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재촉했다. 나는 당황해서 겉옷을 하나 대충 집어 들고 나왔다. 정말 게이트인 건가? 진마하의 위치가 발견된 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홍희의 표정이 초조해 보인 탓에 슬쩍 입을 열었다.
“홍희, 괜찮아. 뭐 별거냐. 매번 있던 일인데. 잘 해결하면 돼.”
아무리 위험하다지만, 게이트는 이제 일상이 된 시대이다. 그리고 나는 랭킹 1위 각성자인 한야라고. 누구보다 강하다. 설마 모르젠트 정도도 못 지킬까. 안심하라는 듯 웃자 홍희가 나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정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차가 보였다.
“장소 어디야? 먼저 가 있을게.”
“아냐. 같이 가는 게 더 빨라.”
“아, 그래?”
운전기사가 있어 따로 운전할 필요는 없었던 데다 이동하면서 홍희가 바쁘게 연락을 하고 있어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도착한 곳은 깔끔한 외관의 한 건물이었다. 저 안에 게이트가 열린 건가. 근데 겉은 너무 멀쩡한데?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근데 각본은?”
“각본이 왜?”
“게이트 터진 거 아냐?”
“음….”
홍희가 숙연한 얼굴로 입가를 실룩이더니 내 등을 떠밀며 건물 안으로 향했다.
“일단 빨리…!”
“아, 알았어. 안에 터진 거야? 근데 여기 주변 통제해야 하지 않아? 길드원들은?”
“길드원… 불러 놨어. 일단 위치는 3층이야.”
다급하게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려 했더니 홍희가 내 옷을 잡아당기며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3층 가는데 웬 엘리베이터?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말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벽면에 달린 거울이 있어서 힐끔 보니 머리가 여전히 까치집이 되어 있어 엉망이었다. 나는 대충 정리했다. 어차피 게이트 처리하느라 땀 흘릴 테니.
곧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나는 미리 한야를 뽑고 가려고 손에 쥐어 들었다. 옆에서 홍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얘, 어디 아픈가. 걱정스럽게 보는 순간.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3층은 한 층 전체가 확 트인 공간이었다. 나는 튀어 나가려다 움찔하며 멈춰 서고 말았다.
생각했던… 마력 파장 같은 건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한쪽엔 기다란 옷걸이에 옷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제일 앞엔 천장부터 내려오는 흰 천이 있었고, 그 앞에 커다란 카메라가 여러 대 세워져 있었다.
“여기! 소품 개수 확실해?”
“넵! 오늘 쓸 거 다 가지고 온 거예요.”
“조명 스태프! 이것도 세팅해 놔!”
사람들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게 지금… 무슨 광경이지. 당황한 나머지 멈칫하자 누군가 한야를 든 나를 발견하고 꺅 소리 질렀다.
화들짝 놀라서 움찔했다가, 일반 사람들에게 한야가 흉흉해 보일 거란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다급히 검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큰 안경을 쓴 남자가 날아오듯 내 앞으로 달려와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아챘다.
“이게 바로 한야…! 최고의 피사체가 오셨다!”
“대박, 진짜였어!”
나는 당황했다. 그는 공손하게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눈을 번쩍 빛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에 언뜻 광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사진작가 칼스입니다. 어떻게, 컨디션은 괜찮으신지요? 그 검 집어넣으시려구요? 아뇨,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오늘 같이 한 컷에 나오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당장 한야 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칼스라는 남자는 내 손을 콱 붙잡고 나를 이끌었다. 당황해서 그를 따라가다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홍희를 쳐다봤다. 홍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깨를 덜덜 떨었다. 뭐야 지금 상황? 지금 화났나?
“야, 홍희야. 지금 이게… 뭐야?”
“으흑, 흑… 풉, 으하하핫!”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홍희가 어깨를 떨며 광소를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식 지금…!
“게이트는 무슨 게이트, 오늘 잡지 인터뷰와 화보 촬영하러 온 거라고!”
“…야, 홍희.”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이제 쫙쫙 뽑아 먹을 일만 남았다!”
홍희가 양손을 번쩍 들고 신난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녀석에게 한야를 집어 던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앞의 사람들이 나와 홍희를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칼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홍희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게이트 없어. 옴므라운드라고 인터뷰 요청이 왔는데 화보 촬영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가장 전성기에 이 얼굴을, 이 몸매를 숨기고 있다는 건 죄악이다!”
“뭔 소리야! 내가 왜…!”
나는 주의의 시선을 의식해서 목소리를 한껏 줄였다.
“무슨 내가 뭔, 뭐? 화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아직 예전 병원비부터 정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였더라….”
“해 보겠습니다. 뭐든 제가 해 보겠습니다.”
나는 음흉한 얼굴로 협박하는 녀석에게 지고 말았다. 힘 빠진 얼굴로 몸을 돌리자, 사람들 시선이 더욱 적나라하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다 방금 튀어나온 몰골… 영 그렇죠? 하하. 하하…… 홍희 이 자식….
“얘기 다 끝나셨으면 한야 님을 모셔도 될까요? 최고로 대접하겠습니다. 자 어서…!”
