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79)화 (176/201)

진마하

번개와 천둥이 쳤다. 맥없이 추락하던 나는 어느 순간 다가온 누군가의 품에 안겨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빗물 사이로 흐릿해진 시야에 하얀 백금발이 보였다. 백루찬이 나를 껴안고 있었다.

이게 눈물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자꾸 눈이 따가웠다. 나는 백루찬의 목을 끌어안았다. 백루찬이 크게 숨을 내쉬며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죽으려고 작정했어? 왜 아무것도 안 해?”

말하는 입은 싸늘했지만, 녀석은 더없이 떨리는 손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가만히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자식이, 그 새끼가….”

백루찬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어깨에 입술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비가 내리고 번개가 치는 어두운 밤, 하늘에 둥글고 푸른 마력 파장이 요요히 빛을 뿜어냈다. 그것은 도시를 삼킬 것만치 컸다.

- 삐빅- 삐빅-

호출기에서 요란한 게이트 경보음이 울렸다.

나는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진마하가 열어 놓고 사라진 게이트였다. 끝까지 자신을 기만하는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진마하가 열어 놓은 것.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멍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지금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저기로 사라진 진마하는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할 일은 세계의 기둥, 메인 캐릭터를 모두 구하는 것이었다. 구하지 않으면 세계가 멸망한다. 하지만 이미 오류로 명명된 진마하를 없애지 않아도 세계가 멸망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나에게 이런 일을 맡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괜스레 막중하게 얹히는 부담감에 속이 매스꺼워졌다.

나는 진마하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때 백루찬이 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마주친 회색 눈동자가 옅은 빛을 품고 빛이 났다. 녀석은 한쪽 뺨을 씰룩이며 내게 말했다.

“형이 또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안 돼.”

“…루찬아.”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돼. 어떻게 찾았는데, 내가 어떻게…. 절대 안 보내. 게이트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백루찬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걸음을 옮겼다. 모르젠트 빌딩이 있는 방향이었다.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하고 재난 문자가 퍼지면서 게이트가 열린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익숙하게 대피를 하며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열린 게이트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나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며 백루찬을 따라갔다. 아수라장이 된 거리. 도로 또한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차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 어떻게든 막힌 도로를 벗어나기 위해 클랙슨을 울리는 사람들. 온갖 군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한 사람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인파를 헤치고 다가온 이는 송류진이었다.

그는 땀범벅이 된 이마를 훔치며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안도의 한숨 같았다.

“해준 씨!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대체 게이트가 또 왜-”

송류진의 호출기는 정신없이 울리고 있었다. 각본에서 오는 호출이겠지. 송류진은 나를 보고 입술을 꾹 다물면서 호출기에서 오는 연락을 받았다.

“네, 송류진입니다. 네, 네… 지금 함께 있습니다.”

백루찬이 송류진을 응시했다. 그도 백루찬과 나를 번갈아 보며 통화를 마쳤다.

“…게이트가, S급 이상으로 측정됩니다.”

나는 멍하니 송류진을 쳐다봤다. 백루찬이 짜증 내며 나를 끌고 그 옆을 지나치려 했으나, 송류진이 내 팔을 붙잡아 당겨서 멈춰 섰다.

백루찬은 그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매번 길드에 기댈 생각만 하시네. 각본이 알아서 해 봐요.”

“모르젠트 길드장, 아시지 않습니까. 저번 가약동에서 열린 게이트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때도 우린 같이 움직였어요. 어려운 부탁인 거 압니다만-.”

“이번엔 안 돼.”

“왜죠?”

“내가 싫으니까. 지원은 보내 주죠. 차해준은 안 됩니다.”

백루찬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잡아끌었다. 재촉하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멈춰 선 채 백루찬을 쳐다봤다. 백루찬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형!”

“루찬아, 그러지 마.”

“대체 뭐가! 자꾸 이럴 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게이트. 진마하가 연 게이트는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나만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백루찬이면 몰라도.

그리고 백루찬과 송류진. 모두 힘을 합치면 더 빨리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저 안에 어떤 것이 열려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힘없이 웃었다.

이제 결심이 섰다. 진마하를 구하기로.

세계가 나에게 왜 이딴 거지 같은 일을 맡겼는지 나는 모르겠다. 구해도 멸망이고 구하지 않아도 멸망이라면, 나는 일단 구해야겠다.

나는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송류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하하 웃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어차피 나서려 했어요.”

“…몸도 좋지 않은데, 일단은 피해 계시고, 만약 부족할 경우 도움을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부엔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명 사고 난 후에 그 말 할래요?”

“…해준 씨.”

