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홍희는 나와 백루찬 포함 애들을 끌고 마사지 숍, 피부 관리 숍을 돌며 미친 듯이 관리를 받게 했다.
거울을 보니 가뜩이나 창백했던 얼굴이 이제는 그냥 하얗게 보일 정도로 윤기가 나고 좋아졌다. 하… 쉬면서 이런 거 하는 거 좋긴 한데, 좀 불안했다. 진마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하고 일도 많은데 이래도 돼? 이런 생각을 가졌으나 홍희는 단호했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한 번뿐인 인생 즐기는 거야.”
“아직 즐길 땐 아니라고 보는데….”
“내 말 들어. 손해 보는 거 없다니까?”
킬킬 웃는 얼굴이 사악해 보였지만… 백루찬도 옆에서 잠자코 따라주니 할 말이 없었다. 길마, 부길마가 대체 뭐 하는 건데. 너희 너무 태평한 거 아니냐고. 적이 코앞에 있는데 참…. 불안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녀석은 능청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러 오며 턱을 기댔다.
“괜찮아요, 이것도 중요해.”
“…대체 뭐가? 피부에 광이 나는 게?”
“아주 중요하지. 그리고 형이 좀 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요. 지금까지 달려오기만 했잖아. 내려놓는 것도 필요해.”
“그래도 그렇지, 인마….”
“대한민국 최고 길드가 파고들고 있고, S급 전력이 대기하고 있고, 각본도 있는데 왜 이렇게 혼자 전전긍긍해요? 그러면서 뭘 혼자 안 한다고…. 그냥 맡겨 봐요.”
“…그건 할 말이 없네.”
“그쵸?”
백루찬이 씩 웃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나눠서 하자고 맡겨 놨으면 좀 믿어야 하는데 불안해하는 건 결국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매번 혼자서 해 왔으니 이런 방식이 적응도 안 되고 말이다. 그래, 같이 하자고 일을 나눴으면 믿어야지. 아직 각본에서 온 연락은 없던데, 역추적은 잘되고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호출기를 슬쩍 들여다보다가 백루찬에게 걸려서 그것도 빼앗겨 버렸다.
“형, 진짜 나 없으면 쉬지도 못하겠네. 어떡해. 맨날 붙어 있어야겠어.”
“…이미 너무 붙어 있다. 떨어져라.”
“이잉. 싫은데.”
“으으윽 미쳤냐!”
애교 부리는 놈의 얼굴을 밀치며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되레 능글맞게 웃으며 나를 꽉 껴안았다. 달라붙는 녀석이 싫지 않았지만… 넌 좀 주변 시선도 생각해 줄래? 질린 얼굴로 너를 보는 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냐고!
“하하… 역시 모르젠트 분들은… 사이가 참 좋으셔….”
피부 관리 숍 직원분이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스패출러를 손에 모아 들고 부러트릴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다. 눈빛이 반짝이는 게… 어쩐지 약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거봐. 이상하게 보고 있잖아!
나는 힘겹게 백루찬을 떼어 내고, 관리실을 나왔다. 다른 방에서 관리를 받던 새벽이와 한솔이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와 한솔이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가뜩이나 반짝거리는 애들인데 이제 아주 후광이 보일 정도였다. 정돈된 헤어. 깔끔하게 정리된 눈썹 라인과 윤기 도는 피부. 하… 누구 애들이길래 이렇게 예뻐.
“다 끝나셨어요?”
“어우… 쳐다보지 마 봐. 빛이 나서 눈부셔.”
“아, 형. 진짜. 형이 가장-.”
“응?”
“아니에요.”
새벽이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을 돌렸다. 아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나는 새벽이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새벽이가 피해 버렸다. 짜식…. 나는 새벽이와 한솔이의 탱글탱글한 피부를 보며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아우 뽀동한 내 새끼들.
밖으로 나오자 홍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모르젠트 회사 차에 기대서 있었다. 마치 부잣집 재벌 3세 아가씨 같은 옷차림이었다.
“…너 뭐 하냐?”
“오우, 역시 여기 숍은 한번 받으면 딱 티가 난다니까!”
내가 다가가자 선글라스를 휙 벗고서 우아하게 웃었다. 이상한 콧소리와 함께 웃음소리를 흘리자 나는 양팔을 벌려 껴안으려는 홍희를 지나쳤다. 와씨 진짜 쪽팔려.
“야잇, 이 몸을 거부하다니!”
“애들아, 차 타자. 우리끼리 빨리 가자.”
“나도 탈 거야! 차 기사! 운전해!”
“응, 기사님 따로 계시고. 얘들아 빨리 타.”
“아 진짜!”
그렇게 홍희를 된통 놀려 주고 우리는 길드로 귀가했다. 하루 종일 마사지에 얼굴 관리만 받다가 집으로 오다니, 이렇게 여유 있었던 적이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 쉬세요!”
“형아 내일 봐! 길마 형, 우리 형 괴롭히지 마!”
“내가 오히려 괴롭힘당해, 한솔아.”