칼스가 나를 안내했다. 나는 쪽팔림에 고개를 푹 수그리며 그를 따라갔다.
❖ ❖ ❖
3층 구석에 있는 쪽방에서,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메이크업 도구들이 앞에 가득했고, 탈의실 앞엔 옷, 신발, 액세서리가 가득 놓여 있다.
“어머, 피부 좋으신 것 봐! 따로 뭐 바르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올린다. 아니 바르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나는 이 상황이 어색해 그냥 웃었다.
화장을 끝마치고는 탈의실에서 쥐여 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헤어 세팅까지 마친 뒤에야 스태프들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정신이 너무 없다. 갑자기 화보고 인터뷰고….
유명 랭커들이나 각성자들이 자주 화보를 찍고 인터뷰하는 것을 몇 번 보기는 했다만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백루찬도 광고를 몇 개나 찍었으니까…. 그게 다 설마 홍희의 농간이었던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의심을 하며 스태프가 내어 준 구두를 신고 방을 나섰다.
“형!”
언제 온 건지 새벽이와 한솔이가 와 있었다. 환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던 새벽이는 갑자기 흠칫 놀라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야,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어디 아픈가?
“왜 그래? 얼굴에 발갛네. 혹시 열나니? 아파?”
걱정돼서 성큼 다가가 이마를 짚자, 새벽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새벽이 옆에 붙어 있던 한솔이도 빡세게 세팅한 내 모습이 어색한지 새벽이 옆에 붙어서 시선을 피했다.
“형아 똑바로 봐야지, 정한솔.”
이름을 부르며 팔을 잡아당기자, 한솔이도 발개진 얼굴로 나를 훔쳐보듯 힐끗 보더니 이내 내 품에 안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안아 주려고 했더니 스태프 한 명이 다급하게 나를 말렸다.
“의상 구겨지면 안 됩니다!”
“아, 넵. 한솔아, 미안. 구겨지면 안 된대.”
“…괜찮아, 형.”
“형 어때. 어색하지.”
“아니! 완전, 완전 멋있어! 진짜야!”
내 말에 한솔이가 버럭 소리치며 극구 부인했다. 그러고선 당황해서 다시 새벽이 뒤로 쏙 숨어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크게 웃으며 숨는 한솔이를 잡아당겨 머리를 한껏 쓰다듬었다.
새벽이가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진짜….”
“응? 뭐라고?”
“아니, 아니에요. 촤, 촬영 지켜볼게요! 파이팅!”
“그래. 애들은 저쪽으로 가고.”
수줍게 파이팅을 외치는 사이, 언제 온 건지 백루찬까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새벽이가 그를 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한솔이가 새벽이를 재촉하며 끌고 갔다. 나는 멀리 구석에 자리 잡는 아이들을 보다가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아… 어색하네. 멋쩍어 머리를 긁으려다 헤어도 아까 한 올 한 올 세팅해 줬던 것이 떠올라 손을 내렸다.
“와… 형 진짜.”
“어, 왜. 이거 홍희 그 녀석이 협박해서….”
“와 진짜….”
녀석은 성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춤에 팔을 감고 나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귓가에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당장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눕히고 싶다.”
“…넌 머릿속에 든 게 그딴 것밖에 없냐?”
백루찬이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나 지금 너무 진심인데. 형도 형의 이런 모습을 보면 나같이 생각할 거라고요. 키스하면 안 되지? 입술… 지워지니까.”
“되겠냐고.”
점점 고개를 가까이 숙이는 녀석의 팔을 풀어 어깨를 밀쳤다. 백루찬이 킥킥대며 밀려났다. 하 저게, 사람들 많은 데서도 저러니까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한, 아니 차해준 씨!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칼스가 누가 들어도 신나 죽겠다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루찬의 손을 잡고선 슬쩍 속삭였다.
“야, 어떡해. 나 처음이라 좀 떨리는데?”
“형도 떨릴 때가 있어? 나 볼 때 말고도?”
“너 볼 땐 안 떨려 이 자식아.”
“안 떨리게 해 줄까요?”
“…아니. 됐다. 하지 마.”
“왜. 안 떨리게 해 줄게.”
백루찬이 또 슬그머니 내 허리춤에 팔을 감아 몸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흡…!”
가슴께가 깊게 파인 니트를 입고 있어서 드러난 목덜미에 쪽, 뽀뽀를 해 왔다. 미친 소름 돋았어! 나는 당황해서 녀석을 밀쳤다. 주변에서 헉 하는 탄성이 들렸다. 이게 다 보고 있는데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 미쳤냐!”
“이제 풀렸지? 다 알아~ 파이팅, 우리 형.”
백루찬이 새침하게 웃으며 내가 휘두르는 팔을 피해 멀어졌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가 없어 손으로 부채질하며 녀석을 노려봤다. 으, 당황스러워.
그런데 확실히, 저놈이 저러니까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려 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나를 보며 어머어머- 감탄하고 있는 칼스에게로 움직였다. 닥친 일이니, 일단 열심히라도 하자. 그런 다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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