“류진 씨도 나설 거잖아요. 루찬아 너도 그냥 보고만 있을 거 아니잖아. 근데 왜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해.”

“그런 말이 아니잖아.”

“게이트가 열린 원인을 알아요. 그 앞에 있었거든.”

송류진이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백루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에서 보인다. 내가 누굴 만나러 나간 건지 백루찬은 이미 눈치챘다.

사람들이 길목에 멈춰 선 우리를 지나쳐 갔다. 나는 그들 사이로 게이트가 열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메인 캐릭터들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새벽이와 진마하까지.

나는 담담하게 그들을 보며 말했다.

“허황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세계가 우리를 선택했거든.”

“형.”

“내가 두 사람을 지켰듯이 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꼭 형이 나서야만 해?”

“내가 아니면 안 돼서.”

“그럼 나는?”

백루찬이 내 팔을 붙잡았다. 매달리듯 잡고 나를 쳐다봤다. 울분인 듯 괴로움인 듯 일그러진 얼굴이 고통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약속했잖아.”

나는 루찬이의 손을 꼭 잡았다. 손깍지를 끼자 백루찬이 움찔했다. 짜식아, 설마 이 형이 너와 한 약속을 어기겠냐. 고작 게이트 따위로 저버릴 수 없는 약속이었잖아.

“믿어라, 좀.”

짓궂게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백루찬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송류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도 손을 뻗었다. 내 손이 그의 뺨을 장난스럽게 토닥였다.

“울지 말고요, 송류진 씨. 누가 죽는대?”

“…제가, 너무 부족해서… 자꾸 당신을 무리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게이트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일단….”

“그럼 나도 같이 가.”

내가 무어라 부탁을 하려고 할 때 백루찬이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혼자는 못 가, 형.”

“야, 백루찬.”

“죽어도 나랑 죽어야지.”

“이 미친….”

소리를 하네, 이 자식이. 게이트를 머리 위에 띄워 놓고, 백루찬은 헛소리를 했다. 죽긴 누가 죽어, 네가 왜 죽어, 이 자식아!

❖ ❖ ❖

[속보입니다. 여의도 상공에 측정 불가 제로급 게이트가 나타나…….]

[재난 알림. 게이트로부터 반경 10km 이상 멀어지길 권고합니다. 다시 알립니다. 게이트로부터 반경 10km 이상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가약동 게이트와 동일한 제로급 게이트로, 현재 국내에 있는 S급 각성자들이 모두 출동하여 웨이브를 대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게이트 진입은 어느 헌터가 맡을 것인지 말이 오가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터진 제로급 게이트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허공에 뜬 형상을 목도하며 이번에도 가약동 사건과 같은 운이 따를 것인지를 떠들고 있었다.

[모르젠트에서 입장 표명이 나왔습니다. 게이트가 터진 지 20분이 지난 시점. 마력 파장은 점점 거세지고 있고 모르젠트 측에선 S급 헌터 모두 출동. A급 헌터 41명, B급 헌터 101명, 현장 긴급 구호 처리팀 총 열 팀을 움직이겠다고-]

[길드 다해가 여의도로 출동했습니다! 라온 길드 및 대형 길드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는 가운데-]

[속보입니다! 게이트 최초 진입자가 정해졌습니다. 각본에서 회의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진입자는-]

TV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듣던 홍희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미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정장과 건틀렛을 낀 그녀가 길드장실 밖으로 움직이자 뒤로 모르젠트 임원진이 따라붙었다.

“우리 길드장님과 한야는 내가 분명 병동에 처박아 뒀던 거 같은데.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홍희가 성큼성큼 걸으며 묻는 말에 뒤에 서 있던 임원진이 대답했다.

“…현장에 계시다고, 연락받았습니다.”

“내가 분명 병동에 처박아 뒀었는데. 그치?”

“…그, 부길드장님.”

홍희가 품위를 유지하며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쾅쾅 뛰며 발을 굴러 소리쳤다.

“이 새끼들 내가 분명 꼼짝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부, 부길드장님, 진정을-”

“게이트에 누가 들어가? 누가 들어간다고?! 지들이 뭔데! 정의의 사도야, 뭐야!? 게이트를 다 지들이 처리해야 돼? 아니 위험한 건 맞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익!!”

익룡처럼 소리치는 홍희를 차마 말리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던 임원진이 묵묵한 얼굴로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홍희가 시뻘게진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둘 다 게이트만 처리돼 봐. 아주 뒤졌어!”

[속보. 게이트 최초 진입자. 모르젠트 백루찬, 차해준]

뉴스에서 헤드라인에 두 사람의 이름이 크게 걸렸다.

0