“으응. 얘들아. 푹 쉬어.”
한솔이가 버럭 외치는 말에 백루찬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놈이 또 헛소리할까 봐 뒷덜미를 끌며 펜트하우스에 올라왔다.
“어디 가지 말고 쉬어요. 집에서.”
“너도 쉬는 거야? 아직 일 남아 있나?”
“조금 남아 있긴 한데… 같이 있고 싶어요?”
“같이 있으면 좋지. 혼자는 외롭잖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은 거죠?”
“넌 뭘 당연한 소릴….”
현관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가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나 방금 굉장히 부끄러운… 발언을 한 거 같은데.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백루찬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점점 바짝 붙어 오길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그러자 백루찬이 벽에 탁 손을 올린 채 내 앞을 막았다.
“다른 사람 말고, 나랑 있는 게 좋은 거죠?”
놈에게 막혀 오도 가도 못 한 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으, 건수 잡기만을 기다리는 애한테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저렇게 말하니까 괜히 더 부끄러웠다. 백루찬이 허리를 숙이며 더 가까이 밀착해 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숨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가, 녀석이 얼굴을 더욱 바짝 들이대자 고개를 훅 숙여 녀석이 가로막은 팔 밑으로 몸을 내뺐다. 가까이 붙으려던 백루찬이 비틀거리며 나를 불렀다.
“아, 형.”
“거기서 뭐 해? 빨리 신발 벗고 와.”
“쳇….”
나는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게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생수를 꺼내 쉬지 않고 반절을 마셨다. 백루찬이 저런 식으로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미친 듯이 반응하게 된다. 숨이 가빠지고, 열나는 것처럼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런 이상 현상을 뭐라고 부르는지 나는 정말 잘 알고 있었다.
“부끄러워하기는….”
백루찬이 중얼거리며 소파에 털썩 앉더니 패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일이 남아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네. 나는 어쩐지 좀 뻘쭘한 느낌으로 남은 물을 마시고,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고운 얼굴에 풍성한 속눈썹, 깊이감을 더하는 아이홀과 신비한 느낌을 풍기는 눈동자. 정말 잘 조각된 세공품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이 녀석이 눈을 감고 있던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나는 패드를 보며 일에 매진하는 백루찬을 보다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갔다.
“형, 나 일하잖아.”
“일해.”
“…….”
나는 녀석이 패드를 보는 손을 들어 올려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백루찬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고양이야? 형은 강아지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다가가면 도망가고 떨어지면 다가오네.”
“…잠 좀 잘 테니까 일이나 해.”
“침대 멀쩡히 두고 무릎에서 왜 자요.”
“너… 바보냐?”
“바보겠어? 이러면 도망 못 가. 알죠?”
백루찬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잿빛 눈이 휘어지며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어쩐지 전보다 훨씬 평온해 보이는 웃음을 보는 건 기분이 좋았다. 나는 녀석을 따라 마주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 눈이 절로 감긴다. 스르륵 잠들 것 같아 눈을 감자, 갑자기 입술에 촉촉한 것이 쪽- 닿았다가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서 백루찬이 입맛을 다시며 웃고 있었다.
“더 해도 돼?”
“…넌 그런 걸….”
나는 웅얼대며 뒷말을 삼켰다. 그것을 용케 알아들었는지 백루찬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 녀석아… 그런 걸 물어보고 하냐….
백루찬이 느리게 허리를 더 숙였고, 나는 눈을 감았다. 평온한 오후였다.
❖ ❖ ❖
- 삐비빅 삐비빅.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잠결에 취해 흐릿한 시야로 눈을 껌벅이다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호출기, 호출기 어딨어!
긴급 호출인 줄 알고 허둥지둥 호출기를 확인했지만 호출기는 조용했다.
“아씨, 알람이었어….”
하, 소리가 비슷해서 게이트 터진 줄 알았네. 까치집 된 머리를 손으로 넘기면서 하품을 쩍 했다. 지금 몇 시더라. 손을 더듬더듬 뻗어 알람 시계의 알람을 끄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백루찬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집 안이 고요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며칠 사이 익숙해진 루틴처럼 자연스럽게 커피 머신 앞으로 갔다.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려 뜨거운 물을 부어서 두 잔을 만들었다. 하나는 내가 마시고 하나는 백루찬 거.
챙겨 놓고 밤새 온 연락을 확인하며 소파에 앉아 여유를 즐길 예정이었다. 이런 아침이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앉아서 TV를 켜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아침 9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누구지?
나는 혹시 예민한 백루찬이 초인종 소리에 깰까 봐 서둘러 문 앞으로 나가 방문자를 확인했다. 홍희가 다급한 얼굴로 서 있었다.
- 빨리 문 열어! 큰일이라고!
뭐? 큰일? 무슨 일 터진 건가? 설마 진마하가 나타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재빠르게 문을 열어 주고, 기다리다 못해 내가 현관으로 가 열리는 문을 활짝 밀어서 열어 주었다. 홍희가 들어오자마자 외쳤다.
“빨리, 준비해! 지금 당장 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