈이 나를 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뱉는다.

“괜찮아?”

“괜찮아 보여?”

…충분히 괜찮아 보인다. 입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나는 녀석을 부축해 부서진 잔해들로 엉망인 홀에서 그나마 멀쩡한 구석으로 이동해 놈을 앉혔다. 녀석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과도한 힘의 사용. 이래서 네가… 악마의 눈동자 때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걸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나탈리스를 처치하는 나를 보고, 그 게이트를 닫아 버리는 나를 보고 네가….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녀석이 제대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가진 뒤, 백루찬이 먼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밖에서 마력 파장이 느껴져. 게이트가 또 터진 건가? 이건….”

뒤늦게 악마의 눈동자 게이트를 느낀 듯 흠칫한 녀석이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어깨를 누르며 앉혔다.

“잠깐이라도 쉬어.”

“쉴 상황 아니야.”

“알아. 좀… 상황이 심각한데.”

나는 웃었다.

“별수 있냐. 일단 숨부터 골라.”

“찾아야 돼. 더 지체할 시간이-”

백루찬은 김세영을 찾지 못해 초조하게 굴었다. 내 팔을 쳐 내고 일어서려는 것을 다시 꾹 눌러 붙잡았다. 그러곤 녀석의 양 뺨을 가볍게 철썩- 붙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급한 상황 맞아. 그럴수록 더 진정하고 침착하게-”

“네 상황이라면 침착할 수 있을 것 같아?”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백루찬을 보며 나는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럴 수 없다. 나 같아도 먼저 몸을 날렸을 테니까. 다만 나는… 두려웠다. 네가 현실처럼 그 상황을 마주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끝내 나를 원망할까 봐.

난 좀 무서웠다.

“불안해한다고 당장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황도 파악해야 하고. 조금만 있다가….”

“…차해준.”

“조금만 있다가 가자. 너 지금 무리했고, 홍희도 무리했고.”

“야.”

“이런 상태로 가 봤자 쓰러지면 더 손해야. 그러니까 조금만 있다가 가자.”

숨을 헐떡이던 백루찬은 빤히 시선을 마주하더니 내 이마를 손끝으로 밀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깜박이며 녀석을 쳐다봤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또, 또 그런 얼굴.”

“…내가 어떤 얼굴인데.”

백루찬이 삐딱하게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멍청한 얼굴.”

“이게 생각을 해 줘도.”

“생각을 해 준 거냐? 사심 채우는 건 아니고?”

“급한 상황에 무슨 사심이야! 넌 내 진심을 뭐로 보고 그렇게 말해?”

“아, 진짜 못 숨기네. 사방팔방에 아예 광고를 하지 그래? 내가 백루찬을 좋아한다.”

“돌았냐?”

“둘이 뭐하냐.”

다 큰 남자애들이 서로 얼굴을 붙잡고 다투고 있자 홍희가 기가 차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여간 이것들이 정신머리가 썩어 가지고. 세상이 망해 가는데 연애질 할 틈은 있다 이거냐고.”

“너도 말 좀 그렇게 하지 마라. 어?”

“뭐래. 이 씨, 얼빠 새끼한테 충고 안 받아.”

“아, 아니라고!”

“아니긴. 대놓고 아주 그냥, 아주 잘한다~ 그냥.”

“아오, 저게…. 넌 다치진 않았냐?”

“말 돌리는 것 보소. 이제야 내가 보이셨어요? 어후 재수 없어.”

홍희가 대박 짜증 난다는 얼굴로 귓가를 후볐다. 아 진짜, 이 두 녀석이 붙어 있으면 도무지 말싸움으로 이길 수가 없다.

홍희도 악마의 눈동자 게이트가 열린 것을 느꼈을 텐데, 일부러 더 태평한 모습을 유지하려 하는 게 보였다. 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표정만 보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감정표현도 과장되었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나는 내 말에 따라서 얌전히 쉬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백루찬 옆으로 이동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 녀석들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은 존재로 남을 각오가.

아니지. 나는 찰싹 내 뺨을 쳤다. 벌써부터 포기하지 마라, 차해준. 과거를 바꾸지 못해도 심상 세계에서는 김세영을 구할 수도 있다. 이곳에선 차해준이 두 명이잖아. 어? 신경 쓸 수 있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인드 컨트롤에 힘썼다. 백루찬이 심각하게 눈에 힘을 주는 나를 보고 어이가 없는 얼굴로 피식거렸다.

“바보 같아. 왜 이래? 아까는…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협박까지 해서 일을 해결하더니.”

“신경 끄고 쉬어라.”

“신경 쓰이지 않게 만들어 주든가. 자꾸 거슬리게.”

“뭐, 뭔 소리야.”

“왜 당황을 해?”

“네가 말을 이상하게 하잖아!”

“이상하게 듣는 네 귀가 문제 아닌가?”

“아오, 둘 다 입 닥쳐. 소름 돋으니까.”

홍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백루찬은 떫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나는 홍희 눈치를 보며 무릎을 감싸 안았다. 이놈들 이제 내가 아주 호구로 보이나 본데… 호구 맞긴 해서 할 말이 없네. 그래도 믿어 주는 건 확실하게 느껴진다. 신뢰가 쌓인 느낌이다.

우리는 잠깐 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홍희가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야, 예비 길드원.”

“왜.”

“존댓말 써라. 부길마한테. 쓰읍-”

미래에서도 안 쓴다, 이놈아…. 홍희는 소환을 해제했던 건틀렛을 다시 끼고 있었다. 나갈 준비였다.

“밖에 있는 게 뭔지, 넌 알지?”

“…모르는데.”

“모르는 척하지 마, 새꺄. 너 이미 들켰어. 행동도 빠릿빠릿하니 나름 마음에 드니까 넘어가는 거야. 알간?”

홍희가 거칠게 어깨동무를 하며 내 가슴팍을 팍팍 때렸다. 키 작은 녀석에게 맞춰 주려 한껏 수그린 자세로 얻어맞으니 더 아팠다. 건틀렛 끼고 때리면 어떡하냐, 이 자식아….

“X발, X되도 일단 가 보자고!”

홍희가 당차게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우리는 명동으로 가 보기로 했다. 상지대로 보냈던 팀원들에게서 그곳에서 김세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연락을 받은 뒤였다.

“일단 놔라….”

“갑오작오!”

“하아….”

일단 김세영을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백루찬도 홍희도, 큰 게이트를 처리하고 얻을 명예, 권력, 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애초에 실력과 몸을 숨기고 있던 상태였으니.

백루찬과 홍희가 무어라 대화를 나누며 앞서 걸었다. 3관에서 폭발음과 같은 소리가 들린 탓인지 호명대 교정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대피한 것 같았다.

나는 두렵긴 하지만 두 녀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마음을 가져 봤자 백루찬이 심상 세계임을 인지하고 깨어날 리 없었다. 가슴은 아프지만 목표는 달성해야 했다. 현실 또한 구해야 하니까.

나는 백루찬이 현실에서 살아가도록 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악마의 눈동자가 내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슬픔을 지워 줄 수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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